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잡록(雲巖雜錄)
유성룡(柳成龍 1542-1607)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유자온(柳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작(柳公綽)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23세),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25세)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49세),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蘋)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황화집(皇華集)』·『구경연의(九經衍義)』·『문산집(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유성룡의 저서에 대해, 「서애행장(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붕당(朋黨)
아, 우리 나라가 쇠약해진 조짐은 그렇게 된 유래가 있다. 명종(明宗) 때에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 1503-1565)ㆍ이량(李樑 1519-1582)의 무리가 20여 년 동안 서로 이어 정권을 잡으니, 충성스럽고 어진 이는 억눌려 등용되지 못하고, 기강은 무너져 어지럽고 탐관오리가 풍조를 이루어 이미 쇠약해져 떨치지 못할 조짐이 있었다.
을묘년(1555, 명종 10)의 왜구(倭寇)는 개나 쥐 같은 좀도둑에 불과하였는데도 원근이 모두 놀라고 벌벌 떨어 호남 지방이 거의 보전되지 못할 뻔하였다. 만약 적이 스스로 물러가지 않았다면 그 형세가 또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에도 군정(軍政)이 예전처럼 문란하여 백 가지 중에 하나도 바로잡힌 것이 없었다.
명종 말년에 이르러 권력 부리던 간신들이 제거되니 자못 정치를 새롭게 하려 하였다. 이에 산림에 숨어 있던 선비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벼슬하는 이가 많게 되니, 사림들이 즐거워하여 태평성대를 기대할 수 있다 하였다.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더욱더 인재의 등용에 유념하게 되니, 그 당시 건의하는 자들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서 초야에 버려진 현사(賢士)가 없게 하는 아름다운 일로써 임금에게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등용된 사람들은 대체로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이가 많으며, 그중에는 혹 선비라는 이름을 가탁하여 시속의 좋아하는 것만 따르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도(公道)를 저버리고 당파를 위해서 죽는 폐습이 점차로 이루어지고, 직분을 지키고 임금을 받드는 의리는 점점 쇠퇴해져서 서로서로 부추기고 추천하여 당(黨)이 성한 자는 중요한 지위에 오르고 형세가 고립된 자는 낮은 벼슬에 억눌려 있게 되었다.
고(故) 상공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이것을 근심하여 고치고자 하였는데, 당시 사류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떼지어 일어나 공격하여 착한 이를 미워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준경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죽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둘로 나뉘어 당파의 화가 비로소 일어나더니, 이이(李珥 1536-1584, 1558년 별시문과 장원급제, 1564년 대과장원급제)와 정철(鄭澈 1536-1593, 1562년 별시문과 장원급제) 등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더욱 분열되었다. 사대부들이 나와서는 조정에서 논의하고, 들어가서는 집에서 꾀하는 짓이 오직 피차간에 이기고 지는 것, 같은 당파끼리는 두둔하고 다른 당파는 공격하는 것으로 일삼아 번갈아 승부가 갈리더니, 계미년(1583, 선조 16)ㆍ기축년(1589, 선조 22)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다.
시험삼아 여기에서 논평한다면, 명종 때에는 권신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폐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에 있었고, 금상(선조) 때에는 조신(朝臣)들이 당파를 만들었기 때문에 폐단이 권력의 분산에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정사에 옳고 그름을 논하지 못하되 그래도 한군데로 귀착되는 것이 있지만, 분산되게 되면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모양도 이룰 수가 없다. 그 밖에 또 틈을 타서 부정한 방법을 통하고, 어두운 곳을 의지하여 몰래 자기의 사욕을 이루는 무리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 기강과 풍속이 크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길, ‘평숙(平叔)은 부탄(浮誕)하기만 하고, 이보(夷甫)는 앉아서 공(空)만을 논하고 있으니 소양전(昭陽殿)이 선우(禪于)의 궁궐로 변할 줄 어찌 알랴.’하였다. 사물(事物)이 본래 서로 의논하지 않되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니, 진(晉) 나라 때의 오호(五胡)의 변란은 사대부들의 청담(淸談)이 나라를 그르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화가 어찌 원인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옛날 소동파(蘇東坡)는 일찍이 화(和)와 동(同) 두 글자를 논하기를,
“동은 물에 물을 탄 것 같고, 화는 국에 양념을 한 것과 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의 습성에 조화롭게 지내는 것은 좋으나, 부화뇌동(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마다 진실로 부화 뇌동하는 것을 숭상한다면 천하는 또한 위태하다고 하겠다.
※和而不同(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함.)
천하의 사리(事理)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을 가린 뒤에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힐 수 있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힌 뒤에야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신에게 행한다면 나쁜 냄새를 미워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르게 될 것이며, 이것을 남에게 행한다면 선(善)을 보고는 따라잡지 못할 것처럼 하고 악(惡)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대는 것처럼 겁내어 온 세상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간사하고 사심을 품어 이(利)와 녹(祿)을 구하여 한 번 이름을 사림에 붙이면 비록 죄악이 낭자하여 직분을 망가뜨려서 온갖 못된 짓을 하더라도 남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한 번이라도 그 잘못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명목으로 공격하니, 옛 사람의 이른바, 선은 작은 것이라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악은 미세한 것이라도 비평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모든 일은 정밀하게 다루어지고 사물은 그 근본을 다스려서 이름에 따라 실적(實績)을 책임지우며 허위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정치라는 것이 장차 어떻게 시행되겠는가.
아, 시속(時俗)의 병폐가 이미 오래되었구나! 정치를 아는 신하와 기미를 아는 선비가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모든 백성들이 당파를 지음이 없고 사람들이 비덕(比德)함이 없는 것은 임금이 극(極)이 되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극을 세우는 길을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치우침이 없고 기욺이 없어 왕의 도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좋아함을 일으키지 말아 왕의 의(義)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미워함을 일으키지 말아 왕의 길을 따르라. 치우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넓고 크며, 편당함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탄할 것이고,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의 도가 바르고 곧을 것이니, 그 극에 모여서 그 극에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격물치지(格物致知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와 성의정심(誠意正心 뜻을 성실(誠實)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의 도를 다하여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평형을 이루어 위에서 내리 비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현란시키고 번복하여 형상이 만 가지일 것이니, 임금이 그것에 좇아 옳고 그름을 살피고자 한다면 틈 사이로 싸움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또 어떻게 승부의 있는 바를 알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게 되어 온 세상의 인심이 점점 더 퇴폐해져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환란이 어찌 생기지 않으랴. 슬픈 일이다.
예전부터 붕당(朋黨)의 화는 반드시 말세에 일어나는 것으로, 아직까지 조정이 당파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고도 나라가 위태하고 어지럽지 않은 적은 없었다. 예를 든다면, 당(唐) 나라는 우ㆍ이(牛李)의 당파가 일어나 승부를 다툰 지 40여 년 만에 당 나라 왕실이 드디어 떨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는 희령(熙寧), 원풍(元豐), 원우(元祐) 이후로 간사한 무리와 바른 사람들이 나뉘어 서로 공격하다가 그 말기에는 바른 사람들은 다 떠나고 간사한 무리들만이 남아 있게 되어 마침내 정강(靖康)의 화를 초래하였으니, 조금 징계해야 할 것 같은데, 남도(南渡)한 뒤에도 위학(僞學)의 금(禁)이 있었으며, 점점 전락(轉落)하여 정대전(丁大全)ㆍ사미원(史彌遠)의 무리가 서로 바뀌어가며 정권을 잡기에 이르러 송 나라는 다시 구할 수 없었다.
아, 슬프다. 대개 일찍이 살펴보니, 신하가 조정에 벼슬할 적에 언론(言論)의 차이나 소견의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때에는 소위 옳고 그른 것과 다르고 같은 것이 모두 공정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와 사심(私心)이 그 사이에 섞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옳다 하는 것이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며, 그르다고 하는 것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동의해야 할 것을 동의하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으며, 의견이 같더라도 일찍이 아부하는 의사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개인감정을 잊고, 사람은 도의(道義)에서 서로 잊는다.”는 것이다. 밤낮으로 힘쓰는 것은 오직 그 근심되는 것을 생각하여 국가 일에 마음을 다하는 데에 달린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사심을 써서 속임수를 쓰는 자가 있으면 큰 경우는 형벌을 주고 작은 경우는 내쫓으니,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 있으면 도깨비가 저절로 날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홍범에 이르기를,
“모든 백성들이 당파를 지음이 없고 사람들이 사사로이 아첨함이 없는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하였다. 표준이 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각각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람끼리 서로 찬성하고 반대하여 자기와 같은 편이면 비록 그른 것이라도 옳다 하고, 자기와 다른 편이면 비록 옳은 것이라도 그르다 한다. 그 처음에는 한두 사람으로 시작하여 거기에 좇는 자가 더욱 많아지면 그 틈을 타서 시세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아서 달려가 붙어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세월이 갈수록 날로 많아진다. 이에 온 나라 안이 둘로 나뉘어 각기 자기가 옳게 여기는 것을 옳다고 주장하여 참으로 옳은 것을 가리지 못하고, 각기 자기가 그르게 여기는 것을 그르다 하여 참으로 그른 자도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임금이 그 정상을 살펴 버리고 취하는 조처를 두려 하면 말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어지럽게 떠들어 현란시키고 번복하여 마치 틈 사이로 싸움을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그 승부와 득실의 있는 바를 알 수 있겠는가. 이때에 아부를 잘하는 자가 있어서 혹은 궁인(宮人)들과 결탁하고, 외척에게 연줄을 놓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임금의 뜻을 변동시키고, 밖으로는 눈치보며 달려가 붙는 무리들로 하여금 사론(士論)이라 칭탁하여 남을 모함하는 술책을 쓰게 하여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로 하여금 깡그리 자기네를 따르게 하여 안과 밖에 꽉 차게 했으니, 임금이 비록 보고 듣는 것을 바꿔서 바로잡을 계획을 하고자 하여도 소용이 없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니, 위태롭도다.
근일에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설은 금상 초년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서인)과 김효원(金孝元 1542-1590 동인)에게서 시작되고, 이이(李珥 1536-1584 서인입장)와 정철(鄭澈 1536-1593 서인)에 이르러 성해졌으며, 이산해(李山海 1539-1609 동인)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망친 전례가 한 수레바퀴의 자국과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서 마침내 그칠 때가 없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저자인 본인 유성룡(1542-1607)은 동인.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심의겸은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이다. 명종 때에 그의 고모부(고모부는 잘못, 외삼촌임) 이량(李樑)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이감(李戡) 등과 서로 결탁하여 기대승(奇大升)ㆍ이문형(李文馨)ㆍ박소립(朴素立)ㆍ허엽(許曄) 등 5~6인을 모함하여 관직을 빼앗고 내쫓으니, 이들은 모두 사류(士類)였으므로 조정과 민간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의겸이 은밀히 대궐 안에 들어가 이량이 정치를 문란시키고 사람을 해치니 제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드디어 부제학 기대항(奇大恒)으로 하여금 논핵하게 하였는데, 한 번 아뢰자 곧 윤허하였다. 이량과 그 도당은 모두 멀리 귀양을 가고, 문형 등은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의겸은 사림에 명성이 나서 자못 일을 독단할 조짐이 있었다. 급제한 지 5년도 못 되어 당상이 되었으며, 박순(朴淳)ㆍ이이(李珥) 등과 가장 친밀하였다.
김효원(金孝元)은 보다 늦게 나왔으나 나이가 젊고 기백이 날카로워 의론에 피하는 바가 없어서 의겸은 외척이므로 등용할 수 없다 하였고, 의겸도 효원이 소년 시절에 일찍이 윤원형(尹元衡)의 사위 안덕대(安德大)와 교유하여 원형의 집에 기식(寄食)하였다 하며 서로 헐뜯었다.
그래서 의겸이 옳다고 하는 사람을 서인, 효원이 옳다고 하는 사람을 동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의겸의 집은 도성 서쪽에 있고 효원의 집은 도성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가 여러 번 소를 올려 관원들이 분열할 염려를 말하고, 화협시켜 진정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항상 서인을 위주로 하였다.
또 정철이란 자가 있었는데, 편협하여 의논을 주장함이 더욱 어긋나서 한쪽을 다 배척하고자 하여 효원을 공격함이 너무 심하여 소인이라고까지 하니, 이에 선비들의 여론이 더욱 격해졌다.
얼마 안 가서 종실(宗室)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임금께 면대하기를 청하여 유성룡(柳成龍)ㆍ김응남(金應南)ㆍ이발(李潑)ㆍ김효원이 서로 붕당을 만들었다고 논하였으므로 나는 부제학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돌아갔다.
이때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바야흐로 때를 만나 정권을 잡으니, 경망스럽고 붙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날마다 그의 집에 가득하여 논의가 바람이 일듯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선비들의 의론이 이이와 서로 충돌함이 날로 심해졌다.
※저자인 동인 유성룡은 동시대의 인물이자 서인계열인 이율곡에 대해 상당히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율곡과 함께 조선전기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서애지만 인격면에서 율곡에 비해 편협된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할게 해주는 글이다.
그때 마침 북쪽 변방에 일이 생겼는데, 이이가 말을 바친 군사들의 수자리 사는 것을 면제해 주면서 임금께 아뢰지 않았다. 또 하루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궐내에 도착하였다가 병을 핑계대고 나가버렸다. 이에 대간이, 이이가 국정을 전단(專斷)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탄핵하였으며, 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 이이를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하였으니, 그 차자는 바로 허봉(許篈 1551-1588 동인의 선봉으로 이때 유배되었고 방랑자로 살다 죽었다.)이 기초(起草)한 것이었다. 상이 매우 성내어 대신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ㆍ정지연(鄭芝衍) 등을 불러 물으니, 박순은 이이가 잘못이 없는데 남에게 모함을 받았다고 역설하고, 지연은 이이의 일처리가 잘못되었으니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다 그르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귀영은 이이를 침해하는 말이 많았다.
상이 성내어 묻기를,
“이이는 과연 소인인가? 바로 말하라.”
하니, 귀영이 대답하기를,
“사람을 아는 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니, 신이 어찌 그가 반드시 소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이 물러간 뒤에 상은 귀영이 당파에 아첨하고 정직하지 않다고 하였다. 귀영이 드디어 갈렸다.
이이의 문하생 몇 사람이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글을 올려 이이를 변명하고, 왕자의 사부 하낙(河洛), 황해도 유생 박추(朴樞), 유학(幼學) 신급(申礏)ㆍ박제(朴濟), 전라도 유생 변사정(邊士貞), 호군(護軍) 성혼(成渾)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이이는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간사한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하니, 상이 곧 그들을 칭찬하였다. 또 동인쪽 선비들 수십 명이 상소하여 이이를 논핵하여 전일의 유생들의 말은 공론이 아니라고 하니, 조정이 매우 소란하여 송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1536-1588 동인으로 이때 유배됨)가 독계(獨啓)하여, 이이가 젊었을 때에 아버지를 버리고 중이 되었던 일과 토지를 다투어 탐욕을 부린 일 등을 말하고 나라를 파는 소인이라고까지 하니, 상이 성내어 그를 체직시켰다.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이 그의 동료 김제갑(金悌甲)ㆍ이원익(李元翼)ㆍ성낙(成洛) 등을 거느리고 유생들이 이이를 구원한 것은 공론이 아니라고 아뢰니, 상이 직위장(直衛將) 정복시(鄭復始)ㆍ권벽(權擘)을 불러들여 가승지(假承旨)를 삼고, 근원 등을 해임하여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에 박근원은 강계(江界)로, 송응개는 회령(會寧)으로, 허봉은 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내고(계미삼찬이라고 함), 김응남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이이를 이조 판서로, 성혼을 참판으로, 정철을 대사헌으로 삼았으며, 그 밖에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이이를 공격한 사람은 모두 지방관으로 내보냈으며, 지연은 등창이 나서 죽었다.
다음 해 갑신년(1584, 선조 17) 봄에 이이가 병으로 죽었다. 이해 여름에 큰 가뭄이 드니, 말하는 자가 혹은 세 사람(박근원, 송응개, 허봉)을 귀양 보냄이 너무 지나쳤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에 노수신(盧守愼) 공이 좌상으로서 조정에 돌아오고, 나는 경상 감사로서 특명으로 부제학이 되어 소환되었다가 곧 예조 판서에 승진되었다. 사류들도 조금씩 다시 등용되었다.
그 뒤에 근원은 유배지에서 죽고, 응개와 허봉은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모두 죽었다. 허봉의 자(字)는 미숙(美叔)으로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성질이 경망하였다. 경서와 사기(史記)에 폭넓은 지식이 있었으며 문장도 잘 지었다. 관동 지방의 산수를 유람하다가 객지에서 병을 얻어 영평(永平) 수령 서인원(徐仁元)이 지우(知友)라 하여 들러서 묵고 가기를 요구하였으나 문지기에게 거절당하고 여관에서 죽으니, 이 소문을 듣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저서로 《이산잡술(伊山雜述)》이 있고, 《해동야언(海東野言)》과 《조천록(朝天錄)》을 편차(編次)하였다.
이숙헌(李叔獻 이이) 1536-1584
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원수(元秀)에게 애첩이 있었는데, 그를 대우함이 좋지 못하므로 이이가 분이 나서 달아나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의암(義庵)이라 이름하고, 풍악산(楓岳山), 오대산(五臺山) 등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시를 잘 짓고, 문장에 더욱 뛰어났다.
전신은 분명 김시습이요 / 前身定是金時習
이 세상에선 도로 가낭선이 되었구나 / 今世還爲賈浪仙
라는 시가 있다. 20세가 넘어서 머리를 기르고 집에 돌아와서 사류들 가운데에 유명해졌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생원과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문묘에 가서 배알하고자 하니,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가 일찍이 중이었다 하여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이가 함께 급제한 사람들과 벽송정(碧松亭)에 앉아서 날이 늦도록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이야기하고 웃는 것이 태연하여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성균관 박사 권문해(權文海)가 여러 유생들에게 강권하여 풀어 주어 드디어 들어가 배알의 예를 행하고 나왔다. 그 해에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니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다. 그때에 삼사에서 을사위훈(乙巳僞勳)을 삭제하기를 청하느라 1년이 다 가도록 논계하여 차자를 날마다 올렸다. 이이가 올 때마다 동료들은 붓을 놓지 않았는데, 이이가 종이와 붓을 청하여 물흐르듯 문장을 써서 조금도 막히거나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해주(海州)로 돌아갔다. 더러는 파주(坡州)의 임진강(臨津江) 가에 살기도 하였다.
성혼(1535-1598)과 교분이 두터워 서로 존중하였다. 여러 번 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니, 상이 그에게 포부가 있다고 생각하여 크게 등용하려 하였다. 그래서 신사년(1581, 선조 14) 간에 부제학과 대사헌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호조 판서에 배명(拜命)되고, 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다. 만년에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어떤 이는 그를 왕안석에게 비유하였다 한다. 갑신년 봄에 병으로 죽었다.
성호원(成浩原 성혼) 1535-1598
성혼(成渾)의 자는 호원(浩原)이다. 그의 아버지 수침(守琛)은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다. 훌륭한 덕(德)과 높은 명망이 있었으며, 호를 청송(聽松)이라 하였다. 70여 세에 집에서 사망했다.
성혼은 이름난 현인의 아들로 일찍부터 당시의 명예가 있었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았다. 이이등이 적극 추천하여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이이가 조정에 있을 적에 성혼의 명성이 더욱 성해지니, 상의 기대가 날로 높아져서 여러 번 불렀다. 성혼이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오던 날에는 성중의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들이 모두 나가서 맞이하였다. 상이 인견(引見)하고 대도(大道)의 요점을 물으니, 성혼의 대답에 그다지 특이한 것은 없었다. 통정대부로 올리고, 또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이조 참판을 삼으니,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재상의 반열에 이른 경우는 근세에 없던 일이었다.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왕의 피난 행차가 파주(坡州)를 지나므로, 왕의 생각에는 성혼이 나와서 어가를 호종(扈從)하리라고 여겼는데, 나오지 않자 매우 섭섭하게 여겼다. 그 해 겨울에 성혼이 성천(成川)에 가서 세자를 호종하니, 우의정 유홍(兪泓 1524-1594)이 좌상 윤두수(尹斗壽 1533-1601)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성혼은 어진 사람이니 마땅히 벼슬의 품계를 올려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유홍은 성천에 있고, 두수는 행재(行在)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수가 유홍의 말대로 청하였으나, 상께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조에서 곧장 참찬으로 추천하였더니, 낙점하여 드디어 자헌대부가 되었다. 성혼이 성천에서 처자를 거느리고 의주로 달려가서 사은하고, 당시 의론을 주도하여 홍여순(洪汝諄)ㆍ송언신(宋言愼)ㆍ이홍로(李弘老) 등을 귀양 보내니, 이들은 모두 이산해(李山海)의 당파(동인)였다.
평양이 수복되자 상이 의주에서 수레를 되돌렸다. 성혼이 그 뒤로는 어가에 호종하지 않다가 상을 정주(定州)로 뒤쫓아와서 병 때문에 호종하지 못하였다고 하고 대죄(待罪)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의병장이 되었으니 수복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때의 일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성혼이 파주에 있을 적에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의병이라고 일컬었으므로 상이 그것을 기롱한 것이다.
계사년(1593, 선조 26) 여름에 왕명을 받들고 가서 왜적에게 도굴된 정릉(靖陵)에서 나온 시신의 진위(眞僞)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드디어 그것을 버리고, 빈 능을 다시 옛 모습대로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병을 핑계대고 재령(載寧)에 머물면서 비밀리에 승지 구성(具宬)에게 부탁하기를,
“정릉의 시신은 다른 시체를 가져다 놓고 공(功)을 요구한 것이다.”
하고, 임금께 그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그 뜻은 나를 모함하려는 데에 있었다. 구성이 돌아와 성혼의 말대로 아뢰자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이홍국(李弘國) 등과 그와 같이 갔던 10 인을 체포하여 삼성(三省)이 같이 추국하였는데, 체포된 자의 전후의 진술이 한결같고 틀린 것이 없었으므로 일이 잘 풀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정릉에 관한 논의가 드디어 그치고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상이 환도하자 성혼이 뒤쫓아 도성에 들어와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왜적과 화친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성내어 그 그름을 배척하니, 성혼이 두려워하며 궐문 밖에 나와서 명을 기다리다가 벼슬이 해임되어 돌아갔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임종할 때에 큰 범이 그의 집 지붕에 올라가서 이엉을 걷어 차내며 크게 으르렁거려 소리가 산골짜기에 진동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날 밤을 계속하므로 집안 사람들이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호위하여 겨우 화를 면하였는데, 수일 만에 죽었다.
정계함(鄭季涵 정철) 1536-1593
정철(鄭澈)의 자는 계함(季涵)이다. 이이ㆍ성혼과 가장 친하였으며, 또 심의겸(沈義謙)을 시켜서 김효원(金孝元)을 적극 공격하게 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허봉(許篈) 등이 죄를 받은 데에는 정철의 힘이 있었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에는 추관(推官)이 되어 기회를 타서 자기와 당파가 다른 사람을 많이 모함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소인이라 지목하여 강계(江界)로 귀양갔다. 임진년에 행재(行在)에 불려 갔는데, 또 상의 뜻에 거슬려 죽은 뒤에 관작(官爵)이 삭탈되었다.
최효원(崔孝元 영경) 1529-1590
최영경(崔永慶)의 자는 효원(孝元)이다. 처음에는 한양(漢陽)의 원동리(院洞里)에 살았는데, 어버이 상을 당하였을 때에 애훼(哀毁 부모의 상에 매우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짐)로 소문이 났다. 재산을 다 털어 장사를 후하게 하여 석곽(石槨)을 썼다. 조금 뒤에 집안이 더욱 궁핍하게 되어 생활할 수 없으므로 처자를 데리고 진주(晉州)로 내려가서 그의 아우 여경(餘慶)의 처가에 의지하였다. 모든 일을 영경이 주관하고 여경은 그의 앞에서 공손히 명령을 받으니, 보는 이가 그곳이 여경의 집인 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다 어질게 여겼다.
영경은 사람됨이 구애됨이 없이 기개를 숭상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에는 깊이 캐기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언론(言論)을 좋아하였다. 조남명(曺南冥 식(植) 1501-1572)을 보고 좋아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조정에서는 유일(遺逸)로 불러 전후에 사축(司畜)과 지평(持平)으로 삼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높은 관리가 문 밖에 와서 만나기를 원하더라도 그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면 즉각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남에게 원망을 많이 샀다.
갑신년(1584)에 내가 경상 감사가 되어 관내(管內)를 순행하다가 진주에 이르러 오래 전부터 영경의 이름을 들어 그 집에 찾아갔더니, 집이 우거진 대밭 속에 있었는데, 영경이 베옷을 입고 학 한 마리와 함께 그 안에 살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훌륭하였다. 술자리를 베풀어 마주앉아 서로 권하였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말이 당대의 일에 미쳐 나를 놀라게 하였다.
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역옥 사건이 일어나자 사류 중에 연루된 자가 많았다. 전라도 유생 홍천경(洪千璟) 등이 권신의 뜻을 받들어 영경이 역적의 도당이라고 모함하여 감사 홍여순(洪汝諄)에게 말하니, 여순이 즉시 경상 감사 김수(金睟)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경을 체포하여 한편으로 조정에 급히 보고하여 알리고, 드디어 그의 아우 여경과 함께 서울 감옥에서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바야흐로 서울 감옥에서의 일이 급하게 되었으나 감히 그의 원통함을 말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안음(安陰) 유생 김경근(金景謹)이 소를 올려 말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조금 뒤에 여경이 먼저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그때에 좌상 정철(鄭澈)이 당시 의론을 주장하여 옥사를 맡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대궐에서 정철을 만나,
“영경의 옥사가 어떻게 되었소?”
하고 묻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뛰어난 선비로 중망(重望)이 있으니, 옥사를 자세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오.”
하니, 정철이 평소부터 경솔하고 또 술에 취하여 갑자기 자기 왼손으로 자기의 목을 잡고 오른손으로 찌르는 형상을 하면서 연달아 말하기를,
“이 사람이 평소에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고자 하였소.”
하였다. 판부사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옆에 있다가 해명하기를,
“남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소. 원컨대, 대감은 남의 말을 믿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정색하며 말하기를,
“가령 그 사람이 실지로 그런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이 지금 옥관(獄官)으로 있으니, 마땅히 그 생각은 잊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러시오?”
하니, 정철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것을 생각하겠소. 이미 추안(推案)에 극구 해명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문하지 않고 그냥 가두고만 있소.”
하고, 또 나에게 말하기를,
“공이 이미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않았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큰 옥사이니 외부인이 말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화를 더하게 할 것이오. 오직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만이 사리(事理)를 바르게 펼 수 있는 것이오.”
하니, 정철이,
“내가 진실로 이미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다른 일이 없도록 보증하겠소.”
하였다. 수일 뒤에 영경이 과연 옥에서 풀려 나왔다. 사헌부에서 도로 수감(收監)하여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윤두수(尹斗壽)가 대사헌이고, 발의(發議)한 자는 실로 장령 구성(具宬)이었다. 사람들은 정철이 비록 겉으로는 공론을 보고서 석방해 주는 체하면서 은밀히 자기의 당파를 시켜 논핵하게 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영경이 전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이미 폐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친구 이조춘(李遭春)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약을 구하였다. 두 번째 옥에 갇히자 병이 더욱 심해져서 오래지 않아 죽었다. 사헌부에서 또 아뢰기를,
“영경이 스스로 자기 죄를 알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습니다.”
하고, 당직 도사(當直都事)를 파면하니, 사람들이 그의 죄가 심했다 하여 정철이 죄를 받게 되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영경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말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영경에게 대사헌을 추증하고, 그 당시 대관(臺官)이었던 구성 등은 귀양보냈다. 정철은 죽은 뒤에 또한 이 일 때문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영경은 평시에 성혼(成渾)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성혼이 이이와 함께 정철과 결탁하자 영경이 매양 정철은 형편 없는 소인이라고 드러내놓고 말하고, 술을 마신 뒤에 술이 매우 취하면 두 무릎을 내놓고 손으로 스스로를 만지면서,
“이 무릎은 마침내 정철에게 고문당하게 될 것이지만, 내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이어 큰소리 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성혼과의 교분이 끝까지 가지 못하였다.
임진년에 내가 안주(安州)에 있을 때에 정철이 행재소로부터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가다가 나를 백상루(百祥樓)에서 만났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에 갑자기 말하기를,
“공이 내가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말하였다는데, 과연 그런 말을 하였소?”
하기에, 내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공의 마음은 알 수 없으나 형적(形跡)으로 본다면 그런 것 같았기 때문에 과연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소.”
하니, 정철이 성내어 술잔을 땅에 던지고 일어나 두어 걸음 가다가 도로 앉아서 말하기를,
“공은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오? 그를 구원하려 한 성호원(成浩原)의 편지가 아직도 나에게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소?”
하였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돌아보면서 한 번 웃고 말았다.
무술년(1598, 선조 31) 겨울에 내가 동성(東城) 밖에 있을 때에 이귀(李貴)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으니, 곧 정철이 옥사를 맡았을 때에 영경을 구원하고자 하다가 올리지 못한 계사의 초고(草稿)였다. 이귀가 말하기를,
“정승 정철의 본심은 이러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므로 그의 자제가 사람을 시켜서 가져와 보인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논하는 사람들이, “성혼이 정철을 사주하여 영경을 죽이게 하였다.’고 추후에 말하자 성혼의 관직도 삭탈하였다. 이쪽 저쪽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다.
정릉(靖陵)에 관한 일을 기록함
계사년(1593, 선조 26) 4월 초순에 선릉(宣陵)과 정릉이 왜적에게 도굴되었다. 그때 나는 동파(東坡)에 있었는데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에서 개성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듣고,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가서 문후(問候)하였다. 접반사 이덕형(李德馨), 유수(留守) 노직(盧稷),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 등 5~6인이 접대청(接待廳)에 모여 앉아 있는데, 경기 좌감사(京畿左監司) 성영(成泳)의 급보가 왔다. 그때는 캄캄한 밤중이었으므로 불을 켜고 그 글을 펴 보니, 바로 능침(陵寢)에 변고가 생겼다는 보고였다. 즉시 울부짖으며 슬퍼하니, 제독이 듣고 그 보고를 가져다 보았다. 나는 여러 공들과 함께 만월대(滿月臺) 앞 남쪽 산기슭에 가서 능쪽을 바라보면서 곡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김 원수(金元帥)와 함께 동파로 돌아와서 사람을 모집하여 가서 두 능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하니, 군관 이홍국(李弘國)이라는 자가 나와 꿇어앉아 말하기를,
“소인은 바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예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어찌 보통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죽을지라도 가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원수와 함께 그의 충성을 칭찬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가 혼자 갈 수는 없으니, 다시 가기를 원하는 군사 10인을 모집하여 함께 가도록 하라.”
하였다. 그때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강화에 있었는데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경성(京城)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내가 일찍이 2백 명을 뽑아서 동파에 두고 심부름을 시키고 있었다. 홍국에게 그들 중에서 모집하게 하였더니, 과연 10인이 응모하였는데, 모두 각 사(各司)의 관노(官奴)로 봉상시(奉常寺) 사람이 절반이었다. 내가 모두 앞에 불러 놓고 울며 타이르니, 모두 감격하여 힘을 다하겠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식량과 물품을 갖추어 보냈다. 떠나갈 때에 내가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이미 각 사의 사람들이니 두 능으로 가는 길에 본래부터 익숙할 것이지만, 근래에는 오래도록 강화에 있었기 때문에 동쪽 적의 진영이 있는 곳은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분방어사(分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이 양주(楊州)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해유령(蟹踰嶺)에 주둔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언백에게 가서 다시 한두 명의 길잡이를 얻는다면 거의 차질이 없을 것이다.”
하고, 즉시 언백에게 보내는 비밀 공문을 홍국에게 주었다. 그때는 4월 9일이었다.
홍국이 떠난 며칠 뒤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장군의 명령을 듣고 방어사의 진중에 가서 길을 잘 아는 한 사람을 뽑아서 독임리(禿任里)에 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작은 고기잡이 배 한 척을 구하여 12명이 같이 타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 밤중에 삼전도(三田渡)를 거쳐서 정릉 아래에 정박하였습니다. 두어 사람은 배를 지키고 8명이 능에 올라가서 보니, 능은 이미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때 달은 떨어지고 어두운 밤이었으므로 도굴한 곳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간 사람들의 베로 만든 띠를 풀어 연결하여 차례로 매달려 내려가니, 구멍 안이 어두워서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니, 누워 있는 시신이 있었으므로 모두 놀라서 손을 움츠렸다가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려서 손으로 다시 더듬어보니, 시신은 덮은 것이 없이 알몸으로 재와 흙 속에 누워 있는데, 약간 습기가 있어서 손가락에 끈적끈적 묻어 모든 사람들이 굴 밖으로 도로 나왔습니다. 구멍 곁에서 찢어진 옷과 범(梵) 자가 쓰인 두어 장의 종이와 검게 칠을 한 손바닥만한 나무 조각을 주워서 증거품으로 가져왔습니다.
또 선릉에 도착하니 능이 비록 도굴되었으나 얕아서 겨우 한 사람 들어갈 정도였는데 비어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배에 돌아와서 거슬러 올라와 삼전도에 이르니, 하늘이 밝아졌습니다. 독임리를 거쳐서 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상황은 이러합니다.”
하였다. 내가 김 원수와 순찰사 권율(權慄)과 모여서 의논하였으나 계책이 서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보고에 의거해 보면 옥체(玉體)가 광중(壙中)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하니, 정리상 애통하여 참을 수가 없다. 또 만일 적이 우리 사람들이 가서 탐지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불측한 짓을 한다면 어찌하겠는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몰래 업고 나와서 다른 곳에 안치(安置)하였다가, 적이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능을 복구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모두들,
“그렇다.”
고 하였다.
그때에 원수의 진중에 관은(官銀) 백 냥이 있었으므로 즉시 덜어 내어서 당흑포(唐黑布) 두어 자를 사서 겹이불을 만들고, 또 솜 수십 근을 구하였으며, 권 순찰사가 유둔(油芚)을 내고, 또 대목수를 구하여 남여(藍輿)를 만들되 그 체제를 간편하게 해서 가벼워 쉽게 운반할 수 있게 하였다. 내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나를 모함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군친(君親)의 천양의 화[泉壤之禍]를 구하는 일을 알 뿐이다.”
하였다. 다시 군중에 영을 내려 누구 갈 사람 없느냐고 하니, 창의사 중군(中軍) 박유인(朴惟仁), 전 부장(部長) 김극충(金克忠)과 가기를 원하는 군인이 50인이었다. 이홍국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며 경계하기를,
“이것은 큰일이므로, 나도 멀리서 추측할 수는 없다. 너희들이 거기에 가서 형세를 살펴보고 만약 묻을 만하면 묻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 봉안(奉安)하라.”
하니, 유인 등이 응낙하고 갔다. 또 독임리를 거쳐서 배를 타고 밤에 내려가서 시신을 남여 속에 싣고 도로 나와서 물을 거슬러 올라왔으나, 경성의 수십 리 밖까지는 적이 항상 출몰하고 있어서 봉안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로 가서 파괴된 민가 두어 칸을 찾아서 봉안하고, 김극충이 50인을 거느리고서 지키고, 유인은 와서 보고하였다. 나는 즉시 장계를 올려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 달 20일에 적병이 남쪽으로 내려갔으므로 내가 그날로 대군을 따라 서울에 들어갔다. 23일에 송산으로 달려가서 봉심(奉審)하였는데, 감히 열어 보지는 못하고 다만 향하여 곡만 하고 돌아와서 나는 병으로 누웠다. 5월에 들으니,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예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좌참찬 성혼(成渾), 예조 참판 이관(李灌) 등 5~6인이 행재소에서 차례로 명을 받들고 두 능을 봉심하려 한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성혼은 도중에서 사람을 보고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의 진위가 어떠냐고 많이 물어 그의 말이 의심할 만한 것이 많이 있었다 한다. 도착하고 나서 또 들으니, 여러 재상들은 먼저 정릉에 가서 봉심하였다고 한다. 최후에 여러 재상들은 비로소 송산에 가면서 나와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때에 병에서 막 일어났으나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병을 참고 가서 모였다.
그때 조신(朝臣) 중에는 중종(中宗)을 섬겼던 사람이 없었고, 오직 동지(同知) 송찬(宋贊)이 나이 84세로 중종 때에 한림(翰林)을 지냈는데, 피난하여 충청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역마(驛馬)로 불러 왔다. 6월 18일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송산에 모였다. 대신 심수경(沈守慶)ㆍ최흥원(崔興源) 및 유홍(兪泓)은 나와 1열(列)이 되고, 재신 김응남ㆍ성혼ㆍ이관ㆍ권징(權徵)과 종실(宗室) 부안 도정 수산(扶安都正壽山) 등이 1열이 되었으며, 낭청 서인원(徐仁元) 등은 밖에 있었다. 또 예양부인(豫陽夫人)이 평양에서 왔다. 예양은 바로 중종의 왕자인데, 그 부인이 궁중에 있어서 일찍이 중종의 용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환관 두어 사람도 같이 와서 딴 곳에 있었다. 조금 뒤에 재신들이 들어가 살펴보려고 하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중종을 섬긴 적이 없으니, 비록 들어가 살필지라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마땅히 먼저 평소 모습의 대강을 물어 가지고 살펴보아야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모두들 옳다고 하였다. 이에 송 동지와 중종의 용안을 뵈었던 나인[內人]에게 물어서 각각 키가 크고 작은 것과 살지고 수척한 모습을 기록하였다.
첫째로 중종의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인데 조금 크고,
둘째로 중종은 상체(上體)는 풍만하고 하체는 말랐기 때문에 어의(御衣)는 홑치마를 여러 벌 입혀서 하체가 풍성하도록 하였다. 조신들이 그것을 본받아 드디어 등나무 고리를 써서 하의가 풍성하게 하였다.
셋째로 수염은 매우 적고 자줏빛이었으며
넷째로 턱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다섯째로 중종의 뒤통수는 약간 움푹하게 들어갔다. 그런 까닭에 평소에 쓰신 갓이 밖으로 비스듬할 때가 많아서 매양 손으로 바로잡았다고 했다.
다 기록한 뒤에, 방안이 좁아서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나누어서 들어가기로 하였다. 대신이 먼저 들어가면서 송 동지를 청하여 같이 들어갔다. 이불을 들치고 시신을 보니,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이고, 머리카락은 적고, 콧대는 꺾였으며, 수염은 약간 그 흔적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자줏빛이었다. 양쪽 어깨는 밖으로 펴졌으며, 가슴은 매우 높고 정강이에는 뼈만 있고 살은 없었으며, 힘줄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가슴과 배에 칼 자국이 두 군데 있었으니, 아마 왜적이 찌른 것인 듯하다. 온몸 전체는 말라서 마른 나무와 같았다. 4월부터 꺼내다 안치하였고, 그전에 노출되어 있던 것이 또 며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벌레나 구더기가 없고 또한 냄새도 없는 것이 매우 이상하여 여러 사람들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송 동지가 또 말하기를,
“중종은 일찍이 등에 종기(瘇氣)를 앓아서 처음에는 의원 김응곤(金應崐)을 시켜서 침을 놓게 하였으나 매우 아프기 때문에 또 박세거(朴世擧)를 시켜서 침을 놓게 하였으니 아마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이것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박유인으로 하여금 시신을 돌려 놓게 하니, 등 뒤에 재와 숯가루가 들러붙어서 두께가 몇 치나 되어 살빛이 보이지 않았다. 명주 수건을 물에 적셔서 여러 번 씻으니, 차츰 가죽과 살이 보이는데 홀연히 왼쪽 어깨뼈 아래에 흔적이 두 군데 드러났다. 거리는 1~2푼[分]인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사면에 검은 무리가 있어 둥글기가 큰 엽전만하고 그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보는 자들이 크게 놀랐다. 나온 뒤에 김응남ㆍ성혼ㆍ권징 등이 다음에 들어가게 되자 송공에게 앞을 다투어 묻기를,
“어떻소?”
하니, 송공이 말하기를,
“매우 놀랄 만합니다. 신장은 보통 사람 정도이고, 상체는 풍만하고, 하체는 말랐으며, 턱은 약간 나왔고, 뒤통수는 들어갔으며, 또 종기의 흔적이 있습니다.”
하니, 성혼이 침묵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갔다가 오래지 않아 곧 나와서 도로 앉았다. 여러 재상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성혼이 정중히 일어나 홀로 대신 앞에 나아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들어가 살펴보니, 비록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라고는 하나, 나의 소견은 이러합니다. 비록 상체가 풍만하고 하체는 말랐다고 하나,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송공이 말한 바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반박해 나가는데 다른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다만 ‘그러한 것을 보지 못했다[不見如是].’는 넉 자만으로 그 말을 다 혼란하게 만들고, 마친 뒤에는 유유히 물러가 버리니, 같이 있던 사람들은 서로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다른 일은 알 수 없다고 치더라도 등 뒤의 종기 흔적은 어찌 의심스럽지 않은가?”
하니, 부안 도정이 즉시 성혼의 말에 덩달아 큰소리로 말하기를,
“등 뒤의 종기가 비록 의심할 만은 하나 여섯 군데나 흉터가 있으니 어찌 그렇게 많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미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살펴보았는데 분명 두 군데가 있었습니다. 지금 여섯 군데라고 말하니 이는 큰일이므로 말이 이렇게 서로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즉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다른 재상으로 하여금 수산과 같이 다시 들어가 살피게 하였더니, 과연 두 군데였다. 수산이 말이 궁하여,
“앞에서 말한 여섯 군데라는 것은 대강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성혼을 겁내어 다시 어떻다고 변론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파하고 성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또 남학동(南學洞)의 빈 집에 모여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내가 늦게 달려가서 보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이미 성혼에게 휩쓸려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최 영상에게 말하기를,
“제공(諸公)의 소견이 이미 그렇다면 딴 논의를 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릉의 옥체는 장차 어디로 갔다고 합디까?”
하니, 최 영상이 말하기를,
“능 앞에서 작은 재를 발견하였는데, 여럿이 그것으로 해당시켜서 적이 태운 것이라 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근일에 적이 시체를 태운 곳을 많이 보았는데, 사람의 형체는 비록 재가 되었더라도 여전히 뚜렷이 알아볼 수는 있었습니다. 지금 이 능 앞에서 발견된 재의 흔적은 길었습니까? 짧았습니까?”
하니, 최 영상이,
“길지 않았으며, 그 흔적은 둥근데 겨우 방석만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조 참판 이관이 즉시 말하기를,
“매우 길었습니다.”
하니, 최공이 멍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는 길지 않았고 또 그것이 옥체의 재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론에는 여러 사람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나도 감히 그 말에 단정짓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등 뒤의 종기 흔적은 오래된 일이므로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근처 산의 옛 무덤을 발굴한 곳이 있고 없는지를 마땅히 아울러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대충대충 결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의견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대개 사람의 시체는 가장 잘 썩는 것이어서 막 죽은 시체도 수일이 지나지 않아 모두 부패하는 것인데, 지금 이 시체는 바깥에 둔 지가 몇 개월이나 되었고, 한창 더운 여름인데도 냄새도 없고 벌레도 없으니, 깊이 장사하였거나 지극히 오래된 것이 아니면 이럴 수 없다. 그러나 왜적이 어디서 이런 시체를 가져다가 광중(壙中)에 두었겠는가. 이것은 변명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때에 이 제독(李提督)이 성중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또한 말하기를,
“이것은 변별하기 어렵지 않다. 마땅히 오래된 시체인지 근자에 죽은 시체인가를 가지고 결정할 것이니, 오래된 시체라면 필시 다른 사람의 시체는 아닐 것이다.”
하였다. 모임이 있은 하루 뒤에 나는 남쪽으로 경상도에 내려갔다. 경안역(慶安驛)에 이르러 냇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을 때에 종사관 신경진이 나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제공의 논의가 송산의 시체는 진짜가 아니라 하여 버리고자 한다는데 천하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진짜를 가짜라 하는 것이나 가짜를 진짜라 하는 것은 똑같이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이미 우리가 직접 허실을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에 내가 남쪽에 있으면서 들으니,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에 모두 능 옆에 있던 잡회(雜灰) 조금씩을 관에 넣어서 비어 있는 채로 장사지내고, 송산의 시체는 진짜가 아니라 하여 버렸다. 그러나 임금의 뜻은 여전히 의심하여 후하게 장사지내되 도감이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강우(姜䨞)가 당상에게 말하기를,
“후하게 장사지내면 더욱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대충 다른 곳에 묻고 말았다 한다. 박유인(朴惟仁)이 말하기를,
“서소문 밖에 늙은 사약(司鑰) 한 사람이 있어 나이 80여 세이다. 일찍이 중종을 섬겼는데 그 일을 듣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기를, “이것은 실로 중종의 옥체인데 어째서 버렸단 말이오?”하고, 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란 썩기 쉬운 봄, 여름에 죽은 자는 비록 깊이 매장하여도 썩지 않는 것이 없고, 겨울에 죽은 자는 비록 세월이 오래되어도 썩지 않고, 나뭇조각처럼 마릅니다. 소인이 일찍이 조부의 무덤을 옮겼는데, 겨울에 죽었기 때문에 60년 뒤에도 전혀 썩지 않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능의 시신도 그렇다 하니, 중종이 승하하신 때가 11월 15일이었으므로 매우 추울 때입니다. 이것도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는데 어째서 버린단 말입니까?”하였다.”
한다.
능의 역사를 마치고 성혼이 장차 해주(海州)의 행재소에 복명(復命)하려고 가다가, 재령(載寧)에 이르러서 아프다는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에 승지 구성(具宬)도 능소(陵所)에서 행재소로 향하는 길에 성혼을 찾아보니, 성혼이 비밀히 말하기를,
“이홍국(李弘國)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빌려 가지고 옥체라 하면서 공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임금께 아뢰어 국문해야 할 것이다.”
하니, 구성이 그 말대로 하였다. 이에 옥사가 크게 일어나 삼성(三省)이 함께 국문하였다. 이홍국과 먼저 능소에 갔던 자 10인을 체포해다 국문하였다. 그 사람들이 옥사에 먼저 오기도 하고 뒤에 오기도 하였는데, 진술한 것이 한결같아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이 무고(誣告)임을 살피고 석방하도록 하였다.
이는 성혼이 처음부터 이 일로 인하여 나를 모함하고자 하여 이렇게 날조한 것이니, 그 역시 잔인한 사람이다. 바야흐로 능을 개축하는 데 묘소의 양쪽 언덕이 까닭 없이 갑자기 무너져서 일꾼 세 명이 압사되었다.
이해 9월에 거가(車駕)가 도성에 돌아오려고 막 출발하는데, 크게 천둥치고 비가 쏟아지고, 왕자가 머물던 집의 사람과 가축이 벼락을 맞았다. 병신년(1596, 선조 29) 3월 그믐에 여러 능의 삭제(朔祭)의 헌관(獻官)들이 궐내에서 향촉을 받는데, 갑자기 천둥치고, 문 밖에 있던 향촉을 실은 말 3필과 역졸이 벼락을 맞았다. 며칠 뒤에 부제학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정릉의 일은 그때의 처리가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변이 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큰일이다.”
하고,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좌상 김응남(金應南)이 성내어 말하기를,
“이 말은 나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그것은 응남이 봉심할 때에 예조 판서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며, 또 증명할 길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의견을 아뢰되 다만,
“성상의 하교를 받자오니, 신은 차마 들을 수도 없습니다. 큰일이 이미 정해졌으니, 아마 다시 처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여, 일이 드디어 그만두게 되었다.
대체로 처음에 변별하지 못한 것은 이설(異說)이 사람을 혼란시킨 것인데, 지금 수년 뒤에 형체가 더욱 사그라져 남은 것이 없을 것이니, 비록 추후에 변별하고자 해도 될 수 없고, 한갓 끝없는 아픔만 더할 뿐 다시 선처할 길이 없으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천고에 한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여도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그 뒤 무술년(1598) 가을에 내가 당시 사람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 이산해(李山海 1539-1609)와 모의하기를,
“만약 정릉의 일을 들추어 죄목을 삼는다면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산해가 말하기를,
“이것은 김중숙(金重叔)에게도 관계될까 두려우니, 부디 꺼내지 말라.”
하였다 한다. 중숙은 응남의 자(字)로, 응남은 산해의 매부이니, 옥사가 일어나면 그에게까지 파급될까 두려워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가소로운 일이다.
갑진년 봄에 예안(禮安) 사람 생원 아무개가 정릉 참봉(靖陵參奉)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정릉의 시말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그의 친구에게 말하기를,
“능에서 밤중이면 매양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자 늙은 수호군(守護軍)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에 옥체를 버리고 장사지내지 않고 잡회(雜灰)를 넣어서 빈 채로 장사지냈기 때문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밤마다 곡성(哭聲)이 이렇게 나는 것이오. 오늘 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하므로,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골수에 사무쳤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적어서 신하의 지극한 원통함을 표시한다.
잡기(雜記)
좌의정 정철(鄭澈)을 강계(江界)로 귀양보내어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그의 죄를 써서 조정에 걸어 놓았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다. 어릴 때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수업하였다. 현달하고 나서도 여전히 제자로서의 예를 지켰다. 그러나 대승은 일찍이 말하기를,
“계함이 득세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사람됨이 강하고 편협하며, 남의 허물을 말하기 좋아하고 은혜와 원수를 분명히 하여 자기 마음에 언짢은 사람이 있으면 끝내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패하였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미워하여 당파로 나뉘었는데 이이(李珥)가 의론을 주장하기를 자못 공평히 하였다. 정철은 깊이 효원을 배척하려고 하여 의론이 맞지 않자, 정철이 시를 짓기를,
그대 뜻은 산 같아 굳게 움직이지 않고 /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은 물 같아 가서 돌아오기 어렵네 / 我心如水去難回
물 같고 산 같음이 모두 운명이라 / 如水似山俱是命
서쪽 바람에 머리를 돌리며 홀로 배회하네 / 西風回首獨徘徊
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호남으로 돌아가서 경박하고 언론(言論)을 좋아하는 놀고 먹는 선비들을 많이 모아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시사(時事)를 조롱하였는데, 그것이 원근에 전파되어 더욱 화단(禍端)이 되었다.
계미 연간에 이이가 조정에 있고 정철이 대사헌이 되어 논의를 주고 받으매 동서(東西)의 설이 성행하여 그칠 수 없었다. 허봉(許篈)ㆍ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 등은 모두 이이를 공격한 죄로 귀양갔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정철의 힘이 있었다. 김우옹(金宇顒)이 소를 올려 정철을 공격하였는데, 말이 매우 격렬하였다. 이이가 죽자 성혼은 산으로 돌아가고, 정철은 세력을 잃어 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음성(陰城)ㆍ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고양(高陽) 사이를 일정한 처소도 없이 출몰하면서 불만이 더욱 심하여 주색에 빠져 지낼 뿐이더니, 기축년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이 지방에서 와서 승정원에 나아가 소를 올리니 듣는 자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산해는 젊을 때에는 정철과 교분이 좋았는데 뒤에 정철이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자, 산해는 정철을 배반하고 이발(李潑) 등과 함께 정철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발 등이 패하고 정철이 다시 들어오니, 산해가 매우 두려워하여 다시 그와 결탁하여 화를 면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정언신(鄭彦信)이 정승에서 파면되었는데 산해가 정철을 추천하여 언신 대신으로 정승이 되게 하고, 정철과 함께 옥사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철을 섬기기를 매우 삼가 그의 아들 경전(慶全)을 보내어 밤낮으로 정철의 집에 있게 하니 노예와 같았다. 또 말하기를,
“전날 그대를 공격한 것은 모두 김응남과 유모(柳某 유성룡) 등의 소행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오.”
라고 하여 화를 타인에게 전가시켜 자신은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철은 산해와 묵은 원한이 이미 깊었으며, 또 산해가 배신함이 심한 것을 알기 때문에 끝내 감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에 정철의 당파가 대각(臺閣)에 가득차 있어서 날마다 남을 얽어 넣는 것을 일삼아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모든 사람을 역도(逆徒)로 몰아넣으니, 상도 자못 싫어하였다.
산해가 궁인(宮人)들과 결탁하여 성상의 뜻을 탐지하고, 또 홍여순(洪汝諄) 등과 함께 정철을 넘어뜨릴 것을 비밀히 꾀하였다. 먼저 이경전을 시켜서 놀고 먹는 선비 홍봉선(洪奉先)ㆍ이성경(李晟慶) 등 6인과 결탁하여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게 하니, 상이 즉시 인견하고 물었다. 봉선이 정철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정치를 문란시킨다고 말하니, 상이 그의 충성을 칭찬하였다.
산해가 즉시 대간으로 하여금 정철을 논핵하게 하니, 처음에는 대간이 그 일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심하고 두려워서 1~2일을 머뭇거렸다. 산해가 잇달아 사람을 시켜 속히 발론하기를 재촉하고, 또 말하기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조금 늦은 것이 한스럽다.”
하였으니, 이는 상의 성냄이 한창 대단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철을 탄핵하는 계본(啓本)이 들어가자 즉시 윤허하였다.
그때 여순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해수(李海壽) 등 6~7인도 아울러 논핵하여 북도(北道)에 나누어 귀양 보냈으니, 이들은 모두 정철의 당파였다. 이성중(李誠中)과 우성전(禹性傳)은 정철의 당파가 아니었으나, 산해가 미워하였으므로 여순 등을 시켜서 같이 논핵하여 파면시켰다. 상이 정철의 죄를 써서 조정에 게시하고 또 위리 안치시키라고 명하였는데도 산해는 여전히 정철과 서로 문안을 끊지 않았으며, 또 약(藥)도 부쳐 보냈다 한다.
정철을 삼도 관찰사(三道觀察使)로 삼았으니 정철이 신묘년에 강계로 귀양갔다가 이때에 와서 석방된 것이다. 도중에서 불리어 행재소로 달려가서 평양에서 임금을 뵙고, 의주(義州)까지 호종하였다. 하루는 빈청에 여러 재상들이 모여 앉았다. 귀빈(貴嬪) 김씨(金氏)가 안에서 퇴선(退膳 임금이나 왕후의 남은 음식을 물려 주는 것)을 내보내 별감이 상을 받들고 와서 대신들 앞에 놓았다. 정철이 제일 위에 앉아서 어디에서 가져 왔느냐고 물었다. 별감이 대답하기를,
“김숙의(金淑儀)에게서 왔습니다.”
하니, 정철은 성난 소리로,
“내가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겠느냐? 구 지사(具知事)에게나 갖다 드려라.”
하였다.
이는 왕자 정원군(定遠君)은 김씨의 소생이며, 지사 구사맹(具思孟)의 딸이 정원군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사맹이 좌석에 있다가 상이 오자 부끄러워서 얼굴을 숙이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고사(故事)에, 조정에서 퇴선을 내리는 것은 오직 임금과 중전만이 하는 것이고 후궁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김씨는 임금의 총애가 후궁 중에 으뜸이고 한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또 신립(申砬)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구사맹은 또 신립의 매부였으므로 한 집안의 세력이 대단하였다.
신묘년에 신립의 어머니가 금천(衿川) 별장에 가는데 두 왕자와 구사맹 등이 강가에 모여 영접하는데 높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로에 가득차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김씨의 동생 공량(公亮)은 조신(朝臣)들과 사귀어 안팎의 말을 전달하니,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영의정 이산해가 가장 그에게 아부하여 밤중에 나귀를 타고 왕래하는데 사람들이 마주친 자가 많았다. 공량은 천한 사람이었는데,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아첨해 붙으니, 듣는 자가 더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때 아직 동궁(東宮)을 세우지 않았는데 신성군이 상에게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 산해는 또 신립과 결탁하여 매양 계집종을 시켜 왕래하여 문안하고 선물을 보냈는데, 편지를 고리버들로 만든 그릇에 담은 떡 속에 넣어 남이 알지 못하게 하여, 종적이 매우 비밀스러워 그 말한 바가 무엇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얼마 안 가서 신성군이 요절하였다. 산해는 또 임금의 생각이 자못 광해(光海)에게 있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는 다시 유자신(柳自新)과 결탁하였으니, 자신의 딸이 바로 광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은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었다. 산해가 그의 아들 경신(慶伸)을 위하여 자신에게 혼사를 청하려고 정부의(政府醫) 고기(高麒)를 시켜 가서 청해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고기가 여러 번 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사위 조국필(趙國弼)이 도성에 있었는데, 산해가 매양 친히 국필을 찾아가서 은근한 호의를 표하였으니, 그가 세력에 빌붙어 부끄러움 없음이 이와 같았다. 산해는 또 그의 딸을 안황(安滉)의 아들 응형(應亨)에게 시집보냈으니, 안황은 성상의 매부이다. 이때에 임금이 파천하는 화를 만났으므로 중론이 들끓어 산해에게 죄를 돌렸다. 그런데도 김씨는 여전히 자숙(自肅)하지 않고 의주에 있으면서 산해에게 선물을 줌이 끊이지 않으므로 또한 남들의 말이 많았다. 정철은 성격이 강하고 편협해서 산해가 후궁에게 아부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 일에 격분함이 이러하였다 한다.
수일 뒤에 정철에게 삼도 체찰사(三道體察使)를 임명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정철이 술을 좋아하여 종사관과 함께 항상 취하여 일을 보지 않으니, 여론이 또한 비난하였다.
갑술ㆍ을해년(1574~1575) 사이에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론(黨論)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숙헌(叔獻)은 비록 서인을 위주로 하였으나 의론이 자못 공평하였고, 또 양쪽을 조정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계함은 성격이 강하고 편협하여 전적으로 서인을 위주로 하여 동인을 공격하므로 숙헌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호남으로 돌아가면서 시를 지었다.
그대의 뜻은 산 같아 굳게 움직이지 않고 /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은 물 같아 가서 돌아오기 어렵네 / 我心如水去難回
물 같고 산 같음이 모두 운명이라 / 如水似山俱是命
서쪽 바람에 머리를 돌리며 홀로 배회하네 / 西風回首獨徘徊
성낙(成洛) 사중(士重)은 동인인데도 계함과 사이좋게 지냈는데, 그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구름은 용을, 바람은 범을 따르는 것이 물의 성질인데 / 雲龍風虎物之性
어쩌다 그대 마음 홀로 돌아오지 않는가 / 胡乃君心獨不回
스스로 울타리를 헐어 치우니 정말 운명이로구나 / 自撤藩籬眞是命
천지에 배회할 곳 없으리 / 乾坤無處可徘徊
이로부터 당론이 날로 치열해져서 걷잡을 수 없었다. 뒤에 계함이 승지가 되었다. 그때 그의 무리로 대간(臺諫)이 된 자가 있었는데, 정철이 승정원에서 시를 지어 보냈으니, 이러하다.
늦가을 바람 기운 부드럽기 봄 같으니 / 季秋風力軟如春
추위를 타는 자는 좋다 하고 열이 많은 자는 찡그리네 / 寒者宜之熱者嚬
모름지기 오경 서리 뒤의 송골매가 / 須待五更霜後鶻
한 소리로 높이 치솟아 푸른 하늘에 오르기 기다려라 / 一聲高起上蒼旻
이것은 탄핵하기를 권한 시로 듣는 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가정(嘉靖) 정묘년(1567, 명종 22) 6월에 퇴계(1501-1570)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도성에 들어왔는데, 사은도 하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다.
8월에 선생이 예조 판서의 임명을 사퇴하여 체임되자, 즉시 광나루에 나가서 배를 타고 경상도로 돌아가니, 당시 사대부들은 모두 섭섭하여 무엇을 잃은 것 같았다. 이조 정랑 정철이 광나루까지 뒤쫓아 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시를 짓기를,
뒤쫓아 광나루에 이르니 / 追到廣津上
신선의 배는 이미 아득하네 / 仙舟已杳冥
가을 바람에 많은 생각으로 / 秋風滿腔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하였는데, 자못 사람들의 암송하는 시가 되었다.
기축년의 역옥(逆獄)에 대해 기록함
기축년(1589, 선조 22) 10월에 황해 감사 한준(韓準)이 비밀 장계를 올리기를,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과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의 고변(告變)에 의거하건대, 안악과 재령 사람 변사(邊泗) 등이 전주(全州)에 사는 전 수찬 정여립(鄭汝立 1546-1589, 44세)과 결탁하여 반역을 모반했다 합니다.”
하였다.
밤중에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대신 및 의금부 당상을 불러 장계를 보이고, 즉시 선전관과 금부 도사를 남대문으로 내보내어 체포하게 하니, 바깥사람들은 모두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조금씩 전해 듣고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으며, 상의 생각도 믿지 않았으나, 여립이 오면 절로 판명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일 뒤에 도사가 장계하기를,
“여립이 이미 도망하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옥사가 갑자기 일어났다.
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1570년,25세)하였다. 성질이 거칠고 비루하였다. 일찍부터 도학(道學)을 담론하여 이이(李珥)ㆍ이발(李潑 1544-1589, 동인의 대표격)ㆍ정철(鄭澈) 등과 어울려 매우 친밀하였다. 선비들 사이에 이름이 났으므로 모두들 그를 요직에 추천하려 하였으나, 이조 좌랑 이경중(李敬中 1542-1584)이 평소부터 여립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중요한 지위에 추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여립을 편드는 사람들은 경중이 어진 이를 시기한다고 하였다.
정인홍(鄭仁弘 1535-1623 동인편으로 북인의 영수)이 장령으로 이이 등과 함께 경중이 훌륭한 인재의 앞길을 막는다고 탄핵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여립을 비로소 정언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시골에 많이 있으면서 벼슬하지 않으니, 더욱 사람들에게서 추앙을 받았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이조 판서 이이가 입대하여 여립이 쓸 만한 인물이라고 적극 추천하였다. 이에 여립이 수찬이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사직하고 떠났다. 이이가 이발 등과 점점 사이가 틀어지고 이이가 죽자, 여립은 다시 이발에게 붙어서 이이를 매우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사류로서 이이를 비난하는 자들은 모두 그와 사귀게 되었다. 백유양(白惟讓)이 여립과 함께 옥당에서 입직하다가 그의 언론을 듣고 매우 좋아하여 자기의 딸을 여립의 형의 아들에게 아내로 주었다.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도사에게 비밀리에 교서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된 편지들을 압수하여 궐내로 가져오게 하였다. 그래서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며 편지를 주고 받은 자들은 다 연루됨을 면치 못하게 되어 사류 중에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그 중에 고문을 받다가 죽은 자는 전 대사간 이발, 이발의 아우 전 응교 이길(李洁), 이발의 형 전 별좌(別座) 이급(李汲), 병조 참지 백유양, 유양의 아들 생원 백진민(白振民), 전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 전 남원 부사(南原府使) 유몽정(柳夢井), 전 찰방 이황종(李黃鍾), 전 감역(監役) 최여경(崔餘慶), 선비 윤기신(尹起莘), 여립의 생질 이진길(李震吉), 기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이발과 백유양의 집안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입었다. 그리고 연루되어 귀양간 자는 우의정 정언신, 안동 부사 김우옹, 직제학 홍종록(洪宗祿), 지평 신식(申湜)ㆍ정숙남(鄭叔男), 선비 정개청(鄭介淸)이고, 옥에 갇혀 병이 나서 죽은 자는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었다. 옥사가 계속해서 얽히고 뻗어가서 3년이 지나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천 명(1천여명)이었다.
군현(郡縣)에서 추격하여 체포하니, 여립이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변사와 함께 중도에서 자결하여 두 사람의 시체가 한 곳에 있었다. 시체를 실어오게 하여 저자에서 사지(四肢)를 찢게 하였다. 백관들이 입회하여 보는 가운데에 형을 집행하여 머리를 베어 철물교(鐵物橋)에 효시(梟示)하였으며, 그의 처자식들을 죽이고, 그의 아비와 할아비의 무덤을 파버렸으며, 그의 집은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못을 팠으며, 그가 살던 금구군(金溝郡)을 혁파하여 전주에 소속시켰다.(※사실이 아님)
10여 년 동안 재변(災變)과 사람과 소의 전염병이 5~6년간이나 연달았으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가로질러 뻗친 것이 무수하였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은 것이 한 해에 혹 6~7번씩이나 있었다. 도성 가운데에 검은 기운이 공중에 가득하고, 북악산과 인왕산(仁旺山) 사현(沙峴) 사이에는 연기도 안개도 아닌 이상한 기운이 위로 반공 중에 닿고 아래로는 땅에 서리어 그 빛이 새까매서 물체를 분변할 수 없더니, 오래지 않아서 큰 옥사가 일어났으며, 옥사가 겨우 끝나자, 또 임진년의 난이 있어서 도성이 전복되었다. 아, 어찌 천운(天運)이 아니겠는가.
※정여립의 인물됨을 일찍이 간파한 사람은 이경중이다. 현명한 이이도 자신을 따르는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천거한 것은 이이의 큰 실수라고 할 수 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곧 바로 이발을 추종하며 이이를 배반하고 공격한 정여립은 결코 인정될 수 없다. 그를 혁명가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출세가 늦고 이이가 죽자 그를 배반하고 동인편에 붙자 선조가 이를 나쁘게 보아 등용하지 않으니 전주로 낙향하여 비로소 혁명을 꿈꾸며 세상을 뒤집을 생각을 한 것으로 확신한다. 본디부터 혁명사상을 가진 큰 인물이 결코 아니라고 본다. 1589년 정여립이 모반하여 패사하자, 이 글의 저자인 유성룡은 지방에 좌천되었다가 병사한 이경중을 그의 예견이 사실화되었음을 상소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잡기(雜記)
병술년(1586, 선조 19) 봄에 나는 예조 판서로,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은 참판으로 있었다. 하루는 상이 왕자 의안군(義安君)으로 복성군(福城君)의 후사를 잇게 하라고 명하였다. 내가 회계하기를,
“예(禮)에 후사를 이을 사람은 마땅히 아들의 항렬(行列)에서 데려와야 하고, 손자 항렬에서 데려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성군은 중종의 왕자이니, 의안군에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됩니다. 제후(諸侯)의 별자(別子)는 따로 한 종(宗)이 되니 후일 사당을 세우게 되면 조묘(祖廟)는 있고 예묘(禰廟 아버지를 제사하는 사당)는 없어서 예에 어긋나니, 시행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복성군의 후사를 잇는 것은 종실 중에서 아들 항렬에 해당하는 자를 골라야 할 것이며, 왕자로서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내가 처음에 계본(啓本)을 기초(起草)할 때에는 집에서 단독으로 하였는데, 황정욱이 편지를 나에게 보내서 말하기를, “의안군으로 복성군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예(禮)에 무방하다.’ 하기에, 내가 예문(禮文)을 인용하여 회답하였다.
이튿날 주강(晝講) 때에 황정욱이 특진관(特進官)으로 나아가서 곧 아뢰기를,
“의안군이 복성군의 후사가 되는 것은 예에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놀라서 이르기를,
“예조의 공문서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경은 듣지 못하였소?”
하였다. 이에 황정욱이 대답하기를,
“그 공문서는 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은 말이 없었다. 황정욱이 물러간 뒤에 그 일이 드디어 그대로 이루어져서 고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일에 따라 상의 뜻에 아첨하여 영합(迎合)함이 이와 같았다.
또 부마(駙馬)를 간택(揀擇)하는 의론이 있을 때에 상이 이씨(李氏) 가운데에서도 선택하도록 명하되, 성자(姓字)는 비록 같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무방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뜻 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뢰기를,
“예에 동성간에 혼인하지 않는 것은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유총(劉聰)이 유은(劉殷)의 딸로 빈(嬪)을 삼았는데 그들의 본적이 아주 달랐으나 《강목(綱目)》에 이 일을 기록하기를, “개와 양처럼 문란하다.”하였습니다. 또 당 나라와 송 나라 이래로 공주(公主)에게 장가간 자를 고증해 보니, 모두 다른 성(姓)이었고, 이씨(李氏)나 조씨(趙氏)는 없었습니다. 소종(昭宗)만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 계엄(繼儼)으로 부마를 삼았으나, 이는 난리 때에 강력한 신하에게 위협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니, 본보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그 해 3월에 나는 해임되어 고향에 내려가서 여러 번 소명(召命)을 사양한 것이 3년이었다.
세자를 세운 일을 기록함
금상이 즉위한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세자가 없으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세자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 것을 근심하였다. 간혹 세자 세울 것을 아뢰는 이가 있으면 곧 견책(譴責)을 받게 되므로, 김성일(金誠一)이 한 번 떠나간 뒤로는 다시 말하는 이가 없더니, 이때에 와서는 적의 형세가 날로 급박해져서 임금이 바야흐로 파천(播遷)하려 하였다. 동지(同知) 이덕형(李德馨)이 나에게 말하기를,
“어찌 세자를 세워서 백성들이 기대를 걸게 할 것을 청하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여러 대신들과 청대(請對)하였더니, 임금이 묻기를,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하였다. 내가 세자를 세워서 인심이 붙일 데가 있게 하기를 계청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전부터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따르지 않은 것은 다만 중궁이 만약 원자(元子)를 낳는다면 처리가 지극히 어려우므로 끌어온 것이오. 경들은 한 번 말해 보시오. 만약 세자를 세운 뒤에 원자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소?”
하고, 신하들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군신 사이는 부자간과 같은 것인데 어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소? 모름지기 경들의 평소의 생각과 조정에서 논의된 것을 속히 말하시오.”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것이 어떤 일인데, 신하들이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원자가 아직 탄생하지 않으시니, 신민들의 심정이 절망스러움을 면치 못하므로 속히 세자의 위호(位號)를 정하여 민심이 의지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소. 사람이 비록 늙어도 오히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서둘러 절망이라고 말하시오? 만일 원자가 태어난다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소? 다시 말해 보시오.”
하므로, 대답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별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만 절망스럽기 때문에 이러할 뿐입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은 춘추가 겨우 30여 세였을 때에 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사람들이 급히 태자 세울 것을 청하였으니, 그것은 어찌 본 바가 없어서 그러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윽고 이르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누구로 세자를 삼아야 하겠는가?”
하기에, 우리들이 황공하여 대답하기를,
“이 일을 신하들이 어찌 감히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번 재촉하였으나, 여러 대신들은 모두 엎드린 채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도 좋아하니, 후사로 삼을 만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것이 어떤가?”
하였다. 우리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연거푸 종묘사직과 신민의 복이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고, 또 나랏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었으니, 가령 적이 물러간다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조종(祖宗)을 뵈오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하니, 어떻겠소?”
하기에, 우리들이 똑같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어찌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세자도 다만 전하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게 하면 가할 것인데, 어찌 갑자기 이 일을 의론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큰 복을 누리시어 어려운 일을 구제하옵소서.”
하고, 울며 물러나왔다.
잡기(雜記)
상(선조대왕)께서는 세상에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을 알고 우뚝이 뛰어나고 특출한 인재를 얻어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므로 용모가 웅장하고 객기(客氣)가 있고, 담론(談論)을 잘하는 자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등용된 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정언신(鄭彦信 1527-1591)ㆍ유영립(柳永立)ㆍ장운익(張雲翼) 같은 자들이 모두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르는 곳에 마침내 성과도 없었다.
오직 정언신만은 자못 충실하여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지만, 견식이 없고 경솔한 점이 많음이 흠이었다. 병조 판서를 거쳐서 우상이 되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에 어떤 사람이 상소하기를,
“언신이 여립과 교분이 두터워 서로 왕래하였습니다.”
하니, 언신이 소를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였다. 그때에 상이 여립의 집에서 압수해 온 편지들을 궐내에 가져오게 했는데, 언신의 편지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상은 언신이 임금을 속였다 하여 정승직을 파면시키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대신이 구하였다. 궁궐에서 국문하도록 하니, 고문을 받아서 피와 살점이 낭자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북도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영립은 함경 감사가 되었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머리가 깎인 채 도망쳐 나왔다. 그 밖의 사람들은 더욱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
염철(鹽鐵)에 관한 일을 적음
홍진(洪進)을 염철사(鹽鐵使)로 삼았다가 조금 뒤에 파면하였다. 그때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어 국고(國庫)에는 한 달 먹을 식량도 없었다. 중국 군사들이 나라 안에 가득하여 황해도ㆍ충청도의 쌀을 배로 운반해오면 도착하기가 무섭게 없어져서 마치 타고 있는 가마솥에 물을 붓는 것 같았다. 백관들의 급료도 주지 못할 때가 가끔 있을 정도로 사세가 더욱 급박해지는데 어떻게 할 계책이 없었다.
내가 소금과 쇠를 전매하던 옛날의 법을 시행하여 국가의 선박을 이용하여 한강(漢江)ㆍ임진강(臨津江) 등으로 다니면서 강가에서 판매하면 여러 산촌의 백성들은 소금을 얻어 기근을 구제할 수 있고 나라에서는 반드시 곡식을 많이 얻을 수 있어서 국가와 백성들이 모두 편리할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홍진으로 염철사(鹽鐵使)를 겸임시켰던 것인데, 홍진은 본래부터 용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서 염전(鹽田)을 하는 집들을 검사하여 긁어 모으니, 말하는 이들이 그 소란스러움을 말하므로, 도로 파하였다.
이 정승(이준경)이 조남명(조식)을 대우한 일을 적음
정승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국량이 엄정하여 남에게 기뻐하는 말씨나 안색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젊어서 징사(徵士) 조식(曺植 1501-1572)과 벗이 되었다. 그 뒤에 이공은 조정에서 현달하였으나 조식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智異山)에 살고 있었는데, 매우 높은 명망이 있어서 온 세상이 흠모하였다.
그가 일찍이(1566년) 상서 판관(尙瑞判官 종5품))으로 불리어 서울에 오자, 사대부들이 그의 집에 가득찼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이공은 가 보지 않았다. 하루는 조식이 직접 이공의 집에 가서 문에 상당히 오래 서 있는데, 이공이 안에서 큰 신을 끌며 천천히 나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대충 일상 생활을 말한 뒤에는 다른 말이 없었다. 조식이 말하기를,
“근간에 사직하고 돌아가려 하네.”
하니, 이공이 웃으며 큰소리로 말하기를,
“상서 판관이 좋은데, 어째서 봉직(奉職)하지 않으려는가? 그렇다면 지평이나 장령이 되고 싶은가?”
하니, 조식이 매우 불쾌하여 갔다.
이로부터 이공이 선비들에게서 비방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공은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식은 도량이 좁다. 그의 그릇을 논한다면 참봉(參奉)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를 가볍게 여긴 말이다.
※이준경(1499-1572) : 대사성. 참판, 관찰사, 판서, 한성판윤, 대사헌, 삼정승및 원상
이 황(1500-1570) : 1549 이후 학문전념, 1555 소수서원, 1568 대제학, 영남학파 형성
조 식(1501-1572) : 산림처사, 남명학파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