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懷(서회) 회포를 품
김굉필(1454-1504)
處獨居閒絶往還(처독거한절왕한)
홀로 한가롭게 사니 오가는 이 끊겼고
只呼明月照孤寒(지호명월조고한)
다만 밝은 달 불러와 외롭고 가난함 비칠뿐이네.
煩君莫問生涯事(번군막문생애사)
그대여 번거로이 내 생애를 묻지 말게
數頃烟波數疊山(수경연파수첩산)
두어 이랑 물안개와 몇 겹의 산뿐이리니.
2018.10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가범(家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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