시정비(時政非)
이 책은 선조(宣祖) 17년(1584) 갑신(甲申) 정월부터 24년(1591) 신묘(辛卯) 7월까지 전후 8년간의 중요한 시정(時政)을 뽑아서 서술한 기록으로 《대동야승(大東野乘)》 제25권 중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題目)은 시정비(時政非)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서울대학교 소장 규장각 도서(奎章閣圖書) 내에 보존된 《대동야승(大東野乘)》 원본으로 간주되는 필사본 중에서는 표지에만 시정비(時政非)라고 씌어 있으나 내용에는 《시정록(時政錄)》으로 되어 있으니, 아마 표지가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시정비》라고 불리워진 것 같다. 그리고 저자에 대해서도 의정(議政) 정철(鄭澈) 가장(家藏)이라고만 적혀 있으므로 송강 정철의 집에 소장된 책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정철 집안의 누구인가가 참고로 초기하여 보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내용은 편년체(編年體)인 연월순으로 기록되었으나 거의 당쟁에 관련되는 기사만 추려서 초록하였고, 등장 인물로는 역시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을 필두로 정철ㆍ이발(李潑)ㆍ류성룡(柳成龍)과 기타 당쟁에 관계된 사람이 가장 많고, 후반은 정여립(鄭汝立)과 그 옥사에 관계되어 희생된 인사의 기록 등이다. 이 책 역시 당쟁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 중 하나로 인정된다.
■갑신년(서기 1584)
1월 16일.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이(李珥1536-1584)가 졸하다.
11일. 이조 참판(吏曹參判) 성혼(成渾 1535-1598)이 신병으로 사은숙배하고 사직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어진 재상을 잃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치 못하다. 이제 국정(國政)을 함께할 자가 경(卿)이 아니고 누가 있겠는가. 급히 물러갈 생각을 하지 말라.”하다. 재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다.
23일. 대사헌(大司憲) 정철(鄭澈1536-1593)이 사은숙배하고,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기를, “외로운 충성을 자처하나, 여러 사람이 알아주지 않되 홀로 바른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바로다. 사직하지 말라.”하다.
3월 4일. 전교하기를, “심희수(沈喜壽 1548-1622)를 내가 처음 보았을 때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고, 다만 그 말이 매우 간사스럽고 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대개 말이란 마음의 소리이므로 그 말로 인해서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이이가 죽은 뒤에 별로 전과 달리 대접한 일이 없었는데, 감히 말하기를, ‘대접하는 도리가 사생(死生)에 차이가 있으니, 이는 생각건대 반드시 임금으로부터 그 뜻이 있음이다. ’하니, 이는 은밀히 내 마음의 정도를 시험해 본 것이다. 또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이이를 썼다.’하였는데, 내가 배척한 것은 간신(奸臣)들이 남을 모함하는 간사한 말이었거늘 이것을 가지고 중론(衆論)을 배척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는, 서얼(庶孼)을 허통(許通)한 일은 비록 매우 구차스러우나 그 조종(祖宗)의 토지가 없어지는 것이 조석에 달린 것을 애석히 여겨 이런 부득이한 일을 한 것인데, 이이가 어찌 미리 그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을 알고서 그 서자(庶子)의 처지를 위했겠는가. 그런데 지금 말하기를, ‘사람들이 반드시 그 자식 때문에 이 납속(納粟)의 법을 만들었다 할 것이다.’하니, 이것은 외인(外人)의 말이라고 청탁하면서 실상은 이이가 한 일을 배척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꿈에 귀양간 신하를 본 것을 시가에 드러내서 은밀히 써서 들였으니 모두 음흉한 술책이 아님이 없다. 매미가 지껄이는 소리 같은 것을 진실로 책망할 것은 못 되나, 임금의 사람 쓰는 도리로는 처음에 군자와 소인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대개 그 사람됨이 언어에 민첩해서 혹 우연히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정원(政院)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회계(回啓)하기를, “듣자온대, 심희수(沈喜壽)가 아뢴 일은 딴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일에 이이(李珥)가 국가의 일을 성심으로 다스리고 자기 집을 돌보지 않은 것을 공경하고 사모했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처자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항상 애석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전하께서 특별히 은혜를 보이시어 그 공로를 갚아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다만 그 말이 경솔해서 잘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지 조금도 그 사이에 딴 의사가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하다. 조강(朝講) 때 영상(領相) 박순(朴淳 1523-1589)이 아뢰기를, “이이(李珥)가 국사에 성심껏 하여 몸을 바치기로 기약했는데, 뜻밖에 죽어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을 걱정하는 마음을 다 시행하지 못했음은 진실로 불쌍한 일이오니 추숭(追崇)하는 은전(恩典)을 내리실 만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의논해서 하라.”하다. 이에 대신(大臣)들이 의논하여, “박순의 계사(啓辭)대로 시행하소서.”하다. 또 전교하기를, “이이는 내가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나니 아래에서 다시 아뢸 필요도 없다.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러 그 품계가 이미 지극했으니, 추증(追贈)할 마땅한 자리도 없다. 다만 그의 처자들이 파주(坡州)에 있다가 지금 또 해주(海州)로 간다니 가는 길을 호송하게 하고 장사지낼 때의 모든 일이나 호송하는 일을 그 도(道)에 말하도록 하라.”하다.
■을유년(서기 1585년)
5월 28일. 의주 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 1542-1587)이 소를 올려 박순(朴淳)ㆍ정철(鄭澈)ㆍ이산보(李山甫)ㆍ박점(朴漸) 등을 옹호하고, 또 정여립(鄭汝立)은 이이를 존경해 섬겼는데 지금 와선 앞장서서 그를 배반했다고 하면서 남의 말을 빌려다가 아울러 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 등의 과실을 말하고, 또 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ㆍ박근원(朴謹元) 등 세 사람의 귀양간 자들을 석방할 것을 청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괴이하고 황홀하기가 헤아릴 수 없도다. 내가 이른바 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이이와 성혼이므로 이 두 사람을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간사함이 되는 것이다. 다만 유성룡도 한 군자(君子)로, 내가 생각하기에 비록 오늘날의 대현(大賢)이라 한대도 옳을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 함께 대화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심복(心服)할 때가 많은 것이다. 어찌 학식(學識)과 기상(氣象)이 이와 같고서 큰 간사한 사람이 될 리가 있겠는가. 어떤 담(膽) 큰 놈이 감히 이런 말을 하느냐. 정여립(鄭汝立)의 사람됨에 있어서는 내가 수차 만나 보니, 기(氣)를 부리는 듯 싶었지만 실상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비록 그러나 정여립도 어느 정도는 괜찮은 사람이니 어찌 예조 판서가 거간(巨奸)이라 지적할 리가 있겠는가. 반드시 이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여립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고 하니, 서익(徐益)의 말도 근거가 있을 듯하다. 대체로 인정(人情)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 아니로다.”하다. 이에 회계(回啓)하기를, “서익의 마음은 과연 헤아리기 어려옵고, 유성룡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오니, 신등이 다시 무슨 말을 하오리까. 정여립이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거짓인지 참말인지 알 수 없사오나, 거간(巨奸)이 아직도 있다는 말은 설혹 있더라도 정여립에게 귀로 들은 말이 아니오니, 어떻게 유성룡을 가리켜서 이런 말을 한 것인 줄 알겠나이까.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가 한 말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이옵니다. 더구나 근사하지도 않는 말로 또 노수신(盧守愼)에게까지 미치오니 그 현란(眩亂)스럽고 방자한 태도가 더욱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만일 전하께옵서 분명하신 하교가 없으시오면 인심이 의심해서 정해질 때가 없을 것이오니 신등은 지극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하니, 답하기를, “그 소(疏)는 매우 의심나는 데가 있으니 이이가 비록 어질기는 하지만 어찌 성인(聖人)이 될 리가 있으리오. 그런데 정여립은 그를 성인이라 하고 또 예조 판서를 그렇게 말했다고 운운하니, 정여립이 만일 이런 말을 했다면 이는 천지간의 한 요물(妖物)로 매우 괴이한 일이로다. 이산보(李山甫 1539-1594)로 말하면 비록 순박하고 진실되기는 하지만 그 재주가 부족하며, 박점(朴漸 1532- ?)은 비록 성실한 듯하지만 그 학문이 전혀 없다. 이 두 사람이 오랫동안 내 가까이에 있었으니 그 잘하고 못하는 점을 진실로 가리지 못한다. 그런데 서익이 망령되이 칭찬하여 전일의 수단을 쓰려 하여 언관(言官)으로 하여금 모두 입을 다물고 두려워하여 꺼리고 말하지 못하게 하니, 내가 보기에는 서익의 말은 마음이 음험해서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런 무리들이 훗날 조정에 일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것이 걱정스러운 일이로다.”하다. 예조 판서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만일 이 일로 인해서 물러간다면 도깨비 무리들이 벼슬을 하여 다만 저들의 뜻을 이루어 줄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서익이 소를 올려 함부로 조정 일에 대해 언급(言及)하며 남의 말이라고 핑계하여 망령되이 시비를 논하니, 훗날 사림(士林)의 화가 반드시 이 사람이 시초를 연 것이 아니라 하겠나이까. 청컨대, 파직시켜 배척하시옵소서.”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서익의 마음이 음험(陰險)하다고 논박하니, 답하기를, “이 차자의 내용을 보니, 만세(萬世)에 바꿀 수 없는 바른 견해로다. 옛사람의 말에, ‘산에 맹수(猛獸)가 있으면 명아주 잎과 비름 잎을 따지 못하고, 조정에 곧은 신하가 있으면 간사한 신하들이 자취를 감춘다.’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경(卿)등은 마땅히 국사에 마음을 다할 것이다. 만일 옳지 못한 일이 있으면 마땅히 바로 말하고 숨기지 말 것이며, 서익 같은 도깨비 무리들은 내버려 두고 문제도 삼지 말라.”하다. 헌납(獻納) 김권(金權)이 아뢰기를, “제 동료들은 차자(箚子)를 올려 서익의 상소가 잘못된 것을 논하려 하오나 신(臣)의 의견은 이와 다른 바가 있나이다. 전에 세 사람이 귀양간 뒤에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왔으니, 정여립이 이이를 위하여 계획한다면 마땅히 화평함으로 일을 진정시켜 공정한 계책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온데, 그 글에 말하기를, ‘한두 간사한 사람을 이미 귀양보내고 내쫓았으나 거간(巨奸)이 아직도 조정 의논을 쥐고 있어 화를 즐기는 마음이 시끄럽게 그치지 않았사오니 훗날의 화가 오늘보다도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또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선비를 죽이는 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사오니 이 말이 과연 어떤 말이겠나이까.’하였습니다. 그런데 뒷날 경연(經筵)에 들어가 모시게 되어서는 전날의 삼사(三司)를 쓰지 않았다 하여 허물을 이이에게로 돌려서 배척하고 훼방(毁謗)하여 못 하는 일이 없이 하였사오니, 만약 그 실정을 안다면 누가 정여립을 형편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서익이 처음 남쪽에 있을 적에 정여립의 의론을 알지 못함이 없었기 때문에 분개하여 이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 뜻은 화평한 것이고 또 언관은 깊이 죄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신(臣)은 동료들의 의논이 지나쳐서 형세상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옵나니, 청건대 신의 벼슬을 바꾸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네가 직접 그 글을 보았는가?”하니, 회계하기를, “신이 직접 보았나이다.”하다. 답하기를, “그 글은 정여립이 이이를 배척하기 전에 나왔는가? 그 뒤에 나왔는가?”하니, 회계하기를, “배척한 뒤에 나왔습니다.”하다. 답하기를, “너는 그 글을 보았기 때문에 분개하여 나온 말이라 하겠지만 동료들은 반드시 각각 소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말에 의탁해서 말한 것이라는 것도 무방한 것이다. 다만 서익이 정여립을 논한 일이 설사 옳더라도 그 밖의 말은 곧 간사한 말들인데 네가 화평을 주장한 것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다만 이미 그 글을 보았으니 다시 의심할 게 없다고 하겠으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말인 것이다. 이는 정여립의 글이 인정에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물러가서 중론(衆論)을 기다리라.”하다. 헌부(憲府)에서 그의 벼슬을 갈기를 청하니, 따르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서익의 상소의 잘못을 논핵하니, 답하기를, “차사(箚辭)를 받아 보고 그 정직함을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이것은 바꾸지 못할 정당한 의논이니 내 다시 무슨 말을 하랴. 그러나 마음아픈 바는 변방 신하의 조롱거리가 되어 그 욕됨이 심한 것이다. 서익의 사람됨을 내 일찍이 보고서 그 경솔하고 사나운 태도를 진실로 의심했는데, 이제 또 그의 글을 보니 은밀히 속임수를 써서 마음을 음험하게 가지고서 한편으로는 동료들을 구하고 한편으로는 어진 선비들을 배척해서 공격하는 말을 끌어다가 대간(臺諫)을 위협하고 억제해서 그들로 하여금 관계(官界)의 부정을 규탄하지 못하게 하고 의리에 죽는 절개인 것처럼 하여 군부(君父)를 공갈하여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도록 하고, 겉으로는 화평한 계책을 진술하나 실지로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술책을 놀리는 것으로, 한 번 상소에 허다한 간사함이 있으니 귀신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을 만드는 것이 능하고 말하는 것이 교묘하니, 이로써 본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소인(小人) 중에 재주가 있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이 어찌 두렵지 않단 말인가. 내가 전일에 이른바 음험한 것을 헤아릴 수 없고 또 조정에 일을 일으킬 것이 걱정스럽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된 도량으로 그 정상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참고 다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의 뜻을 보건대, 혹 일종의 다른 말들이 있기로 내 뜻을 분명히 밝혀서 곧은 신하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저 괴상한 말들이 분분한데 이것이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냐. 이것이 일을 더욱 만드는 것이냐. 옥당(玉堂)은 나를 위하여 논사(論思)하는 자리이니, 만일 생각한 바가 있거든 이 뒤로는 모두 말하고 숨기지 말라.”하다.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정여립이 이이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사실이며 승지(承旨) 중에 이것을 본 자가 있는가?”하니, 회계(回啓)하기를, “정여립이 편지를 보낸 일은 민간에도 떠도는 말이 있사오나 신등이 직접 보지는 못했고, 또 듣자오니 그 뒤에 정여립이 이이와 절교(絶交)한 편지가 있다고 하오나 이것도 신등은 보지 못했습니다.”하다.
6월 16일. 이경진(李景震)이 소(疏)를 올렸는데, 그 말한 대략은, “신이 듣자오니, 정여립이 경연(經筵)에서 신의 숙부(叔父) 이이를 배척했다 하오매 신이 놀라고 괴상히 여겨 스스로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딴사람이 숙부를 헐뜯었다면 괴상할 것이 없겠지만 정여립은 반드시 이럴 리가 없다.’했습니다. 신이 집에 있는 편지를 보다가 정여립이 숙부에게 보낸 글을 찾았사온데, 거기에 말하기를, 당신[從者]이 여러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낭패하여 서울에서 나갔다는 말을 들은 후에 누워도 자리가 편치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않아서 가슴을 헤치고 피를 뿌려 간사한 자들이 질투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상황을 힘껏 말하려 하였사오나, 조금 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바야흐로 내가 못나서 군부(君父)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의리상 얼굴을 들고 말할 수가 없고, 또 성장(成丈)께서 이 일을 위하여 글을 올려 변명했으니 내가 비록 말을 하지 않아도 한이 없나이다. 계속해 듣건대, 성장(成丈)께서 역시 남의 비방을 받아 발을 싸매고 산으로 돌아가셨다 하오니,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죽이는 화가 조석에 박두한 것 같사와 충성되고 분한 마음이 스스로 격해서 다시 그칠 수 없어서 바야흐로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임금께 글을 올리고자 하였더니, 이내 들리는 말에 전하의 마음이 고쳐지시어 마치 해가 중천(中天)에 뜬 것 같아서 도깨비 무리들이 저절로 물러가리라 하므로 또 스스로 참고 그만두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두 소인이 비록 벼슬이 깎이고 내쫓겼으나 거간(巨奸)이 아직도 조정 의논을 장악해서 화를 즐기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불행히 하늘의 화를 다시 받지 않도록 뉘우치지 않는다면 후일의 근심이 오늘날보다 더 심하여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친구들 중에는 십분 믿을 만한 자가 매우 적어서 내가 존형(尊兄)에게 바라는 바가 전에 비하여 더욱 간절하오니 그 뜻이 또한 민망합니다…… ’하였사오니, 이는 계미년 9월의 편지입니다. 이이가 조정에 돌아온 뒤에 또 편지 하나가 있는데, ‘우리 임금이 홀로 중론을 배척하고 많은 미워하는 사람 가운데서 존형(尊兄)을 발탁하여 도리어 총재(冢宰)를 삼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한당(漢唐) 이후에 없던 거룩한 일입니다. 모두 이것을 보고 듣는 자가 누군들 감격하지 않으리오마는 저의 기쁨은 더욱 심함이 있나이다……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이가 죽기까지 겨우 한 달 사이인데 어찌 절교(絶交)한다는 편지가 있었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정여립이 한 일은 인정에 가깝지 않기 때문에 나는 혹 유언비어에서 나왔거니 했는데, 그 뒤에 들으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기로 이미 이리저리 번복하는 고약한 자라고 말했었다. 또 자기에게 절교 당할 허물이 없다면 남이 비록 끊는대도 무슨 해가 있겠는가.”하다.
22일. 대사간(大司諫) 최황(崔滉)이 아뢰기를, “정여립이 이이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은 이미 있던 말이온데 입대(入對)했을 때에는 또 딴말을 했사옵니다. 그 뜻에 비록 스스로 지금은 옳고 지난 일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이다고 하겠지만, 이것 역시 세력에 따라 변천(變遷)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조야(朝野)에서 비웃고 있음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가 없나이다. 그러하온데 간원(諫院)의 차자(箚子)에는 말하기를, ‘떠도는 말에서 나온 것이고 실상은 아무런 증거도 없다.’하오니, 이는 정여립을 옹호하고자 하여 제 마음을 속이는 것이니 일찍이 마주 대해서 거짓말하는 이산보(李山甫)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조정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실상 이러한 일들에 말미암는 것이오니 동료들과 서로 용납할 수가 없사옵니다. 청컨대, 신의 직책을 파면시키옵소서.”하니, 답하기를, “물러가서 중론(衆論)을 기다리라.”하다.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청컨대, 최황과 한옹(韓顒)의 벼슬을 바꾸시옵소서.”하니, 따르다.
7월. 전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정설(鄭渫)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내가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고, 남을 칭찬하고 헐뜯는 것이 너무나 지나치다 하는데 무슨 일을 가리켜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처음부터 남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이 임금과 신하를 한 집안처럼 보고, 어진 자는 들어서 썼을 뿐이니 이는 조정이 다 함께 아는 바이다. 다만 배우지 못하고 학식이 없는 까닭에 간혹 나의 의견을 고집하는 병통이 있다. 간사한 자를 미워하고 또 외척에 의지해서 세력을 만들려는 자들을 더욱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이와 성혼 두 사람은 국가의 어진 선비로 온 조정이 모두 추천한 자이기 때문에 내가 성심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내 몸을 굽혀서 맞이했던 것이고, 편벽된 사사로운 마음으로 쓴 것이 아니며 내 의견으로만 발탁한 것이 아니었다. 아, 옛날부터 어찌 그 어진 신하를 예우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그 떠도는 말이 매개가 되어 이리저리 꾸며 가지고 남을 모함하기를 몹시 심하게 하고 군부(君父)를 희롱했기 때문에 내가 노해서 배척했던 것이다. 그 중에 두세 사람의 무리가 좋지 못한 자와 결탁해서 세력을 끼고 방자하게 굴었던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바로 나라 사람들이 침 뱉고 욕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임금된 도리로 이들을 포용하고 드러내지 않고서 아직 그 쓸 만한 점을 취해서 함께 두고 부린 것이고, 마음속으로는 실상 비루하게 여겼던 것이니, 본래 이들을 옳게 여긴 것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말이 여러 번 나와서 공론(公論)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사정을 두겠는가. 오직 내 마음은 편벽되지 않고 사심이 없기 때문에 옳은 자는 옳다 하고 그른 자는 그르다 했으니, 이 어찌 남을 칭찬하고 헐뜯는 것이 한결같지 않은 것인가. 가령 한 사람의 몸에도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는 것이니, 미워하면서고 그 착한 것을 알고 좋아하면서도 그 악한 것을 알아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한다면 이는 정당하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천리(天理)이니 임금의 사사로운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이를 옳다고 한다면 그 그른 것까지도 옳다 하고, 어떤 이를 그르다고 한다면 그 옳은 것까지도 그르다고 하니, 이것은 편당을 짓는 음험한 자의 행위이다. 그는 나에게 이런 짓을 하게 하려는 것인가. 근래 기강(紀綱)이 서지 않아 간사한 말이 가득하여 은밀히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서 업신여겨 아무런 기탄도 없으니, 마음아픔을 금하지 못하겠도다. 훗날 이 일로 해서 나라를 망칠 것은 반드시 진정시킨다는 말이 잘못된 것이니 마땅히 내 뜻을 알도록 하라.”하다.
8월 18일. 양사(兩司)에서 탄핵하기를,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이 전일에 당파를 만들어 화를 사림(士林)에게 끼치고, 밖으로는 조정의 정령(政令)과 안으로는 궁중의 일까지 지휘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이제 제 아비 상중에 있으면서 나가서 벼슬할 계획을 하고 거짓 왕후의 명령이라 칭하고 아우의 아내를 독살(毒殺)했다 하오니 청컨대 파직시키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한 사람이 옳고 그름을 처리하는 것이 맨 처음에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때문에 조정이 시끄럽게 되어 10년 동안이나 결정이 나지 못했으니 그 사이에 상(傷)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상하다! 전고(前古)에는 없던 일이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죄주는 데에 이른다면 온당치 못한 일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그가 어떠한 사람과 결탁했다 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알게 한 일인데, 당초에 그 근원을 분명히 알아서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하고 진정시킨다는 말을 만들어 상하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마침내 이 일로 국가를 그르치게 했다. 이는 비록 조정에 사람이 없는 까닭이지만 어찌 일을 망친 분명한 거울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신하가 간관(諫官)이 되었으면 이치상 마땅히 바로 말을 해야 할 일인데 두려워하고 겁내서 말을 다하지 못하니 책임을 져야 할 곳이 있도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묻는 것은 딴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것을 알아서 훗날 일처리하는 데 지침이 되게 함이니, 대개 옛사람의 이른바 호랑이에게 상하였다는 것이다.”하다. 이에 양사(兩司)에서는, “심의겸이 박순ㆍ정철ㆍ이이ㆍ박응남(朴應男)ㆍ김계휘(金繼輝)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박점(朴漸)ㆍ이해수(李海壽)ㆍ신응시(辛應時) 등과 사생(死生)의 교분을 맺고 권세로 서로 의지해서 조정을 어지럽히고 형세를 엿보고 있으니 장차 무슨 짓을 하고자 함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성혼도 그의 사랑을 받아서 마침내 조정의 상하로 하여금 두 갈래로 갈라져서 깨끗하지 않게 한 것이 모두 이 사람이 만든 일 아님이 없사오니, 청컨대 죄를 주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옳지 않은 일이다.”하더니, 뒤에 마침내 윤허하다. 그때 대사헌은 이식(李拭), 집의(執義)는 이유인(李由仁), 장령은 한옹(韓顒)ㆍ홍인헌(洪仁憲), 지평(持平)은 심대(沈岱)ㆍ이시언(李時彦), 사간(司諫)은 이양중(李養中), 헌납(獻納)은 정홍남(鄭洪男), 정언(正言)은 조인득(趙仁得)ㆍ송언신(宋言愼)이다. 대사간(大司諫) 이발(李潑 1544-1589)은 밖에 있고 미처 오지 못하다.
25일. 대사간 이발이 서울에 들어와 숙배(肅拜)하고 아뢰기를, “저번 본원(本院)에서 심의겸의 죄를 논할 적에 전하께서 그 결탁한 사람을 물으셨으니, 대간된 자는 낱낱이 빠짐없이 말해서 성상으로 하여금 모두 그 무리들을 아시게 해야 옳을 것이온데, 판서(判書) 홍성민(洪聖民)과 부제학(副提學) 구봉령(具鳳齡)은 모두 심의겸의 친구이오니, 지금 배척을 받은 자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유독 이들을 들어 말하지 않았는지요. 이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오니 서로 용납할 수 없사옵니다. 청컨대, 사직하나이다.”하니, 답하기를, “물러가서 중론을 기다리라.”하다. 양사(兩司)가 이로 인해서 모두 혐의를 피하자, 옥당(玉堂)에서 모두 나와 일을 보도록 청하니, 따르다.
27일. 생원(生員) 이귀(李貴 1557-1633)가 소를 올려 대간 등이 이이와 성혼이 심의겸과 결탁했다고 전하를 속여 여쭈었다고 논핵하니, 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니 네 말은 모두 대간이 이이와 성혼을 들어 말한 것은 혹 우연한 데서 나왔다 하나, 심의겸을 옳다고 하는 자는 간사한 의논이고, 이이와 성혼을 그르다고 하는 자도 정당한 의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어떤 이를 옳다고 한다면 그 그른 것까지도 옳다 하고, 만일 어떤 이를 그르다고 한다면 그 옳은 것까지도 그르다고 하니, 이것은 편당을 짓는 음험한 자의 소행이다.’하였으니, 내 뜻이 이 말로 다 표현되었다.”하다. 이귀가 두 번째 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알았다.”하다. 해주(海州)에 사는 생원(生員) 조광현(趙光玹) 등이 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억울함을 변명하니, 답하기를, “모두 너희들의 의견을 보았다.”하다.
■병술년(서기 1586년)
11월 20일. 공주 교수(敎授) 조헌(趙憲1544-1592)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의 학술(學術)의 바른 것과 국가에 충성하는 정성을 극구 말하고, 또 당시 사람들이 어진 사람을 비방하고 나라를 그르친 것을 배척하여 수만 자나 되니, 임금이 그 소를 궁중에 머물러 두고 수십 일이 되도록 내려보내지 않다. 조헌이 또 소를 올려 극구 간하니, 답하기를, 구언(求言)에 응하여 소를 올리는 정성이 실로 가상하다.”하다.
22일. 부제학(副提學) 정윤복(丁允福 1544-1592) 등이 차자를 올려 조헌의 상소가 잘못되었다고 논하니, 답하기를, “무궁한 구설(口舌)을 떠벌리고 쓸데없는 시비를 가지고 다투는 것 보다는 자기 몸에 돌이켜서 스스로 살피는 것이 옳은 일이다.”하다. 옥당에서 밤늦게 차자를 올리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난밤 3경에 갑자기 중관(中官)이 방울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기로 옷을 입고 일어나서 스스로 ‘밤이 깊어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도 고요하며 궁문(宮門)이 이미 잠겼는데 무슨 아뢸 일이 있단 말인가. 급보(急報)가 아니면 필경 변보(邊報)가 있는 것이다.’생각하고 좌우를 재촉하여 나가 보라 하였더니, 불과 한 장의 쓸데없는 말이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새나 쥐까지도 잠든 밤중에 꼭 올려야 할 글이 아니다. 옥당에서는 오직 진언(進言)하는 데 급해서 사체(事體)를 헤아리지도 않은 것이나 정원으로 말하면 일을 출납(出納)하는 곳이니 마땅히 그 급하고 급하지 않은 것을 취해서 사체(事體)를 헤아려서 이튿날 아침을 기다렸다가 올린다 해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지금 혼미한 정신이 엎치락뒤치락 꿈을 깬 뒤에 오직 옥당의 영(令)을 전하는 것만 바삐 하니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훗날에도 만일 이 풍습을 따른다면 반드시 벌책(罰責)이 있을 것이다. 또 궁문은 어두워지기 전에 닫고 날이 밝으면 여는 것은 모두 그 까닭이 있는 것으로, 비록 만승(萬乘)의 높은 천자로서도 관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하였는데 지금의 신료(臣僚)들은 출입하고자 하면 제 맘대로 해서 궁문이 민가의 문만도 못하니 실로 옛사람들의 한 일과는 매우 다르도다.”하다.
12월 2일. 영상(領相) 박순(朴淳)이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려고 영평(永平) 촌집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경이 자취를 감추고 돌아오지 않으려는데 그것이 자신을 위하는 처사로서는 잘하는 일이겠지만 일시 풍기(風氣)의 의리로는 좋지 못하다. 전에 경을 재촉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경으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지 못하게 한 것은 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글이 그곳에 당도하는 즉일로 길에 올라 서울로 와서 살도록 속히 올라오라.”하다.
11일. 조헌(趙憲)이 송응개(宋應漑)가 그 부모 장사를 지내는 데 무덤의 길을 파서 비밀리 천자(天子)의 예법을 썼다고 말하니, 송응형(宋應泂)이 소를 올려 신원(伸冤)을 청했다. 이에 전교하기를, “자연 공론(公論)이 있는데 어찌 갑자기 와서 싸워 조정을 마치 송사하는 마당처럼 만드는가. 마땅히 벌로 다스릴 것이나 우선은 추궁하지 않는다.”하다.
■정해년(서기1587년)
3월 6일. 유생(儒生) 조광현(趙光玹)ㆍ이귀(李貴) 등이 소를 초잡아 자기들의 스승 이이가 시속 무리들에게 모함받은 것을 극구 논하고, 조정 신하들을 두루 비방하여 여러 만언(萬言)을 썼으나 이것을 임금께 올리지 않았는데, 이이의 조카 이경진(李景震)이 자기 이름으로 대신 올리니, 임금이 묻기를, ‘이 소에는 경솔하게 출세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일어나 부회(附會)하여 그때 심의겸의 집에 출입해서 조석으로 서로 만나 마치 종처럼 알랑거리던 무리들과 그를 맞아 굽실거리며 뚫고 들어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하고, 또 말하기를, ‘전일 심의겸에게 붙었던 무리들이 한때 동인(東人)에게 복종하더니 거꾸로 심의겸을 공격했다.’하였는데 이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숨김이 없는 것이 옛 도리이니 너는 모두 일일이 대답하라.”하다. 이에 이귀는 문자로는 자세히 아뢸 수 없다 하며 면대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창졸간에 다 아뢰지 못하겠으면 잠시 물러가서 써서 아뢰도록 하라.”하다. 이귀가 써서 아뢰기를, “죽은 스승 이이는 평생 참된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했는데 한 번 시론(時論)에 마움을 받자 별별 옳지 않은 의론이 백 가지로 나오니, 신(臣)은 그 이해를 따지지 못하겠사옵고 오직 이이의 본심을 드러낼 것만 생각하나이다. 만일 이이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변명함이 있다면 비록 만번 죽임을 받는다 해도 피하지 않겠나이다. 이른바 경솔하게 출세하기를 좋아하는 자란 백유양(白惟讓)ㆍ노식(盧植)ㆍ송언신(宋言愼)ㆍ이호민(李好閔)ㆍ노직(盧稷)입니다. 이런 무리들을 모두 들자면 어찌 이 몇몇 사람뿐이겠습니까. 전일 심의겸에게 붙었다가 심의겸이 세력을 잃은 뒤에는 도리어 심의겸을 공격한 자란 박근언(朴謹言)ㆍ송응개(宋應漑)ㆍ윤의중(尹毅中)이옵니다. 이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심의겸과 서로 아는 친분이 이이에 비할 바 아닌 자가 있사오니 이는 이산해(李山海 1539-1609)입니다. 심의겸을 안다는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어찌 이산해를 공격하지 않고 이이만 공격하는 것입니까. 그 이산해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한갓 시속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산해는 이이와 젊어서부터 친구 사이면서도 이이를 구원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이 크게 한하는 바입니다. 이산해가 심의겸에게 지어준 시(詩)에,
서울에 봄이 오자 두 번째 그대의 편지를 보았고 / 洛下春來重見札
산골짜기에 밤은 어두웠는데 서로 맞기 익숙하네 / 山蹊夜黑慣相迎
하였사온데 이것이 과연 심의겸과 알지 못하는 자이겠습니까. 이야말로 조석으로 상종하던 자이오며, 이른바 종처럼 알랑거린 자란 정희적(鄭熙績)이옵니다.”하다.
11일.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산해(李山海)가 아뢰기를, “소신은 임술년 봄에 옥당(玉堂)에 들어갔고, 심의겸(沈義謙)은 계해년에 옥당이 되었사오며, 또 갑자년 봄에 옥당의 동번(同番)이 되어 이로부터 옥당과 서당(書堂)에서 동직(同直)했사오니 안 지가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니옵니다. 그러하오나 일찍이 어울리지 않았고, 또 그의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그의 꺼림을 받았사오며, 그들이 신을 헐뜯을 때는 이 아무개는 옥당이 아니라 서당(書堂)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다 함께 들은 바입니다. 그러하오나 심의겸은 사람 대접하기를 몹시 후하게 해서 조정에 함께 있는 선비들은 그와 서로 사귀려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가 마음으로는 비록 신을 꺼려했지만 어찌 밖으로야 은근한 빛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병자년 상주(喪主)가 되었을 때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사람을 보내 위문(慰問)했사오며, 그가 호남 방백(湖南方伯)이 되어서는 신에게 이별하는 시(詩)를 구하고 또 직접 신의 집에 오기도 했사오나 신은 혹 꺼리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마침 조정의 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는데 심의겸이 신의 집 뒤의 동네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을 만났사옵고, 그 뒤에도 어두운 밤에 들어와 만났습니다. 호남으로 부임한 뒤에 글을 보내서 또 이별하는 시를 요구하기로 신은 감히 완강히 핑계 대지 못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보냈습니다. 그 심의겸에게 준 글귀는 대개 곧바로 쓴 것이온데, 이것 때문에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다면 이것은 신이 실상 스스로 취한 일이오니 청컨대 파직시키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하다. 대사간(大司諫) 이발이 혐의를 피하고 전일에 이이가 편지로 왕복하면서 의논한 것은 처음에는 같다가 나중에는 달랐으며, 지금 이귀(李貴)도 왕복한 글을 인용하여 소를 올려 현저하게 배척을 받는다고 사직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개 인신(人臣)은 번복하는 태도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물러가서 중론을 기다리라.”하다. 간원(諫院)에서 이발이 나오기를 청하니 이를 따랐으나, 이발은 글을 올려 사직하다.
9일. 이산해(李山海)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기를, “내가 항상 인재를 얻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국가가 전복되지 않는 것은 경(卿)등 몇 사람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한 서생(書生)의 말을 가지고 의심이 생겨 그 말에 흔들린단 말인가. 그 사람의 마음을 캐 보면 역시 제 스승이 시속 무리들에게 무고당함을 분하게 여겨 궐문을 두드려 소를 올린 것이니 또한 해로울 것이 없도다. 경은 다만 내가 경에게 위임하는 뜻을 알아서 오로지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라.”하다.
11월 21일. 임금이 일본국(日本國)에서 그 국왕(國王)을 폐해서 내쫓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이것은 시역(弑逆)의 죄를 범한 나라이므로 그 사신을 접대할 것 없이 마땅히 대의(大義)로 타일러 돌려보내고자 해서 종이품(從二品) 이상에게 그 가부(可否)를 물어 비밀리에 들어와 아뢰도록 하라.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화외(化外)의 나라이므로 예의(禮義)로 책망할 수 없으니 이 사신들을 마땅히 전례대로 접대할 것입니다.”하다. 조인득(趙仁得)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다.
■무자년(서기 1588년)
1월. 전 현감 조헌(趙憲)이 소를 올려 노수신(盧守愼)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ㆍ이산해(李山海)ㆍ권극례(權克禮)ㆍ김응남(金應男)이 붕당을 만들어 국가를 병들게 했다고 말하고, 또 박순(朴淳)ㆍ정철(鄭澈) 같은 어진 이가 먼 곳으로 내쫓겼으니 마땅히 속히 부를 것을 논하고 또 송익필(宋翼弼)ㆍ서기(徐起) 등은 모두 장수의 재주가 있다고 논하니,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지금 조헌의 소를 보니, 이는 사람 중의 요물이로다. 하늘이 꾸짖고 훈계함이 심하니 경계하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노라. 어찌 덕이 적고 어두운 내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재상을 알아보지 못하고 평일에 지성으로 대접하지 못하고 일 맡기기를 전적으로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있게 한 것일까. 또 비참하고 흉악함을 견디지 못하겠도다. 상소는 변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이 상소는 차마 내려보내지 못하겠다. 이 소가 한 번 내려지면 손해나는 것이 몹시 많을 터이니 내 차라리 허물을 받더라도 태워 버리겠다. 원컨대, 사관(史官)은 크게 내 허물을 써서 후세에 경계하라.”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조헌을 사판(仕版)에서 깎아 없애 버리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로 두고 다툴 바가 못 된다.”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조헌을 죄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진실로 일개 조헌에게 흔들릴 사람은 아니며, 그 역시 어찌 그 말이 시행되리라고 기필하겠는가. 다만 그 마음에 사람을 뽑을 때 그 소를 전하려던 것인데 내가 그 소를 불살랐으니 이는 그 마음을 불사른 것이다. 만일 소를 불사른 것을 그르다고 한다면 내 마땅히 달게 그 책망을 받고 뒤에 마땅히 경계를 삼을 것이나, 만일 여러 가지로 서로 대조해서 변론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조정의 부끄러움이 되어 한갓 대체(大體)를 상하게 될 것이니 심히 내가 기뻐하는 바가 아니다.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리라.”하다. 서울 강물이 광릉(廣陵) 나루에까지 차서 며칠 동안 물빛이 핏빛처럼 흐리다.
■기축년(서기 1589년)
10월 3일.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사람을 보내서 밀장(密狀)을 바치니, 이날 밤에 삼공(三公)과 육승지(六承旨)에게 명하여 입대(入對)하여 복명(復命)하게 하고, 입직(入直)한 도총관(都摠管)과 옥당(玉堂)의 상하번(上下番)이 모두 입시했는데 유독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만은 입시하지 못하게 하다. 탑전(榻前)에서 황해도의 비장(祕狀)을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니, 이는 안악(安岳) 재령(載寧)의 원이 변고에 대해 올린 내용으로, 대개 전주(全州)에 사는 전 수찬(修撰) 정여립(1546-1589)이 반역을 꾀하여 그 괴수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와 같은 무리인 안악(安岳) 조구(趙球)가 밀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해서(海西)와 호남(湖南) 등 각 도에 나누어 보내고 이진길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게 하다.
7일. 의금부 도사 유담(柳湛)이 급히 사람을 보내서 보고하기를, “명을 받고 전주부(全州府)에 달려와서 군사를 내어 정여립의 집을 포위했더니 정여립은 기미를 알고 이미 몸을 빼내어 도망했습니다.”하다.
8일. 황해도의 죄인들을 잡아오니, 대궐 뜰에서 국문하게 하다.
17일. 선전관(宣傳官) 이용준(李用濬)과 내관(內官) 김양보(金良輔) 등이 정여립을 수색하기 위해서 전주로 달려가다. 정여립과 그 아들 정옥남(鄭玉男), 그리고 같은 무리인 안악 교생(安岳校生) 변사(邊汜)와 박연년(朴延年)의 아들 박춘룡(朴春龍)이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현감(縣監) 민백인(閔伯仁)이 관군(官軍)을 거느리고 포위하고 보니, 정여립 등 3명의 역적이 바위 구멍 속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현감은 그들을 사로잡으려 하여 왕명으로 회유하고 관군에게 핍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여립은 먼저 칼로 변사를 찔러 즉사시키고, 또 그 아들 정옥남을 찌르니 칼이 목에 닿자 죽지 않고 땅에 자빠졌다. 인하여 칼날을 땅에 꽂고 스스로 칼날 위로 가서 목을 자르니 그 소리가 마치 소 울음 소리와 같았다. 관군이 급히 달려가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어 시체 둘과 산 역적 2명을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20일. 임금이 정옥남ㆍ박춘룡ㆍ박연년 등을 국문하니, 모두 정여립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실정을 자백했다.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찢어 죽이고, 정여립의 시체를 찢고 백관에게 명하여 열을 지어 서도록 하였다.
11월 3일. 생원(生員) 양천회(梁千會)가 상소하기를, “역적 정여립이 조정의 진신(搢紳)들과 친밀하게 교제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 모두 버젓이 큰 소리로 길에서 벽제(僻除)하며 다닙니다.”하다.
4일. 예조 정랑(禮曹正郞) 백유함(白惟咸)이 상소하여 이발(李潑)ㆍ길(李洁)ㆍ김우옹(金宇顒) 등이 역적과 교제가 두터웠다고 논하다.
7일. 양사(兩司)에서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1527-1591)과 이조 참판 정언지(鄭彦智)가 역적과 친하였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한다고 논핵하자 이를 따르다.
9일. 정철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성혼을 이조 참판에 임명하고, 백유함을 헌납(獻納)에 임명하고, 최황(崔滉)을 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다.
12일. 임금이 친히 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홍종록(洪宗祿)ㆍ정창연(鄭昌衍)ㆍ이발(李潑) 등을 국문했으니, 이는 정여립의 조카인 정집(鄭緝)의 초사(招辭)에서 나온 것이다. 정언지와 홍종록ㆍ이발을 모두 멀리 귀양보내고, 정언신은 중도부처(中途付處)하고, 정창연은 석방하고, 백유양(白惟讓)ㆍ이길은 역시 멀리 귀양보내다.
12월 4일. 양사에서 아뢰기를, “급제(及第) 정언신은 변이 일어나던 처음 탑전(榻前)에서 면대할 때에 이미 역적을 옹호하는 뜻이 있었고, 국문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현란(眩亂)시킨 자취가 있었으며, 심지어 원래 고발한 사람을 잡아 다스리자고까지 말을 해서 옥사(獄事)를 늦추고자 했사오니, 멀리 귀양보내시옵소서. 또 급제 임국로(任國老)는 정언신과 부회(附會)하여 역적을 옹호한 자취가 많아 옥사가 소루(疏漏)하게 된 것이 모두 이 사람들 때문이온데 어찌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치오리까. 문 밖으로 내보내시옵소서.”하니, 모두 따르다.
6일. 헌납(獻納) 백유함이 아뢰기를, “행(行) 호군(護軍) 홍여순(洪汝諄)은 사람됨이 음험하고 시기심이 있고 재물을 탐해서 일찍이 수령(守令)으로 있을 때 교만하고 남을 이기기를 좋아해서 싫증남이 없이 해서 장형(杖刑)을 함부로 참혹하게 베풀어 백성들을 해쳐 흉악한 위엄이 극도에 달하여 관찰사를 멸시하여 사람들이 그를 표범이나 범처럼 여겼사옵니다. 그가 남을 해칠 마음을 가진 것은 실로 조정에 있는 한 도적이오니,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마시옵소서.”하다.
8일. 전교하기를, “고(故) 집의(執義) 이경중(李敬中)이 일찍이 이조 좌랑(佐曹左郞)으로 있을 때는 역적의 괴수 정여립이 성대한 이름이 났을 때로 그의 나쁨을 알고 극구 배척했기 때문에 청현(淸顯)의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마침내 논핵을 받았으니 그 앞을 내다보는 충성됨이 옛사람보다 못하지 않다. 그를 판서로 추증(追贈)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내려서 포상하도록 하라.”하다.
9일. 좌상(左相) 이산해(李山海)에게 전교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여립과 교제한 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나, 근일 기상(氣像)이 장차 파급(波及)될 조짐이 보이니, 그 의논이 지나친 사람은 이를 억제시키거나 혹 면대하기를 청하라.”하다. 지평(持平) 황혁(黃赫)이 혐의를 피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상신(相臣)들에게 내리신 말씀은 진정시키려는 뜻이 지극하심이온데, 이제 역적이 갑자기 일시에 이른바 명류(名流) 중에서 나왔습니다. 그 평소에 그와 교제하고 추장(推獎)하여 그 성세(聲勢)를 도와서 이 변란을 양성한 자는 왕법(王法)으로 따져 보건대 자연 해당되는 죄가 있사오니, 언관(言官)은 들은 바를 일일이 차례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 파급(波及)될 걱정은 신등도 일찍이 염려한 바로, 오직 두려운 것은 한 사람이라도 혹 죄 없는 이가 걸리는 것입니다. 하물며 4ㆍ5년 동안에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여 유사(攸司)의 법이 일절(一節)이 일절(一節)보다 심해서 심지어는 사우(師友)나 인척(姻戚) 사이에까지 모두 중상(中傷)을 입어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성을 내지만 감히 말을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나이다. 이 경화유신(更化維新)할 때를 당해서 누가 감히 언론(言論)이 자기와 다른 것을 가지고 때를 타 남을 모함해서 스스로 소인(小人)의 전철(前轍)을 밟겠습니까. 그 중에 만일 탐하고 사나움이 대단히 심한 자가 있으면 부득이 죄에 따라서 다스릴 것입니다. 신이 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고자 해서 대사헌(大司憲) 최황(崔滉)에게 물었더니, 그 대답하는 말이 공손하지 못하고 신을 대접하기를 낭리(郞吏)처럼 했습니다. 신이 절대로 이 자리에 있지 못하겠사옵기에 사직하나이다.”하니, 답하기를, “최황의 뜻은 대체로 옳다 할 수 있는데 네 어찌 감히 이처럼 불안한 말을 하느냐. 만일 이렇게 한다면 반드시 일이 생길 것이니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서 중론을 기다리라.”하다. 대사헌 최황, 장령(掌令) 윤섬(尹暹)ㆍ심희수(沈喜壽), 지평(持平) 신잡(申磼)이 모두 혐의를 피하여 물러갔다. 이는 황혁이 홍여순(洪汝諄)을 공박하고자 했는데 최황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1일. 집의 성영(成泳)이 최황과 황혁(黃赫)을 모두 나와 일보게 하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황혁의 벼슬을 바꾸라.”하다. 최황이 황혁의 벼슬을 바꾼 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재차 피혐(避嫌)하니, 답하기를, “황혁의 말은 두어 줄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마음이 이미 드러났으니 내 어찌 바꾸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하다.
12일. 교생(校生) 선홍복(宣弘福)의 집에서 문서를 찾아냈는데, 역적 정여립과 서로 통한 자취가 있으므로 잡아다가 심문해서 자백받고 사형에 처하였다. 선홍복이 진술하는데, 이발ㆍ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ㆍ이진길(李震吉)을 끌어들이고 유덕수(柳德粹)의 집에서 참서(讖書)를 얻어다 하므로 이들을 잡아 국문하게 하니, 유덕수는 심문당하다가 죽고, 이발ㆍ길ㆍ백유양 등은 배소(配所)로 떠나보냈다가 다시 잡아다 모두 장형(杖刑)을 받아 죽게 하였다.
14일. 전라도 유생(儒生) 정암수(丁岩壽) 등이 상소하여 이산해(李山海)와 유성룡(柳成龍)을 논하는데 몹시 헐뜯고 배척하였다. 임금이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정암수 등을 잡아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는데 뒤에 대간(臺諫)이 아뢰고 관학 유생(館學儒生) 등이 구원하므로 다시 국문하지 못하게 하다.
15일. 조헌(趙憲)이 적소(謫所)에서 풀려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소를 올리고, 호남 유생 양산숙(梁山璹) 등이 상소하였으니, 대개 모두 당시 재상들을 지목해 배척하는 말이었다. 전교하기를, “이 몇 사람들이 소를 올려 조신(朝臣)들을 다 배척하고 유독 정철 이하 두어 사람만 칭찬하면서 스스로 이것을 곧은 말이라고 하나 도리어 그 정상(情狀)을 나타내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로다. 조헌은 간사한 사람으로 아직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정을 경멸해서 더욱 방자하고 꺼림이 없으니, 이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을 것이다.”하고, 또 전교하기를, “조헌은 간사한 사람으로 그 마음이 몹시 참혹하니 사형을 면한 것도 다행이다. 그러나 언로(言路)에 관계된 일이고 또 대사령(大赦令)를 내렸기에 특별히 석방시켜 돌아오게 했는데 이런 사람을 임금에게 아뢰지도 않고 서둘러 벼슬을 주어 인심을 현혹시키고 어지럽게 하니 몹시 잘못된 일이다. 그날 집무한 이조 당상(吏曹堂上)의 벼슬을 갈도록 하라.”하였으니, 이 사람은 판서 홍성민(洪聖民)이었다.
16일. 특지(特旨)로 유성룡(柳成龍)을 이조 판서로, 권극례(權克禮)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사노(私奴) 송익필(宋翼弼) 형제가 조정에 원한을 품고 기어코 일을 일으키려 하고 있으며, 간사한 괴수 조헌(趙憲)이 소를 올린 것도 모두 이 사람이 시켜서 한 것이라 하니 몹시 마음아픈 일이다. 하물며 종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해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니 더욱 해괴하고 놀라운 일이다. 잡아 가두고 사실을 추궁토록 형조(刑曹)에 말하라.”하다. 양사(兩司)가 조정에서 논의하여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니, 헌납(獻納) 백유함(白惟咸)이 혼자 옳지 않다고 말하여 혐의를 피하고 인하여 사직하여 갈리다.
20일.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존호 올리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옥당(玉堂)은 나와 강학(講學)한 지가 지금 몇 해나 되었는데 아직도 나의 뜻을 모르는가. 지금 이 일은 다만 조종(祖宗)의 지휘를 받든 것이고, 애당초 조그만 공도 기록할 것이 없는데, 지나친 말을 해서 마치 참으로 큰 공이 있는 것처럼 하기까지 하니, 천지에 부끄럽고 후세에 비웃음을 끼치는 것으로 작은 일이 아니로다. 가령 내가 조그만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삼대(三代) 때의 일은 그만두고라도 한(漢) 나라 고조(高祖)ㆍ광무(光武)와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천하를 다시 중흥시킨 것은 가장 큰 공이었지만 존호(尊號)를 올린 일이 있었다는 걸 듣지 못했다. 오직 당(唐) 나라 덕종(德宗)의 무리가 감히 이런 일을 했다가 낭패하게 되어서 도리어 호(號)를 삭제하느라 바빴으므로 지금 천년 후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손바닥을 두드리고 웃게 하는 것이다. 내 비록 불민(不敏)하나 조금은 서사(書史)를 아는데, 또한 어찌 여러 신하들의 권함에 못 견디어 내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옥당의 여러 선비들은 마땅히 내 뜻을 알아서 속히 이를 정지하도록 하라.”하다.
■경인년(서기 1590년)
12일. 이보다 앞서 임금이 박충간(朴忠侃)ㆍ이축(李軸) 이하와 죄인을 추국(推鞫)한 모든 신하들을 모두 평난공훈(平亂功勳)으로 기록하라고 명하니, 양사에서 너무 지나치다고 논하였다. 지평(持平) 윤형(尹泂)의 계사(啓辭)에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 녹훈(錄勳)했던 것을 또한 10년 뒤에 고친 일도 있으니, 어찌 애당초에 정당하게 하는 것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물정(物情)이 이를 해괴하게 여기다.
18일.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갑신년 정부에 있을 때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고 김우옹(金宇顒)ㆍ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ㆍ정여립(鄭汝立)ㆍ를 천거했다. 이 천거 명록(名錄)을 보고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섰다. 옛날부터 이런 대신(大臣)이 있었단 말인가. 이 사람은 내가 우대(優待)하는 사람이나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는 바이기에 내 이 일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니 조정의 공론에 따라 처치하도록 하라.”하다.
19일. 좌상 정철(鄭澈 1536-1593)과 우상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회계(回啓)하기를, “삼가 성교(聖敎)를 보니, 노수신(盧守愼)의 일은 매우 놀랍고 송구합니다. 노수신이 세상에 드문 대우를 받고 전에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마땅히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고 국가를 위하여 어진 이를 천거해야 할 것인데, 그 천거한 사람이란 대개가 역적의 무리들이오니 바야흐로 간사한 의논이 횡행해서 역적의 무리들이 세력을 만드는 때에 일찍이 말로써 금하고 경계시켜 억제하지 않고 한결같이 시속 무리들의 농간하는 말을 따라서 도리어 스스로 천거하였으니 그 죄 진실로 피하기 어렵습니다. 변이 일어난 뒤에 여전히 대죄(待罪)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엉뚱한 몇 마디 말만을 범연하게 아뢰고 물러갔사오니, 그 늙어 정신 없음이 심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분명히 알지도 못하고 일국의 기세(氣勢)에 눌려서 그런 것입니다. 하물며 노수신은 네 대(代)를 섬긴 오래된 신하로 늙고 병듦이 심하고, 지금은 종기를 앓아 목숨이 실낱 같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옛 신하를 대접하시는 데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게 하는 의리를 가지셔야 할 것이오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알았다.”하다. 대사헌 홍성민(洪聖民)과 대사간 이산보(李山甫)가 합계하기를, “노수신이 어진 이를 천거하라는 명을 받고는 마침내 역적을 천거했사오니, 당시에는 비록 역적의 행동이 전부 나타나지는 않았더라도 그 흉악하고 음험한 모양을 사람들 중에는 혹 확실히 아는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이들을 천거해서 역적의 무리가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도와 주었으며, 일찍이 한 마디도 그의 행동을 꺾지 않고 도리어 끌어들였습니다. 변이 일어난 뒤에도 잘못 천거한 것을 자기의 죄로 인정하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하라고 말했사오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그르친 죄가 크옵니다. 관작(官爵)을 삭탈하게 하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파직시키도록 하라.”하다. 계속하여 3일 동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4월 1일.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정여립이 역적질할 마음을 품은 것이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온데, 이조(吏曹)에서는 일찍이 김제 군수(金堤郡守)와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천거해서 그의 하고자 하는 계획을 들어주어 거의 헤아리지 못할 변이 생길 뻔 하였사오니, 당시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모두 파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소란스럽다.”하고, 윤허하지 않다. 이산해(李山海)가 판서로 있을 때 김제 군수로 천거했고, 이양원(李陽元)이 판서로 있을 때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천거했다. 이것은 정언(正言) 황신(黃愼)이 의논을 주장했다.
5월 24일. 특별히 황신(黃愼)을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하다. 이산해(李山海)가 사직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위로하기를 지극히 하다.
6월 19일. 전교하기를, “정언신(鄭彦信)이 고발한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말을 버젓이 했으니 일이 해괴하고 놀랍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조정에서는 한 사람도 이것을 말하는 이가 없다가 유생(儒生)의 상소로 인해서 비로소 알았으니 전주(全州) 양형(梁詗) 의 상소임. 이 역시 놀라운 일이다. 정언신(鄭彦信)은 대신으로 감히 방자하게 나를 속였으며, 그 형 정언지(鄭彦智)도 행동을 같이하였으니, 이 두 사람은 그 마음이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니 매우 마음아프고 분하다.”하니, 추국청(推鞫廳)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정언신의 이런 말은 전파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미루고 아뢰지 않았사오니 신의 죄가 크옵나이다. 정언신의 말이 이미 드러났사오니 내버려 두고 묻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즉시 여러 대신(大臣)들을 불러 죄를 의논하시옵소서.”하다. 이에 전교하기를, “그대로 하라.”하다. 임금이 추국(推鞫)에 참여한 대신들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불러서 정언신의 발언을 들었는지의 여부를 물으니, 김귀영(金貴榮)은 왼쪽 귀가 먹어서 듣지 못했다 하고, 이집(李潗)은 자기가 앉아 있던 곳이 멀어서 듣지 못했다 하고, 이산해(李山海)는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계에 대해서 회계(回啓)할 적에 정언신의 말이 나온 것 같다 하고, 유홍(兪泓)과 홍성민(洪聖民)은 모두 들었다고 말했다. 대사헌 홍성민(1536-1594)이 아뢰기를, “정언신이 말을 할 때에 신은 실상 거절했사옵고 이산해도 그 옳지 못함을 말하고 신을 돌아보면서 나도 판서의 의견과 같다고 했었습니다. 정언신이 재삼 그 말을 하자 이산해는 조금 수그러져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우상(右相)의 말이 옳습니다.”하고, 정언신이 황해 감사를 추국하자고 하기에 신이 그 옳지 못함을 힘써 말해서 그 일이 드디어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산해가 ‘분명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아뢴 것은 필시 이산해가 큰 병을 앓고 난 뒤에 혼미(昏迷)해져서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양이 위에 있고 귀신이 옆에 있는데 군부(君父)를 속이고서 어떻게 살려는 것입니까. 신이 본래부터 이런 생각이 있었사오나 이제야 비로소 아뢰오니 정언신과 죄가 같사옵니다. 형벌을 내리옵소서.”하니, 답하기를, “경(卿)이 이미 직접 보고서도 처음에 곧장 말하지 않고 이제야 유생(儒生)들의 말로 인해서 말을 많이 하니 이는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도다. 일의 가부(可否)를 가릴 때 사람의 말들이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언신의 말은 진실로 패역(悖逆)한 일인데 어찌 한 사람의 말로 인해서 이것을 어떤 사람의 아뢴 말로 인하여 딴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는가. 나는 실로 경의 뜻을 알지 못하겠도다. 이미 사직한다 했으니 아뢴 대로 벼슬을 갈도록 하겠다.”하다.
20일. 이산해가 글을 올려 사직하니, 전교하기를, “경은 어찌 이렇게 사직서를 올리는가. 백 가지로 경을 모함하려는 태도를 내 이미 알고 있으니 비록 만인이 공격한다 해도 상관없노라. 아, 경이 가면 다른 사람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경은 다시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일을 보라. 그렇게 하면 일에 뉘우쳐지는 것이 많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후회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하다.
■신묘년(서기 1591년)
2월 29일. 이조 판서 유홍(兪泓)과 참판 이증(李增)을 추고하고 벼슬을 갈도록 명하다. 참의(參議) 이덕형(李德馨)이 병으로 숙배(肅拜)하지 못하니, 불러서 정사를 하라 했으나 오지 않다. 특지(特旨)로 우상 유성룡(柳成龍)으로 이조 판서를 겸하게 하고, 최흥원(崔興源)을 이조 판서로 삼고, 부제학(副提學) 이성중(李誠中)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고, 행 호군(護軍) 이해수(李海壽)를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삼다. 이해수가 일찍이 여주 목사가 되었다가 임기(任期)가 차서 바꾼 것인데 이때 다시 부임한 것이다.
3월 6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조 정랑 유공진(柳拱辰)은 인물이 경솔하고 용렬하오며, 검열(檢閱) 이춘영(李春英)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망령된데 재상의 집에 출입한다 하오니, 모두 파직시키시옵소서.”하니, 이를 따르다.
14일.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정철(鄭澈)이 조정의 기강(紀綱)을 제 맘대로 희롱하여 일세(一世)를 주무르니, 파직시키시옵소서.”하니, 따르다.
16일. 전교하기를, “옛날에 대신을 파직시키고 내쫓을 때에 조당(朝堂)에 방(榜)을 붙이는 것은 그 죄상을 백성들의 이목(耳目)에 밝게 보여서 후세 사람을 징계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정철을 파직시켰으니 승지(承旨)는 옛일대로 조당에 방을 붙이라.”하다.
6월 22일. 도목(都目) 정사를 하는데, 전 사인(舍人) 백유함(白惟咸)과 전 정랑(正郞) 유공진(柳拱辰)을 모두 학관(學官)으로 천거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중죄인을 사장(師長)에 천거하니 이는 내 마음을 시험하고자 함이로다. 누가 이 사람들을 천거했느냐?”하고 물으니, 당상(堂上)이 사실대로 아뢰기 어려워해서 재삼 힐문한 뒤에야 정랑(正郞) 윤돈(尹暾)이 먼저 말을 꺼냈다고 대답하다. 이에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어 추고(推考)하고 삭직하여 놓아 보내게 하다.
23일. 대사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집의(執義) 김륵(金玏), 지방에 있는 장령(掌令) 조인득(趙仁得)ㆍ윤담무(尹覃茂)ㆍ지평(持平), 이상의(李尙毅)ㆍ정광적(鄭光績), 대사간 홍여순(洪汝諄), 사간(司諫) 권문해(權文海), 헌납(獻納) 김민선(金敏善), 정언(正言)ㆍ윤엽(尹曄) 등이 합계(合啓)하기를, “정철ㆍ백유함ㆍ유공진ㆍ이춘영(李春英) 등이 서로 사귀어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히고 자기와 주장이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자 하여 유생(儒生)들을 꾀어 상소하여 이름 있는 재상과 선비들을 역적으로 몰아넣어 모두 없애려 하였으니, 모두 멀리 귀양보내시옵소서.”하니 따르다. 정철은 진주(晉州)로 귀양보내고, 백유함과 이춘영은 처음에는 서도(西道)로 귀양 보냈었는데, 임금이 옮기라 하여 이에 진주를 강계(江界)로 고치고, 백유함은 경흥(慶興)으로, 유공진은 경원(慶源)으로, 이춘영은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남부 유학(南部幼學) 유시(柳諡)의 집 뜰에 갑자기 검은 물건이 이리저리 떨어지므로 보니 검은 개미로, 모두 죽어 있는데 혹 머리가 잘린 놈도 있고 혹 허리가 꺾어진 놈도 있으며, 날개는 희고 몸뚱이는 검은 놈도 있었다.
25일.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우찬성(右贊成) 윤근수(尹根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성민(洪聖民),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해수(李海壽), 양양 부사(襄陽府使) 장운익(張雲翼) 등이 무리가 되어 정철(鄭澈)에게 붙어서 간사한 무리를 끌어 들였으니,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보내시옵소서.”하니, 따르다. 뒤에 홍성민은 부령(富寧)으로, 이해수는 종성(鍾城)으로, 장운익은 온성(穩城)으로 귀양보냈다.
7월 2일.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병조 판서 황정식(黃廷式), 승지(承旨) 황혁(黃赫)ㆍ윤근수(尹根壽), 호조 판서 윤두수(尹斗壽),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산보(李山甫), 사성(司成) 이흡(李洽), 병조 정랑(兵曹正郞) 임현(任鉉), 예조 정랑(禮曹正郞) 김권(金權), 고산 현감(高山縣監) 황신(黃愼), 사과(司果), 구면(具?) 등이 무리가 되어 정철에게 붙어서 사람을 해쳤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황정식 부자가 방자하고 재물을 탐하였으니 모두 파직시키시옵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황정식과 황혁은 전부터 들은 말이지만 꼭 그런지 실상은 알지 못하겠고, 윤두수는 관대하고 재주와 지혜가 있으며, 윤근수는 글을 하는 선비이니 아까운 일이로다.”하고, 윤허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따르다.
5일. 이보다 앞서 호남(湖南)의 정암수(丁岩壽)가 상소하여 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 등이 평소에 역적 괴수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배척하니, 임금이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입대(入對)시켜서 위로하였다. 정암수의 소(疏)에 연명(連名)으로 참여한 자가 많으므로 다 죄줄 수 없다 하여 그 이름이 위에 있는 자 10명만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양사에서 옳지 않다고 고집하고 태학생(太學生)들도 상소하여 구원해서 석방되었다. 이에 이르러 양사에서 논핵하기를, “그 당시의 대간(臺諫)이 권간(權奸)들의 지휘를 받고 정암수를 구원했사오니, 모두 파직시키시옵소서.”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많은 사람을 모두 파직시키면 소란스럽다 하고 따르지 않다가 뒤에는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당시의 대사헌은 최황(崔滉), 집의(執義)는 성영(成泳), 장령(掌令)은 심희수(沈喜壽)ㆍ윤섬(尹暹), 지평(持平)은 신잡(申磼)ㆍ우준민(禹俊民), 대사간은 이증(李增), 사간(司諫)은 오억령(吳億齡), 헌납(獻納)은 백유함(白惟咸)ㆍ유대진(兪大進), 정언(正言)은 강찬(姜燦)ㆍ이흡(李洽)이었다.
17일. 전교하기를, “간신(奸臣) 정철에게 모함당하고 배척당한 자가 있다면 모두 거두어 등용하도록 하라.”하였다.
20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이태수(李台壽)가 순안(順安)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보고하기를, “정철이 병이 중해서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태수는 조정이 두렵지 않은가. 간사한 역적을 압송해 가는데 엄하게 하지 못하고 제 맘대로 가면서 지체하고 있으니 다른 도사(都事)를 보내서 압송해 가게 하라. 정철은 천성이 교활하고 간사하니 배소(配所)에 도착한 뒤에 잡인(雜人)들과 사귀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엄하게 위리(圍籬)하도록 하라.”하다.
7월 8일. 양사에서 연명으로 아뢰기를, “윤두수(尹斗壽)와 황혁(黃赫)을 처벌하시옵소서.”하고, 또 아뢰기를, “상호군(上護軍) 박점(朴漸)이 무리를 만들어 정철에게 붙어서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급급하게 음험하고 간사한 자들을 끌어다가 요직(要職)에 두루 앉히고 흉악한 짓을 선동하였사오니, 관작을 삭탈하시옵소서.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성중(李誠中)은 선비로 정철 문하(門下)에 왕래하면서 그와 함께 일을 모의했사오니, 파직시키시옵소서. 사인(舍人) 우성전(禹性傳)은 괴이한 의론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여 공변된 의론을 위협해서 행하지 못하게 하고, 또 무리를 만들어 정철을 옹호했사오니, 파직시키시옵소서. 황혁은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국혼(國婚)을 개 돼지 같은 집과는 할 수 없으니 다시 정하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윤두수와 황혁은 이미 파직시켰으니 멀리 귀양보낼 것이 없고, 박점과 이성중은 아뢴 말대로 시행토록 하라. 우성전(1542-1593)은 본래 사람들의 말이 많더니 역적의 초사(招辭)나 편지에서 그 이름이 나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사람은 근 10년 동안 밖으로 배회하다가 저번에 한두 번 입시(入侍)했는데, 사람됨이 몹시 음험하고 또 무리를 만들어 정철을 옹호했다 하니, 파직만 시킬 것이 아니라, 관작도 삭탈하라. 혼사는 필부(匹夫)라도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천승(千乘)의 임금이겠느냐. 고칠 수가 없다.”하였다. 윤두수는 뒤에 아뢴 대로 멀리 귀양보냈고, 황혁은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았다. 이성중은 부제학으로 있었을 때 차자를 올려 세자(世子)를 세우는 일을 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