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오음잡설(윤두수)

청담(靑潭) 2018. 7. 28. 16:05



오음잡설(梧陰雜說)

  

윤두수(尹斗壽 1533-1601)


본관 해평(海平). 자 자앙(子仰). 호 오음(梧陰). 시호 문정(文靖). 이황(李滉) ·이중호(李仲虎)의 문인.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正字) ·저작(著作)을 지냈다. 1563년 이조정랑 때 권신 이량(李樑)의 아들 정빈(廷賓)을 천거하지 않아 파직되었고, 이량이 실각되자 수찬에 등용되었다. 그 뒤 이조 ·공조 ·형조 ·호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1577년(선조 10)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8년 도승지 때 이종제(姨從弟)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루 파직되었다. 1579년 연안부사로 복직,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건저(建儲) 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 회령(會寧) 등에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용되어 선조를 호종, 어영대장이 되고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1594년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로 세자를 시종 남하하였다. 1595년 중추부판사로 왕비를 해주(海州)에 시종하였다. 1598년 다시 좌의정이 되고,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였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에 《성인록(成仁錄)》, 문집에 《오음유고》, 편저에 《평양지(平壤志)》 《연안지(延安志)》 《기자지(箕子志)》 등이 있다.



○이원길(李原吉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자(字))은 정승이 되었을 때 엄하게 체모(體貌)를 지켰다. 비록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장려하기에 급하였으나 일찍이 비굴하게 체모를 상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징사(徵士) 조식(曺植 1501-1572)이 조정에 들어올 때를 당하여서도 다만 친구의 정의로 문자(文字)를 상통할 뿐이었다. 징사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일부러 찾아가 고발하면서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 정승의 지위로 높은 체하여 끝내 친히 한 번도 찾아주지 않소?”

하니, 이원길이 대답하기를,

“조가(朝家)에 체모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감히 손상시킬 수 없소.”

라고 하여, 서로 한바탕 웃고 헤어졌다.

퇴계(退溪 1501-1570)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경사대부(卿士大夫)들이 조석으로 그 문간에 대기하여 다투어 서로 인사드리므로, 퇴계는 일일이 다 접견하느라 조금도 틈이 없었다. 최후에 정승 이원길(李原吉)을 찾아보았더니 이 정승이 말하기를,

“공(公)이 서울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일찍 상면하지 않았소?”

하니, 퇴계가 대답하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시간이 없었소.”

하니, 이 정승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지난 기묘년(중종 14, 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해)에 있어서도 선비들의 버릇이 이러하였는데, 그 중에는 또한 양질호피(羊質虎皮 본바탕은 아름답지 못하면서 겉만 훌륭함)의 사람도 없지 않아 결국 화를 매개하는 폐단이 있었소. 조정암(趙靜菴) 같은 분 외에는 내가 취하지 않소.”

하였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守愼 1515-1590))와 정황(丁璜 1512-1560)은 동지(同志)로서 막역한 친구간이 되었다. 당시 재상으로서 선을 좋아한다고 칭해진 자 중에는 유인숙(柳仁淑 1485-1545)정순붕(鄭順朋 1484-1548)을 으뜸으로 삼았다. 유인숙은 의관이나 음식을 한결같이 재상으로 자처하였고, 정순붕은 초라한 갓과 허름한 의복으로 검소함을 스스로 지켰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우열을 가렸다. 소재(蘇齋)와 정공(丁公)은 같이 정순붕의 집을 찾아 뵙기로 언약하고 먼저 그 뜻을 정순붕에게 통지하였다. 그날 마침 다른 일 때문에 자연 밤중에 가게 되었더니, 정순붕은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다가 정복(正服)을 하고 맞아들였다. 정공이 물러와서 소재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의 하는 정상과 일은 자못 자연스럽지 아니하오.”

○여느 때에 조서(詔書)가 오면 우리나라에서는 으레 조서를 머물러 두는 절차가 있어, 상감이 몸소 중국 사신 앞에서 정성스럽게 조서를 머물러 두라고 간청한다.

정묘년(명종 22, 1567)에 중국 사신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이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의 등극을 반포하러 올 때에, 가산(嘉山)에 당도하여 명종(明宗)이 불의에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허국ㆍ위시량이 곧 노상에서 조서를 머물러 두는 한 절목을 처음 냈는데, 지금의 상감께서 바야흐로 권서(權署) 중에 있어서 대신으로 하여금 군신들을 인솔하고 머물러 두어 변례(變禮)해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이다.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원년(선조 6, 1573)에 중국 사신 한세능(韓世能)ㆍ진삼모(陳三謨)가 올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당초 권서(權署) 때에 예가 변경된 까닭을 살피지 못하고 한결같이 정묘년에 조서를 머물러 두던 의절로 의주(儀註)를 만들어 보냈고, 한세능ㆍ진삼모 또한 본말을 알지 못하고 변례를 답습하여 행하였으니, 지극히 온당치 못하다. 이 사정을 후일 예관(禮官)은 알아야 할 것이다. 당릉군(唐陵君) 홍순언(洪純彦)이 생존시에 매양 나를 위하여 말하였다.

○을사년(명종 즉위년 1545) 7월, 인종(仁宗)이 아직 빈소(殯所)에 계실 때에, 여러 신하들이 빈청에 모여서 모두들 윤원로(尹元老 ?-1547)를 죽이되 먼저 시행하고 뒤에 알리려고 하여, 재상들로 하여금 차례로 정승의 앞에 나아가 그 가부를 말하게 하였더니, 이원길(李原吉)이 우윤으로서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은 전일과 다르고 대왕대비(大王大妃 문정왕후(文定王后))께서 위에 계시는데, 어찌 여쭈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그의 동기(同氣)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가 문을 나갈 때에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547)가 노기를 띠고 불러 말하기를,

“원길(元吉)의 이 의논을 나는 취하지 않소.”

하였다. 이원길이 오래지 않아 평안 감사가 되어 나가고 시사(時事)가 새로 변하여 사림의 화가 오래 끊이지 아니하였고, 윤원형이, 이원길이 구출하여준 것을 고맙게 여겨, 그를 끌어들여 정경(正卿 정2품 이상의 벼슬)에 앉혔다. 이것은 즉 여러 신하들이 한갓 전일의 대ㆍ소윤(大小尹)의 사정(邪正)의 설에만 현혹되어 변통하여 잘 처리할 줄을 알지 못하여, 끝내 화를 면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정묘년 5월, 공의전(恭懿殿 인종의 비 박씨)이 편찮으매, 명종께서 승정원에 명하여 복제(服制)를 고찰하여 알리라고 하였다. 이때에 퇴계가 서울에 있었는데 말하기를,

“예(禮)에 있어 형수[嫂]와 시숙[叔] 사이에는 복이 없으니, 상감께서는 복입지 않는 것이 타당하오.”

하므로, 여러 사람들은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大升 1527-1572)의 호)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따라갔다가 뒤에 서울에 돌아와 말하기를,

“인종(仁宗)께서는 한 나라에 군림(君臨)하셨으므로 지금 상감께서 자연 왕위를 계승하는 복이 있는데, 어찌하여 형수의 예를 인용할 수 있겠소?”

하니, 퇴계가 듣고 생각한 끝에 말하기를,

“명언(明彦 기고봉의 자(字))의 말이 옳다. 창졸간에 잘못 대답하였으니, 내가 죄인을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이 말은 온 조정이 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축년 11월 국상(國喪) 때에는 비록 한 두 사람의 이의가 있었으나 왕위를 계승하는 복으로 정하니, 위아래에 의심해 묻는 사람이 없었다. 고봉(高峯)의 정밀한 조예와 퇴계의 옳은 것에 심복한 것을 온 나라가 믿었으니, 그 이익이 넓다고 하겠다.

○기고봉(奇高峯)이 일찍이 말하기를,

“박화숙(朴和叔 이름은 박순(淳 1523-1589), 호는 사암(思庵))은 하는 일이 소활하여 자못 법을 신중하게 지키는 듯이 없으니 염려스럽다.”

하였다. 일찍이 6품에 적합한 사람 약간 명을 뽑아내는 것을 삼공(三公)에게 가서 품의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뒤에 그의 의견을 와서 말하기에 나는,

“이는 말세의 좋은 일이다. 이조의 의견이 그렇고 보면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한탄스러운 것은 공(公 박화숙)이 조종(祖宗)의 법 세운 본의를 통찰하지 못하고 이같은 잘못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후폐가 있을 것이다.

경연(慶延)과 효성(孝成)의 행실로도 성종 때에 오히려 참봉을 제수하였다가 오랜 뒤에 6품을 시켰고 조효직(趙孝直 효직은 광조(光祖)의 자(字))의 학문으로도 중종 때에 초입사(初入仕)를 제수하였다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된 다음에야 6품을 제수하였으니, 조종조에서 사람을 경솔하게 쓰지 않은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또 취할 만한 재주가 없는 사람은 쓸 수 없는 것이며, 간혹 훌륭하여 쓸 만한 사람이 있더라도 차라리 한두 사람을 잃을지언정, 법전(法典)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기고봉의 서실(書室)이 호현방(好賢坊) 골목에 있었는데, 일찍이 봄철에 종을 보내어 용문산(龍門山)의 산나물을 뜯어다가 뜰에서 말려 월동 준비를 하였으니, 즉 《시경(詩經)》에 이른바, ‘내 아름다운 나물을 저축한다[我有旨蓄]’는 뜻이니, 그가 향리에 있을 때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우엉 나물을 삶아서 나에게 보내면서 편지에,

“이는 초야에 있는 사람의 맛이니, 사대부들도 알아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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