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김안로(金安老 1481-1537)
본관 연안(延安). 자 이숙(頤叔). 호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1506년(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522년에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24년에는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아들 희(禧)가 장경왕후(중종계비)의 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한 뒤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南袞), 대사헌 이항(李沆 ?-1533)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1527년 남곤이 죽고 그 일파가 실각되자, 1529년에 풀려나와, 1531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종친(宗親) ·공경(公卿)이라 할지라도 이를 축출하여 살해하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펼쳤다. 정적이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형을 받았고,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용천담적기(龍泉淡寂記)》가 있다.
※중종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권신들 대부분은 어느 날 밤, 중종의 기습 전략에 의해 하루 아침에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당하고 죽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은 조광조와 김안로였다. 이들이 비록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고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신들이 죽은 원인은 중종의 기습적인 습격과 이들을 사사하라는 명령에 있었다. 이는 비록 일부 권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로인해 이들의 권력이 너무나 커졌다고 해도 중종은 이러한 권신들을 기습 전략으로 제거하기 전에는 없던 면모를 보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자서(自序)
◯내가 귀양살이한 이래로 과거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여 고치려고 스스로 뉘우치고 많이 조심을 하였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내가 둥근 구멍에 따라서 네모난 장부를 고치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부엌에 제사지낼 수는 없었다. 내 뜻으로는 본질을 지키며 충심을 다하여 험악한 일을 무릅쓰고 한 길로만 달리면서 거의 실낱 같은 충성을 바치려 하였으나 목을 움직여 말만하게 되면 남의 시기를 받게 되고 발을 들어 행동하기만 하면 함정에 빠져 당실(堂室 집안 식구)과 폐부(肺腑 일가 친척)가 모두 구기(鈎機)나 고가(鼓架)가 되었다. 한 사람이 제창하는 것이 마치 불을 부채질하는 것 같고 거기에 천 사람의 의심이 바람같이 호응하여 칼을 갈고 물을 끓이는 자가 용맹을 떨치며 나를 급히 밀어넣으려 하니, 어찌 나의 미치고 어리석은 성질이 힘을 돌아보고, 자신의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서 시대에 합당하지 못하였던 것을 요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구구한 내가 나라에 몸을 바친 죄가 만번 죽어도 속죄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임금께서 밝게 살펴주시고 당시의 여론이 특별히 용서하여 요행히 피묻은 이빨에서 벗어나게 되어 형벌 받은 나머지 목숨을 잇게 되었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텁다. 죽을 뻔하다 남은 혼이 아직도 떨려서 진정되지 않는다. 외로운 몸뚱이가 떠돌아다니면서 엎치락뒤치락하여 습지와 더러운 것에서 발생하는 열병 등 백 가지 독을 받아 죽음과 이웃이 되어 있노라. 그러나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여 스스로 화를 밟으려고 결단하였으니, 비록 구렁텅에 빠져 죽더라도 또 후회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천지의 귀신들이 위에 벌려 있고 옆에 나열하여 있으니 나를 죄에 얽어매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횡액(橫厄)으로 당한 환난은 옛날 사람들도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조용히 조그마한 방을 쓸고 향을 피워 마음을 고요히 하면 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남은 생명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군자가 병폐로 생각하는 바라, 백번 귀양살이한 사람이 정신이 피로해서 성인의 글을 보아도 두어 줄을 읽지 못하고 마음이 심란하여 푸르고 붉은 색이 다르게 보여 문득 그 장(章)도 마치지 못하고 걷어 치워버렸다. 긴 밤과 기나긴 낮을 뜻 둘 곳이 없으면 때로 예전에 친구들이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농담하는 것에 대신하였다. 또한 새로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끝에 보충하여 번민을 덜고 적적함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비록 이런 것으로 마음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낮잠을 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패관소설(稗官小說)도 충분히 박식(博識)을 돕고 잃어버리거나 떨어진 것을 주워 모을 수 있어서 역사의 편집을 맡은 사람들이 반드시 참고하여야 할 것이 있으니 어찌 끝끝내 감추어 두어 사유물(私有物)로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아직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다만 책상 안에 두어서 나의 자손들로 하여금 오늘날의 나의 불우하고 고생스러운 상황을 알게 하여 자손들이 마땅히 힘쓰도록 할 뿐이다.” 하였다. 가정(嘉靖) 전몽(旃蒙) 작악(作噩), 즉 을유(乙酉 서기 1525년) 12월 상한(上澣)에 인성당(忍性堂)에서 적음.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김안로(金安老) 찬(撰)
●포은(圃隱) 정문충(鄭文忠)의 사당이 옛부터 영천(永川)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순효(舜孝 1427-1497) 칠휴공(七休公)이 일찍이 이 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 영천군 경계를 지나다가 말 위에서 술에 취하여 졸면서 몽롱한 가운데 포은 사당이 있는 마을을 지났다. 꿈결에 희미하게 한 늙은 노인을 보았는데 수염과 머리가 희고 의관이 아주 점잖았다. 노인이 말의 머리를 막아 서면서, “내가 포은이라.” 하고, 또 말을 계속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너무 퇴락하여 바람과 비를 막을 수가 없다.” 하는데, 마치 그에게 부탁하는 빛이 있어 보였다. 칠휴공이 놀라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고로(故老)에게 물어서 그 옛터를 찾았다. 그리고는 그 고을 사람들에게 권하여 사당을 다시 지었다. 집이 이루어지고 물품들이 모두 비치된 뒤 칠휴공은 몸소 잔을 드리고 사당의 낙성식을 올렸다. 그리고는 스스로 큰 잔에 술을 가득히 마시고 취하여 마루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丞相 송 나라 문청상)과 충의백(忠義伯) 두 선생의 간담이 서로 비추어 일신을 잊고 사람을 기강을 세우시니 천만 세에 우러러 마지 않는다. 이권(利權)이 있는 곳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분주히 모여드는데, 맑은 서리 흰 눈에 송백만이 창창한데 집 한 간을 지어서 비바람을 막게 하니 공의 신령(神靈)도 편안하고 내 마음도 편하리다.”라 하였다.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은 천지 사이에 있어서 넓게 조화(造化)의 원기와 함께 흘러가는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사당의 성패로써 남에게 힘을 빌리는가. 아마도 이 노인[七休公]의 마음이 넉넉하고 아름다워 평생을 두고 충성과 관용으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그 정신과 기맥(氣脈)이 혹 황홀한 사이에 감동된 것인가 보다. 내가 동도(東都) 경주의 부윤이 되니 이웃 고을이 곧 영천(永川)이라, 옛일들을 물어서 포은의 사당은 아직 있는 것을 알았으나 칠휴공의 글씨는 이미 다 떨어져 나가 흔적이 없어지고 돌 같은 데 글을 새긴 일은 본래 없었다. 아, 유유한 백 수십 년 동안에 칠휴공 한 사람을 기다려서 사당을 수리하였는데, 기록을 새긴 이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던가. 개연(慨然)히 그 고을의 군수 장군(張君)과 모의하여 돌을 장만하는 역할은 그 고을에서 부담하고, 거기에 새길 글은 나에게 청하였는데, 내가 상주가 되어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일이 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한탄스러워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뒤에 오는 군자에게 바랄 뿐이다.
●영묘(英廟 세종대왕)께서 문화 정치에 뜻을 독실히 가져 인재를 육성한 미덕이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났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선비들을 모아 날로 번갈아가며 숙직하도록 하여 토론(討論)하는데 대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대접하기를 융성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른 것에 비유하였다. 문충(文忠) 신숙주(申叔舟)가 하루는 숙직 당번이었다. 밤 2경쯤 되어서 임금께서 환관에게 명령하기를, “가서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 엿보고 오라.” 하니, 환관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지금 촛불을 켜고 글을 읽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연달아 두서너 번을 엿보도록 하였는데, 글읽기를 여전히 중지하지 않더니 닭이 울어서야 비로소 잠들더라고 보고하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잘 갖옷[貂裘]을 벗어 잠이 깊이 든 틈을 타서 덮어 주었다. 문충(文忠)이 아침에 일어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현묘(顯廟 문종대왕)가 오래도록 세자[承萃]로 있을 때, 춘추가 점점 높아가면서 학문에 빠져 낮과 밤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달이 밝고 인적이 고요할 때 혹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에 가서 그들과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때 성삼문(成三門) 등이 숙직을 하면서 갓과 띠를 밤에도 감히 풀어놓지 못하였다. 하루는 야반이 될 무렵에 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하는데, 홀연히 문밖에 신발소리가 들리더니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字))를 부르며 들어오므로 성삼문이 놀라 일어나 얼떨결에 맞아 절을 하였다. 이때 임금의 부자(夫子 공자)의 학문에 부지런함과 선비를 독실히 좋아함이 진실로 천고에 듣기 드문 일이었다.
●선묘(宣廟 성종대왕)가 글을 좋아하여 윗 대 두 임금 세종과 문종을 이어 유림(儒林)을 사랑하고 장려하는 것이 보통 규모에서 우뚝 솟아나서 당시에 문장에 뛰어난 선비들이 옥서(玉署 홍문관)에 가득 찼다. 매계(梅溪 조위(曺偉))ㆍ삼괴(三魁 신종호(申從護))ㆍ뇌계(礌溪 유호인(兪好仁)) 및 우리 선대부(先大夫 김흔(金訢)) 등이 더욱 융성한 사랑을 받아서 항상 지은 글을 달마다 적어서 올렸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으므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원하니, 특별히 쌀을 내려주어 그 부모를 넉넉하게 해 주었다. 뇌계가 올린 글 가운데,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는 막혀 있고 / 北望君臣隔
남쪽으로 오매 어미와 자식이 한데 모였도다 / 南來母子同
라는 시구가 있었는데, 임금께서 조용히 읊으며 이르기를, “호인(好仁 뇌계(礌溪)의 이름)의 몸은 비록 외지에 있지만 마음은 임금을 잊지 않고 있다.” 하였다. 매계(梅溪)가 상주가 되었을 때 제물(祭物)을 내려 영광스럽게 하여 은총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까지 미치게 하니, 사람마다 감격하여 흥기하였다. 인재를 고무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진실로 천고(千古)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영상(領相)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서 상주가 되어 관직을 그만두었다가 상을 마치고 다시 그 자리에 복직되어 규례대로 은명(恩命)에 사례드리니, 임금이 불러 합문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노모가 있으니 공사를 마치고 여가가 있거든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여 반찬을 장만하라.” 하였다. 또 밤에 불러들여 술과 과일을 내려 주시니, 성희안이 소매 속에다 감귤(柑橘) 십여 개를 넣어두었다가 술이 취하여 엎어져서 인사불성이었다. 중관(中官)이 업고 나갈 때 소매 속의 감귤이 떨어져서 땅에 흩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 다음날 감귤 한 광주리를 옥당(玉堂)에 내려 주시고 전교하기를, “어제 희안이 감귤을 소매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고 하였던 것이므로 다시 주는 것이다.”라고 하니, 성희안이 뼈에 사무치게 임금을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난을 안정시키는 일에 앞장서서 은혜를 갚고 충성을 다하였다. 선묘(宣廟)가 선비를 대접한 성의와 인재를 알아보는 총명이 진실로 신하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도록 한 것이고, 성희안이 위태로움을 제거하고 안정을 이루어 공훈이 사직(社稷)에 있었으니, 또한 임금이 알아주어 대우한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문종(文宗)ㆍ성종(成宗) 두 임금은 해서(楷書)로 쓰는 법에 정통하였다. 문종의 글씨는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진기(眞氣)가 있어 진(晉) 나라 사람의 오묘한 경지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돌에 새긴 두서너 가지만이 세상에 전할 뿐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한 글씨는 참으로 필적을 보기 드무니 애석하다. 성종의 글씨는 아리땁고 단정하여 조용히 조송설(趙松雪)의 법도에 맞았다. 임금께서는 또 묵화(墨畵)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모두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이어서, 모방하고 연습하지 않아도 신묘하게 옛법에까지 나아갔다. 정사하시는 여가에 고요하게 혼자 계실 때가 있으면 때때로 붓과 먹을 잡고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는데, 한 치만한 종이나 한 자 너비의 베 조각이라도 세상에 흩어져 있으면 그것을 얻은 사람들이 완상하고 첩첩이 싸서 두기를 큰 구슬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이 글씨를 조금 잘 썼는데, 성종께서 보고 칭찬하여 그의 고향에 글을 내려 종이와 붓을 주도록 하여 장려하니, 그 고을에서 빛나게 되어 놀라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러한 조그마한 기예(技藝)가 어찌 임금의 감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마는, 임금 자신이 능하다 하여 신하의 조그마한 기예도 버리지 않고 융성하게 권장하는 것이 반드시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과 서화와 백공의 기술을 게을리하지 않고 정밀하게 하였으니, 임금이 고무시키고 변화시키는 기틀이 단지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사이에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만일 성의로써 좋아함이 보통 인정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백방으로 권하고 엄하게 과정을 세워도 다만 시끄럽고 게을러지기만 할 것이다. 이러한 성의가 아니었다면 어찌 사람을 감동시키기를 이렇게 깊이 할 수 있었겠는가.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어릴 때부터 이미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런데 번잡한 것을 벗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고 고쳤다.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과 법도 밖의 교우가 되어서 미친 듯이 시를 읊고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중이 되었으나 불법(佛法)은 받들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미친 중이라고 지목하였다. 저자 거리를 지나다가 혹은 응시(凝視)하느라 돌아갈 것도 잊어버리고, 한 곳에 잠자코 서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보며 여러 사람들이 보는 것도 꺼리지 않으니, 아이들이 욕하고 비웃으면서 기와나 자갈을 던져 쫓아버리기도 하였다. 자기의 종과 전택(田宅)을 남이 빼앗아 가는데도 내버려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사람에게 돌려주기를 청하니 그 사람이 불응하자 설잠(雪岑) 자신이 곧 송사(訟事)를 하여 대면하여 싸우며 심문에 대답하는데 시끄럽기가 흡사 시정(市井)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끝내 변론해서, 승소하여 관가(官家) 문서가 다 이루어지자 품안에 품고 문을 나와 하늘을 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끄집어내어 찢어 개천 속에 던져버렸다. 그가 남을 희롱하고 세속을 업수이 여김이 이와 같았다. 광묘(光廟 세조대왕(世祖大王))가 내전(內殿)에서 법회(法會)를 열 때, 설잠(雪岑) 또한 뽑혀 들어갔다가 갑자기 새벽에 도망쳐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일부러 길가 변소에 빠져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사미(沙彌 나이 어린 중) 한 사람이 목청이 청초하여 능히 상성(商聲)을 내에 길게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돌아서 슬프게 느껴졌다. 매번 달 밝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읊게 하고 번번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마시고 취하면 말하기를, “우리 영묘(英廟)를 뵐 수 없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모든 중들이 추대하여 신사(神師)라 하고 복종해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는데, 하루는 일제히 청하여 말하기를, “제자들이 대사(大師)님을 오랫동안 모셨는데 아직도 한 번 가르치시는 것도 아끼시니 대사님의 청정법안(淸淨法眼 고상한 사상)을 끝내 누구에게 전하려 하십니까. 이 중생들이 방향을 모르니 금비(金篦 금으로 된 긁어내는 칼)로 긁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더욱 간곡히 청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마.” 했다. 그래서 크게 법연(法筵)을 열고 설잠이 가사(袈裟)를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하자 중들이 에워싸고서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경청하였다. 설잠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야 한다.” 하니, 중들이 무엇에 쓸지 몰라서 소를 끌어다 뜰 밑에 매어두었다. 설잠이 또 말하기를, “꼴을 가져와서 소 뒤에 두라.” 하고는 크게 웃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니, 소는 짐승 가운데 가장 미련한 것이다. 무식한 사람을 속담에, ‘소 뒤에 꼴 둔 것이다.’라고 한다. 중들이 부끄러워서 모두 물러가고 말았다. 근대에 시 짓는 중들 중에서는 설잠이 으뜸이 되었다. 시가 정중하여 소순기(蔬荀氣)가 적었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글을 지어 석실(石室)에 감추어 두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은 대개 기이한 것을 우의법(寓意法)을 써서 기록하였는데, 《전등신화(剪燈新話 중국 명 나라 초년에 지어진 단편소설)》 등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 1434-1494)은 젊을 때부터 기개(氣槪)가 침착하고 굳세어 길을 가면서도 한 번도 좌우를 보지 않고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아서 간혹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다. 일찍이 친구들과 글을 읽을 때 도둑놈이 밤에 그 방에 침입하여 옷과 신을 모두 가져 가버리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충정공은 홀로 태연한 마음으로 마음에 두지 않고 붓을 뽑아 벽에다 쓰기를, “이미 나의 옷을 빼앗아 갔으니 내 신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 이미 내 옷도 뺏고 또 내 신도 도둑질하니 내가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찬성할 수 없구나.” 하니, 식자들이 비로소 그 도량에 항복하였다. 과거에 합격[釋褐]하여 군기 직장(軍器直長)이 될 때 광묘(光廟)가 문관(文官)을 뽑아 천문학을 연구하도록 하니, 공(公)이 추보법(推步法 천체 운행하는 법칙)을 연구하였다. 때마침 일식(日食)을 보고, 양정공이 일식법(日食法)을 추산하여 적어서 올리면서 끝에 소장(疏章)을 달아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사냥놀이를 그만두고 언론의 길을 열라는 등의 일을 말하니, 임금이 급히 내각(內閣)으로 불러들여 소장 중에 있는 말을 지적하며, 거짓으로 위엄과 노기를 띠면서 시험삼아 이르시기를, “내가 백 일을 돌아오지 않았다든지, 밀가루로 희생을 대신한 실수가 없는데, 네가 어찌 나를 하강(夏康)과 양무(梁武)에 비유하느냐.” 하고, 역사(力士)에게 명하여 그를 끄집어 내려서 원장(圓杖)으로 치게 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리를 떨었다. 임금이 또 칼집에 든 칼을 무릎에 올려 놓고 명하기를, “내 칼이 칼집에서 다 빠지는 것을 보거든 곧장 목을 베라.” 하고, 서서히 칼을 빼니 서릿빛 같은 칼날이 사람에게 번쩍번쩍 비쳤다. 칼이 다 뽑혀 갈 때 역사(力士)가 도끼를 잡고 칼만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공은 여전히 변치 않고 질문에 따라서 틀림없이 대답하니, 임금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면서 이르기를, “참 장사로다. 늦게 만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잔을 드리라고 명하니, 공이 조용히 일어나 피를 씻어내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동여매고 술단지 있는 곳으로 가서 잔에 가득 부어서 올리는데 진퇴하는 품이 매우 찬찬하였다. 임금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더니, 마침내 정승에까지 이르렀다.
●정덕(正德) 을해년(1515)에 내가 직제학(直提學)으로서 일본 사신 남호(南湖)ㆍ서당(西堂) 등을 위로하는 길에 응천(凝川)에 이르렀다. 그때 국상을 당하여 화려한 일을 일체 버리고 망호당(望湖堂)에 혼자 있는데, 흰 달빛이 주렴으로 비쳐 들어오고 물과 산이 아득하였다. 하늘은 적적하고 인적은 고요한데 맑은 기운이 뼈에 사무친다. 기이한 흥이 가득 차 올라 마음에 울렁거려 감당할 수 없기에 입속으로 읊조려 한 글귀를 얻어 새벽에 일어나 붓을 찾으니, 필갑(筆匣) 안에 빈 붓대만 있고 붓촉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이불을 헤치고 옷을 털어 보아도 끝내 찾지 못하여 마음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말을 세우고 떠날 무렵에 다시 필갑을 열어보니 붓촉이 이전과 같이 붓대에 꽂혀 있었다. 그날 밤 누워 잘 때 그것으로 편지를 다 쓰고 내 손으로 필갑에 넣고 뚜껑을 덮었으니, 빠져 나갈 틈도 없었고 또 좁은 방에 장판이 유리쪽 같았고 깨끗한 벽에 아무런 다른 물건도 없었으니, 머리카락이나 부러진 바늘이라도 모두 더듬어 찾을 수 있었다. 삼면이 다 막혔고 남쪽만 비어 있었는데 내가 그 밑에 누워 있었다. 숙직하고 있는 하인들이 내왕도 하지 않았고, 필갑이 머리맡에 있어서 손으로 시종 만지고 있었으니 열고 닫을 사람도 없었다. 모르겠지만, 붓촉이 처음에는 어떻게 필갑에서 빠져나갔으며, 빠져나갔으면 어디에 숨어 있었으며, 또 어떻게 다시 필갑에 들어왔었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을 주사(主使)에게 하니, 주사가 말하기를, “옛말에, ‘시가 이루어지매 귀신을 울린다.’ 하고, 혹은, ‘신령이 운다.’ 하고, 혹은, ‘귀신이 근심한다.’ 하니,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가 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간 시인이나 문장가들이 읊조려서 벽 사이에 새겨둔 현판(懸板)이 비늘 같이 달리고 굴껍질같이 붙었으니, 그 희롱과 모욕을 받은 것이 귀신도 익숙해졌을 것인데, 나의 이 보잘것없는 한 시구(詩句)에야 무엇 때문에 그러했겠는가. 반드시 시도(詩道)에 빈약하기 때문에 손벽치며 놀리는 조롱을 면하지 못한 것이라.” 하고, 서로 한바탕 웃고 떠났다. 그때 이비중(李棐仲)이 주사(主使)로 있었다.
●성종 때에 흉년으로 인하여 모여서 술마시는 것을 금하였다. 때마침 늦은 봄이라 백화(百花)는 난만하고 달은 낮같이 밝았다.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이러한 좋은 밤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모여서 술먹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자건(紫巾 궁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자색 두건을 쓰고 있었다.) 두서너 사람을 시켜 장안의 다섯 거리를 수색하여 아뢰라.” 하였다. 마침 참판 송영(宋瑛)의 집에서 큰 모임을 베풀었는데, 당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여러 악기소리에 취하여 농담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심부름꾼 한 사람이 그 음악소리를 따라 갔으나 모두들 자건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심부름꾼이 문 밖에 서서 귀를 기울여 웃음소리를 듣고는 채빙군(蔡聘君)의 웃음소리인 줄 알고 뒷걸음질쳐 도망하였다. 이 심부름꾼은 본래 이조(吏曹)의 종으로, 채빙군이 이조 낭관으로 있을 때 말을 몰던 사람이었다. 다음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비로소 그 사실을 들었다. 권충민공(權忠愍公)이 채빙군에게 편지로 하례(賀禮)하기를, “덕성스럽다, 그대의 웃음이여. 복스럽다, 그대의 웃음이여. 그대의 웃음이 아니었더라면 일이 위태할 뻔하였네.” 하였다. 이것은 선비들 사이에 전해가며 웃음꺼리가 되었다. 당시에 조정이 아주 청명하여 사방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으며, 풍년이 들고 재물이 풍부하여 화한 기운이 가득하여 조정에는 충후(忠厚)한 기풍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서로 꼬집고 고소하는 풍속이 없었다. 사대부들이 신의로써 서로 대하고 시기하고 알력하는 일이 없어지니, 관청이 맑고 한가로워 아침이나 저녁이나 여가가 많아서 날로 글짓고 술마심으로써 서로 즐기게 되어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풍을 양성하기를 좋아하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풍류를 흠모하였다. 그때의 기상을 지금은 다시 볼 수 없으니, 미루어 생각하여 길이 탄식함을 금치 못하겠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나이 어린 사람 가운데서 학문에 가장 우수한 선비를 뽑아서 궁중에 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궁중의 서적을 마음대로 찾아 보도록 하여 장래에 쓰려 하였다. 광록시(光祿寺)에서 술과 성대한 밥상을 공급하고, 태자와 친왕(親王)들이 번갈아가며 그들을 접대하였다. 황제가 때로 친히 와서 논란을 벌이고는 백금과 말ㆍ의복 등의 물건을 내렸으니, 이들에 대한 융성한 은총이 일찍이 옛날에는 없던 것이었다. 우리 왕조 세종이 비로소 이 제도를 모방하여 서생들에게 특별히 휴가를 주어 독서하도록 하였으나, 거기에 선발된 사람은 전후 삼사명에 불과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이 규정이 점점 갖추어져 처음 여섯 명을 선발하여 오랜 휴가를 주어 장어사(藏魚寺)에서 그들 마음대로 책을 보도록 하였다. 중년에는 용산(龍山)의 황폐한 절간을 중수하여 한림원 학사들을 한 달씩 번갈아 쉬게 하였다. 그 뒤에는 다시 일곱 명을 뽑아서 일 년마다 교대하도록 하고 나라에서 술ㆍ음식ㆍ종이 같은 여러 가지 비품을 나누어 주었으니, 옛날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용산당(龍山堂)을 넓게 중축하려고 내신(內臣)을 보내어 시찰하고 짓도록 하였는데 담장ㆍ마굿간ㆍ부엌ㆍ창고 등 아무 부족한 것 없이 모두 완전하게 구비되었다. 조위(曹偉)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고, 또 편액에다 독서당(讀書堂)이라는 글자를 크게 쓰도록 하고 술과 풍악을 베풀었으며, 승지(承旨)를 보내어 낙성하도록 하여 춤추며 노는 지극한 즐거움이 만연히 무르익어서야 모두들 파하였다. 다음 날 아침 사례하는 소장을 써서 대궐에 보내는데 붉은 비단으로 싼 함을 메고 앞에 나가며 여악(女樂)이 따르게 하였으니, 임금의 하사를 영화로 여긴 것이다. 거리의 남녀들이 놀라 어리둥절하였으니, 진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유학의 일대 성대한 사건이었다. 극도로 성하게 되면 쇠망(衰亡)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인 만큼 중년에 연산군 시대에 폐지되었던 것이 다시 당대에 복구되었으니, 어찌 서당이 폐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된 것도 세상의 융성하고 침체한 풍조에 따라간 것이 아니겠는가. 용산당(龍山堂)의 폐허에는 이제 단지 빈 터만 남아서 정업원(淨業院)을 빌려 임시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 공부하는 곳이 동리와 저자 곁에 있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다시 동호(東湖) 북쪽 기슭에 깨끗한 터를 마련하니, 크고 아름다운 품이 용산의 옛 제도 보다 훨씬 뛰어났다. 나라에서 내리는 공급품의 풍성함도 옛날 법식보다 넉넉하였으나 차차 형식으로 흘러서 서당은 비록 폐지되지 않았으나, 언제나 비어 있고 그 일은 벌써 중요시 되지 않게 되었다. 나와 같이 못난 사람도 일찍이 시종 여러 선비들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점점 옛날 같지 못함은 어찌 이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워하며 많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내부(內府)에 수정으로 만든 잔 한 쌍이 있는데, 하나는 네모이고 또 하나는 둥근 것으로 크기는 반되 들이이고, 깨끗하기로는 티 한 점도 없다. 술을 따르면 금빛 물결이 가늘게 일어 찰랑찰랑 그 가운데 찬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맑기가 털끌 하나 섞이지 않은 듯하고 은은하기로는 물빛과 달빛이 서로 비춰 하늘에 닿은 듯하니, 정녕 세상에 보기 드문 절묘한 보배이다. 일찍이 중국 사신을 접대할 적에 이 두 잔을 붉은 비단으로 받침하여 금 그릇ㆍ옥 그릇과 나란히 하여 술상 위에 섞어 놓았더니,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보고 찬탄하여 그 중 하나라도 얻어가기를 원하였으나, 성종께서 조종조(祖宗朝)에서 보존해 온 것이라 하여 허락지 않으셨다. 어느 날 승정원에 술을 내릴 때 임금이 둥근 잔을 내어 따르게 하였는데, 그 부어지는 모습이 하늘에 노을이 일 듯하고 깨끗한 얼음이 투명한 듯하며 붉고 흰 빛이 서로 엉켜 안팎이 투명하니, 불피워 밥해 먹는 자의 입에 댈 것이 아니었다. 적영반(赤瑛盤)에 앵두를 담아 하사했다는 영화도 이에 비길 바 못 되며, 파리배(玻瓈杯)에 포도주 따르는 사치스러움도 어찌 이에 비길 수 있으랴. 모두들 경탄하여 이 진기한 잔을 받는 즉시 들이키니, 흠뻑 취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본시 술을 마실 줄 몰라 여러 차례 잔을 사랑스레 만지작거리면서 차마 놓지 못하고 하리(下吏)에게 차를 따르라 하기에, 하리가 끓는 물을 불쑥 부으니 잔 가운데가 갑자기 터지고 말았다. 모두들 술에서 깨어나 이를 알고는 하루 종일 애석해 마지않았다. 다른 네모난 잔을 독서당(讀書堂)에 내리면서 전교(傳敎)하기를, “그대들로 하여금 술만 먹게 하려 함이 아니라 나의 진중(珍重)한 뜻을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였다. 그때에 강혼(姜渾) 공ㆍ신용개(申用漑) 공ㆍ김감(金勘) 공ㆍ김일손(金馹孫) 군 등이 독서당에 있었는데, 엎드려 그것을 받아 갑(匣) 속에 싸 간직하면서 오랫동안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되 이에 관한 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고, 금으로 잔대를 만들고 거기에 명문(銘文)을 새기기를, “청정함은 변색되지 않고, 비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으며, 내려주신 물건을 덕(德)으로 삼아 오래도록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하라.” 하였다. 그 뒤로는 술이 내려오면 임금이 예(例)대로 하고 나서 술잔을 한 바퀴 돌리자마자 곧 갑속에 간직하니, 혹시 떨어트려 부수지나 않을까 해서이다. 연산조(燕山朝) 때 독서당이 폐지되자 잔을 옥당(玉堂)으로 옮기고, 옥당이 없어지자 또 시강원(侍講院)으로 옮겼다. 성조(聖朝 중종(中宗))가 중흥하자 다시 옥당에서 독서당으로 옮겨 왔는데, 그것이 옥당에 있을 때 구경하던 자가 실수하여 한 쪽이 약간 흠이 생겨 지금까지도 보는 자들이 한탄하는 바이다. 독서당의 존폐(存廢)가 무상하니 잔도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그것을 간수하는 사람이 여러 번 바뀌어서 보존에 태만하기 쉬워 위태로운 순간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아직도 거의 온전히 보존하여 성종의 보화를 보배로 여기지 않고 어질고 착함을 보배로 여기시던 거룩한 뜻을 빛내게 되었으니, 어찌 지극한 보배를 신들이 아껴 여지껏 사문(斯文)을 위해 보존하여 성상의 은택을 영원히 불멸하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의 내시 이진(李珍)과 왕헌신(王獻臣)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을 때 연창(延昌) 김감(金勘)이 수찬(修撰)으로서 반접(伴接)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진이 그의 상을 보고, “크게 벼슬하겠다.” 하더니, 다음 해에 이진이 다시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을 때는 연창이 이미 금띠를 두르고 승정원의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진이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전번의 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대는 화를 면할 상이요.” 하였다. 그때 채빙군(蔡聘君 : 채수 1449-1515)이 서경(西京)의 관찰사로 있어 내가 선비로 장인을 모시고 있었는데, 조서(詔書)가 처음 서경부(西京府)에 당도할 때 처남 채생(蔡生)과 함께 몸을 주렴 뒤와 행랑에 숨기고서 구경하고 있었다. 중국의 선비 장월(張鉞)이란 자가 자못 학식이 있고, 자태 또한 단정하였는데, 우리를 보고 말을 건네고 싶어 하였으나 통하지 않으므로 눈짓으로 서로 만나보고 싶은 뜻을 전하며 부채에 몇 자 적어 서로 보였다. 이튿날 장월이 이진에게 그 일을 말하여 이진이 반접사(伴接使)에게 만나보기를 청하여 통역관으로 하여금 우리들을 들어오도록 하였다. 이진이 술과 안주를 차려 몇 순배 들고 나서 장월로 하여금 종이 쪽지에, “중국 사신이 묻는 바는 몇 가지 경전(經典)에 능통하냐.” 하고 쓰게 했다. 내가 답하기를, “오경(五經)을 대략 안다.” 하니,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의 글을 몇 줄 끄집어내거늘 그 뜻을 대충 강론하고, 내가 또 몇 가지 물음에 글로써 답하니, 이진이 “중국의 과거 시험에는 각각 경전 하나만 익히면 될 뿐, 이처럼 다 능통할 필요는 없다.” 하고, 자리에서 바싹 다가앉아 내 손을 잡고 손금을 보며, 또 앞상과 뒷상을 보는데 혹은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고루 보고 혹은 손가락으로 만져도 보고 칭찬하기를, “어찌 장인을 이렇게 닮았어, 관상법에 의하면 귀한 상이다.” 하였다. 다음으로 채생(蔡生)을 보는데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듯이 말하기를, “얼굴은 아버지에 비할 수 있는데, 예쁜 점으로 말하면 아버지보다 조금 낫다.” 할 뿐, 그의 길흉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진이 서울에서 수개월 머문 뒤 돌아갈 때 장인이 대동강에서 배로 맞이하였는데, 이진이 갑자기 묻기를, “안찰사(按察使)의 아드님은 잘 있소.” 하였다. 이때는 이미 채생이 죽은 지 수개월 뒤라 사실대로 말했더니 이진이 위로하기를, “나는 이내 그럴 줄 알았소. 그대는 두 사위가 있으니 부디 그것을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하고, 이어 나의 소식을 묻더라는 것이다. 그가 숙녕관(肅寧館)에 도착하여 또 장인에게 묻기를, “작은 사위는 어찌 서경에서 나를 보지 않소.” 하니, “예법(禮法)에 사사로이 배알함을 금하오.” 하고 대답하니, 그가 보지 못하고 감을 두 번 세 번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연창(延昌)은 그때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어떤 재앙이나 면할 수 있었던 것인데, 마침내 연산주의 뜻에 거슬려 영남 방면 안찰사로 좌천되었으나, 연산주의 학정이 날로 심하여 화가 거의 박두한 것 같았다. 때마침 일이 생겨 불려 올라오게 되었으나, 곧 반정(反正)의 거사가 일어나 훈공(勳功)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일의 순조로움이 마치 도와주는 자가 있는 듯하였으므로 화를 면하리라던 말이 또한 들어맞게 되었다. 그 6년 뒤는 정덕(正德) 무신년(1508년)이었다. 이진이 또 사신으로 와서 장인을 보고, “둘째 사위는 어느 관직에 있소.” 하므로, 답하기를, “이조 정랑이요.” 하였다. 왕년에 길가에서 우연히 그를 한 번 만나보았을 뿐이오, 일이 또 오래되었는데, 모르겠지만 이진이 어떻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은근함이 있는 듯하다. 아마 그가 관상법에 자부심을 가져 그 기술이 들어맞는지를 시험하고 싶어서인 듯하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예전에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을 남궁(南宮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대할 때,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 1445-1504)가 예조 판서, 장인이 참판이었다. 잔치가 파하자 그 사신이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상법(相法)에 의하면 판서는 흉하고, 참판은 좋다.” 하기에, 통역관이 말하기를, “판서는 혼자만이 출세한 것이 아니라 자제 셋이 모두 급제하여 중직을 맡고 있어 그 복이 세상에 드문 바인데 어찌 흉하다 하는가.” 하였더니, 사신이 한참 말이 없다가,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광양군은 키가 크고 몸이 비대하여 그 모습을 보면 역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알 수 있었으므로 사신의 말을 듣고는 모두 허망한 소리라고 웃고 말았는데, 그 얼마 안 되어 광양군의 온 집안이 화를 당하게 되고, 장인은 마침내 무사하게 되어 편안히 늙어 돌아가셨으므로 그가 남의 길ㆍ흉ㆍ화ㆍ복을 잘볼 줄 알았다. 점치는 것[卜]은 그 수(數)를 미루어 보는 것이고, 상보는 것[相]은 그 모양을 보아 아는 것으로, 마치 촛불을 비추고 수를 세는 것 같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미리 정해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써 도모하고자 하여 마음과 힘을 기울여도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그 과정을 원망하고 허물하는데, 이는 미혹되어 헛수고만 하는 짓이라 하겠다.
●정덕(正德) 갑술년(1514년)에 닭에 관한 이상스러운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 혹은 암탉이 변하여 숫탉이 되고 혹은 세 발 달린 병아리가 생겨나는 등 이러한 이변(異變)들이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漢) 나라 사람 경방(京房)이 지은 《주역》의 〈요(妖)〉라는 제목에, “임금이 부인의 말을 잘 들으면 괴상한 닭이 생겨난다.” 하였다. 한 나라 원제(元帝) 때에 암탉이 변하여 숫탉이 되는데 울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왕비(王妃)가 황후(皇后)로 될 것이다.” 하더니, 정말 왕비의 존귀함이 보통이 아니었으나 황후까지는 미처 오르지 못하였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천자로 있을 때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위황후(韋皇后)가 정권을 농락할 때도 세 발 달린 닭이 있었다. 이처럼 괴상한 닭이 생기면 모두 여자의 화가 있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는데, 을해년 봄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돌아가셨으니 변란(變亂)치고 이보다 더 큰일이 있으랴. 승지 정성근(鄭誠謹)은 평소 곧고 결백하여 일편 단심으로 도서 편찬에 정력을 쏟았음을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연산군 때 벼슬에서 떨어져 불우한 처지로 있으면서 비분강개하여 통속적인 노래를 지어 밤중이면 슬프게 불러 그의 임금님에 대한 사랑과 못잊어 애태우는 마음을 붙였다. 내가 그 노래 가사를 따서 적었으니, 그 일절에, “나는 자네 마음 생각하는데 자네는 내 마음 같지 않네. 자네 마음 진정코 나와 같다면, 천하에 이런 일 어찌 있으랴. 서로들 생각함이 모자란다 한들, 오히려 질투나 말았으면.” 하였고, 그 이절에, “도리(桃李)꽃은 은광(恩光)에 아첨하느라 다투어 빛깔을 곱게 하네. 늦 국화인들 어이 꽃이 아니련만, 적막하니 늦은 때 누가 살펴주나. 서릿바람 화초를 흩날려 버린 뒤에, 외로운 향기 가을 뜰에 피었어라.” 하였다. 그 노래 소리가 처량하면서도 곱고, 그 가사가 원망하면서도 역시 시인의 남긴 회포라 하겠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은 슬프고, 한(漢) 나라 가의(賈誼)의 〈장사부(長沙賦)〉는 괴로움을 읊은 것이다. 〈이소경〉과 〈장사부〉의 전아(典雅)함과 정승지(鄭承旨)의 이 속된 노래가 비록 다르다 하겠으나, 머나먼 이들의 마음은 천년에도 서로 통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고 목이 메어지게 함은 매한가지라 할 것이다. 옛날 문충(文忠)이 어머니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노쇠하심을 민망히 여겨 목계가(木鷄歌)를 지었는데, 익재(益齋)가 가사를 짓기를, “나무로 조그마한 닭 한 마리를 새겨, 젓갈로 집어 벽 위에 올려 놓으니, 이 닭이 울어 시간을 알리니, 어머님 얼굴에도 해 지는 듯하네.” 하였다. 이 노래가 지금까지 악보에 전해져 오관산곡(五冠山曲)이 되었으니, 뒤에 악보를 만드는 이가 있으면 혹시라도 이것을 수집하여 현악(絃樂)에 연주하면 아마도 목계(木鷄)와 더불어 전해질 수 있으리라.
●허암(虛庵 정희랑(鄭希良))이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났는데 특히 시를 잘 지었다. 늦게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갔는데, 남의 길흉(吉凶)을 잘 알아 맞추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무오사화보다 더 심하리라.” 하고, 승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산조(燕山朝)의 사화(史禍)가 무오년에 일어났는데, 허암이 일찍이 용만(龍灣)으로 귀양갔던 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덕수현(德水縣) 남쪽에서 상중에 있던 어느 날 남녀 노비를 모두 내보내되, 그 중 어른은 나무하고 아이는 나물을 뜯게 하여 저녁거리를 장만하게 하고 자기 혼자 빈 집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늙은 종 한 명이 집에 심부름꾼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지체없이 돌아오니 허암이 없었다. 이웃 사람을 불러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단지 남강(南江)즉 조강(祖江)의 상류 에서 낡은 신발 한 켤레가 모래톱에 벗겨져 있는 것만 발견될 뿐이었다. 필시 강물에 빠졌으리라 하여 어부와 수군을 동원하여 배를 타거나 헤엄을 치기도 해서 강 아래와 윗쪽을 모두 찾아 보았으나 결국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얼마 후 연산주(燕山主)의 학정이 더욱 심하여 마구잡이로 죽였으니,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것으로 허암이 살아 있었다면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취를 스스로 감추어 죽지 않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묘향산(妙香山)의 어느 절에서 한 중을 만났는데, 비록 스스로 춥고 배고픈 시늉을 하지만 속된 중의 거동이 아니어서 마음속으로 괴이쩍게 여기다가 훗날 다시 그를 찾아보니 이미 행방이 묘연했으니, 의문의 여지없이 그가 허암일 것이다.” 하고, 또 다른 이는, “길가 한 여관의 벽에 두 절구시가 적혀 있는데,
새가 낡은 담구멍을 기웃거리는데 / 鳥窺頹垣穴
사람들은 석양에 물 깃는구나 / 人汲夕陽泉
산수로 집을 삼는 사람 / 山水爲家客
천지 어느 곳에 있는가 / 乾坤何處邊
비 바람에 전날 놀랬기에 / 風雨驚前日
문명 세계를 지금 저버리노라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를 노닐면서 / 孤笻遊宇宙
시끄러움 꺼려 시마저 짓지 않노라 / 嫌鬧並休詩
하였다. 이 시도 필시 허암이 지었을 것이다.” 하였다.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런 시를 지어 남의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지, 허암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모든 사람이 익사하면 시체가 떠오르거나, 혹은 떠서 강변으로 밀려나오는 법이니, 만약 그가 과연 투신자살하였다면 반드시 강가에서 밀려나오는 법이니, 뒤에도 끝내 찾지 못하였음은 무슨 일인가. 빈 신발만 강변에 남겨서 자기의 익사한 사실을 남들에게 보이려고 한 점은 더욱 의심스러운 바이다. 신기할 정도로 앞을 잘 알아맞춘 그였으니, 어찌 화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머리를 깎고 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하에는 이처럼 기이한 재주있는 사람이 없은 적이 없으니 반드시 죽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아직 상복(喪服)을 벗기도 전이며 아버지 또한 살아계신데, 과연 세상을 등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화가 가족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차라리 인륜(人倫)을 어지럽히는 죄를 범하여 짐짓 가문이라도 보전할 계책을 꾀한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할 일이다. 내가 덕수(德水)에서 귀양살이 하던 곳이 허암의 고향과 가까웠는데, 그곳의 유식자(有識者)가 모두들 그와 같이 이야기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들의 궤변을 좋아하고 허탄한 일을 즐기는 것은 진실로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황당한 일을 믿고 천륜을 버려 까닭 없이 물에 뛰어든다는 일은 더욱 믿기 어려운 것이다.” 하니, 이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다.
●옛날 고려조(高麗朝)에 불교(佛敎)가 성행하였을 때 요승 학열(學悅)의 무리가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여 온 세상이 미쳐 날뛰게 하였으므로 떠받듦이 어느 다른 중보다 으뜸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학열 중이다.” 하였는데, 학열이라는 발음은 우리말로 무엇을 한다는 뜻과 흡사하니, 이것은 할 만한 것은 중이라는 것으로, 선망과 찬탄어린 말이다. 근세에 와서는 선비를 벼슬자리에 추천하는데 협잡이 많다. 시골의 무뢰배와 어리석고 요망한 것들이 스스로 현량(賢良)으로 은퇴해 있다고 하면서 자기 신분의 높음을 표방하고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를 내려다 보아 처음에는 한 계급의 벼슬도 없던 자가 의레 육품(六品)에 뛰어 오르곤 하였다. 노필(盧㻶)이란 사람이 있어서 처음에는 겨우 주부(主簿)였는데 갑자기 지평(持平)과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여 권세를 날린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필 벼슬이다.” 하였는데, 노필이란 발음은 높일이라는 우리말과 비슷하므로, 높일 만한 것은 벼슬뿐이라는 것으로, 이 또한 부러워하며 찬탄해 마지않은 말이다. 이와 같이 대(對)를 맞추는 공교로움이 마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 이야깃거리가 될 만하다. 과거에 연산주(燕山主)가 교동(喬桐)에 유폐될 때 시중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 사모(詐謀)인가, 거동이 교동인가. 흥청 운평(興淸運平 연산조에 미인을 모집하여 흥청과 운평 등으로 등급을 나누었음.)은 어디 두고서, 가시덤불 밑으로 돌아가는가.” 하였다.
●연산조에는 관리들이 사모(紗帽)에 충성(忠誠)이란 두 글자를 모두들 써 붙이게 하였는데, 쓰는 사모(紗帽)와 속인다는 뜻의 사모(詐謀)와 음이 같다. 또 연산주가 방탕하고 표홀하여 사방 팔방으로 쏘다녔다. 모든 출입하는 것을 거동(擧動)이라 하였다. 팔도의 군현은 모두 기생과 악기를 베풀어놓고 그 중에서 으뜸가는 미인을 뽑아 이원(梨園)으로 올리고 그들의 이름을 운평(運平)이라 부르며 운평 가운데 왕의 사랑을 받으면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흥청망청 또 연산주를 교동에 안치할 때 가시덤불로 주위를 둘렀는데, 가시[荊棘]란 말이 우리말의 각시[妻]란 말과 비슷하며, 밑[底]이란 뜻은 또 사람의 음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항간에 나도는 조롱과 해학들인데도 그 속에는 세상을 비웃고 풍자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어 한 시대의 일을 잘 묘사함으로써 실재하였던 사실을 여실히 들추어 내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세속에 나도는 가요를 채집하여 백성의 여론을 살피는 일은 이와 같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다.
●근래 채(蔡)씨란 성을 가진 한 학생이 훈련원(訓練院)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해가 져서 어둑어둑할 무렵에, 거리에 나섰는데 길에는 행인의 발걸음이 점차 드물어지고 달빛이 어스름하여 먼데 있는 사람의 모습은 희미하게 볼 수 있으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만큼 떨어져 한 부인이 길에 서 있거늘 서로 한동안 바라보다가 채생이 천천히 다가가 보니 소복에 비녀를 나지막이 꽂았는데 얼굴은 밝고 요염한 것이 사람에게 비쳐 왔다. 채생이 정신이 황홀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짓을 넌지시 해 보고 손으로 더듬어 보아도 여인은 놀라거나 싫어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몸을 바싹 붙이고 말하기를, “좋은 밤 한가로운 풍경에 귀한 분을 이렇게 만나니 솟아나는 정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순간적으로 미친 짓을 저질렀소만 진(晉) 나라의 한수(韓壽)가 향(香)을 훔친 일이 무어 그리 죄가 되리오. 부디 조금이나마 용서해주시오.” 하니, 부인이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군자(君子)는 어떤 분이시기에 오다가다 만난 아녀자에게 이다지도 정중하신가요. 미천한 계집에게 혹시라도 뜻이 계시다면 제가 가는 곳으로 따라오시겠나이까.” 하였다. 채생은 놀랍고 즐거움이 지나쳐, “이것이 바로 감히 청할 수 없다는 것이요. 아직 낭자의 성씨조차 모르기에 굳게 잠긴 깊숙한 집을 상상만 하여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소.” 하니, 부인이, “이미 정을 허락한 바이온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하고, 소매를 잡고 같이 걷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돌아 개천 하나를 건너니 큰 저택이 바라보이는데 흰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채생을 잠깐 기다리게 하고 부인이 먼저 들어가고 나니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인적도 뚝 끊겼다. 채생이 주위를 배회하며 기다림에 지쳐 놀란 듯 잃어버린 듯도 하여 마음을 채 가눌 수 없었다. 한참 만에 머리를 갈라 땋은 한 소녀가 문을 반쯤 열고 나와 채생을 인도하여 여덟 겹 문으로 들어서니 흰 돌로 기둥을 한 누각이 솟아 있는데, 집의 짜임새나 그 웅장한 모습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았다. 그 옆에 깊숙하고 아늑한 방이 있는데 녹색 창과 자주빛 발이 영롱하여 눈이 부셨다. 부인이 문앞에 나와 맞으며, “모두 잠들기를 기다리느라고 너무 오래 서 계시게 해서 혹시 의심이나 하시지 않았는지요.” 하고 소매를 끌어 앉혔다. 사방 벽을 살펴보니 쳐놓은 병풍과 걸린 서폭(書幅)의 색깔이 눈부시며, 수놓은 자리와 꽃방석이 아름답게 깔려 있고 화장대와 화롯불의 성대함이 모두 세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채생의 마음이 괴이하고 눈이 현혹되어 여기가 필시 신선이 사는 진경(眞境)이 아닌가 의심하여 스스로 부끄럽고 위축되어 얼굴이 찌푸려짐을 어쩌지 못하였다. 부인이 소녀에게 술을 들여오라고 명하여 주안상이 들어왔는데 모두 진기한 것들이었다. 쌍룡으로 얽혀진 귀가 달린 백옥(白玉)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채생에게 권하면서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미천한 계집의 운명이 기구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자라서도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여 유모에 의탁하여 살다 보니 규방(閨房)의 법도(法度)에 익숙치 못합니다. 매양 고요한 밤에 풍경을 완상하며 긴 한숨 속에 지내다 동무를 따라 길거리에 나섰는데 홀연히 치닫는 마차와 뛰는 말이 길을 메우고 달려 오기에 길가로 조금 피한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잃고 동무마저 놓쳐 홀로 길을 방황하던 차에 다행히 그대의 멋있는 모습을 뵙고 또한 은근한 정을 보여 주심을 알고서 저도 모르게 법도를 이같이 어기게 되었으니, 만약 그대가 저를 천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평생을 모시어 이 몸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하였다. 채생이 일변 마시고 일변 감사하여 미칠 듯 기뻐 말문이 막혀 더듬거릴 뿐, 속으로 이는 필시 하늘에서 내려준 복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말을 그칠 줄 모르는데, 밤 시각을 알리는 종은 이미 세 번을 울렸다. 술은 거나하고 말소리도 끊어지니 소녀가 살며시 들어와 채생의 각대(角帶)와 초립(草笠)을 받아 횃대에 걸고 금침(錦枕)을 펴고 촛불을 내어 간 뒤 채생이 부인을 덥썩 끌어안고 두 사람이 즐기는데 벌이 노는 듯 나비가 춤추는 듯이 얽히기를 다한 후에도 서로들 기이한 상봉을 못내 기뻐하여 퉁소 불던 한 쌍이 달밤에 만나던 기쁨도 어이 이 같으랴 싶었다. 시간은 새벽을 재촉하나 즐거운 흥은 아직도 멀었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머리를 때리듯 요란하여 놀라 눈을 뜨니 자기가 돌다리 아래 누워서 흙투성이 돌을 베고 떨어진 거적을 덮고 있어 코를 찌르는 악취가 앞을 가리며, 벗은 초립과 각대는 다리 기둥 틈에 걸려 있었다. 아침해가 이미 솟아 인마(人馬)가 시끄럽게 내달리고 땔나무 실은 수레 두 대가 쿵쿵거리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채생이 소스라쳐 놀라 미친 사람처럼 집으로 되돌아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아직도 망연히 마음이 울적하여 마치 하늘에 오르다 떨어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빼어 혹시나 한 번 더 만나볼 수 있을까 초조해 하였으나 곧 요귀에게 홀린 줄을 알고 무당이 굿을 하고 의원이 뜸도 뜨는 등 약물과 기도를 백방으로 하여 겨우 병이 낫게 되었다. 그 다리는 서울 안 큰 개천 하류에 있는 것으로 다리 이름은 태평교(太平橋)라 한다. 채생을 만나본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퇴재(退齋)란 분한테 상세히 얘기하니, 퇴재가 듣고 탄식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던가. 요귀는 사람을 묘하게 홀리느니라. 추악하고 요괴로움을 꾸며 미모로 나타나고 간악하고 위장된 일을 오히려 미담(美談)으로 바꾸며, 악취를 향기롭게 하고 더러운 흙투성이를 훌륭한 궁실로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홀리고 눈을 어지럽혀 갖은 수법으로 현혹시켜 유혹하니 기개가 지극히 크고 강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들 유혹되지 않겠는가. 채생이 계집과 만나게 된 것을 스스로 기뻐하고 있을 때 만약 옆에서 누구 귀에다 대고 요귀임을 알려 주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또 구하여 주려고 하더라도 오히려 노여움만 사게 될 것이고, 심지어는 귀신의 힘을 빌어 해치려 하였을 것이니, 그때 만약 다리 위의 천둥 소리만 없었던들 다리 밑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천하에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민심을 문란케 하는 것이 귀신보다도 더한 일이 많은 것이니, 채생의 그렇게 당한 유혹 정도는 이미 수없이 많았으리라. 다행히 약물과 기도로 채생의 병은 고쳤지만, 만약 어느 누가 하우(夏禹)의 솥 만들던 일을 돌이키고 우저(牛渚)의 일을 비추어 세상의 요귀로 하여금 대낮에 그 요망스러운 짓을 못하게 하여 천하의 뭇 사람들을 채생과 같은 홀림에서 풀어 줄 수 있을까.” 하였다.
●국조(國朝)에 거문고 타는 악사(樂師) 이마지(李馬智)란 자가 그 솜씨가 당대에 으뜸이었다. 장지(長指)로 제일궁(第一宮)을 짚어 줄을 튕김에 가볍고 무거운 억양이 무상하게 변하니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의 맑고 흐리며 높고 낮으며 가늘고 굵으며 성글고 잦은 소리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가락의 기이한 변화가 당시의 악사들보다 출중하여 음악을 즐기는 인사들이 다투어 맞이해 갔다. 매양 달밤이면 빈 대청에서 손 가는 대로 한 가락 타면 바람이 일고 물이 소용돌이치듯 하며, 하늘은 차고 귀신의 휘파람 소리와도 같아 듣는 자로 하여금 머리칼이 쭈삣쭈삣 서게 하였다. 어느 날 자리에 앉은 이들이 모두 정승이거나 귀한 손님들이었다. 이악사 이마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한 곡조 타니 구름이 가듯 냇물이 흐르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다가 갑자기 툭 트이는가 하면 홀연히 닫히며 펴지고 오무라듦이 변화무쌍하여 좌상에 앉은 이들이 음식맛을 잃어 술잔을 멈추고 귀 기울여 정신을 모으고 우두커니 앉은 모습들이 흡사 우뚝 선 나무와 같았다. 갑자기 변하여 고운 소리를 내니 버들개지가 나부끼듯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듯 광경이 녹아날 듯 고운 듯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취하고 사지가 사르르 풀리는 듯하였다. 또 다시 높이 올려 웅장하고 빠른 가락이 되니 깃발은 쓰러지고 북은 울리는 듯 백만의 병사(兵士)가 일제히 날뛰는 듯하여 기운이 뻗치고 정신이 번쩍 들며 몸을 일으켜 춤추게 되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변하여 상성(商聲)으로 크게 울리니 숲들을 흔들고 나무도 뒤흔들 듯하여 산과 골짜기가 다 우는 듯하고 치조(徵調)로 되니 원숭이가 수심 짓고 두견이 원망하는 듯하여 나뭇잎이 우수수 지니 진정 감개가 처량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속눈썹을 적셨다. 이어서 다시 줄을 바로잡고 진(軫)을 옮겨 한 번 쭉 그으니 우레 소리가 뚝 그친 듯, 남은 소리가 잔잔히 울려 창틈이 바르르 떨더라. 거문고를 밀어 무릎 아래에 놓고 옷깃을 여미고 슬픈 얼굴을 하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인생 백년도 잠깐이요, 부귀 영화도 한순간이다. 영웅호걸의 의기(意氣)도 그가 죽고 나면 뉘 알리오. 오직 문장(文章)에 능한 사람은 그의 글을 남기고 글씨와 그림에 능한 사람은 그 자취를 비교하여 저작자(著作者)들의 능력 정도를 평가할 수 있으니 천년 만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이다. 허나 나 같은 이는 몸이 한낱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나면 연기가 사라지고 구름이 없어지듯 하리니 비록 이마지가 음률에 능했다 하나 뒷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그 재주를 알아주랴. 옛날 호파(瓠巴)와 백아(伯牙)는 천하에 오묘한 기술을 가졌으나 죽고 난 그날 저녁 이미 그 소리를 다시 들어볼 수 없었거늘, 하물며 천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랴.” 하고는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내어 쉬니 자리에 앉은 이들이 모두 눈물로 옷깃을 적시더라. 이마지 같은 이는 정말 옹문주(雍門周)와 비등한 기술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의 신기한 곡조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든 것이었는데,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두 곡을 몰래 배운 자가 있어 오늘까지 전해져 이마지의 곡조라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하여 마침내 그 온존함을 잃어 버렸으니, 마치 광릉산(廣陵散)의 곡조가 전해지지 않음과 같다. 또 여자 악사 조이개(曹伊介)란 이가 있어서 가야금 타는 솜씨가 기묘하여 이마지(李馬智)와 동시대에 살면서 각각 그 기술의 극치를 이루었으므로 나라에서는 악사의 명수로 이 두 사람을 일컬었다고 한다.
●정덕(正德) 무인년(1518) 5월 15일 임금님이 친히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정사를 보셨다. 어떤 사람에게 직책을 맡기는 일을 정(政)이라 함. 그때는 좌의정 김응기(金應箕) 공(公)이 탄핵되어 면직되었으므로 그 자리가 오래도록 비고 보충되지 않고 있었다. 하루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1538)과 우의정 신용개(申用漑 1463-1519)를 불러 좌의정을 천거하라고 하자, 두 분이 똑같이 나의 계부(季父) 충정공(忠貞公)당시에 찬성(贊成)이었음. 을 추천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근시(近侍) 중에 널리 의논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어서 즉 승지 문근(文瑾)이었다. 정부(政府)ㆍ육조(六曹)ㆍ한성부(漢城府)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들을 모아 각기 천거해 보도록 하니, 육조와 한성부에서 말하기를, “대신에 관한 일과 정승을 임명하는 일을 어찌 하층 관료들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성종대왕께서 정승을 임명하시려 할 때 조회(朝會)에 입시(入侍)한 재상들로 하여금 추천하도록 명하시자, 당시 정승의 한 사람이던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못났으나 삼공(三公)의 무거운 책임을 맡고 있사오니 정승을 천거하는 일은 신에게 하문하심이 마땅하올 일이니, 아래로 육조(六曹)의 의견까지 들으실 필요가 없는 줄 아뢰오.’ 하므로 성종대왕께서는 사과하고 마침내 그의 말을 채택하셨으니, 이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입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모두 사양하여 기다리지 않고 물러갔다. 정광필ㆍ신용개 두 정승이 큰 명을 받들어 먼저 추천한 사람과 찬성 이계맹(李繼孟)ㆍ판서 남곤(南袞) 등을 추가하여 올리자, 임금님께서는 특별히 호조 판서 안당(安瑭)이 어떠냐고 물으시니 시종(侍從)들이 비밀리에 찬성하여 성취시켰다. 이날 정사에서 안당(1461-1521이 이조 판서의 후보로 들어갔다가 즉석에서 정승 발령을 받고 나왔다. 그리고 이장곤(李長坤) 공을 불러 이조 판서에 대치시키고, 또 우승지(右承旨) 김정(金淨)을 뽑아 참판(參判)으로 삼고, 한충(韓忠)을 응교(應敎)로 승진시키고, 김구(金絿)를 전랑(銓郞)에 전직(轉職)시켰으니, 이는 모두 왕의 뜻이었다. 모두 나이가 젊은 신진의 선비들이라서 예리한 기상이 있고 일하기를 좋아하나, 세상일에 경험이 적어 모든 일을 도모하고 명령을 시행할 때 반드시 옛일을 끄집어 내어 삼대(三代)의 정치를 당장 실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시행해 오던 헌장(憲章)을 많이 뜯어 고치려 하는데, 늙고 경험 많은 신하들은 이루어진 법을 그대로 지키기를 고집함으로써 의견이 완전히 엇갈리게 되었다. 신진 인사들은 재상을 가리켜, “자기네들이 무슨 일을 하리오.” 하면서, 오로지 안당만을 촉망하여 그들의 진로를 개척하려한 지 오래되었고, 한충과 김구도 당시에 촉망되는 인사여서 때를 노리던 젊은이들이 바야흐로 벼슬 한 자리 얻을 준비를 하며 서로 축하들을 하고 있었다. 그날 임명장이 수여될 때 홀연히 우레 소리와 같은 지진이 일어나 대지가 떨고 건물이 흔들려 마치 작은 배가 풍랑을 만나 기우뚱거리다 전복될 듯하여 인마(人馬)가 놀라 자빠지고 그 중에는 기절하는 자도 많았다. 성안의 집들이 무너지고 가지런히 널려 있던 단지나 항아리 같은 그릇들이 서로 부딪쳐 부서진 것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지진이 그쳤다 일어났다 해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빈 뜰로 뛰쳐나가 압사(壓死)될 것을 피하였다. 이로부터 그 기세가 차차 수그러지기는 하였으나 날마다 여진이 계속되어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쳤으니, 이는 팔도가 모두 그러한 바로 일찍이 보기 드문 이변이었다. 그 뒤 일이 순조롭지 못하여 안당과 김정은 죽임을 당하고 한충도 곤장을 맞아 죽고, 김구는 섬으로 귀양갔으며, 이장곤 공도 쫓겨나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하늘이 인간에게 경고한 바가 진실로 거짓됨이 없는가 보다. 아, 두려운 일이로다.
●옛날부터 항간에 동요(童謠)가 유행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무 뜻도 없고 아무런 실정(實情)도 없는 데서 나오며, 인위의 작용이 내포되지 않는 그런 자연적인 천성에서 순수하게 우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동요가 어떤 미래의 예언이 되어 그것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 나라 태종 때에는, ‘저 남산에 가서 돌을 치는데 돌을 치는 정(釘)이 남지 않을 것이다.’라는 동요가 있었다. 정(釘)이라는 것은 돌을 치는 기구이다. 그런데 머지않아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일로써 주살(誅殺)되었다. 남산이란 남은을 가리키는 말이고, 정(釘)은 정(鄭)과 같은 음으로 정도전을 말한 것이다. 여(餘) 자의 풀이는 우리말로 남은(南誾)과 음이 비슷하니, 정도전과 남은이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 된다. 성종조에, ‘망마다승슬어이라[望馬多勝瑟於伊羅].’라는 동요가 유행하였는데, ‘망마다’라는 것은 속담에 사절(辭絶)한다는 말이고, 위의 사(辭) 자는 굳이 사절한다는 사 자이다. ‘승슬어이라’라는 것은 속담에 염증이 나서 물리친다는 말이니, 모두 단절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윤서인(尹庶人)이 죄가 있어서 폐위(廢位)되었다. 연산조(燕山朝)에, ‘견소의로고굿기로고 (見笑矣盧古仇叱其盧古)ㆍ 지금 관리들 장부에 천민이나 서족들의 이름자를 적을 때 방언(方言)에 바른 소리가 없어서 적기 어려운 것은 ㅅ[叱]자를 빌려서 조음(助音)으로 적으니, 이것은 그러한 예와 같은 것이다.패아로고(敗阿盧古).’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세 개의 노구를 합쳤다.”라 하였으니, 노구는 쇠탕기로 대(大)ㆍ중(中)ㆍ소(小) 세 겹의 탕기가 한 갑에 들어 있던 것을 세속에서 삼합로구(三合爐口)라 하는 것이다. 노고(爐古)라는 것은 말이 끝날 때 어떤 사실을 결단(決斷)하는 말로 노구(盧口)와 음이 비슷하여 같은 말 세 가지가 중복되는 것이 노구 셋이 합쳐진 것과 같은 것이다. ‘견소의로고(見笑矣盧古)’라는 것은 행위가 무도한 짓을 많이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이고, ‘굿기로고(仇叱其盧古)’라는 것은 방언에 더러운 행동을 하여 난잡하고 부정(不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패아로고(敗阿盧古)’라는 것은 방언에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망가뜨리는 것을 말한다. 한 말이 끝나면 반드시 노고(盧古)라는 말로 사실을 단정하는 것은 속어체(俗語體)가 그런 것이다. 이 동요의 전체의 뜻은 연산군이 많이 패도(悖道)하고 황난(荒亂)하여 이미 이루어 놓은 대업(大業)을 망가뜨려서 몸이 끝내 보전되지 못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연산군 때에 또 다음과 같은 동요가 있어서, ‘매이역가미애역가수묵묵(每伊斁可每伊斁可首墨墨)’이라 하였으니,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과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등이 모두 남산 아래 묵사동(墨寺洞)에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나라를 평정하는 계책을 가장 먼저 수립한 사람들이다. ‘매이(每伊)’라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존장(尊長)을 불러 말씀을 고할 때 쓰는 말이고, 역(斁) 자는 임금의 이름자와 같은 음이고, 가(可) 자는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부를 때 조사로 쓰는 말이며, 불러서 어버이나 임금에게 고하는 뜻이기도 하다. ‘수묵묵(首墨墨)’이라는 것은 그 계획을 세운 우두머리가 묵사동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 역시 진(晉) 나라의 오마남도(五馬南渡)의 동요와 같은 것이다. 나라의 흥폐는 천명(天命)과 인심의 향배(向背)이기도 하여 반드시 먼저 그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니, 옛날부터 그러한 것이다. 그전에, ‘기객야야만손야재(其客也耶萬孫也哉).’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천하고 비루하여 가소로울 정도였다. 백성 가운데 만손(萬孫)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 양평군(襄平君)이라고 하면서 조정에 자수하여 말하기를, “옛날 사약을 내릴 때 유모가 양민의 집에서 비슷한 아이를 데려와 대신 죽게 하였다. 내가 사실은 양평군으로 연산군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관리를 시켜 사실을 조사하여 결국은 근거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해서 주살되었다. ‘객야야(客也耶)’라는 것은 ‘이 손님은 어떤 손님인고’라는 뜻이며, ‘만손야재(萬孫也哉)’라는 것은 이 손님이 곧 만손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 미친 사람인데 무슨 관계로 동요로써 미래를 예언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러고 보면 천지간의 모든 사물의 성패와 생몰(生沒)에도 모두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묘한 이치를 알고 은미한 조짐을 식별할 줄 아는 선비라야 가히 앉아서도 미래를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 서로 바뀌는 이치는 역시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근래의 ‘슬파곤(瑟破鯀)’이란 동요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과 나의 장인 채나재(蔡懶齋 : 채수1449-1515)는 모두 인품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으며 원래부터 산림(山林)의 기상이 있었다. 함께 승정원에 계실 때 대수롭지 않은 일로 같이 벼슬에서 물러나 당나귀에 짐을 싣고 젊은 종으로 하여금 봇짐과 항아리 술을 지게 하고서 산천을 유람하였다. 마침내 동쪽 관동(關東) 방면으로 발길을 돌려 풍악산(楓嶽山)에 올라 동해에 해뜨는 광경을 구경하고 으슥한 바위틈과 깊은 골짜기로 신선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헌 갓을 젖혀 쓰고[蓬累] 봉루는 갓이다. 《노자(老子)》 본전에 ‘군자가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갓을 쓰고 간다.’고 했음. 갓끈을 드리우고[垂條] 수조는 실로 만든 갓끈이다. 포의망혜(布衣芒鞋)로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나, 행장이랬자 별 것 없어 금마문(金馬門 홍문관) 앞에 선 봉지의 손님[鳳池客 임금의 글을 대신 짓는 사람.]과 같을 리 없다. 길을 지나감에 일부러 성읍(城邑)을 피하여 다니니 그들을 알아보는 이도 없었다. 다만 아름다운 경치를 따라 가고 싶은 곳만 찾아 다녀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은 가릴 바 아니었다. 하루는 흥에 겨워 흥청거리며 서산에 해지는 줄을 모르다가 당황하여 갈 곳이 없어 어느 현의 향교를 찾아가 하룻밤 쉬고 갈 수 있기를 간청하였다. 그때 마침 교관(校官)이 출타하였다가 돌아오니 제생(諸生)들이 닭을 잡고 술을 걸러 선생의 노고를 쉬게 할 연회를 마련하였다. 교관은 코가 주독으로 벌겋고 수염이 텁수룩하며,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띠를 느슨히 매었는데 왼쪽으로는 백목(白木) 안석에 기대고 오른손으로는 주점 아가씨를 끌어 안고 있다. 어린 학생은 뒤에서 부채질을 하고 당장(堂長) 학사(學舍)의 제생(諸生)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을 당장(堂長)이라고 한다. 은 앞에서 술을 따라[進鍾] 술잔에 귀가 없고, 자루만 있는 것을 세속에서 종(鍾)이라고 한다. 술이 거나해지자 마음이 흡족하여 부산하게 떠들어 대다가 [唱噱]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창거(唱噱)라 한다. 이 분들이 대문간에 서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늙고 지친 선비[措大]들이라 생각하여 같이 어울려 한 잔 하자고 하며 제생(諸生)들의 오른편에 앉게 하고 커다란 바가지에 술을 가득 떠 권하며 말하기를, “선비들이 늦게 왔으니 마땅히 몇 잔 더 들어야 할 것이오.” 하며 상스러운 농담에 우스갯소리로 마치 어린애 대하듯 한다. 공들도 같이 마시면서도 언동을 삼가는데 교관이 아가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노래도 하게 하고 술도 권하며 말하기를, “선비들은 나의 이렇게 어긋난 짓을 탓하지 마시오. 공부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필경은 이 지경이 되었소. 하나 여기에도 그런대로 멋이 있으니 당신네들도 뒤에는 아마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자 가(歌) 자로 연구(聯句)를 지어 한 구(句)를 부르면 받아 부르기로 합시다.” 하여, 나재(懶齋)가 먼저 짓고 허백(虛白)이 따라 지으니, 교관이 그것을 읊어 내겨가면서 손뼉을 치며, “비록 채나재(蔡懶齋)의 문장이라도 어찌 이보다 나으랴.” 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나재의 문명이 높아 사람들 입에 자자하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안찰사의 하인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두 승지(承旨)분들이 여기 오시지 않았는가.” 하니, 교관이 비로소 알고 놀라 생땀을 흘리며 숨어 버렸다. 또 공들이 포천(抱川)의 어느 길가에서 아침밥을 지으며 풀숲에 앉아 말안장을 내려 말을 쉬게 하고 짐을 풀어 소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촌사람이 밭이랑을 가로질러 걸어 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하기를, “사직(司直)들은 영안도(永安道) 시장에 사는 소 거간꾼이 아니오.” 하므로, 허백(虛白)이 일부러 느릿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촌사람이, “쌀 한 섬으로 소 한 마리를 바꾸어 줄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허백이, “다 팔아버리고 단지 남은 것이라곤 짐 실은 소 뿐이오.” 하니, 그는 욕하며 가버렸다. 창도역(昌道驛)에 이르러 병으로 며칠 동안 체재하면서 개천가의 작고 반반한 돌을 주어 바둑알로 하고 종이에 선을 그어 바둑판을 만들어 같이 간 무관(武官) 이소(李昭)와 함께 세 사람이 앉아서 바둑을 두며 즐기고 있는데, 역졸(驛卒) 한 사람이 다가와 옆에 걸터 앉는다. 형색이 우락부락 사납게 보이는 자로, 매어 놓은 소와 말을 풀어 문 밖으로 쫓아내면서 큰 소리로 욕하기를, “어떤 놈들이 감히 짐승을 제멋대로 매어두어 뜰을 이렇게 더럽히는가.” 하기에, 허백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는 어찌 사람을 이다지도 박대하는가, 뒷날 우리가 찰방 벼슬이라도 한 자리 할지 어떻게 아는가.” 하니, 역졸은 하늘을 쳐다보고 깔깔대고 웃으며, “나는 이미 늙었소. 또 영안도(永安道)의 사직(司直)으로서 찰방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하였다. 대개 벼슬 못하는 북쪽 사람들이 그들의 대열 가운데서 특히 성적이 좋은 자가 있으면 서위(西衛)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으므로 남들이 그를 높여 부르기를, ‘사직이라.’ 한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허백이 이 도(道)의 안찰사가 되고, 이소(李昭)가 이 부(府)의 수령이 되었다. 역졸이 보니 모두 전에 자기가 욕한 이들이라 대경실색하여 말하기를, “영안도(永安道)의 사직을 나는 이제 다시는 가벼이 대하지 않겠다.”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하였다.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나 고결한 인격자로서 천한 곳에 묻혀 낮은 벼슬자리에 앉아서 세정을 완미(玩味)하고 세속을 기롱(譏弄)하는 이는 적지 않은데, 세상 사람들이 겉모양만 보고 그를 능멸하고 모독하는 일이 허다하다. 교관(校官)이 선비들을 선비로 대우하지 않는 일이 드물 것이고, 역졸이 공들을 사직(司直)이라 욕한 일도 마찬가지이니, 이는 각별히 조심할 일이라 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시를 주어 주고 받는 것은 단지 그 뜻을 화답할 따름이었다. 시에 차운(次韻)하여 짓는 것은 중고(中古) 때부터 처음 시작된 것으로 같은 운(韻)을 왕복하여 거듭 쓰되 갈수록 뜻은 새로운 것이었다.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대단히 성하였다. 그러나 사(詞)와 부(賦)에 같은 운을 써서 짓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에 오는 중국의 사신들을 보면 풍속과 민요를 보고 짓는 것이 많아 대개가 모두 이런 식으로 화답된 것이다. 비록 사와 부 같은 대작이라도 반드시 운을 그대로 써서 지었으니, 명 나라 사신인 진감(陳鑑)이 〈희청부(喜晴賦)〉를 지었다. 세조(世朝)가 그 사람을 어렵게 여겨서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을 불러서, “너가 한 번 지어보라.” 하셨다. 괴애가 자기 집에 물러나와 대청에 홀로 누워 정신을 가다듬고 움직이지 않은 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서 골똘히 생각하기를 며칠을 두고 한 후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붓을 잡게 하고 써서 올리니, 글이 아주 찬란하게 뛰어났고 글의 뜻이 잘 통했으며 운(韻)으로 말하면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세조가 이것을 읽고 기쁘게 생각하고 영성(寧城)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윤색하라 하였다. 영성이 몇 구절을 마음대로 고쳤더니, 괴애가 고친 것을 보고 웃으며, “어찌 천하에 추녀인 무염(無鹽)을 그린 그림으로 천하 미인인 서시(西施)의 단장을 보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감이 이것을 보고 과연 크게 칭찬하고 고친 부분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본인이 쓴 글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괴애의 이름이 중국에 퍼져서 후일 괴애가 중국 조정에 들어갔을 때 한림원(翰林院)에서 아패(牙牌)를 두른 학자들이 빙 둘러서서 괴애를 보고, “이 사람이 김희청(金喜晴)이다.”라고들 칭찬하였다. 조사(詔使) 예겸(倪謙)이 왔을 때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그와 더불어 교류하였다. 신숙주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는데 그 표지에는 작은 해서(楷書) 글씨로 범옹(泛翁)문충공의 자(字) 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으니, 이것은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쓴 글씨였다. 예겸이 그것을 보고, “필법(筆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문충(文忠)이 거짓말로, “나의 벗 강경우(姜景遇)가 쓴 것이오.” 라고 대답하였다. 예겸이 종이를 꺼내어 주며 그 사람의 글씨를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문충이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예겸이 말하기를,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왕손(王孫)과 공자(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비해당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에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 하면 중국 사람들이, “당신 나라에 제일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글을 구입하려 하오.” 하였다. 이래서 청지(淸之)비해당의 자(字) 의 글씨가 중국에서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진감이나 예겸 같은 사람은 감식력(鑑識力)이 신같이 깊어서 한 자 한 구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 성종(成宗) 때에 호부(戶部) 기순(祈順)이 황제의 명을 반포하러 오면서 도중에 어떤 사물을 볼 때마다 흥이 나서 시를 읊었는데, 원접사(遠接使) 사가(四佳) 서선생(徐先生) 이름은 거정(居正)임. 은 마음속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신으로 왔던 일을 다 마친 그 다음날 사가(四佳)가 한강에서 놀기를 청하니 기순이 “좋다.” 하였다. 도중에 시로 화답하는 것은 손님이 주인보다 먼저 하였으나 내일 강가에서는 주인이 손님보다 먼저 시를 지어 흥을 돋구기로 하였다. 사가가 미리 율시(律詩) 한 수를 짓고, 또 일찍 지어 두었던 영천명원루(永川明遠樓) 시를 적고는, “이놈의 늙은이 항복을 받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강가 정자로 건너갔을 때 술은 아직 반도 들지 못했다. 자리에 앉은 채 시를 읊조리는 시늉으로 어떤 구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찾아 시 한 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바람과 달은 황학을 따라가지 않고 / 風月不隨黃鶴去
아지랭이 긴물결은 백구를 보내 온다 / 煙波長送白鷗來
하니, 기순이 즉석에서 붓을 휘둘러,
백제의 지형은 강물을 따라 다하고 / 百濟地形臨水盡
오대산 물줄기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 五臺泉脈自天來
하였다. 그리고는 사가를 돌아보며, “이게 맞습니까.” 하였다. 필봉(筆鋒)이 빼어나 대항할 수 없자,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괴애도 참석하여 화답하고 있었는데 퇴(堆) 자로 운(韻)을 달아 고심하여 읊었으나 생각이 고갈되어 눈썹을 찌푸리고 사람을 돌아보며, “생각도 나지 않고 뜻도 다해 버렸으니 내가 죽을 지경이구나.” 하고, 오래 되어서야 겨우 글을 엮기를,
술이 쌓여 천 병이요, 고기는 백 무더기라 / 崇酒千甁肉百堆
하였다. 그 뒤에 또 두(頭) 자 운을 쓰려는데, 괴애가 말하기를,
검은 구름이 비를 안고 머리 위에 다다랐다 / 黑雲含雨已臨頭
하니, 기순이, “가히 고기 백 무더기를 씻을 만하구려.” 하였다. 배를 타고 노를 띄워 물결 따라 내려오니 강산(江山)이 정신을 사로잡고 잔과 접시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붓을 잡고 정력을 기울이는 통에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서쪽 해는 반쯤 산에 걸렸고 저녁 물결이 약간 높았다. 취해서 눈 깜박할 사이에 배는 잠두봉(蠶頭峯) 아래 이르렀다. 기순이 눈을 뜨고, “여기는 지명이 무엇이오.” 물으니, 통역관이, “양화도(楊花渡)라 합니다.” 하였다. 즉석에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는데,
사람은 죽엽주(竹葉酒) 잔 중에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
배는 양화나루터를 향하여 비꼈도다 / 舟向楊花渡口橫
하니, 사가(四佳)가 그 운에 맞추어,
산은 높은 회포를 안은 듯 길게 비스듬히 누워 있고 / 山似高懷長偃蹇
물은 힘찬 붓과도 같이 다시 출렁거리네 / 水如健筆更縱橫
하였다. 두 사람의 교묘하고 빠른 속도가 거의 대적할 만하여 마치 두 영웅이 서로 진을 치고 지구전을 하는 것처럼 결판이 쉽사리 나지 않아 기습(奇襲)과 정공(正攻)으로 변화무쌍하여 꾀를 서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칼을 맞닥뜨리고 싸움이 붙자 번개같이 빠르고 뇌성같이 날쌔어 진격하고 물러나는 기세가 깃발과 북 사이에 있는 것이다. 비록 당당하게 팔진(八陣)의 진을 치고 부채로 지휘하였지만, 사마중달(司馬仲達)의 계산도 실수 하나 없었으니 역시 항복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순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생이 중국에 계셨더라면 의당 시 잘하는 사람 4,5명 중에 들 것입니다.”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임진강에서 배를 타고 사가가 먼저 장편의 고시(古詩)를 지으니, 기순이 두루마리 끝을 탁자 위에 두고 손을 짚어가며 천천히 보아 내려가는데 한 구를 보면 시 한 구를 지어 손과 눈이 한꺼번에 내려가면서 그것을 잠깐 사이에 다 보자, 운에 맞추어 지은 시도 다 지어졌다. 운을 다 맞추고서도 붓은 계속 멎지 않고 연이어 종이가 다 되도록 시를 짓는데 마치 쌩쌩 바람이 불고 비가 갑자기 내리는 것처럼 또 한 편의 시가 이루어졌다. 사가가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종사관(從事官) 채나재(蔡懶齋)를 돌아보며, “신속하고도 많이 지었다.” 하며, 이마를 약간 찌푸리고는 곧 이어 두 수를 지으니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 다할 줄 몰랐다. 저쪽에서는 한 번 부르면 화답하는 마음이 겹겹이 나와서 많이 짓는 것으로 승부를 삼으려 하니 이것은 정말 세상에 드문 민첩한 솜씨이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서재상(徐宰相)의 안부를 물었다. 사간(司諫) 최보(崔溥)가 일찍이 탐라(耽羅)에서 표류되어 태주(台州 중국 복건성 지방)에 이르러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로 거슬러 올라온 적이 있는데, 남쪽 사람들 역시 묻는 사람이 있었다 하니 사가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안찰사로 있던 성허백당(成虛白堂 : 성현)은 모습이 훌륭하지 못하였다. 동월이 안찰사를 주(州)의 관리인 줄 알고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성허백이 지은 시에,
붉은 비 뜰에 가득한데 복사꽃 이미 떨어졌고 / 紅雨滿庭桃已謝
파란 연잎 물결에 점 일으키며 연꽃이 처음 떠오르더라 / 靑錢點水藕初浮
하였다. 동월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고는, “이런 사람이 어째서 주(州)의 관리밖에 못하고 있는가.” 하니, 반접사(伴接使)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우리 나라에서는 풍화(風化)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으뜸가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관(州官)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동월의 풍월루기(風月樓記)에, “관찰사가 속으로 빼어나고 문아(文雅)하다.” 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돌아갈 무렵 압록강에서 전별 잔치를 할 때에 쌍방이 모두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빛이 있었다. 충정공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푸른 연기는 고요하게 떠 있고 풀은 무성한데 / 靑煙漠漠草離離
바로 강두에서 석별할 때라 / 正是江頭惜別時
말없이 서로 보는 정 한 없으니 / 黙黙相看無限意
이생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 즐길고 / 此生何處更追隨
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서로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등이 와서 등극(登極)의 조서를 선포할 때, 사신을 접대하였던 용재(容齋)이택지(李澤之) 가 처음 연회에서 자리를 같이하며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어 밀자, 당고가 팔을 뻗어 그 잔대를 잡고 약간 밀쳐서 물러서게 하니,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당고의 음락시(飮酪詩)가 있었는데, 용재가 차운(次韻)하여,
왕가 8백 리에 비하면 / 若比王家八百里
서생이 너를 용서한 것이 또한 많다 / 書生貸汝亦云多
하였더니, 이때부터 교제가 밀접해지고 늘 시단의 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요즈음 중국에 어떤 예부랑(禮部郞)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가혹하게 금지하고, 문장이 해외로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를 예의와 문헌이 있는 나라라고 하여 이적(吏狄)들처럼 낮추어 보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까닭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 문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 사이에서 고하(高下)를 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들에게 모두를 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
●조수(潮水)에 대한 학설은 학자들의 설이 모두 같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자루나 젓대 같은 것이 오무려졌다 펴졌다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하고, 혹자는, “사람이 호흡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바다 미꾸라지가 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 때문에 조수가 생긴다.” 하고, 불교에서는, “신룡(神龍)이 변화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니, 모두 황당무계하여 옳은 것이 없다.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는, “물이란 땅의 혈맥으로 기(氣)에 따라 나왔다 물러났다 한다.” 하였고, 노조(盧肇)의 《해조부(海潮賦)》는, “조수는 해를 따라 생기는 것이니, 해가 물을 격동시키면 조수가 생기고 달이 해에서 떨어지면 조수가 커지는 것이다.” 한다. 여양공(餘襄公 송(宋) 나라 여정(餘靖))이 설(說)을 지어서 이상의 학설들을 비난하면서, “달이 임하는 곳에 물이 따라가니 달이 동서쪽으로 가게 되면 물은 동남쯕으로 불어나며, 달이 북남쪽으로 가게 되면 조수도 남북쪽으로 평평하게 되어, 저쪽이 기울어지면 이쪽이 가득 차곤 하여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니 조수의 동향은 달과 관계 있는 것이지 해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이 설을 상세하게 주장하게 되자 학설이 정설로 되었다. 소자(昭子 소옹(邵雍))는, “땅이 숨쉬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 동해에는 조수의 차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선대 학자들의 학설이 모두 성세하고 옳은 것은 아니니 이러한 이치는 끝내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 나라 남쪽 문경현(聞慶縣)에 우뚝 솟은 산이 있어서 그 위에 약간 오목하게 들어간 토구(土口)가 있는데, 그곳의 흙은 언제나 건조한 상태여서 축축하게 음습한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매일 한 번씩 샘물이 솟아올라 큰 시내를 이루고 흐르다가는 곧 멈추어 버리는데, 물 한 방울 남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물이 솟아나는 시간이 이르고 늦은 것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으나, 물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절도가 있는데, 그곳을 조천(潮泉)이라 불렀다. 이곳은 문경현에서도 가장 산이 험준한 곳이며,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지형이 점점 높아져서 아주 높은 곳이다. 샘은 그 산 위에 있으므로 조수와 서로 통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아주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물은 땅 속에서 흘러 넘쳐 나오는데 어느 곳이고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하여 비록 산마루처럼 지극히 높은 곳일지라도 샘의 맥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사람의 혈기(血氣)가 온 몸에 두루 흘러서 위로 뇌와 정수리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것과 같다. 만약 혈기가 역행하면 종기가 생기는 법이고, 기운이 위로 솟으면 코피를 흘리게 되니, 모두 그 순조로움을 얻지 못하여 옆으로 터지기 때문이다.
혹 땅의 기운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 물줄기의 맥이 그 안에서 막히게 되어 옆으로 터지거나 위로 새어나가면 격렬하게 넘쳐서 나가는 것이므로 땅기운의 호흡이 올라가고 내려가는데 따라 물이 나오고 들어가기 때문에 잠깐 나왔다가 잠깐 들어갔다 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비유하면, 물을 마구 들어부어 그릇에 가득 담아두고 그 위에 단단한 뚜껑을 덮어 놓는 것과 같으니, 혹 사물의 격동으로 위로 튀어서 틈 있는 곳으로 나오는 것이 막히고 빽빽하여 그 순한 성질을 잃게 되는 것으로, 많고 적은 양과 빠르고 느린 속도가 한결같지 못함은 진실로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하였다. 의성현(義城縣)에 또 빙혈(氷穴)이 있으니, 입하(立夏) 이후에는 얼음이 얼어서 점점 단단하게 되었다가 입동이 지나면 얼었던 얼음이 점점 녹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고 상도에 반대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른 매화는 동지(冬至) 전에 피는 것이니, 정자(程子)는, “물체란 제각기 하나의 건곤(乾坤)을 갖고 있다.” 하였다. 여름에 사물이 생장할 때에도 도리어 말라붙는 것이 있으니 겨울날 추울 때에 생겨나는 것이 있음은 괴이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다. 사물을 이치란 진실로 한결같지 않기가 이러하며, 또 기(氣)와 유(類)를 가지고 서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이란 음기의 지극한 것인데, 양기(陽氣)가 물 가운데 모래 있는 곳에서 먼저 생겨나기도 하니, 소자(蘇子 소동파)의 눈에 대한 시에, “이제서야 양기가 흐르는 물에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모래 위 한자 남짓한 강에 얼음이 없더라.” 하였으니, 지금 우물의 물을 보면 겨울에는 언제나 따스하고 여름에는 차가운 것이다. 이 이치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물이 음(陰)이라는 것은 곧 양(陽)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물속이 밝은 것은 음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며, 음은 같은 음끼리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약한 음을 만나게 되면 성하게 되며 성하면 반드시 양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약한 음을 만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구괘(姤卦)는 음의 시초이니 곧 단단한 얼음이란 뜻이 있고, 복괘(復卦)는 양의 시초이니 곧 양춘(陽春)의 뜻이 있는 것이다. 늙은 것은 물러가고 젊은 것은 나아가는 것이며 성한 것은 쇠하게 되고 쇠해진 것은 다음에 성하게 되는 법이니, 천하의 사물은 그렇게 된 징조에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시초를 삼간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목전의 일에 가리워져서 이러한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빙혈(氷穴)을 보면 그와 같은 이치가 훤히 더욱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치를 궁리하는 것은 배우는 자의 일이니 바로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물은 지극히 음(陰)한 것이지만 혹 온천이 있는 것과도 같다.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물의 근원에 유황이 있으면 그 샘물이 곧 온천이 된다.” 하는데, 지금 유황을 물 속에 넣어도 물이 더워지지 않으니, 이 말을 근거없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신룡(神龍)이 하는 짓이라 하나, 황당무계하여 가소롭기 짝이 없다. 불의 성질은 지극히 뜨거운 것인데도 옛날 선비 중에는, “양주(涼州)에 서늘한 불꽃이 있으니, 음양(陰陽)의 정기가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다.” 하였다. 물속이 밝은 것은 음(陰) 안에 양(陽)이 있고, 불의 중심이 어두운 것은 양(陽) 안에 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니, 온천이 있다면 같은 이유로 서늘한 불꽃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듣자 하니, 채빙군(蔡聘君)이 지리산 상봉에 가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나무가 있길래 그 나무를 꺾어서 땔감으로 사용하여도 불이 뜨겁지 않으므로 따라 온 사람 가운데 손발이 언 사람이 있어서 그 불 속에 넣고 지졌으나 단지 미지근할 뿐이어서 끝내 지져지지 않았으며, 곡식으로 밥을 지어도 밥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그 나무의 성질이 산만(散漫)하여 기운이 없기 때문에 불이 뜨겁지 않는 것이다. 뽕나무 같은 것은 화기(火氣)가 더욱 세니, 불은 모두 그 나무의 성질에 달려있는 것이지 불의 성질이 달라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서늘한 불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불의 성질이 서늘하다면 비록 뽕나무를 땐다 하더라도 덥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물고기는 원래 물에 사는 것이므로, 물을 얻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리하다는 뜻을 지극히 심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천(四川) 지방에는 나무을 타는 물고기도 있다고 하니, 이와 비슷한 것은 많고도 많아 이루 다 들 수 없다. 그래서 선대의 선비들도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선대의 선비가 말하기를, “높은 산에 소라 껍질이 있고, 혹 어떤 것은 돌 속에 있는 것도 있는데, 이러한 돌은 옛날에는 흙이었으며, 소라라는 것은 물속에 사는 생물이다. 그러던 것이 낮은 곳이 변하여 높게 되고 부드러운 것이 변하여 단단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나도 일찍이 산 위를 파서 흙 속에서 물이 마찰된 바둑알 만한 작은 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 역시 천지개벽 이전에는 물속에 있던 물건인가고 의심했던 적이 있다. 소옹(邵雍 1011-1077)의 말에 의하면, “12만 9천 6백 년이 일원(一元)이니, 12만 9천 6백 년 이전에 천지개벽이 한 번 있었다. 그때 산천(山川)ㆍ초목(草木)ㆍ인물(人物)ㆍ벌레와 물고기 및 크고 작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들이 수풀처럼 빽빽하게 천지에 가득 차 있어 마치 오늘날과 같았다. 그러다가 다시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 큰 기운이 한꺼번에 불어닥쳐서 천지간을 한없이 크게 흔들자, 가볍고 깨끗하여 위로 올라갔던 것은 탁(濁)해져서 내려 앉고, 엉키고 메워서 내려갔던 것은 터져서 새어나왔다. 산과 냇물이 솟아나고 메워지고, 사람과 물건은 모두 멸하고 말았다. 음양이 혼합하고 원기가 융화된 뒤에 다시 천지의 개벽이 일어나 탁하여 밑에 있던 것들이 다기 맑아져서 하늘이 되고, 터져 새어나간 것들이 다시 엉켜 땅이 되었으며, 산이 솟고 냇물이 흘렀으며 사람이 화생(化生)하여 번식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물이 모여서 큰 덩어리로 엉켜 굳어지는 것은 어떤 큰 기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큰 기운이 흩어지면 천지가 모두 혼합되어 흔적 없이 되어 버리는데, 하물며 그 사이 한 물체가 변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광로에 비유한다면 강하고 단단하고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두 녹여버리는 것과 같은데, 하물며 천지간에 이미 흩어진 기운이 어찌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있겠는가. 이래서 천지조화란 무궁무진하여 이미 간 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고, 다시 오는 것이 그 뒤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지금 저 쇠를 녹이는 기구인 풀무[鞴]비(鞴)는 곧 지금의 피배(皮排)로, 대장장이가 이것을 사용하여 불을 일으키는 것이다. 《강목(綱目)》에 나온다. 를 보면 부채같은 불꽃이 동(銅)을 녹여서 틀에 부어 물건을 만들게 된다. 그때는 반드시 쇳물이 녹아 물같이 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응결되어 녹지 않은 것이 없어야만 능히 둥글거나 모난 대로 틀에 맞도록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용해되지 않은 찌꺼기가 있다면 어찌 하자가 없는 완전한 기구가 만들어지겠는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흙으로 만든 것이 모양이 매우 조잡하지만 진흙이 익지 않으면 이그러지고 찌그러져 그릇이 완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천지의 조물(造物)에 있어서 어찌 한 개의 소라나 하나의 작은 돌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고서야 합하고 흩어지고 녹이고 붓고 열고 닫혀져 천지 형상의 변화가 생기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천지개벽 초에는 홍수가 범람하여 물이 산까지 차고 구릉 위로 올라와 소라나 작을 돌들이 산의 돌 사이에 붙게 되었는데, 물이 다 빠지고는 구릉과 계곡이 변하고 바뀌어 지난번에 높던 것이 씻기고 무너져서 다시 낮아지고, 낮은 것은 흘러오는 모래가 쌓여서 다시 높게 되었기 때문에 물속에 있던 물건이 높은 산의 토석(土石) 속에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옛날에 그림 그리는 자는 당 나라 이전에는 그리 많지 않고, 그 필적들도 오래되어서 전해오지 않았다. 당 나라 오도자(吳道子)의 시대는 송 나라와 시대가 그리 멀지 않아서 소자첨(蘇子瞻 이름은 식(軾))이 그래도 한두 그림을 보았을 따름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천년을 내려온 오늘날에 있어서랴. 중국도 이러한 형편인데, 하물며 외국에 있어서랴. 지금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당 나라 사람의 그림이 있다고 하며, 또 오도자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아마 이것은 모두 진짜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옛날 그림을 얻었는데, 그것은 즉 명황단전도(明皇端箭圖)로 세월이 오래되어 비단 절로 파손되고 이지러져서 그 형태만 겨우 남아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창연(蒼然)하여 그림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나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형체와 쭈구러진 모양들이 분명하여 알아볼 수 있으며, 생동하는 오묘함이 정말 형용할 수 없다. 그 위에 송 나라 사람이 글을 써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이것은 당 나라 신징(辛澄)의 작품으로, 인물의 풍체와 모양들이 자연에서 나왔으니 역대에 인물화를 그린 사람들이 누가 이 그림에 미치리오. 진실로 우러러볼 만한 것이다.” 하였다. 그것이 정말 당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오래된 오묘(奧妙)한 필치는 후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라 생각한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그림을 논하려면 마땅히 그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였는데, 오도자의 그림에 중유(仲由 자로(子路))가 목검(木劍)을 이고 있는 것이 있고, 염령공(閻令公 염립본)의 그림에 왕소군(王昭君)이 유모(帷帽)를 쓰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목검이 진(晉) 나라 시대에 처음 만들어지고 유모가 본조(本朝)에서 만들어진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니, 이것이 모두 그림의 병폐인 것이다. 단전도(端箭圖)에 있는 시희(侍姬)와 위사(衛士)들의 관상복색(冠裳服色)의 제도도 퍽 기이하고 오래된 것으로 근고(近古)의 화가들이 일찍이 본 것들이 아니다. 만약 후세 사람이 옛날 그림을 그린다면 그 당시의 제도를 잊고 그리게 되어 위에 든 예와 같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당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면 당시의 제도를 모르고 그릴 리는 없지만, 당 나라 사람들의 의복 양식을 지금 상세히 알 수 없으니 박식한 군자가 그 진가(眞假)를 가려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고금(古今)에 이름난 화가들의 성명으로는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를 들 수 있는데 자(字)는 장강(長康)이고, 어릴 때의 자는 호두(虎頭)로, 진능(晉陵) 무석(無錫) 사람이다. 육탐미(陸探微)는 오(吳) 나라 사람이다. 사혁(謝赫)이 강좌(江左 강동(江東)으로 양자강 이남) 사람들의 그림을 논평하여 고개지와 육탐미의 그림을 최상품으로 쳤다.
당 나라 우승(右丞) 왕유(王維)는 오묘한 이치가 귀신 같아서 그림의 형상을 보고 평하기는 어려우니, 그림을 그리는데 사시(四時)를 불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꽃을 그리는데 이따금 복숭아ㆍ살구꽃에다 연꽃을 함께 그리는 따위이다. 또 그의 원안와설도(袁安臥雪圖)에는 눈 속에 파초를 그린 것이 있다. 심존중(沈存中 송(宋)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 가는 대로 손이 움직여 뜻이 이르게 되면 곧 그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이치가 신(神)의 경지에 들어가 멀리 천의(天意)를 얻었으므로 속된 사람과 평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오도자(吳道子)는 법도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뜻이 있어서 호탕한 외에 오묘한 이치를 구사하여 마치 칼날을 놀려도 아직 여지가 있고[游刃餘地], 도끼를 움직이니 바람이 이는[運斤成風]듯한 격조였다. 소설당(蘇雪堂 소동파)이 두보(杜甫)의 시와 한유(韓愈)의 문장과 노공(魯公 안진경(顔眞卿))의 글씨에 비교하여 천하의 능한 일은 이것으로 끝났다 하였다. 조패(曹覇)는 위(魏) 나라 무제(武帝) 즉 조조(曹操)의 후손으로 당 나라 능연각(凌煙閣)에 공신(功臣)의 상(像)을 그렸다. 그의 제자 한간(韓幹)은 대량(大梁) 사람으로 인물을 묘사하는데 능하였고, 더욱이 안장 얹은 말을 잘 그려 왕유(王維)가 그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말을 비대하게 그려 살을 그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무위장군(武衛將軍) 이사훈(李思訓)은 당시에 제일 신묘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그의 아들 이소도(李昭道)는 부친의 필치를 변경하였는데, 신묘하기가 부친보다 뛰어났으므로 세상에서 산수 그림을 말하는 데에 큰 이장군(李將軍), 작은 이장군이라 하였다. 염입본(閻立本)ㆍ기악(祁岳)ㆍ정건(鄭虔)은 모두 크게 당시 이름을 떨쳤다. 그 중 정건은 시와 글씨를 잘 써서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소열(蕭悅)은 대 그림을 잘 그렸고, 왕재(王宰)의 산수와 수목은 형상보다 뛰어났고, 필굉(畢宏)과 위언(韋偃)은 모두 고송(古松)을 잘 그렸다. 위언은 대력(大曆) 2년에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또 신선과 부처의 괴상한 돌을 잘 그렸으며 말도 잘 그렸는데, 필력이 강건하고 풍격(風格)이 높았다. 위언의 백부는 용과 말을 잘 그렸다. 마란(馬鑾)은 산수와 소나무ㆍ바위 등을 잘 그렸다.
설직(薛稷)의 자는 사도(嗣道)로, 꽃ㆍ새ㆍ인물 등 잡화(雜畵)를 잘 그렸고, 특히 학을 잘 그려 이름이 알려졌다. 선주 자사(宣州刺史) 주방(周昉)의 자는 경현(景玄)으로, 사람의 뒷면을 그리고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여자들을 정교하게 그렸다. 영왕(寧王)과 신왕(申王)은 말을 잘 그렸고, 등왕(藤王)은 나비를 잘 그렸다. 강도왕(江都王) 이서(李緖)는 당 나라 초기에 안장을 얹은 말을 잘 그려 그 신묘함이 독보적이었다. 주요(朱瑤)는 당 나라 말기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세상에서 말하는 오도자의 그림은 주요의 그림이 많다. 양(梁) 나라 장승요(張僧繇)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명성이 있었다.
고금에 물을 그리는데 평원(平遠)하면서도 잔잔한 물결이 있는 그림이 많아서 그 좋은 것이라도 파도 위에 기복이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당 나라 광명(廣明) 연간에 처사(處士) 손위(孫位)가 비로소 새로운 생각을 내어 빠른 여울이나 큰 물결이 산과 돌을 따라서 곡절이 되는 것을 그리되 경치에 따라 형태를 묘사하여 물의 변화를 그렸다. 그 후에 촉(蜀) 지방 사람 황전(黃筌)과 손지미(孫知微)가 모두 그 필법을 이어 받았으나, 손지미가 죽자 그 필법은 중도에 단절되고 말았다. 송 나라 성도(成都) 사람 포영승(蒲永昇)은 술을 좋아하고 방랑기가 있어서 성미가 그림 그리는데 알맞았다. 그가 비로소 흐르는 물을 그려 손위와 손지미 두 사람의 필법을 얻었다. 황거래(黃居萊)ㆍ이회곤(李懷袞)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황전(黃筌) 부자(父子)가 꽃을 그린 그림은 색소를 잘 쓰는데 신묘함이 있었고, 붓이 극히 가늘어서 거의 먹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벼운 색으로 물든 것 같이 되어서 사생(寫生)이라고들 한다.
강남(江南)의 서희(徐熙)는 묵화로써 약간씩 붉은 색을 썼을 뿐이니, 신통한 기운이 빼어나 유달리 생동감이 있는 것 같았다. 황전은 자기와 상대되는 것을 미워하여 그의 그림은 추하고 속되어서 등급에 들어올 수 없다 하며 헐뜯었다. 서희의 아들이 황씨의 격조를 모방하여 더욱 붓을 쓰지 않고 다만 채색으로 그렸으니 이것을 몰골도(沒骨圖)라 한다. 그러자 황전 등이 다시는 흠을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기운을 말하면 부친 서희에게는 훨씬 뒤떨어졌다. 이후주(李後主)가 서희의 필적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개보(開寶 송 나라 태조의 연호) 말년에 서희는 송 나라로 귀의(歸依)하였다.
송 나라 혜숭(惠崇)은 건양(建陽) 사람으로 오리ㆍ기러기ㆍ백로ㆍ가마우지 등을 잘 그리고 특히 작은 경치를 잘 그려 차가운 물가에 연기 낀 모래밭 같은 쓸쓸하고 공허한 풍경을 잘 그려 다른 사람들이 이르기 어려웠다. 또 시를 잘 지어 《십승시집(十僧詩集)》에 혜숭이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조창(趙昌)의 자는 창지(昌之)로, 광한(廣漢) 사람이다. 꽃과 과일 등을 잘 그려 생물을 묘사하기를 거의 실물과 같이 그렸으나 필치가 좀 속되어 옛사람들 같은 품격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에게 견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애선(艾宣)은 종릉(鍾陵) 사람으로, 꽃과 대나무와 조류(鳥類)를 잘 그려 홀로 풍아(風雅)한 경지에 이르러 남다른 풍격(風格)을 가졌다. 변란(邊鸞)은 조류(鳥類)를 잘 그렸다. 이세남(李世南)은 가을 경치를 잘 그렸다.
최백(崔白)의 자는 자서(子西)로, 호량(濠梁) 사람이다. 바람 부는 창포와 겨울 기러기를 그렸다. 윤백(尹白)은 변(汴) 사람으로, 꽃을 잘 그렸다. 이기(李頎)는 산을 잘 그렸고, 왕진경(王晉卿)은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를 그렸다. 주상선(朱象先)은 색채를 잘 썼다. 송복고(宋復古)는 소상강(소湘江)의 늦은 경치를 그렸다. 문동(文同)의 자는 여가(與可)로, 촉(蜀) 지방 사람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그가 대를 그리는 묵화는 가장 신묘(神妙)하였다. 소자첨(蘇子瞻)의 신기하고 예스러운 것은 여가(與可) 다음이었다. 진직궁(陳直躬)은 기러기를 그렸다. 곽충서(郭忠恕)는 누각(樓閣)과 대사(臺榭)를 잘 그렸는데, 고상하고 고풍(古風)스러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공린(李公麟)의 자는 백시(伯時)로, 스스로 용면거사(龍眠居士)라고 불렀으며, 서주(舒州)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구상을 먼저 하였으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곽희(郭熙)는 산수와 겨울철의 숲을 그려 당시에 독보적이었으며 부채를 즐겨 그렸다. 최각(崔殼)은 꽃과 새를 잘 그렸다.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는 글씨와 그림이 모두 신묘하였다. 왕공엄(王公儼)은 화초와 금수를 잘 그렸으며 색깔을 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원(謝元)과 진의보(陳義甫)도 꽃과 새를 잘 그렸다. 유백희(劉伯熙)는 산수를 잘 그렸으며 기이한 바위와 오래된 나무를 잘 그렸다. 이필(李弼)은 필세(筆勢)가 정미(精微)하여 누각과 인물을 잘 그렸다. 마원(馬遠)은 산ㆍ바위ㆍ수목들을 그리는데 필치가 웅장하고 강건하였으며 또 인물을 잘 그렸다. 교중(喬仲)은 작은 산이나 작은 나무라도 법도를 넘게 그리지 않았다. 유도권(劉道權)은 산수를 잘 그렸는데 특히 짙고 엷은 구별을 잘하였다. 안휘(顔輝)는 바위와 인물을 잘 그렸다. 장언보(張彦甫)와 고영경(顧迎卿)은 특히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의 어둡고 먼 정취를 잘 그려 각각 신기한 경지에 이르렀다. 장자화(張子華)와 나직천(羅稷川)은 모두 산수를 잘 그렸다. 주랑(周郞)과 임현능(任賢能)은 모두 말을 잘 그리기로 이름이 났다. 중 설창(雪窓)은 난초와 대를 잘 그렸다. 왜승(倭僧) 철관(鐵關)은 산수와 고목을 잘 그려 실물과 흡사하도록 힘썼으나 호탕하고 뛰어난 것이 적어 불교 냄새를 면치 못하였다. 식재(息齋)는 대를 잘 그렸고, 진재(震齋)는 용을 잘 그렸다. 설촌(雪村)은 매화를 그리는데 비스듬한 가지와 오래된 밑둥은 기이하고 강건하게 하여 진짜 같았으나 그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종병(宗炳)의 자는 소문(小文)으로, 남양(南陽) 사람인데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도사(道士) 우전(牛戩)은 하내(河內) 사람으로, 새들을 잘 그렸는데 그 중에도 비둘기와 까치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그다지 정교하고 고상하게 그리지는 못하였다. 대송(戴松)은 싸우는 소를 잘 그렸다. 유포(劉褒)는 은하수를 그리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 더워하고, 북풍(北風)을 그리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 추위를 느꼈다. 이성(李成)은 영구(營丘) 사람으로 산수를 잘 그렸는데, 이영구(李營丘)라고도 불렀다. 송민(宋敏)ㆍ섭형(葉衡)ㆍ지환(知幻)은 모두 대를 잘 그렸는데 풍치와 격조가 깨끗하였다. 그 중에서도 송민이 더욱 뛰어났다. 옥면(玉冕)은 묵매(墨梅)를 잘 그렸는데, 역시 표치(標致)가 있었으나 가지와 꽃이 너무 많아 옛 기풍이 적었다. 그 시대를 상세히 알 수 없어 매우 뚜렷이 서적에 기록된 사람들만을 추려 그 대략을 기술하였으며 나의 문견이 미치는 한도에서 대충 기술하여 옛 그림을 모으려는 사람들의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 동방의 화가는 옛날부터 들은 바가 많지 않다. 고려 이영(李寧)의 천수원도(天壽院圖)는 중국에서도 칭찬을 받았으며, 《파한집(破閑集)》에서도 상세하게 그것을 말하였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희귀하니 왜 그런지 모르겠다. 비해당(匪懈堂)은 평소에 옛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또 화법에도 달통하였다. 누구라도 그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값을 배를 주고라도 사 모아서 두루 모으기를 몇 년을 하니, 수백 축에 달하였다. 당송(唐宋)의 물건이라면 비록 떨어지거나 남은 조각이라도 모아서 완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이영(李寧)은 근세 사람이니 과연 세상에서 진기한 것이라면 어찌 비해당(匪懈堂)의 화기(畵記) 가운데 기록이 없을까. 사람이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민몰(泯沒)되고 전해지지 않으니 정말 의심스럽다.
공민왕(恭愍王)은 큰 글씨를 잘 쓰고 색채를 잘 썼다. 아방궁(阿房宮)의 인물을 그렸는데 대단히 작아지만 관(冠)이나 옷ㆍ띠ㆍ신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모두 구비되어 있다. 정밀하고 섬세하기가 짝이 없었으니,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무능한 자라고 하겠는가.
본조(本朝) 안견(安堅)의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라고도 하며 지곡(池谷) 사람이다. 옛 그림을 박람하여 그 그림의 심오(深奧)한 묘리(妙理)를 알았다. 곽희(郭熙)를 모방하면 곽희의 그림처럼 되고, 이필(李弼)을 모방하면 이필 그림처럼 되고, 유융(劉融)을 모방하거나 마원(馬遠)을 모방하거나간에 모두 똑같지 않음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산수(山水)를 제일 잘 그렸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은 글씨와 그림과 시를 잘 하여 당시에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묵화(墨畵)로 소품(小品)을 그리기를 좋아하여 벌레ㆍ새ㆍ풀ㆍ나무ㆍ인물ㆍ물건을 그리는데 필치(筆致)는 세밀하지 않았으나 생기가 있고, 그 무르익은 모양은 화가(畵家)의 본색(本色)에는 미치지 못하나 시인(詩人)의 여운이 있었으니, 마땅히 화사(畵史) 격조(格調) 외에 있을 것이다. 지금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대개 원(元) 나라 사람들의 필적이 많고, 곽희(郭熙)ㆍ이백시(李伯時)ㆍ소자첨(蘇子瞻) 등의 진필(眞筆)도 많이 전하였으나, 그 중에 진짜와 가짜와 본뜬 모본(模本)이 섞여서 분별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이는 안목(眼目)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과 가려야 할 것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에 있을 때,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부중(府中)에 있게 하면서 원 나라 학사 요수(姚遂)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와 교류하도록 하여, 숨겨져 있는 도서와 서적을 밝혀낸 것이 많았다. 그 후에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올 때, 일용(日用) 기물과 간책(簡冊)ㆍ서화(書畵) 등의 물건을 배에 싣고 바다로 왔다. 지금 전해오는 오묘한 그림과 족자(簇子)들이 그 때에 나온 것이 많다고 한다.
●충청도 지방에 빈 절이 하나 있었다. 수리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떤 늙은 중이 수리할 생각이 있어 공력(功力)을 계산하러 갔다가, 산은 깊고 날은 저물어서 빈 방에 자게 되었다. 밤은 깊고 산은 고요하며 별과 달이 희미한데, 큼지막한 물체가 어떤 것을 옆에 끼고, 별안간 담을 넘어 들어와서 끼고 온 것을 뜰 한가운데 놓아두고, 뒷걸음질하여 쭈구리고 앉아 멀리서 노려 보거나 혹은 꼬리를 끌고 앞으로 가 냄새도 맡으며, 살짝 뛰어넘기도 하고 뛰기도 하여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빙빙 돌기도 하여 희롱하는 듯 놀리는 듯한 것이 마치 고양이가 쥐를 놀리는 형상과 같았다. 창구멍 사이로 바라보니 범[於菟]이 사람을 잡고 있었다. 중이 급히 떨어진 문짝을 던지니 번개가 치고 뇌성이 일면서 산과 바위에 소리가 울리니, 범이 놀라 달아나 소리와 그림자가 모두 없어졌다. 중이 뜰에 내려가 본즉 나이 16세 되는 계집아이였다. 이미 숨은 끊어졌으나 몸에는 상처가 없어 다시 살아날 것 같아 업고 방안으로 들어와 시험삼아 옷깃을 헤치고 가슴을 맞대고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었다. 새벽부터 시작하여 오정쯤 되니, 생맥(生脈)이 조금 돌아오고 저녁 때에는 숨이 통해졌다. 그래서 미음을 끓여 먹여주고 수일간 조리한 후에야 처음으로 정신이 안정되고 사물을 알아보았다. 거주와 성씨를 물으니 역력히 모두 대답하였다. 집이 전라도에 있어 절과의 거리는 백리(百里)가 넘으며, 범에게 물리게 된 것은 초저녁 일이었는데, 절에 도착한 것은 겨우 밤중이었으니 이것을 보면 범의 걸음이 빨라 멀리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이 이 여자를 데리고 그 마을을 찾아가서 여지는 동구(洞口)에 두고, 거짓으로 탁발하러 다니는 행색을 하고서 먼저 그 집을 방문하니, 여자 집에서는 무당을 맞이하여 죽은 혼을 부르고 있었다. 무당이 죽은 귀신이 범에게 잡아 먹힐 때의 고통을 형용하니 부모 친척들이 발을 구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딸이 천천히 집에 들어가니 부모가 보고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야 알아보고는 서로 안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그 중을 후하게 사례하여 돌려보냈다. 여자는 그 고을의 양갓집 딸이었으므로 방아찧고 물깃는 천한 일은 해보지 못했으며, 사람들이 예쁜 규수라고 일컬었는데 중이 조리해서 살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가슴을 맞붙이면서도 음란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자비심을 생각하고 색욕(色慾)을 떠난 참으로 계행(戒行)이 있는 중이라 이를 만하다.
●권통지(權通之 : 권달수 1469-1504)는 이름이 달수(達手)이다. 일찍이 급제하여 교리(校理)가 되었다. 연산군이 윤서인(尹庶人)의 사당을 세우는 일을 의논할 때, 크게 위엄을 떨쳐서 신하들의 입을 막았다. 그래서 연산군이 하고 싶은 일을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였다. 권통지가 분개하여 의논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 홍문관(弘文館) 사람들도 그 말에 이의가 없었다. 연산군이 노하여 그들을 매질하여 귀양보내고 말았다. 오랠수록 노기가 더 심해져서 홍문관이나 대간(臺諫) 중에 그 의논을 처음 제창한 사람을 극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지난 일을 소급하여 문죄(問罪)하는데 제창한 사람을 지적함이 날로 혹독하였다. 모두들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 죽은 사람의 묘를 파고 시체를 찢게 하고 자기만 구차히 면하려고 하는데, 권통지 혼자만이 스스로 자기가 그렇게 하였다고 복죄(伏罪)를 하여 죽은 동료를 저버리고 자신만 살려고 꾀하지 않아 대간의 먼저 발론(發論)한 자와 함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옥리(獄吏)가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둘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고 한 사람은 사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였다. 대간이 되었던 사람이 옥리의 뜻을 받아들여 홍문관이 대간보다 먼저 발언하였다고 하니, 권통지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아 너희들이 과연 나를 본받아서 한 일인가.” 하고, 곧 붓을 빼앗아 공술하기를, “불초 신 달수(達手)가 한 짓이니, 구차하게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공술을 끝내고도 안색이 변함이 않고, 술을 주니 서서 다 마시고 사형을 받으면서도 평상시와 변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처음 권통지는 용궁현(龍宮縣)으로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올 때 영순리(永純里)에 있는 집을 지나다가 가족들과 영결하였다. 그때 내가 함녕촌(咸寧村)에 살고 있어 술 한 병을 들고 가서 술을 권하니, 권통지가 한 잔 가득히 들이마시고는 나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예전부터 간신들이 임금을 부추겨 악을 인도해서 선비들을 죽이도록 한 자들이 자신들을 끝까지 보전한 것이 있는가. 내가 죽지만 눈을 빼서 달아 두고 보게 하라.” 하는데, 말이 강개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권통지가 죽으니 그 미망인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성조(聖朝)에 와서 권통지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미망인은 열부(烈婦) 정려(旌閭)를 세웠으니, 절개와 의리가 짝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음성ㆍ모습ㆍ의지ㆍ기개가 훤히 나의 눈에 어른거리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고 심히 애통할 뿐이다.
●연산군이 옛날 그 어머니의 폐비 문제를 의논하였던 신하를 추죄(追罪)할 때, 대간이나 시종으로 있던 사람들 중 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여러 날 동안 어전에서 고문을 받았다. 직경(直卿) 홍언충(洪彦忠 1473-1508)도 죄수 속에 있어서 고문을 마치고 업혀 나와 감옥 담장 밖에서 잠깐 쉬고 있을 때 원(圜)은 감옥이다., 내가 그의 옷이 피로 물들여진 것을 보고 측은하여 말하기를, “참혹하도다.” 하였더니, 직경이 말하기를, “이것은 홍문관의 물이 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은 홍문관이 이 사람을 끌어넣은 까닭으로 홍(弘) 자와 홍(紅) 자는 음이 같으며 피빛이 홍색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고문을 마치고 배소(配所)로 다시 갈 때 내가 교외까지 가 보았더니, 직경이 말하기를, “평생에 학문한 화가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나.” 하면서 매우 괴로워하는 빛이 있었다. 내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만일 자네로 하여금 지혜를 없애버리고 학식도 없애버려 마치 향기와 악취를 가리지 못하고 콩과 조를 섞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라 한다면 자네 그렇게 하겠는가.” 하였더니, 직경이 계면쩍어 하면서, “아니다. 곤란한 가운데서도 사람이 혹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학문 때문이고, 객지에서 곤란하여 주머니가 빌 때 남이 혹 도와주는 것도 학문 때문이고, 섬에 귀양가 있을 때 정신과 혼백이 울렁거리면 그때 문묵(文墨)을 제외하고는 즐길 만한 것이 없으니 학문의 공이 큰 것이다. 내가 선악을 가리고 시비를 말하여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의 화를 입게 된 것도 진실로 이 학문 때문인 것이다. 또 내가 학문에 힘 입은 것이 저렇게 많으나 병이 되고 죄가 쌓여서 고초를 받고 형벌을 당하는 것은, 내 학문이 병들게 한 것이어서 내 몸에 큰 흠이 있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였으나, 만일 나를 어리석게 하고 나의 지각을 빼앗아 어리석고 둔하여 한갓 먹기만 한다면 서럽기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뒷간에 빠진 것과 같을 것이니, 비록 백 번 넘어지더라도 내 어찌 이것을 취하겠는가마는, 이따금 뒷간에서 빠져나와 하늘 위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예전에 모두 그러하였다. 하늘 위에 있는 자의 위태로움은 뒷간에서 안락한 것만도 못한 것이니 내 어찌 위태로운 것을 가지고 저 편한 것과 바꾸려 하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몸에 있는 큰 보배보다 더 좋은 것이다.” 하고, 서로 한바탕 웃었다.
●용재(容齋 이행 1478-1534)가 당시의 여론(輿論)을 거슬렸기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그를 헐뜯어서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지목하여 대사헌(大司憲)의 직책을 빼앗았다. (1517년)당시 한세환(韓世桓 1470-1522)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고 내가 참의로 있었는데, 임금이 급히 오라고 불러서 대사헌을 교대시키라고 하였다. 당시의 화가 어떻게 미치게 될 지 몰라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선비들의 논의도 수군수군하였다. 이조 판서는 조용히 결국 대사헌을 경질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의 말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이 일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걱정하거나 근심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으니, 마치 이 일에 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참판과 내가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마음속으로 격동되는 것을 우리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판서는 정중하게 침묵만 지키니 정말 우리로서는 따를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 심중이 밝게 통하고 있는 처지라서 마음속으로는 퍽 불만스럽게 여기고 다시 또 의심하기도 하였다. 용재가 관직을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은 평생을 지낼 계획을 하였으나, 집에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만한 업이 없었다. 판서의 전답이 그 근방에 있었는데, 전답을 관리하는 노복으로 하여금 수확의 절반을 용재 집으로 보내게 하였다. 매년 가을마다(1517-1519) 이렇게 하였는데, 다만 물건만 보내주었을 뿐, 단 한 통의 편지도 문안한 적도 없었으며, 또는 그 뜻을 말하여 간곡한 정을 표시한 적도 없었다. 그제야 그의 마음을 알았으니, 구구하게 분개해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으며 오로지 화만 더할 뿐이니, 오직 마음으로 걱정해 주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일이나 헛된 말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여긴 것이다. 그 후에 또 당시의 무리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배척당하기도 하는 것을 그때마다 적당하게 억눌러 처리하곤 하였으니,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 공(公)만이 능하였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낭관(郞官)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탄핵당하여 물러났다. 남들은 단지 공이 공손하고 신중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뿐이고, 그 마음속에는 꿋꿋한 기상이 이러하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물며 용재와 동과(同科)에 급제(이행은 18세, 한세환은 26세)하고 평소에 그렇게 다정한 사이가 아니어서 뇌(雷)ㆍ진(陳) 두 사람의 친밀한 교제처럼 두터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非雷陳膠漆之篤] 낭패를 당하여 곤경에 빠지게 되자 능히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덜어서 도와준 것에 있어서랴. 이런 일은 옛사람들한테서나 들을 수 있었고 지금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나는 이 사실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의 사적을 캐려는 사람에게 들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행(1478-1534) :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1531)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 박생(朴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염병에 걸려 10여 일을 위독하게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혼이 홀연히 어딘가로 가는데 마치 어떤 아전들이 쫓아와 잡으려 하는 듯하여 도망을 가서 광막한 사막을 지나 한 곳에 이르니 궁전도 아니고 집도 아닌데, 말끔히 소제된 땅이 꽤나 널직한데 단(壇)이 노천(露天)에 설치되어 있고 붉은 난간이 둘러져 있는 것이 마치 창(槍)이 꽂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관리들이 그 안에 줄지어 앉아 있고 머리는 소 같고 몸은 사람 같은 야차(夜叉)들이 뜰 아래 벌려서 있었다. 그들이 박생이 오는 것을 보고는 뛰어 앞으로 나와 잡아서 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물이 끓는 가마 속에 던져 넣었다. 박생이 보니, 중과 여승, 남녀 할 것 없이 끓는 물속에 섞여 있었다. 박생은 가만히 생각하니, 그 사람들이 쌓여 있는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양손을 솥 표면에 대고 반듯이 누워서 떠 있었다. 한참 있다 야차가 쇠꼬챙이로 그를 꿰어서 땅에다 내 놓았다. 그런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 있다 야차를 시켜 상급 관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큰 궁궐에 이르러 겹문을 들어가니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탁자가 있는 것이 마치 지금의 관청과 같았다. 높은 면류관을 쓰고 수놓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위에 줄지어 앉아 있고 수레와 호위병들의 성대함은 마치 군왕(君王)과도 같았다. 서류 장부들은 구름처럼 쌓여 있고 판결의 도장이 벼락같이 찍혀지고 있었으며 파란 두건을 쓴 나졸들이 책상 아래 엎드려 있다가 문서들을 나른다. 이 엄숙하고 정숙한 장면이 인간 세상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박생을 끌어와 묻기를, “너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였으며 또 어떤 직책을 맡아 보았냐.” 하니, 박생이, “세상에서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직책은 의국(醫局)에 속해 있었으며 방서(方書)를 출납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였다. 심문이 다 끝나니 관리가 관리들에게 두루 이것을 알렸다. 여러 관리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운명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올 사람이 아니다. 관리들이 저승 명부를 잘못 살피고서 이런 실책을 한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지.” 하니, 그 중에 한 관리가 거동이 점잖은 품이 마치 우리 선대의 왕 같았는데, 그가 사사로이 박생을 끌고 자리 뒤쪽에 가서, “지금 너에게 떡을 줄 것인데 네가 만약 그 떡을 먹으면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박생이 엎드려 절하고 땀을 흠뻑 흘리고 물러났다. 과연 한 상자의 많은 떡을 가지고 와서는 박생에게 먹으라고 하였다. 박생이 거짓으로 먹는 체하고 몰래 품속으로 모두 집어 넣었다. 머리를 들고 귀를 기울여 대전(大殿) 위에서 의논하는 말을 들어보니 모두들, “이 사람을 쓸 만하니 이곳에 두고 일을 맡겨 봅시다.” 하니, 한 관리가, “운수가 아직 올 때가 아닌데 그릇된 것을 기정사실로 굳혀버리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며, 변론이 왔다갔다 반복되더니 드디어 판결을 내리기를,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한 관리가 한 통첩에 도장을 찍는 것을 보았다. 그 통첩에, “박효산(朴孝山)과 윤숭례(尹崇禮)는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에 올려주고, 서복경(徐福慶)은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으나, 박생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박생이 나오려 할 때 우리 선대왕 같은 사람이 비단폭에다 글을 쓰고 구슬함을 열쇠로 잠가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서 박생에게 주면서, “너희 나라 군주에게 전하라. 너희 나라 군주의 소문이 대단히 좋지 못하니 내가 정말 무안할 지경이다.” 하였다. 박생이 하직인사를 하고 서함(書函)을 받들고 나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을 물끓는 가마솥에 던져넣던 곳까지 나오니 처음 체포하던 옥졸이 박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박생이 그 옥졸에게 따지기를, “관에서 이미 나를 놓아 주었는데 네가 감히 마음대로 구속하여 방자하게 못된 짓을 거리낌없이 하는가.” 하였더니, 그 옥졸이 독살스럽게 말하기를, “나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관의 증명이 없으면 나가지 못한다.” 하였다. 박생이 서함을 보이며, “이것이 관의 증명이 아닌가.” 하니, 옥졸이, “그것은 문을 나가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관에 가서 물어 보겠다.” 하고 가더니, 한참 있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미 관의 승인이 있으니 너는 가도 좋다.” 하고는 하얀 삽살개 한 마리를 주면서 털이 많은 그 개를 따라 경계를 나가라고 하였다. 큰 강이 있는 곳에 이르자 삽살개는 날아가는 것 같이 뛰어 건너므로 박생도 몸을 날려 뛰어드니 강 복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받아주는 데 마치 수레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였다. 그리고 단지 바람 소리 물 소리만 들리고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자기 몸은 자리 위에 누워 있으며 아내와 자식들이 옆에서 울고 있고 친척들이 모여서 막 자기를 염(殮)하려고 모든 것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박생이 정신이 아찔하여 고함치며 물건을 찾으면서, “나의 옥함서를 잃어버렸다.” 하고, 또, “박효산과 윤숭례는 모두 옥관자를 할 것이고, 서복경은 군수의 부절(符節)을 나눠 받게 될 것이니 내가 가서 알려주어야 한다.” 하면서, 문을 열고 달려가려 하였다. 처자들은 그가 헛소리를 하고 미쳐서 달아나는 줄 알고 뭇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일주일을 지나서야 비로소 생생하게 자기가 겪었던 이야기를 죽 하였다. 대체로 박효산과 윤숭례는 의원이며 서복경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서자였다. 나라에서 벼슬길에 서자 출신들은 벼슬하지 못하도록 제정하고 있었다. 박생은 또 평생을 서복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연산주가 특별히 박효산과 윤숭례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직을 제수하였다. 서복경은 궁녀의 연줄로 훌륭한 반열에 끼이게 되어 안악 군수가 되었으니 그 말들이 모두 증험이 있었다. 옥함서는 흡사 연산군의 주색에 빠지고 음란함을 경계한 말 같으나 내내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박생의 이름은 세거(世擧)로 지금은 내의원(內醫院)에서 벼슬하고 있는데, 의술이 아주 정통하다고 세상에 이름이 나 있다. 일찍이 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여 내가[忍性子], “그대의 말은 마치 불교에서 세상을 속이기 위한 말과 똑같다. 괴상한 말과 이단을 말하는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저 의원들이 관직에 올라 영화를 누리는 것과 서자가 분수에 넘치는 직분을 무릅쓰는 따위는 진실로 혼조(昏朝 연산군)의 문란한 정치였으니, 거기에서 무슨 운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으리오. 모든 인간의 이득과 손실, 화와 복, 업(業)을 경영하고 구하기를 도모하는 따위는 모두 그 사람의 잘하고 못함, 어리석거나 간사한 데에 달려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 미리 정해진 운수인 것이다. 때가 되어 이 운수가 펴지게 되면, 반드시 신묘하게도 일들이 척척 들어맞아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운수를 타서 성공하게 하는 것인데, 성공해서 사람들은 이러한 것도 모르고 망령되게 그 사람의 지력이 어떠하다고들 하면서 마음을 피로하게 하고 정력을 소비해서 죽을 때까지도 그치지 않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나 성하고 쇠하고 갚고 받는 것이 사람의 선함에 달려있는 것은 정칙이다. 이 정칙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운수라는 것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저 의원과 서자들이 얻었던 것이 눈에 차지도 않았으며 연이어 그것도 잃고 말았으니, 어찌 함부로 엿보고 훔쳐서 자기 분수를 돌아보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강릉(江陵)에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전손(傳孫)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집 담장 사이에 큰 뱀이 구멍을 뚫어놓고 때로 뜰에 나와서 꾸불꾸불 서리고 있었는데 차저(次且)는 고문(古文)에 자저(趦趄)이다. 그 모양이 이상스러웠다. 이전손이 보기 싫어 지팡이로 때려 쫓아 버렸다. 뱀이 쫓겨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서너 번을 거듭하니, 이전손이 화가 나서 담장 구멍을 파헤치고 기어이 쫓아버려 뱀이 밭 사이 풀을 쌓아둔 무더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전손이 그곳에 불을 질러 풀무더기를 태워버렸다. 생각하기를 불이 뜨거우면 뱀이 반드시 딴 곳으로 달아날 줄 알았으나 뱀이 그 속에 엎드려 있다가 타 죽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뭇 뱀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빙빙돌다가 목을 들고 그 불에 타 죽으면서 마치 비분한 뜻이 있는 듯하더니 무려 수백 마리의 뱀들이 불에 들어가 죽었다. 이전손이 그제서야 그 신령스러움을 깨닫고는 놀라고 뉘우쳤다. 이로부터 가산이 날로 줄어들었다. 이전손이 매양 말하기를, “이것은 뱀을 태워 죽인 보복이다.” 하였다. 그 뒤에 이전손이 과거에 급제하기는 했으나 벼슬은 크게 못하였다. 뱀이 비록 독물이지만 그것에도 남이 뺏지 못할 천성이 있어서 큰 뱀은 군장(君長)이고 뭇 뱀들은 신하와 종들인 것이다. 신하 뱀들이 임금의 재난에 와서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듯이 쉽게 하니 전횡(田橫)의 의사(義士)인들 어찌 이보다 훌륭할 수 있으리오. 큰 뱀이 죽으면서 달아나지 않은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뱀들도 나라를 위해서 죽고 영토를 지키는 의리가 있어서 그러했는가. 아, 관저(關雎)새의 부부와 승냥이와 수달의 부자와 벌과 개미의 군신이 각각 그 한 가지씩의 의리를 지켜 타고난 천성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저들 미물보다도 못한 점이 많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송원(松原)의 어떤 선비가 한 산을 얻어 집을 지으려 하였다. 처음 그 터를 닦아 흙을 두어 자쯤 삽으로 파니 흙과 돌 사이에 거북 같은 여러 벌레들이 한군데 엉켜 있는데, 깊이 팔수록 더욱 많았다. 그 벌레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는 집을 다 짓고서 그곳으로 이사해 갔다. 1년이 못가서 그 선비의 아내가 갑자기 미친병이 나서 귀신 같은 말로 선비에게 말하기를, “네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우리 사는 곳을 빼앗아가며 우리 종자를 모조리 죽였는가. 우리는 땅속의 금돼지라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 사람이 도리어 우리를 이렇게까지 몰살시키는가.” 하니, 그 선비가 놀라고 괴상히 여겨 묻기를, “네가 금돼지라면 내가 너희 족속들을 죽인 일이 없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네가 내 아내를 병들게 하니 사실은 너희들이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의 집을 모두 파헤쳐서 가차없이 다 죽여버릴 것이다.”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너에게 잡혀 죽은 거북 같은 벌레가 모두 나의 종들이다. 나는 깊이 황천 밑에 살고 있으니 비록 온 나라의 군사들을 다 동원해서 손끝이 닳도록 파헤쳐도 어찌 그 단단하고 두터운 것을 다 통하도록 판단 말인가.” 하였다. 선비가 공손하게 사과하고 말하기를, “저승과 이승이 같지 않으며 깊은 곳과 얕은 곳이 서로 다른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서로 방해를 한단 말이오.”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이미 우리 무리들을 죽였으니 어찌 다시 용서하겠는가.” 하였다. 말이 끝나자 아내의 병이 더욱 심해져 죽고 말았다. 선비가 두렵고 겁이 나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되지 않아 병이 식구들에게 퍼져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어버렸으니 매우 괴상한 일이다. 옛날 송 나라 장군 조빈(曹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집이 너무 허름해서 자제(子弟)들이 수리하도록 청하였다. 장군이 말하기를, “지금은 한 겨울인 만큼 담장이나 기왓장 사이에 벌레들이 칩거하고 있을 것이니 그들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어진 사람들의 마음씀이 이러하여야만 옳은 것이다. 그런데 저 선비는 거북 같은 벌레를 모두 다 죽였으니, 하늘이 낸 생물들을 거의 표독(慓毒)스럽게 죽여버렸던 것이 아닌가. 생물들의 원한에 대한 갚음이 이치상 없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수후(隋侯)의 사주(蛇珠)와 공유(孔愉)의 거북과 인(印) 같은 것을 이루 다 거론할 수 없다. 수후(隋侯)가 뱀이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약을 발라 치료해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뱀이 명월주(明月珠)를 물고 와서 보답하였다. 진(晉) 나라 공유(孔愉)가 거북을 샀다가 다시 놓아 주었다. 그랬더니 거북이 왼쪽을 돌아보면서 사라졌다. 공유가 봉후(封侯)가 되어 금구(金龜)를 만들려 했더니 거북의 모양이 삐뚤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그 거북은 흡사 자기가 살려주었던 거북과 비슷하였다.
●옛날에 한 재상(宰相)이 남도의 관찰사로 갔는데 그는 성품이 몹시 엄격하여 사적인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뭇 고을들이 엄숙한 풍조가 있었다. 화산(花山 안동)의 아리따운 계집이 재상과 정이 꽤 두터웠으나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보였다. 세숫물을 떠오고 소제를 맡아 보는 기생들이 조금만 잘못하여도 용서하지 않으니, 고을 기생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아리따운 계집이 기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저 놈의 영감을 한 번 욕보일까 보다.” 하니, 기생들이, “어떻게 욕을 보인단 말인가.” 하고 물었다. 그 계집이, “한껏 술을 마실 때 세숫대야에다 회(頮)는 세수하는 것이고, 잡(匝)은 세수하는 그릇이다. 술을 가득 부어서 욕을 보이겠다.” 하니, 기생들이, “네 약(若)은 너이다. 가 정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들이 술잔을 받들어 너의 장수를 빌겠다.” 하였다. 그 계집이, “두고 보기만 하라.” 하였다. 봄날 밤에 백옥 같은 달이 휘장 사이로 보여 잠을 자다 잠깐 열고 보니, 꽃 그림자는 창문에 걸려있고 원앙 금침은 훈훈하게 따스하여 정과 경치가 엉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창밖에서 가벼운 신발 소리가 나고 또 가벼운 기침 소리도 들렸다. 기침을 하다가도 억지로 참고 하는 것이 마치 주저주저하며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재상이 그 계집을 흔들어 깨우고, “밖에서 소리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계집이 귀를 기울여 듣더니, “꼭 우리 어머니 기침 소리 같습니다.” 하였다. 재상이, “한 번 나가보라.” 하여 계집이 나가서 한참 있다가 돌아와 문을 닫고, “늙은이도 참 쓸데없는 일을 하지.” 하고는, 원망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중얼거리는 폼이 마치 성난듯이 보였다. 재상이 무슨 영문인지 캐물었다. 계집이 고개를 숙이고 수줍어 하는 태도로, “무식한 시골 노파라 사또에게 아뢸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다그쳐 묻자, 천천히 말하기를, “시골에서는 봄과 가을이면 신을 모시는 풍속이 있어서 무당들이 이웃들을 모이게 하는데 마침 집에서 담근 술이 아주 좋습니다. 관찰사께서 맛볼 만하지는 못하지만, 밤이 아름답고 관찰사께서도 심심하기도 하시겠고 아전들도 모두 흩어져 고요하고 인적이 없으니, 사또에게 한 잔 올렸으면 하는 것이 천한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진심이지만 일이 매우 외람된 것 같기에 꾸짖어 보냈습니다.” 하였다. 관찰사가, “괜찮다. 네가 어찌 그리 싫어하는가. 빨리 가서 데려와라. 빨리 가서 데려와.” 하고 재촉하였다. 계집은 사양하는 체하여 사또의 뜻을 더욱 굳게 하였다. 계집이 거짓으로 나가 늙은 어미를 부르는 척하고 낮은 소리로 사또에게 말하기를, “들고 온 것이 단지 한 개의 술통뿐이고 술잔은 없습니다. 밤이어서 그릇은 모두 부엌에 치워 두었습니다. 지금 옥잔을 꺼내려 하면 시종들이 모두 일어나게 될 것이니 남들을 번거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 사온 깨끗한 세숫대야가 탁자 위에 있습니다. 그렇게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는 너무 공손하지 못하오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관찰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질그릇에 탁주라는 말도 있는데 이러한 시골이고 보면 놋 세숫대야가 질그릇 탁주보다도 사치스럽다.” 하고는 술을 따르라고 재촉하였다. 두 차례 마시고 나서 하는 말이, “옥동서(玉東西)와 금파라(金叵羅)모두 잔의 이름이다. 같은 잔들보다도 좋다.” 하고, 이어서 계집에게, “제발 누설하지 말라.” 하고 부탁하였다. 물론 이 계집이 일찍부터 계획한 일인 줄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기생들은 개미떼처럼 벽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창문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을 원이 어떤 일로 책망당할 일이 있어 성적 심사에서 하(下)의 하등급을 받게 되었다. 원이 이 계집을 불러 말하기를, “만약 네 힘으로 나의 등급 문제를 해결해 주면 한 살림 넘도록 톡톡히 보답하마.” 하니, 계집이 사례하며, “마음을 다해 보겠나이다.” 하였다. 심사가 있던 날 저녁에 계집이 문틈으로 몰래 듣고 있었더니, 과연 그 고을 원을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계집이 병풍과 휘장 사이에서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면서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관찰사가 몰래 변소에 가는 척하고 나와서 계집의 등을 쓰다듬으며, “무슨 병이 그리 심하지.” 하고 물으니, 계집이 노하여 답하기를, “병이 아닙니다. 우리 고을 원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이 서러워서입니다. 옛말에도 있으니, ‘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지붕의 까마귀까지 사랑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고을 원님이 하등(下等)이 되는 것을 보았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지신 어른이 한결같이 이 천첩을 보아서라도 한번 봐주시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관찰사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일이 위급하니 다시 풀어 놓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첩의 생사가 여기 달려있나이다. 천첩이 다행하게도 사랑하시는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뒷날까지 길게 누릴 단 한 번의 혜택도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니, 관찰사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미 보좌관들이 결정한 것이니 어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집이 울며 원망하고, 이윽고 두 다리를 관찰사의 어깨에 올려놓고 목을 조르면서, “늙은 이에게 형틀을 씌운다.” 하니, 관찰사가 웃으며, “형틀치고는 좋구나.” 하며, 승낙하고 나가서 그 고을 원을 중(中)의 중등급을 매겼다. 관찰사는 후일 정승에까지 올랐으며 풍채와 도량도 상당히 있었다. 심하구나. 요염한 여자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조그마한 여자가 허다하게 간교한 꾀를 감추고, 마치 벌레가 물건을 갉아 먹듯이 하여 매끄러운 살결은 뼈까지 녹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단한 사람을 솜처럼 약하게 하고 강한 사람을 기름처럼 부드럽게 하고, 엄한 사람을 흐리멍덩하게 하고, 힘써 일하는 사람을 완만하게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우둔하게 하며, 명석한 사람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자애로운 사람은 자애를 잃게 되고, 효도하는 사람은 효도를 잃게 되며, 충성을 해치고 신의를 빼앗아버리며, 친우을 해치고 형제간의 우애를 끊어버리는 것이 모두 계집의 요염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저 황하를 뛰어 건너는 용기, 눈을 후벼내는 횡포, 칼날 앞에 맞닿아서도 눈을 잠깐도 깜박거리지 않는 것은 모두 기개가 심히 장한 것이고, 백만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나 천자를 보필하는 재상들은 말하고 웃으면서 사람을 죽여도 사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위엄이 매우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모두 침상의 베갯머리에서 달콤한 부인의 말에 제재를 받고 마음이 달라져서 자신을 해치고 집안을 망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의리와 예절을 지키며 사욕(邪慾)을 버리지 못하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소자유(蘇子由)가 뇌주(雷州)로 귀양갔을 때 관사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드디어 민가를 빌려 있게 되었다. 그러자 장돈이 이것을 강탈한 것이라고 하여 그 사람을 추궁하였더니, 빌려준 문서가 명확하여 더 추궁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두 해도 못 되어 장자후(章子厚)가 뇌주로 귀양살이 와서 민가에 자기가 있을 집을 구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전번 소공(蘇公)이 왔을 때 장승상(章丞相) 때문에 우리 집이 망할 뻔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들에 대한 보답이 이러하였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부절(符節)처럼 정확히 맞다. 그러니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가 과연 거짓이겠는가. 사물이 극도로 성하면 반드시 쇠해지는 것이니, 꺼져 없어지고 찼다가 비게 되며, 나아가고 물러나며 쇠진하고 성장하는 이치가 더욱 뚜렷하게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음양(陰陽)과 한서(寒暑)가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풀과 나무의 꽃이나 열매가 번갈아가며 바뀌어가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양지 쪽의 나무와 음지 쪽에 자라는 나무를 보면 꽃피는 시기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양지 쪽의 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도 남쪽 가지의 꽃봉오리가 가장 좋게 되는데, 이것은 훈훈한 바람과 따듯한 기운이 그 발육과 성장을 돕기 때문이다. 이른 봄날에 온갖 꽃들보다 먼저 피는 것이 찬란하여 귀하기 짝이 없으니 이것을 보면 조물주가 흡사 편파적으로 복을 내린 것 같으나, 그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핀 것부터 시작하여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일찍 화를 당하여 깡그리 병이 드는 것이다. 저 음지에 있는 나무는 찬비와 눈에 꺾이지 않음이 없고 추워서 얼어 붙을 때도 별로 구애되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때에도 꽃을 간직하고 피게 하니 그 정기가 단단하고 오래가며 먼 곳까지 향기를 피우게 된다. 그래서 이른 꽃들의 흔적이 없어진 뒤에 관상(觀賞)하게 되니, 이 때에는 누가 때를 만나고 못 만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 조물주가 저쪽이나 이쪽을 편애해서이겠는가. 자연의 이치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금의 호사가(好事家)들은 꽃을 심고서 꽃이 피기를 재촉하여 흙집을 만들고 온돌을 만들어 불을 때서 따뜻한 물을 뿌려서 증발시켜 미세한 물방울을 만들어 줌으로써 엄동설한에 밖의 날씨는 추운데도 요염한 꽃이 터져나와 피게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기운을 얻어서 피는 꽃이라, 꽃 수술이 단단하지 못하여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들고 눈을 뭉쳐서 만든 것처럼 잠깐 동안 형색(形色)을 빌렸다가 이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겨우 흙집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만 바람과 햇빛에 노출되어 얼고 시들어 뿌리까지 말라 죽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꽃 자체의 성질을 무시하고 교묘하게 사람의 힘을 불어 넣어 인력(人力)으로 조화를 부려서 자연의 힘을 잠깐 동안 빼앗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찍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일월(日月) 같은 권세에 의지하여 평민이 갑자기 귀족으로 변하여 이름과 지위가 빛나게 되는 것은 마치 양지쪽의 나무와 같은 것이며, 힘과 노력을 쌓아서 재주와 명망을 몸에 지니고, 고생과 가난을 수없이 겪은 후 마지막에 가서 큰 영화를 누리는 것은 마치 음지 쪽에서 자라는 나무와 같은 것이고,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 어떤 일을 도모하거나 잘못된 것에 의지하여 외람되게 그릇된 것을 취하고, 함부로 덤벼서 영화를 누렸다가 이내 망해 버리는 것은 마치 토실의 꽃과 같은 것이다. 지위를 비록 부정(不正)하게 얻은 것이 아닐지라도 갑자기 얻게 되면 반드시 찼다가도 비워지는 재앙을 당하는 법인데, 하물며 정도(正道)가 아닌 방법으로 얻고서도 그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여 교만과 방자함으로 재촉하는 무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고금(古今)을 두루 살펴보면 모두 각기 분수가 있는 것이다. 근래에 박평성(朴平城)ㆍ유청천(柳菁川)ㆍ성창산(成昌山)은 모두 왕실(王室)을 돕고 백성들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제한 공로가 국가에 있어서 죄수들까지도 그들의 은택을 입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융성한 총애를 받는 것이 마땅하며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살려주면 귀신도 돕는 법이므로 오래도록 영화를 누려야 할 것인데, 6ㆍ7년이 못 되어 모두들 청년으로 요절하고 오래도록 나라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정말 사람들의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분수는 모두 완전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한 번 이지러지면 한 번 가득 차게 되겠는가. 이것이 만족스러우면 저것은 손해가 있는 법이고, 부귀가 갑자기 극에 이르면 그 한계는 끝이 있는 것이니, 분수가 이 이상 넘어설 수 있겠는가. 일년 4계절도 차례가 있어서 공을 이룬 것은 물러가듯이 큰 일을 성공시키게 되면 물러가야 하는데, 만약 다시 기대한다면 천도(天道)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이윤(伊尹)은 총애와 이익으로 성공을 한 것이 아니며, 장량(張良)은 봉후(封侯)를 사양하고 녹(祿)을 피하였으니, 그 사람들의 뜻을 알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기회를 살펴 세력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 여우처럼 덤비고 원숭이처럼 외모만 꾸미고서 번영과 실패가 입에 달렸고 승진과 침체가 그들 마음대로 되며 세력을 끌어다가 자기 것으로 삼고는 오래오래 누릴 것이라 하여 아주 거만하다가 결국은 그들의 처지도 한 바탕의 웃음으로 변하고 마는 사람들이 있어서랴. 이런 사람들은 정말 음란한 자에게 화(禍)를 주는 천도를 몰랐던 것이다. 말없이 정해져 있는 운수가 눈도 미쳐 깜짝할 사이도 없이 귀신의 벌과 사람의 벌이 한꺼번에 무더기로 오고 떼로 닥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전철(前轍)을 밟아 전복되고 마는 것과 같으니 정말 한숨지을 일이다. 근래 어떤 선비가 있는데 사람의 생년 월일 시(生年月日時)를 추산하여 그 사람의 화와 복 단명과 장수를 말하는데, 틀리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어떤 때는 재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것으로 반드시 복이 크게 올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하고, 어떤 때는 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이 재난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따져 묻기를, “운수가 꽉 막힌 것이 어찌 길하며 형통한 것이 어찌 흉하게 되겠는가. 무슨 그런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가.” 하니, 그 선비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성한 것은 쇠퇴해질 시초이고, 쇠퇴한 것은 성해질 단서로, 사물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하였다.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변란을 당하고 그 후에 향락을 누려야만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번영하는 것은 혹 하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러는 것도 있지만 반면에 하늘이 그 사람에게 화를 입히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고난을 많이 겪는 것은 그 후에 복이 올 기틀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의 분수에 넘는 번영이 없다면, 어찌 종족을 멸망시키는 화가 있겠는가. 사람이 두려운 마음으로 욕심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위대한 사람이 되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영달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복을 받았다.’ 하고, 아주 불운한 사람을 보면 모두 ‘화를 입었다.’ 하는데, 이것은 미혹된 것이다. 저 선비 같은 사람은 훌륭한 점장이라 할 수 있으니, 화복의 기미가 얽히고 섥힌 묘리와 저 환난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게 된다는 뜻에까지 두루 통했던 것이다.
●성은 윤씨이고 직함은 첨정(僉正 종4품)인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성질이 방탕하여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 술을 즐겨 마셨으며 취하면 큰 소리로 옆에 앉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려 비록 사람들의 숨겨진 결점이라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간혹 견딜 수 없는 일도 있었으나, 그 말이 모두 농담이고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그저 농담으로 넘기고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농담은 생각에서 나왔고 해학이나 풍자도 섞여 있었다. 또 자기의 용기를 믿고서 아첨하거나 굽히지도 않으니, 세상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곧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이 때문에 환난을 면하였던 것이다. 그때 아주 젊은 세력가로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바야흐로 그의 재주가 발휘되어 모든 사람들은 선동하여 사헌부와 홍문관에서 팔을 걷어 부치고 당시의 여론을 올리고 내렸으며, 하늘까지고 열고 닫을 듯이 그의 칼끝과 칼날이 닿는 곳은 쇠와 돌까지도 부서질 지경이며, 한 번 숨을 불어주면 썩었던 나무에도 꽃을 피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한씨의 부친도 농기구를 팽개치고 초가집을 뛰쳐나와 두둑한 봉록을 받는 지위에 올랐다. 그들은 세력을 빌려서 기염을 토하며 세상의 문벌들을 능가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발걸음도 조심할 정도였다. 하루는 윤첨정이 술병을 가지고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밖까지 손님을 전송하였다. 한씨 부친의 직책은 서울 네 군데 산의 소나무를 지키는 것이었는데, 때마침 산을 지키는 나졸들을 길가의 인가(人家)에서 점검(點檢)하고 있었다. 윤첨정은 비록 한씨 부친과 안면은 없지만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서 한씨의 부친을 보고 말하기를, “나에게 한 병 술이 있으니 함께 마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아이들을 불러 잔에 가득 따라 권하고, 잔을 비우는 대로 따라 주었다. 한씨의 부친은 비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윤첨정이 거기다 조소로 한씨 부친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농락하기 시작하였다. 왼손으로는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귀를 당기거나 무릎을 치면서 온갖 모욕을 가하고 한씨 부친의 은밀한 곳을 마구 건드렸다. 한씨 부친은 안색이 의기소침해지고 기운이 없어 숨이 끊어져 곧 죽을 것처럼 되어 엎드려 공손히 복종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이래서 윤첨정이 노래하라 하면 노래하고, 춤추라 하면 춤추고, 또 네가 아무개의 애비인가 하면 예 그렇습니다 하고, 너의 성이 한(寒) 자인가 하면 예 그렇습니다 라는 식이었다. 한(韓)과 한(寒)은 음이 같은 것으로 그들의 성질이 차갑고 독살스럽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온갖 모욕을 주는 대로 한씨 부친이 응대하느라 피로하여 땀이 물처럼 쏟아졌다. 그러자 윤첨정을 따라 갔던 사람들이 옆에서 힘껏 말리니, 윤첨정이 그제서야 한바탕 웃고 나가버렸다. 그 다음날 한씨의 아들이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노하여 윤첨정을 논죄하여 처벌하려고 하니, 그는 본래 미친 사람이라 의논이 되지 않았고, 형벌로 다스리려 하였으나 또 그 말들의 시비를 가리기 어려웠으므로 하는 수 없이 한씨가 윤첨정을 따라 갔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그대들이 아니었던들 우리 아버지가 위태할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은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그리고 공경 대부들까지 윤첨정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윤첨정은 또 왕족인 길안정(吉安正)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 그와 교분이 있었다. 길안정의 아들 정숙(正叔)은 그 당시 세력가들과 아주 친밀하였으므로 당시의 세력가들이 그를 유향(劉向)처럼 추대하였다. 윤첨정이 길안정을 만나 그의 목을 가리키면서, “슬프다, 네 목이여. 너에게 그런 아들이 있으니 네 목이 어찌 보전될 것인가.” 하였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당시 세력가들이 패망하고, 길정숙은 안처겸(安處謙) 등과 반역을 꾀했다 해서 주살되었다. 윤첨정의 말이 비록 농담이었으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 당시의 사대부들은 당시의 세력파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울분이 있었으나 모두 무릎을 꿇고 아첨하여 조정이나 재야(在野)가 모두 벙어리로 지냈는데, 저 한 사람의 미친 선비는 남의 잘못을 마다 않고 바로 지적하였으니, 이런 것을 두고 공자 문하에서는 말하기를, “차라리 광자(狂者)와 견자(狷者)를 얻는 것이 더 좋다.” 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