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총화(慵齋叢話)
성현(成俔 1439-1504)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이다.
성현은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리고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그는 형 성임(成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하였다.
성현은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서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이듬해에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왔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대사성·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은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다.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 해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대사헌이 되었다.
성현은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성현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한 달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 해에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성현은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성현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판윤을 거쳐서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에 수 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그러나 그 뒤에 신원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현의 저서로는 『허백당집(虛白堂集)』·『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급제 3회, 연행4회
용재총화 제1권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최치원이 당 나라에 들어가 급제하니 문명(文名)이 크게 떨쳐 지금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이제 그의 저서를 통하여 보면, 시구에는 능숙하나 뜻이 정밀하지 못하고, 사륙문체(四六文體)에는 재주가 있으나 말이 단정하지 못하였다. 김부식(金富軾)과 같은 이의 글은 풍부하나 화려하지 않고, 정지상(鄭知常)의 글은 화려하나 드날리지 않았고, 이규보(李奎報)는 눌러[押] 다듬을 줄 알았으나 거두지 못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는 단련(鍛鍊)되었으나 펴지 못했고, 임춘(林椿)은 진밀(縝密)하나 통하지 못하였으며,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적실(的實)하나 슬기롭지 못하였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는 노건(老健)하나 아름답지 못하였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은 온자(醞藉)하나 길지 못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은 순수하나 종요롭지 못하였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장대(張大)하나 검속(檢束)하지 못하였다. 세상에서 칭하기를,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시와 글에 모두 뛰어나 집대성하였다.” 하나 비루하고 소략한 태(態)가 많아서 원(元) 나라 사람의 규율(規律)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당(唐)ㆍ송(宋)의 영역에 비길 수 있겠는가. 양촌(陽村 권근(權近))ㆍ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문병(文柄)을 잡기는 하였으나 목은(牧隱)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며, 춘정은 더욱 비약(卑弱)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들을 맞아들였는데,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ㆍ영성(寧城) 최항(崔恒)ㆍ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ㆍ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ㆍ근보(謹甫) 성삼문(成三問)ㆍ태초(太初) 유성원(柳誠源)ㆍ백고(伯高) 이개(李塏)ㆍ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두 한때에 이름을 떨쳤다. 근보의 문장은 호종(豪縱)하나 시(詩)에는 짧고, 중장도 대책문(對策文)이나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태초는 천재로 숙성(夙成)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였다. 백고(伯高)는 맑고 뛰어나 영발(英發)하고 시도 정절(精絶)하였으나, 선비들이 모두 박인수(박팽년)를 집대성(集大成)이라고 추대하였으니, 그는 경술(經術)ㆍ문장ㆍ필법(筆法)을 모두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 주살(誅殺)을 당하여서 저술한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성(寧城)은 사륙문체(四六文體)에 능하고, 연성(延城)은 과거(科擧)의 글에 능하였다. 그러나 고령(高靈)의 문장과 도덕만이 일대(一代)의 존경을 받았고, 그 뒤를 따를 사람은 서달성(徐達城)ㆍ김영산(金永山)ㆍ강진산(姜晉山)ㆍ이양성(李陽城)ㆍ김복창(金福昌)과 나의 백씨(伯氏 성임 1421-1484)뿐이다. 달성의 문장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시는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체(體)를 본받아 손의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기 짝이 없는 글이 되었고,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 영산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외기 때문에 문장의 체(體)를 얻어서 그 글이 웅방호건(雄放豪健)하여 그와 문봉(文鋒)을 다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검속하지를 못하여 시의 압운(押韻)에 착오가 많았다. 진산의 시와 글은 전아(典雅)하여 천기(天機)가 절로 무르익어 여러 선비들 가운데서도 가장 정밀하고 빼어났다. 양성의 시와 글은 모두 아름다워 정교한 장인이 다듬고 새긴 것과 같아서 다듬은 흔적이 없었다. 나의 백씨(伯氏)의 시는 만당(晩唐)의 체를 얻어서 떠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다. 복창은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숙되어 반고(班固)를 따랐으니, 문장이 노건(老健)하였다. 일찍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엮었는데, 일을 서술한 것이 대개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일대(一代)에 이름을 떨쳐서 문학이 빛나고 성하였다.
◯우리나라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적다. 김생(金生)이 글씨를 잘 써서 세자(細字)에 있어서 아무리 작아도 모두 정밀하였다. 행촌(杏村)은 자앙(子昻)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필세(筆勢)는 서로 적수였으나,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써내려 가는 것은 마땅히 자앙에게 양보하여야 한다. 유항(柳巷)도 또한 유명하다. 진(晉) 나라 필법을 많이 체득하여 그의 글씨는 굳센데 그가 쓴 〈현릉비(玄陵碑)〉는 지금도 남아 있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의 글씨는 진밀(縝密)할 뿐인데, 나이 80세에 〈건원릉비(健元陵碑)〉를 썼는데도 조금도 필력(筆力)이 쇠하지 않았다. 안평(安平)의 글씨는 오로지 자앙(子昻)의 글씨를 본받았는데, 호매(豪邁)함은 서로 상하를 다투며 늠름하여 날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일찍이 예시강(倪侍講)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편제(篇題) 2자를 보고, “이것은 범수(凡手)가 쓴 것이 아니니 내가 꼭 만나 보았으면 좋겠다.” 하여, 왕이 안평에게 가서 보도록 명하였다. 시강이 그의 필적을 좋아하여, “지금 중국에서는 진학사(陳學士)가 글씨를 잘 써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왕자에게 견준다면 미치지 못한다.” 하고, 더욱 예모(禮貌)를 갖추고 마침내는 글씨를 받아 가지고 갔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글씨를 사왔는데, 바로 그의 글씨이므로 안평이 크게 기뻐하여 능한 것으로 자처하였다. 당시 최흥효(崔興孝)란 선비가 있었는데, 유익(庾翼)의 법을 본받아 글씨를 잘 쓴다고 자칭하면서 항상 붓주머니를 가지고 여러 관청이나 대가(大家)를 찾아다니면서 글씨를 써 주었는데, 안평이 맞아들여 글씨를 청하였으나, 자체(字體)가 거칠고 비루하였으므로 마침내 찢어서 벽을 발라버렸다. 백씨(伯氏 성임(成任))는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ㆍ동래(東萊) 정난종(鄭蘭宗)과 더불어 당시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불렸다. 인재는 성품이 글씨 쓰기를 꺼렸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수적(手跡)이 드물고, 나의 백씨는 병풍ㆍ족자를 많이 썼는데 〈원각사비(圓覺寺碑)〉는 더욱 묘하여, 성종(成宗)이 그 필적을 보고, “잘 썼다.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였다. 동래는 많은 힘과 공을 들여서 글씨를 썼는데,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써 주어서 세상에 유포된 것이 많으나 유약(柔弱)하여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물상(物像)을 묘사함에는 하늘이 준 재주[天機]를 얻은 자가 아니면 정밀하게 할 수 없고, 한 물건에 정밀하더라도 모든 물건에 정밀하기는 더욱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화가가 매우 적다. 근대로부터 이것을 보면 공민왕(恭愍王)의 화격(畫格)이 매우 높다 지금 도화서(圖畫署)에 소장된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진영(眞影)과 흥덕사(興德寺)에 있는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은 모두 공민왕의 수적(手跡)이며, 간혹 갑제(甲第)에 산수를 그린 것이 있는데, 매우 기절(奇絶)하다. 윤평(尹泙)이란 사람도 산수화를 잘 그려 지금 사대부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필적이 평범하여 기취(奇趣)가 없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고인(顧仁)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왔는데, 인물을 잘 그렸다. 그 뒤에 안견(安堅)ㆍ최경(崔涇)이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는데, 안견의 산수화와 최경의 인물화는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 요새 사람들이 안견의 그림을 금옥(金玉)처럼 사랑하여 보관하고 있다. 내가 승지가 되었을 때에 궁중에 감수된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를 보았는데 참으로 훌륭한 보배였다. 안견은 항상 “평생의 정력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최경도 또한 만년에 산수와 고목(古木)을 그렸으나 마땅히 안견에게는 양보하여야 한다. 그 밖에 홍천기(洪天起)ㆍ최저(崔渚)ㆍ안귀생(安貴生)의 무리가 산수화에 이름이 있으나 모두 용품(庸品)이다. 다만 사인(士人) 김서(金瑞)의 말 그림과 남급(南汲)의 산수화는 제법 아름다웠다. 강인재(姜仁齋)는 타고난 자질이 고묘(高妙)하여 옛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개척하였는데, 산수화와 인물화가 모두 뛰어났다. 일찍이 그가 그린 〈여인도(麗人圖)〉를 보니 실물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청학동(靑鶴洞)〉ㆍ〈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였다. 배련(裵連)이란 사람이 있어 산수화와 인물화를 모두 잘 그렸는데, 평생토록 최경을 알아주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안견과도 서로 미워하였는데, 인재(仁齋)는 배련에게 더 아취(雅取)가 있다고 하였다. 이장손(李長孫)ㆍ오신손(吳信孫)ㆍ진사산(秦四山)ㆍ김효남(金孝男)ㆍ최숙창(崔叔昌)ㆍ석령(石齡)은 오늘날 이름은 있을지라도 아직은 모두 그림을 논할 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음악은 여러 기술 가운데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니, 타고난 자질이 있지 아니하면 그 진취(眞趣)를 얻을 수 없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도 각기 음률과 악기가 있었으나 세대가 오래되어서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지금의 현금(玄琴)은 신라에서 나왔고, 가야금은 금관(金官 가락국(駕洛國))에서 나왔다. 대금(大笒)은 당 나라의 피리를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가장 웅장해서 음악의 근본이 되었다. 향비파(鄕琵琶)도 역시 당 나라 비파를 모방한 것으로, 그 설괘(設掛)에 있어서 현금과 같은데 배우는 사람이 줄을 고르고 채를 퉁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잘 타지 못하면 들을 수가 없다. 전악(典樂) 송태평(宋太平)이 잘 탔는데, 그 타는 법을 배운 아들 송전수(宋田守)는 더욱 절묘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백씨(伯氏) 댁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데, 마고(麻姑)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아 연이어 듣고 싶고 싫증이 나지 않았으나, 도선길(都善吉)에 비하여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송전수 이후로는 오직 도선길이 송태평에 가까웠을 뿐 그 밖의 사람은 미치지 못하였고, 지금은 이것을 능히 하는 사람이 없다. 당 나라의 비파에는 역시 송전수가 제일수(第一手)인데, 도선길이 그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요즘은 능숙한 영인(伶人 악공)이 많이 있는데 사서인(士庶人)은 악(樂)을 배울 때에 반드시 비파를 먼저 한다. 그러나 아주 뛰어난 사람은 없고 다만 김신번(金臣番)이라는 사람이 도선길의 지법(指法)을 모두 배워 호방함에 있어서는 도선길보다 나으니, 역시 지금의 제1수라 할 것이다. 악에 있어서 현금은 가장 좋은 것이며 악을 배우는 문호(門戶)이다. 맹인인 악공 이반(李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세종(世宗)에게 알려져 궁중에 출입하였다. 김자려(金自麗)라는 사람도 또한 거문고를 잘 탔는데, 내가 어렸을 때 이것을 듣고 그 소리를 흠모하였으나 지법(指法)을 배우지 못하였다. 지금 영인들의 악을 비율(比律)한다면 고태(古態)를 면치 못하였다. 영인 김대정(金大丁)ㆍ이마지(李亇知)ㆍ권미(權美)ㆍ장춘(張春)은 모두 한시대의 사람인데, 당시에 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대정의 간엄(簡嚴)한 것과 이마지의 요묘(要妙)한 것은 각각 극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김대정은 일찍 주살(誅殺)당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권미ㆍ장춘은 모두 범수였고, 다만 이마지만이 사림(士林)의 귀여움을 받고 임금의 사랑을 입어 두 번이나 전악(典樂)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희량(希亮)ㆍ백인(伯仁)ㆍ자안(子安)ㆍ침진(琛珍)ㆍ이의(而毅)ㆍ기채(耆蔡)ㆍ주지(籌之)와 함께 마지(亇知)에게 가서 배웠으므로 날마다 맞아오고 어떤 때는 같이 자기도 하여 듣기를 매우 익숙히 하였다. 그의 소리는 채를 퉁긴 자취가 없이 거문고 밑바닥에서 나온 것 같아서 심신(心神)이 경송(驚悚)하여지니 참으로 절예(絶藝)였다. 이마지가 죽은 뒤에도 그의 음악은 세상에 성행하여 지금은 사대부집 계집종이라도 이에 능한 사람이 있는데, 모두 이마지의 유법(遺法)을 배운 것이고 고몽(瞽矇)의 누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전악 김복(金福)과 악공(樂工) 정옥경(鄭玉京)이 더욱 연주를 잘해서 당시 제일수가 되었고, 기생 상림춘(上林春)이 또한 거의 이에 가까웠다. 가야금은 황귀존(黃貴存)이란 사람이 잘 탄다고는 하나 나는 아직 듣지 못했으며, 또 김복산(金卜山)이 타는 것을 듣고 그 당시 탄복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역시 매우 질박(質樸)하다. 요즘 노녀(老女)ㆍ조이[召史]가 공후(公侯)의 집에서 쫓겨나와 비로소 그 소리를 퍼뜨렸는데, 그 소리가 요묘(要妙)하여 사람들이 대적하지 못하였고, 이마지도 옷섶을 여미고 자기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정범(鄭凡)이 장님 가운데서 가장 잘 탄다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세종조(世宗朝)에 허오계(許吾繼)란 사람이 있었고, 이승련(李勝連)ㆍ서익성(徐益成)이 있었다. 이승련은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군직(軍職)을 배수하였고, 서익성은 일본에 가서 죽었다. 지금 김도치(金都致)란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80을 넘었는데도 소리가 약하지 아니하여 거벽(巨擘) 아쟁(牙箏)으로 추대하였다. 옛날에 김소재(金小材)란 사람이 이것을 잘하였는데, 역시 일본에서 죽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폐절(廢絶)되었었는데, 금상(今上)께서 풍류에 뜻을 두어 이를 가르치시므로 잘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도읍을 설치하였던 곳이 하나가 아니다. 김해(金海)는 금관국(金官國), 상주(尙州)는 사벌국(沙伐國), 남원(南原)은 대방국(帶方國), 강릉(江陵)은 임영국(臨瀛國), 춘천(春川)은 예맥국(穢貊國)의 도읍지이다. 모두 좁은 땅에 웅거하여 분계(分界)하였으니, 지금의 소읍(小邑)과 같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경주(慶州)는 동경(東京)인데 신라의 천년 도읍지이다. 산천이 둘러 있고 땅은 기름지나, 교천(蛟川) 한 굽이가 놀 만하고 다른 빼어난 경관이 없다. 평양(平壤)은 기자(箕子)가 도읍한 곳으로 8조(條)로 다스린 정전(井田)의 제도가 지금도 역력히 남아 있는데, 오늘날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로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차지하였고, 또 고구려의 도읍지로 되었는데, 국경의 남쪽은 한강(漢江)에 이르고, 북쪽은 요하(遼河)에 이르러, 수십 만의 병력을 가진 가장 강성(强盛)한 나라였다. 고려는 이곳에 서경(西京)을 두고 춘추로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다. 지금까지도 인물(人物)이 풍성한 것은 모두 그때의 유풍(遺風)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인데,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다. 영숭전(永崇殿)은 고려의 장락궁(長樂宮) 터이다. 평양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모란봉(牧丹峯)인데, 모두 조그마한 산으로 송도(松都)ㆍ한도(漢都)의 주악(主嶽)처럼 장엄하지 않다. 북쪽에는 물이 없어 몽고병이 거침없이 달려왔고, 남쪽은 강을 띠고 있어 묘청(妙淸)이 성을 차지하여 반역을 하였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크고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있고,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있으며,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都) 중에서 오직 이곳만이 한양과 서로 갑을을 겨룰 만하다. 동으로 10리 떨어진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 터가 있으나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아마 이것은 별궁(別宮)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이라 하고, 옛 강동(江東)을 양국(壤國)이라고 한다. 지세(地勢)는 좁으나 볼 만한 산수(山水)가 있는데, 용강산성(龍岡山城)이 가장 장엄하여 지금도 높아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 모두들 이것을 용관국(龍官國)이라고 칭하는데, 무엇에 의거하여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없다. 부여(扶餘)는 백제가 도읍했던 곳이다.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의 옛터가 지금도 완연하다. 백마강(白馬江)을 참(塹)으로 삼았으나 좁고 얕아서 왕자(王者)가 살 만한 곳이 못 되어 소정방(蘇定方)이 이것을 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주(全州)는 견훤(甄萱)이 차지하였던 곳이나 오래되지 않아 고려에 항복하였는데, 지금도 고도(古都)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철원(鐵原)은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중성(重城)의 옛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地勢)가 막혀 강하(江河)는 조운(漕運)이 어렵다. 오직 송도(松都)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년 기업(基業)이 굳혀진 곳이다. 곡봉(鵠峯)이 주악(主嶽)이 되고 지맥(支脈)이 나누어져 뻗어 나간다. 산세(山勢)가 둘러 있어 조그마한 산이라도 모두 구역(區域)을 지었으며 수천(水泉)이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있다. 고종(高宗) 이후에 강화(江華)로 옮겼는데, 이는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이므로 도읍이라고 칭할 것이 못 된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한 뒤에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세를 보고 이미 경읍(京邑)의 규모를 살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를 중지하고 다시 한양에다 정도(定都)하였다.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예전부터 공암(孔岩)이 앞에 있단 말이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서쪽 영서역(迎曙驛)들이 바로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였으나 뒤에 다시 이를 살펴보니, “산이 모두 등지고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산(白岳山)의 남쪽과 목멱산(木覓山)의 북쪽이 제왕 만승(萬乘)의 땅으로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여 이곳으로 정하였다. 전하는 말에,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므로 권신(權臣)의 발호(跋扈)가 많았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얕으므로, 장자(長子)가 잘 되지 못하고 지자(支子)가 잘되어 오늘날까지 왕위의 상승(相承)과 명공(名公)ㆍ거경(鉅卿)은 지자 출신이 많았다.” 한다.
용재총화 제2권
◯전조(前朝)의 과거에는 다만 지공거(知貢擧) 1명과 동공거(同貢擧) 1명이 있어서 미리 합격자를 차정(差定)하였기 때문에 홍분유취(紅粉乳臭)의 빈축을 면하지 못하였다 국초에도 여전히 이러한 구폐를 이어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격례(格例)를 고쳐서 모두 옛 제도를 썼다. 이조에서 시관(試官)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임시로 입계(入啓)하여 낙점을 받았으며, 시관이 된 자는 명을 받들어 시험 장소에 나누어 가서 삼관(三館)에다 과거 볼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날 새벽에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과장에 들여보냈다. 이때 수협관(搜挾官)이 문 밖에 나누어 서서 의금(衣襟)과 상자를 조사하였는데, 만약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순탁관(巡綽官)으로 보내 이를 결박하게 하였다. 만약 과거장 밖에서 발견되면 1식년(式年 4년마다 한 번씩 과거를 보이는 해)의 과거를 못 보게 하고, 과거장 안에서 발견되면 2식년의 과거를 못 보게 하였다. 밝기 전에 시관이 대청에 나와 촛불을 켜놓고 앉으면 그 엄숙한 것이 신선(神仙) 속의 사람과 같았었다. 삼관원(三館員)이 뜰로 들어와 과거 볼 사람의 자리를 정해주고 나가는데, 날이 밝으면 방(榜)을 펴서 글제를 내걸었고, 오정(午正)이 되면 시지(試紙)를 걷어 도장을 찍어 삼관에 돌려준다. 그러면 옥상(屋上)에 올라 대종(大鍾)을 들고 선생을 부르고, 뜰에 임하여서는 신래(新來)를 부르며, 또 허방(虛榜)을 써서 창(唱)하였는데, 이는 모두 고풍이었다. 날이 저물면 북을 쳐서 재촉하고 글이 다 이루어지면 수권관(收卷官)에게 바쳤으며, 다시 등록관(謄錄官)에게 넘기되, 자호(子號)를 권의 양쪽 끝에다 쓰고 또 감합(勘合)을 써서 이를 두 개로 자르는데, 하나는 봉명(封名)이고 하나는 지은 글이었다. 봉미관(封彌官)은 봉명을 받아 물러가서 별처에 있고, 등록관이 서사인(書寫人) 등을 모아 주묵(朱墨)으로 문권을 전사(傳寫)하되, 사동관(査同官)은 본초(本草)를 읽고 지동관(枝同官)은 주초(朱草)를 비준하여 시관에게 넘겨 높고 낮은 것을 품제(品題)한 뒤에 봉미관(封彌官)으로 하여금 봉명(封名)을 뜯어 방(榜)을 쓰게 하였다. 강경(講經)하는 법은 자호(字號)를 써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붙이고, 또 자호를 생(栍 종이 쪽지나 대쪽으로 만든 찌)에 써서 통(筒) 속에 넣어둔다. 과거 볼 사람이 강송할 글이름을 써서 바치면 시관이 생을 뽑는데, 만약 천(天) 자를 뽑으면 경서에 붙인 천 자를 찾아서 다만 대문(大文)을 써 준다. 과거 보는 사람은 대문을 읽어서 해석하고 시관은 주소(註疏)를 강론하며, 아전이 통(通)ㆍ약(略)ㆍ조(粗)ㆍ불(不)의 넉 자를 써서 강첨(講籤)을 만들어 각각 시관 앞에 놓는다. 한 책의 강론이 끝나면 아전은 허첩(虛揲)을 가지고 위로 올라가며, 시관이 차례로 강첨을 점고하여 다수에 의하여 취한다. 이때 서로 등(等)이 같으면 아래로부터 초장(初場)에서 강경한 분수(分數)와 중(中)ㆍ종장(終場)에서 제술(製述)한 분수를 통계하는데, 그것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고 점고도 한 사람이 하지는 않았다. 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에 있는 것이다.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李氏)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성씨(창녕成氏)만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은 참의(參議)였고, 참의는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사인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우의정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領議政)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刑曹判書) 광성군(廣城君), 극증(克增)은 광천군(廣川君), 극돈(克墩)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광원군, 극균(克均)은 지중추(知中樞)였으니, 모두 일품(一品)에 올랐는데, 이 네 아들은 공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세좌(世佐)는 지금 광양군(廣陽君)이며, 문자(文字)ㆍ문손(文孫)도 높은 반열에 서서 서로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우리 성씨(창녕成氏)는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이후로 점점 커졌다. 부원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석인(石璘)은 좌정승인 창녕부원군이었고, 다음 석용(石瑢)은 유수(留守)였으며, 그 다음은 나의 증조인 예조 판서이다. 정승의 아들인 발도(發道)는 좌참찬이었고, 유수의 아들인 달생(達生)은 판중추였으며 개(槪)는 관찰사가 되었다. 증조께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맏아들은 곧 나의 조부(祖父)인데 지중추부사였고, 다음인 유(柳)는 우참찬이었으며, 그 다음인 급(扱)은 첨지중추부사였다. 나의 선고께서도 3형제였는데, 아버지는 맏이로서 지중추부사였고, 다음은 우의정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이었으며, 그 다음은 형조 참판이었다. 우리 형제도 셋인데, 큰형은 좌참찬이요, 다음형은 정언(正言)이며, 막내는 나다. 창성부원군의 아들은 참의인 율(慄)이었는데, 율 이후에는 부진하였고, 참판의 아들은 셋이었는데, 맏이인 숙(淑)은 동지중추부사이고, 다음인 준(俊)은 병조 판서이며, 그 다음 건(健)은 형조 판서요, 나 또한 예조 판서이니, 삼형제가 일시에 삼조(三曹)의 판서가 된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한 해의 명절에 거행하는 일이 한 가지뿐이 아니나, 섣달 그믐날에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진자(侲子)로 삼아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宮中)으로 들여보내면 관상감(觀象監)이 북과 피리를 갖추어 소리를 내고 새벽이 되면 방상시(方相氏)가 쫓아낸다. 민간에서도 또한 이 일을 모방하되 진자는 없으나 녹색 죽엽(竹葉)ㆍ붉은 형지(荊枝)ㆍ익모초(益母草) 줄기ㆍ도동지(桃東枝)를 한데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 대문[欞戶]를 막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문 밖으로 몰아내는 흉내를 내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 한다. 이른 새벽에는 그림을 대문간과 창문에 붙이는데, 그림에는 처용각귀종구(處容角鬼鍾馗)ㆍ복두관인(僕頭官人 급제하여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던 관)ㆍ개주장군(介冑將軍)ㆍ경진보부인(擎珍寶婦人) 그림ㆍ닭 그림과 호랑이 그림 따위였다. 섣달 그믐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과세(過歲)라 하고, 정월 초하룻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세배(歲拜)라 하는데, 정월 초하룻날에는 모두 일을 하지 않으며, 모여서 다투어 효로(梟盧) 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즐겨 논다. 새해의 자(子)ㆍ오(午)ㆍ진(辰)ㆍ해(亥) 일에도 이렇게 하였고, 또 어린이들은 다북쑥[蒿]을 모아서 동산에서 불을 지르는데 해일은 훈가훼(薰猳喙)라 하고, 자일은 훈서(薰鼠)라 한다. 모든 관청은 3일에 한하여 출사하지 아니하고, 서로 친척이나 동료들 집으로 가서 명함을 던졌는데, 대가집에서는 미리 함(函)을 만들어서 이를 받았다. 근년 이래로 이 풍습이 갑자기 고쳐졌으니, 또한 세상이 변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달 보름날은 원석(元夕)이므로 약밥을 만들고, 2월 초하룻날은 화조(花朝)라 하여 이른 새벽에 솔잎을 문간에 뿌리는데, 속언으로는, “그 냄새나는 빈대가 미워서 솔잎으로 찔러 사(邪)를 없앤다.” 한다. 3월 3일을 상사(上巳)라 하는데 속언으로는 답청절(踏靑節)이라 한다. 이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교외의 들로 나가 놀았는데, 꽃이 있으면 꽃술을 지져서 술을 마시고, 또 새로 난 쑥으로 설고(雪糕)를 만들어 먹는다. 4월 8일을 연등(煙燈)이라 하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이날이 석가여래(釋迦如來)가 탄생한 날이라 한다. 봄에는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기(旗)를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떼를 지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등불 켜는 기구를 구걸하는데, 이를 호기(呼旗)라 한다. 이날이 되면 집집마다 장대를 세워 등불을 걸었으며, 부호들은 크게 채색한 등대(燈台)를 세웠는데, 층층이 달린 그 많은 등불은 마치 하늘에 별이 펼쳐진 것과 같아서 도인(都人)들은 밤새도록 구경하였고, 무뢰한 젊은이들은 이것을 건드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불교를 숭상치 않으므로 혹 연등놀이를 한다 해도 옛날에 번성하던 것과는 같지 않다. 5월 5일은 단오(端午)라 하여 애호(艾虎)를 문에다 걸고 창포(菖蒲)를 술에 띄우며, 아이들은 쑥으로 머리를 감고 창포로 띠를 하며, 또 창포 뿌리를 뽑아 수염처럼 붙였다. 도인(都人)들은 길거리에 큰나무를 세워 그네놀이를 하였고, 계집아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하고 길거리에서 떠들썩하게 채색한 줄을 잡고 서로 다투며, 젊은이들은 몰려와서 이것을 밀고 끌고 하여 음란(淫亂)한 장난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이것을 금하여 지금은 성행하지 않게 되었다. 6월 15일은 유두(流頭) 날인데 옛날 고려의 환관(宦官)들이 동천(東川)에서 더위를 피하여 머리를 풀고는 물에 떴다가 잠겼다가 하면서 술을 마셨음으로 유두라 하였다. 세속에서는 이로 인하여 이날을 명절로 삼고 수단병(水團餠)을 만들어 먹었으니, 대개 회화나무 잎 가루를 냉수에 일어 먹던 유속인 것이다. 7월 15일은 속칭 백종(百種)이라 하여 승가(僧家)에서 1백 가지 꽃 열매를 모아 우란분(盂蘭盆)을 베풀었는데, 서울에 있는 여승(女僧)의 암자(庵子)에서 더욱 심하였으므로 부녀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곡식을 바치고는 돌아가신 어버이의 영혼을 불러 제사지냈다. 왕왕 중들이 탁자(卓子)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엄금하여 그 풍속이 없어지게 되었다. 중추(中秋)의 달구경, 중양절의 높은 데 오르기, 동지(冬至)의 팥죽, 경신일(庚申日)의 밤새우기 등 모두가 옛날의 유속이다.
○임금의 명을 받들고 사신(使臣)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동료들이 모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었고, 또 떠나는 날에는 모두 교외로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비록 훈귀(勳貴)한 대신이라도 속태를 면치 못하였다. 오직 홍익성(洪益城)만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궁궐에 나아갔을 뿐이었고, 다른 곳에는 인사를 가지 않았으며, 또 일찍이 마중이나 전송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로 오는 사신이나 각 도의 감사가 떠나는 날도 다만 녹사(錄事)를 보내어 한 병의 술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게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야말로 재상의 체모를 얻었다 하였다.
◯내가 사는 서산(西山) 남쪽에는 여승(女僧)의 암자가 있는데, 갑술(甲戌)년 7월 16일에 암자에서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어 선비집 부녀자들이 많이 모였었다. 여자들이 뒷 소나무 언덕에 올라가 더위를 피하는데, 소나무 사이에 버섯이 많이 났는데 향기롭고 고와서 먹음직하였다. 여자들이 탐내어 삶아 먹더니, 많이 먹은 이는 엎어져 기절해 버렸고, 조금 먹은 이는 미쳐서 소리를 지르고, 혹은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으며, 혹은 슬피 울고 혹은 노하여 서로 때리기도 하였는데, 국물을 마셨거나 냄새를 맡은 이는 다만 어질어질 하였을 뿐이었다. 자녀들이 듣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달려와 모였는데, 암자에는 다 들어갈 수 없어 혹은 산기슭에서 혹은 밭가운데서 각각 병자를 구제하니, 길가의 구경꾼이 저자와 같았다. 주문을 잘 외우는 사람이 있으면 다투어 맞이해서 배[腹]에다 주문을 읽었고, 또 은사발에 불결한 것을 담아 옥수(玉手)로 물에 반죽하여 푸닥거리하여 버리니, 상하ㆍ귀천이 한데 섞여 분변할 수 없었다. 오정(午正)이 지나자 비로소 깨어나기는 하였으나, 이 때문에 병이 든 사람도 혹 있었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을 잘하였으며,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천하 제일이었다. 또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 타는 재주도 훌륭하였다. 성격이 부탄(浮誕)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경승(景勝)을 즐겨 북문(北門) 밖에다 무이정사(武夷情舍)를 지었으며, 또 남호(南湖)에 임하여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 문사(文士)를 불러모아 12경시(景詩)를 지었으며, 또 48영(詠)을 지어 혹은 등불 밑에서 이야기 하고 혹은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혹은 연구(聯句)를 짓고 혹은 바둑 장기를 두고 풍류가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술마시고 놀았다. 당시의 이름있는 선비로서 교분을 맺지 않은 이가 없었고, 무뢰하고 잡업(雜業)을 하는 이도 많이 모여들었다. 바둑판과 바둑알은 모두 옥(玉)으로 만들었고, 또 금니(金泥)를 글자에 입히고 사람에게 명주와 생초를 짜게 하여, 곧 붓 가는 대로 글씨를 쓰다가 진초(眞草)와 난행(亂行)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내주는 일이 많았다. 나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므로, 중씨가 가서 뵙고는 정자 가운데 있는 여러 시에 화답하니 시구가 뛰어나고 절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드디어 공경히 대접해 보내면서 뒷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 대부인께서 중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자의 도(道)는 문을 닫아 손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패할 것이 뻔하니 너는 같이 사귀지 말아라.” 하시므로, 그 뒤에 재삼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더니, 얼마 안 가서 패사(敗死)하였다. 온 집안은 모두 대부인의 문장과 감식(鑑識)에 탄복하였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마침내 부인과 마주앉지 않았고, 생원(生員) 한경기(韓景琦)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일찍이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으며, 만약 종년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변하지 못하였고, 또한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운우(雲雨 남녀의 교정(交情))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붉게 단장하고 족두리한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내가 저술한 것으로는 《시집》15권, 《문집》15권, 《보집(補集)》5권,《풍아록(風雅錄)》2권, 《주의(奏議)》6권,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6권, 《용재총화(慵齋叢話)》10권,《금낭행적(錦囊行跡)》30권이고, 편찬한 것은 《풍소궤범(風騷軌範)》30권, 《악학궤범(樂學軌範)》6권, 《상유비람(桑楡備覽)》40권인데, 비록 남의 이목(耳目)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심심풀이로 보기에는 족하다.
◯중추(中樞) 민대생(閔大生 1368-1463 : 96세 졸)은 나이 90여 세였는데, 정월 초하룻날 조카들이 와서 뵙고는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까지 향수(享壽)하소서.” 하니, 중추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 90여 세인데 내가 만약 백 년을 산다면 다만 수 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니, 무슨 입이 이렇게 복 없는 소리를 하느냐.” 하고는 드디어 내쫓았다. 또 한 사람이 나아가 말하기를, “원하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을 향수하시고 또 백 년을 향수하옵소서.” 하였더니, 중추는 “이것은 참으로 송수(頌壽)하는 체모(體貌)로다.” 하고, 잘 먹여 보내었다.
◯세종조(世宗朝)에 신상(申商)은 예조 판서가 되고, 허조(許稠)는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신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기울면 돌아오고, 허는 이른 아침에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지고 난 뒤에 돌아왔었다. 하루는 허가 먼저 나가서 조(曹)에 앉았는데 신이 이조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가서 고하기를, “어찌 늦게 출근하여 일찍 파하시오.” 하니, 신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인은 일찍 출근한다 해도 무슨 이익되는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한다 하나 무슨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습니까. 각각 자기의 수완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신은 때에 임하여 결단을 잘 하였고, 허는 부지런하되 각박하게 시행하니 성격이 같지 않은 것이다.
◯최세원(崔勢遠)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친구 중에 강진산(姜晉山)ㆍ노선성(盧宣城)ㆍ성하산(成夏山)은 모두 음탕하고 못난 사람이로되, 오직 서평(西平) 한경신(韓敬愼)만은 절조가 있다 하여 나도 또한 당시의 성인(聖人)이라 말했더니, 이제 와서 보니 성인이 아니로다.” 하므로, 사람들이 그 연고를 묻자, 대답하기를,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울타리 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평이 문 앞 추녀 끝에 앉아 있는데, 어린 종년이 세숫물을 올리니까, 서평이 세숫물을 움켜서 종년 얼굴에 뿌리면서 희롱하는데 이것이 어찌 성인의 소위이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용재총화 제3권
◯신돈(辛旽 ?-1371)이 국정(國政)을 잡은 처음에 기현(奇顯)의 집에 기숙하면서 기현의 처와 사통하였는데, 기현 부처는 늙은 노비처럼 시종하였다. 신돈의 권위가 점차 성해져서 백성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 죽을 지경에 두고자 한다면 뜻대로 안 됨이 없었다. 만약 자색이 아름다운 사대부의 처첩이 있다고 들으면, 그 남편을 조그마한 죄과로라도 순군옥(巡軍獄)에 보내고는 기현 등을 시켜서, “만약 주부(主婦)가 친히 가서 부탁하면 억울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 부인이 신돈 집에 와서 대문을 들어서면 말과 따르는 사람을 돌려보내고, 중문을 들어서면 비복들까지 보내게 하였으며, 신돈 집안 사람이 데리고 안문으로 들어오면 신돈은 서당(書堂 서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옆에 마련된 이부자리에서 마음대로 간음하는데, 사랑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수일 동안 머물게 하였다가 보내고서는 그녀의 남편을 놓아 주었다. 만약 불손한 자가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죽게 된 자도 있었으므로, 부녀자들은 그 남편이 잡혔다고 들으면 반드시 단장을 하고 먼저 신돈의 집에 가는데, 하루도 빠진 날이 없었다. 신돈은 양도(陽道)가 쇄할까 염려하여 흰 말의 음경을 자르거나 지렁이를 회(膾)쳐 먹는데, 만약 황구(黃狗)나 흰 매를 보면 소스라쳐 놀라고 두려워하니, 그 당시 사람들은 늙은 여우의 정령이라 하였다.
◯고려 재신(宰臣)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은 시대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환란을 피하고자 꾀하여 미친 사람 시늉을 하였었다. 그 전에 서해도(西海道)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언제나 “아미타불”을 외었다. 공과 서로 친한 수령 한 사람이 있었는데, 창 밖에 와서 “조운흘” 하고 외었다. 공이 “너는 어찌 내 이름을 외우느냐.” 하니, 수령은, “영감의 염불은 성불(成佛)하기 위함이요, 나의 염불은 영감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고는 서로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또 청맹(靑盲 눈은 멀정하나 보지 못한다)병이 들었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사직하여 집에 있었는데, 그의 첩이 공의 아들과 서로 사통하여 늘 앞에서 수작을 하였으나, 수년 동안 모르는 척하였다. 난리가 진정되자 눈을 부비며, “나의 눈병이 나았다.” 하더니, 그 첩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서 그 죄를 다스려 강에 던졌다. 그가 살던 시골집은 지금의 광나루[廣津] 밑에 있다. 공이 자청하여 사평원주(沙平院主)가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사귀어 늘 서로 모여 앉아 술마시며 잡담을 하는데, 끝날 줄 몰랐다.
◯철성(鐵城 철성 부원군은 최영(1316-1388)을 작봉한 것이다)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紳]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잡아 위신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 데 족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재상들은 시로 초대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투어 성찬(盛饌)을 차려 호사함에 힘썼으나, 공만은 손님을 초대하여 한낮이 지나도록 찬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기장과 쌀을 섞어서 지은 밥에다 잡동사니 나물을 차렸지만, 손님들은 배고픈 참이라 채반(菜飯)이라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 집 밥이 맛이 좋다.” 하니, 공은 웃으며, “이것도 용병(用兵)하는 술모(術謀)요.” 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점련(占聯)하기를,
3척 칼머리에 사직이 편하고나 / 三尺劍頭安社稷
하니, 당시의 문사들은 아무도 대구를 짓지 못했는데, 공이 재빨리,
한가닥 채찍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공이 항상 임렴(林廉)의 소행을 분하게 여겨 그의 종족을 모두 죽였는데, 공이 형(刑)을 받으면서, “평생 동안 나쁜 짓 한 일이 없는데, 다만 임렴을 죽인 것이 지나쳤다.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무덤은 고양군(高揚郡)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줌의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라, 흔히들 홍분(紅墳)이라고 한다.
◯포은(圃隱 1337-1392)은 학문이 정수(精粹)하고 문장도 호한(浩瀚)하였다. 고려 말에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돕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혁명에 즈음하여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추대하는 곳이 있었건만 공만 홀로 의연(毅然)히 범하지 못할 기색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서로 잘 아는 중이 있었는데, 공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를 알만한데, 공은 어찌 고집만 하고 고생하는가.” 하니, 공은 “사직을 맡은 사람이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처신할 바가 있다.” 하였다. 하루는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호)이 뵈러 갔는데 마침 공이 나왔다. 공을 따라 동리를 나오는데, 화살통을 짊어진 무사 수명이 말 앞을 가로질러 가니, 아졸(呵卒)이 벽제(辟除) 소리를 질렀으나 무사는 피하지 않았다. 이때 공이 매헌을 보고, “그대는 속히 가라. 나를 따르지 말라.” 하였으나, 매헌이 그대로 따라가니 공이 갑자기 노하여, “어찌 내 말을 듣지 않는가.” 하므로, 매헌이 부득이 작별하고 돌아왔는데 조금 있다가 누가 와서, “정 시중이 살해당했다.” 하였다.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은 고려가 멸망함을 통탄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의 벼슬을 던지고 선산(善山) 금오산(金鰲山) 밑에 살면서 본조에서는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였는데, 본조에서는 예로써 대하였으나 역시 그 뜻을 빼앗지 못했다. 공은 군(郡)의 여러 생도를 모아 두 재(齋)로 나누었는데, 양반의 후손들을 상재(上齋)로 삼고, 마을의 천한 가문의 아이들을 하재(下齋)로 삼아, 경(經)ㆍ사(史)를 가르치고 근(勤)ㆍ타(惰)를 시험하는데 하루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백 수십 명이었다.
◯고려의 왕들은 흔히 원(元) 나라의 공주(公主)를 아내로 삼으니, 원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선비의 딸을 요구하여 후궁으로 맞이하거나 후궁으로 들지 못한 자는 대신에게 맡겼다. 조반(趙胖 1341-1401)공의 누이동생도 원 나라로 들어가서 대상(大相)의 부인이 되었는데, 공도 젊었을 때 따라갔었다. 누이동생집에 여동(女僮)이 있었는데, 뛰어나게 아름답고 또 글을 알아서 공이 첩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항상 원 나라에 있었는데, 부부의 아기자기한 정은 비익조(比翼鳥)나 연리지(連理枝)라 할지라도 거기에 비길 수 없었다. 하루는 외사(外舍)에서 함께 자는데, 야반(夜半)에 도란도란 소리가 들렸으나 단잠에 빠져 그 까닭을 묻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집에는 한 사람도 없고 이웃집 사람이 말하기를, “황제가 병란을 피해 상도(上都)로 들어갔고, 대상과 부인도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하여 갔습니다. 이미 대병력이 근교에 임박하여 온 도성이 허둥지둥 다투다시피하며 처자를 데리고 남북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하였다.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대상집 어린 하인이 홀연이 나타나더니 땀을 흘리며 다급히 말하기를, “거가(車駕)가 급하게 가므로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공이, “상도는 멀어서 갈 수 없으나 우리나라는 가까우니 우리들 세 사람은 빨리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며, 집안을 뒤져 쌀 한 말들이 전대를 얻어 종은 혼자서 말을 타고 공과 여자는 한 말에 같이 타고 떠났다. 도중에 종이, “이렇게 병란으로 시끄러울 적에 이런 요물(妖物 여자)을 끼고 있다가 도적을 만나면 살아날 이치가 없으니, 원하건대, 군께서는 정을 끊고서 이 여자를 버리시오.” 하였는데, 여자는 날뛰면서 울부짖으며 생사를 같이하자고 하니, 공도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옷소매를 꽉 쥔 손을 풀지 못하였고, 두 줄기 눈물은 옷깃을 적시니, 옆의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사세(事勢)를 살핀 공은 마침내 여자를 버리고 가니, 여자는 울면서 따라왔다. 해가 저물어 숙소에 들면 여자도 뒤쫓아 왔는데, 무릇 3주야를 쉬지 않고 오니 두 발이 해져 걸을 수 없게 되었는데도 힘을 다하여 따라오다가 시냇가에 있는 높은 다락으로 여자가 문득 앞장서서 오르기에 공은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려니 생각하고 다락을 돌아보니 여자는 다락 밑에 있는 못 속으로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공은 전에는 재주와 외양을 사랑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그 절개에 더욱 탄복하여 종복과 더불어 본국에 돌아와 노경에 이르러서도 항시 당시의 비통함을 말하여 마지않았다.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하였다. 밤낮으로 임금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를 시켜 다시 가서 보게 하였다. 이익재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쓰는데,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
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
하였다. 익재가 돌아와서,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아도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의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이익재가 술잔을 올리고는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므로 이익재는 그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말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그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태조가 개국하자 재상 조반(趙胖)은 중국에서 자랐다 하여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보냈다.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 태조)가 불러보고 혁명을 꾸짖으니, 조반이 대답하기를, “역대의 창업한 임금은 거의가 하늘의 명에 따라 혁명을 하였으니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은연중 명 나라 일을 빗대었다. 중국 말을 쓰니, 황제가 “너는 어찌 중국 말을 아느냐.” 하니, 조반이, “신은 중국에서 자랐고 전에 탈탈(脫脫)의 군중(軍中)에서 폐하를 뵌 일이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조반이 자세히 말하니, 황제가 어탑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 “만약 탈탈군이 그대로 있었다면 짐(朕)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경은 실로 짐의 친구다.” 하면서, 빈객의 예로써 대접하고 ‘조선’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올린 표문(表文)의 말씨가 공손하지 못하다 하여 표문을 지은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 1353-1397)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 1358-1397)을 부르니, 김약항과 정총이 경사(京師 북경)로 떠났다. 광산군이 안주관(安州舘)에 이르러 시를 지었는데,
여관은 어찌 이리 쓸쓸하느냐 / 旅舘何寥落
풍연은 들 밖에서 저물었다 / 風煙野外昏
객지에서 회포는 사납고 / 客中懷抱惡
침상에서 꿈길마저 어지럽다 / 枕上夢魂翻
땅이 궁벽하니 거민도 적은데 / 地僻居民少
해 저무니 새소리만 시끄럽다 / 日斜飛鳥喧
타향의 봄은 쓸쓸하니 / 異鄕春寂寂
온갖 생각에 혼자 난간에 기대었노라 / 百慮獨憑軒
하였다. 남경(南京)에 도착하자 함께 잡혀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서원군이 무엇(원문이 빠진 듯)을 팔아 행량(行糧)을 마련하자고 청하였으나, 정탁(鄭擢)이 빼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겼다. 나중에 황제가 노여움을 거두어 그들의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찾아 가게 하였으나, 끝내 찾아오지 못했다. 광산군의 딸은 나의 조모이시다. 늙은 여자종이 있었는데, 스스로 집안 사람이라 하고 남경으로 가서 한 항구에 도착하니, 양쪽 강 언덕에 높은 누각이 솟아 있고 누각 안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자수(刺繡)를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바가지만한 귤 껍질이 파도 위에 점점이 떠 있고, 버드나무 그늘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다고 한다. 늙은 종은 본시 어리석어 땅 이름을 자세히 묻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양자강(楊子江)이 아닌가 싶다.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은 큰 공을 이룬 뒤에 세운 공을 믿고 교만하여 같은 반열의 재상들을 종처럼 볼 뿐 아니라 임금이 불러도 병이라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게다가 병 문안을 하기 위해 중사(中使 왕명을 전하는 내시)가 계속 이르는데도 내실(內室)에서는 음악 소리가 어지러웠다. 혹 어떤 사람에게 관직을 주고자 하면 이름을 작은 종이에 써서 사람을 시켜 천거하게 하니 친한 친구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두루 나누어 있었다. 돈의문(敦義門) 안에 큰 집을 지었는데, 인마(人馬) 소리가 싫다 하여 아뢰어서 문을 막고 사람의 통행을 금하니 사치스럽고 참담한 행동이 날로 심하더니 마침내 죄를 얻어 멀리 함양(咸陽) 별장으로 유배되었다. 세종(世宗)이 유신들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적에, 이숙번이 태종 시대의 일을 잘 안다고 해서 급히 불렀다. 이숙번이 흰옷을 입고 궁궐에 나오니 고관들과 재상들이 모두 후배이므로 다투어 나아가 배알하였으나, 이숙번은 다만 손을 흔들어 말리면서, “어렸을 때에 누구는 영매(英邁)하고 누구는 성실하다고 하므로 나도 영장(令長)의 그릇이 되리라 생각하였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그의 헌걸(軒傑)한 의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춘정(변계량 1369-1430)은 성격이 인색하여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아니하고, 동과(冬瓜)를 쪼갤 때마다 쪼개는 대로 기록하였으며,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실 때에도 마신 잔 수를 짐작하고는 술병을 조심스럽게 봉하여 거둬들이므로 그의 안색을 살피고는 가버리는 손님이 자못 많았다.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러 오랫동안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엮을 때, 세종께서 그의 문장을 존중히 여겨 궁중에서 하사하는 찬(饌)이 끊이지 않았고, 고관과 동료들도 다투어 주식을 보냈는데, 하나하나 여러 방 속에 저장하였다. 날이 오래되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담 밖에까지 나도, 썩으면 언덕에 갔다 버릴지언정 종과 시중들은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하였다.
◯황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 1363-1352))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만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 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서리맞은 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니,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말라.” 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한 나무의 열매가 모두 없어졌었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정초(鄭招 ?-1434) 대제학은 총명이 뛰어났으니 무릇 서적을 한 번 보면 암송하였다. 과거볼 시기가 이미 닥쳐왔으나 공은 놀기만 하더니 하루는 육경(六經) 책갑을 뽑아 한 번 슬쩍 보고는 책을 덮고 다시 보지 아니하였는데, 강론할 때는 깊은 뜻을 모두 설명하였고 메아리같이 응답을 하였다. 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에 있을 때 군졸 수백 명을 한 번 보고 모두 그 얼굴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아니, 사람들이 모두 그 신통함을 탄복하였다. 어렸을 때에 중이 《금강경(金剛經)》을 읽는 것을 보고, “ 저 금강경 같은 것은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다.” 하니, 중이 “그대가 만약 외면 내가 성찬을 낼 것이고, 그대가 만약 외지 못하면 그대가 성찬을 내어라.”하고, 서로 약속을 한 뒤에 공이 북채를 쥐고 북을 치면서 금강경을 물 흐르듯 암송하여 거의 반 권쯤에 이르니 중이 도망해 버렸다.
◯맹좌상(孟左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대사헌이 되고 박안신(朴安信 1369-1447) 공이 지평이 되어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국문(鞠問)하는데(1408), 임금에게 여쭈지 아니하고 고문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저자에서 죽이려고 할 적에 맹상은 실색(失色)하여 말을 못하는데 박공은 침착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맹상의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상관이요, 나는 하관이나 이제 죽을 죄인이 되었으니, 어찌 존비가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대를 지조가 있다고 했는데, 어찌 오늘은 이렇게도 겁을 내는가. 그대는 저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하였다. 또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가져 오너라.” 하였으나, 나졸이 듣지 않으니, 공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네가 만약 듣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반드시 먼저 너에게 화를 주겠다.” 하고, 말소리와 안색을 더욱 엄하게 하니 나졸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기와조각을 가져다 주었다. 공이 시를 지어 기와조각에 쓰기를,
네 직책 다하지 못하였으니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 爾職不供甘守死
임금이 간신을 죽였다는 이름이 남게 될까 두렵소 / 恐君留殺諫臣名
하고 나졸에게 주어, “속히 가서 임금께 보이라.” 하니, 부득이 궐내에 갖다 바쳤다. 이때에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이 좌정승이었는데, 급히 가마를 타고 궐내에 나아가 극간(極諫)하니 임금도 노염이 풀려 마침내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다.
◯재상 하경복(河敬復 1377-1438)이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용력(勇力)으로 세 번 화를 면하였다. 한 번은 태종이 내란을 평정할 때에 잘 아는 사람이 궐내에서 숙직하였으므로, 서로 얘기하고자 우연히 들어갔다가 마침 문이 닫혀 나오지 못하였다. 사방을 방황하는데 병졸 여러 사람이 달려와 몰고 가서 죽이려고 하기에 내가 힘을 다해 싸우고 달아나니 여러 사람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곧 어전에 이르러, ‘나 같은 장사를 죽여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으니 태종께서 들으시고 용서하셨다. 이는 용력이 없었던들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젊었을 때에 깊은 산에 들어가서 사냥하다가 졸지에 맹호를 만났으나 피할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범의 목줄을 잡고 땅에 던지니 그 사이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 구해 주기를 외쳤으나 와주는 사람이 없고 돌아보았으나 한 치 되는 칼조차 없었다. 그래 별 수 없이 맨손으로 막다가 언덕 밑에 물 웅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밀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니 사람과 짐승이 모두 지쳐서 땀이 온몸을 적셨다. 마침내 그 범을 물 속에 빠뜨리니 범이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 힘이 빠지기에 나무와 돌을 가지고 때려죽였다. 이는 용력이 없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변방에서 적을 방어하고 있을 때 적의 기병이 구름같이 모여 드는데 화살이 비오듯 하였다. 앞에 큰 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만약 적이 먼저 차지하면 적이 이기고 내가 먼저 차지하면 내가 이길 것이므로, 마침내 몸을 날쌔게 달려서 먼저 나무를 차지하였는데, 적도 쫓아왔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싸움에 이기니 이 또한 용력이 없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벼슬은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고 제일 가는 용장으로서 이름을 당세에 떨쳤다.
용재총화 제4권
◯홍 재상(洪宰相)이 아직 현달하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굴 속에는 집이 있고 17, 8세의 태도가 어여쁜 여승이 엄연히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빌리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되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방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蜥蝪]과 같은 조그만 물건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거늘 공은 아전에게 명하여 밖으로 내던지게 하자 아전은 죽여버렸는데,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거늘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밤이면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는 함 속에 넣어 변방을 순행할 때도 사람을 시켜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동파역(東坡驛)으로부터 송도(松都)로 향하는 어간에 보현원(普賢院)이 있는데 전하기를, “의종조(毅宗朝)의 문신이 조난당한 곳이다.” 한다. 내가 젊었을 때에 그 들을 지나는데, 산기슭에 깊고 검은 못이 있어 그 길이가 수리(里)나 되므로 지난 일을 생각하고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였더니, 후에 이곳을 지날 때는 이미 뭍으로 바뀌어 농사를 짓는 땅이 되어 있었다.
◯계성군(雞城君) 이양생(李陽生 1423-1488)은 본래 서자로 미천한 사람이다. 일찍이 신을 만들어 겨우 먹고 살았는데, 장용대(壯勇隊)에 들어가 이시애를 정벌하는 일에 공이 있어서 공신호(功臣號)를 하사받아 가선(嘉善)에 이르고 봉군(封君)되었으나 글을 몰랐다. 그러나 성품이 순진하고 근엄하고 화락하여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었다. 일찍이 옛 장터를 지나다가 이전에 미천하였을 때 사귀었던 친구를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얼싸안고 서로 이야기한 뒤에 떠났다. 그 아내는 나의 종년인데, 용모가 추하고 보잘것없는 데다가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권하기를, “그대는 큰 공이 있어 벼슬이 재추(宰樞)에 이르렀으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어찌 다시 이름있는 가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자식을 낳지 않느냐.” 하였으나, 그는, “내가 젊었을 때 빈곤을 같이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며, 천인으로서 양가의 딸을 취함은 의에 해가 되니 옳지 못하다. 내 적형(嫡兄)이 미약하여 떨치지 못하니 그 아들로써 대를 삼아 내 음공에 힘입게 하면 이는 곧 우리 종가를 크게 함이 될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수를 아니 장자(長者)의 풍이 있다.” 하였다. 성품과 국량이 넓고 커서 비록 좋은 비단옷을 남에게 벗어 주더라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뜻이 없었다. 또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그가 호랑이를 잡는 것은 풍부(馮婦)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사람의 안색을 보고서 도적을 분변하여 10에 1이라도 실수가 없었으니 소옹(邵雍)이라도 이만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매양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잡을 일이 있으면 조정에서는 이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용재총화 제5권
◯또, 어떤 상좌가 사승을 속이기를, “우리 집 이웃에 젊고 예쁜 과부가 있는데 항상 내게 말하기를, ‘절의 정원에 있는 감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나는, ‘스승이 어찌 혼자만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그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감이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네가 따서 갖다 주어라.” 하였다. 상좌가 모두 따다가 제 부모에게 갖다 주고는 중에게 가서, “여자가 매우 기뻐하며 맛있게 먹고는 다시 말하기를, ‘옥당(玉堂)에 차려놓은 흰 떡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내가, ‘스승이 어찌 혼자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은, “만약 그렇다면 네가 거두어서 갖다 주어라.” 하므로, 상좌가 모두 거두어 제 부모에게 주고는 중에게 가서, “과부가 매우 기뻐하며 맛나게 먹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으로써 네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겠느냐.’ 하기에 내가, ‘우리 스승이 서로 만나보고 싶어합니다.’ 하니, 과부는 흔연히 허락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친척과 종들이 많으니 스승이 오시는 것은 불가하고 내가 몸을 빼어 나가서 절에 가서 한 번 뵈옵겠다.’ 하므로, 내가 아무 날로 기약했습니다.” 하니, 중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 날짜가 되자 상좌를 보내어 가서 맞아 오게 하였더니, 상좌가 과부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폐(肺)를 앓는데 의사의 말이 부인의 신을 따뜻하게 하여 배를 다림질하면 낫는다 하니 한 짝만 얻어 갑시다.” 하니, 과부가 드디어 주었다. 상좌가 돌아와서 문 뒤에 숨어서 엿보니 중이 깨끗이 선실(禪室)을 쓸고 자리를 펴놓고 중얼거려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여기에 앉고 여자는 여기 앉게 하고, 내가 밥을 권하고 여자가 먹으면 여자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서로 함께 즐기지.” 하였다. 상좌가 들어가서 신을 중 앞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끝장났습니다. 내가 과부를 청하여 문까지 이르렀다가 스승의 하는 소행을 보고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네 스승은 미친 사람이구나.’ 하고, 달아나므로 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하고, 다만 벗어 버리고 간 신 한 짝만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중이 머리를 숙이고 후회하며 하는 말이, “네가 내 입을 쳐라.” 하니, 상좌가 목침(木枕)으로 힘껏 쳐서 이빨이 다 부러졌다.
◯어떤 중이 과부를 꾀어 장가들러 가는 날 저녁에 상좌가 속여 말하기를, “가루 양념과 생콩을 물에 타서 마시면 매우 양기(陽氣)가 좋아집니다.” 하니, 중이 그 말을 믿고 그대로 하였다. 그런데 과부집에 갔더니, 배가 불러 간신히 기어서 들어가 휘장을 내리고 앉아 발로 항문을 괴고 꼼짝하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과부가 들어왔으나 중이 꿇어앉아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어찌 이처럼 목우(木偶 나무로 만든 인형)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하며 손으로 잡아 끄니, 중이 땅에 엎어지면서 설사를 하여 구린내가 가득 찼으므로 과부는 매를 때려 내쫓았다. 밤중에 혼자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흰 기운이 길을 가로질러 있었다. 중이 시냇물로 생각하고 옷을 걷어올리고 들어가니 가을 보리꽃이었으므로 중은 성이 났다. 또 흰 기운이 길을 가로질러 있는 것을 보고, “보리밭이 나를 속이더니 또 보리밭이 있구나.” 하고, 옷을 걷어올리지 않고 들어가니 그것은 물이었다. 중은 옷이 모두 젖은 채 다리 하나를 지나가는데 아낙네 두어 명이 시냇가에서 쌀을 일고 있었다. 중이, “시큼시큼하구나.” 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오는 길에 낭패하고 수고함을 형용함이다. 아낙네들은 그 까닭을 모르고 모두 와서 길을 막으며, “술 담글 쌀을 이는데 어찌 시큼시큼하다는 말을 해요.” 하고, 옷을 다 찢고 중을 때려 주었다. 해가 높이 뜨도록 얻어 먹지 못하고 중은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어서 마를 캐어 씹고 있으니, 갑작스레 웃고 외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수령의 행차였다. 중은 다리 밑에 엎드려 피하고 있으면서 가만히 생각하기를, “이 마가 매우 맛이 있으니 이것을 수령에게 바치면 밥을 얻을 수 있겠는데.” 하고, 수령이 다리에 이르자 중이 갑자기 나타나니 말이 놀라 수령이 땅에 떨어졌으므로 크게 노하여 매를 때리고 가버렸다. 중이 다리 옆에 누워 있었더니, 순찰관 두어 명이 다리를 지나가다가 보고, “다리 옆에 죽은 중이 있으니 몽둥이질하는 연습을 하자.” 하고, 다투어 몽둥이를 가지고 연달아 매질하였다. 중은 무서워서 숨도 쉬지 못하다가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다가오며 말하기를, “죽은 중의 양근(陽根)이 약에 쓰일 것이니 잘라서 쓰자.” 하므로 크게 소리 지르며 달아나서 저물녘에야 절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소리를 높여 상좌를 불러, “문 열어라.” 하니 상좌가, “우리 스승은 과부집에 갔는데 너는 누구이기에 밤중에 왔느냐.” 하고, 나와 보지 않았다. 중이 개구멍으로 들어가니 상좌가, “뉘 집 개냐. 간밤에 공양할 기름을 다 핥아 먹더니 이제 또 왔느냐.” 하고, 몽둥이로 때렸다. 지금도 낭패하여 고생한 사람을, “물 건넌 중”[渡水僧]이라고 한다.
◯이장군(李將軍)이 있었는데, 젊고 훤칠하여 풍채가 옥과 같았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큰길을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22, 3세쯤 되어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계집종 두어 명을 거느리고 장님에게 점을 치고 있었다. 장군이 눈짓을 하니 그녀 또한 장군의 풍모를 사모하는 듯이 서로 눈을 떼지 않았다. 장군이 졸병에게 그녀의 가는 곳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녀는 점치기를 마치더니 말을 타고 계집종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들어가 사제동(沙堤洞)으로 향하였다. 그 집은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큰 집이었다. 이튿날 장군이 사제동에 들어가서 여염집에 출입하다가, 마침 그 동네에 사는 활공장이[弓匠]를 만났다. 장군은 무인(武人)이라 이내 서로 사귀어 나날이 이야기하고 놀면서 동네의 모든 집에 관하여 물으니 활공장이는 일일이 말하여 주었다. 장군은 또 묻기를, “저 산 기슭에 있는 큰 집은 무슨 성씨(姓氏)요.” 하니, 활공장이는, “재상 모공(某公)의 딸인데, 요사이 과부가 된 집이 올시다.” 하였다. 그 뒤부터는 장군이 오가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과부가 사는 집을 물었다. 하루는 한 소녀가 와서 불을 얻어 갔는데, 활공장이가, “지금 온 소녀가 과부댁 사람이니 장군은 그리 아십시오.” 하였다. 이튿날 장군은 다시 활공장이를 찾아와서 사정을 말하고,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여 잊을 수 없으니, 만약 그대로 인하여 성사하게 되면 사생(死生)을 그대의 명령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활공장이가 그 소녀를 불러 장군의 말을 전하고 돈과 옷감을 주었더니 소녀가 드디어 승낙하였다. 장군이 소녀에게 말하기를, “너를 매우 사랑하지만 일단 정회(情懷)가 있으니, 네가 내 청원을 들어주면 후하게 사례할 뿐만 아니라 너의 살림을 맡아 주겠다.” 하니, 소녀가, “말씀해 보십시오.” 하였다. 장군이, “요전에 내가 네 주인을 길에서 본 뒤로는 마음이 황홀하여 입맛을 잃었다.” 하니, 소녀가,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였다. 장군이, “어떻게 하느냐.” 하니, 소녀는 “내일 저물녘에 우리집 문 밖으로 오시면 제가 나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였다. 장군이 약속한 대로 가니 소녀는 반가이 나와 맞이하여 제 방에 들이고 경계하기를, “서두르지 마시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며,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장군이 두려워서 그 소녀에게 속지나 않았나 의심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안채에서 등불이 켜지고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인 여자가 변소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때 그 소녀가 내려와서 장군을 끼고 들어가 안방에 있게 하고 다시 경계하기를, “참고 참으십시오. 참지 않으면 계획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므로, 장군은 캄캄한 방에 들어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등불이 켜지고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들어왔는데, 계집종이 물러가자 주인 여자는 적삼을 벗고 낯을 씻고 분(粉)을 바르니 얼굴이 옥(玉)처럼 깨끗하였다. 장군은 생각하기를, “나를 맞으려나보다.” 하였더니,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동(銅)화로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며 술을 은주전자에 덥히기에 장군은, “내게 먹이려나보다.” 생각하고, 나가려 하다가 문득 그 소녀의 참으라고 한 말을 생각하여 적이 앉아 기다렸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창문에 모래를 끼얹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한 거만한 사나이를 맞아들였다. 그 사나이는 들어서자마자 선뜻 주인 여자를 껴안고 희롱하므로, 장군은 섬찟하여 나가려고 하였으나 도리가 없어 그냥 있으니, 조금 후에 그 사나이는 주인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다가 모자를 벗었는데, 늠름한 까까중이었다. 장군은 그를 제지하리라 생각하고 방 속을 더듬어 긴 노끈 한 움큼을 쥐고 있다가, 중이 주인 여자와 함께 누울 때 장군이 돌출하여 노끈으로 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몽둥이로 마구 치니 중은 한없이 슬프게 부르짖었다. 그런 뒤 장군은 주인 여자와 한 번 즐기고 중에게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신례(新禮)를 행하려 하니 네가 장만할 수 있겠느냐.” 하니, 중이,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신례(新禮)의 잔치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장군은 과부집에 자주 왕래하고 과부 역시 장군을 사랑하여 여러 해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었다.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여 미녀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하루는 이웃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이웃에 체격이 알맞은 진짜 절세 미녀가 있는데, 그대의 말을 그 여자에게 들려주면 흔연히 응할 것 같으나, 다만 재물을 매우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소.” 하니, 장님은, “만약 그렇다면 재산을 기울여 파산(破産)에 이를지언정 어찌 인색하게 하리요.” 하고 그의 아내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주머니와 상자를 찾아 재물을 모두 꺼내주고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만날 날이 되어 장님은 옷을 잘 차려 입고 나가고, 아내 역시 화장을 고치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먼저 방에 들어가 있으니, 장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배(再拜) 성례(成禮)하였다. 이날 밤에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하는데, 그 아기자기한 인정과 태도가 평상시와 달랐다. 장님은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오늘밤이 무슨 밤이기에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는고. 만약에 음식에 비유하면, 그대는 웅번(熊膰 곰의 발바닥.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이나 표태(豹胎 표범의 태(胎))와 같고, 우리 집사람은 명아주국이나 현미 밥과 같구나.” 하고 재물을 많이 주었다. 새벽이 되어 아내가 먼저 그의 집에 가서 이불을 안고 앉아 졸다가 장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젯밤에는 어디서 주무셨소.” 하니 장님은, “아무 정승집에서 경(經)을 외다가 밤추위로 인하여 배탈이 났으니, 술을 걸러 약으로 쓰게 하오.” 하였다. 아내가 매우 꾸짖기를, “웅번ㆍ표태를 많이 먹고 명아국과 현미 밥으로 오장육부를 요란하게 하였으니 어찌 앓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장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제야 아내에게 속은 줄을 알았다.
○서울에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젊은이와 벗하여 사이 좋게 지냈다. 젊은이가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길에서 나이 어린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주인께서 잠시 별실(別室)을 빌려줄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장님은 허락하여 주었다. 젊은이는 장님의 아내와 별실에 들어가 곡진하고 애틋한 정을 서로 나누는데, 장님이 창 밖을 돌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 빨리 가거라. 집사람이 와서 보면 이야말로 큰일이니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하였다. 조금 뒤 아내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그 새 어떤 손님 왔었소.” 하며 일부러 성낸 듯이 하니, 장님은,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정오쯤에 동쪽 마을의 신생(辛生)이 나를 찾아왔을 뿐이었소.” 하였다.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이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하였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儒生)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어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보냄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刑)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용재총화 제6권
◯옛날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이는 문장에 능하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못가에 좋은 밭 수십 이랑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양기가 왕성하여 돌이 든 주머니를 거기에 매달고 휘두르면 머리를 넘긴다 하였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이며 말하기를,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 文章闊發多勞苦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능은 싸우다가 죽을 것이요 / 射御材能戰死亡
못가에 밭이 있으면 물로 손해를 볼 것이니 / 池下有田逢水損
돌이 든 주머니를 휘둘러 머리 위로 넘기는 것이 내 마음에 들도다 / 石囊踰首我心當
하였다.
◯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때 금란을 불러 타이르기를,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하니, 금란의 말이, “월악산(月嶽山)은 무너질지라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하였으나, 뒤에 단월역(斷月驛)의 승(丞 관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전목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네가 문득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 聞汝便憐斷月丞
깊은 밤 항상 역을 향해 달려간다 하니 / 夜深常向驛奔騰
언제나 삼릉장(세모진 형장)을 잡고 / 何時手執三稜杖
돌아가 월악산 무너져도 마음은 변치 않는다던 맹세를 물어볼고 / 歸問心期月嶽崩
하니, 금란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북쪽에 전군이 있고 남쪽에는 승이 있으니 / 北有全君南有丞
첩의 마음 정할 수 없어 뜬구름 같도다 / 妾心無定似雲騰
만약 맹세한 바와 같이 산이 변할진대 / 若將盟誓山如變
월악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너졌는고 / 月嶽于今幾度崩
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
◯어떤 경사(經師)의 아내가 그의 남편이 외출한 사이에 이웃집 남자를 방에 맞아들여, 이제 막 서로 흥을 즐기는 찰나에 그 남편 때마침 돌아왔다. 아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으로 치마를 쥐고 남편의 눈을 가리려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경사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에게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고 자기도 뛰면서 나아가 말하기를, “북택재신(北宅宰臣)의 장사를 치르고 오는 길이다.” 하였다. 아내가 치마로 남편의 머리를 싸안고 눕자 이웃 사람은 마침내 도망갔다.
◯선비 정 모(鄭某)가 상처(喪妻)를 한 뒤, 남원에 부잣집 과부가 산다는 말을 듣고 배우자로 삼으려고 날을 가려 정혼하고, 정(鄭)이 먼저 군청에 이르러 예물을 갖추었는데, 과부가 계집종을 보내어 그 행동거지를 보게 하였다. 계집종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수염이 많은데다가 털모자까지 썼으니 늙은 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 젊은 장부(丈夫)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고자 하였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리오.” 하였다. 군청 관리들은 휘황하게 촛불을 켜들고 둘러싸서 과부 집으로 갔으나, 과부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정은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되돌아갔다. 또 악관(樂官) 정 모가 만년에 또한 배우자를 잃은 뒤, 부잣집 여자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어느날 부잣집에 가보니, 그림 병풍을 치고 만당(滿堂)에 붉은 털요를 깔고 당중에다 비단요를 펴놓았다. 정이 자리에 나아가 스스로 계략을 잘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여자가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70살이 아니면 60살은 넘었으리라.”하고, 탄식하면서 좋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밤을 틈타 여자의 방에 뛰어들어가니 여자가 정을 꾸짖기를, “어느 곳에 사는 늙은이가 내 방에 들어오는가. 용모가 복이 없을 뿐 아니라 말소리까지도 복이 없구나.”하고 밤중에 창을 열고 나가버리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어떤 유생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어지럽게 욕탁(정교하는 것)하여 얼마나 기쁘게 날뛰었던고 / 粉粉浴啄幾騰讙
두 정의 풍류가 일반이로다 / 二鄭風流是一般
호연을 맺으려다가 도리어 악연을 맺었으니 / 欲作好緣還作惡
이렇게 되느니 홀아비 신세가 더 나은 것을 / 早知如此不如鰥
하였다.
◯내 친구 손영숙(孫永叔)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 시절에 장난삼아 10여 명이 떼를 지어 절에 돌아다니며, 몽둥이로 중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는 짓을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의금부에 갇혀서 국문(鞫問)을 받았다. 이때 금법(禁法)이 엄하지 못하여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들어가 볼 수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주찬(酒饌)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손영숙이 말하기를, “구복(口腹)을 채우기에는 이곳만한 데가 없으니, 만약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먹을꼬.”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뒤에 대간(大諫)이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마침 형옥의 폐단에 대해 논하자, 손영숙이 아뢰기를, “젊어서 옥(獄)에 있어 보니 옥은 죄인을 가두어두고 괴롭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땅에 금을 그어놓고 옥이라 하여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으니, 옥이 아름답다고 한들 사람이 어찌 영화롭게 생각하겠느냐.” 하니, 좌우가 모두 놀랐다. 손영숙은 진실하고 다른 뜻은 없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말을 실수한 것이었다.
◯신재추(辛宰樞)는 성품이 매우 급하였다. 파리가 밥그릇에 어지럽게 몰려들어 들어 날려 보내도 다시 모여들자, 재추는 크게 노하여 그릇을 땅에 던져버렸다. 부인이, “무지한 미충(微蟲)을 놓고 어찌 이다지도 화를 내시오.” 하니, 재추는 눈을 똑바로 뜨고 꾸짖기를, “파리가 네 서방이냐. 어째서 두둔하느냐.” 하였다.
진일(眞逸 성간(成侃)) 선생이 일찍이 서후산(徐后山 서강(徐岡))과 더불어 한림원에 들어갔었다. 서후산은 왕비의 조카뻘이 되는 사람으로 글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세조가 장차 크게 발탁해서 등용하려 하여 은총이 비할 데 없었는데,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문득 백씨(伯氏)에게 말하기를, “서후산은 제 명(命)에 죽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백씨가 놀라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됨이 너무 강하고 사나워서 할 말을 다하기를 좋아하니, 그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피살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제7권
◯전조(前朝) 때의 과거는 시관이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 두 사람뿐이었다. 미리 명망이 있는 문신으로 이를 삼았는데, 은문(恩門 등과자가 그때의 시관을 일컫는 말)은 문생(門生)을 자제와 같이 보고 문생은 은문을 부모와 같이 보아 데릴사위도 못 들어가는 내실에서 문생은 특별히 상견함을 허락하니, 이는 중히 여기는 까닭이다. 같이 급제한 사람들이 은문의 집에 모여 연회할 때에는 장수를 빌며 술잔을 올리고 더러는 유숙하기도 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부호(富豪) 집안이어서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 30명에게 모두 담비털 이불을 주고 또 각각 만루은잔(萬縷銀盞)을 주었다는데, 이는 나의 외가가 안씨이므로 전해들은 것이다. 아조(我朝)에서는 지공거의 제도를 없앴으나 아직 문주(門主) 좌주(座主)의 이름이 있어 더러는 술자리를 베풀어 찾아보고, 죽으면 그 집에서나 혹은 장삿길에서 모두 전(奠)을 배설하여 제사지냈는데, 지금은 문생과 좌주가 호월(胡越)과 같이 보고 도리어 서로 배척하니, 여기에서 또한 세상 풍속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고, 또 이듬해 계해년에는 문과에 뽑혔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장원을 하고 심효생(沈孝生)은 2등이 되고 태종은 10등이었는데, 이내(李來)ㆍ성부(成傅)ㆍ윤규(尹珪)ㆍ윤사수(尹思修)ㆍ박습(朴習)ㆍ현맹인(玄孟仁) 등은 모두 동방(同榜)이었다. 보위(寶位)에 오르자 김한로의 딸이 세자 이지(李禔)의 부인이 되었는데, 진퇴할 때 마다 항상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양녕군(讓寧君) 이지(李禔)는 비록 덕을 잃어 세자가 되지 못하였으나 만년(晩年)에 증히 때를 따라 스스로를 감추었다. 세조께서 이지에게 묻기를, “나의 위무(威武)가 한고조(漢高祖)에 비해 어떠하냐?” 하니, “전하께서는 위무가 있으시지만 반드시 선비의 관에다가 오줌을 누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데 양무제(梁武帝)에 비해선 어떠하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부처를 좋아하시지만 밀가루[麪]로 희생(犧牲)을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내가 간언을 물리침이 당태종(唐太宗)에 비해선 어떠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간언(諫言)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장온고(張蘊古)를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이지가 항상 우스운 말로 풍자를 하였고 세조께서도 역시 그 거침없음을 좋아하며 즐거워하시었다
◯내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을 때, 홍문관 관원이 명을 받들어 남원에 사신으로 가서 광주 기생을 사랑하다가 실수를 하고 돌아오니, 동료들이 비웃었다. 내가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중은 성색에 있어선 본래 무정하지만 / 僧於聲色本無情
기생집에서는 오히려 정을 발하는도다 / 娼妓齋中尙發情
만약 호남의 역마 타는 객이 된다면 / 若作湖南乘馹客
옥당(玉堂) 학사도 모두 다 다정하리로다 / 玉堂學士摠多情
하였다. 옛날에 한 기생이 어버이를 여의고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었는데 여러 기생들이 모두 같이 갔었다. 한 중이 야채를 썰다가 문득 칼을 가지고 벽에 기대어 섰기에, 주지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아름답게 단장한 기생들을 보니 마음이 산란하고, 정이 동하여 참을 수 없어 그러하옵니다.”하자, 주지승이 말하기를, “네 그 쓸데 없는 소리 좀 마라. 오늘 창기의 재에 누군들 정이 움직이지 않겠느냐.”하였으니, 앞의 시구는 이 사실을 빌려다가 비유한 것이다.
◯내가 신미년에 파주(坡州)의 별장에 있었는데, 하루는 나의 백형(伯兄 성임(成任))이 어머니를 모시고 진암(珍巖)에 올라갔었다. 바위는 임진강[洛河]을 베개로 삼고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는 백여 명이나 앉을 만하였다. 서쪽은 해문(海門)에 닿아 있고, 북쪽은 송도(松都)와 더불어 서로 마주보아 송악산, 관악산, 성거산(聖居山) 등 여러 산이 마치 지척에 있는 것 같고, 풍경은 잠령(蠶領)보다도 좋았다. 이때 해가 기울어지면서 문득 비가 몰려오고, 무지개가 바위 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강 속으로 들어가니, 빛이 비치는 곳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노랗게 되고, 비릿한 기(氣)가 있어 사람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참으로 천지의 부기(浮氣)이니, 옛 사람의 말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백형은 시를 짓기를,
출렁이는 강물은 아득히 허공과 같고 / 江波渺渺水如空
둥둥 뜬 고깃배는 하나하나가 다 같구나 / 泛泛漁舟箇箇同
저물녘 바람 불고 무지개 비 지나더니 / 日暮顚風虹雨過
늦은 무지개가 때마침 떠올라 강동을 끊는구나 / 晩虹時起斷崗東
하였다. 이해에 내 나이 13살이고, 조카 성세순(成世淳)의 나이는 10살이었다. 백형은 아침저녁으로 나와 조카를 부지런히 가르쳐, 책을 읽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면서 매일 밤 한 방에서 같이 자며, 글을 짓고 회포를 논하였는데, 중형(仲兄 성간(成侃))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두 아이가 문장을 잘하니 우리들은 나중에 문을 닫고 스스로 오그라지리라.”하였는데, 불행히도 성세순은 일찍 죽었다. 내가 성장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은 모두 백형의 힘이였다.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한글을 짓게 하니, 처음에 초종성(初終聲)이 8자(八字),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글씨체는 범자(梵字)를 본받아 만들어졌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어문 문자(語文文字)로써 표기치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홍무정운(洪武正韻)》의 모든 글자를 또한 모두 한글로 쓰고 드디어 오음(五音)으로 나누어 분별하니, 이를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라 하는데, 순음에는 경중(輕重)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정반(正反)의 구별이 있고, 글자에도 또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불청(不淸). 불탁(不濁)의 차이가 있어서 비록 무지한 부인이라도 똑똑하게 깨닫지 못함이 없게 하시었으니, 성인(聖人)이 물건을 창조하시는 슬기로움이야말로 범인의 힘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정유년에 유구국왕(琉球國王)의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성종께서 경회루 밑에서 접견하였는데, 사신이 퇴관(退館)하여 통사(通事)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소.” 하였다. 통사가 그 까닭을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 붉은 연꽃 사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 이것이 한 가지 장관이요, 영의정 정공(鄭公)이 풍채가 뛰어나고 흰 수염이 늘어져 배에까지 내려와서 조복을 빛나게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장관이요, 예빈 부정(禮賓副正)이 항상 낮에 술마시는 연석에 참여하여 쾌히 큰 잔으로 무수히 술을 마시되 일찍이 취한 빛을 보이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장관이오.” 하니, 당시 이숙문(李淑文)이 예빈 부정(禮賓副正)이라 친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을사년(1475)에 박생(朴生)이 나를 따라 명경(明京)에 갔었는데, 사람이 착실하나 용모가 추하고 촌스러웠다. ●처음 평양에 이르렀을 때, 감사가 여러 기생들을 거느리고 배[舟]에서 맞이하니, 박생이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하다가 모자 밑으로 가만히 엿보니 자태가 이상한 한 기생이 뱃머리에 앉아 있으므로 박생이 같이 간 성생(成生)에게 기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서윤(庶尹)의 삼촌이 되니 내 일을 이루어주기만 하면 반드시 후히 은혜를 갚겠네.” 하고, 관에 돌아와 방에 들고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을 모아 공손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얼마 있다가 휘장을 걷어올리고 사람이 들어오는데 바로 아까 뱃머리에 앉아 있던 그 여자였다. 생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혼자 중얼거리기를, “만약 성용(成龍)의 힘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하였다. 정의가 깊고 두터워 잠깐 사이도 옆을 떠나지 못하여 변소에도 또한 서로 같이 갔었다. 무심히 주머니 속을 만지다가 편지 조각을 꺼내보니 기생의 사부(私夫)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박생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더욱 사랑하였다. 매일 새벽에 기생의 짧은 웃옷을 벗겨 가지고 입혀주면서, “이것도 객중의 재미다.” 하였다. 떠나는 날 말에 태워 함께 데리고 가려고 이미 안장과 말을 준비하였는데 기생은 틈을 타서 도망쳐버렸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다가 또 예쁜 술집 계집을 보고 온갖 계교를 써서 방 속으로 끌어들였으나 박생이 취한 틈을 타서 그 계집도 도망가 버렸다. ●박생이 술에서 깨었을 때 한 여자가 방문 앞을 지나가는데, 그 계집인 줄 알고 데리고 들어와 밤새도록 서로 즐겼었는데 새벽이 되어 보니, 코가 쟁반만하고 처음에 본 그 여자와 다르므로 생이 급한 소리로, “다른 사람이잖아.” 하였다. ●숙영관(肅寧館)에 도착하니 고을 중에 인물들이 번화하고, 수십 명의 기생들이 술통을 들고 벌여 앉아 있었다. 박생은 부사(府使)의 족제(族弟)라는 위세를 타고 미녀를 얻어 몹시도 사랑하였다. 날이 흐린 어느 날 박생이 계집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일 비가 오면 일행이 머물게 될 것이니,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주시어 주룩주룩 비를 내려주소서.” 하고는, 크게 한숨을 지었다. 빈주(賓主)가 아침에 동헌(東軒)에서 밥을 먹는데, 박생이 종이 쪽지를 부사에게 주면서, “원하건대 여자에게 옷을 빨게 할 시간을 주십시오.” 하였다. 부사가 며칠을 주었더니 박생이 말하기를, “사촌간에 어찌 이다지도 인색한가.” 하니, 부사가 마지 못해 몇 달을 주었다. 박생이 말을 빌려 여자를 태우고 안주(安州)로 떠나는데, 숙천(肅川)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중국 가는 사신의 행차가 1년에 세 차례 있는데, 무수한 자제 군관(子弟軍官)을 우리가 많이 보아왔는데 이 사람같이 음란하고 색을 밝히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그 분주하게 다니는 모양이 마치 미친 개와 같다.” 하였다. 안주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무는 동안 사랑은 더욱 두터웠는데, 출발할 때가 임박하여 여자를 숙천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여자가 데리고 온 종이 마침 안장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소리 지르며 울면서 말하기를, “당신을 따라온 것은 당신의 덕을 입으려 하였던 것인데, 이제 덕을 입기는 커녕 도리어 이런 걱정이 생겼습니다.” 하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박생이 멍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평관(嘉平館)에 이르자 박생이 예쁜 관노를 보고는 관인(館人)에게 말하기를, “내가 임신년에 파병 군관으로 있을 때, 일찍이 이 종을 사랑했으니 곧 불러오너라.” 하였다. 여자가 그 말을 믿고 앞으로 와서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임신년에 누구를 따라왔사옵니까?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니 박생이 하는 수 없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잤다. ●정주(定州) 달천교(獺川橋)에 이르니 목사가 나와서 술 자리를 베풀었다. 박생이 한 기생을 보고 부르면서 다가앉아 말하기를, “네가 이륙(李陸) 영공(令公)을 아느냐.” 하니, “모릅니다” 하였다. “노공필(盧公弼) 영공을 아느냐.” 역시, “모릅니다.” 하니, 박생이 갑자기 손을 잡고 말하되, “두 공〔二公〕을 모른다면 내 방으로 오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동반(同伴)이 박생을 속여 말하기를, “이곳 목사와 관계 있는 여자요.”하였더니, 박생이 드디어 놓아주었다. ●또 기생 벽동선(碧洞仙)이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온갖 계교를 써서 이 여자를 얻으니, 일행이 생의 음란함을 미워하여 속이려고 하였다. 마침 고을 유생에 명효(明孝)란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젊고 매우 아름다웠는데 분을 바르고 옷을 잘 입혀서 동헌의 기생들 가운데 앉히니, 눈매와 옷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박생이 한번 보고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다.” 하고, 갑자기 앞으로 나가 손을 잡고 서쪽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돌아가므로 명효가 일부러 뿌리치니 박생이 꾸짖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였다. 이때 마침 늙은 기생이 촛불을 들고 앞을 인도하면서 박생에게 말하기를, “이 계집아이는 아직 남자를 상대해 보지 않았으니 서서히 길들이시고 너무 급히 서둘러서 욕보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박생이 방으로 들어와 허리를 껴안고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기를, “네가 만약 내 말을 들어주면, 너의 살림은 내가 돌보아주겠다.” 하고 수작하는데, 마침 성생이 와서, “목사가 술자리를 베풀고 우리를 위안하고자 하니 그대로 일찍 쉴 것이 아니라 기생을 데리고 가서 참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박생이 손을 잡고 같이 갔더니 목사가 명효를 보고 꾸짖기를, “네가 관청 소속으로서 객에게 불순하니, 죄가 대태(大笞)에 처함니 마땅하다.” 하고, 아전이 북나무[栲] 몽둥이를 가지고 가서 끌어내리니 박생이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애걸하기를, “이 아이에게는 불순한 일이 없었는데, 전하는 사람이 잘못한 듯하오니 나로 인하여 죄를 얻는다면 도리어 나를 허물하는 것이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목사가 용서하여주니 명효가 술잔을 받들고 노래를 불러,
오늘 처음 만났다가 / 今日始相見
내일이면 다시 떠나가리로다 / 明日還相離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으면 / 厥初若不逢
누구인지나 몰랐을 것을 / 不知是何誰
하니, 박생이 등을 어루만지며 흔연히 웃으며 말하되, “어찌 이다지 불손하면서도 이 같은 노래를 부르느냐. 내가 본 여러 기생 중에 네 얼굴만한 것이 없었는데, 내가 너를 버리고 누구를 구하겠는가.”말하고, 자리가 파한 뒤에 방으로 와서 서로 붙잡고 희롱하며 포옹함이 천태만상이었다. 이때 벽동선(碧洞仙)이 옆에 있으므로, 박생이 성생(成生)에게 이르기를, “내가 미인을 얻어 이 기생은 돌보지 못하였으니 자네가 빨리 데리고 가거라.” 하였다. 박생의 종이 밖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이 기생인 줄 아십니까. 어찌 이렇게도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시나이까.” 하니, 박생이 도리어 “네가 어찌 내 일을 아느냐.” 하고 꾸짖었다. 조금 있다가 옷을 벗고 같이 누워서야 비로소 남자임을 알고 놀라 일어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행차가 이정(離亭)에 이르니 명효가 남자 복색으로 생을 따라 술잔을 전하고, 생이 말에 오르려 할 때 명효가 옷깃을 부여잡고 만류하면서, “밤새 재미있게 지낸 것은 오직 내 살림을 차리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어찌 이다지도 쉽게 떠나십니까. 너무도 무정하옵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의주에는 본래 인물이 많아 평양과 서로 비슷한 고을이었는데, 말비(末非)라고 하는 한 나이 어린 계집종이 있어 박생이 이를 보고 어여쁘게 여겨 욕심을 내보았으나, 이루지 못하여 배관(裵官)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이 고을에 가서 내 일을 이루어주면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으리다.” 하니, 배관이, “이들은 각각 주인이 있어 내가 제어할 수 없으니 주관(州官)에게 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생이 곧 나아가 판관(判官)을 보고 청하니, 판관이 말비를 불러 달래어도 말비가 오히려 들어주지 아니하고 상방(上房) 앞에 있으므로, 생이 옥호로(玉葫蘆)를 풀어 말비의 옷에 매어주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물건을 얻었으니, 내 말에 복종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이날 밤 같이 잤다. 말비는 비록 박생을 사랑하는 뜻이 없지만 뒷날 이익을 얻을까 해서 온갖 애교를 부리니, 박생이 여기에 홀딱 녹아 스스로 아름다운 짝을 얻었다 여겼다. 이튿날 말비가 박생에게 말하기를, “관가가 번잡하고 시끄러우니 우리 집에 가서 채소와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라도 모시는 것만 같지 못하겠소이다.” 하여, 박생이 이 여자를 데리고 집에 갔는데, 이른 아침에 조밥과 아욱국을 올리니 박생이 달게 먹고 남기지 않았다. 생이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머리가 덥수룩하고 얼굴에 때가 끼었으므로 말비가 따뜻한 물로 직접 얼굴을 씻겨주고 머리를 빗질해 주니 박생이 더욱 기뻐하였다. 생이 돌아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집이 넉넉하고 사람이 슬기롭고도 꾀가 많아서 내 평생에 아직 이런 것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강가에 이르러 이별할 때, 박생이 말비를 안고 모래 위에 누워 울면서 조그마한 돌을 쪼개어 서로서로 이름을 나누어 가졌는데, 생은 옷소매에 이를 매어 보물처럼 여겨 잃어버리지 않았다. 연경에 머문 여러 달 동안 말할 때마다 항상 말비를 불러 입에서 그 이름이 떠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들렀을 때 말비가 조카 말산(末山)이 영봉군(迎逢軍)을 따라가는 길에 박생에게 따뜻한 옷옷을 보냈으므로, 박생이 곧 어깨에 걸치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내 아이가 보낸 물건이요.” 하였다. 의주에 이르렀을 때 말비가 중국 물건을 얻으려고 더욱 애교를 부리니, 박생의 사랑은 먼저보다 더했고 많은 물건을 주었다. 말비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안 말비가 박생에게 이르기를, “집에 어물(魚物)이 없으니 당신이 좀 얻어 오십시요.” 하니, 생이 판관(判官)을 보고 건어(乾魚) 속(束)을 얻어 친히 가지고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신사주(神賜酒)를 받아 쾌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나는 이 집 대주(大主) 늙은이니 불가불 마셔야겠다.” 하였다. 임반관(林畔館)에 이르러 이별하려 할 때, 박생이 말비의 손을 잡고 상방(上房)에 들어와서 술잔을 찾아 서로서로 한 잔씩 마시고, 말비는 생의 옷을 부여잡고 박생은 말비의 손을 잡아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해가 이미 중천에 떴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떼어 놓았더니, 생은 말비가 쫓아올까 걱정하여 급히 달려 나와 잘못 알고 다른 사람의 말을 거꾸로 타니, 보는 자들이 모두 손뼉을 쳤으나 말 위에 있는 박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한 시냇가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을 때 동반한 사람이 음식을 권하여도 생은 돌아보지 않고 그저 머리를 숙이고 시내만 보고 있으므로 동반한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 우는 게 아닌가.” 하니, 박생이 대답하기를, “우는 게 아니라 물 속에 있는 고기를 구경하고 있는 것일세.”하였으나, 모자를 벗기고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주인공인 박생은 저자인 성현을 따라 갔다고 하는데 저런 부도덕한 짓을 연이어 계속하고 있음에도 바른 지도나 충고도 없이 그저 재미있는 일화로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성현은 존경받을 만한 인품을 가진 고위관료는 못 되었던 것 같다.
용재총화 제8권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한 지는 오래되었다. 신라의 옛 서울에서는 민간에서 승려를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또 송도도 그러하였다. 왕궁과 큰 집들이 모두 절과 서로 연결돼 있어 왕이 후궁과 더불어 절에 가서 향을 피우지 않은 달이 없었으며,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와 같은 대례(大禮)를 베풀되 모두 절에서 하였다. 왕의 맏아들은 태자가 되며, 둘째 아들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였으니, 비록 유림(儒林)의 명사라 할지라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절에는 모두 종이 있어서 많게는 수천 수백에 이르고, 주지(住持)가 된 자는 더러 비첩(婢妾)을 두기도 하니, 그 호사스러움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보다도 나았다. 십이종(十二宗)을 두어 불교를 관장하였으며, 중으로서 봉군(封君)의 관직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아조(我朝) 태종(太宗) 때에는 십이종을 개혁하여 다만 양종(兩宗)을 두고 사전(寺田)을 모두 혁파했으나, 그래도 유풍(遺風)은 끊기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그 친속을 위하여 모두 재(齋)를 올리고, 또 빈당(殯堂)에다 법연(法筵)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기제(忌祭)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중을 맞아다가 음식을 먹이었다. 또 시승(詩僧)이 있어 관리들과 더불어 서로 수창(酬唱)하는 일이 자못 많았으며, 독서하는 유생들은 모두 절에 올라가서 하였다. 비록 절을 부수고 벽을 훼손하는 폐단이 있기는 하나 유학자와 중이 서로 의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세조(世祖) 때에 극도에 달하였다. 중들이 촌락에 섞여 살면서, 비록 제멋대로 행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이를 꾸짖지 못하고, 조관(朝官)이나 수령들도 항의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중을 의지하여 뒤에서 이익을 얻는 자까지 있었다.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도 부처의 사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하여도 사림(士林)들이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종 때부터 도첩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엄하게 세워 도첩의 발급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성(城) 안에는 중들이 줄어들고 내외의 절은 모두 비었으며, 재를 올려 중에게 밥먹이는 사족(士族)이 없어졌다. 이는 임금이 숭상하는 바에 따라 습속도 함께 변한 것이다.
◯함동원(咸東原)이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서 방랑하였으나, 직무에 임해서는 신중하였고 일을 잘 처리하여 드디어 명재상이 되고 공훈(功勳)으로 봉군(封君)이 되었다. 호남 감사가 되어 선정(善政)으로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항상 전주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이별하기 어려워서 호패(號牌)를 기생에게 비밀히 주고 밤에 몰래 따라오라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 기생이 부윤(府尹)에게 이별을 고하니, 당시 부윤으로 있던 이언(李堰)은 성품이 청렴하고 고상하면서도 급하여 기생이 하직하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법관(法官)이 어찌 기생을 데리고 갈 리가 있는가 네 말이 거짓이다.” 하였다. 기생이 대사헌의 호패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공이 ‘관부(官府)에서 만약 믿지 않거든 이것으로써 표를 삼으라.’하셨소이다.” 하니, 이언이 땅에 침을 뱉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함동원을 지조 있는 선비라 여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참으로 하품인(下品人)이로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솔직함을 좋아하고 이언의 빡빡함을 비웃었다. 늙어서는 오랬동안 병중에 있었으며, 딸 하나가 있었으나 그 딸마저 먼저 죽었는데, 또 주색을 싫어하여 첩을 두지 아니하고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끼니를 자주 거르기도 하였다. 옛날 정분이 있던 여의(女醫)가 이 소문을 듣고, 곧 찾아가 공을 뵈니, 남루한 옷을 입고 거적자리에 길게 누웠는데, 다만 한 하인만이 옆에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여의가 말하기를, “공 같은 호걸(豪傑)이 어찌 이와 같이 되셨습니까.” 하니, 공이 아무 말도 없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함동원이 실제 인물인지 찾을 수 없으나, 대사헌에 직책에 있는 자가 전주땅의 기생을 데리고 상경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거니와 전주부윤의 말이 옳은데도 당시 세인들은 함의 솔직함을 좋아하고 부윤을 비웃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중추 김성동(金誠童 1452-1495)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連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적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뽑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부평(富平)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무를 당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고 일은 시원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조세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편안하게 살며 부모처럼 섬기었다. 그때 감사가 임금에게 선정(善政)을 아뢰어 특별히 중추원(中樞院)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원대함을 보고 기대하기를, “참으로 재상감이다.”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부부가 모두 죽었다. 집의(執義) 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사람됨이 문무(文武)에 뛰어나서 소년으로 등제(等第)하여 사인(舍人)으로부터 나아가 집의(執義)가 되고,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 오르기를 지척(咫尺)에 있는 것 같이 여기었다. 평안도에 사신으로 갈 때에 윤자방이 황해 감사라, 집의가 해주(海州)로 아버지를 뵈러 가다가 돌연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중추의 관이 발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집의의 관이 들어와 사림(士林)의 똑똑한 사람들이 한번에 죽으니, 인근 지척의 사이에 흉사(凶事)가 연달아 일어나 사림에서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의 빙고(氷庫)는 옛날의 능음(凌陰)이다. 동빙고는 두모포(豆毛浦 : 동호대교 북단)에 있는데, 오직 하나뿐이어서 제사지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봉상시(奉常寺)가 주관하고, 별제(別提) 두 사람과 함께 검찰(檢察)하였다. 또 감역부장(監役部將)과 벌빙군관(伐氷軍官)이 저자도(楮子島 강남구 삼성동에 있던 섬) 사이에서 채취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이는 개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西氷庫)는 한강 하류 둔지산(屯知山 용산구 소재)의 기슭에 있는데, 무릇 고(庫)가 8경(梗)이나 되므로, 모든 국용 (國用)과 제사(諸司)와 모든 재추(宰樞)가 모두 이 얼음을 썼었다. 군기시(軍器寺)ㆍ군자감(軍資監)ㆍ예빈시(禮賓寺)ㆍ내자시(內資寺)ㆍ내섬시(內贍寺)ㆍ사담시(司贍寺)ㆍ사재감(司宰監)ㆍ제용감(濟用監)이 주관하여 별제 두 사람과 같이 검찰하였고,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이 있고 그 나머지 각사(各司)는 8경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얼음이 얼어서 4치 가량 된 뒤에 비로소 작업하였다. 그때는 제사(諸司)의 관원들이 서로 다투어 힘쓰므로 군인이 비록 많으나 잘 채취하지 못하고, 촌민들이 얼음을 캐가지고 군인들에게 팔았다. 또 칡끈을 얼음에 동여매어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변에는 땔나무를 쌓아놓아 얼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며, 또 의약을 상비(常備)하여 다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그 질환에 대한 조치가 상비되었다. 처음 8월에는 군인을 빙고에 많이 보냈는데, 고원(庫員)이 군인을 인솔하여 고(庫)의 천정을 수리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바꾸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수리하였다. 또 고원한 사람은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다가 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많이 쌓아 두텁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는다. 전술한 관인들은 밤낮으로 마음껏 취하도록 마시고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하리(下吏)들에게 맡기었다. 계축년에 얼음의 저장을 소홀히 하자 왕이 노하여 모두 파직을 시켰고, 갑인년에는 관리가 주의하여 얼음을 저장했기 때문에, 국상(國喪)과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에도 얼음이 넉넉하고 가을까지 빙고에 남아 있었으니, 그 검사하는 방법을 치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초(國初) 이후로 법률이 문란해져서 사대부가 이익을 얻는 길이 또한 넓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종(太宗)이 외방에서 사냥하시다가 날이 저물어 평복 차림으로 시내를 지나니, 10여 이이 말에 식물을 싣고 임금 앞을 지나다가, ‘승정원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태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물 아래 연기 나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 곳이 곧 승지(承旨)가 있는 곳이다.’하였다.”한다. 세종(世宗) 때에는 여러 창고의 공물(公物)을 단속할 줄 모르고, 궁궐 안의 찬물(饌物)은 승정원이 오로지 관장하였는데 어선(御膳)의 나머지를 다 먹을 수 없어서 나누어 자기 집까지 보내었다. 연회(宴會)가 있을 때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연석을 베풀고 주관(酒官)이 술을 올리며, 창고의 아전이 기생에게 소요되는 옷감을 주되, 쌀 열 섬 이하는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되므로 하루에 쓰이는 종이가 수백 권이요, 술은 수백 병이며, 다른 물건도 또한 이와 같았다. 관리로서 객지에 있는 사람이 되질을 하는 과정에서 땅에 흘린 곡식을 창관(倉官)에게 빌려 썼는데, 그 수가 적어도 몇 섬이 넘었으니 비록 땅에 흘린 곡식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정곡(正穀)이었다. 그릇을 관에서 빌려쓰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여도 관에서는 이를 묻지 않았다. 허비가 이렇게 많은데도 공용이 군색하지 아니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조(世祖)로부터는 육전(六典)을 고쳐 횡간(橫看)의 안(案)을 만들어서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모두 계품(啓稟)한 뒤에 쓰게 하니, 이로부터는 사람들이 남용하는 일이 없었으나, 저축해 둔 것이 또한 없어서 국가에서 항상 그 부족함을 근심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속담에, “아침에 마신 술은 하루의 근심이요, 맞지 않는 가죽신은 1년의 근심이요, 성질 나쁜 아내는 평생의 근심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배가 부른 돌담과 말 많은 아이와 헤픈 주부는 쓸모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말은 비록 속되나 역시 격언이다.
◯같이 급제한 신생(申生)은 수염이 많으나 누렇고 크기가 작고 등이 굽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남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이 되어 기생들을 검찰(檢察)할 때 너무 각박하여 기생들이 모두 노래를 지어 조롱하였다. 또 순채와 송이버섯을 싫어하며 “이것이 무슨 맛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하였다. 친구가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신군은 특이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좋도다. 갹조(噱鳥)의 소리여.”하므로, 친구들이, “이는 꾀꼬리인데 어찌 갹조라 하느냐.” 하니, 신생이 말하기를, “그 울음이 갹갹하니 이는 갹조요, 꾀꼬리가 아니다.”하자, 친구들이 모두 그 고지식함을 웃었다. 이때에 어떤 이가 시를 짓기를,
나뭇가지에는 갹갹하고 우는 꾀꼬리 머물고 / 樹頭??黃鳥止
순채와 송이는 내가 좋아하지 않도다 / 蓴菜松菌非我喜
붉은 수염의 등이 굽은 작은 남아는 / 紫髥曲脊小男兒
이원(梨園)의 기생을 검찰할 줄 알도다 / 猶知檢察梨園妓
하였다.
◯대제학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었다. 어렸을 적에 향교에서 수업할 때,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학이 독서하는 틈에 겸하여 피리를 익히니, 그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인정하였다. 제학이 과거 보러 서울에 가다가 이원(梨園)의 훌륭한 배우를 보고 교정을 받는데 배우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음절이 속되어 절주에 맞지 않으며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하고, 나날이 왕래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배우가 들어보고서, “선배는 가르칠 만하다.” 하고, 또 수일 만에 들어보고는, “규범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에 이르리라.”하더니, 또 수일 후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뒤에 급제하여 또 금슬(琴瑟)과 제악(諸樂)을 익히니,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의 총애를 얻어 드디어 관습도감(慣習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은 관장하였다. 제종이 석경(石磬 돌로 만든 경쇠)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케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모율(某律)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다.” 하여, 다시 보니, 고율(高律)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께서 명하여 진흙 찌꺼기 1푼을 없애게 하고 또 저율(低律)에는 다시 진흙 찌꺼기 1분을 붙이게 하였더니,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그 아들이 계유(癸酉)의 난에 관여되어 제학도 또한 이로 인하여 파직되고 향리로 내려갈 때, 친구들이 강가에서 전송하였는데, 제학이 말 한 필과 종 하나만 데리고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배[舟] 안에서 같이 앉아서 술자리를 베풀고 소매를 잡고 이별하려 할 때 제학이 전대 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고서 떠나가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처량하게 여기어 눈물은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제9권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이 글을 읽을 때에는 음(音)과 뜻이 있고 또 구결(口訣)이 있어 쉽게 배울 수 없으나, 중국에서는 모두 문자로 말하고 음과 뜻과 구결이 없기 때문에 학문하기가 쉽다. 우리나라 사람은 간사하고 편파적이고 의심이 많아 항상 사람을 믿지 않으므로 역시 남도 나를 믿지 않지만, 중국인은 순후(純厚)하고 의심이 없어서 비록 외국인과 상거래를 하더라도 그다지 다투거나 힐난하는 법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은 비록 조그마한 일에도 경솔하게 떠들기 때문에 사람은 많아도 성취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중국인은 조용하고 말이 없으므로 사람이 적더라도 쉽게 일을 성취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마시고 먹는데, 만일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파 어쩔 줄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부잣집에서 벌어다 먹기까지 하면서도 낭비만 하고 아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 이르며, 신분이 높은 자는 주식(酒食)을 많이 벌여놓고도 싫어할 줄 모른다. 만일 군사가 출정하게 되면 군사 식량의 운송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길 떠나는 사람은 몇 리 안 되는 도정(道程)이라도 말에 실은 짐이 길을 메울 정도이다. 중국인은 많이 먹지 아니하여 한 번에 구운 떡 하나면 조석 끼니를 때울 수 있고 꼭 밥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군졸(軍卒)은 마른 양식을 말안장에 걸어놓아 굶주림에 대비하고, 길 떠나는 사람은 비록 천만 리 먼 길이라 할지라도 은전(銀錢)만 가지고 가면 요구하는 대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며 말도 탈 수 있고, 종도 거느릴 수 있어 머무르는 데는 집이 있고, 자내 데는 계집이 있으므로 가기 어려운 곳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관에 있는 자는 조반(早飯)ㆍ조반(朝飯)ㆍ주반(晝飯)을 먹으며 아무 때고 술을 마신다. 또 종들을 들볶아 성찬(盛饌)만 가져오라 하고,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매질을 한다. 그러나 중국인으로 관에 있는 자는 공경대부(公卿大夫)라 할지라도 집에서 고기와 밥 한 그릇만을 차려서 관청으로 운반하여다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외방에 사신(使臣)가는 자는 관리들이 지경(地境) 내어서 영송(迎送)을 하는데, 먼저 주식을 갖추고 준비하였다가 고을에 들어오면 며칠 동안 머물게 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흠뻑 취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술이 깨어있는 날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병을 얻어 페인이 되는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송별할 때는 경치 좋은 산수를 골라 장막을 치고 소매를 붙잡아 놓지 아니하며, 종일토록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관의 돈을 다 써 없애서 날로 퇴폐해지고, 능력 있다는 자는 영리를 꾀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므로 관가(官家)는 날로 쓸쓸해지고, 관리와 백성은 점차 초췌(憔悴)해져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 반면에 중국인으로 사신 나가는 자는 만기(萬騎)가 앞에서 인도(引導)하고, 절월(節鉞)이 휘황(輝煌)하니, 그야말로 성사(盛事)라 할 만하다. 고을에 들어가면 관리들은 당하(堂下)에서 절하고 사신은 방에 들어가 돼지 족발과 변변치 않은 쌀밥 정도를 먹고 따라온 사람과 같이 한 평상에서 자고 이튿날 떠나는데, 관리들이 5리 밖까지 나와서 석 잔 술로 전송한다. 관리가 인정(人情)을 닦고 싶으면 사적으로 술가 음식을 갖추어 길떠남을 이유로 대접하기 때문에 사신은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관에는 낭비하는 물건이 없게 되어 주현(州縣)은 항상 풍족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비(奴婢)가 반을 차지하는 까닭으로 유명한 고을이나 큰 읍이라도 군졸(軍卒)이 적은데, 중국은 모두 나라 사람이고 집집마다. 정병(精兵)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벽읍(僻邑)이라도 수만의 무리를 급히 갖출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경솔(輕率)하고 안정되지 못하여 백성은 관리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관리는 선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비는 대부(大夫)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대부는 공경(公卿)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상하가 서로 업신여기고 남을 모함할 생각만 한다. 그러나 중국은 백성이 관리 두려워하기를 표범같이 하고, 관리는 공경대부(公卿大夫) 두려워하기를 귀신같이 하며, 공경대부는 임금 두려워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는 까닭으로 일을 맡으면 잘 처리하고, 명령을 내리면 쉽게 복종한다.
◯지금의 우리 나라는 육도(六道)마다 모두 온정(溫井)이 있으나, 경기(京畿)ㆍ전라도(全羅道)만 없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수주(樹州)에 온천이 있다.”하였는데, 수주는 곧 지금의 경기도 부평부(富平府)이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답사하였으나 그 근원을 얻지 못하였으니, 고서에 잘못 기재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싫어하여 그 줄기를 막아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 온천이 있는데, 샘이 다른 곳보다 조금 차서 목욕하는 사람이 뜨거운 돌을 샘 속에 넣어 따뜻하게 한다. 또 목욕하러 오는 일본인이 연달아 끊이지 않았으므로 현(縣)에서 꺼려하여 임금께 아뢰어 그 샘줄기를 막아버렸다. 동래(東萊) 온천이 가장 좋은데, 마치 비단결 같은 샘물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오는데, 물을 끌어들여 곡(斛)에다 받아둔다. 따뜻한 것이 끓는 것과 같아서 마실 수도 있고 데울 수도 있다. 일본인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자는 반드시 목욕을 하고 가려 하므로, 얼룩옷[班衣]을 입은 사람들의 왕래가 번번하여 주현(州縣)은 그 괴로움이 많았다.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 안부역(安富驛) 큰 길가에 온천이 있는데, 샘물이 미지근하고 별로 뜨겁지 않다. 온양(溫陽) 온천은 꼭 알맞게 따뜻하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 친히 여러 번 임행(臨幸)하였고, 그뒤에 정희왕후(貞熹王后)도 갔었는데 행궁(行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주(淸州)에는 초수(椒水)가 있는데, 물은 따뜻하지 않으나 그 냄새가 후추와 같았는데 사람들은 이 물로 씻으면 안질이 잘 낫는다고 하였다. 세종께서 친히 임행하였고, 그뒤에 세조께서 복천사(福泉寺)에 가면서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다. 강원도에는 세 개의 온천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천현(伊川縣)의 북쪽 깊은 산속에 있다. 세종께서 옛 동주(東州)의 들에서 강무(講武)하시고 온천에 들렀었다. 또 하나는 고성현(高城縣)의 속읍인 환가(豢豭)에 있으니 금강산 동쪽 기슭이다. 샘이 큰 시냇가에 있는데, 세조께서 친히 납시어 지금까지도 어실(御室)과 불당(佛堂)이 있다. 나머지 하나는 평해군(平海君) 서쪽 백암산(白巖山) 밑에 있는데, 샘이 상등성이 높은 언덕에서 솟아 나온다. 샘물이 알맞게 따뜻하고 매우 깨끗하다. 중 신미(信眉)가 큰 집을 짓고 쌀을 꾸어주고 받고 하여 목욕하러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옛날과 같이 하고 있다. 황해도(黃海道)에 온천이 가장 많다. 백천(白川) 대교온정(大橋溫井)ㆍ연안(延安) 전성온정(氈城溫井)ㆍ평산온정(平山溫井)ㆍ문화온정(文化溫井)ㆍ안악온정(安岳溫井)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해주(海州)의 마산온정(馬山溫井)이 가장 기이(奇異)하여 미지근한 것도 있고 몹시 뜨거운 것도 있다. 바로 샘 옆이 바다이기 때문에 그 냄새가 좋지 않고 맛은 짜다. 들 가운데 30여 군데쯤 있는데, 그중에는 괴어서 못을 이룬 곳도 있고, 혹은 조그마하게 물웅덩이를 만든 것도 있으며, 혹은 물밑이 뜨거워서 밟기 어려운 곳도 있다. 또 어떤 것은 넘치는 샘이 물을 뿜어내어 뜨거운 물거품이 용솟음쳐서 주위에 있는 진흙이 뜨거워 열 때문에 엉겨서 돌과 같이 단단하다. 채소(菜蔬) 줄기를 그 속에 던져보면 순식간에 익어버린다. 아침 저녁에 김[蒸]이 서려서 온 들이 연기가 낀 것 같고, 평지는 따뜻하여 마치 토상(土床)에 누운 것과 같다. 평안도(平安道)에는 삭주온정(朔州溫井)과 성천온정(成川溫井)이 있고, 또 양덕현(陽德縣)에 온정이 있는데, 그 물이 끓는 탕(湯)과 같아서 날짐승이 털을 데쳐 뜯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용강현(龍岡縣) 온정이 가장 기이한데, 물이 뜨거워서 아주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들어가 있을 수 없고, 물을 이끌어 곡(斛)에다 받아두어야만 목욕할 수 있다. 천정(泉井) 속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너무 깊어서 바다와 통하지 않는가 의심스럽다. 영안도(永安道 함경도의 옛 이름)에도 온천의 우물이 있다. 전라도(全羅道)에는 다만 무장(茂長)의 염정(鹽井)이 있을 뿐 온천은 없다. 지금 이 사실들을 살펴보면 온천은 북방(北方)의 한랭한 심산 골짜기에 많이 있으며, 염기(炎氣)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고, 수성(水性)도 또한 각각 다른 종류가 있어서 그 이치를 미루어 생각할 수 없다.
◯세종(世宗) 갑인년에 별시(別試)를 친 다음 방을 내거는 날 상사(上舍) 박충(朴忠)이 자라처럼 움츠리고 집에 있으면서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방목(榜目)을 가서 보게 하고 앉지도 못하고 서서 기다렸다. 저녁 때에 그 종이 천천히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말에게 먹일 여물만을 장만하고 있었다. 상사가 낙담하여 누웠다가 천천히 돌아보면서 묻기를, “방(榜)에 내 이름이 없더냐?” 하니, 종은 “들긴 들었으나 별로 빛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어찌되었느냐?”물으니, 종이 말하기를, “최항(崔恒)께서는 장원이 되고 어르신은 말좌가 되었나이다.” 하니, 상사가 왈칵 성을 내어 낯빛을 변하고 크게 꾸짖으면서, “아, 야 이놈아,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이다.” 하였다. 최항은 나이 젊은 유학(幼學)이요, 박충은 나이 많은 생원이라 그 종은 말좌라고 부끄럽게 여겼지만 상사는 말좌를 다행으로 생각한 것이다.
◯성균관의 상하재(上下齋)는 각각 50명이며, 동서(東西)가 모두 2백 명이니, 하재는 사학(四學) 유생 중에 뛰어난 사람으로써 충당하였다. 그 외에 동서학(東西學)에서 각각 3명씩 납미(納米)를 허하고, 찬(饌)은 관(官)에서 급여하면서 사량(私糧 기숙사 장학생)이라 이름하였다. 영성(寧城 최항 1409-1474)이 사량으로 관에 있었으나, 이해 별시(別試)에는 삼관(三館)에서 사량을 거절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성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먹는 데는 비록 공사(公私)의 분별이 있으나 학문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고, 시험 장소에 들어가게 되니 시험장 안의 늙은 상사들이 비웃기를, “어디에 있는 가죽 불알이 이같이 날뛰느냐.” 하니, 영성이 답하기를, “당신 애비는 철불알이오?” 하였다. 마침내 장원에 뽑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훈공과 업적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다.
◯태종(太宗) 병신년 중시(重試)에 이조 정랑 김자(金赭 ?-1428)가 병조 정랑 양여공(梁汝恭 1378-1433)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양여공은 문장에 능하고 김자는 호걸이었다. 양여공이 해가 질 무렵에야 시편(詩篇)을 작성하였는데, 감자가 양여공에게 말하기를, “너는 향생(鄕生)으로서 병조 낭관이 되었으니 족하다.” 하고는, 시권(詩卷)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바쳤는데, 김자가 그렇게 해서 장원급제하였다.
◯허문경공(許文敬公 허조 1369-1439)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후(詡 큰 아들)와 눌(訥 둘째 아들)이 어디에서 나왔겠소.” 하였다. 이때에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 계획을 세웠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서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 소속이니, 취하여도 무방한데, 만약 이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면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이 모두 그릇되이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죄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없애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 하여, 마침내 공의 뜻을 좇아 전과 다름없이 그냥 두고 없애지 않았다.
※오늘날 공창제 운영과 관련된 문제이다. 현재 성매매가 금지되고 있으나 사실상 더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매매는 극성을 부리고 있다. 조선시대 연행사 일행의 양반들은 각 읍의 기생들 수청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허조의 말에는 많은 어폐가 있다. 만일 대다수 관료들의 의견대로 각 읍의 창기를 없애게 되었는데 젊은 관료들이 민간의 여성들을 불법으로 취하게 된다면 엄한 법으로 다스리면 되는 일이다. 오직 양반들의 성적 노리개로 창기를 둔 것이나 이를 방조한 것은 바람직한 생각은 못된다.
◯김현보(金賢甫)는 용모가 파리하고 약하였는데, 그의 친구 어자경(魚子敬)이 조롱하기를, “김현보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중도에 죽었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져서, 온 집안이 통곡하거늘 한 종이 문에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여, ‘용모가 아깝다.’하였는데, 그 종이 무슨 마음으로 그 용모를 아깝다 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현보가 가사옹(假司饔) 제조(提調)가 되자 어자경이 말하기를, “현보가 나라 잔칫날에 사옹원(司饔院) 차비(差備)에 참례(參禮)하고 돌아와 어미를 뵙고, ‘오늘 매우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현보가 대답하기를, ‘사옹원 제조(提調)가 되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무슨 관직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사옹원 제조가 되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무슨 관직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 임무는 어찬(御饌)을 받들어 바치고 연회를 관장하는 일인데, 반드시 풍채가 웅위한 사람을 뽑아서 합니다.’ 하니 어머니가 놀라면서, ‘가문에서 그렇게 시킨 일이로다. 어젯밤에 꿈에 네 아버지가 나타나, 장차 기쁜 경사가 있을 것이므로 꿈에 나타난 것이다.’하였다.” 하였는데, 그 아버지 중추공(中樞公)이 용모가 못생겼기 때문에 어자경이 이와 같이 놀린 것이었다. 김현보가 도승지가 되니 양(羊)뿔과,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는데, 그 띠가 너무 넓었다. 어자경이 말하기를, “군은 마땅히 잘 싸서 감추어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하라. 후세의 자손으로서 군의 용모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우리 선조(先祖)가 이 띠를 띠었으니, 이 띠는 반드시 용모가 봄 채소를 올려 놓은 네모난 넓은 소반과 같았으리라.’ 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풍만함을 말한 것이다.
○축산군(竺山君)은 정랑(正郞) 민보익(閔輔翼)과 한 동리에 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 만나서 반드시 술을 취하도록 마셔서 두건이 벗어져 맨 머리가 되면서도 날마다 술 먹는 것을 약속하였다. 민보익은 황달병에 걸려 얼굴이 먹처럼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아, 내가 늘 책망하였다. 민보익이 사중에 와서 몰래 술을 찾으면서 판서가 알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축산군은 몹시 슬퍼하다가 민보익이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축산군은 순근(純謹)한 종친(宗親)이요, 민보익 역시 문학(文學) 명유(名儒)이나 술을 삼가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서 세상을 버리니, 술이 사람에게 화(禍)를 끼침이 심각하다.
용재총화 제10권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루고 거리낌 없이 음란하였다.
전최(殿最) 날 도사(都事)가 호정의 허물을 논박하여 곧 하고(下考)하려고 하였더니, 당시 김주(金湊)가 감사로 있었는데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하륜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니 아직 논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상등[上第]으로 고과하였다. 그후에 김주가 정사(定社)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의 아내가 호정의 말 머리에 꿇어앉아서, “나는 김 아무개의 아내입니다.” 하고 말하니, 호정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호정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 당시 정안군(靖安君)이던 태종이 집 잔치에 참여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태종이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부을 적에 호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상위의 찬과 탕을 뒤집어 엎어, 왕자의 옷을 더럽히자,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났다. 호정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노하여 가니 가서 사죄해야겠다.” 하고 드디어 따라나섰다. 종이 태종에게 고하기를, “감사가 옵니다.”하였으나,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大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므로 호정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중문(中門)에 들어가니 호정도 또 중문에 들어가고, 내문(內門)에 들어가니 또한 내문에 따라 들어왔다. 태종이 비로소 이를 의심하여 돌아보고, “웬 일이냐?”고 물었다. 호정은 말하기를, “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어 엎은 까닭은 장차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 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침실로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호정이 말하기를, “신은 왕명을 받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 이안군(移安軍)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 것이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신도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머물러 기다리겠사오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십시오.” 하고 호정은 드디어 떠났다.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 그 연고를 말했더니, 이숙번은 아뢰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사온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종과 이안군을 이끌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빼앗아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와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이 남문 밖에 막차를 쳐서 그 가운데 앉고 또 막차 하나를 그 밑에 치니, 사람들이 누구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는데, 호정이 올라와 가운데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머지 않아 재상이 될 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호정과 이숙번의 힘이었다.
◯내가 김세적(金世勣 ?-1490)과 더불어 같이 승지가 되었는데, 활을 뛰어나게 잘 쏘아 당시에 적수가 없었기에 무과 장원에 뽑혀 성종(成宗)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드디어 기용되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활 만드는 장인에게 활을 만들게 하고, 활을 시렁에 꽂아 늘 손에 닿지 않은 것이 수백여 자루가 되며, 관청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항상 활을 벽에 기대어 세우고 손으로 만져 보배같이 여기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만약 잠깐의 여가라도 있으면 반드시 나와 사후(射候)를 쏘거나 표적을 쏘며, 비가 내리면 웅크리고 앉아 조그마한 종이를 벽에 붙이고 조그마한 싸리활을 써서 쏘았다. 힘써 부지런히 힘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종일 쏘아도 과녁을 벗어나지 않으며 짐승 쏘기를 더욱 잘하여 쏘아서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성종의 사랑함이 견줄바 없어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날로 고기를 그 부모에게 주게 하고, 이것저것 하사받은 것도 또한 헤아릴 수 없었으니, 비록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나 훈구(勳舊 벼슬이 높고 나이 늙은 자)라도 미칠 수가 없었다. 나이 40이 되기 전에 벼슬이 2품까지 올랐으나, 그 부모가 병이 있어 김세적이 찾아뵙다가 병이 전염되어 죽으니, 독자인데다 자식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오두 애석하게 여겼다.
◯세종이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여 표전지(表箋紙)와 자문지(咨文紙)를 제작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또 서적 찍는 여러 색지(色紙)를 만드니 그 품종이 한가지가 아니었다. 고정지(蒿精紙)ㆍ유엽지(柳葉紙)ㆍ유목지(柳木紙)ㆍ의이지(薏苡紙)ㆍ마골지(麻骨紙)ㆍ순왜지(純倭紙)가 그 정묘함이 지극하여 찍어낸 서적도 역시 좋았다. 지금은 다만 고정지와 유목지뿐이요, 자문지ㆍ표전지도 또한 옛날같이 정묘하지 못하다.
◯동잠실(東蠶室)은 성동 아차산(峨嵯山) 밑에 있는데 환관이 주관하고, 요즘 또 새로 잠실을 한강 밑 원단동(圓壇洞)에 설치하였는데, 또한 환관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서잠실은 성 서쪽 십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곧 옛날의 연희궁(衍禧宮)이다. 별좌(別坐) 두 사람을 두어 맡겼다가 그 뒤에 별좌는 상의원(尙衣院)에 이속시켜 여름에는 누에를 치고 양잠을 마치고는 본원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동서 잠실에서 각각 고치를 쳐서 승정원에 바쳐 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였다. 남강의 밤섬[栗島]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해마다 이를 따서 누에를 쳤다. 옛날 서울 성 안 큰 집에서는 다만 서너 집이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큰 집뿐 아니라 비록 일반인의 조그마한 점방이라도 누에를 기르지 않는 집이 없어서 뽕잎이 극히 귀하여 뽕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많았다.
◯고려 말에 왜구가 들끓었는데, 이는 연해(沿海) 사면으로 진(鎭)을 두어 방비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개국(開國)한 이후로는 항구의 중요한 곳에 모두 만호영(萬戶營)을 두고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가 거느리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왜구가 조금 없어졌는데, 그뒤에 왜구가 또 침입하므로 세종이 삼군(三軍)에 명령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비록 크게 승리하지는 못하였으나, 왜구도 또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왜적 몇 호가 삼포(三浦)에 살고자 하므로 세종이 그 의(義)를 사모함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니, 허조(許稠)가 울며 간하기를, “왜노(倭奴)가 신이라 칭했다가도 반란을 일으키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찌 어류나 패류(貝類)와 같은 천한 무리로 하여금 예의를 갖춘 우리 사이에 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후일에 백성이 점점 많아지면 응당 나라의 큰 해가 될 것입니다.” 하고, 죽음에 임하여 재삼 상계(上啓)하되, “청하건대 아직 번성해지기 전에 아주 이를 돌려보내십시오.” 하니, 그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허조의 말을 예사롭게 여겨 별로 놀라지 않더니, 지금 삼포에 도모하기 어려운 폐해가 만연하게 된 연후에야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조정에서 항상 도주(島主)에게 타일러 돌아가게 하였으나 돌아간 것은 3, 4호에 지나지 않고, 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점점 우리 땅을 갈아서 밭을 만들어 얼룩옷이 변두리 여러 읍에 가득하여 때로 우리 백성과 더불어 서로 다투며, 몰래 전라도로 가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모두 삼포의 사람이었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오곡이 생산되지 않아, 다만 구맥(瞿麥)을 심고 사람들은 모두 칡과 고사리 뿌리를 캐어 먹고 도주도 또 한 삼포에서 세를 거두어가지고 이로서 생을 이어나갔다. 대마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 나라 벼슬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된 자가 해마다 한번씩 조회하러 왔는데, 조회하러 오는 것이 한 해에 무려 50척이나 되었다. 한번 오면 몇 달 동안 머물러 있고 또 일본인에게 주는 양식을 받아 이것으로 그 처자를 먹여 살리니, 경상 하도(慶尙下道)의 미곡은 태반(太半)이 왜의 양식으로 소모되었다.
◯향시(鄕試)의 울타리는 경중(京中)에서처럼 엄중하고 정제되어 있지 못하다. 수령이 시관(試官)이 되고 수령이 과거보는 선비가 되기 때문에 흔히 누설되어 서로 통하는 일이 많았다. 한 수령이 시험에 나아갈 때 시권(試券)을 만들어주고 나와서, 그가 지은 시권의 첫머리 글귀를 써서 소리(小吏)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내 시권의 등급 차례를 보고 오너라.” 하였다. 얼마 있다가 소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시권이 고중(高中)이로소이다.” 하였다. 수령이 그 연고를 물으니, 답하기를, “처음 장중(場中)에 들어가서 당호(堂戶)에 의거하여 엿보니, 시관이 시권을 읽어 내려가다가 반쯤 읽고나서 문득 크게 웃고 이방이라 써붙였습니다.”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경자(更子)라 쓴 것이 이(吏) 자와 같아서 이방이 그 우두머리이므로 고중이라 한 것이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우리 나라 거가대족(巨家大族)은 모두 주(州)ㆍ군(郡)ㆍ토성(土姓)으로부터 나왔으나, 옛날에 번창하다가 지금 쇠잔한 것과 옛날에 한미하다가 지금 번창한 것을 아울러 기록하면 파평(坡平) 윤(尹)씨ㆍ한양 조(趙)씨ㆍ이천(利川) 서씨ㆍ여흥(驪興) 민(閔)씨ㆍ수원 최(崔)씨ㆍ양천(陽川) 허(許)씨ㆍ덕수(德水) 이(李)씨ㆍ행주(幸州) 기(奇)씨ㆍ교하(交河) 노(盧)씨ㆍ인천 이(李)씨ㆍ채(蔡)씨ㆍ남양(南陽) 홍(洪)씨ㆍ용구(龍駒) 이(李)씨ㆍ죽산(竹山) 박(朴)씨ㆍ안(安)씨ㆍ양성(陽城) 이(李)씨ㆍ광주(廣州) 이(李)씨ㆍ강화(江華) 봉(奉)씨ㆍ청주(淸州) 한(韓)씨ㆍ경(慶)씨ㆍ서산(瑞山) 유(柳)씨ㆍ한(韓)씨ㆍ이(李)씨ㆍ전의(全義) 이(李)씨ㆍ단양(丹陽) 우(禹)씨ㆍ진천(鎭川) 송(宋)씨ㆍ신창(新昌) 맹(孟)씨ㆍ옥천(沃川) 육(陸)씨ㆍ경주(慶州) 김(金)씨ㆍ이(李)씨ㆍ김해(金海) 김(金)씨ㆍ이(李)씨ㆍ안동(安東) 김(金)씨ㆍ권(權)씨ㆍ진주(晉州) 강(江)씨ㆍ하(河)씨ㆍ성주(星州) 이(李)씨ㆍ상주(尙州) 김(金)씨ㆍ밀양(密陽) 박(朴)씨ㆍ손(孫)씨ㆍ청송(靑松) 심(沈)씨ㆍ거창(居昌) 신(愼)씨ㆍ창녕(昌寧) 성(成)씨ㆍ조(曺)씨ㆍ영산(靈山) 신(辛)씨ㆍ고령(高靈) 신(申)씨ㆍ동래(東萊) 정(鄭)씨ㆍ하동(河東) 정(鄭)씨ㆍ연일(延日) 정(鄭)씨ㆍ하양(河陽) 허(許)씨ㆍ칠원(漆原) 윤(尹)씨ㆍ순흥(順興) 안(安)씨ㆍ의령(宜寧) 남(南)씨ㆍ선산(善山) 김(金)씨ㆍ완산(完山) 이(李)씨ㆍ광산(光山) 김(金)씨ㆍ나주(羅州) 박(朴)씨ㆍ나(羅)씨ㆍ장수(長水) 황(黃)씨ㆍ순천(順川) 박(朴)씨ㆍ능성(綾城) 구(具)씨ㆍ영광(靈光) 정(丁)씨ㆍ여산(礪山) 송(宋)씨ㆍ제주(濟州) 고(高)씨ㆍ해주(海州) 최(崔)씨ㆍ평산(平山) 신(申)씨ㆍ연안(延安) 이(李)씨ㆍ백천(白川) 조(趙)씨ㆍ문화(文化) 유(柳)씨ㆍ신천(信川) 강(康)씨ㆍ원주(原州) 원(元)씨ㆍ강릉(江陵) 최씨ㆍ함(咸)씨ㆍ평양(平壤) 조(趙)씨ㆍ함종(咸從) 어(魚)씨ㆍ풍천(豐川) 임(任)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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