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1712-1791)
서언 : 東史綱目을 읽기 시작해보니 실로 방대한 책이다. 기록하고 싶은 것만 간추려가며 정리한다 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분량 역시 대단할 듯싶다. 찬찬히 읽어가면서 중요한 내용만 정리해보고 여러 차례로 나누어 올리고자 한다.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서우(瑞雨)이고, 아버지는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벼슬이 주로 외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제천·울산·영광·무주·한양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736년(영조 12)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그뒤 이곳에 거주하면서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분석하고 〈치통도 治統圖〉·〈도통도 道統圖〉 등을 저술하는 등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다. 1746년 이웃 고을인 안산에 살던 이익(李瀷)을 만나 경세치용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이듬해 만녕전참봉으로 첫 벼슬에 올랐다. 1751년 의영고참사, 이어 정릉직장·귀후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45세 되던 해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쓰기 시작해 1759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20여 년 간 이익·윤동규(尹東奎) 등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177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는 익위사익찬이 되었고, 4년 뒤 정조가 즉위하자 목천현감을 지냈다. 그뒤 돈녕부주부·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790년(정조 14)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으나, 그가 맡은 직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령에 따른 예우로 받은 산직(散職)이었다.
사상
안정복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으로는 지주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신분제가 변질되는 한편, 주자학적·중화주의적 세계관이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스승인 이익을 비롯하여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황의 주자 해석에 따라 이기이원론의 설을 계승하고, 유형원·이익의 수기치인(修己治人)·경세치용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하학지남 下學指南〉의 편찬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당시 학자들의 '먼 것에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공자가 말한 하학상달(下學上達)의 방법론을 취하여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물로부터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실학자들이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던 서학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해서는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을 통해 불교와 비슷한 이단으로서 배척했다. 이는 실학자이면서도 주자의 정통론에 기울어 있던 그의 사상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전(井田)을 연구하면서 민산의 균등화를 추구하는 토지개혁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환곡제도를 없애고 관권이 배제된 가운데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이를 자치적으로 운영하자는 적극적인 사창론(社倉論)을 제기했다. 그가 현실적인 개혁론으로서 제기했던 토지제도 개혁론은 기존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한 위에서 토지소유 규모의 상한선을 정하고 부농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농업문제의 해결 방향을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에서보다는 증산(增産)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사창론도 기존의 환곡제도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개선을 주장했다. 결국 안정복이 가졌던 현실적인 개혁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부분적인 제도개혁과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역사인식
양란 이후의 조선 봉건사회의 동요는 역사인식의 분야에서도 종래의 전통적인 역사인식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인식경향을 낳았다. 특히 이익은 화이관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자국사를 서술할 것을 주장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동사문답 東史問答〉·〈열조통기 列朝通紀〉 등의 역사서를 통해 이익의 사론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세가로 서술하는 종래의 편찬태도를 비판하고 본기로서 독자적으로 다룰 것을 주장했다. 한편 단군조선을 우리나라 정통왕조의 시작으로 설정하여 국사의 상한을 중국과 대등하게 끌어올렸으며, 종래 역사가들이 중국문헌이라면 별다른 검토 없이 믿어온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가능한 모든 사료를 수집하여 이를 철저히 고증하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한편으로는 주자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전통적인 역사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점은 그의 대표적인 역사서 〈동사강목〉이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801년(순조 1) 좌참찬에 추증되고, 1871년(고종 8) 문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서(序)
동방의 역사도 갖추어 있다. 기전체(紀傳體)로는 김 문열(金文烈 문열은 김부식(金富軾)의 시호)의 《삼국사기》와 정문성(鄭文成 문성은 정인지의 시호)의 《고려사》가 있고, 편년체(編年軆)로는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와 최금남(崔錦南 금남은 최 보(崔溥)의 호)의 봉교찬(奉敎撰)인 《동국통감》이 있고, 이를 따라서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과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이 있으며, 초절(抄節)한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畧)》과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의 책이 있어 빈빈하게 성하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소략하면서 사실과 틀리고, 《고려사》는 번잡하면서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은 의례(義例)가 어그러짐이 많고, 《여사제강》과 《동사회강》은 필법이 혹 어그러진 것이 있다. 오류로 인하여 오류를 답습하고 잘못으로 잘못 전한 것에 이르러서는 여러 역사서가 비슷하다. 내가 그것을 읽고는 개연히 바로잡을 뜻이 있어, 동국의 역사 및 중국의 역사에서 동국의 일에 언급한 것을 널리 가져다가 산절(刪節)하여 책을 만들되, 일체 자양(紫陽)이 이루어 놓은 법을 따라 사삿집의 상자에 잘 간직해 두고 고열(考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뿐이요, 감히 찬술로 자처한 것은 아니다.
대저 역사가의 대법(大法)은 통계(統系)를 밝히고, 찬역(簒逆)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忠節)을 포양하고, 전장(典章)을 자세히 해야 하는 것인데, 여러 역사책이 여기에 실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으므로 약간 손질을 가하고, 오류가 심한 것에 있어서는 별도로 부록(附錄) 2권을 만들어 아래에 붙여 놓았다.
책이 이루어진 지 20여 년이 되도록 정서하지 못하였더니, 병신년(1776, 영조 52) 겨울에 호남의 수령으로 나가서, 공무를 보는 여가에 비로소 1본(本)을 쓰고, 이어서 그 사유를 적어 가숙(家塾)의 자제에게 준다.
성상 즉위 3년 무술(1778, 정조2) 2월 1일
목주(木州)의 용회당(用晦堂)에서 한산(漢山) 안정복(安鼎福) 씀
▣동사강목 제1상
기묘 조선 기자(箕子) 원년부터, 기미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26년,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15년, 백제 초고왕(肖古王) 14년까지 1301년간
■기묘년 조선 기자 원년(주(周) 무왕(武王) 13, B.C. 1122)
○은(殷)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오니, 주(周)의 천자(天子)가 그대로 그곳에 봉(封)하였다.
기자는 성이 자(子)이고 이름이 서여(胥餘)이며, 은 주(紂 주왕)의 친척이다. 기(箕)에 봉하여지고 자작(子爵)을 받았으므로 ‘기자’라고 부른다. 《사기(史記)》 주(註)에 “기는 국명이고 자는 작호이다.” 하였고, 《일통지(一統志)》에 “서화(西華)는 옛 기 땅이며, 개봉부성(開封府城 : 개봉부는 하남성(河南省)에 있다) 서쪽 90리에 있다. 예전에 성사(聖師 : 자기를 가리킨다)가 기를 식읍(食邑)으로 하였으므로 그를 기자라고 부르며, 지금 읍내(邑內)에 기자대(箕子臺)가 있다.” 하였다. 기자가 은에 벼슬하여 태사로 있을 적에 주가 음란하므로 간(諫)하였으나 주가 듣지 않고 가두니, 기자가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노(奴)가 되어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슬퍼하였다. 주(周) 무왕(武王)이 주를 치고 은에 들어와서,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갇힌 기자를 풀어 주게 하였다. 무왕이 은이 망한 까닭을 물었으나 기자가 차마 말하지 않았고, 왕이 이어서 천도(天道)를 물으니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진술하였다. 《사기(史記)》ㆍ《서전(書傳)》에 보인다 기자가 주에 의하여 풀려 난 것을 부끄러이 여겨 조선으로 달아나니, 무왕이 듣고서 조선을 그에게 봉하되 홍범(洪範)의 대전(大傳)에 보인다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사기》에 보인다.
○ 동방에는 예전에 임금이 없더니,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매, 백성이 군(君)으로 세우니, 이 이가 단군(檀君)이다. 혹 이르기를 ‘이름은 왕검(王儉)이고 국호는 조선이라 하였는데, 당(唐) 요(堯) 25년(무진)과 같은 때이었다.’ 한다.
단군이 백성에게 편발(編髮 머리를 땋다)과 개수(蓋首 모자를 쓰다)를 가르쳤으며, 군신(君臣)ㆍ남녀ㆍ음식ㆍ거처(居處)의 제도가 이때에 비롯하였다. 처음에 기주(冀州) 동북 땅에 동이(東夷)가 살았는데, 요(堯)의 덕이 널리 입혀지매 모두 귀화하여 그들의 피복(皮服 가죽옷)을 공물(貢物)로 바쳤다. 순(舜)이 섭정(攝政)할 때에 유주(幽州)ㆍ영주(營州) 두 고을을 두어 동이들을 여기에 붙였다.
하(夏)의 우(禹 우왕)가 즉위하여 제후(諸侯)를 도산(塗山)에서 조회(朝會)시킬 적에, 단군이 아들 부루(夫婁)를 보내어 들어가 조회하게 하였고, 상(商 19대 반경(盤庚) 때에 국호를 은(殷)으로 고쳤다)의 왕 무정(武丁 22대) 8년(갑자)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재위(在位)는 1천 17년간이고 수(壽)는 1천 48세이었다고 한다.
○ 단군이 처음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백악(白岳)으로 옮겼고, 단군이 죽은 뒤 196년 이 햇수는 단군의 자손에 관계되는 것이라야 마땅하다 에 기자가 동방에 봉하여졌다.
○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 성곽(城郭)을 쌓았다.
○ 8조목의 교훈[八條之敎]를 베풀었다.
기자가 올 적에 따라온 중국 사람이 5천이었다.
그 안에 시서(詩書)ㆍ예악(禮樂)ㆍ의무(醫巫)ㆍ음양(陰陽)ㆍ복서(卜筮)의 무리와 온갖 공장이의 기예(技藝)있는 자들이 따라 왔는데, 처음 와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하여 그것을 알렸다.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와 부자ㆍ군신의 도리를 알게 하였고, 법금 8조[禁八條]를 두었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고, 남을 다치면 곡식으로 갚고, 남의 것을 훔치면 사내는 잡혀 가서 그 집의 노(奴)가 되고 계집은 비(婢)가 되는데, 스스로 속(贖 재물을 내고 형벌을 면하다)하려면 사람마다 50만 금을 바친다.”
그러나, 노비가 되는 것을 면하여 양민(良民)이 되더라도 세속이 그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므로 혼인에 배필이 되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백성은 훔치지 않으므로 밤에 문을 걸어 닫는 일이 없었으며, 아낙네는 곧고 성실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그 백성은 음식을 변두(籩豆)에 담아 먹었다. 신의와 겸양을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독실하여 중국의 풍교(風敎)를 자아내어, 전쟁을 좋아하지 않고 거세고 사나운 것을 덕으로 복종시키니, 이웃 나라가 모두 그 의리를 사모하여 따랐으며, 의관(衣冠)의 제도가 다 중국과 같았다.
○ 전제(田制)를 정하고, 백성에게 전잠(田蠶)을 가르쳤다.
기자가 은의 전제를 쓰고, 백성에게 농사짓고 누에 치고 베 짜는 방법을 가르치매, 3년이 못 가서 백성이 다 향화(向化)하고, 예속(禮俗)이 행하여져서 흥작(興作)하여, 조야(朝野)가 무사하니, 백성들이 기뻐서 도읍의 강을 황하(黃河)에 견주고 도읍지의 산을 숭산(嵩山)에 견주어 곧 대동강(大同江)과 영명령(永明嶺)이다 노래를 지어서 그 덕을 기렸다.
■임오년 기자 4년(주 무왕 16 B.C. 1119)
※원본은 오류로 119로 표기 됨
○기자가 주에 조빙(朝聘)하였다.
기자가 소차(素車 흰 수레)에 백마(白馬) 은 사람은 흰 색을 숭상하였다 로 주에 조빙하는 길에 은의 옛 도읍터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벼와 기장이 난 것을 보고 느껴 개탄하였다. 기자가 상심되었으나, 목놓아 울자니 옳지 않고, 소리 죽여 울자니 아낙 같은 짓이 되므로, 맥수시(麥秀詩)를 지어 불렀다.
보리 자라 무성타 / 麥秀漸漸兮
벼와 기장 기름져 / 禾黍油油兮
교활한 그 아이는 / 彼狡童兮
나를 좋아 않더니 / 不與我好兮
교활한 아이란 주(紂)를 뜻한다. 은 사람이 이를 듣고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죽서기년(竹書紀年)》ㆍ《사기(史記)》에서 보충
송(宋)의 증공(曾鞏)은 이렇게 적었다.
“무왕이 상(商)을 이기고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으니, 주에 조빙하였다는 것을 주에 손으로 갔다는 뜻이다.”
■무오년 기자 40년(주 성왕(成王) 30, B.C. 1083)
◯기자가 훙(薨)하였다.
수(壽)는 93이었고, 평양 북토산(北兎山)에 장사 지냈다. 변씨(卞氏) 계량(季良) 은 이르기를,
“기자는 무왕의 스승인데, 무왕이 다른 지방에 봉하지 않고 우리 조선에 봉하매, 조선 사람이 가까이 가르침을 받아, 군자는 대도(大道)의 요체를 듣고 소인은 지극한 다스림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으므로, 그 교화로 길에서 흘려 있는 물건을 줍지 않게까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동방에 은혜를 두텁게 하여 인현(仁賢)을 내려 주어 우리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것이며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바가 아니랴! 정전(井田)의 법제와 8조의 규약이 해와 별처럼 밝아서, 우리 나라 사람이 대대로 그 가르침에 따르되 천년 뒤에는 그때에 나서 엄숙하게 신명을 대하듯이 절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술년 연대ㆍ기년(紀年)미상(주 경왕(敬王) 41, B.C. 479)
◯공자(孔子)가 노(魯)에서 졸(卒)하였다.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주(周)의 왕실이 미약해져서 제후(諸侯)가 강한 것을 서로 다투니, 공자가 천하에 어진 임금이 없는 것에 상심되어 탄식하여 말하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떼를 타고 바다를 건너겠다.”
하고, 또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 하니, 어떤 사람이,
“미개한 곳인데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하매, 공자가,
“군자가 그곳에 사는데 어찌하여 미개하겠느냐!”
하였다.
■무술년 조선 연대ㆍ기년 미상(주 현왕(顯王) 46, B.C. 323)
◯연(燕)의 백(伯)이 왕을 참칭(僣稱)하매, 조선의 후(侯)가 치려 하다가 수행하지 못하고, 또한 왕이라 칭하였다.
기자가 훙하고서, 자손이 대대로 동방의 군(君)이 되었으나,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연의 역왕(易王)이 왕호를 참칭하고 동으로 와서 땅을 침략하려 하매, 조선후가 군사를 일으켜서 연을 치고 존주(尊周 주 왕실을 높이 받들다) 하려 하였으나,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諫)하므로, 중지하고 예를 시켜서 서쪽으로 가서 연왕을 타이르게 하니, 연도 중지하고서 공격하지 않았는데, 조선후가 또 왕이라 칭하였다.
■경진년 조선 연대ㆍ기년 미상(진(秦) 시황(始皇) 26, B.C. 221)
◯왕(王) 비(否)가 진에 복속하고서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조선이 왕을 칭하자, 그 뒤로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하여졌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전에 동호(東湖)에 볼모로 가 있을 적에 동호가 그를 매우 믿었는데, 돌아가서는 동호를 엄습하여 격파하고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서 만번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어서는 비가 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는 기자의 40세손인데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임진년 왕 준 12년(진 이세(二世) 원년, B.C. 209)
◯연(燕)ㆍ제(齊)ㆍ조(趙)의 백성이 투탁(投托)하여 왔다.
처음에는, 연이 전성(全盛)하였을 때에 진번(眞番)ㆍ조선(朝鮮)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서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었는데, 진이 연을 멸망시키고서 요동(遼東) 외요(外徼 변방 나라)에 붙였다. 이세(二世)가 즉위하고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매, 연ㆍ제ㆍ조의 백성이 점점 도망하여 조선에 귀화한 자가 수만 구(口)였다.
■기해년 왕 준 19년(한 고제 5, B.C. 202)
◯한과 패수(浿水)로 경계가 되었다.
한이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연이 쌓은 장새(障塞)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동(遼東)의 옛 장새를 수리하고서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왕 준 26년(한 고제 12, B.C. 195)
◯연(燕) 사람 위만(衛滿)이 항복하여 오니, 박사(博士)를 제배(除拜)하고서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한의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凶奴)로 들어가매, 위만이 망명하여 천여 인의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이(夷)의 옷을 입고서 동으로 달아나 장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와서 항복고, 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있는 옛 진(秦)의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면서, 망명하여 온 자들과 함께 이 나라의 번병(藩屛 울타리. 변방의 나라)이 될 것’을 바라니, 왕이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를 제배하고 규(圭)를 주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왕 준 28년 조선 왕 위만 원년(한 혜제(惠帝) 2 B.C. 193)
◯위만이 배반하여 왕도(王都)를 엄습하매, 왕이 남으로 달아나니, 위만이 조선왕이라 칭하고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있으면서 망명한 무리들을 꾀어서 점점 많아지매 사람을 왕에게 보내여 ‘한(漢)의 군사가 열 갈래의 길로 온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들어가 숙위(宿衛) 하기를 청하고, 드디어 도리어 왕을 공격하였다. 왕이 위만과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하고, 좌우(左右)와 궁인(宮人) 및 나머지 무리 수천 인을 거느리고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馬韓)에 가니, 기자(箕子)로부터 준(準)까지 41세(世)이며 모두 9백 30년을 지내고서 나라를 잃었다.
○ 위만이 조선을 격파하고 점점 진번ㆍ조선의 제이(諸夷)와 옛 연ㆍ제에서 망명하여 온 자들을 종속시켜서 그들의 왕이 되고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마침 효혜(孝惠 한(漢) 혜제(惠帝))ㆍ고후(高后 한 고조(高祖)의 후) 때에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므로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아서 변방 밖을 지키게 하매, 그 때문에 위만이 병권과 재물을 얻게 되어 곁에 있는 작은 고을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ㆍ임둔이 다 복속해 와서 지방이 수천 리가 되었다.
○ (준)왕이 마한(馬韓)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군(益山郡) 에 도읍하였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니,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益山) 오금사봉(五金寺峰)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였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준(準)이 마한에서 임금 노릇을 하면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으며, 그 아들ㆍ벗ㆍ친족으로서 나라에 머물러 있던 자가 성(姓)을 한씨(韓氏)라고 고쳤다.
※ 쌍릉은 대체적으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여겨 왔으나 위 글에 근거하여 한씨들은 준왕묘로 여겨왔다. 2018년 현재 최근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대왕릉은 무왕의 무덤임이 확실시 되고 있으나 소왕릉은 선화공주가 아닌 정실왕비인 사택왕비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믿는다. 무왕은 고향인 익산에서 정실왕비 아닌 신라출신 선화공주와 왕궁을 짓고 남방정책을 추진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참고로 大韓帝國의 韓자는 바로 저 한에서 나온 것이며 바로 마한을 일컬음이라 할 수 있고 당연히 大韓民國의 韓자도 저 <馬韓>에서 나온 것이다.
■마한 위씨 조선(衛氏朝鮮)(한무제(武帝)원삭(元朔) 원년, B.C. 128)
◯가을 예(濊)의 군(君) 남려(南閭)가 한(漢)에 항복하니, 한이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다.
예도 조선의 땅이다. 한이 팽오(彭吳)를 시켜 길을 열어 예맥(濊貊)ㆍ조선(朝鮮)에 통하게 하였는데, 예의 군 남려가 남녀 28만 구(口)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內屬)하니,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
■마한 위씨 조선(한 무제 원삭 3 B.C. 126)
◯한이 창해군을 파하였다.
한의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이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쓸모 없는 땅을 돕는 것을 파하자고 간(諫)하여서 파하였다.
■마한 조선왕 우거(右渠)(한 무제 원봉(元封) 2, B.C. 109)
◯조선왕 우거(右渠)가 한의 요동도위(遼東都尉) 섭하(涉何)를 죽였다.
위만이 졸(卒)하매,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손자 우거 때에는 한에서 도망 온 사람을 더욱 많이 꾀었고, 또 중국에 들어가 천자에게 뵈지도 않고,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뵈려 하여도 막고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해에 한의 사신 섭하가 우거를 달래었으나, 끝내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다가 국경인 패수(浿水)가에 이르러, 말몰이꾼을 시켜 하를 전송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강을 건너 새(塞)로 달려 들어갔다. 드디어 돌아가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니, 무제(武帝)가 그 명분을 아름답게 여겨 꾸짖지 않고서 하에게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제배(除拜)하였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습공(襲攻)하여 하를 죽였다.
◯하6월 한이 조선을 정벌하였다.
무제가 천하의 사죄인[死罪]을 모아서 군사를 만들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뜨게 하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어 요동을 나가게 하였다.
【안】우리 동방은 삼면이 바다로 둘려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연결됐으니, 참으로 사면에서 적을 받을 나라이다. 동과 남은 바다를 거쳐서 왜(倭)의 땅과 가까우므로 배를 타고 침략해 오면 이르지 못할 곳이 없으며, 또 중국과 화목하지 못한다면 육지로는 요갈(遼碣 요동으로부터 감석(碣石)에 이르는 지역 일대)로부터 오고 바다로는 발해를 거쳐서 올 것이니, 수(隋)와 당(唐)의 일을 거울삼을 만하다.
이런 뜻을 안다면, 바다를 막고 변방을 지키는 계책에 더 유의하고, 그들과 말썽을 일으켜서 변란을 가져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마한 이 해에 위씨조선이 망하였다 (한 무제 원봉 3, B.C. 108)
◯춘3월 한군(漢軍)이 왕검성(王儉城)을 포위하니, 여름에 조선 사람들이 저희 군(君)인 우거(右渠)를 시해(弑害)하고 나와서 항복하였으며, 대신(大臣) 성기(成己)는 죽으니, 위씨가 망하였다.
한군이 조선 국경을 넘어 들어오니, 조선왕 우거가 군사를 발하여 험새(險塞)을 막았다.
양복이 제(齊)의 군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매, 우거가 성에서 지키면서 양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곧 성을 나가 양복을 공격하니, 양복의 군사가 패하여 흩어져서 산속으로 도망하였다가 10여 일만에 퇴산(退散)한 병졸을 조금 찾아 다시 모았다. 순체는 조선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쳤으나 깨뜨리지를 못하였다.
천자가, 두 장수가 유리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서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에 의지하려 우거에게 가서 달래게 하니, 우거가 사자를 보고 돈수(頓首)하며 사례하기를,
“항복하려 하였으나, 두 장수가 속이어 신(臣)을 죽일까 두려웠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므로 다시 항복합니다.”
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들어가 사례하고 말 5천 필과 군량을 바치게 하매, 무리 만여 명이 병기를 가지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와 순체가 변란이 생길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사람들이 병기를 가지지 말게 하시오.”
하므로, 태자도 사자와 순체가 속여서 죽일까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베었다.
순체가 수상군(水上軍)을 격파하고 곧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서쪽과 북쪽을 포위하고, 양 복도 성 남쪽에 가서 모이니, 우거가 드디어 성을 굳게 지켜서 두어 달 동안이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순체가 거느린 연(燕)ㆍ대(代)의 병졸은 굳세고 사나운 자가 많았으나, 양복이 거느린 제(齊)의 병졸은 이미 패망의 곤욕을 맛보았으므로, 병졸들은 다 두려워하고 장수는 마음에 부끄러웠다.
우거를 포위하게 되어서도 늘 화해하려는 태도를 가졌으나, 순체는 급하게 공격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대인(大人)이 몰래 사람을 시켜서 양복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 양복도 왕래하며 말하였으나, 아직 결단하려 하지 않았다. 순체가 자주 양복에게 함께 싸우자고 하였으나, 양복이 조선 대인과의 약속을 추진하려 하여 그를 만나지 않았다.
순체도 사람을 시켜 틈틈이 조선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양복에게 붙으려고 생각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장수가 서로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안】 예로부터 두 장수가 출사(出師)하여 먼 지역에서 훈공(勳功)을 차지하려 하고서도 화목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이 능히 이간하니, 두 장군이 끝내 그 공명(功名)을 보존하지 못하였다.
순체가 마음속으로 ‘양복에게는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이제는 조선과 몰래 잘 지내어 항복받지 못하니, 아마도 그가 배반할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감히 발설하지는 않았다. 천자가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서도 의견이 달라서 싸움이 오래도록 결단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제남 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가서 치되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공손수가 이르니, 순체가 말하기를,
“조선을 마땅히 항복받았을 것인데 오래도록 항복받지 못한 것은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자주 기약에 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평소에 생각했던 일들을 갖추어 고하면서 ‘지금 이와 같이 취하지 않으면 아마도 큰 해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공손수도 그렇게 여기고, 곧 절(節)로써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영에 들어와 일을 계획하라 하고는, 순체의 휘하에게 명하여 양복을 잡게 하고 그 군사를 합병하고서,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공손수를 베어죽였다.
순체가 두 군사를 병합하고 나서 곧 급히 조선을 공격하니, 조선의 재상[相] 노인(路人)ㆍ한음(韓陰)과 이계(尼谿)의 재상 삼(參) 상고하니, 이계는 예(濊)의 반절(反切)이다 과 장군 왕협(王唊)이 서로 꾀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잡혔고, 홀로 좌장군이 양군(兩軍)을 아울러 거느렸으니, 앞으로 싸움이 더욱 급해지려니와 아마도 그들과 싸워 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살피건대, 우거는 나라를 망친 임금일지라도 또한 등한한 사람이 아니었다.
음ㆍ협ㆍ노인이 다 도망하여 한(漢)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길에서 죽었었다.
여름에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서 우거를 죽이고 한에 항복하니, 위만으로부터 우거까지가 무릇 3세, 86년 만에 망하였다.
허씨 목(穆) 는 이렇게 적었다.
“위만이 인(仁)과 덕(德)은 쌓고 베푼 것이 없이 한갓 망명한 사람들을 속이고 왕 준(準)을 쫓아내고서 나라를 빼앗아 아울렀으니 매우 의롭지 못하거니와, 2세를 지내고서 멸망하였으니 갑자기 얻은 자는 갑자기 망하는 것이다.
어찌 전세(傳世)가 장구하여, 단군ㆍ기자와 같으랴!”
○ 조선이 이미 항복하였으나, 왕검성(王儉城)만은 항복하지 않고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다시 한의 관리를 공격하니, 순체가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재상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서 백성에게 고유(告諭)하여 성기를 죽이게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였다. 《한서》에서 보충
【안】 이때에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사망하고 대신들이 다 안으로부터 배반하였으나, 성기는 홀로 몸을 아끼지 않고 분연히 굳게 지켰으니, 노인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 살기를 탐낸 데에 비하면 충절이 위대하여, 후세의 신하에게 권장이 될 만하다.
《한서》에 ‘성기가 배반하여 다시 관리를 공격하였다.’ 하고, 또 ‘성기를 주살(誅殺)하였다.’ 하였으나, 이것은 적국에 대한 말이므로 필법(筆法)이 그렇거니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그대로 써서, 참으로 죄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한이 조선을 갈라서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현도(玄菟)ㆍ진번(眞番)의 4군(郡)으로 만들었다.
낙랑은 조선현(朝鮮縣) 지금의 평양부(平壤府) 에, 임둔은 동시현(東暆縣) 지금의 강릉부(江陵府) 에, 현도는 옥저성(沃沮城) 지금의 함경남도 에, 진번은 재삽현(在霅縣) 호(胡) 땅에 있으나, 지금은 미상 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삼(參)을 획청후(澅淸侯)땅은 제(齊)에 있다 로, 음(陰)을 적저후(狄苴侯)땅은 한(漢)의 발해(渤海郡)에 있다 로, 협(唊)을 평주후(平州侯) 태산(泰山) 양보현(梁父縣)에 있다 로 장(長)을 기후(幾侯) 땅은 하동(河東)에 있다 로, 최(最)는 아비가 죽었고 자못 공도 있으므로 날양후(涅陽侯) 남양군(南陽郡)에 있다 로 봉(封)하였다. 순체(荀彘)를 불러들여, 공을 다투어서 서로 시기하여 계책을 어그러뜨린 죄로 기시(棄市 사형에 처하여 주검을 저자에 버리는 것)하고, 양복(楊僕)도 군사가 열구(列口)《지리고(地理考)》에 보인다 에 이르면 순체를 기다려야 하는데도 마음대로 먼저 출동하여 군사를 많이 잃은 죄로 죽어야 마땅하나, 속(贖 금품을 내고 벌을 면하다)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사군이 내속(內屬)된 뒤로부터 요동에서 관리를 가려 보내매, 그 관리들은 백성이 문을 닫거나 물건을 감추지 않는 것을 보았었는데, 중국의 장사꾼이 가서는 밤이면 도둑이 되매 풍속이 점점 박해져서, 범금(犯禁)이 많아져 60여 조목에 이르니, 인현(仁賢)의 교화가 변하였다. 한의 반고(班固)는 이렇게 적었다.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 남ㆍ서ㆍ북의 세 지방)의 오랑개와 다르므로, 공자가 도(道)가 행하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떼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서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였으니,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기해년 마한(한(漢) 소제(昭帝) 시원(始元) 5, B.C. 82)
◯한이 진번군을 폐지하고, 현도군을 고구려에 옮기고, 임둔군을 낙랑군에 합쳤다가 곧 낙랑에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처음에는 한이 옥저(沃沮) 땅을 현도의 군치(郡治)로 삼았었는데, 이맥(夷貊)에게 침략받으매 고구려 한(漢)의 고구려현은 지금 심양(瀋陽)의 봉천부(奉天府) 북쪽에 있었다 에 도읍을 옮기고, 단대령(單大領) 지금의 철령(鐵嶺) 이동의 옥저ㆍ예맥(濊貊)은 모두 낙랑에 붙이더니, 뒤에 경토(境土)가 넓으므로 다시 낙랑의 영동(嶺東) 7현을 갈라서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不耐城) 지금의 영동(嶺東)에 있으나 미상 에 치소를 두었다.
■임술년 마한(한 선제(宣帝) 신작(神爵) 2년, B.C. 60)
◯부여(扶餘)의 군(君) 해부루(解夫婁)가 도읍을 동으로 옮겼다.
부여국(扶餘國)은 현도(玄菟) 북쪽 천리에 있었다. 그 선대는 알 수 없는데, 혹 “단군의 후손이 북쪽으로 옮겨 부여국이라 하고, 해(解)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처음에 그 왕 해모수(解慕漱)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일컬었고, 또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며, 아들 부루(夫婁)를 낳았다. 부루가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매 백제(百濟) 시조 온조(溫祚)가 부루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들이라고 하니, 여기에 아들이 없다고 한 것은 의심스럽다. 동사(東史)의 착란(錯亂)하여 밝힐 수 없음이 대개 이와 같다. 산천에 제사하여 후사(後嗣)를 구하였더니,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 지금 호(胡)의 땅에 있었으나 미상 이르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으므로, 기뻐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다.”
하고, 곧 거두어 길러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국상(國相)이 부루에게 말하기를,
“동해(東海) 가에 흙이 기름져서 오곡을 심기에 알맞는 땅이 있으니 도읍 할 만합니다.”
하고, 드디어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기고서, 또 동부여(東夫餘)라 일컬었다.
■갑자년 마한 신라 시조박혁거세 원년(한 선제 오봉(五鳳) 원년, B.C. 57)
◯하4월 진한(辰韓)의 육부(六部)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군(君)으로 세우고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하였으며, 국호를 사로라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동해(東海) 가 산골짜기에 나뉘어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었는데,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突山高墟)ㆍ자산진지(觜山珍支) 간진(干珍)이라고도 한다 ㆍ무산대수(茂山大樹)ㆍ금산가리(金山加利)ㆍ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이며 이것이 이른바 진한의 육부이다. 육부의 기로(耆老)가 알천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다.
“우리의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일(放逸)하니, 어찌 덕있는 이를 구하여 임금을 삼지 않을 수 있으랴!”
이때에 양산부에 지덕이 뛰어나고 조숙하여 신성한 자질이 있는 박혁거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육부 사람들과 함께 그를 추대하였다.
이해 4월 병진(丙辰)에 그를 임금으로 세웠는데, 그때 나이는 13세이고 거서간이라 불렀으며, 국호를 사로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을 뜻하는데, 귀인의 호칭이라고도 한다.
■마한 신라 시조 5년(한 선제 감로(甘露) 원년, B.C. 53)
◯춘정월 사로(斯盧)가 알영(閼英)을 비(妃)로 세웠다.
알영은 왕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자라서는 덕용(德容)이 있었는데, 왕이 듣고서 맞아다가 비로 삼았더니, 어진 행실이 있어 능히 내조(內助)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二聖]이라고 하였다.
■마한 신라 시조 22년 고구려 시조 2년(한 원제 건소 3, B.C. 36)
◯하6월 비류국(沸流國)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비류국은 비류수(沸流水)의 상류에 있다. 고구려 임금이 사냥하러 갔다가 그 나라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 임금 송양(松讓)이 나와 보며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서 여러 대를 임금 노릇하였는에,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용납할 수 없고,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 되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되라.”
하니, 주몽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서로 말로 따졌고, 또한 서로 활쏘기를 하여 기예(技藝)를 겨루니, 송양이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때 국가가 새로 창업(創業)하여 의위(儀衛)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따라간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비류국의 고각(鼓角)을 가져 가자고 청하였는데, 주몽이 곤란하게 여기매, 아뢰기를,
“대왕(大王)이 부여에서 곤욕을 받다가 꼭 죽을 것을 살아 나와 이름을 요동(遼東)에 드날렸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무슨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가서 가져 오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했고, 날마다 주몽이 점점 강대해짐을 두렵게 여겨 나라를 가지고 와 항복하니, 그 지역에다가 봉(封)하여 다물후(多勿侯)를 삼았다. ‘다물’은 고구려 말로 복토(復土)라는 뜻이다.
■마한 신라 시조 26년,고구려 시조 6년(B.C. 32)
◯동10월 고구려가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취하였다.
행인국은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신하 오이(烏伊)ㆍ부분노(扶芬奴)를 보내어 그 땅을 취하고 성읍(城邑)을 삼았다.
■마한 신라 시조 31년 고구려 시조 11년(한 성제 하평 2, B.C. 27)
◯동11월 고구려가 북옥저(北沃沮)를 멸하였다.
북옥저의 또 한 가지 명칭은 치구루(置溝婁)인데, 읍루(邑婁)의 남쪽에 있다. 고구려가 장수 부위압(扶尉厭)을 보내어 멸하고, 그 땅으로써 성읍(城邑)을 삼았다.
■마한 신라 시조 42년, 고구려 유리왕 4년, 백제 시조 3년(B.C. 16)
◯을사년 마한 신라 시조 42년, 고구려 유리왕 4년, 백제 시조 3년(한 성제 영시(永始) 원년, B.C. 16)
■마한 신라 시조 50년, 고구려 유리왕 12년, 백제 시조 11년(B.C. 8)
◯하4월 낙랑(樂浪)이 말갈(靺鞨)을 시켜 백제의 병산책(甁山柵)을 엄습하여 깨게 했다.
추7월 백제가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책(柵)을 세웠다.
이것은 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마한 신라 시조 52년, 고구려 유리왕 14년, 백제 시조 13년(B.C. 6)
◯추7월 백제가 한성(漢城)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백성을 옮겨다 채웠다.
■마한 신라 시조 60년, 고구려 유리왕 22년, 백제 시조 21년(A.D. 3)
◯동10월 고구려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마한 신라 남해왕(南解王) 원년, 고구려 유리왕 23년, 백제 시조 22년(4)
◯3월 사로(斯盧)의 거서간(居西干 신라 시조의 왕호(王號)) 혁거세(赫居世)가 졸(卒)하고, 7일이 지나 왕비 알영(閼英)이 졸하였다. 태자 남해(南解)가 즉위하여 호칭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고, 원년(元年)을 고쳐 불렀다.
■마한 신라 남해왕 5년, 고구려 유리왕 27년, 백제 시조 26년(A.D. 8)
◯동10월 백제 왕 부여온조(扶餘溫祚)가 침공해 들어와서 왕성을 엄습하여 함락하였다.
온조가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마한이 점점 약해져서 상하(上下)의 마음이 이탈되었으니 형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딴 나라가 그를 합병한다면 순망치한(唇亡齒寒)이 되어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니, 남보다 먼저 그를 취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군사를 내어 거짓 사냥간다 말하고서 가만히 마한을 엄습하여 이를 드디어 합병하였다. 그러나 원산(圓山)ㆍ금현(錦峴) 두 성만은 굳게 지키므로 항복받지 못하였다.
■마한 신라 남해왕 6년, 고구려 유리왕 28년, 백제 시조 27년(9)
◯하4월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이 백제에 항복하니, 마한은 드디어 망하였다.
두 성이 항복하니 그 백성은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마한은 기준(箕準)이 세웠는데, 이때까지 전한 세대(世代)의 수는 사기에 전한 바 없고, 역년(歷年)은 2백 2년이며, 기자(箕子)가 왕조를 전한 것까지 합하면 1천 1백 31년이 된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주(周) 무왕(武王) 기묘년에 기씨(箕氏)를 조선에 봉하여 9백여 년을 지났으며, 기준에 이르러서 남으로 마한에 달아나 50여 국을 통합하여 4군 2부(四郡二府) 시대를 지내는 동안에 전세(傳世)가 2백 년이니, 기씨가 전후에 서로 전승한 것이 1천여 년이다. 전세가 이처럼 오래거늘 아깝게도 고증할 만한 문헌(文獻)이 없다. 지금 마한이 멸망함에 있어서 김부식(金富軾)과 권근(權近) 등은 모두 기군(箕君)의 시종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자와 같은 성덕(聖德)으로 자손이 미약하여 파천(播遷)되었다가 하루 아침에 제사를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 기준(箕準)의 후손은 멸절되었지만 마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 제사를 받드는 이가 있었으며, 마한 사람이 다시 서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하는데 사서에는 전하지를 않는다.
동사강목 제1하
■신라 남해왕 9년, 고구려 유리왕 31년, 백제 시조 30년(A.D. 12)
◯신(新)의 망(莽)이 고구려왕을 낮추어 하구려후(下句麗侯)로 삼았다.
망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匈奴)를 치니, 고구려 군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망이 억지로 보내니,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변방으로 나와 요서(遼西)를 침범하였다.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그들에게 죽으니, 엄우(嚴尤)가 아뢰기를,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위안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드디어 배반할까 두렵고, 반드시 이들에게 부화(附和)하는 부여 족속이 있을 것이니, 이는 큰 우환입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조서를 내려서 치게 하였다. 우가 그들의 장수 비연(丕延)을 꾀어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전하니, 망이 크게 기뻐하고, 고구려왕을 고쳐 ‘하구려후’라 하고서 이를 천하에 포고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침범이 더욱 심하여졌다.
■신라 남해왕 11년, 고구려 유리왕 33년, 백제 시조 32년(A.D. 14)
◯왜(倭)가 사로(斯盧)에 침구하였다.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어 해변의 민호(民戶)를 노략질하게 하므로 6부의 경병(勁兵 강한 군사)을 징발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樂浪)이 사로에 침입하였다.
낙랑은 왜가 사로에 침구한 것을 듣고, 그 허술한 것을 틈타 급히 금성(金城)을 공격하였으나, 밤에 유성(流星)이 낙랑 진영에 떨어지자 사람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閼川)경주부(慶州府) 동쪽 5리(里)에 있으니, 지금 동천(東川) 에 주둔하였다가 돌무더기[石堆]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육부의 군사 1천 인이 이를 추격하다가 돌무더기를 보고 적이 많은 줄 알고 곧 정지하였다.
■신라 남해왕 13년, 고구려 유리왕 35년, 백제 시조 34년(A.D. 16)
◯동10월 옛 마한(馬韓) 장수 주근(周勤)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마한이 망하여 그 땅이 모두 백제에 함몰되니, 옛 장수 주근이 마한을 항복시키려고 군사를 일으켜 우곡성(牛谷城) 지금 미상. 다루왕(多婁王) 때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靺鞨)을 방비하였으니, 그 땅이 마땅히 백제 동북변에 있을 것이다 에 웅거하므로, 왕이 몸소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팍하였다. 근은 군사가 패하자 스스로 목을 매니, 그 시신을 요참(腰斬)하고 그 처자까지 아울러 죽였다.
■신라 남해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5년, 백제 시조 40년(A.D. 22)
◯춘2월 고구려왕 무휼이 부여를 쳐서 크게 깨뜨리고, 그 임금 대소를 죽였다.
■신라 유리왕 5년, 고구려 대무신왕 11년, 다루왕 원년(A.D. 28)
◯동11월 사로 이사금이 국내를 순행하였다.
왕이 국내를 순행하다가 한 늙은 노파가 굶주리고 얼어서 장차 죽게 된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능히 백성을 양육하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른이로 하여금 살 곳을 잃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하고, 옷을 벗어 주고 음식을 물려주었다.
이어서 유사(有司 담당 관리)에게 명을 내려서 환ㆍ과ㆍ고ㆍ독(鰥寡孤獨)과 늙고 병들어서 능히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급양(給養)하도록 하였으매, 이웃 나라의 백성들로서 이 소식을 듣고 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 사로의 민속이 화평하였었는데, 이해에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이것이 신라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사로에서 비로소 보습[梨耟] 및 장빙고(藏庫氷)ㆍ수레[車乘]를 만들었다.
※환ㆍ과ㆍ고ㆍ독(鰥寡孤獨) :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말한다. 곧 환은 늙고 아내가 없는 홀아비, 과는 늙고 남편이 없는 과부, 고는 어리며 부모가 없는 고아, 독은 늙어서 자식이 없는 늙은이. 《孟子 梁惠王下》
■신라 유리왕 9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백제 다루왕 5년(A.D. 32)
◯하4월 고구려가 낙랑을 엄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에 사냥을 나갔었는데, 낙랑왕 낙랑은 중국의 군(郡)이니 어찌 왕을 칭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대개 삼국 사이에 끼어 그 세력이 왕과 같았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그를 왕이라 호칭한 것이다 최리(崔理)가 나가 다니다가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이 비상함을 보니 어찌 북국(北國 즉 고구려) 신왕(神王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함께 돌아와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호동은 그 여인를 시켜 무고(武庫)에 들어가 병물(兵物 무기류)을 파괴하게 하고, 왕을 권하여 낙랑을 엄습하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크게 몰려오니, 최리가 비록 싸우고자 하나 고각(鼓角)이 모두 파괴되었으므로, 드디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동10월 고구려 왕이 아들 호동을 죽였다.
고구려 왕의 원비가 아들 해우(解憂)를 낳으니, 그는 성품이 모질고 사나왔다.
처음 왕이 갈사왕(曷思王)의 손녀를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아서 호동을 낳으니, 얼굴이 미려하므로 왕이 사랑하여 호동이라 이름하였다. 원비가 맏이[嫡]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왕에게 참소하기를,
“호동이 첩에게 무례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믿지 않았다. 원비는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울며 고하기를,
“대왕께서는 자세히 살펴보소서. 만약 사실이 아니면 첩이 마땅히 복죄(伏罪)하겠습니다.”
하니, 이에 왕이 의심하여 장차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하였다.
호동이 말하기를,
“이는 어머니의 잘못을 드러나게 하여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효도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복검(伏劍)하여 죽었다.
김씨는 이르기를,
“왕이 참소를 믿고 인자하지 못했던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동도 죄가 없을 수 없다. 순(舜)은 작은 매질은 받고 큰 매질에는 달아나 아버지를 불의에 빠뜨리지 않게 하였는데, 호동은 이렇게 하지 않고 죽지 않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작게 삼갈 것을 고집하여 큰 의리에 어두웠던 것이라 할 만하다. 그 신생(申生)에게나 비유할까?”
하였다.
■신라 유리왕 10년, 고구려 대무신왕 16년, 백제 다루왕 6년(A.D. 33)
◯2월 백제가 비로소 벼논[稻田]을 만들었다.
나라 남쪽 주군으로부터 먼저 시작되었다.
■신라 유리왕 14년,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백제 다루왕 10년(A.D. 37)
○겨울 고구려가 낙랑을 엄습하여 멸하였다.
낙랑 사람 5천과 대방(帶方)낙랑의 속현 사람이 사로에 투항하니, 사로가 육부에 나누어 두었다.
■신라 유리왕 15년, 고구려 대무신왕 21년, 백제 다루왕 11년(A.D. 38)
◯가을 백제에 흉년이 들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동10월 백제왕이 동ㆍ서부를 순행하였다. 가난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곡식 2석(石)씩을 주었다.
■신라 유리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백제 다루왕 15년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金首露) 원년, A.D. 42)
◯춘3월 가락(駕洛) 사람이 김수로(金首露) 형제 6인을 세워 군(君)으로 삼고, 가야(加耶)를 나누어 다스렸다.
■신라 유리왕 22년, 고구려 민중왕 2년, 백제 다루왕 18년( A.D. 45)
◯하6월 고구려 동쪽 지방이 장마로 흉년이 들어, 창고를 열어 진급(賑給)하였다.
■신라 유리왕 25년, 고구려 민중왕 5년ㆍ모본왕(慕本王) 원년, 백제 다루왕 21년(A.D. 48)
◯추7월 가락국 임금이 비(妃) 허씨(許氏)를 맞았다.
허씨의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어진 덕이 있었다.
■신라 탈해왕 3년, 고구려 태조왕 7년, 백제 다루왕 32년(A.D. 59)
◯하5월 사로가 왜(倭)와 교빙(交聘)하였다.
【안】 이것이 동사(東史)에서 왜와 화의한 시초이다.
■신라 탈해왕 9년, 고구려 태조왕 13년, 백제 다루왕 38년( A.D. 65)
◯춘3월 사로의 이사금이 김알지(金閼智)를 아들로 삼고, 국호를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신라 파사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48년, 백제 기루왕 24년(100)
◯동10월 계림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백성들 집이 무너져서 죽은 사람도 있었다.
■신라 일성왕 11년, 고구려 태조왕 92년, 백제 개루왕 17년(144)
◯춘2월 계림이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왕이 하령하기를,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 여러 주군은 제방을 수리하고 전야를 개척하라.”
하였다. 《農者(産業)政本, 食唯民天》
■신라 아달라왕 16년, 고구려 신대왕 5년, 백제 초고왕 4년(169)
◯하4월 고구려가 한에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한의 현도 태수 경임(耿臨)이 고구려에 침입하여 수백 인을 죽이니, 고구려 왕이 항복을 청하여 예속되기를 빌었다.
■신라 아달라왕 20년, 고구려 신대왕 9년, 백제 초고왕 8년(173)
◯하5월 왜의 여군(女君) 비미호(卑彌呼)가 사신을 보내어 계림에 교빙하였다. 왜왕 중애(仲哀) 말년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주인이 없더니, 중애의 아내 비미호가 능히 귀도(鬼道)로 사람을 속여서 임금이 되었다. 뒤에 신공천황(神功天皇)이라 칭하더니, 이때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교빙하고, 뒤에 또한 중국과도 통하였다 한다.
동사강목 제2상
■신라 벌휴왕 11년, 고구려 고국천왕 16년, 백제 초고왕 29년(194)
◯동10월 고구려는 진대법(賑貸法)을 제정하였다.
왕이 사냥을 나가다가 길에서 우는 사람을 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가난하여 늘 품을 팔아서 어미를 봉양하여 왔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할 곳이 없어 적은 양식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하매, 왕이,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런 극단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이다.”
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어 위로하고, 이어 내외 관원에게 명하여 환과고독(鱞寡孤獨)과 노병빈핍(老病貧乏)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를 찾아서 진휼(賑恤)하게 하고, 또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을 내어 백성에게 진대(賑貸)하되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알맞추어 하고, 10월에 환납토록 하여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으니, 내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라 조분왕 17년, 고구려 동천왕 20년, 백제 고이왕 13년(246)
◯추8월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입하니, 고구려 왕이 두 번 싸워 패배시키고 드디어 진격하였으나 지고 말았다.
위가 고구려 왕이 변경을 자주 치므로, 유주자사(幽州刺使) 관구검과 낙랑 태수 유무 및 대방 태수 궁준을 파견하여 군사 1만 인을 거느리고 현도를 거쳐 침략해 오니, 왕은 보기병(步騎兵) 2만 인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맞아 싸워 패배시키고, 3천여 인을 참수하였으며, 또 군사를 이끌고 양맥(梁貊)의 계곡에서 재차 싸워 또 패배시키고 3천여 인을 참획(斬獲)하였다.
왕이 제장(諸將)에게 이르기를,
“위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 같지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의 명장이나, 오늘 그의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다.”
하고, 이어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니,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만들어 결사적으로 싸웠으므로 고구려 군사는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1만 8천여 인이나 되었다. 왕은 1천여의 기병을 이끌고 압록원(鴨綠原)으로 달아났다.
○ 백제가 낙랑을 엄습하였다.
백제왕은 낙랑 태수 유무가 관구검을 따라 고구려를 친다는 것을 듣고 좌장 진충을 보내어 허술함을 틈타 그 변방을 엄습하니, 무(茂)가 이를 듣고 노하므로 왕은 침략해올 것을 염려하여 그 백성을 돌려보냈다.
동10월 위의 군사가 환도성(丸都城)을 함락하고 도륙(屠戮)하므로, 왕은 달아나고 동부의 밀우(密友)가 힘써 싸워 막았다.
검(儉)이 군마(軍馬)를 묶고 수레를 달아 올려 환도성에 올라 왕도를 무찌르는 한편,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보내어 왕을 추격케 하니, 왕이 남옥저(南沃沮) 《위지(魏志)》 관구검전(毌丘儉傳) 및 《자치통감》에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고 하였고, 주(註)에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매구루(買溝婁)다.’고 하였다. 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군사가 분산되어 거의 없어지고, 오직 동부의 밀우가 곁에 있어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추격하는 적병이 매우 급박하여 벗어나지 못할 형편이니, 청컨대 신이 목숨을 걸고 막겠으니 왕께서는 피하십시오.”
하고,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함께 적진에 나아가 힘껏 싸우니, 왕은 소로(小路)로 빠져나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아 자위(自衛)하고, 이르기를,
“만약 밀우를 구해 오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리라.”
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나서면서,
“신이 한 번 가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싸움터에 가서 밀우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등에 업고 돌아오니, 왕이 자기의 무릎에 누여 놓은 지 한참 만에 깨어났다.
○ 고구려인 유유(紐由)가 위의 장수를 찔러 죽이니, 위군이 물러갔다.
왕은 샛길로 빠져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군의 추격이 그치지 않으므로, 계책이 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아뢰기를,
“형세가 매우 위험하고 절박하니,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이 어리석은 꾀가 있으니,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을 먹이다가 틈을 엿보아 그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약 계책이 이루워지면 왕께서는 분격(奮擊)하소서.”
하니, 왕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유유가 드디어 위군에게로 가서 거짓 항복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해 왔으나 몸둘 곳이 없어, 장차 진전(陣前)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사구(司寇)에게 목숨을 맡기려 하는데, 먼저 소신을 보내어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지고 종자(從者)들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위의 장수는 이를 듣고 장차 항복을 받으려 하였는데, 유유는 칼을 밥그릇 속에 숨겨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어 위장의 가슴을 찌른 다음 함께 죽으니, 위군이 드디어 소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니, 위군이 요란하여 진(陣)을 치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에서 철군하였다. 이 싸움에서 왕기(王頎)가 왕을 뒤쫓아 옥저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의 남계(南界)에 이르러, 돌에 공을 새겨 놓았고, 환도산(丸都山)에도 새기고 불내성(不耐城)에도 새겨 놓았는데, 여러 곳에서 죽이거나 항복받은 것이 8천여 구(口)이었고, 한(韓)의 나해(那奚) 등 수십 부락이 위에 항복하였다.
처음 고구려 신하인 패자 득래(得來)가 왕이 자주 중국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여러 번 간(諫)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므로, 득래가 탄식하기를,
“끝내는 이 땅이 쑥밭이 됨을 보리로다.”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이를 듣고,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그 묘를 헐지 못하게 하고 그곳의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사로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냈다.
최씨는 이르기를,
“전(傳)에,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 나라를 보전한다.’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데, 왕이 덕과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자주 침범하였으니, 그가 보국(保國)의 상도를 잃음이 심하였다. 득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자주 이기자, 곧 교만하여져 마침내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나라를 잃은 것은 모두가 다 자신이 초래한 화근이니 어찌 피할 수 있으리오. 슬프다! 부차(夫差)가 자서(子胥)의 충언을 듣지 않아서 미록(麋鹿) 떼가 고소(姑蘇)를 짓밟았고,동천(東川)이 득래의 간언을 듣지 않아서 환도가 쑥대밭이 되었도다.
예부터 임금으로서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탄 없이 방자하고서는 몸과 나라를 망치지 아니한 자가 없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라 유례왕 2년, 고구려 서천왕 16년, 백제 고이왕 52년(285)
◯이해에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가 부여국을 습파(襲破)하였다.
처음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요동에 예속되기를 요구하니, 공손도(公孫度)는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의 사이에 처해 있기 때문에 보존하기 여렵다 하여 종녀(宗女)를 시집보냈다.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즉위했으나 적자(嫡子)가 없고 얼자(孽子) 마여(麻餘)가 있어, 제가(諸加)들이 함께 세웠다. 마여가 죽고 아들 의려(依慮)가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6세였다. 외(廆)가 부여를 칠 때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보호를 받았으며, 외는 부여를 짓밟고 1만여 인을 몰고 돌아갔다.
다음해에 의려의 아들 의라(依羅)가 현재 남아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돌아가 구강(舊疆)을 수복코자 하여 진(晉)의 동이교위인 하감(何龕)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감이 독호(督護)인 가탐(賈耽)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이를 호송해 주게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부여를 수복하였는데, 그 뒤에 매양 외의 침략을 받아 그곳 사람들이 중국에 팔려지니, 진제(晉帝)가 관물(官物)을 내어 속환(贖還)하고,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하였다.
■신라 기림왕 5년, 고구려 미천왕 3년, 백제 분서왕 5년(302)
◯추9월 고구려가 현도군을 침략하였다.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기었다.
■신라 기림왕 10년, 고구려 미천왕 8년, 백제 비류왕 4년(307)
◯계림이 국호를 신라(新羅)로 고쳤다.
그러나 오히려 확정되지 아니하여 호칭이 무상하였다.
■신라 흘해왕 4년, 고구려 미천왕 14년, 백제 비류왕 10년(313)
◯동10월 고구려가 진(晉)의 낙랑군을 침략하였다.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때에 중국이 소란하매 고구려가 틈을 타서 침략하니, 진의 장수 장통(張統)이 대방ㆍ낙랑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 왕과 서로 싸우다가 여러 번 패배하였다. 통(統)이 드디어 모용외에게 돌아가니, 외(廆)는 요(遼) 땅에 낙랑군을 두고 통을 태수로 삼았다. 이로부터 2군은 고구려에 몰입되었다. 《자치통감》에서 보충 낙랑은 중국 땅이 되어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 계유부터 이때까지 무릇 4백 21년 만에 동방에 다시 속하였다.
■신라 흘해왕 21년, 고구려 미천왕 31년, 백제 비류왕 27년(330)
◯계림에서 벽골지(碧骨池)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를 처음 만들었다.
【안】 지금 김제군(金堤郡)에 벽골지의 옛터가 있는데, 이는 백제의 소관이나, 이때는 백제의 도읍이 한성(漢城)의 서남쪽 내지(內地)에 있었으므로, 혹 신라가 침탈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 흘해왕 22년, 고구려 미천왕 32년, 백제 비류왕 28년(331)
◯추7월 백제에 크게 기근[大饑]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신라 흘해왕 33년, 고구려 고국원왕 12년, 백제 비류왕 39년(342)
◯춘2월 고구려가 환도성과 국내성을 수축하고 추8월에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겼다. 평양에 도읍한 지 모두 96년 만에 천도하였다
동11월 연왕 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성을 함락하고, 왕모(王母)와 왕비를 사로잡고, 미천왕의 능묘를 발굴하여 그 시체를 싣고 크게 약탈하여 가지고 돌아갔다.
황이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옮겼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慕容翰)이 청하기를,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우문(宇文)을 없앤 후라야 중원(中原)을 도모할 수 있다.”
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데는 두 길이 있으니, 그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좁고 험하므로 군중들이 북쪽 길을 따라 가려고 하니, 한(翰)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대군이 북쪽 길을 이용하리라 생각하고, 반드시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벼이 할 터이니, 마땅이 정예병을 이끌고 남쪽 길을 따라 공격하면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 환도(丸都)는 취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따로 일부 군사를 북쪽 길로 내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복심(腹心)이 이미 무너졌으니 사지(四肢)를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황이 이를 좇았다.
11월에 황이 친히 경병(勁兵) 4만 명을 거느리고 남협(南陜) 남협(南陜)은 지금 연산관(連山關) 통원보(通遠堡)에서 봉성(鳳城)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으로부터 침입하니,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파견하여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가 치게 하였다. 왕은 아우 무(武)를 파견하여 정병 5만을 거느려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졸(弱卒)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비하였는데, 한(翰) 등이 먼저 이르러 목저(木底)에서 교전하였는데, 황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뒤를 이어 오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가(加)는 고구려 관명에 상가(相加)ㆍ대가(大加)ㆍ소가(小加) 등의 이름이 있다 를 죽이니, 여러 군사가 승세를 몰아 드디어 환도성에 들어왔다. 왕이 단기(單騎)로 달아나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가매 장군 모용여니(慕容輿尼)가 추격하여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에 왕우(王寓) 등은 북쪽 길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은 끝까지 추격하지 아니하고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황이 돌아가려 할 즈음에 한수(韓壽)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은 지킨다는 것이 불가합니다. 지금은 왕이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곡에 잠복하고 있으나, 대군이 떠나고 나면 반드시 다시 한데 모여 그 여력을 수습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오히려 후환 거리가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 아비의 시체를 싣고 그 생모(生母)를 포로로 잡아 갔다가 그가 제 몸을 묶고 스스로 귀복하여 오기를 기다린 연후에 이를 돌려 주고 은혜와 신의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황이 이를 좇아 미천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를 싣고, 부고(府庫)에 있는 누대(累代)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그 궁실을 불지르며 환도성을 파괴한 뒤 돌아갔다.
동사강목 제2하
■신라 내물왕 9년, 고구려 고국원왕 34년, 백제 근초고왕 19년(364)
◯하4월 왜가 계림에 침구[寇]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왜병이 크게 쳐들어오니, 왕이 풀로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서 갑옷을 입히고 병기를 들리어 토함산(吐含山)에 벌여 세워놓고 용맹한 군사 1천을 부현 동원(釜峴東原) 지금은 미상 에 매복해 두었다. 왜인이 자기 군사가 많음을 믿고 바로 쳐들어오매 매복한 군사들이 나와 엄습해 치니, 왜인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는데, 추격해서 거의 전멸시키었다.
■신라 내물왕 16년, 고구려 고국원왕 41년, 백제 근초고왕 26년(371)
◯겨울 백제 왕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평양까지 이르렀는데 고구려 왕이 성을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백제의 군사가 곧 돌아갔다.
백제 왕이 고구려가 자주 와서 침탈(侵奪)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태자와 같이 정병(精兵) 3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쳐서 평양성까지 이르매, 고구려 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막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으니, 백제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두 나라는 대대로 구적(仇敵)이 되어 전쟁이 잇달았다.
■신라 내물왕 17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백제 근초고왕 27년(372)
◯6월 진(秦)이 부도(浮屠)와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고구려에 보냈다.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부도 순도(順道)와 불상과 불경을 보내 왔다. 고구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고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그 뒤에 중 아도(阿道)가 또 진(秦)에서 왔으니 이것이 해동(海東)에 불법이 들어온 시초이다.
○ 고구려가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고구려 사람이 학문을 좋아하여 궁한 마을, 말먹이는 사람들까지도 서로 신칙하고 권면하였다. 큰 길거리 옆에는 어디나 큰 집[嚴屋]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불렀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이 무리로 거처하며, 경전을 외고 활쏘기를 익혔다.
■신라 내물왕 29년, 고구려 소수림왕 14년 백제 근구수왕 10년(384)
◯9월 백제 왕이 인도 중을 왕궁으로 맞아들이었다.
인도 중 마라란타(摩羅蘭陀)가 진(晉)으로부터 와 백제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경하니 이는 백제 불법의 시초이다. 마라란타는 번역하여 말하면 동학(童學)이다.
■신라 내물왕 37년, 광개토왕(廣開土王) 원년, 아신왕(阿莘王) 원년(392)
◯추7월 고구려 왕이 백제를 쳐서 10성(城)을 함락시켰다.
왕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쳐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니, 백제 왕이, 고구려 왕이 군사를 잘 쓴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 막지 못하였으므로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이 많이 고구려에 점령되었다.
■신라 실성왕 7년, 고구려 광개토왕 17년, 백제 전지왕 4년(408)
◯2월 왜가 대마도에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섬은 옛날의 대해국(對海國)인데 신라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땅이 험조하고 숲이 우거졌으며 길은 새나 사슴이 다니는 길 같고, 토지가 메말라 좋은 밭이 없어서 주민들이 해물(海物)을 먹고 살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면서 곡식을 사들였다.
옛날에는 신라에 소속되었었으나, 그곳이 바다로 멀리 떨어져 지키기 어려우므로 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왜인으로 신라에 오는 자는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게 되니, 참으로 두 나라의 요충(要衝) 지대이다. 《통고(通考)》에서 보충
이때에 와서 왜인이 군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양식을 저장하여, 신라를 엄습할 계획을 하였다.
신라 사람이 이를 염탐하여 알고서 왕은 그들이 출발하기에 앞질러 먼저 공격하려 하니,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신은 들으니, 전쟁이란 위험한 것이라 합니다. 더구나 큰 바다를 건너가서 남을 치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불리(不利)하다면 후회한들 어찌할 수 없으리니 험준한 데에 관문(關門)을 설치하였다가 저들이 오면 방어하면서 형편을 보아 나가 치는 것만 같지 못할 듯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이르게 하는 것이요, 남에게 부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계책의 최상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안】 대마도가 여기에 처음 보인다.
■신라 눌지왕 2년, 고구려 장수왕 6년, 백제 전지왕 14년(418)
◯봄 계림이 삽량주 간(歃良州干 간은 신라 관직의 하나) 박제상(朴堤上)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볼모로 갔던 왕자 복호가 돌아왔다.
왕의 두 아우가 모두 외국에 볼모로 있으매 왕은 변사(辯士)를 얻어 볼모로 간 아우를 데려올 것을 생각하던 차에, 수주촌 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 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와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세 촌(村)은 지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신라의 제도에 촌마다 간(干)을 두었다. 3인이 어진 지혜가 있다 함을 듣고, 여러 신하와 나라 가운데 호협(豪俠)한 이들을 모으고 그 3인을 불러 연회를 베풀며 묻기를,
“두 아우가 볼모로 외국에 가 있으니, 짐(朕)이 이렇게 부귀한 자리에 있어도 두 아우를 잠시도 잊을 수 없다. 누가 짐을 위하여 두 아우를 보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3인이 대답하기를,
“신등이 들으니, 삽량주 간 박제상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대손으로서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으니, 전하(殿下)의 근심을 풀어드릴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왕이 박제상을 불러서 그 사실을 말하니, 박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은 들으니, 충신은 일에서 어려움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의리로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다 합니다. 만일 어렵고 쉬운 것을 따진 뒤에 행하면 이것을 충성치 못하다 하는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뒤에 움직이면 이것을 용기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못났지마는 대왕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고, 곧 사신으로 떠나서 고구려왕을 달래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는 정성과 믿음뿐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은 신의를 숭상합니다. 질자(質子)를 교환하는 것은 오패(五覇)도 하지 않았습니다. 복호(卜好)는 저희 임금의 아우인데 귀국에 볼모로 있은 지가 거의 10년이 되오매, 저희 임금이 형제의 그리운 생각이 간절하여 대왕의 은애 베푸심을 갈망합니다. 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여 주시면 저희 임금이 대왕의 높은 신의를 덕으로 여길 것입니다. 수호(修好)함은 질자에 있는 것이 아니요, 복호가 귀국에 있는 것은 마치 아홉 마리 소에 털 하나와 다를 바 없어 실로 이익이 없는 것이니, 대왕께서 생각하여 주십시오.”
하니, 고구려왕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함께 돌아가기를 허락하였다.
여름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었다.
가을 계림의 질자 미사흔이 왜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오고 계림의 대신 박제상이 죽었다.
왕이 복호가 돌아옴을 보고, 또 박제상에게 말하기를,
“만일 한몸에 팔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눈 하나만 있고 한 쪽이 없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박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못났사오나 몸을 이미 나라에 바쳤사오니, 어떠한 어려움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다만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임금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이 한 말씀으로 깨우쳐 알게 하였습니다만 왜인은 말로써는 깨우칠 수 없고 계책(計策)을 써야 되겠습니다. 신이 죄를 지어 도망한 듯이 하리니 대왕께서는 신의 처자를 잡아 가두고서 그 소문이 왜에 들리게 하소서.”
하고, 처자도 만나보지 아니하고 떠나서 율포(栗浦) 지금 미상 에 다다라 닻줄을 풀어 배를 띄웠다. 그의 아내가 뒤를 쫓아와서 크게 통곡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들어 적국으로 가니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소.”
하고, 드디어 왜국으로 들어가 마치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같이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백제에서 망명하여 온 사람으로 왜에 있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계림이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칠 계획을 한다.”
하매, 왜왕이 군사를 보내 국경 밖을 순라케 했는데 마침 고구려 사람이 침공해 와서 왜의 순라하는 사람을 노략하여 죽였으므로, 왜왕은 백제 사람의 말을 곧이듣게 되었다. 이에 박 제상이 오자 왜왕이 처음에는 의심하였으나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가 모두 잡혀 갇혔다 함을 듣고서는 박제상이 실제로 나라를 배반한 줄로 믿었다. 그러므로 박제상의 계책을 써서 군사를 출동하여 계림을 치기로 하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길잡이로 삼아 떠나서 바다 섬에 이르렀다. 박제상이 미사흔과 더불어 날마다 배를 타고 유람하는 것같이 하여 왜가 의심하지 않게 하고서, 어느 날 박제상이 미사흔에게 가만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니, 미사흔이 차마 혼자 떠나지를 못하였다. 박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당신의 목숨을 구원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한다면 이보다 더 만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어찌 살기에 미련을 두리까! 이제 우리가 다 같이 가다가 왜인이 깨닫고 쫓아오면 같이 죽을 뿐 아무 이익도 없을 것이나, 내가 남고 당신만 떠난다면 왜인이 설사 발견하더라도 힐문(詰問)하여 조사하는 사이에 당신은 멀리 가서 추적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가만히 미사흔을 보내 도망쳐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떠나지 않고 왜의 행동을 기다리었다. 그때에 신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에 있었는데 미사흔을 좇아 본국에 돌아가게 하고, 박제상은 혼자 배 안에서 자며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왜인이 정탐하여 알고는 박제상을 결박하여 놓고 미사흔을 추적하였으나, 마침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여 미사흔을 추적하지 못하였다. 왜왕이 자기를 배반한 것을 노하게 여겨 박제상을 국문[鞫]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로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룬 것뿐이다.”
하니, 왜왕이 더욱 노해서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고서 네가 ‘계림의 신하라’ 칭하니,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내릴 것이나, 네가 ‘왜국의 신하라’고 일컫는다면 반드시 큰 녹(祿)으로 상을 주리라.”
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되면 되었지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로 치는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
하니, 왜왕이 더욱 노해서 박제상의 다리 살갗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놓고 그 위를 걸어가게 하며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하니, 박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니, 왜왕이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 가운데 불태워 죽이었다.
■신라 눌지왕 11년, 고구려 장수왕 15년, 백제 구이신왕 8년(427)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平壤)으로 옮기었다.
동황성(東黃城 국내성과 환도성)에 도읍한 지 85년 만에 옮기었다.
■신라 눌지왕 18년, 고구려 장수왕 22년ㆍ백제 비유왕 8년(434)
◯춘2월 백제와 계림이 서로 빙문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고, 가을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에 신라도 황금과 명주(明珠)로 빙문에 보답하였다.
■신라 눌지왕 39년, 고구려 장수왕 43년, 백제 비유왕 29년(455)
◯동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니 계림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이로부터 신라와 백제가 화친을 맺어 고구려와는 교제를 끊으니 삼국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신라 자비왕 18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백제 개로왕 21년(475)
◯추9월 고구려왕이 크게 군사를 내어 백제를 치니 백제왕이 아들 문주(文周)를 계림에 보내어 구원을 구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왕이 가만히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간첩을 구하니 부도(浮屠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기를,
“소승이 도는 잘 모르나 나라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 있으니 소진(蘇秦)이 제(齊)나라를 유세하던 꾀로써 백제를 속이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기꺼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 나라에 죄를 얻은 체하고 도망해 백제에 들어가서 백제왕이 바둑을 잘 둔다 함을 듣고 드디어 바둑으로 왕을 만나보고 더불어 대국을 하니, 과연 국수(國手)인지라 왕이 믿고 가까이 하였다. 도림이 인하여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이국의 사람인데도 대왕께서 멀리하여 물리치지 않으시니 은혜가 너무나 큰데도 아직 조금의 도움도 드리지 못하였기에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니, 백제왕이 물으매 도림이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산으로 싸이고 하수가 가로 흘러 천연으로 된 요새이기에 사방의 이웃 나라가 감히 엿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자세와 부유(富有)한 사업으로 남이 보고 듣는 것을 두려워하게 해야 할 것인데도, 성곽(城郭)이 수선되지 못하고 궁실이 수축되지 못하며, 선왕의 해골은 임시로 노지(露地)에 빈장(殯葬)하였고, 백성의 주택들은 하수에 거듭 파괴되었으니, 신은 취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소.’ 하고 이에 크게 나라 사람을 동원해서 흙을 모아 성을 쌓고 궁실을 높이며 원유(苑囿)를 크게 하고 욱리하(郁里河) 지금 미상 에서 석곽(石槨)을 가져다가 다시 선왕을 장사지내고, 하수를 따라 제방을 쌓아 사성(蛇城) 지금 미상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지금 미상 를 북쪽까지 이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바닥나고 백성들이 흩어져 유리하게 되었다. 도림이 도망하여 돌아가서 고구려왕에게 고하니, 고구려왕이 기뻐하며 친히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쳤다. 백제왕이 이를 듣고 아들 문주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해서 소인을 신용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누가 즐겨 나를 위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해 죽으려니와 부자가 같이 죽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너는 난을 피해서 종묘 사직을 잇도록 하여라.”
하고, 문주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구하도록 하였다. 이에 문주는 목리 만치(木劦滿致)와 조미 걸취(祖彌桀取) 두 사람의 성명이다 를 데리고 남으로 행하였다.
○ 고구려가 진격해서 한성(漢城)을 쳐 함락하니 백제왕 경사(慶司)가 성을 나가 달아났으나 옛 신하 재증 걸루(再曾桀婁) 등이 왕을 잡아 시해하였다.
고구려 왕이 대로(對盧) 제우(齊于)와 재증 걸루ㆍ고이 만년(古爾萬年)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이다 등을 명해서 향도를 삼고 백제의 한성 북쪽 성을 쳐서 7일 만에 함락하고, 이동해서 남쪽성을 치며 군사를 나누어 네 길로 마주치고 바람을 타 불을 질러서 성문을 불태우니, 성 안의 인심이 위구(危懼)하여 나와 항복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백제왕은 사태가 위급하여 어떻게 할지를 몰라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재증 걸루 등이 추격해 따라갔다. 백제왕이 말에서 내려 절하는 것을 보고는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그의 죄를 세며 결박해서 아단성(阿旦城)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혹은 영춘현(永春縣)이라 한다 으로 보내어 죽이고 남녀 8천 인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걸루와 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일찍이 왕에게 죄를 짓고서 도망하여 고구려로 달아나서 장수로 피용되었던 것이다. 최씨가 이르기를,
“임금된 이는 반드시 잡힐 만한 틈이 있은 뒤에 사람이 그 틈을 엿보게 되며 적에서도 이간하게 되는 것이다. 개로왕은 구구(區區)한 작은 오락을 즐기다가 마음과 뜻을 미혹해서 마침내 적국의 미끼에 걸리고 말았다. 옛글에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伐] 뒤에 남이 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개로를 두고 말함이라 하겠다.”
○ 백제 왕자 문주가 즉위하였다.
동10월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문주가 신라에 이르러 군사 1만 인을 얻어 왔으나 왕은 죽고 성은 파괴되고 고구려 군사는 이미 물러갔다. 이에 문주가 즉위하니 이가 문주왕이다. 혹은 문주(汶洲)라 한다 성질이 착하고 부드러워 결단성이 없으나 그래도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도 왕을 애중하였다. 왕은 한성이 너무 파괴되고 또 고구려와 가까움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수도를 웅진 지금의 공주부(公州府) 으로 옮기니 한성에 도읍한지 1백 5년 만에 천도한 것이다.
■신라 자비왕 19년, 고구려 장수왕 64년, 백제 문주왕 2년(476)
◯하4월 탐라국(耽羅國)이 백제에 조공하였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의 작은 나라로, 탁라(乇羅) 또는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백제의 남쪽에 있으며 뱃길로 8백여 리를 가 그 나라에 이른다. 땅의 폭과 둘레는 4백여 리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더니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 세 사람이 그 땅에 나누어 살면서 그의 거처하는 곳을 서울이라 부르고 오곡(五穀)을 심으며, 말과 소를 쳐서 날로 잘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방물을 올리니 왕이 기뻐하여 그 사자를 은솔로 삼았다.
동사강목 제3상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494)
◯춘2월 부여(扶餘)가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부여가 물길(勿吉)에게 쫓겨서, 왕과 처자가 나라를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신라 지증왕 13년, 고구려 문자왕 21년, 백제 무령왕 12년(512)
◯6월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우산국은 아슬라주(阿瑟羅州)의 동해 가운데 있고,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하며, 지방은 백 리이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우릉도(亐陵島)라고 되어 있다. 지금의 우릉도(羽陵島)이며, 동해안 가운데 있다. 순풍(順風)이면 이틀 길이고 주위는 2만 6천 7백 30보이다. 지세의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었다.
【안】 《습유기(拾遺記)》에 이르기를 ‘봉래산(蓬萊山) 동쪽에 울이국(蔚夷國)이 있다.’ 하였고, 또 왕유(王維)가 일본의 조감(晁監)을 송별하는 서문(序文)에 ‘부상(扶桑)은 냉이[薺]와 같고 울도(蔚島)는 마름[萍]과 같다.’고 한 것은 모두 울릉도(鬱陵島)를 가리킨 것이다. 지금은 우리 나라 땅이 되었는데, 고기잡이의 유리함이 많으므로 왜인(倭人)이 늘 와서 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군주 이사부(異斯夫)는 내물왕(奈勿王)의 손자인데 용병(用兵)을 잘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이사부가 생각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력으로 오게 하기는 어렵지만 꾀로 설복시킬 수는 있다.”
하고, 곧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속여 이르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아 죽이겠다.”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신라 법흥왕 25년, 고구려 안원왕 8년, 백제 성왕 16년(538)
◯백제가 사자(泗泚)에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웅진(熊津)에 도읍한 지 63년 만에 도읍을 옮겼다.※泗泚는 사비로 읽는다.
■신라 법흥왕 27년, 고구려 안원왕 10년, 백제 성왕 18년(540)
◯ 신라가 남녀(男女) 아이를 뽑아 풍월주(風月主)라 불렀다.
신라의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므로, 무리를 모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본 연후에 등용하려고, 소년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고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하여 도중(徒衆)을 삼아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권장하였다. 뒤에 또 용모가 아름다운 소녀를 가려서 원화(源花)를 삼게 하매,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두 사람이 뽑혔고, 두 원화가 무리 3~4백 인을 모았는데, 두 사람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俊貞)이 남모(南毛)를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중들이 화목함을 잃고 흩어졌으므로, 왕은 영(令)을 내려 원화를 폐지했다.
■신라 진흥왕 14년, 고구려 양원왕 9년, 백제 성왕 31년(553)
◯춘2월 신라왕이 신궁(新宮)을 헐고 황룡사(黃龍寺)를 지었다.
처음에 신라왕이 월성(月城)에 신궁(新宮)을 지을 때에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왕이 고쳐 불사(佛寺)를 만들고, 황룡(黃龍) 옛터는 지금의 경주(慶州) 월성(月城) 동쪽에 있는데, 열 여섯자의 불상(佛像)이 아직도 있다 이란 이름을 내렸는데, 무릇 14년 만에 준공되었다.
■신라 진흥왕 23년, 고구려 평원왕 4년, 백제 위덕왕 9년(562)
◯추9월 신라가 대가야국(大加耶國)을 쳐서 이를 멸하였다.
가야국(伽倻國)이 신라에 예속되었더니, 이때에 이르러 모반하니 왕이 이찬 이사부(異斯夫)를 시켜서 이를 쳤다. 사다함(斯多含)이란 자가 있었는데 내물왕의 7세손이었다. 나이 16세에 국선(國仙)이 되어 그 무리가 1천여 인이었는데, 그들의 환심을 얻었었다. 종군하기를 청하여 귀당비장(貴幢裨將)이 되어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㫋檀梁) 가야(加耶)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고 하였다 에 달려가 백기를 세웠다. 이에 성중(城中)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대병이 이 틈을 타서 드디어 그 나라를 멸하였다. 대가야(大加耶)가 가락(駕洛)과 더불어 병립(幷立)한 것은 시조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 혹은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으로부터 시작하여 9세에 이뇌(異腦)가 있었고, 이뇌의 7세인 설지(設智)에 이르러 망하니, 모두 16세, 521년이었다. 지금의 고령현(高寧縣)의 남쪽 1리에 대가야(大加耶) 궁궐의 유지(遺址)가 있고, 또 현(縣) 서쪽 2리(里) 쯤에 옛 무덤이 있는데, 속칭 금촌왕릉(錦村王陵)이라 한다
신라 군사가 돌아와서 공을 논하매, 사다함(斯多含)이 으뜸이었다. 왕이 양전(良田)과 포로[俘口] 3백 인을 상으로 주니, 사다함이 그 땅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포로는 사면하여 양인(良人)이 되게 하니, 왕이 그러지 말라고 완강히 권유하자 다만 알천(閼川)의 불모지(不毛地)나 내려 주기를 청하매, 국민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기었다. 사다함은 당초에 무관랑(武官郞)과 더불어 사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한 친구였는데, 후에 무관랑이 죽으매, 7일간 통곡하다가 또한 죽으니 나이 17세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측은히 여겼다.
■신라 진흥왕 27년, 고구려 평원왕 8년, 백제 위덕왕 13년(566)
◯춘2월 신라가 기원(祇園)ㆍ실제(實際) 두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해에 황룡사(黃龍寺)가 준공되었다. 솔거(率居)라는 사람이 있어 벽에 노송(老松)을 그렸는데 참으로 가지와 잎이 서린 듯하여 까마귀와 참새가 이따금 날아와서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빛깔이 흐려지매, 이 절의 중[僧]이 색칠을 하였더니, 까마귀와 새들이 이때부터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를 신화(神畵)라고 하였다.
■신라 진흥왕 35년, 고구려 평원왕 16년, 백제 위덕왕 21년(574)
◯3월 신라가 황룡사(皇龍寺)에 1장 6척의 불상을 주조하였다.
동(銅)의 중량은 3만 5천 7근, 도금(鍍金)한 중량은 1만 1백 98푼이다. 좌우의 두 보살상은 철(鐵)의 중량이 1만 2천 근, 도금(鍍金)이 1만 1백 36푼이다.
■신라 진흥왕 37년, 고구려 평원왕 18년, 백제 위덕왕 23년(576)
◯봄 신라가 화랑(花郞)을 두었다.
때에 신라에 풍월주(風月主), 원화(源花)의 법이 폐하여진 지 이미 여러 해였다. 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영(令)을 내려 귀인(貴人)과 양가(良家)의 자제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 분장을 시켜 화랑(花郞) 또는 국선(國仙)이라 이름하였다. 이에 설원랑(薛原郞)을 얻어 받드니, 국인들이 존경하고 섬기었다. 이로부터 도중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많은 데는 천여 인에 이르렀다. 혹은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악기를 가지고 서로 즐기며 산수(山水)를 유람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잘잘못[邪正]을 알게 되어서 착한 사람을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니, 어진 정승과 충성스러운 신하,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 속에서 많이 나왔다. 후인들이 이 낭도(郞徒)들의 설교하던 연유를 자세히 기록하여 선사(仙史)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진지왕 2년, 고구려 평원왕 19년, 백제 위덕왕 24년(577)
◯ 고구려가 온달(溫達)을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온달(溫達)은 고구려의 걸인(乞人)이었다. 용모가 추하고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떨어진 옷, 해어진 신발 차림으로 마을 거리를 왕래하였다. 그때에 왕이 어린 딸을 두었었는데, 잘 우는 버릇이 있었다. 이에 왕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꼭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보내리라.”
하였다. 딸의 나이 16세에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니 왕녀가 아뢰기를,
“왕으로서는 희롱하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왕께서는 항상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하시더니, 이제 무엇 때문에 먼젓말을 고치십니까? 필부(匹夫)도 거짓말을 안하거늘 하물며 지존(至尊)으로서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노여워하여 딸의 의사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왕녀는 보검(寶劒) 수십 자루를 팔뚝에 걸고 궁(宮)을 나와서 홀로 온달의 집에 찾아가 온달의 어머니 앞에 나아가 절해 뵈었다. 이때 온달은 느릎나무 껍질(楡皮)을 벗겨 가지고 왔다. 이윽고 왕녀는 그들 모자에게 자상한 사연을 말하고,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보검(寶劒)을 팔아서, 밭과 집과 노비를 사고, 또 온달을 시켜서 국마(國馬)로서 병들어 버려진 것을 사라고 하니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다. 왕녀가 말을 부지런히 기르니, 말이 날로 살이 찌고 건장하여졌다.
나라 풍속에 해마다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사냥한 짐승으로 하늘과 산천(山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더니, 그날에 왕이 나와서 사냥을 하매, 군신(群臣)들과 오부 병마(五部兵馬)가 모두 따랐다. 온달도 기르던 말을 타고 왕을 수행하였는데, 달리는 것도 모든 사람을 앞섰고 사냥한 것도 많았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묻고 깜짝 놀랐다. 이때에 주주(周主)가 북제(北齊)를 멸하고, 군사(軍師)를 내어 요동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이산(肄山)이라고도 쓴다 들에서 항전하였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수십 급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분격하여 크게 이겼고, 논공(論功)함에 이르러서는 온달이 으뜸이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나의 사위로구나”
하고,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고, 대형(大兄) 벼슬을 주니, 총애와 영화가 넘쳤다.
■신라 진평왕 8년, 고구려 평원왕 28년, 백제 위덕왕 33년(586)
◯고구려가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평양에 도읍을 옮긴 지 1백 60년 만에 옮겼다.
■신라 진평왕 11년, 고구려 평원왕 31년, 백제 위덕왕 36년(589)
◯이해 수(隋)가 진(陳)을 멸하니 백제가 수에 사신을 보내어 하례하였다.
수(隋)가 이미 진(陳)을 평정하였는데, 전함 1척이 표류하여 탐모라(耽牟羅 지금의 제주도)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백제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이를 후히 대접하여 보내고, 사신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진(陳)의 평정을 축하하였다. 수주(隋主)가 이를 좋게 여기고 조서로 표창하면서 말하였다.
“두 나라의 거리가 비록 멀지라도 사실은 만나서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해마다 따로 조공해 올 것이 없으며, 짐(朕)이 또한 답례로 사신을 보내지 않겠노라.”
■신라 진평왕 20년, 고구려 영양왕 9년 백제 위덕왕 45년(598)
◯봄 고구려가 수를 침략하니 수가 조서로 왕의 관작(官爵)을 빼앗고 대군을 일으켜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이 글을 올려 사죄하니 수의 군사가 돌아갔다.
◯추9월 백제가 수(隋)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백제 왕이 수(隋)가 요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장사(長史) 왕변나(王辨那)를 보내어 군사를 인도하겠다고 청하니, 수주(隋主)가 조서(詔書)를 내리어, ‘고구려가 복죄(服罪)하여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고 그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 왕이 그 일을 알고, 이로 말미암아 그것을 한하여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신라 진평왕 24년, 고구려 영양왕 13년, 백제 무왕 3년(602)
◯추8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니 신라 장수 귀산(貴山)ㆍ추항(箒項)이 힘껏 싸우다 죽으니, 백제가 패배하였다.
백제 군사가 아막성(阿莫城) 일명 모산성(母山城)인데 지금의 운봉현(雲峯縣)이다 을 포위하자 신라 왕이 날쌘 기마병 수천(數千)을 보내어 항전하니 백제 군사들이 불리하였다. 신라는 소이(小陁)ㆍ외석(畏石)ㆍ천산(泉山)ㆍ옹잠(甕岑) 등 4성 지금의 이름은 모두 알 수 없다 을 쌓고, 백제의 구경을 침략하였다. 백제 왕이 노하여 좌평(佐平)인 해수(解讐)를 시켜서 보병과 기병 도합 4만을 거느리고 4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왕은 장군 건품(乾品)ㆍ무은(武殷) 등을 시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항전하니, 해수(解讐)는 전세가 불리하자 후퇴하여 천산성 서쪽 대택(大澤)에 복병하였다. 무은(武殷)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무장한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쫓아가 대택에 이르자 복병하였던 백제 군사가 급습하였다. 무은이 말에서 떨어지자 사졸들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크게 부르짖기를,
“내가 일찍 스승 원광 법사(圓光法師) 에게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싸우다가 물러나 도망쳐서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릴 것인가?”
하고, 말을 아비에게 주고 그의 친구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워 수십 인을 죽이니, 여러 군사가 잇달아 분격하였다. 백제가 패배하여 죽은 시체가 들어 가득 찼고, 해수(解讐)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온 몸이 창에 찔리어 죽었다. 왕이 군신(群臣)들과 더불어 아나(阿那)지금은 알 수 없다 의 들판에서 맞이할 적에 시체를 어루만지며 통곡을 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귀산(貴山)에게는 내마(奈麻), 추항(箒項)에게는 대사(大舍)를 추증하였다.
■신라 진평왕 33년, 고구려 영양왕 22년, 백제 무왕 12년(611)
◯춘2월 수주 광(廣)이 고구려를 친정(親征)하려고 천하의 군사를 징집하여 탁군(涿郡)에 모이게 하니, 신라와 백제가 각각 수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가 출동하는 기일 알려 줄 것을 청하였다.
수주가 유주총관(幽州摠管) 원홍사(元弘嗣)를 시켜서 동래해구(東萊海口)에 가서 선박 3백 소(艘)를 만들게 하고, 조서를 내려 친하의 군사를 징집하여 탁군에 모이게 하고, 또 강회(江淮) 이남의 배 타는 사람[水手] 1만인, 활쏘는 사람[弩手] 3만 인과 영남(嶺南)의 창 쓰는 사람[排鑞手] 3만 인을 동원하니, 이에 사방에서 물과 같이 모였다. 수주가 탁군(涿郡)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러서 하남(河南)ㆍ회남(淮南)ㆍ강남(江南)에 명령하여 전차[戎車] 5만 승(乘)을 만들어서 옷과 무기를 모두 싣고 병사들로 끌게 하고 하남ㆍ하북민(河南河北民)들을 징발하여 군수품을 공급케 하니, 온 천하가 요란하였다. 이때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원병할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고, 백제가 국지모(國智牟)를 보내어 동병할 시기를 알려 주길 청하니, 수주가 기뻐하여 후히 상을 주고, 기거랑(起居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어 백제 왕과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신라 진평왕 34년, 고구려 영양왕 23년, 백제 무왕 13년(612)
◯춘정월 수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때에 사방의 병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에 모였다. 수주가 합수령(合水令) 유질(庾質)에게 묻기를,
“고구려 무리들이 우리 일군(一軍)을 당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이 많은 무리로 치니 이기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치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다가 혹시 이기지 못한다면 위령(威靈)이 떨어질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만일 거가(車駕)는 여기에 머물러 있고, 용감한 장수와 강한 군사를 시켜서 뜻하지 않는 사이에 나가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일의 기틀은 빠른 데 있으니 늦으면 공(功)이 없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기뻐하지 않고 드디어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문책하기를,
“고구려가 작은 나라로서 우매하고 공손치 못하여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집결하여 요(遼)와 예(濊)의 경계를 잠식(蠶食)하고, 망명자와 모반자들을 유인하여 변경에 살게 하며, 거란의 무리[黨]와 합하여 해술(海戌)을 죽이고, 말갈(靺鞨) 고장[服]을 가까이하여 요서(遼西)를 침략하고, 청구(靑丘)에서 조공을 하면 보물을 빼앗고, 사신의 수레가 가면 왕인(王人) 중국 사신을 가리킨 말 을 거절하여 임금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된 예라고 하겠는가? 또한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과중하고 강신호족(强臣豪族)들이 국권을 나누어 쥐고 붕당이 풍속을 이루었으며, 뇌물이 성행한데다가 기근(饑饉)이 거듭되고 싸움이 그칠 사이가 없다. 짐이 이러한 실정을 살펴보고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 죄 있는 자를 문책하기 위하여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펴리라.”
하였다. 좌(左) 12군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으로 나오고, 우(右) 12군은 점선(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彌)ㆍ임둔(臨屯)ㆍ후성(候城)ㆍ제해(提奚)ㆍ답돈(踏頓)ㆍ숙신(肅愼)ㆍ갈석(碣石)ㆍ동이(東暆)ㆍ대방(帶方)ㆍ양평(襄平) 등으로 나와서 평양에 총집결하였다. 군사가 모두 1백 13만 3천 8백인데 2백 만이라 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자는 군사 수의 배가 되었다. 북을 치고 각(角) 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기가 9백 60리에 뻗쳐 있었다.
◯3월 수군(隋軍)이 요수(遼水)에서 고구려병을 대패시키고, 나아가 요동을 포위하였다.
대군이 요수에 이르러 물가에 진을 치니, 고구려 군사는 요수를 막고 굳게 지키었다. 수인(隋人)들은 부량(浮梁 뗏목으로 만든 다리, 부교(浮橋)와 같다)으로 군사를 건너게 하였으나 부량이 언덕에 닿지 않았다. 고구려 병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이를 공격하니, 수군(隋軍)이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많았는데 수의 용장 맥철장(麥鐵杖)ㆍ전사웅(錢士雄)ㆍ맹금차(孟金叉)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수나라 사람들은 다시 다리를 연결하고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고구려 병사가 대패하니, 전사자가 만(萬)을 헤아렸다. 수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을 포위하니, 이곳은 곧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수주(隋主)가 위 문승(衛文昇)에게 명하여 요좌(遼左)의 백성을 위무, 조세와 부역을 10년간 면제해 주고, 여기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6월 수주 광(廣)이 요동에 이르렀다.
그 전에 수주가 여러 장수에게 경계하기를,
“그대들은 진군(進軍)하되, 세 길로 나누어 가고 공격하게 되면 반드시 세 길은 서로 알아야 하며, 모든 군사가 진군하거나 정지하거나 모두 상부에 알려서 회보를 기다려 행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의 요동 수장(守將)이 여러 차례 출전하였으나 불리했으므로 성을 돌면서 굳게 지켰다. 수주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칙령을 내려 이르기를,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마땅히 이를 무마하되, 군사를 풀어놓지 말라.”
하였다. 성(城)이 거의 함락됨에 성중 사람들이 항복함을 청하자 제장들이 달려가서 상부에 알리니, 회보(回報)가 올 무렵이면 성중(城中)이 방어태세를 갖추어서 수시로 나와 항전하는데, 이렇게 하기 두세 번이었으나 수주는 끝내 이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 으르러 수주가 요동에 와서 고구려군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고는 성의 서쪽 몇 리 지점에 진을 쳤으나 고구려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수의 수군장(水軍將) 내호아(來護兒)를 평양성 아래에서 격파시켰다.
내호아가 강회(江淮) 수군(水軍)의 배[舳艫]를 거느리고 수백 리에 뻗쳐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浿水)에 들어가니 평양과의 거리는 60리였다. 고구려군과 만나 진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정예군 4만을 선발하여 곧바로 성(城)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나곽(羅郭) 속 빈 절[寺]에 복병해 놓고 나가서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도망하매 호아(護兒)가 성(城)에 들어가서 군사를 풀어 놓고 약탈케 하니, 다시 대오가 없어졌다. 이에 고구려의 매복했던 군사가 일어나서 양쪽에서 공격하여 수병을 대패시키었다. 호아는 겨우 목숨만 건졌고 사졸들은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배 닿는 곳까지 추격했으나 호아의 부수(副師) 주법상(周法尙)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기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군사들이 곧 물러나니, 호아는 군사를 이끌고 해포(海浦)에 돌아가서 다시 주둔하였다.
◯추 7월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의 우문술 등 9군 30만과 살수에서 격전하여 대패시키니, 수주 광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 길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 길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길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 길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 길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襄平) 길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 길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成) 길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길로 나와서 모두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은 노하(瀘河)ㆍ회원(懷遠) 두 진(鎭)으로부터 군사를 발(發)하여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분의 양식을 주고 또 무기와 의류ㆍ천막, 그 밖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되,
“군량[粟米]을 버리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리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천막 속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으므로 겨우 중도에 가서 군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는 ‘울지문덕(蔚支文德)’이라고 하였다 은 침착하고 지모(智謀)가 있는 데다 겸하여 글을 잘 하였다. 고구려 왕이 중문(仲文)의 진영에 보내어 짐짓 항복하는 척하고, 허실을 탐지하려 하던차 중문(仲文)이 먼저 수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고구려 왕을 만나거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 하였다. 중문이 이를 잡으려 할 때 수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이를 굳이 제지하니 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속여 이르기를,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 돌아왔다. 중문과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고, 중문은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려 하니, 우문술이 굳이 막았다. 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 적은 적군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군사(軍事)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에 좇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마다 딴 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니 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빛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이를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곧 도망하니, 문술 등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이기었다. 술 등은 이 빠른 승첩을 믿고 동으로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淸川江))까지 건너와 평양성에서 근 30리 지점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다 알았고 / 神策究天文
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 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 勝戰功旣高
족함을 알거든 그만 그침이 어떠한고 / 知足願云止
하였다. 중문이 답서하여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문술에게 말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형재(行在)에 나아가 조회하리라.”
하니, 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여 졸지에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방진(方陣)을 만들어 물러갔다. 이때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에서 습격하여, 싸우면서 쫓아가다가, 추 7월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1주야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 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백 인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탕진되매, 수주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구속하였다가 계묘일에 이끌고 돌아갔다. 때에 백제는 또한 국경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겉으로는 수(隋)를 돕는 척했으나 실은 두 마음[兩端]을 가지고 있었다. 수인들은 이 싸움에서 다만 요수 서쪽의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신라 진평왕 35년, 고구려 영양왕 24년, 백제 무왕 14년(613)
◯춘정월 수주 광(廣)이 천하의 군사를 징집하여 다시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수주(隋主)가 돌아가서 전공이 없음을 부끄러이 여기어서 다시 고구려를 치려고, 조칙으로 천하의 군사를 불러서 탁군(涿郡)에 모이게 하고 요동의 옛 요새를 수축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또 시신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작은 오랑캐로서 상국을 모욕하니, 이제 바다를 막고 산을 옮기는 일도 능히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까짓 오랑캐쯤이랴!”
하니, 광록대부(光祿大夫) 곽 영(郭榮)이 간하기를,
“융적(戎狄)이 예(禮)를 잃은 것은 신하의 일입니다. 천 균(千鈞)의 쇠뇌[弩]는 새앙쥐를 잡기 위하여는 쏘지 않는 것인데, 어찌 만승(萬乘)의 몸으로서 작은 적과 대적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4월 수주 광이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6월에 돌아갔다.
수주가 요수(遼水)를 건너고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을 보내어 평양에 나가게 하고, 왕인공(王仁恭)은 부여로 나가서 신성(新城)에 이르게 하니,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이 항전하였다. 인공이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니, 고구려 군사가 성을 돌면서 굳게 지켰다. 수주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는데, 비루(飛樓)ㆍ당거(撞車)ㆍ운제(雲梯)ㆍ지도(地道 땅굴)로 사면으로 일제히 진군하여 밤낮을 쉬지 않았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에 응변하여 항거하니 20여 일이 되어도 성이 함락되지 않았고, 주인과 손이(고구려와 수를 가리킴) 전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수주가 군사를 시켜서 포대[布囊] 백여만 장을 만들어 흙을 담아 쌓아서 어량대도(魚梁大道)를 삼으니, 그 폭이 30보요, 높이는 성(城)과 같았으며 전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공격하게 하고, 또 팔륜거(八輪車)를 만들어 성보다 높게 하고, 어량(魚梁)을 끼고 성안을 내려다보며 쏘게 만들고, 시기를 정하여 장차 공격하려 할 적에 성내가 위축되었었는데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모반하였다는 소식이 이르니, 수주(隋主)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현감(玄感)과 함께 통모(通謀)하다가 발각되매 고구려에 망명하였으므로, 고구려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수주(隋主)는 밤을 틈타 여러 장수를 불러 군사를 끌고 돌아가라 하였다. 군사 자재와 기구는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채 진영의 막사를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군사들은 두려워하고 술렁거려 대오를 분별할 수 없었다. 고구려 군은 이를 알았으나 감히 성밖에 나가서 싸우지 못하고, 다만 성안에서만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다가 다음 날 오시(午時)에야 차차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였으나, 오히려 수군이 속이는가 의심스러워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수천의 군사를 내어 추격했는데, 그들의 군사가 많은 것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쫓지 못하고, 항상 80~90리 거리를 두었다. 뒤쫓아 장차 요수에 이를 무렵에야 수주[御營]가 다 건너간 것을 알고 후군(後軍)을 핍박하니, 후군만도 오히려 수만 인이었다. 고구려 군사가 뒤를 따라 습격하여 수천 인을 죽였다.
■신라 진평왕 36년, 고구려 영양왕 25년, 백제 무왕 15년(614)
◯춘2월 수주 광(廣)이 다시 천하 군사를 징집하여 고구려를 쳤다.
수주(隋主)가 다시 고구려를 토벌할 의론을 하니 군신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황제(黃帝)는 52차를 싸우고 성왕(成王)은 27차를 정벌하여서, 덕이 제후에게 베풀어지고, 영(令)이 온 천하에 행해졌다. 노 방(盧芳)은 조그마한 도적이로되 한 고조(漢高祖)가 오히려 친히 쳤고, 외효(隗囂)의 남은 무리 때문에 광무(光武)가 몸소 농(隴)에 올라 촉(蜀)을 바라보았으니 어찌 사나운 무리를 없애고 난리를 평정하여 수고한 뒤에 편안함을 구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제 고구려가 거만 불공하니 육수(六帥)를 나누어 백도(百道)로 함께 나아가라. 짐(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환도(丸道 고구려 수도)에서 말마(秣馬 말을 먹임)하고, 요수에서 관병(觀兵 군사를 사열함)할 것이다. 다만 으뜸가는 악(惡)만을 없애고 나머지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겠으니, 이를 선포하여 다 내 뜻을 알리라.”
◯춘7월 수주 광(廣)이 회원진(懷遠鎭)에 이르자 고구려가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니, 광(廣)이 곧 군사를 파(罷)하였다.
7월, 계축일에 수주(隋主)가 회원진(懷遠鎭)에 유진(留陣)하였다. 이때에 온 천하가 이미 혼란하여 군사를 징집하여도 응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만연되어 황룡(黃龍) 동쪽으로부터 해골(骸骨)이 잇달아 사망자가 십중팔구였다. 고구려도 피폐하였다. 수장(隋將)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 일명 비사(卑沙)이다. 등래해(登萊海)로부터 평양으로 가려면 먼저 비사성(卑沙城)에 이르러야 한다. 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가 이를 요격하였으나 호아(護兒)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나가려 하니, 고구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인하여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 수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군사를 철수하며 호아(護兒)를 불러 돌아가게 하고, 왕에게 입조(入朝)하라고 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수주가 장수들에게 칙령하여 무장을 엄히 하고 다시 뒷일을 도모하게 했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당의 이연수(李延壽)가 말하기를,
“요동이 군현에 들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여러 나라들이 원정(元正 매년 정월(正月) 세수(歲首))에 조회하고 조공을 궐한 적이 없는데, 문덕(文德)으로써 회유하지 못하고 문득 무력[干戈]을 발동함으로써 안으로는 부강을 믿고, 밖으로는 땅을 넓히는 것만 생각하여, 이기는 것으로 원망(怨望)을 취하고 노여운 것으로 군사를 일으키니, 이같이 하고서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말은 예로부터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고구려 사신이 수군 진영에 갈 적에 한 고구려 사람이 몰래 작은 쇠뇌를 품속에 감추고 사신을 따라가서 수주가 있는 처소로 갔는데, 수주가 사신을 접견하고 글을 받아 읽을 때, 쇠뇌를 쏘아 수주의 가슴을 맞추었다. 수주가 놀라고 두려워 얼굴빛을 잃었다. 군중(軍中)이 요란한 틈에 쇠뇌를 쏜 그 사람이 빠져 나갔으므로 그를 찾았으나 잡지 못하고, 곧 군사를 돌리게 하면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짐이 천하의 임금이 되어서 친히 작은 나라를 쳐서 승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만대의 웃음거리다. 이제 이 사람을 보니, 반드시 형가(荊軻)ㆍ섭정(聶政)같은 무리이다.”
하고 곧 환군(還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