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표주록(이지항)

청담(靑潭) 2018. 9. 26. 22:54



표주록(漂舟錄)

이지항(李志恒 18세기)


부산에서 영해(寧海)로 가던 중 파선되어 일본의 북해도(北海道)까지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기록이다. 1756년(영조 32) 4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5일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약 1년여의 기록이다.

표류되었던 동안의 기록이 많고 나머지는 어디에 머물렀다는 정도의 메모에 불과하다. 날짜도 정확한 날을 적지 않고, ‘다음날 6일 뒤’ 등으로 적고 빠진 날도 많다. 저자는 무관이었으나 일본에서 지은 몇 편의 시와 일기로 볼 때 학문도 상당 수준이었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일행을 안정시키고, 물이 떨어지자 증류수를 만들어 마셨으며, 갑자기 물개가 나타나 요동하자 괘(卦)를 풀어 위안하는 등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이들 일행은 부산을 출항한 지 16일째 되는 날 일본의 북해도 서해안에 표착하여 아이누족에게서 음식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다가 마쓰다(松田)에 도착, 에도(江戶)와 오사카(大阪)를 거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가 이듬해 부산에 귀항하였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이들이 마쓰다에 있을 때 그곳 태수 등과 불교·신(神)·유교에 관한 이야기와 예수교 포교에 관하여 필담한 것이 매우 많다.

맨 끝에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가운데 에조(蝦夷)지방에 언급된 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하였고, 정유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왜상선을 타고 안남국(安南國)을 세번이나 내왕한 조완벽(趙完璧)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표주록 서문

이 선달(李先達)은 이름은 지항(志恒), 자(字)는 무경(茂卿)이다. 선조는 영천(永川) 출신의 학자로 동래부(東萊府)에 살아왔다. 을묘년(1735, 영조 11) 별시(別試)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정사년 여름에 수문장(守門將)으로 천거를 받았었다. 병으로 취재(取才)에 응하지 못했고, 수어청(守禦廳)의 군관(軍官)에 속해 있다가, 이어 본청의 정식 장관(將官)으로 임명되어, 자급(資級) 6품(品)에 이르렀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상기(喪期)를 마쳤다. 그 뒤 병자년(1756, 영조 32) 봄에, 영해(寧海)에 왕래할 일이 있었던 차에, 부산포(釜山浦) 사람 공철(孔哲)ㆍ김백선(金白善)이, ‘읍에 사는 사람 김여방(金汝芳)과 어물(魚物) 흥판(興販 물건을 한 번에 많이 흥정하여 매매하는 일)을 같이 하는데,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沿海)의 각 고을을 다니려면 그곳을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서 말의 쌀과 돈 두 냥(兩)을 가지고 뱃머리에 이르러 노복과 말을 돌려보냈다.



▣표주록(漂舟錄)

●병자년(1756, 영조 32) 4월 13일

순풍을 타고 발선(發船)했다. 사공 김자복(金自福), 격군(格軍) 김귀동(金貴同)ㆍ김북실(金北實)ㆍ김한남(金漢男)은 다 울산(蔚山)의 서낭당[城隍堂] 마을에 사는 해부(海夫)들이었다. 여덟 사람은 한 배에 타고서 좌해(左海 동해)로 돌아 항해했다. 풍세(風勢)가 순하지 않기에 포(浦)마다 들러 정박했다.

●28일

바람이 조금 순하게 불기에 행선(行船)하였다. 신시(申時)쯤에 횡풍(橫風 가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나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하고, 배의 미목(尾木)이 부러지고 부서져, 거의 빠지게 되었다. 노를 대신 질러 비록 물속에 빠져 죽는 것은 면했지만 횡풍으로 대해(大海)에 떠밀려 밤새도록 표류(漂流)했다.

●다음날(4월 29일인 듯)

아침에 보니, 끝이 없는 큰 바다 가운데에, 다만 사방이 구름에 덮여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막막할 뿐,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배에 걸쳐진 나무에 허리를 매고, 비옷을 덮어 몸을 가렸다. 기력이 이미 다하고 정신이 혼미하여져, 저도 모르게 쓰러져서 잠들어 마치 이미 죽은 사람들과도 같았다.

●다음날

새벽, 날이 채 새기 전에, 떠들썩하게 우는 소리가 덮개 안으로 희미하게 들려 왔다. 억지로 일어나 허리에 묶은 것을 풀고 서서 보니 사방은 안개로 가리워져 있고, 바닷물이 치솟았다. 동방(東方)은 이미 밝아지고 있는데 배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지 해가 돋는 곳을 보고 동방을 알았으니, 배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축인방(丑寅方)인 것 같았다. 그래서 노를 잡은 사람에게 삼가서 방심하지 말라고 일렀다. 우리는 정박했던 그곳을 마지막으로 하여 죽이나 밥을 지어 먹은 일이 없이 다만 생쌀을 씹고, 약간의 물로 목마름을 풀어 왔다.

●7일째(5월 6일인 듯하나 미상)

물이 다 떨어졌다. 작은 꾀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여 바닷물을 솥에 담아 솥뚜껑을 거꾸로 닫고 소주(燒酒) 내리듯이 하여 솥뚜껑에 겨우 반 사발 가량의 증류수(蒸溜水)를 받았는데, 그 맛이 과연 담담하였다. 그것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먹여 약간 기갈(飢渴)을 풀게 했다. 그 후로 번갈아 가면서 불을 지펴 증류수를 받아 먹었다.

●8일째(5월 7일인 듯하나 미상)

유시(酉時)쯤에, 마침 한 마리의 물개[海狗]가 배의 수 리(里) 밖에 나타나더니, 뱃깃에다 발을 걸치기도 하고, 혹은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김북실이 칼을 가지고 찔러 죽이려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말리고는,

“물개가 배를 따르는 것으로 점괘를 만드니, 천지비괘(天地否卦 64괘의 하나)를 얻었다. 괘는 비록 불길하나 세효(世爻)가 재효(才爻)를 띠[帶]었고 일진(日辰)은 복덕(福德 6효에 있어서 자손효를 말함)에 닿으니, 우리는 반드시 죽음을 면할 것이다.”

라고 달래니, 모두 곧이어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그치지를 않았다.

●9일째(5월 8일인 듯하나 미상)

초경(初更)쯤에 서북풍(西北風)이 크게 불어 우리는 큰 바다 복판에서 이리저리 표류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 어느 날에나 정박할 수가 있는가를 점쳐 보았더니, 풍뢰익괘(風雷益卦 64괘의 하나)를 얻었는데, 복덕이 괘신(卦身)에 닿고, 세효가 재효를 띠었다. 복서(卜書)에 ‘자효(子爻 즉 복덕효를 말함)가 왕성하고 재효가 분명하면, 모름지기 길(吉)하고 이익이 있으리라.’ 하였다고 달래니, 사람들이 다 답답한 근심을 조금 풀었다. 바람은 3경쯤에 이르러 그쳤다가, 동방이 밝아지며, 곧 이어 서풍이 불어왔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일본(日本) 지도를 본 일이 있었는데, 동쪽은 다 육지였다. 또 통신사(通信使)를 배행(陪行)하여 왕래했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 중간에 대판성(大坂城)이 있어, 황제(皇帝)라는 자가 있고, 동북방 강호(江戶)라는 곳에는 관백(關白)이 있다. 대판성에서 육지로만 이어져 강호까지 가는 데는 16~17일이 걸린다.’ 하였다. 이제 우리는 동해가 다하는 곳까지 가면 반드시 일본의 땅일 것이니, 이는 하늘이 도운 요행이다.”

하니, 선인(船人)들은 다 말하기를,

“끝내 육지를 못 만나니, 이건 틀림없이 허허(虛虛)한 큰 바다와 통해 있습니다.”

하고는, 다들 하늘을 부르고, 부모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밤 2경(更)쯤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파도가 치솟아 뱃전에 부딪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자, 모두들 다 엎드려 축수(祝手)하였는데, 꼭 죽는 것만 같았다. 5경이 되어서야 큰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가 다시 서풍이 불어, 인묘방(寅卯方 동북동쪽과 동쪽)으로 향해 갔다.

●5월 12일

미시(未時)쯤에, 전로(前路)에 태산(泰山)과 같은 것이 비로소 보였는데, 위는 희고 아래는 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데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점점 가까이 가 살펴보니, 산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어 위에 쌓인 눈이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아가 정박하려는 사이에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배는 동요하여 안정되지 않고, 주림과 갈증으로 기력이 없어진데다가, 파도가 배를 쳐 배 안에는 물이 가득해져서 거의 뒤집혀지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일시에 배를 움직이며, 작은 두 개의 통으로 물을 퍼내어, 물에 빠져 죽는 것만은 면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옷이 다 물에 젖어 추워 덜덜 떨었다. 겨우 물이 얕은 굽이진 곳을 찾아 정박하고는 비옷을 덮고 밤을 지냈다.

아침에 육지를 바라보니, 산이 중천(中天)에 솟아 있는데, 중턱 이상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고 그 아래로는 초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은 없고, 다만 산기슭 밑에 임시로 지어 놓은 초가 20여 채가 보일 뿐이었다. 가서 그 집들을 보니, 집 안에는 무수한 고기[魚]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고기는 거의 대구(大口)ㆍ청어(靑魚)였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기타 잡어(雜魚)는 건포를 만들려고 많이 매달아 놓았다. 선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삶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잔뜩 마셔서 배를 북처럼 해가지고는 곤히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대로 그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배에서 내려 비옷을 덮고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해안으로 올라 가, 연기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더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고,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대여섯 사람이 선창(船艙)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선인들로 하여금 불러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서로 바라다보기만 하였으니, 그들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이처럼 묵묵히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교환하지 못한 채 다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늙은이가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삶은 물고기 몇 덩어리가 있었다. 이어서 그들의 집을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며 야단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는데, 우리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자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히도 공포에 떨어,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달아나 보았자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죽기를 각오하고 배를 저어 가 정박하였고, 그곳 선창의 뱃사람들과 일시에 하선(下船)했다. 그들의 연장을 살펴보니, 별로 창검(鎗劍)이나 예리한 칼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조그마한 칼 한 자루만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염막(鹽幕)과 같고, 은밀한 곳이란 없었다. 그들이 저장하고 있는 물건은 말린 물고기, 익힌 복어(鰒魚), 유피(油皮)의 옷들에 불과했고, 그 밖의 연장으로는 낫, 도끼, 반 발(1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 정도의 크기로 된 나무활[木弓], 사슴의 뿔로 만든 화살촉을 단 한 자[尺] 정도 길이의 나무화살 등뿐이었다.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원래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는 것을 보고 살해를 하지 않는 것들이라 알고는, 놀라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졌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脯)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魚湯)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과 여우 가죽 또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 치[寸]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尺]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형용(形容)은 남녀가 모두 같았는데,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이것으로 남녀를 분별할 뿐이었다. 60세 가량의 늙은이가 목에다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풀기를 청하여 그것을 보니, 수염이 매우 길어서 귀찮아,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다 수염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수염을 잡아 재니, 한 발 반 남짓이나 되었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나는,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우리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배에는 쌀이 떨어졌기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행용 그릇을 내보이면서 쌀을 달라고 청해 보았지만,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나는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우리들은 다 굶주린 채로 그곳에서 잤다. 아침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갈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언덕에 올라 사방을 멀리 바라보니, 육지가 동북쪽에 뚜렷이 보였다. 선인들에게 청해 이르기를,

“이곳에서는 밥을 주지 않고, 배에는 쌀이 떨어졌으니, 꼭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저곳으로 가 봐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돌아갈 길도 찾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다행이겠는가.”

하였다. 선인들은 내 말을 믿고, 일시에 배를 저어, 한 작은 바다를 건너가 정박하였더니, 거기도 역시 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땅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다만 제모곡(諸毛谷)이라 하였다.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시늉을 하니, 그들은 또 작은 그릇에 담은 어탕을 줄 뿐이었다.

순풍을 타고 30여 리를 옮아 가, 어느 한 곳에 정박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땅 이름을 물으니 점모곡(占毛谷)이라 하였다. 그들의 말은 이같았으나, 그들이 무슨 말로 알아듣고 대답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구와 청어를 달라고 청했더니, 삶아 먹도록 많이 주었다. 그곳에는 벚나무 껍질이 많이 있어서, 그것으로 횃불로 사용하니, 불꽃이 아주 밝았다. 산모퉁이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동남간에 긴 육지가 있는데 산이 창공에 솟아 있어, 그 지세는 큰 육지같이 보였다. 그곳을 가리켜 물었더니, 다만 지곡(至谷)이라고만 했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불과 30여 리밖에 되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건너갔는데, 종일토록 댈 수가 없었다. 바닷길의 원근(遠近)에 대한 짐작은 육로(陸路)와는 달랐다. 그곳에 배를 대니, 역시 앞에 나온 무리들과 같아서 그들의 언어를 알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다만 물고기만 먹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서 먹던 토사자환(兎絲子丸) 반 제(劑)를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왔으나, 잊고 내 먹지를 않았는데, 그것을 꺼내어 선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물로 넘기니, 기갈(飢渴)증이 다소 풀렸다. 그대로 그곳에 유숙하였다. 지명을 물으니, 소유아(小有我)라고 하였다.

●다음날(5월 13일인 듯함)

나는 속으로,

“미목(尾木)을 갖추고 건어(乾魚)를 얻고, 물을 길어 배에 싣고서 표류하여 온 방향으로 똑바로 가, 요행히 우리의 땅에 도달한다면 살 것이고, 바다에서 역풍(逆風)을 만나, 이리저리 표류하여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불행하게 될 것이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굶주린 사람들을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한 큰 참나무를 찍어서 미목(尾木)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꽂을 구멍이 있는 널판을 견고하게 만들 생각이 나지 않아, 배로 가져 가게 하고는, 나는 혼자 뒤에 처져서는 사방을 둘러보고 왔더니, 시장기가 아주 심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서 곳곳에서 앉아 쉬었다. 마침 길가에 집 한 채가 있고, 연기가 많이 피어 올랐다.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 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水麪] 같았다. 입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좀 달라고 청했더니, 한 그릇을 주었다. 받아 먹어보니, 맛은 의이(薏苡 율무, 식용 또는 약용으로 포아풀과에 속하는 1년초) 같았는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먹어도 쓰지 않았고 배부르고 속이 편안했다. 원 모양을 구해 보니, 과연 풀뿌리인데,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랗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芭蕉)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堯老和那)라 했다. 곧 선인을 불러 그 풀뿌리를 보이고, 또 공중철(孔仲哲)을 불러 죽의 맛을 말해 주고, 한 그릇을 얻어서 두 사람에게 먹였더니, 모두 속이 편하고 배부르다고 말하였다. 다른 선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얻어먹고자 했다. 나는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여행용 그릇 일부를 주고, 그 풀뿌리를 가리키어 얻어와서는 죽을 쑤어 많이 먹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했다. 곧 선인 김한남이 그릇을 가지고 다른 선인들과 함께 일시에 가서 그릇을 주니, 그 무리들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여러 가지로 가리켜 얻겠다는 시늉을 지어 보이니, 비록 자세히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풀뿌리를 가리키면서 시끄럽게 지껄였기 때문에 헤아려 알아들었다. 선인들을 이끌고 산기슭으로 가는데, 1후(帿)의 거리쯤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함께 따라가 보니, 그 풀이 많이 있었다. 그것을 캐어다가 죽을 쑤어 각기 나누어 먹으니, 다 배부르고 속이 편하였다. 닷새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늘 많이 캐어다가 죽을 쑤어 포식했다. 배의 기구 만들기를 마치자, 생기(生氣)가 다소 돌았다. 한편으로는 풀뿌리를 캐고, 한편으로는 어물(魚物)의 남는 것을 구했다.

나는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다니며 구경을 해보니, 평원(平原)과 광야(廣野)는 옥토(沃土) 아님이 없었고, 흐르는 냇물, 두터운 둑이 다 논으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한 자[尺]도 갈지 않았다. 면죽(綿竹)이 우거지고 갖가지 풀과 큰 나무 숲에 살쾡이[狸]ㆍ수달[獺]ㆍ담비[貂]ㆍ토끼ㆍ여우ㆍ곰 등의 짐승이 무수히 있었다. 육지에는 길이라곤 없고, 또 죽은 사람을 묻은 묘도 없었다. 5월인데도 산 중턱 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으니,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또 어떤 곳에 이르니, 마침 날씨는 바람이 불고 추웠는데, 하나는 곰 가죽의 털옷을 입었고, 하나는 여우 가죽을 입었으며, 둘은 담비 가죽의 털옷을 입은 네 사람이 바다와 하수(河水)가 통하는 어구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은 7~8발[把]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 껍질의 실[木皮絲]로 짠 것이었다. 잡은 고기는, 송어(松魚)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雜魚)가 무수했다. 내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며 만지니, 그중에서 한 자[尺]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또 담비 가죽의 옷을 입은 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내가 입고 있는 남빛 명주의 유의(襦衣)를 가리키고, 제가 입고 있는 담비 가죽 옷을 벗어서는, 번갈아 가리키며 지껄이는데, 바꾸어 입자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꾸고자 하는 것인줄 알고는 즉시 허락하여 옷을 벗어 주고 바꾸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떼지어 각기 털옷을 가지고 와 우리 옷과 바꾸자고 하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선인들은 혹은 그릇을 주고 바꾸기도 하였는데 나도 가지고 있던 옷을 다 주고, 담비 갖옷 아홉 가지와 가려서 바꾸었다. 갓끈에 단 수정(水晶) 하나 하나와 바꾸기를 청하기에, 나는 수정 두 알씩을 가지고, 담비 가죽 두석 장과 바꾸었더니, 그 가죽의 수는 60장이나 되었다. 또 허리에 두른 옥(玉)을 가리키면서, 붉은 가죽 일곱 장과 바꾸기를 청하고, 또 여우 가죽 열다섯 장을 가지고는 의복과 바꾸기를 청하기에, 가죽의 품질이 크고 두터워, 북피(北皮 함경북도 지방에서 나는 가죽)의 모양과 같아서 나는 허리에 찬 옥을 끌러 주고, 또 우리 일행이 소지하고 있는 식기와 물에 젖은 면포(綿布) 홑이불 여섯 벌, 보자기 두 장을 다 주고 바꾸었는데, 수달피 석 장을 더 가져왔다. 그 물건은 아주 커서, 한 장으로 털부채를 만들면 네 자루쯤 만들 수가 있다 하였다.

그곳에 머문 지 닷새가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情分)이 있어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부득이 주는 대로 받으니, 고기가 다섯 섬[石]이 넘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선두(船頭)로 나가서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마즈마이……’라 말하였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남을 향해 가라는 것인데 실로 갈 길을 몰라, 마음이 답답하고 낙심을 하고 있을 즈음에, 갑자기 북풍이 불어 왔다. 달리 시험해 볼 방도가 없고, 다만 서쪽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쪽은 무변대해(無邊大海)이고 동쪽으로는 육지여서 동편만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떠났다. 순풍을 만날 것 같으면, 배의 기구가 다 갖추어져서 돛을 가득 달아 빨리 가고 순풍을 만나지 못하고 노를 저어 가다가, 배 댈 곳이면 정박하여 상륙을 했다. 인가를 찾아 들어가 보면 다 역시 그들 무리였다. 하루도 머무름이 없이 장장(長長) 10일을 가, 약 천여 리까지 갔는데도 끝내 그들 무리만이 있었다. 실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방책을 물을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남쪽을 향해 7일을 갔지만 역시 그 무리들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도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끌고 가서, 배를 가리키며 전과 같이 물었더니, 또 남쪽을 향해 가리키면서 ‘마즈마이’라고 할 뿐이었다. 여전히 동쪽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육지가 끊어질 때까지 갈 생각으로 갔다. 배가 몹시 고프고 목이 마르면, 혹 하륙(下陸)하여 전에 죽을 쑤어 먹던 풀뿌리를 찾았으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어물만 먹어서 치근(齒根)이 솟아 나오고, 아파서 다들 고통을 느꼈다.

계속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4일이 되던 날,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들며 부르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은 전의 무리들과 아주 같지 않았다. 즉시 돛을 내리고 앞으로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우리 배의 김백선(金白善)이라는 자는 일본어를 조금 알아 그들과 말을 통해 보았더니, 간혹 아는 말도 있었고, 비록 피차간 완전히 통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남촌부(南村府)의 왜인들이었고, 금(金)을 캐려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가옥(假屋)을 크게 짓고, 50여 명의 왜인을 거느리고, 거기서 앞으로 며칠 가야 하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중의 장왜(將倭)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근방에 표류하여 굶주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그들을 보내어 찾아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백미(白米) 서 말[斗], 잎담배 다섯 뭉치, 장ㆍ소금 등을 전해 주었다. 또 봉한 편지를 전해 주기에 뜯어 보니, 모두 일본 언해(諺解)여서 그 사연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글월의 밑에 다만 한자(漢字)로 ‘송전인 신곡 십랑병위(松前人新谷十郞兵衞)’라고만 씌어져 있었다. 심중은 다소 기쁘고 마치 꿈을 꾸다가 놀란 듯하였다.

곧 두 왜인과 같이 배를 타고 한편으로는 밥을 짓고 소금과 장으로 국을 끓여, 그릇에 가득가득 담아 나누어 주었더니, 일행은 다 먹고는 곤해서 누워 있었다. 5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어 포구에 정박했다. 거기에는 인가 일곱 채가 시냇가에 벌여 있었다. 배에서 내려 왜인들과 같이 그 무리들의 집에서 잤다. 나는 조용히 김백선을 시켜서 그 국명(國名)과 지명(地名)을 상세히 묻게 했더니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종이에 붓으로 일본 글자로 써서 묻게 했더니, 국명은 ‘하이(蝦夷 : 북해도)’이고, 지명은 ‘계서우(溪西隅)’라고 했다.

우리는 5월 초 9일부터 밥을 먹지 못했다가, 29일에서야 비로소 밥맛을 보았으니, 배가 고파도 밥을 맛보지 못하기를 28일까지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발선(發船)했다. 약 70~80리쯤 가니, 해안에 초가(草家)가 많이 있었다. 포구에 정박하니, 시내가 계서우(溪西隅)에서와 같이 흐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가니, 30여 칸의 초가에는 각각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의복과 기명(器皿), 기타 집물(什物)을 늘어놓은 모양은 부산(釜山)의 관왜(館倭)의 거처와 같았다. 그중의 우두머리 왜인[頭倭] 한 사람이 맞아들여 대좌(對坐)하고서는, 생선과 술로 대접을 잘하였다. 속으로 기뻐하고 이제는 살 길을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 왜인이 한 장의 글을 써 보이기를,

“나는 송전(松前) 봉행(奉行)의 사람으로 이름을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衞)라 합니다. 모집한 군인을 이끌고 송전 태수(松前太守)의 명을 받아, 여기에 집을 짓고 머물면서 금을 캐고 있은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3년 만에 한 번씩 송전부(松前府)에 세금으로 황금(黃金) 50냥(兩)을 바칩니다.”

하고, 다시 글을 써서 보이기를,

“처음 정박했던 곳은 어디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글로 써서 대답하기를,

“처음 정박했던 곳은, 산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는 듯하고, 바다를 자꾸 건너도 독산(獨山)만이 해중(海中)에 솟아 있었는데, 그 끝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람은 제모곡(諸毛谷)이라 했습니다.”

하였다. 제모곡이라는 지명을 김백선으로 하여금 직접 발음해서 들려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치하하기를,

“하이(蝦夷)의 지경입니다. 여기서 2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송전에서는 합계 3천 6백 리나 됩니다. 이 나라는 사방이 다 바다이고, 우리나라의 아주 먼 북방의 지역입니다. 해포(海浦)가 서로 이어져 있고, 땅의 넓이는 어느 곳은 4백여 리가 되고, 어느 곳은 7백여 리가 됩니다. 길이는 3천 7백~3천 8백 리나, 혹 4천여 리도 됩니다. 살고 있는 무리들에게는 원래 다스리는 왕이 없고, 또 태수(太守)도 없습니다. 문자(文字)를 모르고 농경(農耕)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해산물을 업(業)으로 삼고, 어탕(魚湯)만을 먹어 농사 짓는 이치를 모릅니다. 산에 올라 여우나 곰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서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아무렇게나 짜 옷을 지어 입습니다.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이 없고, 다만 송전부(松前府)에 익힌 전복[熟鰒]을 매년 만여 동(同 양의 단위. 조기ㆍ비웃 등은 2천 마리를 1동으로 함)만을 바치고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각 마을마다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 송전 태수의 앞에 나가 배알합니다. 그러나 언어가 같지 않고 금수와 같아서, 일이 있으면 송전은 하이어(蝦夷語) 통사(通事)를 별도로 두어, 그 말을 익히게 하며, 매년 한 번씩 송전에서 시자(侍者)를 보내어 그들의 나쁜 바가 있는가를 살피어 다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또 그들은 마을 안에 나이가 많은 자를 그 수장(首長)으로 정해서는 마을 안에 나쁜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잡아내어, 그들끼리 그의 죄악의 경중을 논해서 손바닥 모양으로 만든 쇠매[鐵鞭]로 등을 서너 번 때리고 그치고, 더욱 죄악이 중한 자면 다섯 번을 때리고 그칩니다. 그 밖에 아주 심한 자면, 송전 태수의 앞으로 잡아다 놓고 죄를 논하여 알리고 참수(斬首)케 합니다. 그 무리들의 성질은 본래 억세고 포악하여, 신이나 버선을 신지 않은 채 산곡(山谷)이나 우거진 숲속을 돌아다닐 수가 있으며, 가시덩굴을 밟고 넘어 높은 언덕 위에서 여우나 곰을 달려가 쏘아 잡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서 바다에서 큰 고래를 찔러 잡고, 눈과 추위를 참아 습한 땅 위에서 자도 병에 걸리지 않으니, 실로 금수와 다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옛날 남방 사람의 상선(商船)이 그곳에 표류되었는데, 이 무리들은 선인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 송전에서는 그 모살(謀殺)했던 무리들을 적발해서 부모ㆍ처자ㆍ족당(族黨)들을 불에 태워 죽였는데, 근래에는 사람 죽이는 짓은 없어진 듯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그곳으로 표류했다가 빠져 나올 수가 있었으니, 복 받은 분이라 할 만합니다. 또 들으니, 당신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의 외방(外方)에 별도로 갈악도(羯惡島)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尺)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族)과 같고, 모발(毛髮)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간 하이족(族)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 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장수(長壽)할 분입니다.”

하였다. 우리는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술과 밥을 후하게 먹여 주었다.

●엿새째 되는 날

십랑병위(十郞兵衞)는 그 타고 온 배를 정돈시키고 무전대병위(武田大兵衞)ㆍ선대 육우위문(仙臺六右衞門)ㆍ추전 희좌위문(秋田喜左衞門) 등의 왜인을 거느리고 나섰다. 그들 중에는 고산간병위(高山間兵衞)라는 자도 있었으니, 하이어(蝦夷語)의 통사(通事)였다.

●7월 1일

발선(發船)하여 일시에 송전 태수를 알현하기 위해 돌아갔다. 나는 배에 있는 동안, 글을 써 보여주며 내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말과 물정을 하이어 통사에게 물었다.

“하이족들이 ‘마즈마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오?”

“송전(마쯔마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앙그랍에는 무엇이오?”

“평안(平安)이라는 말입니다.”

“‘빌기의’는 무엇이오?”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악기’는 무엇이오?”

“물[水]입니다.”

“‘아비’는 무엇이오?”

“불[火]입니다.”

이 말들을 왜어와 견주어 보니, 아주 딴판으로 달랐다.

오랫동안 표류하는 배에서 지내고, 또 들판에서 잠을 자면서 뜨거운 열에 삶아지고 장기(瘴氣)의 엄습을 받았고, 기갈(飢渴)증으로 몸이 상해진데다가, 밤이면 모기에게 물리고, 또 벼룩과 이에 뜯기는 괴로움을 당해서 기력이 다 빠졌다. 밤에는 해양(海洋)의 중류(中流)에서 가면(假眠)하고 낮에 순풍을 만나면, 해안(海岸)을 따라 항해하고, 만일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포구(浦口)에 배를 정박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박하는 곳에 비록 인가가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 하이의 무리들이어서 그 집의 습기(濕氣)와 몰려드는 벼룩 때문에 배 위만 못하였다. 나흘을 가서는 역풍(逆風)을 만나 포구에 정박하여 머물렀다. 장사하는 왜의 배가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상왜(商倭) 30여 인 중의 두왜(頭倭) 한 사람이 와서 굴금선(堀金船 금을 캐는 배, 즉 필자 등 일행이 타고 있는 배를 말함)을 맞이하는데, 여러 왜인이 상선의 두왜를 향하여, 모두 마루[床] 밑에서 절하고, 무릎을 꿇고 그들의 사정을 고했다. 오직 십랑병위(十郞兵衞)만이 마루에 올라가 같이 읍(揖)하였다. 같이 앉기를 청해서는 공손히 술과 생선을 내어 와 후히 대접하였다. 글로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영목호차병위(鈴木戶次兵衞)’라 했다. 십랑병위가 나의 시(詩) 짓는 재주를 말하니, 그 왜인이 시 지어 주기를 아주 간절하게 청하였다. 곧 칠언소시(七言小詩)를 지어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를 올리고는 재삼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것은 왜인들이 시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역풍이 연달아 불므로 그곳에서 머문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배 위에서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지난날과 같이 내 집에 있으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로하느라고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내는데, 평소와 꼭 같게 느껴졌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다음날에는 순풍을 만나서 해안을 따라 바다로 나왔다. 사흘이 지난 뒤, 한 큰 바다를 건너서 한 곳에 이르렀는데, 석장포(石將浦)라 불렀고, 그 바다는 하이국(蝦夷國)과 분계(分界)가 되는 바다였다.

●7월 10일(갑자)

남풍이 크게 불고,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나는 홀로, ‘추상갑(秋上甲 입추(立秋) 후 첫 번째 돌아오는 갑자일(甲子日))인데도 우세(雨勢)가 이와 같다면, 천하 어디나 비가 많을 것이고, 곡식에 싹이 나겠구나.’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9월 그믐이 지난 뒤까지도 비가 계속 내려, 강물이 넘치는 것이 어디나 같다 한다.

여러 날 배를 타고, 오래 바다 위에서 지내 장기(瘴氣)와 피로가 너무 심했다. 고향 소식은 들을 길 없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해서 침식(寢食)이 재미가 없었다. 십랑병위가 나의 슬퍼하는 기색을 보고서는, 금 1전(錢)을 꺼내어 좋은 술 한 통을 사다가 나를 위로하여 걱정을 풀게 하였다. 그래서 큰 잔으로 세 차례 듬뿍 마셨더니, 조금 뒤에 약간 풀렸다. 그러나 해외(海外)에 표류하는 근심이어서 비록 조금 감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향수를 견디어낼 수 없었다. 여러 왜인들이 서로 물었지만, 말을 자세히 알아듣지 못하여 마치 귀머거리와 같았다. 그중에서도 김백선(金白善)이 조금 왜어를 알고 있으나 각기 다른 배에 타고서 어느 때는 앞에 가고 어느 때는 뒤가 되어, 서로 같이 묻고 통정(通情)할 수마저 없어 더욱 답답했다.

●7월 23일

송전부(松前府)의 북쪽 백여 리 밖에 도달했다. 지명은 ‘예사치(曳沙峙)’라 했다. 그곳 큰 마을 중에는 수변장(守邊將) 한 사람이 있는데, 큰 관사(官舍)를 짓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존중을 받았다. 백성이 5백여 호 거주하는데, 시장에는 물산(物產)을 벌여 놓았고 남녀의 의복은 극히 화려하고 묘했으며, 인물들은 영리하고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구경꾼들이 양쪽 길가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서 다 좋아했다. 변장(邊將)은 풍성하게 차려 놓고 나를 맞아 공손히 절하였다. 그와 마주앉아 음식과 기이(奇異)한 찬을 시회(蒔)의 소반에다 낭자하게 벌여 놓고 화자배(花磁盃)로 제백주(諸白酒)를 잔질하며 무수히 마셨다.

김백선과 다른 선인들을 밖의 대청에 따로 앉게 하고, 딴 사람으로 하여금 대접하게 하였다. 그는 붓과 벼루를 내어 놓고, 모면지(毛綿紙)에다 글씨를 써서 사정을 물었다. 나는 거기에 닿게 된 내력을 다 써서 주었더니 곧 잘 봉해서는 급히 송전 태수에게로 보내 알리게 하였다.

그곳에 사흘을 머물렀는데, 대접하는 음식은 대단히 풍성하고 좋았다. 이에 송전 태수가 봉행(奉行) 한 사람을 보냈는데 육로로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 한다. 그러므로, 변장은 인마(人馬)를 정비해서 우리의 표류선에 태워 왜인을 정해서 해로로 송전으로 보내고, 나만은 가마를 태웠는데, 산이 높고 마을은 깊으며 초목이 우거지고, 길이 아주 험악했다.

●26일

유시쯤에, 송전까지 70리쯤 되는 데에 도착해서, 어느 마을의 집을 숙소로 정했다.

●27일

새벽에 다시 송전을 향하여 송전까지 10리쯤 되는 데서, 말을 끌고 인가로 들어가니, 약간의 술과 밥을 들여왔다. 그 뒤에, 나는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부중(府中)으로 들어가는 중, 날이 이미 저물었다. 도중에 거느리고 오는 봉행 왜인에게 여러 번 글을 전하여 심히 부산을 떠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 그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5리쯤 가니, 여러 사람들이 호위하고 촛불을 환하게 밝혔다. 성 밖에 이르자, 봉행왜 10여 인이 하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좌우에 두 줄로 행렬(行列)을 지었는데,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맞이하여 읍하며 계속 호위하여 부중의 공사(公舍)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잔치 자리를 풍성하게 차려 놓고, 호위하고 왔던 봉행 등이 영접해서 동편의 자리에 따로 앉혔고 저네들은 서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밖의 대청에 자리 잡게 했다. 그들은 김백선을 불러 말을 전하기를,

“태수(太守)께서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글 한 장을 전하였는데, 그 글을 열어 보니,

“이번 행차에서 당신[吾丈] 등은 무엇하려고 배를 타셨으며, 어디에 닿으려던 것이 바다 속으로 표류하게 되었던 것입니까? 며칠간 표류하다가 우리의 경내(境內)에 도착하게 되었습니까? 해상(海上)에서 일본의 상선(商船)을 만났었습니까? 조선(朝鮮)에서 발선(發船)한 것은 어느 달 어느 날이었습니까? 또 해상에서 표류했던 날수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와 같이 자세히 물었다. 또,

“이 선달(李先達)ㆍ김 첨지(金僉知)의 두 자(字)가 붙은 분들은, 어느 곳에 사는 분이며, 성명(姓名)ㆍ관명(官名)과 그리고, 관품의 고하(高下)는 어떠합니까?”

하였다. 거듭 묻기를,

“조선국에서는 불법(佛法)을 믿습니까? 신(神)에게 제사를 지냅니까? 유도(儒道)를 존중합니까? 또 예수교 사람이 포교하고 있습니까? 또, 하이족(族)들이 당신들에게 불법적(不法的)인 짓을 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이 나그네 길에서 요구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도 좋습니다.”

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삼가 일본국(日本國) 송전 태수 합하(閤下)에게 답합니다. 나는 조선국 경상도 동래부(東萊府)에 살고,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한 사람입니다. 마침 사무(私務)가 있어서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의 포정사(布政司)의 아문(衙門)에 가려고 한 지 오래였습니다. 지난 4월에, 동래부에 사는 어상(魚商)들이, 우리가 타고 온 작은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沿海)의 고을로 간다고 하기에 함께 배를 빌려 탔습니다. 우리는 동해 바다의 길을 따라 출발하여 강원도와의 경계에 닿지 못하여, 그달(4월) 28일 미시쯤에, 해양(海洋) 중에서 졸지에 횡풍(橫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의 미목(尾木)이 부러져서 배를 제동(制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날이 저물어 대해(大海)에 표류하여 지척(咫尺)을 분간 못한 채, 바람 부는 대로 표류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양식과 먹을 물이 다 떨어져 우리들은 다 기갈(飢渴)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다행히도 하늘의 도움을 받아, 5월 12일에 비로소 북쪽 땅에 정박하여, 비록 바닷물 속에 빠져 죽는 것은 면했지만, 배가 닿은 곳에 사는 무리들이 귀국인(貴國人)이 아니어 말이 통하지 못했고, 또 서로 아는 문자(文字)도 없었으며, 또 곡식을 먹고 사는 무리들이 아니어서 다만 그들의 풍속대로 한 그릇의 어탕만을 주어 목숨만은 비록 붙어 있었지만, 굶주림이 심해서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 우리가 오던 길에서, 귀부(貴府)의 사람인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衞)를 채금(採金)하는 집에서 만나, 식사 제공과 구호를 받아 모두 살아날 수가 있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히 엄한 귀지(貴地)를 침범했으니 진실로 죄가 중하지만, 바라건대 족하께서는 특별히 교린(交隣)에 있어 성신(誠信)으로써 하는 의리를 유념하시고, 우리 인명을 불쌍히 여기시어 돌아갈 길을 지시해 주시고, 본국(本國)으로 잘 호송(護送)하도록 선처(善處)하여 주신다면, 실로 선업(善業)을 쌓음으로 훗날의 복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황송한 생각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모월(某月) 모일(某日)

조선국 무과(武科) 급제자(及第者) 이 선달(李先達).

1. 성은 이(李), 이름은 지항(志恒)이며, 자는 무경(茂卿), 관호(官號)는 선달입니다.

1. 성은 김, 이름은 백선(白善)입니다. 첨지(僉知)는 늙은 사람을 존칭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1. 공 비장(孔裨將)과 김 비장은 모두 무사(武士)의 몸으로 장사를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 해부(海夫)나 선인(船人)들입니다.

1. 우리나라에는 불법을 떠받드는 일은 없고, 다만 중으로서 수도(修道)하는 자가 있어 깊은 산 조용한 곳에 절이나 암자를 짓고, 불경(佛經)을 널리 읽고 있을 따름인데, 간간 성불(成佛)한 중이 나오고 있습니다.

1. 또 신(神)을 섬기는 일은 없고, 돌아가신 조부모ㆍ부모ㆍ처의 생일이나 별세한 기일(忌日)에는, 해마다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주육(酒肉)을 많이 차려 놓고서,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낼 뿐입니다.

1. 사람들은 모두 유도를 받들어 행하고 공자(孔子)ㆍ맹자(孟子) 같은 대성(大聖)과 10철(十哲)ㆍ13현(十三賢)을 각 도(道), 각 고을에 위패(位牌)를 모시기 위하여 크게 향교(鄕校)를 지어 놓았습니다. 춘추(春秋)의 상정일(上丁日)에는 석전(釋奠)의 대제(大祭)를 거행합니다. 식년(式年)마다 문무(文武)의 과거를 실시하여 갑(甲)ㆍ을(乙)ㆍ병(丙)의 3등(三等)으로 뽑고 있습니다.

1. 예수교에 대하여는 본시 모르고 있습니다.

1. 하이(蝦夷)의 무리들이 우리들에게 불법적인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1. 여정(旅亭)에서는 술과 밥을 대접해 주어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십랑병위라는 분은 채금점(採金店)으로부터 여러 날 동안 우리를 대접하느라고 양식과 찬을 많이 허비했습니다. 살려 준 은혜를 입어서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실로 한이 됩니다. 또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입었던 옷이 표류하던 중에 모두 젖어서 하이족들의 털옷과 바꾸어 입었으므로 달리 입을 옷이 없고, 전번에 이리로 올 때에 남루한 옷은 묻어버렸으니, 이것이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이것 외에는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봉행(奉行) 왜인들 중에 한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태수 앞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왜인들이 일시에 우리를 보호하며 숙소로 갔다. 그리고는, 큰 판자로 만들어진 담에 붙은 외문(外門)에, 하왜(下倭) 세 사람을 정해서 지키게 하고, 내문(內門)에는 파수 보는 두왜(頭倭) 두 사람을 지키게 해서 3일마다 교대케 하였다. 어지러이 차린 상에 술과 국수 등을 후하게 대접받고 파했다.

●6월 초하루

채금점(採金店)을 떠난 배가 지난 25일에 송전부(松前府)에 들어왔었는데, 비록 중간에서 4~5일 체류(滯留)한 일이 있었지만, 뱃길 20여 일의 거리로써 따져보면, 과연 말하는 바와 같이 2천여 리가 되는 곳이다.

●다음날(7월 28일)

아침에 태수가 1등(一等) 봉행(奉行) 왜인 한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한 장의 글을 전해 주기를,

“주신 편지에 피력하신 뜻을 잘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당장 당신의 나라로 호송하지는 못하더라도 추운 계절까지 지체되어 몸이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부하의 관원(官員)에게 명해서, 일을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을 캐는 자한테 은혜 입은 일에 대해서는 많은 염려를 마십시오. 그 사람도 역시 우리나라 백성입니다. 이곳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비록 몇 달이 된다 하더라도, 굶주릴 걱정은 없을 것이니, 다만 숙소에서 병이 나지 않도록 몸 조심만 하십시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돌아가는 일을 재촉할 것이니, 자친(慈親)과 현처(賢妻)에 대한 불쌍한 생각을 참고 견디십시오.”

하였다.

이 글은 곧 나의 답서에 대한 회보였다. 봉행 왜인의 이름은 고교천우위문(高橋淺右衞門)이라 하였는데, 문자를 조금 알기에 피차 글로 통했고, 혹은 김백선으로 말을 전하게 하였다. 서로 얘기하는 동안, 태수가 다시 시왜(侍倭) 한 사람을 보내어, 나를 들어오라 청하였다. 즉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그와 함께 태수 앞으로 들어갔더니, 태수는 그의 좌석에서 좀 일어섰고, 나에게 좌전(座前)에서 절하게 하였는데, 태수는 손을 들고 답배(答拜)하였다. 조금 물러나와 동쪽을 향하여 잠시 앉아 있으니, 갖가지의 물고기와 과일을 한 그릇에 섞어서 가득 담아 내와서 차와 술 몇 순배를 들고 파하였다. 이어서 태수로부터 한 장의 글이 전해졌는데, 그것을 펴 보니,

“처음 만나보고 크게 기뻤습니다. 숙소로 돌아가서 편히 쉬십시오.”

하였다.

숙소로 올 적에 봉행 왜인 등이 앞에 서서 인도하여 돌아왔다. 비록 노상에는 구경꾼들이 많았지만, 조금도 떠들지 않았다. 송전 태수의 시위(侍衛)의 융성(隆盛)함과 고을 안의 인물 및 시전(市廛) 물산의 풍성함은 우리나라 주부(州府)보다 백 배나 더하였으니, 그 직을 대대로 물려주기 때문에 이같이 성한 것이나 아닌가?

●다음날

오시(午時) 사이에, 태수는 봉행 고교천우위문(高橋淺右衞門)을 시켜, 검은 명주 3단(端), 솜 5편(片), 옥색 명주 1단(端), 푸른 명주 1단, 분지(粉紙 무리풀을 먹여 만든 희고 단단한 종이) 10속(束), 보통 종이 5속을 나에게 보내주었고, 김백선 등 세 세람에게는 흰 모시 각 2단(端), 일본옷 1벌씩, 분지 3속, 보통 종이 3속씩을 주었으며, 선인들에게는 무명 각 2단, 일본옷 1벌씩, 보통 종이 3속씩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사례하기를,

“보내 주신 물건들을 주는 대로 받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중의 검은 색의 것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데, 오히려 가장 많이 주시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옥색과 푸른 색의 명주 2단과 5편의 솜만으로 두터운 옷을 만들어도 족히 추위를 막을 수가 있으니, 검은 명주는 돌려드립니다.”

하고, 검은 명주를 돌려주니 사양하고 받지를 않았다. 단자(單子 남에게 보내는 물건의 수량과 보내는 사람의 성명을 적은 종이)에 써서 십랑병위의 처소로 보냈지만, 또한 받지 않아서 억지로 그의 집에 놓아두었다. 단자에,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衞) 정탑(靜榻)에 편지를 드립니다.

삼가 수일내의 존체가 편안하신지 문안드립니다. 마음 깊이 존장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저는 숙소에서 잘 지내고 있고, 몸에도 아무 탈이 없으니, 존좌(尊座)가 두터이 생각해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 죽게 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가 산과도 같습니다. 넋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언제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제 태수께서는 여러 단(端)의 명주를 보내 주셨는데, 헤아려 보니 옷을 짓고도 남음이 있어서, 검은 명주 3단(端)을 돌려드려 조금이나마 사례합니다. 부디 이 뜻을 받아 주시고 물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송전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매일 세 끼니마다 밥ㆍ국ㆍ술을 세 차례씩 대접하였고, 간간이 별도로 먹을 것을 보내 주었다. 여러 날 굶었다가 점점 배부르고 편안해졌다. 하루는, 태수가 시왜(侍倭)를 보내어 문안하고, 겸하여 당지(唐紙) 열 장을 보내 와서, 김백선을 통하여 말하기를,

“존좌(尊座)는 예사치(曳沙峙)로부터 육지의 길을 오시면서, 이 고을의 경치를 보셨으니, 시를 지어 보내 주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할 수 없이 오던 길에 생각나는 대로 시 여섯 수(首)를 연서(聯書)하여 보냈다.

전해 들으니, 태수는 시사(詩思 시를 짓게 하는 사상ㆍ감정, 또는 시를 짓는 태도)를 제법 즐기고, 또 회화(繪畫)를 좋아해서 그 자신도 그림을 잘 그리며, 항상 강호(江戶)에서 온 중 서류(瑞流)라는 이와 시와 그림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숙식(宿食)도 같이 한다 하였다. 내가 지은 시를, 그 중과 같이 보고 차운(次韻)을 하여 보내 왔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봄이 와도 머리에 흰 눈 쌓였다 말하지 마소 / 莫言春到雪蒙頭

고향길 먼 데 있는 그대가 딱하이 / 覊旅憐君鄕路悠

소ㆍ이(蘇李)가 옷깃을 나누매 다시 만나기 어려워라 / 蘇李分裳難再遇

하량의 한 번 이별함이 이미 천 년일레라 / 河梁一別已千秋

명리(名利)에 떠들썩함이 싫어서 / 應厭利門名政喧

편주로 물결을 타고 도화원 묻네 / 扁舟駕浪問桃源

돌아와 다시 집사람 만나 얘기하면서 / 歸鄕又遇家人語

손잡고 이게 꿈인가 의심했지 / 把手猶疑是夢魂

서풍 따라 만 리를 떠 왔는데 / 漂來萬里任西風

우리나라에 들어올 것 어찌 생각했으랴 / 流到豈思入我邦

여관이 적막한데 그 누굴 벗삼으랴 / 旅館寂寥誰共伴

내 마음 알아주는 건 한 쌍 백구인가 하노라 / 知心只有白鴟雙

한 가닥 경계는 옛 풍연(風煙) 깨뜨리는데 / 一條界破舊風煙

폭포 소리 우레처럼 울려 백천이 불어나누나 / 瀑韵轟雷漲百川

시 지은 이, 적선의 후예이리라 / 應是題詩謫仙後

글 기운이 백 장으로 하늘까지 닿으니 / 文瀾百丈直滔天

찬 달빛 저녁마다 처마를 비춰 주고 / 寒月暎簷夜夜明

쓸쓸한 저 바람은 또 다듬이 소리를 보내 줌에랴 / 風悲況又送砧聲

청등을 선창 아래에 꺼지도록 태우니 / 靑燈結盡禪窓下

시 읊느라 새벽까지 이르렀음을 알겠네 / 想見吟詩到曉更

인간의 일이 모두 제대로 안 풀린다 / 諦渙人間萬事非

만났다가 이별함을 어찌 생각했으랴 / 豈圖相遇又相違

봄바람에 이제 돛을 달고 가지만 / 春風縱今掛帆去

운산에서 중 짝한 걸 잊지 마소 / 莫忘雲山伴衲衣

그 후, 그는 다시 당지(唐紙)를 보내어, 글씨 써 주기를 청했다. 곧 당시(唐詩)의 글귀 세 줄을 초서(草書)로 써서 주었더니, 글씨 체(體)의 좋고 나쁜 것은 모르고, 잠깐 필획(筆劃)이 이리저리 어지러운 것만을 보고는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태수의 칭찬으로 하여 거기에 사는 두왜(頭倭) 등이 당지를 가지고 와서 글씨를 써 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오는 대로 곧 오언(五言), 혹은 칠언(七言)으로 그 종이의 장단(長短)에 따라 써 주어 위로하였다. 태수는 글씨 청함이 많다는 것을 듣고서는 흰 토끼의 털로 정하게 만든 대ㆍ중ㆍ소의 붓을 잘 가려서 보내 주었다.

송전에 있은 지 48~49일 만에 종이에 쓴 것이 거의 백여 권(卷)에 이르렀다. 저들은 말하기를,

“문방구(文房具)를 드려 보답하고 싶지만, 앞으로 강호로 가면, 반드시 수색을 당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존좌의 일행 중에, 만약에 우리나라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된다면, 준 자가 벌을 받음을 면치 못하기에, 다만 물고기와 술을 올려 사례합니다.……”

하였다.

강호의 관백(關白)으로부터 육로(陸路)로 데리고 오라는 통보가 8월 26일에 왔다. 태수는 별도로 그 고을의 가로(家老) 세 사람을 시켜 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그리고 푸른 명주 2단(端), 흰 베 2단, 풀솜[雪綿子] 5편(片), 옥색 명주로 만든 요 1부(部), 독수리 날개 1미(尾), 황금(黃金) 2전(錢), 떡ㆍ국수ㆍ물고기ㆍ술 등을 보내왔다. 또, 두왜(頭倭)를 시켜 편지를 전하기를,

“명주와 솜은 선달(先達)께서 강호로 가시는 노중에 입으실 옷을 짓는 데 쓰게 하자는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와 황금은, 선달께서는 이미 무관으로 계셨으니 띠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드리는 것은 다 나의 정을 잊지 마시라는 물건입니다. 그 밖의 술과 국수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단지 독수리 날개ㆍ금ㆍ음식만 받아 감사드리고, 명주는 받지 않았다. 가로(家老)는 명주도 다른 것들과 같이 놓아두었다. 조금 뒤에 다른 한 사람이 와 태수의 말을 전하기를,

“길을 떠나는 손님에게 노자를 드리는 것은 그 예가 있는데, 하물며 타국의 표류객(漂流客)임에리까?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노자로 준다고 하시니, 부득이 받겠습니다.”

하자, 그 가로(家老)는 기꺼이 돌아갔다.

●다음날

태수는 또 천우위문(淺右衞門)을 시켜, 왜옷 7건(件)과 청색 무명베로 만든 요 7부(部)를 보내오고, 떠나는 여러분이 도중에서 몸이 상할까 염려되니, 나누어 주었으면 한다는 글을 전해 주었다. 나는 봉행(奉行)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서류(瑞流)라는 중이 자주 시를 지어 보내왔기에, 나도 또한 계속 화답하였지만, 서로 만난 일은 없었다. 하루는, 그 중이 와서 만나고는 치사하기를,

“존좌(尊座)께서 이 부중에 오셔서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저는 태수와 같이 있어, 1각(刻)도 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어 주고받은 시로, 정의(情義)만은 벌써부터 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승(小僧)도 또한 강호 사람인데, 이 부중에서 살게 된 지가 이미 70년이나 되었으니, 나그네의 심정이야 피차 어찌 다르겠습니까? 존좌께서 바다에 표류된 지가 오래되기에, 고향댁에서는 반드시 걱정을 하고 아주 비통해 하실 것입니다. 존좌께서 이제 돌아가실 날이 가까우시므로, 저는 틈을 타 와 뵙는 것입니다. 부디 만복(萬福)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서30로 이역(異域)에 있게 되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매, 실로 비감스럽습니다.”

하고, 곧 따로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갔다. 그 시는 이러하다.

올 때엔 서계로 정 더욱 화목했는데 / 來時書契情尤睦

오늘엔 기쁨과 근심이 얽히고 설키누나 / 今日喜愁共有依

채 뵙지 못하고 님 보내니 / 未謁芝眉送錦袖

내 혼은 꿈마다 그대 따르리 / 別魂夢結夜追衣

서로 만나기 전에, 그 중이 지어 보낸 시는 이러하다.

흐린 구름 걷히고 늦게 맑으니 / 嵐雲收盡晩晴快

유유히 명월(明月) 보고 시 지어 보세 / 吟興悠悠對月明

홀몸 쓸쓸한 객 저녁에 앉았으면 / 一半秋客待夜夕

온 혼백이 속세의 정 씻겠네 / 十分魂魄洗塵情

달빛이 하늘 가에 떠오르면 잠자던 까마귀 지껄이고 / 光浮天際宿烏噪

그림자 물결에 비치어 어별을 놀라게 하네 / 影暎潮瀾魚鱉驚

궁벽한 땅 바닷가엔 시 짓는 벗 적어 / 地僻海隅詩友少

홀로 굽은 난간에 의지하여 삼경을 지내노라 / 獨憑曲欄過三更

백운 속 암자(菴子) 있되 / 禪菴住在白雲層

산림 막혀 못 가겠고 / 臝得山林抱不能

밖의 송창엔 □달 비치는데 / 外有松窓□有月

불경 송독하고 나서 가물거리는 등불 마주하네 / 梵凾誦罷對殘燈

가까운 나그네 집 명월(明月) 속에 바라보고 / 近望旅軒對月明

포구 기러기가 사람에게 알리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 忍聞浦鴈報人聲

그대는 나그네 시름에 잠 못 이루시겠지요 / 愁察客霄夢難結

나 역시 그대 그리워 한밤을 새운다오 / 我亦思君到曉更

그대가 삼도에 이른 것은 가을날이었지요 / 君到秋霄三島天

귀한 손님이 신선 되었나 상상했다오 / 鳳客想好化神仙

황연히 잠을 깨니 내 곁에 와 있어서 / 恍然夢覺投吾夕

낭랑한 읊조림이 책상 앞에 울리누나 / 瓊韻金聲響几前

우리들은 술을 몇 잔씩 들고 헤어졌다.

●다음날

태수는 다시 천우위문을 시켜 약간의 물고기 안주와 술을 보내어, 이별을 위로해 주었다.

●30일

조반을 먹고 난 뒤, 배를 정비해서 선창에 대어 기다리게 했다. 태수는 시왜(侍倭)를 보내어 나만 공사(公舍)로 같이 들어오라고 전하였다. 태수는 밖의 대청 위에 나와서 맞이하여 그와 같이 서서 읍(揖)하였다. 그는 작은 술상을 차려서 봉행들에게 모시고 술잔을 올려 떠나는 길을 위로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곧 이어 그 자리로 들어갔는데, 피차 아무 말도 없이, 다만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머리를 수그리고는 서서 작별했다. 봉행들과 잠깐 그 자리에 앉아 몇 잔의 술을 나누고 작별했다.

선창에서 배에 올라 돛을 가득 올려 달고서, 한 작은 바다를 나는 듯이 건너 갔는데, 그곳은 진경군(津輕郡)이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서 숙박했는데, 그 군(郡)에서 출참(出站)하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데리러 온 송전부의 다섯 봉행(奉行)이 가마를 정돈해 들여와서 내게 타라 하고 사람들에게 메게 했다. 곳곳의 지경(地境)에서 정연하게 기다렸다. 길을 안내하는 나장(羅將)이 6명, 심부름하는 사환이 무수히 따르고 있어, 마치 우리나라의 별성행차(別星行次)와도 같았다. 나는 봉행에게 말하기를,

“나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가마를 탈 만한 사람이 못 되는데, 하물며 표류해 온 처지임에랴? 이와 같은 폐를 끼치는 것은 분수에 심히 편치 못합니다. 탈 말을 정해 줄 것 같으면, 마상(馬上)에서 두루 경치도 구경하고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하니, 왜인들이 말하기를,

“관백(關白)께서 잘 호위하여 오라는 명령이 있었고, 또 태수께서 정식(定式 일정한 규칙과 격식, 또는 의식)의 분부가 있었던 것이지, 우리가 갑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우리가 지낸 길의 각 고을은 진경군(津輕郡)ㆍ남부현(南部縣)ㆍ선대부(仙臺府)ㆍ오주(奧州)ㆍ목신우군(牧信友郡) 등 다섯 고을이었다. 각 고을은 북쪽 성문에서 남쪽 문까지 혹은 20여 리가 되고, 혹은 30리나 되며, 사람과 물산의 많음은 우리나라 서울보다 배나 되었다. 각 고을의 지경을 6~7일을 지나야 했는데, 각 고을을 지낸 날을 계산해 보니, 27일간의 일정이었다.

●9월 27일

비로소 강호(에도)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처소로 이관되었다. 도주가 우리를 그대로 대마도로 내보내려고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데리고 오는 봉행(奉行) 및 모든 왜인을 차정(差定)하는 동안에 저절로 5~6일이 되었다.

●30일

술과 국수를 간소하게 차려 한방에 모아서, 수봉행(首奉行) 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전별(餞別)케 하였다.

하루는 두왜(頭倭) 다섯 사람과 하왜(下倭) 열 사람이 우리를 인솔하여 대마도를 향하여 출발하려 할 즈음, 북관(北關)에서 인솔하여 왔던 예에 따라, 나를 가마에 태우고 다른 이들은 다 말을 타게 하였다. 하루에 백여 리를 갔다. 가마를 메는 인부와 마필(馬匹)은 각 고을에서 번갈아 내어 주었고, 지공(支供)은 그들이 돈을 내어 참(站)마다 사서 썼다. 이것은 저들 차인(差人)이 표류인을 귀환시키는 데에는 각 읍에서 지공하는 값은 돈으로 징수하는 것 같았는데, 숨기고 바른 대로 말하지 않아 마침내 그들의 간교한 정상을 알 수가 없었다.

●10월 17일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에 도달했다. 사흘을 머물렀다가, 오사포(五沙浦)의 왜선을 타고, 해로(海路)로 출발했다. 지낸 연안의 고을은 병고보(兵庫堡)ㆍ하관(下關)ㆍ적간관(赤間關)ㆍ지도(芝島)ㆍ승본도(勝本島)ㆍ일기도(壹岐島)ㆍ팔도(八島)ㆍ단포(壇浦) 등이었다.

●12월 14일

대마도에 도달해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송전에 버려두었던 표류선을 기다렸으나, 마침내 오지 않았다.

●정축년 2월 2일

또 왜선을 탔는데 차왜(差倭)를 정하고 서찰을 받았다. 바람이 순하지 못해서 포(浦)마다 들러 머물렀다.

●3월 5일

비로소 순풍을 만나 우리나라의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했다. 왜관(倭館)의 금도왜(禁徒倭 왜의 취체관으로 일본에서는 목부(目付)라 함) 등이 날이 어두워 검사할 수 없으므로, 날이 새기를 기다려 검사를 받은 뒤에야 나왔다. 우리는 가지고 온 짐을, 우리와 같이 표류했던 울산 도포(桃浦) 사람 박두산(朴斗山)의 배에 옮겨 실었다. 부산진(釜山鎭)의 영가대(永嘉臺) 앞에 정박하여 배에서 내렸다.

부산첨사(僉使)가 표류했던 사람들의 배가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를 불러 공술(供述)을 들이라 했다. 이어서 부산성 밖에 있는 기패관(旗牌官) 정진한(鄭振漢)의 집에 당도하니, 밤 2경(更)이었다. 밥을 지어 주었다.

집에서 두 아들과 종 잉질메[芿叱山]가 비로소 와서, 형님이 지난해 6월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정신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관아로 들어가 공술을 들였다.

왜관(倭館) : 고려 시대 말기 이후 조선 시대 초기까지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심하자, 우리나라에서는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 동래(東萊)의 부산포, 울산(蔚山)의 염포(鹽浦)에, 일본인이 주재하는 왜관을 설치(삼포개항 1426)하도록 해서, 교역(交易)과 양국간 사신의 접대에 관한 일을 맡게 했다. 후에 두 나라 사람들의 알력이 생기자, 두 곳의 왜관은 폐쇄하고, 다만 내이포에만 존치케 했다가 다시 중종 36년(1541)에는, 왜관을 내이포에서 부산포로 옮기게 했음.



▣강항(姜沆)의 일본 표류기-강항

형조 좌랑(刑曹佐郞) 강항(姜沆)은 선조(宣祖)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국에 표류하였다. 그는 ‘간양록(看羊錄)’을 지었다. 그 한 조목에,

“해중(海中)에 금산사(金山寺)가 있는데, 목욕재계를 하고, 금(金)의 수량을 원하고서, 배를 타고 캐어 오는데, 원한 수량보다 조금이라도 많으면 돌아오는 배는 반드시 파선(破船)이 된다고 한다.”

하였다. 그곳은 하이(蝦夷)에 접해 있고, 끝없이 광막(廣漠)해서 왜국의 전부가 한 주(州)의 길이와 넓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곳까지의 도로 통행처는 54군(郡)이 된다. 산에 사는 오랑캐는 스스로 부락을 이루고 있는데, 명령하고 통제(統制)하는 자가 없다. 그곳은 또 54군의 길이보다 더 길었다. 그 사람들은 장대(長大)하고 몸에는 털이 났는데, 왜인들은 ‘하이’라고 부른다. 오주(奧州)의 평화천(平和泉)으로부터 하이의 사이에 있는 바다까지는 겨우 30리다. 왜의 이수이다. 혹은 말하기를, ‘하이는 곧 우리나라 야인(野人)들이 사는 땅인데, 문어(文魚)ㆍ초피(貂皮) 등의 물건이 많이 산출(産出)된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왜노(倭奴)들이 늘 말하기를,

“오주로부터 바로 조선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에 닿아, 그 길이 아주 가까우나, 북해(北海)는 바람이 매서워서 건너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한다. 말은 괴탄(恠誕)스러우나 우선 갖추 기록하여 전의(傳疑 고사의 의심스러운 점을 그대로 전함)하는 예(例)를 본받는다.



▣조완벽(趙完璧)의 일본ㆍ안남국 여행기-이수광

조생 완벽(趙生完璧)은 진주(晉州)의 선비였다. 약관(弱冠)으로 정유왜변(丁酉倭變 1597, 선조 30)을 만나 사로잡혀서 일본으로 갔었고, 왜인의 상선(商船)을 따라 안남국(安南國)을 세 번이나 왕래했다.

안남국은 일본에서 해로(海路)로 3만 7천 리나 떨어져 있다. 일본의 살마주(薩摩州)에서 바다로 가면 해수(海水)는 서쪽이 높고, 동쪽은 낮다. 주야로 50~60일 가야 안남국의 흥원현(興元縣)에 닿는다. 그곳은 아주 따뜻하고 논에 경종(耕種)을 아무 때나 해서, 3월에 처음으로 경종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농사가 다 되어 곡식이 익으려 하는 것도 있고, 수확하려는 것도 있다. 뽕[桑]은 매년 밭에 심어서 누에를 친다. 목화 나무가 있는데 높고 커서, 꽃은 작약(芍藥)꽃 만하여,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딴다. 과일로는 귤(橘)ㆍ여자(荔子) 외에는 다른 과일이 없다. 곶감을 주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빈랑(檳榔 야자과에 속하며 아시아 열대 지방에서 산출됨)을 늘 먹고, 목이 마르면 사탕풀[蔗草]을 씹는다. 그 사람들은 장수(長壽)해서, 1백 20세의 노인이 있기도 한데, 머리가 희었다가 다시 누렇게 되니, 이른바 ‘황구(黃耈)’라는 것이다.

그 뒤 10여 년에, 조완벽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의 노모와 아내는 다 함께 아무 탈이 없었다. 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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