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해동제국기(신숙주)

청담(靑潭) 2018. 9. 29. 22:43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신숙주(申叔舟 1417-1475)


1438년(세종 20 : 20세)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21세)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26세)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년(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해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문종 2)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며,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超拜)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誥命: 임명장)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土田)·노비·안마(鞍馬)·의복을 함께 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 방면에 야인(野人)의 잦은 침입으로, 강경론을 폈다. 1460년에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였다.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遺命: 유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 서무를 참결(參決: 참여하여 결정함.)하였다. 같은 해 이른바 남이(南怡)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大統)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신숙주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개찬·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또한 여러 나라의 음운(音韻)에 밝아, 여러 역서(譯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館餽: 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75년(성종 6)에 일생을 마쳤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할 정도로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사육신·생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道學的)인 분위기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대에서의 신숙주의 정치적·학문적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신숙주를 좋게 평가하는 표현으로는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 작은 절의)에는 구애되지 않았다.’든가,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을 열세 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 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배려는 외교·국방면에서 신숙주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가 신숙주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전하는 필적으로는 송설체의 유려함을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찬문(贊文)과 진당풍(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전하는데, 1644년(인조 22)에 7세손 신숙(申洬)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완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서(序)

...삼가 살피건대, 동해(東海) 가운데 자리잡은 나라가 하나뿐이 아니지만 그중에서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큰 나라입니다. 그 땅이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제주도(濟州島) 남쪽에까지 이르러서 유구국(琉球國)과 서로 접경을 이루게 되어 그 지세가 매우 길다랗습니다. 초기에는 각처에서 부락의 집단 체제로 나라를 세웠던 것을 주 평왕(周平王) 48년(기원전 772)에 그들의 시조(始祖)인 협야(狹野)가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고 비로소 주군(州郡)을 설치했으나 대신(大臣)들이 각각 점령하여 통치하다보니 마치 중국의 봉건 제후(封建諸侯)처럼 되어서, 제대로 통속(統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武術)에 정련(精練)하고 주즙(舟楫)에 익숙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을 만약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 주면 예절을 차려 조빙(朝聘)하고, 그렇지 못하면, 문득 함부로 표략(剽掠)을 하였던 것입니다. 전조(前朝 고려(高麗)) 말기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그들을 잘 어루만져 주지 않았더니 그들이 연해(沿海) 지역 수천 리 땅을 침범하여 쑥밭으로 만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분기(奮起)하시어, 지리산(智異山)ㆍ동정(東亭)ㆍ인월역(引月驛)ㆍ토동(兎洞) 등지에서 수십 차례 역전(力戰)하시고 난 다음부터는 적이 함부로 덤비지 못하였습니다. 개국(開國)한 이후로 역대(歷代)의 군주들께서 계승하시어 정치를 잘하시니, 나라 안의 정치가 이미 융성(隆盛)하게 되고, 외지(外地)도 곧 복종하였으므로, 변방의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국기(日本國紀)

■대마도(對馬島)

군(郡)은 8개이다. 민가는 모두 해변 포구를 따라 살고 있는데, 모두 82포(浦)다. 남에서 북은 사흘길이고, 동에서 서는 하룻길, 혹 한나절 길도 된다. 4방이 모두 돌산[石山]이라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활한다. 종씨(宗氏)가 대대로 도주(島主) 노릇을 하는데, 그 선조는 종경(宗慶)이다. 종경이 죽자 아들 영감(靈鑑)이 계승하고, 영감이 죽자 아들 정무(貞茂)가 계승하고, 정무가 죽자 아들 정성(貞盛)이 계승하고, 정성이 죽자 아들 성직(成職)이 계승하였다. 성직이 죽자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 정해년(1467, 세조 13)에 도민(島民)들이 정성(貞盛)의 동모제(同母弟)인 성국(盛國)의 아들 정국(貞國)을 세워 도주(島主)로 삼았다. 군수(郡守) 이하 지방 관리는 모두 도주가 임명하는데 또한 세습(世襲)하며, 토지와 염호(鹽戶)를 나누어 예속시킨다. 3교대로 7일 만에 서로 교체하여 도주의 집을 수직한다. 군수는 자기의 관할 구역을 매년 흉작인지 풍작인지를 실지로 조사하여 세를 받아들이되, 그 3분의 1을 취하고 또한 그것을 3분하여 2분은 도주에게 바치고 1분은 자신이 사용한다. 도주의 목장은 4개소인데, 말이 2천여 필이나 되고, 등허리가 굽은 말이 많다. 생산품은 감귤(柑橘)과 목저(木楮)뿐이다. 남과 북에 높은 산이 있는데 모두 천신(天神)이라 명칭하여 남은 자신(子神), 북은 모신(母神)이라 한다. 풍속이 신(神)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소찬(素饌)으로 제사지내고, 산의 초목이나 금수(禽獸)도 감히 침범하는 사람이 없고, 죄인이 신당(神堂)으로 도망가면 또한 감히 쫓아가 체포하지 못한다.

위치가 해동(海東) 여러 섬들의 요충(要衝)이어서 우리나라에 왕래하는 각지의 추장들이 반드시 경유해야 할 곳이므로, 모두 도주의 문인(文引)을 받은 뒤에라야 오게 된다. 도주 이하가 각기 사선(使船)을 보내는 것이 해마다 일정한 액수(額數)가 있는데, 대마도는 우리나라에 가장 가까운 섬인데다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해마다 쌀을 차등 있게 주었다.



▣유구국기(琉球國紀)

국왕은 세습(世襲)한다. 홍무(洪武) 23년 경오(1390, 고려 공양왕 2)에 국왕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來朝)하였는데,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이라 일컬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고, 그 세자(世子) 무녕(武寧)도 방물(方物)을 헌상(獻上)하였다. 영락(永樂) 7년 기축(1409, 태종 9)에 그 손자 사소(思紹)가 사신을 보내어 유구국 중산왕이라 일컬었다. 그 서장(書狀)의 대략에,

“선조왕(先祖王) 찰도(察度)와 선부왕(先父王) 무녕(武寧)이 잇따라 훙서(薨逝)하여 각 채(寨)가 불화(不和)하게 되었으므로,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그동안 소원했었습니다. 금번에 명 나라 황제의 은전(恩典)으로 왕작(王爵)의 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16년 무술(1418, 태종 18)에 또 사신을 보내어, 유구국 중산왕 이남 하통 연우진(琉球國中山王二男賀通蓮寓鎭)이라 일컬었다. 그 서장의 대략에,

“나의 형이 금년에 서거(逝去)하였으므로 내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통문(通問)합니다.”

하였다. 선덕(宣德) 6년 신해(1431, 세종 13)에는, 유구국 중산왕 상파지(琉球國中山王尙巴志)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경태(景泰) 4년 계유(1453, 단종 1)에는, 유구국 중산왕 상금복현(琉球國中山王尙金福見)이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6년 을해(1455, 세조 1)에는, 유구국왕 상태구(琉球國王尙泰久)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천순(天順) 2년 무인(1458, 세조 4)에는, 유구국왕 현(琉球國王見)이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3년 기묘에는 다시, 상태구(尙泰久)라 일컫고 사신을 보내었다. 5년 신사(1461, 세조 7)에는 사신을 보내어, 유구국왕 상덕(琉球國王尙德)이라 일컬었으며, 성화(成化) 2년 병술(1466, 세조 12)에는 또, 상덕이라 일컫고 사신을 보내었다. 7년 신묘(1471, 성종 2) 겨울에는 국왕이 사신 자단서당(自端書堂)을 시켜 내조(來朝)하였는데, 자단이 말하기를,

“상파지(尙巴志) 이상은 알 수 없으되, 상(尙)은 성(姓)이고, 파지(巴志)는 호이고, 이름은 억재(億載)이며, 상금복현(尙金福見)의 이름은 김황성(金皇聖)이요, 상태구(尙泰久)의 이름은 진물(眞物)이요, 상덕(尙德)의 이름은 대가(大家)인데, 형제가 없습니다. 지금 왕의 이름은 중화(中和)이고, 아직 호는 없는데, 나이 16세에 종성단봉전주(宗姓丹峯殿主)의 딸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왕의 아우의 이름은 어사(於思)인데, 나이 13세이고, 다음 아우의 이름은 절계(截溪)인데 나이 10세입니다. 국왕이 거주하는 지명이 중산(中山)이므로 중산왕(中山王)이라 일컬었습니다.”

하였다. 찰도(察度) 때부터 사신을 보내기 시작한 이래,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았으며, 방물(方物)의 진상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더러는 직접 자기 나라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자기 나라에 있는 일본 사람을 이용하여 사신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 서(書)를 혹은 전(箋)으로, 혹은 자문(咨文)으로, 혹은 서장(書狀)을 보내기도 하여 격식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그 칭호와 성명도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 유구국은 우리나라와 거리가 가장 멀어서, 그 상세한 것을 구명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 조빙(朝聘) 및 명호(名號)의 차례만을 기록하여 후일의 고증을 기다린다.

※대만(臺灣)의 동북방, 일본 구주 남방에 있던 나라. 지금의 충승제도(沖繩諸島)이다. 유구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이 《수서(隋書)》인데, 유구(流求), 또는 유규(流虯)로 되어 있고, 《당서(唐書)》에는 유구(流求)ㆍ유귀(流鬼), 《원사(元史)》에는 유구(瑠求)로 되어 그 명칭이 다르나, 《명사(明史)》이후의 기록에는 유구(琉球)로 표시되어 있다. 수(隋) 나라 이후 역대로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명(明) 나라 때는 정식으로 중국의 책봉(冊封)을 받았다. 일본에게도 실정막부 때부터 조공을 바치고 교역의 이(利)를 획득해 왔는데, 1875년 무렵 일본이 왕을 폐하고 충승현으로 만들었다.


■국속(國俗)

땅은 좁고 사람이 많으므로, 해상 무역(海上貿易)을 직업으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남만(南蠻)과 중국에 교통하고, 동쪽으로는 일본과 우리나라에 교통한다. 일본 및 남만의 상선이 또한 그 국도(國都)와 해변 포구에 모이므로, 국인들이 포구에 술집을 설치하여 서로 교역(交易)한다.

○ 국왕은 누(樓)에 거처하는데, 매번 외국 사신을 대접하려면 가루(假樓)를 만들고 그곳에서 접대하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국서(國書)가 가면 깃발을 갖추어 출영한다.

○ 좌ㆍ우장사(左右長史) 두 사람이 있어, 국왕의 명령을 내고 들이며, 또한 오군 통제부(五軍統制府), 의정사(議政司), 육조(六曹)가 있다.

○ 그 땅의 기후는 늘 따뜻하여 서리와 눈이 오지 않으므로, 초목은 잎이 시들어 떨어지지 않는다.

○ 논은 한 해 동안에 두 번 수확하는데, 매양 11월에 씨를 뿌리고 3월에 모내기하여 6월에 수확하며, 즉시 또 씨를 뿌리고 7월에 모내기하고 10월에 또 수확한다.

남녀의 의복은 일본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사선 정수(使船定數)

국왕 및 여러 추장(酋長)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접대한다.

대마도주(對馬島主)는 한 해 동안에 배 50척을 보내기로 하였다. 혹 딴 일로 특별히 배를 보내게 되면 특송(特送)이라 일컬었다. 일정한 수가 없음.

○ 여러 주(州)의 여러 추장은, 더러는 한 해 동안에 배 1, 2척만 보내기도 하고, 현재 합계가 40인인데 명단이 여러 주(州)에 있음 더러는 한 해 동안에 배 1척만 보내기도 하여, 현재 합계가 27명인데 그 명단이 여러 주에 있음 모두 일정한 약속이 있다. 그 나머지 여러 추장은 혹 일이 있어 내조(來朝)하기도 하고, 혹 사자를 보내기도 하는데, 모두 그 임시에 임금의 교명(敎命)을 받아 응접하였다.

○ 우리나라의 관직을 받은 사람은 한 해 동안에 한 차례 내조(來朝)하고, 사람을 보내지 못한다.

국왕의 사신은 으레 부선(副船)이 있어 혹은 3척까지 되기도 하고, 추장의 사자는 다만 부선(副船)이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배 1척씩이다.

○ 여러 사자(使者)는 누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문인(文引)을 받은 다음에야 우리나라에 오게 된다.


■사선 대소선부 정액(使船大小船夫定額)

배는 세 등급이 있는데, 25척(尺) 이하가 소선(小船)이고, 26척에서 27척까지가 중선(中船)이며, 28, 29척에서 30척까지가 대선(大船)이다. 선부(船夫)는 대선이 40명, 중선이 30명, 소선이 20명이 정액(定額)이 된다.

○ 객사(客使)가 우리나라에 오면 삼포(三浦)의 절제사(節制使)ㆍ만호(萬戶)가 차사원(差使員)과 더불어 선체(船體)를 재고, 또한 선부(船夫)의 인원수를 점검하여, 선부가 비록 많더라도 정원을 초과하지 못하며, 만일 부족하면 점검된 인원수대로만 요(料)를 주었다. 이 때문에 삼포(三浦)에 항시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속여 점검을 받고, 그 요(料)를 나누어 먹었으므로 간사와 협잡이 날로 심해졌다. 현재는 임금의 교명(敎命)을 받아 다만 선체(船體)만 재어 3등급으로 액수를 정하여 요(料)를 주고 따로 사람은 점검하지 않는다.

○ 국왕의 사신은 선체를 재거나 인원수를 점검하지 않고 다만 보고 파악한 것을 액수로 정하여 보고하고 아울러 요(料)를 준다.


■급도서(給圖書)

무릇 도서를 지급할 때에는 견본을 종이에 붙여 예조(禮曹)와 전교서(典校署)에 두고, 또한 삼포(三浦)에도 나누어 두었다가, 서장(書狀)이 올 적마다 빙고(憑考)하여 그 진위(眞僞)를 식별한다.

※급도서(給圖書) : 증빙인부(證憑印符)임. 도서의 종류는 처음에는 수급자(受給者)의 명단을 새겨 주되 상아부(象牙符)를 만들어 좌ㆍ우로 반분하여 쌍방이 한 쪽씩 갖고 있으면서 사절(使節)과 선박 왕래에 증빙으로 지참, 대조케 하였으나, 그 뒤에 상아부가 위조로 남발되는 폐단이 생기자 다시 동인(銅印)으로 개주(改鑄)하여 발급하였음.


■제사 영송(諸使迎送)

국왕의 사신은, 3품(品)의 조관(朝官)을 보내어 경통사(京通事)를 인솔하고 삼포(三浦)에 가서 영접케 하고, 돌아갈 때도 호송케 한다.

○ 여러 큰 추장의 사자는, 경통사를 보내어 삼포에 가서 영접케 하고, 돌아갈 때에는 조관이 경통사를 인솔하여 호송케 한다.

○ 대마도주(對馬島州)의 특송사(特送使)와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의 사자는, 향통사(鄕通事)가 인솔하여 상경(上京)하면 조관이 호송케 한다.


■삼포 숙공(三浦熟供)

○ 국왕의 사신이 삼포에 머물 때에는 상관인(上官人)ㆍ부관인정사(正使)는 상관인이라 칭하고 부사(副使)는 부관인이라 칭한다. 뒤의 것도 이와 같음 ㆍ정관(正官)선주(船主)와 압물시봉(押物侍奉)을 정관이라 칭한다. 뒤의 것도 이와 같음 ㆍ수행원은 인원을 헤아려 잘 익힌 음식을 제공하고, 그 나머지 선부(船夫)는 모두 요(料)를 지급한다.

○ 여러 추장의 사자와 특별히 보낸 절도사의 사자는 정관(正官) 이상은 잘 익힌 음식을 제공한다.

○ 여러 추장의 사자 이하는 모두 요(料)를 지급한다. 하루 두 끼를 준다. 모두 요를 주는 것은 다 같음

○ 국왕의 사신은, 조반(早飯)에는 정관(正官) 이하는 거식칠과상(車食七果床)을 차려주고, 수행원은 거식오과상(車食五果床)을 차려주는데, 모두 삼도탕(三度湯)을 제공한다.

○ 조ㆍ석반(朝夕飯)은,상관인(上官人)ㆍ부관인은 칠첩상(七楪床)의 밥과 국에다 두 가지 탕(湯)과 두 가지 적(炙)을 제공한다.

○ 정관(正官)과 수행원은, 오첩상(五楪床)의 밥과 국에다 두 가지 탕과 한 가지 적을 제공한다.

○ 점심은, 상관인(上官人)ㆍ부관인ㆍ정관(正官)은 5첩상의 밥과 국에다 한 가지 탕을 제공하고, 수행원은 삼첩상(三楪床)의 밥과 국에다 한 가지 탕을 제공한다.

○ 여러 추장(酋長)의 사자(使者)는 국왕의 사신과 같으며, 절도사(節度使)의 특송사(特送使)도 국왕의 사신과 같다. 조반(早飯)은 건어(乾魚)가 주첩(主楪)인 오과상(五果床)에다 세 가지 탕을 제공한다.


■삼포 분박(三浦分泊)

대마도에서 한 해 동안에 배 50척을 보내는데, 25척은 내이포(乃而浦 제포(齊浦))에 정박하고, 25척은 부산포에 정박하며, 나머지 여러 사자의 배는 각자가 임의대로 삼포(三浦)에 나누어 정박한다


■상경인 수(上京人數)

○ 국왕의 사신은 25인이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15인이다.

○ 특송(特送) 사자는 3인인데, 별도의 예는 배로 한다.

○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의 사자는 3인인데, 짐이 5바리[駄]가 넘으면 1인을 증가한다. 매양 5바리가 되면, 인원을 증가하되 5인을 초과하지는 못한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1인인데, 짐이 5바리가 되면, 1인을 증가하되 3인을 초과하지는 못한다.

○ 관직을 받은 사람[受職人]은, 당상관(堂上官)은 3인을 보내고, 상호군(上護軍) 이하는 2인을 보낸다.

○ 대마도에서는 배는 50척을 보내는데, 배 1척마다 1인을 보낸다. 짐이 5바리에 차면 1인을 증가하되, 2인을 초과하지 못한다.


■삼포연(三浦宴)

○ 국왕의 사신은, 삼포(三浦)에 체류하는 동안 연회를 3회 제공하고, 그중 1회는 선위사(宣慰使)가 차리고, 2회는 차사원(差使員)이 차린다. 돌아갈 때에는 1회를 제공한다. 차사원이 차린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삼포에 체류하는 동안 2회를 제공하고, 돌아갈 때에는 1회를 제공한다. 모두 차사원이 차린다. 이하도 이와 같음

○ 절도사(節度使)의 특송 사자는, 삼포에 체류하는 동안 1회를 제공하고, 돌아갈 때도 이와 같다. 일기도(壹岐島) 이외의 여러 추장의 사자는 삼포에 체류하는 동안 1회를 제공한다.

○ 선위사(宣慰使)가 차린 연회는 상관인(上官人)ㆍ부관인에게는 장거식(長車食) 외에 안주를 차리고, 소일과(小一果) 사항상(四行床)을 배설한다. 정관(正官)도 선위사가 차리는데, 다만 한 가지 과실이 없다. 수행원에게는 마제거식(馬蹄車食) 칠과상(七果床)과 지야생화(紙野生花)와 이하도 이와 같음 3가지 탕에 점점과(點點果)와 대육(大肉)을 꿩과 도야지 차린다.

○ 차사원(差使員)의 연회는 상관인(上官人)과 부관인에게는, 마제거식 외에 안주를 차리고, 사항상을 배설한다. 정관(正官) 대객(對客)에게는 삼항상을 배설한다. 수행원은 마제거식과 칠과상을 차리며, 그 나머지는 선위사가 차리는 연회와 같다. 국왕의 사신 이하는 모두 이와 같음

○ 연회할 때마다, 배에 머물러 있는 선부(船夫)에게는 매인에게 밀가루 1되, 기름 1홉, 건어(乾魚) 1마리, 생어육(生魚肉) 적당량, 백주(白酒) 1복자[鐥]를 제공한다.


■노연(路宴)

○ 국왕의 사신은, 경상도에서는 세 곳에서 노연(路宴)을 차리는데, 그 한 곳은 관찰사가 차리고, 그 두 곳은 수령이 차리며, 충청도와 경기도에서는 각각 한 곳인데, 관찰사가 차린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경상도에서는 두 곳인데, 그 한 곳은 관찰사가 직접 차리고, 한 곳은 수령이 차리며, 충청도와 경기도에서는 각각 한 곳인데, 관찰사가 직접 차린다. 돌아갈 때도 이와 같다.

○ 절도사의 특송 사자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각각 한 곳이다. 돌아갈 때도 이와 같다. 수령이 차림

○ 여러 추장의 사자 이하는, 일기도 이외의 사람에게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각각 한 곳이고, 대마도 사람에게는 경상도 한 곳 뿐이다. 돌아갈 때도 이와 같다. 수령이 차림

○ 관찰사의 연회 물품은 삼포 선위사의 연회와 같고, 수령의 연회 물품은 삼포 차사원 연회의 물품과 같다. 국왕의 사신 이하도 이와 같음


■경중영전연(京中迎餞宴)

○ 국왕의 사신은 한강(漢江)에서 영접하여 연회한다. 상관인(上官人)ㆍ부관인에게는 거식칠과상(車食七果床)을 차리고, 정관(正官) 이하는 거식오과상을 차리는데, 모두 네 가지 점점과(點點果)와 유밀과(油蜜果) 오성이부(五星二部)ㆍ실과(實果) 오성이부ㆍ나물과 고기를 교합한 오성이부, 이상은 예빈시(禮賓寺)에서 제공한다 대육(大肉) 건저(乾猪) 3마리, 사재감(司宰監)에서 제공한다 술 사온서(司醞署)에서 제공한다 등을 차린다.

○ 여러 추장의 사자가 처음 사관(使館)에 도착했을 때의 영접 연회 물품은, 국왕 사신을 한강에서 영접하는 연회의 물품과 같다. 돌아갈 때에는 모두 한강에서 전송한다.


■주간의 술 대접[晝奉杯]

○ 국왕의 사신에게는 3일에 한 번씩 제공한다. 상관인(上官人)ㆍ부관인ㆍ정관(正官)ㆍ대객(對客)은 예빈시정(禮賓寺正)이 사정이 있을 경우 내자시정(內資寺正)이나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대행함 거식칠과상(車食七果床)을 제공하고, 수행원에게는 거식오과상을 제공하는데, 모두 세 가지 탕에 점점과와 예빈시(禮賓寺)에서 차림 ㆍ술 사온서(司醞署)에서 차림 등을 제공한다.

○ 여러 추장의 사자도 국왕의 사신과 같다.


■경중 일공(京中日供)

국왕의 사신에게 제공하는 조반(早飯)과 세 끼 식품은 삼포(三浦)에서와 같다. 식품을 그냥 받기를 원하면, 조반은 익힌 음식으로 주고, 나머지 세 끼니는 5일에 한 번씩 합해 준다. 정관(正官) 이상은, 한 사람에게 중미(中米) 2말, 황두(黃豆) 6말, 선주압물시봉(船主押物侍奉)은 콩 5말 밀가루 7되, 마른고기[全鮑] 1백 50개, 조기 5마리, 청어 20마리, 새우젓 3되, 준치 2마리, 생선 5마리, 소금 5홉, 참기름 2홉, 간장 3되, 초 1되 5홉, 미역 10냥, 개자(芥子) 2홉, 차(茶) 1홉을 준다. 승려에게는 생선과 젓을 빼고 참버섯, 표고버섯, 죽순, 오해소(吾海召) 각 5홉씩을 준다. 청주(淸酒)는 3병, 땔나무[燒木] 35근, 탄(炭)은 2월부터 9월까지는 2말 5되, 10월부터 정월까지는 5말 5되를 준다. 수행원은, 한 사람에게 중미 2말, 황두(黃豆) 4말, 메밀[木麥米] 5홉을 주고, 그 나머지는 위와 같다.

○ 여러 추장의 사자에게 조반과 세 끼 식품을 그냥 제공하는데, 국왕 사신의 예와 같다.

○ 대마도 특송절도사의 사자도 또한 국왕의 사신과 같다. 도급(都給)할 적에는 밀가루ㆍ말린 고기ㆍ준치ㆍ생선ㆍ차(茶)ㆍ참버섯은 제외한다.

○ 여러 추장의 사자 이하는, 1일 두 끼 식품을 그냥 제공하는데, 중미 1말 5되, 황두 3말, 수행원은 2말 청주 2병에 잡물은 특송사의 예와 같다. 조반은 익힌 것으로 대접한다.

○ 싸리 홰[杻炬]는, 국왕의 사신에게 매일 3자루씩 제공한다. 사재감에서 제공한다


■궐내연(闕內宴)

○ 국왕의 사신은, 진상 숙배(進上肅拜)한 뒤에 궤향(饋餉)한다. 상관인과 부관인은, 다식(茶食) 외에 안주를 차리고, 소일과 사항상(小一果四行床)에 사허을거피(絲虛乙巨皮)ㆍ사표화영락(絲表花纓絡)ㆍ주향구(炷香具)를 배설하며, 정관 대객은 내시부(內侍府) 관원이다 마제거식(馬蹄車食) 안주를 차리고, 사항상을 배설한다. 이상은 조계청(朝啓廳)에서 한다 수행원 대객은 내시부 관원이다 마제거식 구과상을 차리는데, 이상은 근정문(勤政門) 남행랑(南行廊)에서 한다 모두 네 가지 탕에 점점과와 상(床)과 탕은 내섬시에서 준비한다 술과 사온서에서 준비한다 대육(大肉)을 사축서(司畜署)에서 준비한다. 이하도 이와 같음 차린다.

○ 하직 숙배(下直肅拜)할 때의 궤향도 진상 숙배의 예와 같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국왕 사신의 예와 같다.

○ 대마도 특송 사신과 구주 절도사의 사신은, 상관인과 부관인에게는 다식(茶食) 외에 안주를 차리고, 소일과 사항상을 배설한다. 허을거피(虛乙居皮)는 국왕 사신의 예와 같음 대객 정관은 마제거식 사항상을 차리고, 수행원은 마제거식 구과상을 차리는데, 모두 네 가지 탕에 점점과와 대육(大肉)을 차린다.

여러 추장의 사자와 관직을 받은 사람이나 대마도 사람들에게는 모두 마제거식 사항상을 차리고, 수행원 대객에게는 마제거식 구과상을 차리는데, 모두 네 가지 탕에 점점과와 건대육을 차린다. 사재감(司宰監)에서 마련한다


■예조연(禮曹宴)

국왕 사신의 위로연은, 상관인과 부관인은 산자(散子) 외에 소일과 사항상과 저포화(紵布花)를 차리며, 권화(勸花)도 같다정관은 장거식 사항상과 지화(紙花)를 차린다. 권화도 같고 수행원도 같다. 예조 당상관은 마제거식 삼항상을 차리며, 이하는 모두 같다 수행원은 마제거식 구과상을 차리는데, 모두 네 가지 탕에 점점과와 이상은 예빈시에서 마련한다 대육(大肉)과 사축서(司畜署)에서 마련한다. 승려에게는 떡을 주는데 예빈시에서 마련한다 술이 사온서에서 마련한다 있다. 기생 2명은 상례(常例)의 배이며, 근장사령(近杖使令) 30명은 모두 조례(皂隷)의 의관(衣冠)을 착용한다. 병조에서 마련한다

○ 전송하는 연회도 이와 같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국왕 사신의 예와 같다.

○ 대마도 특송과 구주 절도사의 사자에 대한 연회 물품은, 국왕의 사신과 같으며, 지화도 있다. 권화도 같다

○ 여러 추장의 사신 이하는, 상관인은 장거식 사항상을 차리고, 수행원은 마제거식 구과상을 차리는데, 모두 네 가지 탕에 점점과와 대육이 있고 지화도 있다. 권화도 같다


■명일연(名日宴)

국왕의 사신 이하 대소 여러 사자에게는 상관인과 정관 이상은, 거식 칠과상을 차리고, 수행원은 거식 오과상을 차리는데, 모두 네 가지 탕에 점점과가 있다.


■하정(下程)

○ 국왕의 사신과 큰 추장의 사절에게는 모두 3회를, 구주 절도사의 사자와 특송사에게는 2회를 하는데, 매회에 떡ㆍ술ㆍ과일ㆍ소채ㆍ해채(海菜)ㆍ말린 버섯ㆍ죽순ㆍ두부ㆍ밀가루ㆍ꿀ㆍ건어육ㆍ생어육ㆍ젓ㆍ겨자ㆍ오미자차(五味子茶)ㆍ기름ㆍ간장ㆍ초 등의 물품을 예조(禮曹)가 위에 아뢰어 지급한다. 그 횟수와 물품은, 접대의 후박(厚薄), 인원수의 다과(多寡), 체류 일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감하여 작정한다.

○ 별하정(別下程)도 이와 같으며 승정원에서 아뢰어 물품을 지급한다.


■예사(例賜)

국왕의 사신으로 상관인과 부관인에게는 각각 아홉새 검은 무명 장삼(長杉) 한 벌, 홑과 겹은 철에 따름 아홉새 흰 무명 장삼 한 벌, 아청색(鴉靑色) 비단으로 안 넣은 남초(藍綃) 승관(僧冠) 하나, 검은 말가죽 운혜(雲鞋) 한 켤레와 아홉새 명주, 흰 모시, 검은 삼베 각 한 필을 지급한다.

○ 여러 큰 추장들의 사자는 국왕 사신의 예와 같다.

○ 구주 절도사의 사자는, 의복과 관과 신만 국왕 사신의 예와 같다. 나머지 물품은 지급하지 않는다


■별사(別賜)

만약 나라에 일이 있어 인견(引見)할 경우 별사(別賜)를 하게 되면 승정원이 위에 아뢰어 정한다. 그 사람의 비중에 따라 주는 물품의 차이가 있다.


■유포일한(留浦日限)

○ 국왕의 사신은 기한이 없다.

○ 여러 큰 추장의 사자는 관찰사의 마문(馬文)이 도착한 뒤 15일이 기한이며, 삼포(三浦)로 돌아간 뒤 20일이 기한이다. 만약 기한 이외에 고의로 머무르는 자는 요(料)를 주지 않으며, 현저한 병이 있는 자는 병이 낫기를 기다린다. 아래도 이와 같다.

○ 관직을 받은 여러 추장의 사자와 대마도 사람들은 마문(馬文)이 도착한 뒤에, 짐이 많은 자는 10일이 기한이며, 짐이 적은 자는 5일이 기한이다. 기한 이외에 고의로 머무르는 자는 요(料)를 주지 않는다.


■선척 수리 장비의 지급[修船給粧]

○ 일기도(壹岐島) 이외의 여러 사자가 선척을 수리하기 위하여 장비의 지급을 요청할 경우에 임금의 교령(敎令)을 받아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참작하여 제급(題給)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여러 사자들이 요(料)를 많이 받기 위해 혹은 배를 수리한다 핑계하고, 혹은 배 수선하는 장비를 받지 못하였다 핑계하면서 고의로 머물기 때문에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지금은 임금의 교령을 받아, 처음에 선척을 헤아릴 때에 선체(船體)의 보존 상태와 배 장비의 쓸 수 있고 없는 정도를 아울러 검열하여 보고하면, 수군절도사가 다시 조사하여 요량하여 주되, 배에 머물고 있는 선부(船夫)더러 미리 수리하여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 판자와 쇠못을 지급한 모든 사유는 돌아가는 날 계문(啓聞)할 때에 아울러 위에 아뢴다.


■일본선 철정 체제(日本船鐵釘體制)

○ 대선(大船)은 큰 못 길이 8치, 무게 2근이요, 중간 못 길이 6치, 무게 1근 14냥이요, 작은 못 길이 5치, 무게 11냥이요, 걸 못[鉅末釘] 길이 6치, 무게 2근 7냥이다.

○ 중선(中船)은 큰 못 길이 7치 7푼, 무게 1근 14냥이요, 중간 못 길이 5치 7푼, 무게 1근 7냥 5전이요, 작은 못 길이 4치 7푼, 무게 9냥이요, 걸 못 길이 5치 7푼, 무게 2근 5냥이다.

○ 소선(小船)은, 큰 못 길이 6치 5푼, 무게 1근 10냥이요, 중간 못은 길이 5치, 무게 1근 3냥이요, 작은 못 길이 4치, 무게 7냥이요, 걸 못 길이 5치, 무게 2근이다.


■상경 도로(上京道路)

내이포(乃而浦 : 창원)에서 금산(金山)ㆍ청주(淸州)를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 하루에 세 참[三息]씩 갈 경우 13일 길이 되고, 대구(大丘)ㆍ상주(尙州)ㆍ괴산(槐山)ㆍ광주(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14일 길이 된다.

부산포(富山浦)에서 대구ㆍ상주ㆍ괴산ㆍ광주(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14일 길이 되고, 영천(永川)ㆍ죽령(竹嶺)ㆍ충주(忠州)ㆍ양근(楊根)을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15일 길이 된다.

염포(鹽浦 : 울산)에서 영천ㆍ죽령ㆍ충주ㆍ양근을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15일 길이 된다.

내이포(乃而浦)에서 수로로 김해(金海)황산강(黃山江)에서 아래로 낙동강(洛東江)까지 창녕(昌寧)ㆍ선산(善山)ㆍ충주(忠州)김천(金泉)에서 한강까지 ㆍ광주(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19일 길이 된다.

부산포(富山浦)에서 수로로 양산(梁山)황산강에서 낙동강까지창녕ㆍ선산ㆍ충주김천에서 한강까지 광주(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21일 길이 된다.

염포(鹽浦)에서 수로로 경주(慶州)ㆍ단양(丹陽)ㆍ충주(忠州)ㆍ광주(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가는 데는 15일 길이 된다.

○ 국왕의 사신은 기한이 없으나, 여러 큰 추장의 사자들 이하는 기한이 지나면 날수를 계산하여 요(料)를 감(減)한다. 혹 병이 나거나, 물이 넘치거나, 짐을 운반하지 못하여, 부득이 머무르는 자는 그 소재지의 관청에서 명문(明文)을 받아오게 한다. 돌아갈 때도 이와 같다.


■과해료(過海料)

대마도는 5일, 일기도는 15일, 구주(九州)는 20일의 요(料)를 준다. 일본 본국과 유구국 사신도 또한 20일 요만 준다.


■급료(給料)

국왕의 사신 이하는 모두 1일 두 끼로 각 1되씩 준다. 국왕의 사신은 상관인(上官人)과 부관인은 중미(中米)를 주고, 나머지는 모두 조미(糙米)를 준다.

○ 국왕의 사신은 혹 배가 2척도 되고 3척도 되는데, 선부(船夫)는 전원에게 요(料)를 준다.

○ 여러 추장의 사자는, 부선(副船)이 있으면 모두 요를 주는데, 다만 선체(船體)의 대소(大小)에 따라 선부의 액수(額數)를 정하여 요를 주고, 만약 그 나머지 사람의 것을 청하면 교령(敎令)을 받아 가감한다. 혹은 절반, 혹은 3분의 1을 준다.

○ 여러 사신으로 격식을 어긴 사람은 예조에 보고한다. 예조에서 교령(敎令)을 받아 주접(住接)을 허용하면 전교를 받은 날로부터 시작하여 요를 주고, 주접을 허용받지 못한 사람은 과해료(過海料)의 절반만 준다.


■제도연의(諸道宴儀)

국왕의 사신을 삼포(三浦)에서 연향(宴享)할 적에, 선위사(宣慰使)는 동벽(東壁)에 위치하고 상관인(上官人)과 부관인(副官人)은 서벽(西壁)에 위치하여 모두 교의자(交椅子)에 앉는다. 차사원(差使員)으로서 당상관(堂上官)은 동벽 선위사의 아래 교의에 앉으며, 당하관(堂下官)은 남쪽 줄의 승상(繩床)에 앉는다. 정관(正官)은 서벽에서 조금 뒤편에 위치하고 수행원(隨行員)은 또 뒷줄에 위치하여 모두 승상(繩床)에 앉는다. ...


■예조연의(禮曹宴儀)

국왕 사신의 연회 의식은, 겸판서(兼判書)ㆍ판서(判書)ㆍ참판(參判)은 동벽에 위치하여 교의에 앉고, 각자 차례대로 조금씩 뒤편으로 가서 앉음상관인과 부관인은 서벽에 위치하여 교의에 앉는다. 정관은 서벽 뒷줄에 위치하고, 수행원은 월대(月臺)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모두 승상에 앉는다. 객사(客使)는 서쪽 협문(夾門)으로부터 들어와 겸판서ㆍ판서ㆍ참판 앞에 나아가 모두 재배하고 모두 답배한다. 각자 자리에 나아가서 앉는다. 정관은 서쪽 뜰로부터 들어온 다음 서쪽 섬돌로 올라가 동벽에 나아가서 재배하고, 답배는 없음 수행원은 중앙 섬돌 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각자 자리에 나아가서 앉는다. 연회가 끝나면 각자 재배하기를 처음의 의례와 같이하고 나간다.

○ 여러 큰 추장의 사신의 연회 의식은, 겸판서는 북벽에 위치하고, 판서는 동벽에 위치하며, 참판은 조금 뒤편에 위치하여, 모두 교의(交椅)에 앉고, 상관인과 부관인은 서벽에 위치하고 정관은 뒷줄에 위치하며 수행원은 월대(月臺) 위에 위치하여 모두 승상에 앉는다. 상관인과 부관인이 서쪽 섬돌로부터 들어와 겸판서 앞에 나아가 재배하면, 겸판서는 읍(揖)으로 답한다. 또 동벽에 판서ㆍ참판에게 나아가서 재배하기를 위와 같이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앉는다. 정관은 들어와 겸판서 앞에 나아가서 재배하고, 다음은 동벽에 나아가서 재배한다. 모두 답례는 없음 수행원은 중앙 섬돌 위에 나아가서 북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동쪽을 향하여 재배한다. 각자 차례대로 자리에 나아가서, 각자에게 술잔을 드리고 연회를 행한다. 연회가 끝나면 각각 재배하기를 처음의 의례대로 하고 나간다.

○ 여러 추장의 사신 연회 의식도 우두머리 추장의 사신 연회 의식과 같다. 답배는 없음.


■삼포금약(三浦禁約)

대마도 사람이 처음에 삼포(三浦)에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를 삼포(三浦)라 이름 와서 우거(寓居)하며 교역과 고기잡이 하기를 청하였다. 그들의 거주지와 통행은 모두 정해진 곳이 있어 이를 어길 수 없으며, 일을 마치면 곧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것을 빙자하여 거류하는 자들이 점차 많아졌다. 세종(世宗)이 명하여 도주(島主) 종정성(宗貞盛)에게 서장(書狀)을 보내어 정통 원년 병진년 모두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니, 정성(貞盛)이 답서에 이르기를,

“마땅히 모두 데리고 돌아가겠사오나, 그중 가장 오랫동안 있던 자 60명은 그대로 거류시키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허락하였다. 그 뒤에도 그대로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세조(世祖)가 또 명하여 도주(島主) 종정직(宗貞職)에게 서장을 보내어 기축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성직(成職)이 조금 뒤에 죽으므로 또 지금 도주 종정국(宗貞國)에게 서장을 보내니, 정국의 말에 이르기를,

“내가 소이전(小貳殿)을 따라 박다(博多)에 2년 동안 있었던 까닭으로 봉행(奉行)하지 못하였사오나, 마땅히 말을 어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병술년(1466, 세조 12)에 순찰사(巡察使) 박원형(朴元亨)이, 궤향(饋餉)으로 인하여 인구를 비밀히 계산하니, 내이포(乃而浦)는 3백 호에 남녀 1천 2백여 명이고, 부산포(富山浦)는 1백 10호에 남녀 3백 30여 명이고, 염포(鹽浦)는 36호에 남녀 1백 20여 명이었다.

그전의 조약에는, 상업하는 사람이 항시 거주하는 인가에 몰래 주접(住接)하는 자, 상업을 빙자하고 막사(幕舍)를 짓는 자, 무역하고 난 뒤에도 고의로 머무르는 자는 모두 엄중히 금지하였다


■조어금약(釣魚禁約)

대마도 사람으로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도주(島主)의 도서(圖書)와 문인(文引) 3통을 받아서 지세포(知世浦 거제도)에 도착하여 문인을 바치면, 만호(萬戶)가 문인을 다시 만들어 준다. 고초도(孤草島)의 정해진 곳 외에는 아무데나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며, 고기잡이를 마치면 지세포에 돌아와서, 만호에게 문인을 돌리고 세어(稅魚)를 바친다. 만호는 도주의 문인에 회비(回批)하여 인(印)을 찍어 돌려 줌으로써 서로 증거로 삼는다. 만약 문인이 없는 자이거나, 풍랑을 감내하지 못한다 핑계하고 몰래 무기(武器)를 가지고 변방 섬에 횡행하는 자는 적(賊)으로서 논죄(論罪)한다.



▣전산전(畠山殿)의 부관인(副官人) 양심조(良心曹)가 궤향일(饋餉日)에 진정(進呈)한 서계(書契)



대체 이 시점에 일본국에서 대란(大亂)이 일어난 근본 원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천전(細川殿)의 우경대부(右京大夫) 원승원(源勝元 세천승원(細川勝元))과 산명전(山名殿)의 좌위독(左衛督) 원지풍(源持豐 산명지풍(山名持豐))은 국왕과 동성이며 누대(累代)의 대신으로서, 좌우에서 보필하여 국가의 실권을 잡았습니다. 마치 조(趙) 나라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가 있었던 것처럼, 양가(兩家)가 권력을 다투어 연일 불화하여 전투를 하기까지 이르렀으니, 천하가 두 쪽으로 나뉘고, 서울에 몰려든 사졸(士卒)이 그 수가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국왕께서 여러 번 화친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나, 사람의 수가 많으면 하늘을 이기게 되고, 세력이 점점 성하게 되면 조처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어서 드디어 난세(亂世)가 되고 말았습니다. ...



▣유구국(琉球國)



1. 지계(地界)는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7, 8일 길이고, 남쪽에서 북쪽까지는 12, 13일 길이다.

1. 논은 1년에 두 번 추수한다. 정월에 파종하여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파종하여 10월에 수확한다. 밭은 한 해에 1번 수확한다.

1. 남자는 귀천의 구별이 없이 머리를 묶어서 오른쪽에 상투를 만든다. 국왕은 항상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관직이 있는 사람은 잡색건(雜色巾)을 사용하고, 서민들은 흰 건(巾)을 사용한다. 옷은 모두 소매가 넓다. 중국 사신이 오면 국왕은 오사모(烏紗帽)를 머리에 쓰고, 홍포(紅袍)를 입고 옥대(玉帶)를 허리에 띠며, 군신(群臣)들은 관직의 품계(品階)에 따라 각각 그 관복(官服)을 입는데, 모두 중국의 의복 제도를 모방하였다.

1.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군신(群臣)들에게 반드시 잔치를 베푼다.

1. 중국 사람으로 와서 거주하는 자가 3천여 가구인데, 별도로 한 성을 쌓아서 살게 하였다.

1. 삼발사(三發司)가 2원(員)인데, 국정(國政)을 맡은 대신이다. 정사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관할하였는데, 본국인이 아니면 이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

1. 장사(長史) 2원과 정의대부(正議大夫) 2원이 용사자(用事者)이다. 모두 중국에서 와서 거주하는 사람으로써 이 벼슬을 시켰다.

1. 조사(朝士)는 직전(職田)이 있고, 또 상판선(商販船)을 관직의 품계(品階)에 따라 계산해 주어, 세금을 받아 먹게 한다.

1. 국왕의 상(喪)에는, 금과 은으로 관(棺)을 장식하고, 돌을 파서 곽(槨)을 만든다. 매장(埋葬)하지 않고 산에 집을 만들어 관을 안치하였다가, 10여일 후에 친족과 비빈(妃嬪)이 모여 곡하고, 관을 열어 시체를 꺼내어 살을 모두 긁어서 물에 던져버리고 뼈만 관에 도로 넣는다. 사(士)나 서민의 상도 또한 이와 같으나, 다만 석곽(石槨)이 없다.

1. 부모의 초상에 사대부(士大夫)는 1백 일, 서민은 50일 동안을 고기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

1. 부인이 자녀가 없고 남편이 죽으면, 스스로 목을 찔러 남편을 따라 죽는 사람이 10이면 7, 8명은 된다. 왕도 또한 이것을 능히 금지하지 못한다.

1. 형벌은 유배(流配)와 사형은 있어도,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은 없다.

1. 천지단(天地壇)이 있어, 무릇 기도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여기에서 제사지내며,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도 그 단에 나아가 분향하고, 그 분향한 재를 가져다 입에 삼키고 맹세하기를, ‘우리나라의 일을 마땅히 저 나라에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뒤에 출발한다.

1. 나라의 동남쪽에 수로로 7, 8일을 가면 소유구국(小琉球國)이 있는데, 군장(君長)이 없다. 사람은 모두 장대한데 의복의 제도가 없다. 사람이 죽으면 친족들이 모여 그 고기를 베어 먹고, 그 두개골은 금으로 칠하여 음식 그릇으로 삼는다.



▣어음 번역(語音飜譯)

伱是那裏的人 → 우라마피츄 : 너는 어디 사람인가?

我是日本國的人 → 마온야마도피츄 : 나는 일본국 사람이다.

伱的姓甚麽 → 우라나와이갸이우가 : 너의 성은 무엇인가?

伱的父親有麽 → 우라야샤아리 : 너는 부친이 있는가?

伱哥哥有麽 → 우라신자아리 : 너는 형님이 있는가?

伱姐姐有麽 → 우라아리 : 너는 누이가 있는가?

妹子有麽 → 오라리아리 : 여동생이 있는가?

伱幾時離了本國 → 우라읻시마타셰기 : 너는 언제 본국을 떠났는가?

我舊年正月起身 → 마온구조쇼옹과탈졔 : 나는 거년 정월에 떠났다.

伱幾時到這裏 → 우라읻고마징가 : 너는 언제 이곳에 도착하였는가?

我們今年正月初三日纔到這裏 → 마온구두ㅅ샤옹과취라지긷졔 : 우리들은 금년 정월 초 3일에 겨우 이곳에 도착하였다.

伱初到江口是好麽 → 우라믿라모도징가 : 너는 처음에 항구에 도착하매 좋던가?

一路上喫食如何 → 우라민지민지아긔모로란도 : 오는 길에 밥 먹기가 어떻던가?

多酒 → 오부시 : 술이 많았다.

好下飯 → 오샤가라나 : 반찬이 좋던가?

無甚麽好下飯 → 사가나무야랴랃루모 : 반찬이 별것이 없었다.

請一鍾酒 → 긔부테이긔라 : 술 한 잔 들어라.

湯酒 → 고와가시 : 술을 데우랴.

灑酒來 → 사긔와가지구 : 술을 걸러서 오너라.

撒酒風 → 가구뤼 : 주기(酒氣)가 있으니.

不要饋他喫 → 아로마라 : 저 사람에게 먹이지 말고.

小饋他喫 → 예계나구로마셰 : 저 사람에게 조금만 먹여라.

酒盡了 → 긔미나랃디 : 술이 다 없어졌다.

請裏頭要子 → 우지바라왜쳐아비 : 안방에 와서 놀자.

平坐 → 마고유왜리 : 편히 앉아라.

面紅 → 라루아개 : 얼굴이 붉다.

面白 → 자라루시루사 : 얼굴이 희다.

這箇叫甚麽子 → 구야루욱가 : 이것은 무엇이라 하는가?

這箇人心腸好 → 고노피죠기모로요다 : 이 사람은 마음이 좋다.

這箇人心腸惡 → 고노피죠기모로요왈사 : 이 사람은 마음이 나쁘다.

天 → 텬 : 하늘

天陰了 → 텬구모데 : 날씨가 흐렸다.

天晴了 → 텬과리데 : 날씨가 개었다.

下雨 → 아믜믈데 : 비가 내린다.

雨晴了 → 아믜과릴데 : 비가 개었다.

下雪 → 유기푸리 : 눈이 내린다.

雪住了 → 유기피굄니 : 눈이 그쳤다.

日頭 → 텬다 : 태양.

日頭上了 → 텬다앙갇데 : 해가 떠오르다.

日頭落了 → 텬다야며잇데 : 해가 지다.

風 → 칸피 : 바람.

天亮了 → 이우가미 : 날이 새었다.

淸早 → 믜지 : 이른 아침.

晌午 → 필마 : 오정 때.

晚夕 → 요감븨 : 저녁 때.

黑夜 → 이우루 : 밤.

白日 → 피루 : 낮.

暖和 → 록시 : 날씨가 따스하다.

天熱 → 악사 : 날씨가 덥다.

凉快 → 다 : 날씨가 서늘하다.

向火 → 피루구미 : 불을 쬐다.

春 → 파루 : 봄.

夏 → 낟 : 여름.

秋 → 아기 : 가을.

冬 → 퓨유 : 겨울.

今日 → 쿄오 : 오늘.

昨日 → 커리우 : 어제.

明日 → 아자 : 내일.

後日 → 아삳지 : 모레.

這月 → 고로기 : 이 달.

來月 → 뎨왕과 : 내 달.

開年 → 먀우년 : 새해.

拜年 → 쇼용과노패 : 새해를 축하함.

地 → 지 : 땅.

地平正 → 지마상고 : 땅이 평평하다.

山頂 → 노지 : 산꼭대기.

山底 → 사노시 : 산아래.

大路 → 오부미지 : 큰 길.

小路 → 구미지 : 작은 길.

酒 → 사긔: 술.

白酒 → 링가나긔 : 소주 즉 배갈.

淸酒 → 요가긔 : 맑은 술.

飲酒 → 누미 : 술을 마신다.

酒有 → 사긔아리 : 술이 있다.

酒無了 → 긔 : 술이 없다.

酒醉了 → 긔이우디 : 술에 취했다.

飯 → 음바리 : 밥.

喫飯 → 앙긔리 : 밥을 먹는다.

做飯 → 오바리데 : 밥을 짓는다.

大米飯 → 코메로오반리 : 쌀밥.

小米飯 → 아와로오반리 : 좁쌀밥.

做下飯 → 사가나□라리 : 반찬을 만든다.

師米 → 고믜시랑가지 : 쌀을 찧는다.

肉 → 시시 : 짐승의 고기.

魚 → 이우 : 생선.

鹿肉 → 카우루시시 : 사슴 고기.

猪肉 → 오와시시 : 돼지 고기.

兎肉 → 우상가시시 : 토끼 고기.

油 → 부라 : 기름.

鹽 → 마시오 : 소금.

醬 → 미쇼 : 간장.

醋 → 우 : 식초.

芥末 → 난다리카다시 : 개자가루.

胡椒 → 코슈 : 후추.

川椒 → 산시오 : 조피나무.

生薑 → 옴가 : 생강.

葱 → 깅비나 : 파.

蒜 → 픠루 : 마늘.

菜蔬 → 쇼 : 소채.

燒茶 → 차와가시 : 차를 끓이다.

甜 → 아미 : 맛이 달다.

苦 → 리가 : 맛이 쓰다.

酸 → 사 : 맛이 시다.

淡 → 아바사 : 맛이 싱겁다.

醎 → 시바가나 : 맛이 짜다.

辣→ 카니 : 맛이 맵다.

硯 → 리 : 벼루.

墨 → 미 : 먹.

筆 → 푼디 : 붓.

弓 → 이우미 : 활.

箭 → 이야 : 화살.

弓帒 → 이우미누 : 활집.

箭帒 → 이야누 : 화살집.

弓弦 → 이우미누됴누 : 활 줄.

窓 → 로오리 : 창문.

門 → 요 : 문.

掛帳 → 바 : 천막.

帳 → 미구 : 장막.

席子 → 모시루 : 돗자리.

靴 → 픠상가 : 장화.

紙 → 카미 : 종이.

匙 → 캐 : 숟가락.

筋 → 파시 : 젓가락.

篩 → 푸뤼 : 체.

梡子 → 마가리 : 주발.

砂貼匙 → 싀뢰 : 사기 접시.

木貼匙 → 파지 : 나무 접시.

樻子 → 카이 : 궤, 즉 나무로 짠 네모진 그릇.

刀子 → 카라나 : 작은 칼.

鍋兒 → 나븨 : 쇠 가마.

箒 → 과오기 : 먼지 쓸어내는 비.

火盆 → 피팔지 : 화로.

衣服 → 기루 : 옷.

袴兒 → 파가마 : 바지.

裙兒 → 카마모 : 치마.

瓦 → 카라 : 기와.

車子 → 구루마 : 수레.

卓子 → 타가 : 탁자, 물건을 올려 놓는 세간.

炭 → 미 : 숯.

柱 → 파냐 : 기둥.

身子 → 도우 : 신체.

面 → 라 : 얼굴.

眼 → 무 : 눈.

鼻 → 파나 : 코.

口 → 크지 : 입.

耳 → 미 : 귀.

頭 → 가난우 : 머리.

手 → 데 : 손.

足 → 피샨 : 발.

舌頭 → 시쟈 : 혀.

手指頭 → 외븨 : 손가락.

頭髮 → 카시리 : 머리털.

牙齒 → 파 : 이.

花 → 파라 : 꽃.

綠 → 오 : 녹색.

黑 → 구루 : 검은 색.

靑 → 탄쳥 : 푸른 색.

牛 → 우시 : 소.

馬 → 우마 : 말.

猪 → 우와 : 돼지.

鷄 → 투리 : 닭.

狗 → 이노 : 개.

羊 → 비쟈 : 염소, 소.

老鼠 → 오야비쥬 : 쥐.

蛇 → 파무 : 뱀.

龍 → 타 : 용.

象 → 자 : 코끼리.

獅 → 시시 : 사자.

虎 → 도라 : 호랑이.

홍치(弘治) 14년 4월 22일.

승문원(承文院)에 계하(啓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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