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천일록(凝川日錄)
편자 박정현(1562-1637)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정합DB에는 편자 미상으로 되어있으니 큰 오류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로(重老), 호는 의곡(義谷)·응천(應川). 할아버지는 박이(朴苡)이고, 아버지는 참찬 박호원(朴好元)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김명윤(金明胤)의 딸이다. 이산해(李山海)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주서(注書)로 임금과 함께 서쪽으로 피난갈 때에 사관 조존세(趙存世)·임취정(任就正) 등과 함께 선조가 즉위하던 해인 1567년부터 1591년까지 25년간의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안주에서 도망쳐, 이로 인하여 계속 탄핵을 받았다. 1601년 정월 예조좌랑이 되어, 3월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6년(광해군 8)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618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상사(上使) 신식(申湜)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공조참판을 지내고, 1625년(인조 3) 사은사 겸 진위사(謝恩使兼陳尉使)로 부사 정운호(鄭雲湖), 서장관 남궁경(南宮檠) 등과 함께 다시 명나라로 가려고 할 때 도중에 도망칠 염려가 있으니 가지 못하게 하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의 신임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1627년 3월 무과의 시관(試官)이 되고, 1632년 형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박승종(朴承宗)의 족당이었다.
응천일록 1
1.기유년(1609, 광해군 1)
2.경술년(1610, 광해군 2)
3월
○ 13일 맑음. 상이 공빈 김씨[金恭嬪 광해군을 낳은 어머니]를 추숭(追崇)하려고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해조는
“왕비로 추숭하고 따로 사당을 세우소서.”
라고 회계(回啓)하였는데, 상이 왕후로 높이고자 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양사가 그 그릇됨을 논하여 아룁니다.”
하였는데, 비답에 미안한 말이 있었으므로, 오늘 사헌부가 인피(引避)하여 물러나 대명하였다.
4월
○ 25일 맑음. 나는 기 판부사(奇判府事 기자헌 1562-1624)를 의금부 근처 의막(依幕)에서 뵈었는데, 유순(柳淳)이 아버지의 첩을 간음하였다는 설에 대한 유순의 대답을 당직(當直)을 통해 왕께 아뢰어, 명을 기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 28일 맑음. 기 정승의 일은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매, 유순을 잡아다가 물었다. 천추사(千秋使) 허균(許筠 1569-1618)이 병이라 하여 두 번 상소하고 방물(方物)을 포장할 때에 나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잘못을 지적하였는데, 대간이 곧 잡아다가 죄를 따지기를 청하니, 직책을 갈아 성절사(聖節使) 황시(黃是)로 허균을 바꾸고 성절사는 관주사(管州使) 정문부(鄭文孚)를 보낼 것을 명하였다.
7월
○ 14일 맑음. 상이 조사(詔使)가 묵는 곳에 납시어 잔치를 청하였는데, 조사가 만나기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날이 저물어서 궁으로 돌아왔다. 적지 않게 모욕을 당한 것이 분하다.
11월
○ 16일 맑음. 14일은 바로 대비전(大妃殿)의 탄일(誕日)이었으나, 어제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진하(陳賀)를 행하지 못하고 오늘 하례를 행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 목사 허균이 전시에서 대독관(對讀官)으로 있을 적에 사사로이 처사하기를 제멋대로 하였으니, 사판(仕版)에서 없애버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자기가 뽑은 과거 응시자이니, 틀림없이 모를 리가 없다. 엄하게 따져서 처치하라.”
하였다.
12월
○ 13일 맑음. 허균과 허용은 형벌을 받고 정문진은 스스로 자백하였다고 한다.
3. 신해년(1611, 광해군 3)
3월
○ 18일 흐림. 상이 비망기를 내렸는데 대개, ‘급제한 임숙영(任叔英)은 전시(殿試)의 책제(策題)와는 엉뚱하게 임금을 욕하였으니 급제를 취소하라.’고 하였다. 승정원이 온당치 못함을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삼사가 아울러 합격취소의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4월
○ 8일 맑음. 요사이 좌찬성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려 힘써 회재(晦齋 이언적)와 퇴계(退溪)를 헐뜯으니, 듣는 이마다 놀랍고 분하게 여겼다. 승정원이 계사를 올리자 비답하기를,
“사람은 각기 소견이 있으니 몰아쳐서 부화뇌동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차자는 내리지 않았으니, 승정원의 계는 이르지 않느냐……”
라고 하였다. 좋고 싫음을 시원히 가리지 않고 도리어 승정원의 계사를 이르다 하니, 인심이 더욱 격동하였다.
6월
○ 15일 맑음. 경기 유생들의 상소에, 상이 사사롭고 치우치게 역성든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비답하지 않고 내려 보냈으며, 이윽고 비망기에 대략,
“정인홍이 올린 무신년의 상소는 비단 나 한 사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참으로 종묘사직을 위하고 대의를 위하고 만세를 위하는 명분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그 사이에 무슨 역성을 들었기에 요망한 무리들이 이것을 가지고 고집하며, 업신여기는 기틀을 삼아 제멋대로 업신여기고 물리침으로써 사람마다 괴상히 여기고 감히 말리지 못하니,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이로부터 땅을 쓸 듯이 다하였다. 내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4. 임자년(1612, 광해군 4)
2월
○ 29일 맑음. 합천(陜川) 사람 문신(文賮)이 아비의 첩을 몰래 간통하였다 하여 일찍이 의금부에서 추국하고 나서 풀어 놓아 주었는데, 또 그 아비의 다른 첩을 간통하여 발각되어 잡아 가두고 그 삼촌 조응인(曹應仁)도 잡아 가두었다.
6월
○ 21일 흐림. 유영경(1550-1608)ㆍ김대래ㆍ이홍로ㆍ김일승ㆍ정몽민(鄭蒙民)의 주검을 네거리에서 뒤쫓아 형벌을 가했다.
5. 계축년(1613, 광해군 5)
2월
○ 6일 임혁(任奕)이 병으로 나간 경어궁인(徑御宮人 왕과 가까이 했던 궁녀)과 내통하여 영유(永柔)로 데려 갔으므로 대간이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첩 영생(榮生)이 도망하매 상이 노하여 그 친족의 가까운 사람을 가두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 14일 죄인 임혁은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고, 영생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5월
○ 28일 김제남(1562-1613)을 며칠 전에 외딴 섬에 위리안치하도록 명하였는데, 삼사가 바야흐로 엄히 국문하기를 청하므로 승정원이 여러 번 계시를 올렸으나 명을 받들어 전하지 못하였었는데, 오늘 삼사의 아룀으로 인하여 사약을 내릴 것을 명하였다.
8월
2일 의(㼁 영창대군 1606-1614)가 강화의 위리안치될 곳으로 떠났는데, 압송하는 사람으로는 별장에 이정표(李廷彪)ㆍ이유성(李惟誠)ㆍ이연경(李延慶)ㆍ홍유의(洪有義), 선전관에 허쟁(許崝), 초관에 한응남(韓應男), 문재(文宰)에 이필영(李必榮), 금부당상에 조존세(趙存世), 도사에 홍요검(洪堯儉)이었다. 전교하기를,
“의를 압송할 때에 길을 함께 가는, 상하 일보는 사람들과 군병들은 각기 밥을 싸 가지고 가라.”
고 하였다.
○ 14일 서희신(徐希信)이 상소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피건대, 너의 품은 뜻을 꼭 아뢰려는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생각하니 국가가 불행하여 비록 당을 나누는 명목은 있을지언정 타고난 양심은 고루 가졌으리니, 어찌 한 편의 사람이 다 역적이 될 리가 있으랴. 우두머리를 무찌른 뒤에는 내가 똑같이 보고 똑같이 사랑하여 저쪽이나 이쪽이나 차별없이 하겠으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고 하였다.
10월
○ 12일 전교하기를,
“이덕형(1561-1613)의 집에 특별히 부조하라. 양사가 아뢴 바 이덕형 관작 회복명을 도로 거두라는 청은 허락하지 않겠다. 살아있을 적에 어진 정승에게 거짓 죄를 꾸민 것도 이미 심하였거니와 죽은 뒤에 나라 사람의 위아래가 다 슬프고 아깝게 여기거늘, 또 이런 논의를 일으킴은 이 무슨 마음이냐?”
고 하였다.
6. 갑인년(1614, 광해군 6)
1월
○ 22일 합사(合司)가 영의정 기자헌을 탄핵하여, 음흉하고 교묘히 속인다고 지목하고 파직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영의정은 선조(先朝)의 대신으로 충성되게 일하였음이 뛰어나게 뚜렷하였으니, 나랏일이 위태로운 때를 맞아, 심복을 삼아 전력을 다하도록 해야 사리에 알맞거늘, 꾀하지 못할 이론(異論)을 이처럼 갑자기 일으키니, 안타깝다. 마땅히 곧 그쳐서 체면을 높이고 나라의 근심을 풀게 하라.”
하였다.
○ 23일 합사가 아뢴 영의정의 일에 관하여 비답하기를,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어진 정승을 말을 꾸며서 공격하며 용납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임금을 업신여기고 역적을 편드는 사람을 복상(卜相)하란 말이냐? 결코 따를 수 없는 이치이니, 급히 이런 논의를 멈추고 안심하고 올라와서 지금의 어려움을 건지게 하라.”
고 하였다.
2월
○ 12일 전교하여 이르기를,
“어린 아이(영창대군)가 무슨 아는 것이 있었으랴. 여러 사람의 뜻에 몰려 아니 죽을 데에서 죽었으니, 내가 매우 가엾고 슬프게 여긴다. 별장과 강화 부사는 삼가 구호하지 못하고 또한 미리 달려와 아뢰지 않았으니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대개, ‘비록 상례를 치르고 제사지내는 따위 일을 그 고을 원으로 하여금 특별히 살펴 행하게 하라는 교지는 있을 수 있을지라도, 이 한 건은 거행할 수 없다는 뜻을 감히 아뢴다.’고 하니, 전교하여 이르기를,
“제사는 되도록 두터이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빨리 유지를 내리라.”
하였다. 승정원이 계사하여, 제사를 되도록 두터이 하라는 교지는 받들 수 없다 하니, 입계하였다.
6월
○ 13일 함흥 판관(咸興判官) 심현(沈誢 1568-1637)이 아홉 도랑을 파서 물 대어, 6~7백 섬지기 논을 만들었다는 감사의 장계에 따라 호조가 상주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가자하라.”
고 하였다.
7월
○ 2일 친국하였는데, 죄인 정온(1569-1641)은 다시 추문하고, 정항ㆍ임진백(任進伯)ㆍ이징진(李徵進)ㆍ양달해(梁達海)는 원정하고, 정온은 외딴 섬에 위리안치하고, 정항은 파직하여 놓아 보내고, 임진백과 양달해는 놓아 보냈다.
○ 24일 여산(礪山)의 유학 송흥주(宋興周) 등의 상소는, ‘정항(鄭沆)을 목 베고 정온을 용서하여,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의 분함을 풀기를 청한다.’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10월
○ 1일 승정원이, 예순(禮順) 등을 삼성(三省)이 함께 모여서 추국할 것을 품의하니, 전교하기를,
“전교가 있거든 하라.”
고 하였는데, 예순은 바로 이귀의 딸이다.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북인 중에서도 대북(大北)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귀(1557-1633)와 가장 대립했던 정치인이 대북의 핵심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었던 만큼 이귀의 수난은 예고되어 있었다. 이귀는 선조대 후반 대사헌으로 있던 정인홍의 죄악 10가지를 고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자신이 한 번 정인홍의 허물을 말하자 그의 도당들이 멋대로 자신의 일족(一族)의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내쫓기까지 한 사실과 정인홍에게 잘못 보이면 곧바로 모두 과거 시험에 응시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이 정국의 실세가 되자 이귀는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9월 사간원에서는 “이귀는 괴이한 귀신으로 상소하는 일이 평생의 장기입니다. 전에 소모관이 되었을 때 정인홍을 없는 사실로 얽어서 심지어 ‘오랫동안 의병을 잡고 있다’는 등의 말을 상소 가운데 뚜렷이 언급하여 마치 은연히 다른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의 계략이 너무나 참담합니다.”라고 하면서 이귀의 사판(仕版: 벼슬아치 명부) 삭제까지 주장했지만, 파직으로 마무리 되었다. 또한 장녀 여순(女順)이 죽은 남편의 친구와 간통한 사건으로 인하여, 딸도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616년 이귀는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아들 이시백은 시국이 불안하니 아버지에게 시골로 내려가기를 청했지만 이귀는 본격적으로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을 도모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던 신경진과 구굉 등이 이서와 반정을 먼저 계획하였고, 뜻을 같이할 인물의 포섭에 나섰다. 이때 김류와 함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이귀였다. 대북 정권에서 유배를 갔던 경력과 더불어, 평산부사, 방어사 등을 역임하여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반정 세력과 뜻을 같이 하면서 이귀는 자신의 자식들을 바로 합류시켰고, 평소 친분이 있던 최명길ㆍ김자점ㆍ심기원 등을 끌어들였다. 이귀의 합류로 반정 세력은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 되었다.
7. 을묘년(1615, 광해군 7)
3월
○ 16일 비망기에,
“내직(內職)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숙의(淑儀)의 간택을 위하여 11세부터 18세까지의 처녀의 단자를 봉입하라 하였으나, 중외(中外)의 사대부로서 감추고 내지 않은 자가 매우 많으니, 선대의 성교(聖敎)에 따라 처녀를 감추고 내지 않은 자는 법부(法府)로 하여금 십분 착실히 조사해 밝혀서 중벌에 처한다는 것을 예조에 이르라.”
하였다.
8월
○ 2일 숙의(淑儀)가 될 처녀로, 찰방 김종해(金宗海), 수사 김전(金全), 선전관 구인후(具仁垕), 판관 홍매(洪邁), 진사 임근(任僅), 인의 심협(沈浹), 참봉 윤승현(尹承賢)ㆍ김덕망(金德望)ㆍ심천수(沈天授), 유학 심숙(沈俶), 판서 한효순(韓孝純), 생원 윤홍업(尹弘業), 현감 성여발(成汝撥) 등의 딸을 낙점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 낙점한 처녀 외에는 모두에게 혼인을 허가한다.”
하였다. 가도사 4명이 전교를 듣고 나갔다.
10월
○ 19일 비망기에,
“김천일(金千鎰)은 충신 줄에 수록되었으나, 이대원(李大元)ㆍ이순신(李舜臣)ㆍ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 등으로 말하면 나랏일로 죽은 사람인데, 어찌하여 수록하지 않았는가? 상세히 의논하여 정탈(定奪)하라고 찬집청에 이르라.”
하였다.
11월
○ 5일 간밤에, 문 틈으로 동부승지가 서계하기를 대개,
“좌의정(정인홍)을 용인에서 만나보고 돈유하였으나, ‘다시 성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은 이미 차자에 다 진달하였으니, 이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하고, 그대로 양지(陽智)로 떠났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어진 이를 대우하는 정성이 얕기 때문에, 경으로 하여금 조정에 안정하여 그 뜻을 펴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경으로 하여금 추위를 무릅쓰고 밤에 떠나서 눈ㆍ얼음 덮인 먼 길을 헤매게 하였으니, 너무도 서운하여 침식을 다 잊었소. 차자로 아뢴 것 외에 또 말할 일이 있으면 낱낱이 상세히 말하오.”
하였다.
8. 병진년(1616, 광해군 8)
11월
○ 24일 전교하기를,
“이익(李瀷)은 죄가 중한 사람인데 해가 지나도록 추국하지 않고 보석한 지 여러 달이 되어도 도로 가두지 않으니, 일이 아주 해괴하다. 빨리 도로 가두고 추국하는 날에는 삼성이 함께 자리하여, 태아(太阿)가 거꾸로 잡혔다는 곡절을 엄히 국문하게 하라. 조직(趙溭)도 곧 국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 21일 진사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는 대개, ‘먼저 이이첨의 위세와 복록을 마음대로 하는 죄를 다스리고, 다음에 유희분ㆍ박승종(朴承宗)의 임금과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라’는 것이었는데, 승정원에 올렸더니, 승정원이 아뢰기를,
“오늘 진사 윤선도가 승정원에 소장을 바쳤는데, 그 글 뜻을 보건대, 오로지 원이곤을 구제하고 훈척ㆍ재신을 다 모함하는 데에 있으며, 말이 아주 흉악하고 참혹하므로, 곧 입계하여야 할 바이나, 승정원에 우선 머물려 두라 하신 전교로 말미암아 입계할 수 없음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 들여라’고 전교하였다.
응천일록 2
정사년(1617, 광해군 9)
1월
2일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이 슬프고 괴로운 사연으로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내 뜻을 이미 다 일렀거니와, 경은 떠나갈 만한 의의가 없으니, 굳이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12월
27일 합사하여 아뢰기를,
“기준격이, ‘허균이 군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한다.’는 일로 소장을 올려 고변하였는데, 실로 그런 일이 있다면 허균은 막대한 역적이 되는 것이요, 거짓으로 얽어 무고하였다면 준격도 또한 역적이 되는 것이니, 이미 역적이라면 역적을 토죄하는 일을 일각이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준격의 소가 재차 올라오기에 이르고, 허균 또한 소를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였는데, 국문하라는 명이 아직까지 지체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만큼 큰일인데, 범범하게 보십니까? 준격의 상소는 실로 자헌이 지시한 바에서 나온 것이니, 기자헌ㆍ준격ㆍ허균을 아울러 엄히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서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씻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서히 결정을 짓겠다.”
하였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정월
기미년 (1619, 광해군 11)
7월
18일 황상(皇上)이 임진왜란의 일로써 칙서(勅書)를 내리고, 또 은 1만 냥을 하사하여 전사한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면서, 경략(經略)을 시켜 사람을 차출하여 싸가지고 보내도록 하였다. 그래서 경략이 사천영병도사(泗川領兵都司) 표현룡(表現龍)과 좌영(坐營) 조백(曹柏)을 차출하여 싸 받들고 나왔다.
경신년(1620, 광해군 12)
2월
8일 웅경략(熊經略 이름은 정필(庭弼))이 본국에서 급함을 아뢰었기 때문에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철강(鐵江)과 의주(義州)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한다.
12월
17일 전교하기를,
“이정구의《조천기행록(朝天記行錄)》을 보니, 〈천추성절사 양행계회도(千秋聖節使兩行契會圖)〉 가 있다 하니, 이 도(圖)를 찾아 들이라.”
하였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1월
6일 도승지 유경종(柳慶宗 1565-1623)의 사직하는 차자에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추국하는 일이 많을 뿐만 아니라, 차관(差官)이 잇달아 나오는 이때가 진실로 어떤 시기인가? 서로 계교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마음을 다해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전일에 좌승지 이위경(李偉卿 1586-1623)의 집 노비가 소를 잃은 것을 핑계하여 경종(慶宗)의 집에 가서는 소란을 피우고, 부솔(副率) 황길남(黃吉男)의 집에 가서는 그의 아내를 끌어 내어 치마와 버선을 벗기기까지 하였으며, 그 분노를 다시 경종의 집에 옮겨서, 그의 부부에게 욕지거리하고 그의 손자를 구타하였으므로 계사를 올린 것이다. 위경도 또한 상소하여 시끄럽게 다투어 변명하였으니, 조정의 사체가 극히 한심하다. 이위경이 상소하기를,
“동료를 거슬리어 사주하는 소(疏)가 잇달아 일어나니, 얼굴을 들고 조정에 나갈 수 없습니다. 신의 관직을 개차하여 장관(長官)의 노한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시비의 곡직은 절로 공의(公議)가 있을 터이니, 사직하지 말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황길남의 상소는, ‘이위경이 나무꾼 종을 잡아가고 주인 있는 소를 빼앗았으며, 여종을 놓아 소란을 피우고 사대부의 아내를 구타하였다.’는 것이었다.
10일 사간원의 계는 대개, ‘도승지 유경종과 좌승지 이위경은 종들이 서로 싸움질한 일을 가지고 서로 소장과 차자를 올려 마치 상놈들이 머리를 풀어 젖히고 싸움질하듯이 하였으니, 아울러 파직하고, 황길남은 소를 올려 송사하여 변론하였으니, 군부와 조정을 업신여긴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서서히 결정 짓겠다.”
하였다.
11일 전교하기를,
“이위경이 그의 노비를 놓아 조관(朝官)인 재상의 집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였으므로, 경종의 계사와 길남의 상소는 실로 분을 풀 곳이 없어서 한 일이니, 그 정상이 슬프구나. 한 번 소를 올린 것이 무슨 군부와 조정을 업신여긴 죄가 되겠는가? 슬프다, 오늘날 조정은 어지럽고 나라의 기강은 풀어졌구나. 재신 가운데도 군주를 어린아이처럼 보아 거리낌없이 방자한 자가 있는데, 가령 길남에게 실수가 있다 할지라도 나무랄 것이 뭐 있느냐?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가?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히지 말며, 아울러 위경에게 그만두도록 간원(諫院)에 말하라.”
하였다.
※이위경 : 1605년(선조 38) 진사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성균관유생으로서 앞장서 윤인(尹訒)·정조(鄭造) 등과 연이어 소를 올려, 인목대비가 안으로 무고를 일으키고 밖으로 역모에 응하였음을 주장하고 폐출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지완(李志完) 등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 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등용되고 정언을 거쳐 1618년 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620년 좌승지·예조참의를 지냈고, 162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강원도관찰사 백대형(白大珩)과 결탁하여 경운궁(慶雲宮)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시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정의 삼사관원과 유생들로부터도 중죄를 내리도록 많은 탄핵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백대형·정조·윤인 등과 함께 능지처참되고 동시에 연좌율(緣坐律: 일정한 친족 범위내에서 죄를 지은 자와 함께 처벌되는 형률)이 적용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가족들도 노비로 전락하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 14)
2월
23일 전교하기를,
“밖에 있는 가선 당상(嘉善堂上)의 문신을 급급히 불러 모으도록 비변사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
하였다. 비국의 계는 대개, ‘평시에 녹을 받던 신하가 전리에 누워 있으면서 올라올 뜻이 없으니, 해조에서 하나 하나 불러 모으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엽(鄭曄)ㆍ이수광(李睟光) 등과 같은 관질이 높은 재신이 일체 출사하지 않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모두 불러 모으게 하라.”
하였다.
25일 비국이 아뢰기를 대개, ‘밖에 있는 문신을 불러 모으는 일에 대해 운운하셨으나, 정엽ㆍ이수광 외에 은거하여 독서하고 있는 정경세(鄭經世), 고요히 자신을 지키고 있는 정광적(鄭光績), 공정하고 청렴하게 봉직하는 이성(李渻), 전원에서 수졸(守拙)하고 있는 권양일(權養一)은 모두 먼저 불러 쓸 만하며, 바야흐로 죄적(罪籍)에 있는 자는 감히 아울러 들게 할 수 없거니와, 이미 직첩을 주도록 허락을 받은 자로 말하면, 일심으로 충애하는 남이공(南以恭), 평탄하고 험함을 꺼리지 않는 이귀(李貴), 문장과 재국이 있는 홍서봉(洪瑞鳳) 또한 거두어 쓸 만하므로 구구한 생각을 황공하게 감히 아뢴다.’는 것이었다.
27일 전교하기를,
“접반사ㆍ영위사ㆍ문안사ㆍ접반관 등의 임무는 바다를 건너 경사(京師)로 가는 일과는 다른데, 유식한 재신과 문신들은 아직도 온갖 방법으로 사피하기를 꾀하니, 극히 마음이 아프다. 지금부터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은 분명히 늙거나 병든 자 외에는 모두 삭직하고, 심한 자는 관서(關西)에서 백의종군하게 하도록 승전색에게 시켜라.”
하였다.
계해년(1623, 광해군 15)
2월
27일 경상수사(慶尙水使)의 서목에,
“본월 15일에 왜관(倭館) 80여 칸이 다 타버렸습니다.”
하였다.
응천일록 3
계해년 하(1623, 인조 1)
6월
28일 금부 도사ㆍ강화 별장(江華別將)의 서목에,
“폐인(廢人) 지(䘭)가 이달 27일 3경쯤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하였다.
10월
10일 전교하기를,
“폐비(廢妃)가 병으로 죽었다 하니, 내가 심히 놀랍고 슬프다. 염습(斂襲)에 소용되는 옷과 이불 및 관곽(棺槨) 등의 물건을 급속히 내려보내라.”
하였다.
13일 예조가 아뢰기를,
“중종반정의 초기에 폐주(廢主)를 연산군으로 강호하였으니, 이제 이 폐주를 이 전례에 의하여 강봉할 일로 승전을 받드옵니다. 폐주는 광해군으로 칭호하고, 폐비는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으로 강봉할 일로 승전을 받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리 하라.’ 전교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5월
27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정릉(鄭稜)은 정인홍의 손자로서, 인홍이 만년에 저지른 패악한 일은 실은 정릉의 권유에서였으며, 역적 이괄(李适)의 변이 일어났을 적에 그의 남은 무리들과 더불어 무도한 말을 꺼림 없이 꺼내어 수령을 위협하였으니, 외딴 섬에 정배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비답하였다.
28일 주강 때에, 정엽(鄭曄)이 아뢰기를,
“기축년(1589, 선조 22)이후에 붕당의 환란이 크게 일어나서,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였다는 것으로 죄목을 만들어 길이 선비를 죽였다는 악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대간 구성(具宬)ㆍ이흡(李洽)ㆍ이상길(李尙吉)이 모두 죄를 당하였으나 선조(宣祖) 말년에 모두 용서를 받았고, 이해수(李海壽)가 그때 대사간이기는 하였으나 또한 논의가 발한 뒤였습니다. 그래서 이해수가 죄를 입은 것에 대해 여론은 모두 억울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였고, 김자점(金自點)은 아뢰기를,
“정철은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죄를 입은 지 30년만에 이제 원통함을 벗게 되었는데, 이해수만이 은전(恩典)을 받지 못한다면 참으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정철에 관한 일과 같이 처리하라.”
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 3)
병인년(1626, 인조 4)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
○17일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기를,
“오랑캐 군사 3~4만 명이 13일 밤에 얼음을 밟고 압록강을 건너 몰래 의주를 습격하여 수구문(水口門)으로 들어와서 문지기 병사를 죽였는데, 목사 이완(李莞)은 적병이 성에 오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날이 밝자 성은 함락되어 온 성의 군민(軍民)이 모두 도륙을 당했는데, 이완 및 판관 최몽량(崔夢亮)과 별장이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변고가 뜻밖에 일어나서 성안이 흉흉하여 앞을 다투어 도망하니, 하루 이틀 사이에 성 안이 텅 비게 되었다. 적병이 능한산성(陵漢山城)ㆍ정주(定州)ㆍ안주(安州)를 잇달아 함락하였는데, 능한 산성을 지키던 장수와 정주 목사 김진(金搢)ㆍ곽산 부사(郭山府使) 박유건(朴惟健)은 성이 함락된 뒤에 붙잡혀서 머리가 잘리었고,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協)은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고, 안주의 수성장(守城將)ㆍ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ㆍ목사 김준(金浚)이 죽었으며, 잇달아 들어온 수령 영유(永柔) 송도남(宋圖南)ㆍ장돈(張敦)이 모두 죽었다. 평안 감사 윤훤은 도망하고 성은 함락되었으며, 황주(黃州) 또한 무너졌다. 적병이 무인지경 같이 들어오니 모든 장사가 모두 도망하여 숨고 맞아 싸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21일 자전과 중전(中殿)이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로 먼저 거둥하였다. 20일에 세자가 분조(分朝)하기 위해 공주로 내려갔다가 그대로 전주로 향하였는데, 완평부원군 이원익, 좌상 신흠, 서평부원군 한준겸 및 재신 심열(沈悅)ㆍ최권(崔權) 등과 시강원ㆍ익위사(翊衛司)의 각 관원이 배행하였다.
○26일 새벽에 대가(大駕)가 강화로 거둥하였다. 25일에 나는 저녁에 호조 판서ㆍ지평과 더불어 신기한(申起漢)의 집에 가서 잤다. 나는 총관(摠管)이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예궐하여 대가를 따랐다. (저자는 박정현으로 이 때 총관이라고 하는데 오위도총부의 총관으로 여겨진다. 오위도총부의 관원으로는 도총관(都摠管, 정2품)과 부총관(종2품) 모두 10인으로 타관이 겸임토록 되었다.) 안제(安悌)도 동행하였다. 이후양(李後陽)은 25일 저녁에 첨지 조즙(趙濈)과 함께 먼저 삼전도(三田渡)를 거쳐 강을 건너 노량(鷺梁)에서 기다리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간 뒤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숙배는 노량강가에서 하였다. 대가는 노량 북쪽에 언덕에 머물러서 승상(繩床 휴대용 의자)에 앉고 시위 장사(侍衛將士)는 땅에 앉아 호위하였다. 인마(人馬)가 다 건너간 뒤에야 강을 건넜다. 또 남쪽 언덕에 머물렀다가 저녁에 양천(陽川)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호조 판서ㆍ호조 좌랑ㆍ지평과 읍내에서 같이 잤었다.
○ 27일 내가가 이른 아침에 떠나 김포(金浦)의 원소(園所)를 들려 묘에 배례를 드리고, 낮에 김포의 신현(新縣)에 쉬었다가 저녁에 통진(通津)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 28일 대가가 거둥을 멈추었다.
○ 29일 대가가 10여 리를 행하여 갑관진(甲串津)에 이르러 장막(帳幕)에 잠깐 머물렀다가 강을 건넜고, 또 군(郡) 주변 막차(幕次)에 머물렀다가 해가 저물어서 강화로 들어와 객사에 듭시었다. 자전은 새로 만든 궐사(闕舍)에 드시고, 중전은 부윤의 관사에 드시었다. 김시국(金蓍國)은 예조 참의로서 일찍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와서 창북(倉北) 여염집에 있는데 조 첨지(趙僉知)ㆍ지평ㆍ좌랑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참의가 기숙하는 초가집이 좁고 누추하여 견디어내기 어려웠다.
총부(摠府)의 당상과 낭청 각 두 사람이 궐내에서 숙직하는데, 병조와 한 방에서 같이 자고 낮에는 나왔다. 적병이 안주(安州)에 이르니 평양ㆍ황주가 모두 무너져 흩어지고 감사 윤훤ㆍ병사 정호서(丁好恕)는 도망하여 달아났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모든 고을들이 곳곳마다 무너져 흩어져서 방어하는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적병이 승승장구하여 진격해 왔다. 오랑캐의 차사(差使) 4명을 보내어 강화(講和)하자고 소리쳐 말하므로 신경진(申景禛)ㆍ장유 등을 시켜 갑관(甲串)과 문루(門樓)에서 접대하고 술과 밥을 먹여 보냈다. 오랑캐가 또 차사 유해(劉海) 등 몇 명을 보내왔는데, 해는 곧 요동 사람으로 오랑캐에 투항하여 용사(用事)하는 자이다.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인조가 대청(大廳)에 납시어 인견하는데 배읍례(拜揖禮)를 행하지 않고 곧장 의자에 나와 앉아 거만하게 버틴 채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극히 통분할 일이었다.
조정에서 진창군(晉昌君) 인(絪)으로 하여금 강홍립(姜弘立)의 아들 숙(璹)ㆍ박난영(朴蘭英)의 아들 입(岦)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들어가서 화의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적장과 두 왕자를 평산(平山)에서 만나서 꿇어 엎드리고, 절하고 꿇는 것을 시키는 대로 하였다. 적장이 또한 강홍립과 박난영을 보내어 강화에 관한 일을 찬성하였다. 유해가 평산으로 돌아갔다가 또 하늘에 고하고 맹세에 임할 일로 보내어 왔다. 그래서 그날 밤에 인조는 대청에 납시어 친히 분향하고 강화하는 연유를 하늘에 고하였다.
유해 등이 대신과 훈신의 반렬 끝에 섰다가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 끝난 뒤에 대신 오윤겸 등과 더불어 서문 밖에 단을 쌓고 분향한 뒤에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 하늘에 고하고 맹세에 임하였다. 적장이 왕자와 왕제(王弟)를 맹세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그대로 한(汗)의 처소로 데리고 가려 하므로, 종실 원창령(原昌令)으로 거짓 왕제를 삼아 종2품의 군(君)으로 승진시켜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과 더불어 오랑캐의 진영으로 향하여 평양에서 맹세하였다.
적이 비록 강화하는 것으로 말은 하나, 군사를 놓아 노략질하여 해서의 일도가 그들의 칼날을 받지 않은 곳이 없고 면한 곳은 겨우 3~4 고을뿐이었다. 불사르고 노략질한 것이 문화(文化)가 더욱 심하다 한다.
7월
○29일 정원이 아뢴 대개에,
“강홍립(姜弘立)을 관작을 회복해 주고 상수(喪需)를 제급하도록 명이 내리셨는데, 홍립은 죄가 역적 예(豫)보다 더하고 악이 역적 윤(潤)보다 더 심하므로 감히 전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계사 안에, ‘적을 끌어들였다’는 말에 대하여는 홍립의 본정이 아닐 듯하다.”
하였다.
9월
○13일 의주부윤의 서목은 ‘성 안에 가득한 기와와 자갈이 백골과 뒤섞여 바라보이는 곳곳마다 구릉같고 노적같으며, 죽은 지 오래 되었거나 얼마 안 된 시체들이 그 수를 셀 수 없으며, 쓸 만한 화기(火器)는 다 강물에 잠기고, 사로잡혔던 남녀는 배고파 울며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하니, 극히 참혹하고 측은하다.’는 것이었다.
무진년 상 (1628, 인조 6)
응천일록 4
무진년 하 (1628, 인조 6)
8월
19일 접반사의 서목(書目)에,
“모영경(毛永卿)을 서울로부터 묶어 섬(島 가도(椵島)를 뜻함)으로 돌아와서 처결하려고, 부총차관(副摠差官)이 가정(家丁) 2명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신이 모 차사(毛差使)를 만나보니, ‘모영경이 서울로부터 섬으로 잡혀 돌아오면 목을 베어 서울로 보낸다’ 합니다.”
하였다.
9월
6일 비망기에,
“거의(擧義) 이후로 모든 어전에 이바지하는 물건을 혹은 하교로 말미암아, 혹은 소차로 말미암아 거의 다 줄였는데, 그 중에 지금 아직 감하지 않은 것은 표구(豹裘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이다. 해조(該曹)가 반드시 추위를 막는 것을 중하게 여기어 감히 폐지할 것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도의 백성이 얼어 죽는 때에도 몸에 가벼운 갖옷을 입으니 마음이 심히 불안하다. 금년에는 진배(進排 대궐이나 관아에서 쓸 여러 가지 물품을 바침)하지 말고 그 값에 해당하는 쌀을 양서(兩西)에 내려 보내서, 아무것도 없는 고달픈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라. 또 내주방(內酒房)의 향온(香醞)이 흉년에 계속 있는 것도 매우 옳지 않으니, 대비전에 올리는 것 외에 그 나머지 각전(各殿)에는 내년 추수 때까지 모두 정지하고 그 술에 드는 쌀로 서울 안의 구호에 보태어 쓰라.”
하였다. 또 비망기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을 것은 백성의 하늘인데, 하늘이 혹심한 재앙을 내려 백곡이 크게 흉년들어, 가엾은 우리 항산 없는 백성이 모조리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가 극히 근심되고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러 도의 감사로 하여금 수령에게 엄히 계칙하여 내 진정한 뜻을 알게 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함이 없이 궁핍한 백성을 구제해서 굶어 죽게 되지 않도록 하라. 내가 관원을 보내어 잘 살피겠다. 만약 굶어 죽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죄 주어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다.
12월
6일 병조 판서 이귀(1557-1633)의 차자는 대개, ‘성대훈(成大勳)을 서변(西邊)으로 정배(定配)하는 것은 법에 있어서 부당하다’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대간의 논의 중에서 서변으로 옮겨 정배하자는 말은 비록 지나친 것 같으나, 괴산(槐山) 근처에 정배함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실로 지당한데, 이처럼 허물을 꾸며서 다투고 변명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은가? 본부(本府)가 이미 근래의 규례에 따라 법을 범하여 멀리 귀양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른바 ‘뒤의 폐단이 없지 않다’는 등의 말도 역시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판의금부사 이귀의 차자는 대개, ‘신이 저번 차자에 아뢴 것은 국법을 위한 것이지 한 죄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허물을 꾸민다는 전교를 받았으니, 다른 당상으로 하여금 다시 서변으로 정배하게 하고 신이 띠고 있는 의금부 당상의 직을 체차하라’는 것이었다.
7일 이귀의 차자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이귀는 공훈이 크다고 하더라도 역시 한 신하인데,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이처럼 윤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이 차자를 도로 내어주고 판의금은 원한 대로 체차하라.”
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 7)
3월
26일 이조의 암행어사 회계에 전교하기를,
“당초에 어사가 떠날 때에 고을 이름을 써서 내려준 것은 실상 생각이 있어서인데, 내 생각을 알지 못하고 느릿느릿 왕래하면서 다른 고을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도 서계(書啓)하여 처리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직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겠다. 이와 같은 농사철에 많은 수령들을 가벼이 갈기는 어려울 듯하니 제비 뽑힌 고을들 외에 나머지 수령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해조로 하여금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윤4월
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경평군 늑(慶平君玏 선조의 아들 1600-1673)은 광패(狂悖)한 소행이 한 가지뿐 아닙니다. 작년에 증거 없는 일을 가지고 고부(古阜) 출신(出身) 정성(鄭晟)의 아들에게서 재산을 억지로 거두었고, 정읍 주인(井邑主人)이 까닭없이 잡혀 갇힌 지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이미 은자(銀子) 80냥을 받고서도 오히려 마음에 차지 않아 꼭 백 냥의 수를 채우려고 하니,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파직하시고 심부름을 한 종도 해조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받은 은자를 낱낱이 찾아서 돌려 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왕자의 체면이 중하니 마땅히 후하게 대우하여야 할 터인데, 근래에 조정은 업신여겨서 일마다 허물을 삼고 해마다 죄주기를 청하니 오늘날의 왕자들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계사(啓辭)에 이른바 장응남(張應男)이란 자는 전일의 적간 단자(摘奸單子) 중에 이름이 없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이 일이 풍문이지 반드시 진실은 아닐 듯하며, 또 경평군 늑은 논핵을 당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부끄러운 마음이 아직도 있을 터이니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의 의논하는 것이 아주 부당하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7월
1일 승정원이 아뢴 대개는,
“모문룡(1576-1629)은 1품인 도둑으로서 한 방면을 전제(專制)하였었는데, 원경략(袁經略)이 성지를 받아서 베이고, 감군 허(許)가 성(姓)을 가진 자가 나올 것이라 하니, 접반사ㆍ문안사 등을 빨리 내려보내도록 해조로 하여금 처치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적임자를 차출하여서 확실한 보고를 기다림이 옳다.”
하였다.
경오년 상 (1630, 인조 8)
2월
7일 평안 감사 서목에,
“역관 고목(告目)에 ‘동지사 윤안국(尹安國 1569-1630)이 지난 해 9월 17일에 바다 가운데에서 물에 휩쓸려 죽었다’ 합니다.”
하였다.
※윤안국 :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동인(東人)들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하였다. 1598년 동인들이 실각하자 박사(博士)가 되고, 이어 전적(典籍)‧분승지(分承旨)‧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29년(인조 7)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배가 뒤집혀 익사하였다.
9월
28일 비망기에,
“1차 간택된 처녀인 심기원(沈器遠)ㆍ장유(張維)ㆍ정광경(鄭廣敬)ㆍ김광현(金光炫)ㆍ황수(黃瀡)ㆍ김남중(金南重)ㆍ김광혁(金光爀)ㆍ조위한(趙緯韓)ㆍ송희업(宋熙業)ㆍ윤선도(尹善道)ㆍ김경(金坰)ㆍ김광찬(金光燦) 등의 딸은 혼인을 금하라.”
하였다.
응천일록 5
경오년 하 (1630, 인조 8)
신미년(1631, 인조 9)
1월
11일 동부승지 강홍중(姜弘重)이 서계하기를,
“신이 명을 받고 이원익(1547-1634)의 처소에 가서 위문하였더니, 좌우에서 부축하여 겨우 왕명을 받았고, 겨우 말하기를, ‘신의 나이 90에 가까워 기력이 다 되어 누우면 일어나지 못하고 조석간에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성상의 염려가 여기까지 미쳐 승지를 보내 존문하게 하시니,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아뢸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네가 본 대로 논하면 그의 기력이 어떠했으며, 살고 있는 집의 규모가 또한 어떠했는가. 내가 자세히 알고 싶으니 일일이 서계하라.”
하였다.
12일 전교하기를,
“알았다. 40년 동안 정승 노릇 하였는데, 초가 두어 칸에 살며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다니, 그의 청백과 안빈(安貧)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이 특히 공덕(功德)만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과 검소를 여러 관료들이 본받는다면, 어찌 민생(民生)이 곤궁해질 염려가 있겠는가. 연세 높은 원로는 도리상 마땅히 우대해야 하는 것이요, 그 검소한 덕도 또한 표창해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도(道)에서 정당(正堂)을 짓도록 하고, 또 호부에서 베이불과 흰 요를 보내 주어 숭상하는 검약을 이루게 하였다.
24일 경기 감사의 서목에,
“금천현(衿川縣)에서 보고하기를,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이 정당(正堂)을 지어 주는 것 때문에 딴 고을로 옮겨 가려고 하여, 봉행(奉行)할 일이 또한 지연되게 되어 황공하다.’ 합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부디 나의 지극한 성의로 보아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 것’을 승지를 보내서 타일러라.”
하였다.
26일 완평부원군 이원익의 상소는 대개, ‘집을 짓도록 한 명령을 도로 거두시라.’는 것이었다. 전교하기를,
“정원에 유치해 둔 공사(公事)를 모두 들여오라.”
하였다
6월
24일 평안 감사의 서목에,
“동지사(冬至使)가 탄 배 한 척만 석다산(石多山)에 도착했고, 나머지 짐 실은 배 3척과 진위사(進慰使) 일행이 탄 배 4척, 재자관(賫咨官)이 탄 배 1척은 모두 신미도(身彌島) 후면 바다에 도착했는데, 며칠 안에 당도합니다.”
하였다.
응천일록 6
임신년(1632, 인조 10)
응천일록 7
임신년(1634, 인조 12)
12월
13일 예조가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금년 겨울은 기후가 잘못되어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더구나 남풍이 항상 불고 비가 잇달아 내려서 삼강(三江)에 물이 붇고 뱃길에 막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명년 제향과 공상(供上)에 소용되는 얼음장을 떠서 저장할 길이 단연코 없습니다. 전에도 얼음이 없는 해를 만나서 얼음을 저장하지 못하면 으레 경기ㆍ강원ㆍ공청(公淸) 등 도의 강변 각 고을 얼음을 옮겨다가 나라의 쓰임에 도왔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에 의해서 이런 고을에 각별히 넉넉한 수량을 저장하고, 조정에서 다시 분부하기를 기다리도록 세 도 감사에게 하유하심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공청도에는 근래에 양전하는 일로써 민간에 일이 많으니, 하유하지 말아서 조금이라도 폐단을 없애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오랑캐 나라에 가는 사신은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합니다. 가려 보내지 않으면 적인(敵人)의 업신여김을 받아서 나라를 욕되게 함이 큽니다. 춘신사(春信使) 김요(金)는 본래 천얼로서 사명을 받드는 사람을 선발하는 데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는 곳이 비록 오랑캐의 굴혈이기는 하나, 전부터 이 임무에 이런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또 저번에 가산(嘉山) 고을을 맡아서 오래도록 한길 옆에 있으면서 오랑캐 나라 차사를 익히 대하였으므로, 저들이 군현의 수령 노릇 하였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오랑캐 나라에 의탁한 자가 왕래할 때에 그 천비한 사람인 줄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갑자기 조정 사신이라 일컬으면서 가면 의아하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뜻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 체면이 손상되어서 일을 그르칠 염려가 없지 않을 듯하니, 고쳐 뽑아서 보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오랑캐 나라에 사명을 받드는 사람은 다만 그 재주만 가지고 뽑을 뿐이고, 문지(門地)의 높고 낮음에 구애될 것이 아니다.”
하였다.
17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신해(申垓)는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서, 감히 외척의 세도를 믿고 패만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저번 날 본도의 도사가 순행갔을 때 예대(禮待)하는 동안에 아랫사람의 도리를 많이 잘못하였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에서 야비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도사로서는 법을 들어서 죄주기를 청해야 할 것인데, 그 욕을 달게 받아서 체면을 손상하였습니다. 신해는 파직하고, 도사 정두경(鄭斗卿)은 추고하소서. 형조 좌랑 이구원(李久源)은 본래 용렬한 사람으로서, 사송(詞訟)을 관장하는 관직에는 합당치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번 흉측한 소장에 참여하여 공의에 버림을 당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신해는 추고하라.”
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 13)
8월
12일 함안(咸安) 유학 조영복(趙英復)의 상소는,
“천리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두번 와서 백성들의 병통을 다 아룀은 임금의 마음을 깨닫게 해서 국가가 영구하고 사직을 편케 하려는 계획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소를 올린 지 몇 달이 되어도 궁중에 보류해 두고 내리지 않으십니다. 만번 죽어도 이외에는 다시 아뢸 바가 없으며 정수리부터 갈아서 발꿈치까지 이르더라도 죄가 있으면 달게 받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