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기유(日東記游)
김기수(1832~?)
1875년(고종 12)에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응교에 오르고,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음력 2월 22일 통정 대부에 올랐으며, 예조 참의로 수신사에 임명되니 근대 대일 교섭의 첫 사절이 되었다.
사절 단원 76명을 인솔하고 4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 부산에서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에 승선,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고 5월 4일 고베[神戶]를 경유하여 5월 7일 요코하마[橫濱]에 입항하여, 일본 외무성 관리의 마중을 받고 특별 열차편으로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그 뒤 5월 27일 동경을 떠날 때까지 20일간 체류하면서 개화한 일본의 문물, 즉 전신과 철도의 가설, 군함과 대포의 제조를 비롯하여 군사·기계·학술·교육 등의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김기수의 일본 견문기는 『일동기유(日東記游)』·『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에 나타나 있다.
수신사 일행의 보고와 김기수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復命別單)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척신(戚臣)과 조정의 신하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경 체류 당시 주일영국공사가 호의를 베풀어 면회하기를 요망하였으나, 구미외국사절과는 일체 접촉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1877년 황해도 곡산군수(谷山郡守), 1879년 덕원부사(德源府使), 1881년 대사성, 1883년 감리의주통상사무(監理義州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1893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을 때 황간(黃澗)·청풍(淸風)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었다.
민란 주모자를 엄한 형벌에 처하여 귀양보내고 전 황간현감 민영후(閔泳厚)와 전 청풍부사 송병두(宋秉斗)는 의금부로 하여금 죄인을 잡아다가 신문하도록 하였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1권
▣사회(事會) 1칙(一則)
우리나라는 국조(國朝) 이래 때때로 사신의 내왕이 있었는데,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豐信秀吉)이 관백(關白)곧 일본의 대신인데,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의 ‘모든 일은 먼저 곽광(霍光)에게 관백(關白)한다.’는 말을 따서 관백(關白)이라 한 것이다. 혹 박륙후(博陸侯)라고도 하는데, 그들의 이른바 천황은 그저 실컷 먹고 따뜻이 입을 뿐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고 흉독(匈毒)을 부리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그러나 선조(宣祖)께서는 특히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을 생각하시어, 서로 겨루지 않고 그들과 화친하여, 3백 년 동안 흉사와 경사에 사신의 통문(通問)이 끊이지 않았었다. 금상(今上) 무진년(1868, 고종 5)에 그 나라가 관백을 폐하고 천황이 몸소 정사를 다스리게 되자, 우리나라에 통문하였으나 변신(邊臣)이 이를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명호(名號)의 참망(僭妄)한 것을 미워한 까닭이었다. 이 때문에 봄에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이 있었으나, 강화도 사건이란 그들의 이른바 변리 대신(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과 정상형(井上馨) 등이 와서, ‘천황의 칭호는 유래가 오래된 것이지만, 다만 관백이 정치를 하기 때문에 왕래한 외교문서에 그 칭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황이 몸소 정사를 다스리게 되었으므로 외교문서에 천황의 칭호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자신을 높였을 뿐 다른 뜻은 없는 것이며, 또 우리나라가 화호(和好)를 저버렸다 하면서 도리어 책망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비로소 그들이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예전의 화호를 계속하기를 허락하매, 저들 사신은 매우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차견(差遣) 2칙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저들이 비록 기뻐하면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 속마음은 끝내 우리에게 의심이 확 풀리지 않았을 것이니, 우리가 저들보다 먼저 사신을 보낸다면 저들은 반드시 망외(望外)의 기쁨으로 알 것이다. 우리가 은혜로써 회유(懷柔)하고, 의리로써 제재하며, 정도(正道)로써 굴복시키고, 신의로써 화호를 맺는다면,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지내고 또 우리의 울타리가 될 것이다.”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이 같아 계획이 결정되었다. 이에 정부에서 아뢰기를,
“지난 번 일본 사신의 배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오직 수호(修好) 때문이었은즉, 우리가 이웃 나라와 의좋게 지내려면 마땅히 이때 전담 사신을 파견, 국제간의 신의를 닦아야 할 것입니다. 사신의 칭호는 수신사(修信使)라 일컫고, 응교(應敎)김기수(金綺秀)를 특히 품계를 올려 임명하여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말로써 전하여 단망(單望)으로 임명하고, 수행 인원은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적당히 골라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재가가 내리니 때는 병자년(1876) 2월 22일이었다. 나는 재주가 없고 학식도 없는 사람이라, 비록 예사로운 사명(使命)이라도 그 적임자가 아닌 것이 두려운데, 이제 단발문신(斷髮文身)은 내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고, 험한 물결은 내 발로 건너보지 못한 것이다. 오랑캐의 괴상한 말을 따라서 해야 되고, 강하고 억센 무리들을 대항해야 되니 그것을 두려워하고 움츠러들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가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게 되니, 임금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서는 자기 집을 잊어야 될 처지이다. 힘든 일은 거절하고 쉬운 일만 받아들이며, 험한 곳은 사피(辭避)하고 평탄한 곳에만 나아가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외국에 가는 사신으로서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닌 것만 두려워 할 뿐이지, 험한 길을 발섭(跋涉)하는 것쯤이야 다시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기꺼이 낙지(樂地)에 가듯이 한즉, 거센 풍랑을 사람들은 도리어 부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환재(瓛齋)박상국(朴相國)은 글을 보내어,
“내가 나이와 작위가 공연히 이같이 되어, 이번의 장유(壯游)를 드디어 그대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
하였다.
▣상략(商略) 6칙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의 부녀(婦女)는 저들이 매우 좋아하는 바인데, 저들의 부녀도 또한 우리 장부(丈夫)들을 매우 좋아하여, 대낮에 한길에서 가슴을 풀어 헤치고 서로 손짓할 것이니, 그대의 이번 걸음에는 반드시 이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수는 다른 날에 보복을 당할 것입니다. 그대는 또 유람을 일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유람하면 저들도 유람할 것이니, 그대는 이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별리(別離) 6칙
나이 많은 누이와 어린 딸은 기일 전에 와서 병든 아내와 함께 억지로 평상시와 같이 이야기하고 웃으나, 그들이 바느질과 주식(酒食) 보살피는 일에 더한층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서운하게도 장차 내가 집에 돌아와 다시 밥 먹고 옷 입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가묘(家廟)에 가서 하직 인사를 할 때에는 갑자기 마음이 감격해졌으니, 고로여생(孤露餘生)이 다만 날마다 가묘에 뵙는 것으로서 조금이라도 ‘예전의 효자들이 종신토록 그 부모를 사모한다.’는 정성을 본받으려 한 것이, 이제 만 리나 되는 바닷길을 떠나게 되니 뒷일을 기약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쇠 같은 간장(肝腸)일지라도 또한 굵은 눈물이 떨어짐을 어쩔 수가 없었다.
대궐에 가서 사별(辭別)할 때에 주상(主上)께서는 거듭 칙유(飭諭)하시고, 또 길의 이수와 돌아올 기일까지 헤아리면서 정녕측달(丁寧惻怛)하시기를 마치 가인(家人) 부자처럼 하시었다.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얼굴 들고 천안(天顔)을 뵈옵도록까지 하시니, 임금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우러러 추측할 수가 있었다. 신은 황공하고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비록 그날 죽더라도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대궐에서 사별하던 날은 곧 병자일이었다. 4월 초 4일이다.
남문(南門) 밖에서 전별을 하는데, 공경 대부들이 온 성중(城中)을 비워 놓고 다 나와서 진중한 태도로 작별을 고하였다. 이때 석양은 산 중턱에 걸려 있고 강가의 나무는 먼빛이 어둑어둑한데, 거마 달리는 소리는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힘써 일어나서 한 번 읍(揖)하고는 수레에 탔다.
▣헐숙(歇宿) 부 정리(附程里) 18칙
병자년(1876년) 4월 29일(경인)에 부산포에 배를 타니, 이달은 작아서 마지막 날이었다. 5월 1일(신묘) 아침, 장문주(長門州) 적간관(赤間關)혹은 적마관(赤馬關)이라고도 하고, 혹은 단지 하관(下關)이라고 한다. 에 도착하니 한나절 하룻밤이 걸렸다. 밤에는 배 안에서 잤다. 배가 밤낮 없이 가게 되니, 사람은 자지만 배는 멈추지 않았다. 중류에 배를 멈추고, 작은 배로 육지에 내렸다. 배를 탈 때나 내릴 때나, 반드시 중류에서 배를 멈추고 작은 배로 오르고 내리니, 이것은 이 배가 얕은 해변에서는 정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영복사(永福寺)에 들어가 오찬을 먹고 이로부터 배 안에서의 특별한 음식 대접은 반드시 지방관이 외무성(外務省)의 지시를 받아서 차려 왔다. 이어 하룻밤을 잤다. 부산에서 이곳까지는 8백 리나 된다.
5월 2일(임진) 다시 배를 타고 미시(未時 오후 2시 전후)에 앞으로 나아갔다. 배 안에서 이틀 밤을 잤다.
4일(갑오) 새벽에 신호항(神戶港)에 정박하니, 적관(赤關)에서 이곳까지는 1천 7백 리이다. 아침에 배에서 내려 시중에 있는 회사(會社) 누각에서 쉬었다. 오찬을 먹고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에 다시 배에 올라 배 안에서 잤다.
5일(을미) 진시(辰時)에 배가 출발하였다. 배 안에서 이틀 밤을 잤다.
7일(정유) 아침에 횡빈에 정박하니, 신호에서 이곳까지는 2천 4백 리이다. 배에서 내려 철로관(鐵路關)에서 조금 쉬었다. 여기서 강호(江戶)까지는 1백 10리인데 육로이다. 오시에 출발, 신시에 강호의 연료관(延遼館)에 도착하여 연료관은 예전 대장경(大藏卿)의 집인데 일명 부소로관(富少路關)이라고 한다. 머물렀다. 낮에는 혹 일을 보기 위해 다른 곳에 가기도 하고, 밤에는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8일(무술) 외무성을 예방하였다.
10일(경자) 적판궁(赤坂宮)을 예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어화원(御花苑)에서 쉬었다. 오찬을 가져왔는데 이는 삼산무(森山茂)가 내는 것이었다.
12일(임인) 원료관(遠遼館)이 또한 연료관(延遼館)이라고도 한다. 에서 연회(宴會) 하선연(下船宴) 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박물원을 관람하였다.
15일(을사) 육군성(陸軍省) 안에 있는 교련장(敎鍊場)에서 군대 훈련을 관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외무성에 들어가 오찬을 먹었다.
16일(병오) 궁본소일(宮本少一)의 장화원(長華園)에 갔다.
17일(정미) 해군성(海軍省)을 관람하고, 그 길로 정상형(井上馨)의 집으로 갔다.
19일(기유) 대마도주 종중정(宗重正)의 심천(深川) 별장에 갔다.
20일(경술) 삼산무의 집에 갔다.
21일(신해) 육군성의 병학료(兵學寮)를 관람하고, 소석정(小石亭) 위에서 오찬을 먹었다. 그 길로 공부성(工部省)의 공학료(工學寮)에 가서 전선(電線)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공부경(工部卿)이등박문(伊藤博文) 집에서 베푼 연회에 갔다.
23일(계축) 태학(太學)을 관람하고 선사(先師 공자(孔子))의 소상에 첨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개성학교(開城學校)와 동경 여자 사범학교를 관람하였다.
24일(갑인) 원로원(元老院 귀족원)을 지나 원료관(遠遼館)에 가서 연회 상선연(上船宴) 를 받았다.
26일(병진) 외무성을 예방(禮訪)하였다. 작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27일(정사)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신교(新橋)에서 화륜차(火輪車 기차)를 타고, 횡빈(橫濱)의 철로관(鐵路關)에 와서 오찬을 먹었다. 미시에 배를 타고 횡수하(橫水河, 橫須賀)에 이르러 배를 정박, 하룻밤을 잤다.
28일(무오) 미시에 또 떠났으나 바람에 뱃길이 막혀 5백여 리를 둘러서 횡수하 근방 30리에 와서 정박하여, 또 배 안에서 하룻밤을 잤다.
29일(기미) 사시(巳時 오전 10시 전후)에 출발하였다. 배에서 이틀 밤을 자고 신유일에 비로소 신호(神戶)에 도착하니, 이날은 윤 5월 1일이었다. 병이 나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배 안에서 유숙하였다.
6월 2일(임술) 잠시 배에서 내려 또 회사 누각(樓閣)에서 쉬었다. 오찬을 먹고 즉시 배에 올라 또 하룻밤을 잤다. 횡빈에서 이곳까지는 2천 4백리인데, 횡수하 이전에 길을 50~60리 돌고, 이후에 또 5백 리나 돌았으니 합계하면 3천여 리나 된 셈이다.
3일(계해) 새벽에 배가 출발하였다. 배에서 하룻밤 자고 갑자일(4일) 이른 아침에 적마관(赤馬關)에 정박하였다. 일주야(一晝夜)에 1천 7백 리나 갔으니 만족스러웠다. 배에서 내려 영복사(永福寺)에서 오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배에 올랐다.
4일(갑자) 이날 신시(申時)에 배가 출발하였다. 밤에 큰 바람이 일어나서 3백여 리나 갔다가, 배를 다시 뒤로 돌려 정박하고 하룻밤을 잤다.
5일(을축) 풍세(風勢)가 여전히 거슬러 불므로, 하는 수 없이 길을 돌아 대마도(對馬島)까지 가서 배에서 내려 이정암(以酊庵)에서 유숙하였다. 이정암의 중 현소(玄蘇)는 예전 임진년(壬辰年) 때의 한 왜승(倭僧)인데, 그가 정유년(丁酉年, 1537)에 출생한 이유로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임. 소경(昭敬)은 시호(諡號))께서 이정암(以酊庵)이란 칭호를 특사한 것이다.
6일(병인) 정오에 구도주(舊島主) 종의화(宗義和)종중정(宗重正)의 아버지 의 집에서 베푼 연회에 갔다. 신시에 배를 탔으나, 해시 초에야 바람이 조금 쉬므로 그제야 배가 출발하였다. 배 안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이튿날 윤 5월 7일 정묘(丁卯)에 부산(釜山)에 돌아와 정박하였다. 적마관(赤馬關)이 여기서 8백 리나 되는데, 적마관에서 길을 돈 것이 또 7백여 리나 되며, 적마관에서 대마도까지가 8백여 리나 되고, 대마도에서 이곳까지가 또 6백여 리나 되니, 갈 때의 길을 계산하면 5천 10리요, 돌아올 때는 둘러온 길까지 7천여 리나 되는 셈이다.
동래부(東萊府)에서 5일 동안 머물렀다가 출발, 18일 만에야 서울에 도착하니, 길 이수(里數)가 1천 1백 10리(里)나 되었다. 갈 때의 길과 합계하면 2천 2백 20리나 된다. 이번 걸음을 갈 때의 길과 돌아올 때의 길을 전부 통틀어 계산하면, 1만 4천 2백여 리나 되는 셈이다.
▣승선(乘船) 9칙
4월 26일에 부산(釜山)으로 내려오고 27일에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제문(祭文)은 사과(司果) 안광묵(安光黙)이 짓고 초헌(初獻)도 그 자신이 하였다. 다른 수행원(隨行員)들이 거행한 일은 모두 장무관(掌務官)의 사례책자(事例冊子)에 기록되어 있다. 28일에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동래 수사(東萊水使)가 주인(主人)이 되어 예복차림으로 서로 보고 난 뒤 시복(時服)으로 바꾸어 입고 연회상을 가져 왔다. 그 후에는 사립(絲笠)과 융복(戎服)으로 바꾸어 입었다. 술이 반 순배(巡盃)나 되었을 적에 동래 부사(東萊府使)ㆍ울산 부사(蔚山府使)ㆍ양산 군수(梁山郡守)ㆍ기장 현감(機張縣監), 부산포(釜山浦)ㆍ다대포(多大浦)의 두 첨사(僉使)와 각역(各驛)의 역승(驛丞), 각진(各鎭)의 변장(邊將)들까지 모두 모였다. 마침내 기생을 시켜 음악을 시작하였는데, 거문고 소리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들리게 되니 길 떠나는 사람의 수심도 잊을 만하므로, 한껏 즐긴 뒤 연회를 마쳤다. 이튿날 29일에 화륜선을 탔다.
배를 타는 날에는 위의(威儀)를 크게 갖추고 초량진(草梁津)으로 나아갔다. 바라보니 한 척의 큰 배가 바다 중류(中流)에 서 있는데, 협판(夾板)ㆍ쌍범(雙帆)과 돛대 사이의 연통(煙筒)은 가위 몽상도 할 수 없을 만한 것이었다. 동래 부사와 여러 고을 수령들이 진두(津頭)에 장막을 치고 있는 것은, 나를 전송하기 위함이었다. 술잔을 들고 서로 쳐다보면서 모두가 잠잠히 말이 없었다. 방기(房妓)들도 설문(設門)에 막혀 오지 못하고, 초량관(草梁館)에서 부산진(釜山鎭)에 이르는 길에 설문(設門)이 있었으니 저 사람[日本人]들을 제한하여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다만 먼저 배정된 기생 몇 명만 있었는데, 또한 모두가 몸을 뒤로 돌리고 눈물을 닦고 있었으니, 차마 작별을 고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총총히 배에 오르니, 배 안에 있는 영접관(迎接官) 이하의 사람은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배도 처음 보고 사람도 처음 보게 되니, 비록 얼굴의 생긴 모양은 우리와 같지만, 의관이 다르고 언어도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 저마다 서로 엿보기만 할 뿐 인사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다만 말 적고 침착(沈着)한 태도로 자기 몸을 지키며 잠잠히 조심할 뿐이었다.
▣정박(停泊) 14칙
부산포(釜山浦)에서 출발, 오륙도(五六島)ㆍ절영도(絶影島)를 지나 바다어귀에 나오니, 바라보이는 먼 곳에 청산(靑山) 한 가닥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이것은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종전에도 사신이 반드시 지나가던 곳인데, 이번 걸음은 큰 바다를 배로 건너가게 되니, 가끔 나타나는 섬은 전연 관계없이 지나가 버린다. 큰 바다로 나오니 물결이 세차게 일어 배가 더욱 일렁 거린다. 일행 중 많은 사람들이 구토를 하고, 어지러워서 머리를 붙들고 누웠으나, 나와 안정산(安珽山 안광묵(安光黙)), 오 비관(吳裨官 오현묘(吳顯杳)), 이 당상관(李堂上官 이용숙(李容肅))만은 다행히 심한 고통은 없었다. 때때로 그들과 함께 갑판에 올라가 바라보니, 망망한 물과 하늘은 한 빛깔로 푸르러 끝이 없으므로, 몸은 비록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어도 가슴속만은 시원하고 쾌활하였다. 이같이 1주야를 지내고서 장문주(長門州 산구현(山口縣))의 적간관(赤間關)에 닿으니, 시사(市肆)와 민가가 즐비하였다. 이곳은 각국과 통상하는 큰 부두(埠頭)라 한다.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에 배에서 내려 영복사(永福寺)로 갔다. 절은 성중(城中)에 있는데, 고루(鼓樓)와 등각(燈閣)은 사원(寺院)을 모방하였으나 불사도 아니요 속가도 아닌, 다만 커다란 한 묘우(廟宇)와 같았다. 한 당(堂)에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지 않고 굽이를 돌아 들어갔다. 대개 한 집에 여러 간(間)이 있고 매 칸에는 또 막이를 하였다. 한 방에 들어가니 또 한 방이 있었다. 제일 깊숙한 곳의 방이 내가 쉬는 처소인데, 자그마한 뜰에 피어 있는 화초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로부터 내가 정박하는 곳에는 구경하러 온 저들[日本人]이 몰려들어 거리를 메울 정도로 혼잡하였으나, 이것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중에는 지묵(紙墨)을 가지고 와서 서화를 청하는 사람도 많아, 수원(隨員)과 종인(從人)들은 그들을 대응하기에 팔이 빠질 지경이었으나, 이 당상관(李堂上官) 국인(菊人)만은 흥이 발발(勃勃)하여 마다하지 않았다.
...신호에서 적관까지는 또 조용하고 편안하였다. 조선국(造船局)에서 배가 떠날 때에 배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니 양인(洋人)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갑자기 닻줄을 거두고 닻을 올린다. 나는 그가 양인임이 분명한 것을 탐지하고는 호송관(護送官)에게 말을 전하기를,
“이 배는 비록 일본선(日本船)이지만, 이번 일은 우리의 행차를 전송(專送)하는 것인즉 우리가 배에서 내리기 전에는 이것은 우리의 배이다. 그런데 우리 배에 어찌 양인을 태울 수가 있겠는가? 빨리 이 사람을 내려 보내고 배에 머물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호송관은 말하기를,
“진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외무성에서 수신사(修信使)를 잘 호송하기 위하여 양인에게 일을 맡겨 보낸 것이오니, 지금 와서 그를 오라 가라 하는 일은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배를 운전하는 데는 아직도 이 사람만 못하므로, 원행(遠行)이 있을 적마다 양인 한 사람을 써서, 그 사람의 지시를 받은 뒤라야 모든 일이 안전하게 됩니다. 이번에 이 사람이 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만, 수신사의 의향이 그러하시면 곧 외무성으로 통보하여 그 회시(回示)를 기다렸다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더니, 이곳에 도착한 뒤에야 와서 말하기를,
“외무성의 회문(回文)이 이제야 도착되었습니다.”
하고는 양인을 배에서 내려보냈다.
▣유관(留館) 19칙
매양 가는 데가 있을 때마다, 왕래는 반드시 길을 달리하고 또한 돌아서 가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은 모두 전어관(傳語官)들의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였다. 어느 날 외무성에서 돌아오는데, 오정 때에 출발한 것이 석양이 되어도 아직 노상(路上)에 있었다. 한 거리를 나오면 또 한 거리가 있고, 한 골목을 나오면 또 한 골목이 나왔다. 거리마다 새로 대하는 것이요, 골목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저들이 매양 나에게 구경하기를 요청하였지만, 내가 한결같이 허락하지 않으매 저들이 괴이히 여겨, 내가 길 모르는 것을 기회로 제 마음대로 나를 끌고 안 가는 데가 없는 듯하니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면 그들은 반드시 뽐내게 될 것이니, 훗날의 폐단을 생각지 않을 수도 없었다. 드디어 하례를 엄책(嚴責)하여 탄 수레를 재촉해 돌아오니 한 길거리가 막혔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굽이굽이 돌아 한정없이 돌아가려는 셈이었던 것이다.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소통사(小通事)를 잡아들여, 저들이 무례하게 농락하는데도 살피지 못하고 망연히 있은 죄를 들추어, 한 차례 호되게 매질하였다. 이것은 갑에게 화난 것을 을에게 옮기는 것이었지만, 저들도 두려워 다시는 감히 이같이 하지는 못하였다.
▣행례(行禮) 부 의복(附衣服) 11칙
왜황(倭皇)을 적판궁(赤坂宮)에서 보았는데, 한결같이 우리 임금을 배견(拜見)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먼저 숙배례(肅拜禮)를 행하고 다음에 입시례(入侍禮)를 행하였는데, 진퇴할 적에는 공경하여 감히 예절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왜황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추창(趨蹌)하여 나아가 그 의자(椅子) 앞에 서서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다. 왜황은 보통 체구에 얼굴은 희나 조금 누르고, 눈은 반짝반짝하게 정채가 있으며, 신기(神氣)는 단정하고 조용하였다. 자세히 다 살피지도 못했는데, 전어관(傳語官)이 물러가라고 알리므로 몸을 돌이키지 않고 뒷걸음으로 나왔다. 후일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사람들이 혹 비웃기도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그대의 선조(先祖)도 저들의 이른바 관백(關白)에게 조복(朝服)을 입고 뜰에서 배례하지 않았는가. 관백은 신하이고 왜황은 군주이니, 나의 배례가 어찌 그대의 선조가 배례한 것과 같겠는가. 그[倭皇]가 의자를 피하고 몸을 공손히 하여 서서 보는 예절이, 어떤 전고(典故)에서 나왔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관백이 전상(殿上)에 깊숙이 앉아 있는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일에 비한다면, 나의 소득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2권
▣완상(玩賞) 22칙
이번 행차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외국에 사신 가서 두 나라의 국교를 수호하려는 것이므로, 행동거지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어, 위엄 있게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구경하는 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마는 또 저들에게 따라만 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저들이 두 번 세 번 와서 요청하면 괄시하는 모양으로 있을 수도 없어서 마지못하여 응할 뿐이었다. 또 뿐만 아니라 그 제도ㆍ기계에만 종사한 까닭에 누관(樓觀)ㆍ시사(市肆)의 승경(勝景)과 산천ㆍ풍경의 완상에도 발은 갔으나, 정신 차려 보지 않은 곳은 열에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신호에 도착하니 벌써 각국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구라파의 여러 나라 사람, 러시아 사람, 미국 사람은 모두 눈이 깊숙하고 코가 높직하며 머리는 누르고, 의복 제도도 대략 같아서, 구라파 사람과 러시아 사람을 끝내 분별하기 어렵다. 성년(成年)하지 않은 여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데 한 무더기 누른 빛깔이 마치 텁수룩한 개꼬리 같다. 여자의 치마는 서너 너덧자락뿐인데, 올라갈수록 짧고 겹겹으로 포개어 이상스럽고 빛깔은 희기도 하며 누르기도 하다. 얼굴은 엷은 비단 족두리로 가리웠는데 이는 먼지를 피하기 위한 것이지만, 보기에 더욱 괴상스럽다. 또 코는 모두 높직하나 남녀를 물론하고 눈은 모두 음침하고 정채가 없어 마치 죽은 사람이 눈을 미처 감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의 재주와 슬기는 모두 손에 있는 법인데, 이제 이 구라파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재주와 슬기는 바로 대자연을 정복할 만한데도 그들의 눈은 이렇게도 정채가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북경인(北京人)도 많이 끼여 있는데, 수염은 길어서 창과 같고 땋은 머리는 아래로 드리워서 바로 발꿈치까지 닿았으니 놀라운 일이다.
▣결식(結識) 34칙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오 히로부미)은 공부경(工部卿 공부대신과 같음)겸 법제 장관(法制長官) 으로 있는데, 나이는 40여 세이고 몸은 단소(短小)하였으나 민첩하고 용감하였으며, 두 눈에는 광채가 있었다. 담론을 잘하고 간간이 해학도 하였으며 그 자신의 말로는 세계 안을 거의 가 보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하였다.
▣문답(問答) 9칙
권대승(權大丞)은 말하기를,
“우리나라 국법에는 각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8성(省)의 경(卿 장관(長官))을 차례로 찾아보게 되어 있으니, 만약 경(卿)을 만나지 못하면 다만 명함이라도 드리고 돌아오는 것이 예의입니다. 모레 예를 행한 후에 즉시 이 예를 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일찍이 행하지 않은 예입니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각국에서 통행하는 규정인데 무엇이 옳지 않겠습니까? 또 그전의 통신사도 각로(閣老)를 만났으니 옛날에는 이러한 예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통신사의 전례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마는, 다만 국서를 관백(關白)에게 드리고 관에서 며칠간을 머물고 있다가 국서만 받아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혹시 각로를 만난다는 것은 붕우(朋友)를 찾아보는데 불과할 뿐이오니 지금에 와서 어찌 예가 되겠습니까? 또 우리나라는 신라ㆍ고려 이후로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사귀는 것이 모두 전례가 있으니 다만 이 사무만 볼 뿐이며 감히 사적인 교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년에 와서도 해마다 사신이 북경(北京)에 가면 다만 예부 한 곳에만 일을 보고, 예를 마치면 돌아왔으며, 일찍이 각 부(部)와 성(省)을 차례로 찾아보지 않았으니 전례가 뚜렷하였습니다. 이번 걸음은 우리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들고 바로 귀국의 외무성에 나아가서 봄에 귀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던 예를 회사(回謝)하고 옛날 신의(信誼)를 수호(修好)할 뿐이며, 다른 성(省)을 차례로 찾아보라는 명령은 받지 못하였으니 다른 예(禮)를 내 독단으로 행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히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권대승이,
“각국의 사신들이 한결같이 차례로 각 성의 장관을 찾아보는 것은 벌써 규례가 되었으므로, 이번 수신사의 행차도 각 성의 경(卿)들은 으레 찾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외무성으로서도 또한 말로써는 이것을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각 성의 경들이 만약 모두 수신사를 보려고 한다면 만나보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근신하고 졸수(拙守)하는 것으로써 규율을 만들었으므로, 감히 자기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이 없사오니 지금 이 예(禮 각 성의 경(卿)을 방문하는 일)를 내 단독으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귀국이 우리나라와 다시 옛날 신의를 수호(修好)하여 영구히 잘 지내게 되면 두 나라가 한 나라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졸규(拙規)를 근수(謹守)하는 것은 귀국에서는 아는 바이오니 억지로 해서 안될 일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또 이번 걸음은 오로지 귀 외무성의 주선과 편의 제공에 의지하고 있사오니 각 성에서 혹시 말이 있더라도 귀 외무성에서 잘 설명하여 시비의 단서를 없도록 함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원컨대 두 분께서는 깊이 서량(恕諒)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권대승(權大丞)은 대답하기를,
“앞으로 더 생각하여 편의한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하였다.
...삼산무는 또 말하기를,
“매양 귀국과 담판할 적에는 말이 지리하고 일을 오래 끌어서 한 가지도 즉시 결정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나라에 이익되는 일은 상하가 한마음이 되어 딱 잘라서 결행하고 머뭇거려 미루는 일이 없습니다. 6개월 후에 세목(細目)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혹시라도 그전처럼 지연시킨다면 답답하게 될 것이니 중간에서 교섭하는 사람이 어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규모(規模)는 원래 이와 같으며, 귀국처럼 전권대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도 딱 결단하고 실행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소관(小官) 따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소관은 대관에게 알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아뢰게 되니 허다한 지연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조심하고 근신하여, 방종하고 자행하지 않는 일은 이것이 우리나라의 한 가지 예전 규칙이므로, 공(公)들의 훗날 일에도 그것을 일마다 청종(聽從)하겠다고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미리 양해하여야 될 것입니다. 대체로 세상에 어떤 일이라도 어찌 다 자기 뜻대로 되겠습니까? 귀국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다 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귀국에서도 다 시행하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은 대체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매우 피곤하므로, 드디어 일어나서 읍(揖)하고 돌아왔다.
...문부성의 문학료(文學寮)에서 대승(大丞) 구귀융일(九鬼隆一)은 극진히 나를 접대하였다. 술자리에서 나에게 묻기를,
“귀국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朱子)만 숭상합니까? 아니면 다른 학문도 숭상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학문은 5백 년 동안 다만 주자만 숭상하였을 뿐입니다. 주자를 어기는 사람은 바로 난적(亂賊)이란 죄목으로 처단하였으며, 과거(科擧) 보는 문자까지도 불가(佛家)ㆍ도가(道家)의 말을 쓰는 사람은 귀양보내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법이 매우 엄중했던 까닭으로 상하와 귀천이 다만 주자(朱子)만 숭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군주의 도리(道理)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대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대로, 아들은 아들의 도리대로, 형은 형의 도리대로, 아우는 아우의 도리대로, 남편은 남편의 도리대로, 아내는 아내의 도리대로 하여, 한결같이 공자ㆍ맹자의 도리만 따랐으니, 다른 갈림길이 엇갈릴 수도 없으며, 다른 술수(術數)가 현혹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하니, 구귀융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궁본소일은 또 말하기를,
“또 한 가지 사담(私談)이 있으니 공은 마땅히 마음속에 명백히 기억하십시오. 지난봄에 갔을 적에 강화부(江華府)에서 모든 부녀(婦女)들은 다 피하고 숨으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한 사람도 편안하게 사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 일행 중에서 만약 난잡 패악한 무리의 무지망행(無知妄行)한 죄가 있었다면 내가 이것을 다스려도 될 것인데, 하필 왜 이러한 광경(光景)이 있겠습니까? 내가 귀국의 부녀를 보고자 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백성이 하루 동안을 이산(離散)하게 되면 하루 동안의 손해가 있을 것이고 이틀 동안을 이산하게 되면 이틀 동안의 손해가 있을 것이니, 가련한 저들 백성은 또한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것이 만약 정부에서 영(令)을 내려 한 일이라면 영을 내릴 필요가 없지마는 만약 백성들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이라면 영을 내려 이것을 금지시켜 다시는 이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 또한 우리나라가 귀국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나라 남녀의 구별은 원래부터 매우 엄격하므로 비록 친척도 5~6촌(寸) 외에는 서로 왕래하고 보지도 않았으며, 비록 친자매(親姉妹)와 형제의 사이일지라도 10세 이후에는 한자리에 같이 앉지도 않으며 말할 때는 반드시 방문을 열어 놓고 말하였습니다. 여항(閭巷)의 천인들까지도 모두 결혼한 후에는 남편이 죽더라도 시집가지 않는 사람이 이따금 있어 저절로 풍속을 이룬 지가 지금까지 6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외국인을 더욱 부끄럽게 여기고 숨어 피하여 보지 않는 것은 또 한 가지 그럴 만한 일이 있습니다. 근년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해상(海上)에 왕래하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혹 육지에 내려와서 여자를 만나게 되면 그때마다 강간(强姦)을 하고 혹은 한 여자를 여러 사람이 윤간(輪姦)을 하여 즉시 죽은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한 번 이상한 배가 오는 것을 보면 갑자기 물결처럼 밀려 달아나 숨게 되므로, 이것을 금지시킬 수가 없었으니 이상한 배가 한 번 지나가기만 하면 한 지방이 술렁이게 되었습니다. 지난봄에 귀사(貴使)가 올 적에도 처음에는 또한 종전의 외국인으로 알고서 이렇게 도망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귀국인(貴國人)인 줄 명백히 알았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음에 공(公) 일행이 올 적에는 비록 문밖에 나와서 마음대로 보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이산(離散)하는 행동은 없을 것이니 이 일로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3권
▣궁실(宮室) 16칙
관청 집과 개인 집을 논할 것 없이, 대지(垈地)의 평면 위에 편편하게 지었으며 높다란 여러 층의 계단은 없었다. 섬돌과 주춧돌도 또한 모두 돌 모양 그대로 두었으니 둥근 것, 네모난 것, 비뚤어진 것, 기울어진 것을 그 면만 바루고 그 기반만 튼튼히 했을 뿐이며, 먹줄로 깎아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주춧돌에는 기둥이 단정히 서서 조금도 위태로운 걱정은 없었다.
▣성곽(城郭) 부 교량 도로(附橋梁道路) 13칙
길과 거리는 편편하고 곧고 발라서 규옥(圭玉)의 머리처럼 뾰족한 것도 없고, 을자(乙字)의 목처럼 구부러진 것도 없었다. 한 번 바라보면 막힘이 없이 툭 틔어서 먹줄을 친 것 같았으며, 꺾어 돌아가는 데도 법도에 맞고 능각(楞角)도 서로 어긋나지 않았다.
길은 맑고 깨끗하여 맨발로 다녀도 더럽지 않았으며, 큰비가 온 후에도 그다지 진흙이 미끄럽지도 않았다. 대개 물가의 잔돌을 먼저 가져다가 이것을 땅 위에 깔고, 사토(沙土)를 그 위에 편편하게 폈으니, 그런 까닭으로 비가 한 번 지나가자마자 곧 깨끗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물(人物) 12칙
인물은 한 번 보기에 사랑스러웠다. 날마다 본 사람이 천 명 만 명이나 되었는데, 사람마다 준수하고 어여쁜 것은 아니었지마는, 대체로 몹시 흉악하고 몹시 더러운 사람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대개 그들의 아름다운 자들을 미호(美好)하다고 하는데 합당하여, 단묘(端妙)하다고 해도 되겠으며, 정한(精悍)하다고 해도 되겠으며, 고괴(古怪)하다고 해도 되겠으나, 준위(俊偉)하고 영특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대개 중등 이상의 체구는 전혀 없는 편이나 혹 있기도 했으며, 있더라도 또한 추솔하고 지리(支離)하여 헌앙(軒昻) 수발(秀拔)한 사람은 적은 편이다. 그러므로 귀인(貴人) 가운데에는 체구가 큰 사람은 없으며, 준위 영특한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매양 사람을 볼 때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웃으며, 한 번 말하면 정(情)을 기울이게 되니, 오늘 본 사람이라도 어제의 친한 사람과 같았다. 또 연락(然諾)을 신중히 하고 행동거지를 신뢰하여 한결같이 약속을 실천하니 도리어 천견 고집(淺見固執)한 소인 같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단정하고 엄숙하여 말이 적은 사람은 비록 종일토록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한결같이 얼굴에 웃는 태도를 띠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부인(婦人)은, 귀하고 천한 사람은, 귀하고 천한 구별이 있고, 아담하고 속된 사람은, 아담하고 속된 구별이 있었다.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도 있고 추한 사람도 있고, 풍만한 사람도 있고 섬세한 사람도 있으나, 그 성질이 유순하여 여자다운 태도인 점은 똑 같았다. 장문주(長門州)의 여자도 그렇고, 신호항(神戶港)의 여자도 그렇고, 횡빈(橫濱)의 여자도 그렇고 강호(江戶)의 여자도 그렇고, 대마도의 여자까지도 또한 그러하였다. 어제 본 사람과 오늘 본 사람도 모두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대개 여자는 여자의 용모에 꼭 맞았던 것이다.
▣속상(俗尙) 24칙
서양인과 교통한 후로는, 신당은 우거진 풀밭이 되고 중들은 구렁에 엎어지게 되었으니,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책에 매우 바빠서 이런 것에는 생각이 미칠 여가도 없었으며, 또한 이것은 모두 허문(虛文)이므로 실사(實事)에는 이익됨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의 옛날 풍속의 숭상은 신도(神道)를 먼저 하고 불교를 나중에 하였으며, 또 불교를 먼저 하고 유교(儒敎)를 나중에 하였는데, 신도와 불교가 이 모양인데 유교는 다시 무엇을 논의하겠는가?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 교습(敎習)시킬 적에 나이가 8세에서 15세까지는 그 국문(國文)과 함께 한자(漢字)를 읽게 하고, 한자를 이미 통하면 다시 경전(經傳)은 읽지 않고, 농서(農書)ㆍ병서(兵書)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종수(種樹)의 글만 즐겨서 상시로 읽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녀ㆍ상인(商人)ㆍ어린아이들까지도 계척(界尺 문구(文具) 곧 글로 쓴 명령)을 한 번 내리면 성위(星緯 천문(天文))를 헤아리게 되고, 호령 소리가 조금 일어나면 지여(地輿 땅)를 가리키게 되었으나, 만약 공자(孔子)ㆍ맹자(孟子)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이내 눈이 동그래지고 입을 머뭇거리면서 그것이 무슨 말인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왕공(王公)과 재상이 조회에 가고 관아에 갈 때는, 큰 것을 타면 마차였고 작은 것을 타면 인력거였으니, 한 사람만 시위할 뿐이고 별로 따라다니는 하인도 없었다. 때로는 집이 가까우면 걸어서 가기도 하나 이것을 치사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비록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손님과 주인이 서로 인사하는 말 이외에는 달리 떠드는 소리는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손뼉을 치면서 한 번 부르면 시자(侍者)가 오게 되고, 공회(公會) 때에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방울같은 초인종이 있는데 손가락으로 그 위를 뚜드리면 짜르랑하고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에 응하여 빨리 달려오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 또한 그들의 옛날 풍속이었다.
집에도 시계를 두고, 사람마다 시계를 차게 되었다. 공사(公私)의 연회든지 사적인 방문에는 반드시 기한에 앞서서 시간을 알렸으므로 서로 어긋나는 일은 없었다.
▣정법(政法) 22칙
예전 제도에는 5기(畿)와 7도(道), 66주(州)가 있고, 주마다 각각 수(守)가 있었는데, 혹은 도주(島主)라 일컫기도 한다. 모두 주대(周代)의 봉건(封建 제후(諸侯))과 당대(唐代)의 번진(藩鎭 절도사(節度使))처럼 대대로 이어받았는데, 지금의 왜황은 이것을 모두 혁파하고 그 오래된 것이든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든지, 다만 그 공적에 의거하여 승진도 하고 내어 쫓기도 하였다.
...대마도(對馬島)의 옛날 도주(島主)의 본성은 종씨(宗氏)인데, 중간에 와서 평씨(平氏)로 거짓 꾸몄으니, 즉 평수길(平秀吉)이 성을 준 것이다. 지금은 종씨라 고쳤으니 성을 바꾼 중에는 제일 잘 바꾼 것이었으나, 오히려 마음에 만족해하지 않고 불평스러운 기색이 있으니, 진실로 제도를 고치기는 어려운 것이다.
...구육원(救育院 보육원(保育院))을 설치하여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와 가난한 사람의 가정이 없는 아이를 수용하여 기르고, 그들을 각기 성취시켜 각기 산업(産業)이 있어야만 돌려보내어, 각기 그 가정에 안정이 되도록 한다 하였다.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백성은 모두 죄를 주어 다스리고, 한 가지 소제하는 이상의 사람에게는 모두 봉급이 있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걸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규조(規條) 6칙 : 괘위 죄목(詿違罪目) 28조
1. 좁은 소로(小路)에서 차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
1. 밤중에 등불을 들지 않고 차를 끌거나 또는 말을 타는 것.
1. 아무런 짐작도 없이 차와 말을 빨리 달려서 행인에게 방해가 되는 것.
1. 인력거를 끄는 사람이 손님을 강제로 권하여 수레를 타게 하고, 또 지나친 말을 하는 것.
1. 마차와 인력거, 또는 짐실은 차를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 두어 행인을 방해하고, 혹은 소와 말을 거리 어귀에 가로 놓아서 행인을 방해하는 것.
1. 왕래하는 길에 금수(禽獸)가 죽은 것이나 혹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리는 것.
1. 목욕업(沐浴業)을 생업(生業)으로 삼는 사람이 호구(戶口)를 개방하고, 혹은 누상(樓上)에 발[簾]을 드리우지 않는 것.
1. 가옥 앞의 소제를 태만히 하고 , 혹은 더러운 물을 하수도를 파서 배제(排除)하지 않는 것.
1. 부인(婦人)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발(斷髮)한 것.
1. 짐 실은 차와 인력거가 한데 모일 때에 행인을 방해한 것.
1. 대소변을 소제할 적에 똥통의 뚜껑을 덮지 않고 운반하는 것.
1. 여관업(旅館業)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유숙하는 사람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고, 혹은 진고(進告)하지 않는 것.
1. 거리의 번호표와 인가의 번호, 성명표와 그 표시한 간판을 깨뜨리고 부순 것.
1. 훤화 쟁론(諠譁爭論)하여 남의 자유를 방해한 것과, 또 경악 조요(驚愕噪鬧)에 호응한 것.
1. 장난으로 거리의 상시등(常時燈)을 끄는 것.
1. 주의를 하지 않아서 남에게 더러운 물건이나 또는 돌조각을 던진 것.
1. 전원(田園)에 곡식을 심어 길이 없는데도 이곳을 통행하거나, 또는 소와 말을 끌고 들어가는 것.
1. 왕래하는 도로에서 변소가 아닌 곳에 오줌을 누는 것.
1. 남의 문전을 향하여 왕래하고, 어린아이들에게 대소변을 보게 한 것.
1. 짐 실은 차와 인력거를 한꺼번에 끌고 가면서 통행을 방해한 것.
1. 소와 말을 잘못하여 놓아서 남의 집에 들어가게 한 것.
1. 투견(鬪犬)을 사용하고, 또는 장난으로 사람을 물게 한 것.
1. 매우 큰 지연(紙鳶)을 날려서 방해한 것.
1. 술 취한 것을 이용하여 장난으로 수레와 말의 왕래를 방해한 것.
1. 창문을 열어젖뜨리거나 담을 더위잡아 얼굴을 드러내어 길 가는 사람을 내려다보고, 또 조롱하는 것.
1. 3척(尺) 이상의 긴 밧줄을 사용하여 말[馬]을 끄는 것.
1. 유원지와 길가의 꽃나무를 꺾으며, 혹은 식물(植物)을 해치는 것.
1. 도로와 인가에서 강제로 돈을 구걸하거나, 혹은 물품을 강제로 파는 것.
▣학술(學術) 7칙
서양인과 교통한 후에는 전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책(術策)만 숭상하고, 경서 문자(經書文字)는 아무데도 쓸데없는 물건으로 수장(收藏)하여 두게 되었다. 통경 공문(通經攻文)의 업(業)은 금령(禁令)이 있은 지도 벌써 8~9년이나 되었으니, 안정형(安井衡)의 학문과 중야안역(重野安繹)ㆍ천전의(川田毅)의 문장은 모두가 그 옛날에 강습(講習)한 것이다. 만약 수십 년만 지나게 된다면 남아 있는 노인들도 다 없어질 것이니, 이른바 학문의 전형(典型)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인쇄의 일도 날마다 쉴 여가가 없으며, 또한 교묘하고도 속하여 비록 많은 서적이라도 하루 동안에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서적을 오는 대로 곧 간행하게 되니, 진실로 서적을 구득하고자 한다면 북경(北京)의 서포(書鋪)에 갈 필요가 없으며, 인쇄도 선명하고 종이도 질겨서 중국의 것보다도 오히려 나은 점이 있었다.
▣기예(技藝) 7칙
사의적(寫意的)으로 그린 수묵화(水墨畫)도 때로는 있었다. 주먹만한 큰 붓으로 빛깔이 엷은 먹물을 가득 적시어, 아주 얇은 분칠하지 않은 종이 위에 먹방울을 날리면서 이리저리 그리는 것이 퍽 자유스러웠다. 대개 그 솜씨도 투박하지 않고 정신도 활발하였으므로, 쾌적(快適) 유동(流動)한 점은 왕왕 취할 만한 것이 있었다.
▣물산(物産) 26칙
메벼[秔槄]를 논에 옮겨 심는 것은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쌀은 마땅히 천하에서 제일일 것이다. 근일에는 또 농구(農具)의 정교함과 농부의 근실한 힘으로 토지를 모두 이용하고, 송전 하이(松前蝦夷)의 천 리나 되는 땅을 다 빼앗아 관개(灌漑)하였으므로, 그 이익이 그 전보다도 만 배가 된다고 한다.
...종이는 품질이 깨끗하기는 중국의 것과 비교할 만하고, 질기기는 우리나라의 것과 비교할 만하니, 이것이 그 장점이다. 근일에는 또 일종의 서양 종이가 그 나라에 유행하였는데, 광채가 눈이 부시고 두껍기는 손바닥 같았으나, 종이 같으면서도 종이가 아닌 것이니 도리어 귀하게 여길 것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땅(일본)의 최상품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4권
▣수신사가 일본국에 진정한 사예단 물목
설한단 5필
호피 5장
표피 5장
청서피 30장
백저포 20필
백면주 20필
백목면 20필
채화석(綵花席) 30장
경광지(鏡光紙) 20권
황밀(黃蜜) 30근
▣부 일본국 회예단 목록(附日本國回禮單目錄)
1. 도검[刀] 1구(口)
1. 칠기(漆器) 6개
1. 살마도화병(薩摩陶花甁) 1대
1. 부채[箑] 5악(握)
1. 적지금(赤地錦) 1권
1. 홍백려(紅白絽) 2필
1. 갑비색견(甲斐色絹) 12필
1. 월후백축포(越後白縮布) 12단(端)
1. 월후생축포(越後生縮布) 12단
1. 내량백폭마포(奈良白曝麻布) 15필
▣창수시(唱酬詩)
■오 서기에게 차운함 [次奧書記]
내 행차 빠르다 말하지 마오 / 我行莫道太悤悤
오래 있어도 속마음 다 털어 놓기 어렵겠도다 / 久處猶難訴盡衷
마주 보면 마치 온옥을 대한 듯하고 / 相看擬如溫玉對
말은 안 해도 오히려 심령은 통했도다 / 不言還有點犀通
동경 방초(東京芳草)에 정도 많았는데 / 東京芳草情何已
창해 귀환 길은 끝이 없도다 / 滄海歸槎路未窮
지는 해를 바라보며 헤어진 시름 / 落日館前分手恨
훗날 밤 설레이는 꿈을 또한 어쩌나 / 那堪他夜夢魂中
▣귀기(歸期) 4칙
돌아갈 기일이 이미 결정되매, 일행 중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어수선하고 몹시 기뻐서 날뛰고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며, 더불어 말하려고 하면 도리어 또 요란스럽게 달아나기도 했으니, 행장(行裝)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환조(還朝) 1칙 또 별단(別單) 14칙이 있다.
6월 1일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시복(時服)으로 바꾸어 입고, 바로 대궐로 들어갔다. 숭양문(崇陽門) 밖으로 해서 들어가 숙배(肅拜)하고, 먼저 이번에 사신으로 갔던 동안의 문견(聞見)한 별단(別單) 별단은 아래에 있다. 을 승정원(承政院)에 진정(進呈)한 후,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 에 입시(入侍)하였다. 상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돌았으며,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의 노고와 저들(일본인을 가리킴) 심정의 성실 여부를 물었는데, 음성이 분명하고 때로는 포장(褒獎)하는 말까지 내렸다. 또 먼 곳에 갔다가 온 사람이고 절후도 또 더운 때라 하여, 특별히 밀수(蜜水)까지 내리도록 분부하니, 제호탕(醍醐湯) 한 그릇과 감과(甘苽) 한 그릇, 숙어(鱐魚 말린고기)와 석육(腊肉 육포) 합하여 한 그릇을 내렸다. 신은 전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생명을 보전하고 무사히 돌아온 것은 모두 우리 성상(聖上)의 큰 은덕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특별히 위로해 주고 물품도 많이 내려주시니, 신은 감격하고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물러나와 촛불을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인정종(人定鐘)이 울렸다. 방문 온 손님이 문앞에 가득하였으나 영접할 여가도 없이 바로 들어가서 가묘(家廟)에 절하고, 다음에는 누님을 내당(內堂)에서 뵈었다.
늙은 누님과 병든 아내는 너무 기뻐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으며, 두 딸아이는 기뻐 날뛰면서, 절하는 것이 인사인 줄도 알지 못하였으니 도리어 우습기도 하였다.
▣행중 문견 별단(行中聞見別單)을 부록함
1. 그 평소에 양성한 군사는 강호 성중(江戶城中)에서 봉급을 주어 양성한 사람만 7~8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 밖의 육군성(陸軍省)과 해군성(海軍省)에서도 날마다 군사 뽑기를 쉬지 않았는데, 모두 기계에 정통하고 군율에 숙련하여 군대의 모든 동작에 명령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말[馬]은 모두 키가 높고 다리는 여위었으나 날래고 날뛰어 단번에 천 리를 달릴 기세가 있었습니다. 배 위에서도 대포를 사용하고 차 위에서도 대포를 사용하였는데, 대포를 사용하는 방법 또한 전적으로 기륜(機輪)을 사용하여 적이 이쪽저쪽에 보이는 대로 대포를 따라 움직이되, 손과 다리가 빨리 움직여도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강병이 있고 이러한 이기(利器)가 있어도 오히려 부지런히 일하여 쉴 사이가 없었습니다.
1. 그 이른바 부국강병의 술책은 오로지 통상을 일삼는 것이었는데, 통상도 자기 나라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피차간에 거래가 있어, 이쪽에서는 저쪽에 가서 통상을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에 와서 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이 세계 각국에 통상을 하는 것이 그 수효가 매우 많지마는, 가서 통상을 하는 나라는 일본 한 나라뿐이고, 와서 통상을 하는 나라는 세계의 여러 나라인데,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이 반드시 세계 각국보다 10배나 되지는 않을 것이니, 생산하는 사람은 하나뿐이고 소모하는 사람은 여럿이 되면 물가가 등귀(騰貴)하는 것은 현세가 그렇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에 날마다 전폐(錢弊)를 만들어 이것을 당해 내게 되니, 돈은 천하게 되고 물건은 귀하게 되므로 이것은 반드시 실패하는 도리입니다. 하물며 교묘하지 않은 기술이 없고 정교하지 않은 기예(技藝)가 없이 대자연의 이치를 다 이용하여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으니, 겉모양을 본다면 위에 진술한 여러 조목과 같이 이보다 더 부강할 수는 없지마는, 가만히 그 형세를 살펴본다면 또한 장구(長久)한 술책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일동기유 후서(日東記游後敍)
그는 또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또 우리에게 강제할 수 없는 것을 강제시켜 말 한 마디라도 비위에 맞지 않으면 훌쩍 떠나 버릴 것이니, 그들의 추측할 수 없는 심정과 아무런 생각이 없는 행동을 그대가 다 살피지 못한 점이 있다면, 자칫하면 충신 도덕(忠信道德)도 포궐(暴厥 화적(火賊))에게 양육(粱肉)을 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그대의 염려는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다른 길도 한 길로 돌아가고, 여러 가지의 의란(疑難)도 대공지정(大公至正)에게는 굴복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나무는 꺾을래야 꺾을 수가 없으며, 사방으로 통한 거리는 마음대로 달아나도 막힘이 없는 것이니, 즉 이것은 알기 쉬운 이치입니다. 지금 저들이 우리를 아무리 강제하더라도 우리를 강제로 따르게 하지 못할 것은 저들도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니 그들이 오면 예절을 다해 대접하고 소원(疎遠)한 태도를 취하지 말 것이며, 그들이 말하면 진정을 다해 수응(酬應)하고 조금도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장차 어는 곳에서라도 불평할 데가 없고, 어느 일에서라도 반대할 구실을 없게 한 후에, 우리는 의리(義理)를 강구(講究)하고 사민(士民)을 교련하며 군량을 저장하고 성지를 수리하여야 합니다. 그런 후라야만 걱정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능멸(陵蔑)하여 분치(忿懥)하게 하고 의조(疑阻 의심하여 멀리함)하여 서로 거스르게 되고 울분이 쌓여서 병이 되고 수치가 변하여 노하게 되는 것은, 또한 반드시 이르게 되는 형세이지만, 그대의 걱정도 반드시 이것에 불과할 것이므로, 나의 우견(愚見)도 감히 억지로 해명하지는 못합니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런 의견이 있었습니까? 그대의 말은 정탐을 일삼지 않았다고 하지마는, 정탐을 한들 어찌 이보다 더 잘 하겠습니까? 정탐은 그 걱정이 다만 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삼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다.
손님은 가 버리고 나도 또한 원행(遠行)한 끝에 피곤하여 한 달 동안 병을 앓았는데, 또 상의 은혜를 입어 상산부(象山府 곡산군(谷山郡))의 부사(府使)로 나갔다.
상산 고을은 만첩 산곡(萬疊山谷) 중에 있었는데, 공무의 여가가 있기에 문득 행중(行中)에서 보고 기록한 것을 수습하여 조목을 나누고, 대략 기사본말사(記事本末史)의 체재(體裁)를 모방하여 4권을 만들고, 명칭을 《일동기유(日東記游)》라 하였다. 이것은 훗날 내가 전원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낼 적에 전부(田夫 농부(農夫))ㆍ야수(野叟)와 더불어 이국의 기이한 풍속을 밭이랑 사이에서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