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애일기(陰崖日記)
이자(李耔 1480-1533)
음애일록(陰崖日錄)》 또는 《음애잡기(陰崖雜記)》라고도 한다. 필사본. 1권 1책. 내용은 1509년(중종 4) 9월부터 1516년 12월까지 조정에서 일어난 일 등을 기록한 것으로, 1509년에 유순(柳洵)을 파직시킨 사건의 경위에서부터 조정인사(朝廷人事), 불교 억압에 대한 일, 삼포왜란(三浦倭亂) 등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의 소초(疏草)·조보(朝報) 및 인물평 등을 수록하였다.
또, 1516년 12월에 거행된 노산제(魯山祭)를 계기로 하여 노산묘에 대한 조야의 여론 및 저자의 의견도 기록되어 있다. 이 ‘음애일기’를 《음애문집》에는 ‘음애잡기’로, 《대동야승(大東野乘)》 및 《설해(說海)》에는 ‘음애일록’으로 적고 있다.
이자는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학자. 형조판서·우참찬 등을 지냈다. 조광조 등 기호사림의 급진적 정치개혁을 따르지 않고 훈구파와 사림파의 중도적 정치노선을 걸었다. 기묘사화 후 음성에 퇴거, 학문에 힘썼다.《음애일기》등이 있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 차야(次野). 호 음애(陰崖) ·몽옹(夢翁) ·계옹(溪翁). 시호 문의(文懿). 서울 출생. 1501년(연산군 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때 함께 급제한 김안국(金安國) ·성세창(成世昌) 등과 교유했다.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監察)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연산군의 난정에 불만을 품고 외직을 자청하여 의성현령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언관직에 발탁되어 수찬(修撰) ·교리(校理) ·사간 등을 지냈으며, 1517년 부제학 ·우부승지에 올랐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등 기호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도모했으나, 이들의 정치노선에는 따르지 않고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정치노선을 걸었다. 1519년 형조판서 ·우참찬 등이 되었으나, 이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음성에 퇴거하여 ‘음애’라 자호(自號)하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였던 김세필(金世弼) ·이약빙(李若氷) ·이연경(李延慶)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도 이름이 올라 있으며,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음애일기(陰崖日記)》 《음애집(陰崖集)》이 있으며, 노수신(盧守愼)이 행장을 썼다.
한산 이자(漢山李耔)
기사년(1509, 중종 4년) 윤9월 일에 영의정 유순(柳洵 1441-1517)이 파직되었다. 유순은 선비[布衣]의 몸으로 문필로써 출신(出身)하여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며, 세상에 거슬림이 없이 마침내 대신(大臣)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 때 수상(首相)으로서 오로지 “예, 예” 하는 것을 일삼았고, 반정(反正)한 뒤에는 마땅히 공신(功臣)의 호를 받을 것이나 자기 스스로 더럽힘을 입은 것이 이미 많았고, 또한 건명(建明)한 일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였지만, 다시 우물쭈물함을 일삼으니,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마침내 글을 올려 파직시킬 것을 의논하였으나 역시 스스로 굳이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천변(天變)으로 인하여 파직할 것을 다시 의논하자, 욕되게 여겨 스스로 굳게 사양하니, 이에 명하여 파직시켰다. 재위 기간에 비록 유익한 바는 없었다 하더라도 조정의 원로였는데, 물의(物議)를 만났으니 오히려 석연(釋然)치 않다.
○이 달 24일에 우레와 번개가 심하자, 교서(敎書)를 내려 신하들의 말을 구하고 인하여 술을 금했다.
○10월 일에 특진관(特進官) 이우(李堣)가 조지서(趙之瑞 1454-1504)의 아내 정씨(鄭氏)의 절개를 아뢰었다. 정씨(鄭氏)는 충의백(忠義伯) 정몽주(鄭夢周)의 증손으로 대대로 산음(山陰) 땅에 살았는데, 조지서가 아내를 잃고 후취(後娶)했다. 연산조(燕山朝) 때, 조지서가 동궁(東宮) 때부터 항상 풍자(諷刺)하고 비유하기를 간절히 해서 그의 병통을 깊이 찔렀으므로 연산(燕山)이 매양 꺼리고 미워하더니, 갑자년 여름에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일시에 붙들렸는데, 조지서는 스스로 면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술을 들어 정씨와 결별(訣別)하기를, “내가 이번에 집을 떠나면 반드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 아버지의 신주(神主)를 어찌한단 말이오.” 하니, 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 했다. 조공(趙公)이 과연 죽음을 당하자 그 집이 몰수당하여 정씨는 돌아갈 곳이 없게 되니,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집이 이미 패했는데 어찌 친정으로 돌아와 살지 않는가.” 하였으나, 정씨는 의리로써 거절하기를, “죽은 사람이 나에게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신주(神主)를 부탁하기로 저는 죽음으로 허락했는데 어찌 중간에 저버리겠습니까. 또 망인(亡人)의 첩이 따로 집이 있사오니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신주를 안고 그 집으로 가서 조석으로 곡읍(哭泣)하고 제사지냈다. 만일 중사(中使)가 근처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으면 곧 신주(神主)를 안고 집 뒤 대숲에 엎드려 숨어 혹 수일씩 보내기도 하면서 3년상을 마치었다. 반정(反正)이 된 후에 드디어 다시 그 집을 복(復)하여 제사를 받들기를 평상시와 같이하니 온 고을이 모두 칭찬했다. 우(堣)가 이때 진주 목사(晉州牧使) 가 되었는데, 여러 향당(鄕黨)의 이민(吏民)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위에 아뢰어서 그 문에 정려(旌閭)한 일이 있었다. 충의백(忠義伯)의 후손으로서 백부(伯符 조지서의 자)에 짝하여 곧게 죽고, 두 마음이 없이 부도(婦道)를 온전히 하였으니, 비록 선대의 좋고 나쁜 데에 매이지 않는다고 말하나, 근원이 맑은 물과 모양이 단정한 그림자가 어찌 관계할 바가 없으리오.
○11월 찬성사(贊成事) 이집(李緝 1438-1509)이 죽었다. 이집은 호귀(豪貴)한 데서 생장했으나 성품이 검소하며 겉을 꾸미고 장식하지 않았다. 처음 서사(筮仕)에서 대사헌을 거쳐서 관찰사와 삼조(三曹)의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나 공정한 것을 잡고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에 뇌물이 이르지 못했다. 일찍이 형조 판서가 되었을 때, 지돈녕부사 성세명(成世明)이 사사로운 부탁을 했으므로 공(公)은 그를 미워했다. 대궐 뜰에서 만나자 그는 나와서 읍했으나, 공은 치관(致款 공경하는 뜻을 보이는 것)함이 없이 손을 저어 거절하기를, “재상이 이렇듯 구구하고서야 어찌 족히 남에게 본보기를 보이겠소.” 하니, 세명(世明)은 거의 땅에 자빠질 뻔했다. 그 질박하여 꾸밈이 없고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그가 죽자 조야(朝野)가 모두 애석히 여기고 심지어는 포염라(包閻羅)에게 비교했다.
○대사헌 김전(金詮 1458-1523)이 자기 아버지의 병으로 사면(辭免)했다. 이에 앞서 대간(臺諫)이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와 기신(忌辰)의 재사(齋事)로 여러 달 여러 달 합문 밖에 엎드려 소(疏)를 올렸고, 시종(侍從)과 대신(大臣)들도 역시 모두 떠들어서 거의 허락을 받게 되었는데, 그를 파직시켜 버린 것은 비록 말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빙자한 것이나 실상은 그 의논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또 대간의 말을 이미 받아들이지 않고 딴 일을 빙자해서 파직시키니, 식자들은 모두 성조(聖朝)를 위해서 애석히 여겼다. 김전이 대신 헌장(憲長)이 되고, 권민수(權敏手)가 집의(執義)가 되니, 사람들은 모두 기필코 천청(天聽)을 깨우쳐서 큰일을 마칠 것을 바랐다. 두 사람은 이론(異論)을 제창하기를, “역조(歷朝)의 내려오던 폐단을 가지고 거취(去就)를 다툴 필요는 없다.” 하고, 의논을 정지시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여론이 비루하게 여겼다. 무릇 장리(長利)란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는 것이고, 기신(忌辰)은 조상을 욕뵈고 국조(國朝)를 더럽히는 것인데, 고려 때로부터 내려오는 옛 법으로 인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없애지 못했던 것이다. 언책자(言責者)가 성명(聖明)한 조정을 당하여서 없애기를 청하고자 하면 성상께서도 반드시 좇게 되는데, 두 사람의 입 때문에 막혀 버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두 사람은 본래 선비들이 추중(推重)하던 바로, 연산(燕山)에게 거의 죽을 뻔하기를 두어 번이나 했었다. 어찌 세상의 험한 것을 치르고서 그 본래의 절조를 굽혔단 말인가. 이 달에 눈이 내려 중외(中外)에 모두 3,4척이나 쌓여 인마(人馬)가 많이 얼어 죽었다.
○12월에 태백(太白)이 여러 번 낮에 나타나니 원조회(元朝會) 예연(禮宴)에 풍족히 음식 올리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했다. 폐조(廢朝)로부터 도성(都城)의 사찰(寺刹)을 모두 폐해서 공부(公府)를 만들었으므로 양종(兩宗 선종ㆍ교종)은 이름만 밖에 의탁해서 청계사(淸溪寺)를 선종(禪宗)이라 이름했다. 미친 선비 몇 사람이 경첩(經帖)을 가져가므로 중들은 하인을 시켜서 그 종적을 찾아 가지고 거짓 말하기를, “절에서 쓰는 유기(鍮器) 일곱 짐을 가져갔다.”고 포도장(捕盜將)에게 정소(呈訴)했다. 포도대장은 들어가 위에 아뢰고 그 집을 뒤졌으나, 다만 불경(佛經) 두어 첩(帖)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모두 사실대로 아뢰어 유생(儒生)을 정원(政院)으로 보내서 책망해 타일러서 놓아 보내고, 그 불경(佛經)은 절에 돌려보냈다. 선비로서 불경을 취해 갔으니, 비록 행검(行檢)은 없지만 본래 괴이한 일이 아닌데, 중의 무리들이 뜬 말을 만들어내서 사람을 속여 죄를 꾸며가지고 성청(聖聽)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 죄 용서하기 어렵다.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이 그 속인 죄를 다스리고자 했지만, 임금이 뜻을 결정하지 못하니, 이러한 말류(末流)들의 폐단을 식자(識者)들은 근심했다.
○임금이 경연(經筵)에 거둥하자 대사헌 박열(朴說), 대사간 성세정(成世貞)이 나와 아뢰기를, “박영문(朴永文 ? - 1513)은 육경(六卿)에 적합하지 못하다 하옵는데 더욱이 전하가 거절하시고, 유세웅(柳世雄)이 포도장(捕盜將)으로서 도적을 잡은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인데 특별히 가자(加資)를 주시니, 모두 조정의 벼슬을 업신여기고 명기(名器)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마땅히 급히 갈게 하시옵소서.” 했으나, 임금이 승낙하지 않았다. 좌의정 유순정(柳順汀 1459-1512)이 나와 아뢰기를, “근래에 도둑이 일어나 방비할 수가 없사온데, 세웅(世雄)이 이것을 능히 잡아 다스렸으니, 벼슬이 비록 중하오나 공도 또한 크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 도둑의 소굴로서는 인천(仁川)과 장단(長湍)이 가장 심하오니, 사람을 쓰는 데는 마땅히 무인(武人)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체 세웅(世雄)을 벼슬 승진시키는데, 차서 없이 하였건만 가만히 두둔하였고, 도둑을 잡는 방법은 활과 칼을 갖는 데 있지 않는데도 반드시 무사(武士)를 써야 한다 하였다. 순정(順汀)은 문사(文士) 출신이지만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는 자가 변방에 많이 있다 하여, 이끌어 쓰는 사람이 모두 옛날 부하 속관들이었으니, 그 공의(公議)를 좇지 않고 감히 마음대로 방자히 굴어 무식함이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이 달에 구름이 끼고 흙비가 내리더니, 기후가 봄 같았다. 30일에 대간(臺諫)이 사직했으니 박영문을 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오(庚午 1510) 정월 초에 태백(太白)이 여러 번 하늘에 뻗쳤다. 9일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갔다. 이보다 앞서 대간(臺諫)이 박영문의 탐욕스럽고 음험함을 논핵(論劾)했다. 대략 말하기를, “반정(反正)하던 처음에 박영문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기록하는 일을 주장하여 뇌물이 버젓이 그 문에 행해지니, 공(功)이 없는 데도 재물을 많이 쓴 자가 일등이 되고, 공은 있어도 재물이 없는 자는 마침내 공신에 참여하지 못하여, 무리로 하여금 원망이 들끓게 하였다고 대간이 이로써 논핵하니, 가만히 중상(中傷)하고자 하여 박원종(朴元宗)에게 말하기를, 대간과 문사(文士)가 무인(武人)으로써 삼공(三公)이 된 것은 사체(事體)에 합당하지 못하다 하니, 이는 공(公)을 탄핵하여 나에게까지 미치려는 것인즉, 미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박원종으로 하여금 자기를 끼고 진신(搢紳)을 해치려 했으니, 이것이 한 가지 일이요, 군기시원(軍器寺員)에게 부탁하여 대궐 안의 관혁(貫革)을 마음대로 내오고 문지기가 꾸짖을 때에는 전교를 받들었다고 말하고 내다가 저의 집에 두었으니, 이것이 두 가지 일이요, 공조 판서가 되어 대간이 바야흐로 합문에 엎드려 소(疏)를 올려 벼슬을 달라고 청할 때, 태연히 대궐에 들어가 스스로 변명하고, 또 일찍이 포도대장이 되었을 때, 그 부하 유세웅(柳世雄)이 우봉(牛峯) 등지에서 도둑을 잡아 공이 있었는데, 영문(永文)은 탄핵을 입고 서울에 있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감히 마음대로 공을 의논하여 그의 종사관(從事官) 이해(李海)를 제이(第二)에 기록했다. 이해(李海)도 역시 서울에 있어 한치의 공도 없었는데, 그의 뜻은 그 상을 자기에게 옮기려 한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일이다.” 하였다. 대간이 이로써 사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날 박원종은 영사(領事)로서 경연에 들어가니 대사간 성세정(成世貞)이 박영문의 일을 논핵했다. 박원종(1467-1510)이 나와 아뢰기를, “박영문의 일은 모두 애매한 것으로서 대간이 이르는 바 음험(陰險)하다는 것은 신(臣)과 말한 일에서 나온 것일 것이고, 대간이 나의 말을 논박(論駁)하려는 것은 실상 윤양로(尹陽老)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박영문이 젊어서 신과 함께 같이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배웠고, 과거에 오른 것도 동년(同年)이었으며, 정국(靖國)할 때도 같은 공이었으니, 의리가 형제와 같은즉 만일 이 말을 듣고 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야말로 이른바 음험한 것이고, 말한 것이 음험한 것은 아닙니다. 관혁(貫革)의 일은 비록 대궐 안의 일이오나 전설사(典設司)의 장구(帳具) 같은 외인(外人)도 때로 내다 쓰는 것으로서 신도 역시 무인이오나 때로는 내다가 쓰는 터이니 이는 족히 괴상할 것이 아닙니다. 도둑 잡은 공을 의논할 일은 또한 단자(單子)를 써서 정원(政院)에 취품한 것이고, 직접 입계(入啓)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대간이 과격해서 심지어 조신(朝臣)으로 하여금 편안치 못하게 하니 신은 그윽이 근심합니다. 성종(成宗)이 공신(功臣) 박지번(朴之蕃)ㆍ정유지(鄭有智)가 서정(西征)에 공이 있었다 하여 청현(淸顯)의 벼슬을 주어 그 공로를 갚고자 하였으니, 대체 두 사람은 글자 한 자도 알지 못하는 무부(武夫)였는데, 성종(成宗)은 관작(官爵)을 아끼었지만 육조(六曹)의 참판(參判)을 주었거든, 하물며 박영문은 정국(靖國)의 공로가 적지 않은 터이겠습니까. 박영문이 생원(生員)으로서 무제(武第)에 올라 일찍이 형조 정랑이 되었을 때, 당시 당상(堂上)들이 모두 그의 능함을 칭찬하였거늘, 하물며 이제 대훈(大勳)에 참여하여 지위가 이품(二品)에 올랐사오니, 그에게 공조 판서를 제수하는 것을 신은 불가하지 않다고 생각하나이다. 또 옛날의 대간은 사직함이 있을 뿐인데, 지금의 대간은 반드시 기어코 청함을 이루고자 하니 이는 또 물의가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성세정(成世貞)이 아뢰기를, “박원종의 아뢴 바는 신이 그 뜻을 알지 못하나이다. 비록 박영문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명하게 한다 해도 또한 무엇이 능히 여기에 지나겠습니까. 성종(成宗)이 사기(士氣)를 배식(培植)하여 언로(言路)가 열리게 하더니, 폐조(廢朝)에 이르러 곧은 말을 듣기 싫어했으니, 당시의 대신(大臣)들은 모두 음험한 사람으로서 항상 바른 선비가 자기를 배척하는 것을 원망하다가 무오(戊午)에 이르러 거의 다 죽여 없애고, 갑자년 이후로는 사람 죽이기를 삼대[麻와] 같이 하니, 대간은 오직 자리만을 채울 뿐이었습니다.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인류(人類)가 쇠해져서 상복을 입고서도 고기를 먹고 버젓이 음란한 짓을 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반정(反正)한 뒤에도 남은 습관이 아직도 있으니, 만일 이때에 흐린 것을 없애고 맑은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조정이 어느 날에 청명(淸明)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대간의 책임이온데 박원종이 배척하려 하오며, 박영문의 악함은 성상께서 거울같이 살피셨거늘 왜곡시켜서 변명하려 하니, 신은 박원종의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이에 박원종은 목소리와 얼굴빛이 모두 변해 가지고 아뢰기를, “대간의 말은 매양 사람의 뜻을 미루어 헤아리므로 사람들이 많이 원망합니다. 그러나 박영문의 일은 대간이 일을 폐한 지 이미 오래니 아직 마땅히 들을 것이고, 만일 다시 이 자리를 제수한다면 이 뒤에 대간들이 누가 다시 감히 논란하겠습니까.”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 나와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사직한 지 여러 날이 되어 조정에 기강(紀綱)과 이목(耳目)이 없사오니, 신(臣)의 생각에는 급히 박영문을 갈아서 대간으로 하여금 직책에 나가게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하고, 재삼 아뢰는 말이 심히 간절했다. 이 날 아침에 박원종이 경연청(經筵廳)에 앉아 의논하기를,“대간이 사직했으니 박영문(朴永文)을 마땅히 아뢰어 갈아야 한다.” 하고, 이에 임금 앞에 나갔으니, 말을 자주 바꾸고 믿기 어려움이 이와 같았다.
대개 이 무리들은 뜻이 부귀에 있어서, 국가의 대체(大體)는 헤아리지 않고 전원(田園)과 대사(臺榭)를 잘 꾸미는 데 힘쓰고 사치한 것을 숭상하며, 성색(聲色)과 기완(器玩)에 오직 날이 부족한 것만 한탄하며, 이것으로 서로 잘난 체하고 어깨를 으쓱대며 기운을 부려서, 비록 임금의 앞에서도 혹 목소리와 얼굴빛을 사납게 하여 거리낌이 없이 하며 공의(公議)를 돌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다. 오직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은 조금 공도(公道)를 지키려 했으나, 성질이 경솔해서 의기(意氣)가 발하는 대로 하고 다시 생각하지 않으며, 뜻대로 망령되이 행해서 부자를 탐하고 사치를 숭상하여 박원종(1467-1510)ㆍ유순정(1459-1512)과 더불어 다를 것이 없었다. 반정(反正) 때에 성희안은 본래 중한 이름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풍치(風致)를 바랐으나, 이미 부귀를 이루자 행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물의(物議)가 애석히 여겼다.
○11일에, 정부 육조(六曹)가 대궐에 나가 박영문을 갈도록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갈게 하였다. 즉위한 이래로 조정의 큰 일은 모두 대신에게 명령하여 참가해서 처결하게 했으나,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 대간의 말한 바가 반드시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성청(聖聽)이 반드시 세 번 생각한 뒤에 이루고 재상들이 함께 아뢴 뒤에야 들어 주었다. 대간이 진정(陳情)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대신들에게 명해서 의논하게 했다. 처음 의논할 때에는 매양 공론(公論)을 막다가 대간이 강하게 다투는 날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대간이 폐직(廢職)한다는 말만 가지고 청하였으니, 대개 전조(前朝)의 대신(大臣)들은 자기들의 형적(形跡)으로써 혐의를 삼아 구차스러이 시의(時議)를 좇고, 신진(新進)들은 당장 편안한 것만 좇기를 힘쓰고, 부귀에 뜻을 두고 모두 거만하고 경박하여 겉으로는 좇으나 참된 마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려는 실상이 없었다. 한번 소원(疎遠)한 사람이 있어 시국(時國)을 근심하고 분연히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자가 있으면, 무리가 화의 근본이 된다고 꾸짖어서 성조(聖朝)로 하여금 청명(淸明)한 다스림이 없게 하고, 진신(搢紳)으로 하여금 범의 꼬리를 밟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게 하니, 식자(識者)들은 시국을 위하여 애석히 여겼다.
○18일에 홍문관에서 소(疏)를 올렸으니, 대개 그럭저럭 머뭇거리고 간하는 것을 즐겨하며, 착한 것을 좇지 않고 대신으로 하여금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옮겨 나가서 공도(公道)를 어기기 좋아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임금이 교서를 내리기를, “깊이 시국(時局)의 병통을 맞혔도다. 대신에게 말하라.” 했다. 또 명하여 그 소를 궁중에 들이라 했으니 이것은 교리(校理) 이항(李沆)이 지은 것이었다.
○2월에, 명하여 헌부의 관원을 파직시켰다. 전날 청계사(淸溪寺) 중 일정(日精)이 절의 종을 시켜서 거짓으로 유생(儒生)들이 절 물건을 많이 가져갔다고 말하였다. 헌부에서 이를 국문하였더니, 이에 일정이 도망하였다. 절 종이란 내수사(內需司)의 종이요, 판결사(判決事) 이백(李陌)은 곧 대비(大妃)의 5촌 아저씨인데, 본래 경박한 무뢰한이었다. 집의(執義) 이위(李偉)는 곧 이백의 4촌 형제로서 일찍이 이위에게 부탁했다 한다. 내수사 종이 오랫동안 잡혀 갇히자 내전(內殿)에서 자못 근심해서 또 장령(掌令) 서후(徐厚)와 유인귀(柳仁貴)에게 부탁했다. 어느 날 대(臺)에 앉았다가 이 위가 서후에게 묻기를, “요즈음 이백을 보았는가.”하니, 서후는 말하기를, “보았노라.” 했다. 이위가 다시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던가.” 하니, 서후가, “내수사 종을 잡아 국문하는 일을 내전에서 자못 근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유인귀도 이 말을 대중(臺中)에서 하고 그 사람을 보증하여 내놓도록 하니, 간원(諫院)에서 이 말을 듣고 먼저 이위를 공박했다. 임금이 대장(臺長)에게 묻자, 말이 서후에게 돌아가니, 드디어 명하여 파직시켰다. 간원에서 또 대장이 듣고서도 공박하지 않았다고 의논하니, 임금은 이위와 서후를 명하여 서반직(西班職)으로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좌천시켰다. 유인귀는 실상 이 의론을 만들어낸 자인데도 스스로 핵실하지 않았으니, 사림(士林)들이 그 허물을 감추고 태연히 있음을 욕했다. 이백도 역시 좌천되어 호군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우신(金友臣 1424-1510)이 죽었는데, 젊어서 근후(謹厚)한 것으로서 일컬어서 성묘(成廟)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사부(師傅)가 되었고, 여러 번 옮겨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 임기가 차자 성묘(成廟)가 특히 호조 참의를 제수했고, 그 뒤에 여러 번 노직(老職)으로서 자헌대부에 이르렀으며, 금상(今上)께서 특별히 지중추부사를 제수했다. 아들 세 사람은 담(諶)ㆍ흔(訢)ㆍ전(詮)이니, 모두 한 시대의 명사(名士)이다. 담은 단중(端重)하고 구차하지 않으며, 벼슬에 있으나 집에 거처하는 데에 한결같이 법도를 지키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여하지 못했고 중추부사(中樞府事)로서 죽었다. 흔은 식견이 청원(請遠)하고 조그만 절의에 구애하지 않으며, 바라보면 엄연(儼然)하고 만나보면 따뜻하며 친구 사이에 처하는 데 지극히 즐겁고 친밀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로서 기대했었다. 그러나 일찍 병에 걸려 한직(閑職)에 있다가 공조 참의에 이르러 죽었다. 전도 역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써 스스로 보존하고 문사(文史)에 아는 것이 많으니, 시론(時論)이 그를 추앙했었다. 세 사람이 기상(氣像)은 같지 않으나 모두 바른 데로 돌아갔고, 그의 자손들도 역시 세상에 이름 있는 이가 많았으며, 복록(福祿)이 성함은 한 시대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 늘그막에 후첩에게 반해서 아내를 삼으려다가 자손들이 의심하고 막아서 다만 이로써 그 즐거움을 다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3월에 도리(桃李)꽃이 피지 않고 모진 바람이 여러 번 불었으니,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고 가물 징조가 이미 나타났었다. 이에 명하여 더욱 술을 금하는 것을 엄하게 했다. 5일에 영의정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이 굳이 사직할 것을 청하니, 김수동(金壽童 1457-1512)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박원종은 호귀(豪貴)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무거(武擧)로 발신하여 청현(淸顯)의 벼슬을 역임하여 이름과 행검에 구애하지 않았다. 그 난리를 만나서도 기회를 틈타서 처리하기를 마땅히 하여 드디어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니, 비록 나무하는 아이나 소치는 총각까지도 그의 성명을 알게 되었다. 그 대배(大拜)함에 이르러 스스로 인망(人望)에 만족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절조를 꺾어 겸손하고 공경하여 공론(公論)을 받아들이기를 힘썼으나, 배우지 못하고 꾀가 없어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생각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므로, 비록 임금의 앞에서도 의논을 하는 자가 한번 그의 뜻을 거스르면 역시 얼굴빛에 드러내어 스스로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확실하고 거취에 구애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힘써 사양하니, 당시 의논이 아름답게 여겼었다. 김수동은 단아하고 신중하며 지혜가 많아서 선비가 됨으로부터 대상(大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능히 그 시비를 의논하지 못했다. 연산(燕山)의 흉잔(凶殘)한 때를 당해서 사랑을 받고 정승이 되었으나 역시 능히 때를 따라 처리하여 위로 임금에게 죄를 짓지 않고, 아래로 능히 사람들을 살리니, 진신(搢紳)의 선비들이 많이 힘입어 온전했다. 당시 벼슬에 있던 자들이 다투어 집을 수리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함을 힘써서 선사하는 물건으로 저자를 이루어 문 앞이 들끓었으나 수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의거(義擧)하는 날에 성희안(成希顔)이 그 집으로 찾아가 말하였는데, 간사하게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움직이지도 않아 조용히 살피고 헤아린 뒤에 행하니, 사림(士林)들이 그의 도량에 감복했다. 이때에 이르러 수상(首相)에 제배하니 인정이 차츰 흡족하여졌다.
○28일에 흥인사(興仁寺) 사리각(舍利閣)에 화재가 나니 명하여 유생(儒生)들과 이웃 가까이 사는 백성들을 잡아 국문했었다. 이 절은 본래 신라(新羅)의 고찰로서 우리 태조(太祖)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죽음을 슬퍼하여 명해서 절 안을 둘러보고 인하여 사리각을 세운 것이다. 우뚝하게 높이가 5층으로서 도중(都中)에 높다랗게 섰으며, 또 보물과 불경(佛經)을 그 안에 간직했다. 연산(燕山) 때부터 이것을 폐해서 분사복시(分司僕寺 말 먹이는 곳)를 만들었더니, 임금이 즉위한 뒤에 이어 관사(官舍)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그 절을 불태우고 다만 사리각과 대문(大門)만 남아 있더니, 이때에 이르러 대비(大妃)가 중사(中使)를 명하여 불경을 내수사(內需司)에 옮겼다. 유생 윤형(尹衡) 등은 본래 불량한 자로서 혹 겁탈도 하고 능욕도 하는 자였다. 이날 밤 초경에 불이 일어나 화염이 공중으로 치솟고, 연기가 하늘을 덮어서 도성(都城) 안은 궁벽한 골짜기나 깊은 구멍 속 조그만 물건까지도 보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간사한 사람이 일을 빙자하여 난을 일으켰나 의심해서 궁중이 흉흉하다가 오랜만에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유생들의 소위라고 억측으로 지목하여 곧 명하여 서학(西學)과 중학(中學)의 유생들과 절 사방에 이웃 열 집 안에 있는 유생과 거민(居民)들을 금부(禁府)에 잡아 가두게 했다. 즉시 잡아 가두지 않았다 하여 금부를 견책(譴責)하고, 특히 경력(經歷) 김보관(金俌官)을 파직시켰다. 또 영의정 김수동(金壽童)과 형방승지(刑房承旨) 이희맹(李希孟)에게 명하여 가서 죄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 옥사(獄事)는 증거가 없는 데서 나왔건만 반드시 형장(刑杖)끝에 죄상을 얻으려 하여 비록 대간과 시종(侍從) 삼공 육경(三公六卿)이 날마다 합문 밖에 엎드려 소를 올리기를, 유생은 불경(佛經)을 가져간 것으로 편벽되어 의심하고, 불 놓은 것으로 의심하여 어지러이 형장을 베푸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더욱 거절하고 끝까지 형벌하고 심문하였지만 과연 증거가 없으니, 이에 중사(中使)를 능욕했다 하여 죄주려 하였다. 추관(推官) 등이 아뢰기를, “유생으로서 불경을 가져간 것과 중사가 불경을 폐찰(廢刹)로 옮겼다는 것은 본래 그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법이 없어 죄줄 수 없나이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자필(自筆)로 윤형(尹衡) 등의 죄를 쓰고 윤형은 주모자이니, 장형(杖刑) 80대를 때려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매를 때려 내쫓고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며, 혹은 다만 과거만 보지 못하게 하니, 대간과 시종이 또 논(論)하기를, “임금으로부터 율(律)을 정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또 윤형은 장류(杖流)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윤형의 부처(付處)를 면하게 하였다. 김수동은 수상(首相)으로서 임금의 지나친 처사를 보고서도 능히 간하지 못하고 조그만 일을 조사하고 증거를 찾는 것이 본래 그의 맡은 바가 아닌데도 머리를 숙이고 간하지 않았으므로 사림(士林)들이 한스럽게 여겨 말하기를, “비부(鄙夫)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였다.
○이 달에 서리가 내리는 것이 절기를 잃었고, 풀과 나무가 말라 시드는 곳이 있었다.
○4월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었고, 4일에는 왜놈이 처음 와서 삼포(三浦)를 침입하였는데, 왜놈들이 우리와 더불어 섞여 살면서 번지기 시작한 지 오래되니, 우리나라의 군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교만한 것이 습관이 되었다. 평시의 진장(鎭將)은 조금만 그 뜻을 거스르면 반드시 마당에서 고약한 말로 욕을 하며 심지어는 칼날을 목에 대기까지 했다. 진장이 된 자는 또한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많아서 이 굴욕을 엄호(掩護)하면서 구차히 세월을 보내니, 사람마다 헤아리지 못할 근심이 조석간에 일어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조정 의논은 항상 평화로운 것을 주장하여 변장(邊將)을 가려서 진정시키고자 하나, 천거해서 쓴 사람은 모두 신진(新進)의 일 좋아하는 사람뿐이었다. 부산포 첨사(釜山浦僉使) 이우증(李友曾)은 본래 노둔하고 겁 많고 공연히 일을 과장해서 왜인을 어거하는 데 절제가 없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한결같이 위엄으로 누르려 하며 혹은 새끼로 왜인의 머리를 묶어 나무 끝에 매달고 활을 당겨 그 새끼를 쏘니, 사람들이 모두 독을 품고 겉으로만 무서워했다. 절도사(節度使) 유계종(柳戒宗)은 역시 추하고 비루한 무부(武夫)로서 이것을 달려가 아뢰게 하여 과장하고 칭찬하니, 조정에서는 옷감을 하사해서 권장했고, 여러 진(鎭)에서는 다투어 사나운 것을 숭상했다. 좌도수사(左道水使) 이종의(李宗義)도 공을 세우고자 하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왜인 10여 명을 목 베니, 원수를 사고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이 두 사람의 일로 시작되었다.(삼포왜란의 원인)
이보다 하루 앞서 왜인의 배가 많이 해변을 범하므로 포구 사람들이 정찰해서 보고하니 이우증은 꾸짖어 보내고 글을 여러 진에 보낼 뿐 역시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 4일 새벽에 적이 군사를 나누어 제포(薺浦)와 부산포(釜山浦) 양진(兩鎭)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성을 지키지 않다가 적이 장막 아래에 이르러서야 주장(主將)이 비로소 이를 깨달았다. 제포 첨사(薺浦僉使) 김세균(金世鈞)은 기어서 성을 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가두어 두고 죽이지 않았다. 이우증은 스스로 자기 몸을 풀로 싸고 방 안에 숨어 있었는데, 적이 찾아내다가 드디어 난도질하여 죽였고, 이우증의 형 이우안(李友顔)도 함께 해를 입었으며, 두 성의 노소(老少)와 진군(鎭軍)도 모두 잡혀 죽었다. 드디어 진군하여 웅천(熊川)ㆍ동래(東萊)를 포위하니, 대개 적의 무리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건만 군사가 많다고 말했고, 장정(長程)이란 자가 수령(首領)이었다. 행군(行軍)하고 진(陣)치는 것이 자못 기율(紀律)이 있고, 가끔 유병(遊兵)을 내어 촌가를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찌르니, 태평한 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보지 못하던 터라 이민(吏民)들은 얼굴빛이 없이 도망하여 숨어서 뒤질까 두려워했다. 우도절도사(右道節度使) 김석철(金錫哲)이 군사를 거느리고 웅천(熊川)을 구원하려 했으나 모인 군사가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대적하지 못한다 했으나, 실상은 날로 두려워하고 겁내어 능히 전진하지 못하고서 여러 번 적에게 패한 바 있어 물러가서 창원(昌原) 지방을 보존했다. 7일에 웅천 현감(熊川縣監) 한륜(韓倫)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드디어 함락되었다. 웅천은 남면의 거진[南面巨鎭]이요, 또 왜사(倭使)가 왕래할 적에 공억(供億 어려운 사람에게 물건을 주어 안심시킴)과 반(盤 노자)을 구하는 것을 관장하여 부고(府庫)에 쌓인 것이 딴 고을 보다 다섯 곱절이나 되었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두 적의 소유가 되었다.
동래를 포위한 자는 군사도 적고 형세가 외로웠으므로 현령(縣令) 윤인복(尹仁復)은 약한 군사는 추려 버리고 버티었다. 웅천현감 한륜(韓倫)은 포위당하자 수족이 떨려 어찌할 줄을 모르고 오직 성을 돌면서 장사(將士)들에게 경계하여 적을 쏘지 말라 하였다. 사랑하는 첩이 있으므로 적이 물러가는 것을 엿보고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성 안이 동요하여 모두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도망했다.” 하여 이 까닭에 성이 속히 함락되었다. 적이 들어와 마음대로 약탈해서 부고를 텅 비게 하고 혹은 고을 사람들을 협박하여 그 노획품을 배 위에 옮겨다 놓고 날마다 술 마시고 놀면서 다시 준비하지 않았다. 김석철(金錫哲)은 본래 광대[俳優]로 불량한 자인데, 권세 있는 사람을 섬겨서 남방(南方)을 전제(專制)함을 얻었으므로 난리에 임하자 대책이 없어 군사를 잃고 땅의 경계를 좁혀 날마다 사람을 보내서 조정에 급박함을 보고할 뿐이었다. 일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조정에서도 역시 이길 계획이 없고 조당(朝堂)에서 회의하여 재상들은 화의(和議)를 정해서 전쟁을 늦추려 하니, 이에 전(前) 절도사(節度使) 황형(黃衡 1459-1520)과 유담년(柳聃年 ? -1526)을 명해서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를 통솔하도록 하고, 금군(禁軍) 백여 명을 나누어 주어서 가게 했다. 황형은 본래 욕심이 많고 혹독하였으므로 벼슬을 잃고 집에 있더니, 명을 받고 문을 나가자 곧 팔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가문 날의 나막신 같아서, 비를 만나면 문득 신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금군(禁軍)이 그를 따라 전쟁에 나가면서 대낮에도 남의 인마(人馬)를 약탈하니, 서울에 있는 악한 소년들도 이때를 타서 마음대로 약탈했으나 유사(有司)가 금지하지 못했다. 식자(識者)들이 말하기를, “장수는 교만하고 군사들은 기율이 없으니 어떻게 적을 막는단 말인가.” 하였다. 또 참지(參知) 안윤덕(安潤德)에게 명하여 먼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려주고 경상도 체찰사(慶尙道體察使)로 가게 하였다. 안윤덕은 떠벌리고 겁이 있어 본래 장수의 재목이 아니어서 명을 듣자 안절부절 지체하고 떠나지 않아 먼저 간 군사의 승패를 기다리다가 1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떠났다. 또 좌의정 유순정(柳順汀)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군사의 일을 오로지 다스리게 하니, 유순정은 또 가기를 꺼려하여 임금 앞에서 아뢰기를,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이 꾀를 좋아하고 결단하기를 잘하니 큰 일을 맡길 만합니다.” 하였다. 성희안은 또 아뢰기를, “유순정이 군사의 일을 밝게 익혔으니, 그 위에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했다. 이에 임금도 그의 일을 당해서 구차히 편안하려는 것을 비루하게 여겨 특히 유순정을 명하여 가도록 했다. 황형ㆍ유담년 등이 적을 파하였으니, 왜군은 우리의 방비함이 없는 것을 업신여겨 높은 데 올라서 진을 치고 부고(府庫)의 곡식을 모두 운반해 놓고 돌아가려 하므로, 황형 등이 세 도(道)에 나누어 협공하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적의 배를 포위하게 했다. 적은 본래 급해서 능히 오래 배기지 못하는 터인데, 우리의 수군(水軍)이 바다에 가득히 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머무르지 못하고, 드디어 산골짜기로 도망해서 그 배를 보존하려 했다. 황형 등은 이긴 기세로 진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적들은 이에 다투어 배에 오르려다가 빠져 죽고 또 창황하게 배에 오르니, 배가 사람을 다 태우지 못하고 엎어지는 일도 또한 많았다. 안윤덕(安潤德)은 이때 밀양(密陽)에 물러와 있으면서 우리 군사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자기의 공을 조정해 보고하여 장황하게 공을 나타내는 말이 많으니 듣는 자가 크게 웃었다. 그의 막료(幕僚) 김한사(金漢思)라는 자는 어깨를 치켜 올리면서 말하기를, “적을 평정하여 큰 공이 있는데 겨우 이 정옥(頂玉) 하나를 얻게 되니 마음이 실로 쾌하지 못하도다.” 하고, 또 박영문(朴永文)에게 옷을 구하면서 말하기를, “조석으로 장차 이 옷을 입을 것이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마침내 공을 의논할 적에 김한사에게는 다만 산계(散階)를 주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김공(金公)이 옷을 얻어다가 딴 사람에게 주었다.” 하였다.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은 부잣집에서 자라 젊었을 적엔 뜻이 크고 남에게 구속받지 않아서 푸줏간 동네에 출입하면서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배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벼슬을 하더니, 드디어 행실을 고쳐 글을 읽고, 대의(大義)를 통달하게 되어 세속(世俗)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1455-1506)은 그의 누이로서 연산(燕山)에게 더럽힘을 당하고 드디어 병이 들어 죽으니, 그는 마음에 항상 분하게 여겼었다. 이 때 성희안(成希顔)은 매양 연산을 따라 망원정(望遠亭)에서 놀 제, 재상들과 그를 좇는 자로 하여금 시(詩)를 짓게 하였다. 이에
성인의 마음은 원래 청류를 사랑하지 않는도다. / 聖心元不愛淸流
라는 구절이 있으니, 연산이 크게 노하여 이것은 자기를 기롱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벼슬이 떨어져 집에 있었다. 연산의 어지러운 정치가 날로 심해져서 종사(宗社)가 위급하자 성공(成公)은 본래 큰 계략이 많은 터라, 어둡고 어지러운 것을 맑게 하고 성명(聖明)을 추대하고자 하나, 더불어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어 답답하여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마음으로는 박원종이 큰일을 부탁할 만하다고 생각했으나 본래 좋아하던 터가 아니어서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마을 사람 신윤무(辛允武)라는 자가 두 집을 왕래하여 심히 친밀했으므로, 창산군(昌山君 성희안)은 그로 해서 은밀하게 뜻을 시험하게 했더니, 평성군(平城君 박원종)은 이에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는 터요.” 했다. 이에 창산(昌山)이 저물녘에 평성(平城)의 집에 이르러서 각각 통곡하면서 평생의 충의(忠義)를 털어놓아 말하기를, “마땅히 죽음으로써 국사에 허락할 것이니, 남아의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터인즉 어찌 종사(宗社)의 위험이 조석에 있는 것을 보고서도 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매우 즐거워하더니 두어 달이 지나자 공(公) 등은 고립되어서는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하고, 드디어 그 뜻을 유순정(柳順汀)에게 통지했다. 유순정은 회답을 오래도록 지연시키고 속히 승낙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이미 같이하기로 승낙하였다. 드디어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ㆍ홍경주(洪景舟) 등에게 두루 말해서 각각 동지(同志)를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규합(糾合)된 자들은 모두 무부(武夫)들이 많아서 의리를 좇지 않고 일을 인하여 공세우기만 즐겨 해서 상의하지 않고서도 서로 뜻이 같으므로 그들이 있는 곳마다 날 뛰었다.
병인년 9월 2일에 연산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서 놀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재상은 다만 구종(口從) 한 사람만 데리고 가기를 허락했다. 공(公) 등은 약속하기를 이날 문을 닫고 한쪽으로 막고 한쪽으로는 지켜서 진저(晉邸)를 추대하기로 계획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연산(燕山)이 명하여 이 놀이를 중지시키었으나 장사(將士)들은 환[奮]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여 계획한 일이 이미 폭로되었으니, 형세가 그대로 말 수가 없었다. 공 등은 의논하기를 초하루 밤중에 장사(將士)들을 훈련원(訓練院)에 모이게 하고 사람을 나누어, 변수(邊修) 최한홍(崔漢洪)으로 하여금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하였는데, 창졸간에 군대가 없으므로 역부(役夫)들을 몰아다가 지키게 했다. 공(公)과 성(成)ㆍ유(柳) 양공(兩公)은 바로 광화문(光化門) 앞 수백 보 지점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이루고, 공이 부채를 휘둘러 지휘하는데 용지(容止)가 신인(神人)과 같았다. 신윤무(辛允武)로 하여금 용사(勇士) 이심(李甚)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신수영(愼守英)을 때려 죽이고 다음으로 임사홍(任士洪)을 죽이고 그 다음으로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을 죽이도록 했다. 신수겸(愼守謙)은 당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었으므로 일이 정해진 뒤에 서서히 사람을 보내서 죽이기로 했다. 신수근 등은 비록 권세를 빙자하고 사치하여 형편없이 굴었지만 당시에 난폭한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해서 실로 국가의 근본이 기울어지게 한 자가 어찌 이 사람들뿐이랴만, 유독 이 세 사람만을 죽인 것은 수근이 본래 교만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행동하지 않았었다. 또 장차 국구(國舅)가 된다면 함부로 나대어 제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을 것이므로 급히 그 우익(羽翼)을 제어했던 것이다.
※1506년 신수근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박원종(朴元宗) 등이 장차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成大君: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그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물어보자, 신수근은 자리를 차고 일어서면서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고 하였다.
공 등이 처음 의논하기는 구수영(具壽永)이 음란한 짓을 가르치고 악한 것을 행하게 한 추함이 있다 하여 함께 없애려 했으나 그 족질(族姪) 중에 현손(賢孫)이란 자가 있어 이 계획을 알고 구수영에게 달려가 고하자 구수영이 훈련원으로 나와 목숨을 빌었기 때문에 공 등이 용서했던 것이다. 신윤무가 이 네 사람을 쳐 죽일 제 이심은 항상 철퇴를 가지고 길 옆에 숨었다가 별감(別監) 한 사람으로 하여금 명패(命牌)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들어오기를 재촉하니, 저들이 경황하여 대궐에 들어갈 제, 이심이 세게 치니 말에서 떨어지면서 머리의 골이 모두 터져 나왔다. 신수근이 습격을 받고 땅에 떨어지자 따라가던 종 하나가 그의 머리 위에 엎드려 자기 몸으로 철퇴를 막는 것을 이심이 모두 쳐 죽였다. 이심이 손으로 네 사람을 죽이고 나니 피가 튀어 얼굴에 가득하고 옷이 온통 빨개졌으나 그 공을 보이기 위해서 며칠 동안 얼굴도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니 보는 자가 추하게 여겼다. 평명(平明)이 되자 백관들이 모두 모였으나 누가 어떻게 한 일인지 알지 못하고, 입직(入直)하던 도총관(都摠管) 민효증(閔孝曾)과 병조 참판 유근(柳謹)이 나오고 승지(承旨) 이우(李堣)가 다음으로 나오고, 또 윤장(尹璋)과 조계형(曹繼衡)이 또 나오니, 입직했던 군사들은 모두 성을 넘어서 공 등의 군사에 붙었다. 처음 연산(燕山)은 금중(禁中)에서 이 변을 듣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 등을 불러들여 앉히고 말하기를, “이같이 태평한 세상에 어찌 다른 변이 있겠느냐. 아마도 이것은 흥청(興淸)의 남편 되었던 자들이 모여서 도둑이 된 것이리니, 급히 정승과 금부당상(禁府堂上)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고, 이우를 명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면서 조사하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시켜 문에 나가서 조정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조사해 알고 드디어 몸을 빼어 문을 나왔다. 연산은 이우가 이미 문을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앞으로 나아가 윤장과 조계형의 소매를 잡으니, 두 사람은 거짓 사양해 피하는 체하고 소매를 뿌리쳐 나가 버렸다. 이들은 문틈으로 쫓아 나가려 하였으나, 조계형은 당시 희롱과 은총을 받던 신하인지라 문을 지키던 장사(將士)가 잡아다가 상을 타려고 데리고 군문(軍門)에 나가니 공 등은 역시 용서하였다. 이때 대궐 안 환시(宦侍)와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諸色人]이 모두 나오고 오직 후궁(後宮)과 광대 기생들만 서로 모여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했다.
이에 극문(戟門) 안에서 회의하고 유자광(柳子光)과 이계남(李季男)은 머물러 궐문을 지켜 폐주(廢主)가 도망하는 것을 막도록 했다. 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景福宮) 문 밖에 나가 자순대비(慈順大妃)에게 명령을 청하니 이윽고 문을 열고 이끌어 들였다. 공(公) 등이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 벌여 앉아 유순정(柳順汀)과 정미수(鄭眉壽)로 하여금 잠저에 가서 임금의 행차를 맞게 했다. 이때 상감께서는 평시서(平市署) 옆 인가에 피해 있었으므로 유순정 등은 마을 문 밖에 앉아서 재삼 나가시기를 권했다. 상감이 융복(戎服)으로 연(輦)을 타고 법도를 갖추어 나오니, 저자에서는 평상시와 같이 요동함이 없었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한낮이나 되어 경복궁에 들어가니 유자광(柳子光)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한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왕(前王)을 대궐 안에 가두고 대비(大妃)에게 폐주(廢主)한 연고를 고하려 하니, 공 등은 의논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날이 어둡기 전에 백관의 반열(班列)을 정하고 임금이 근정전에서 즉위한 다음 사방에 교서(敎書)를 내려 대사(大赦)하였다. 교서는 도승지(都承旨) 강혼(姜渾)이 초잡았는데 혼은 젊어서부터 이름이 당시 세상에 알려졌는데, 연산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경술(經術)을 가지고 난폭한 정치를 감싸며 아첨하는 태도와 아첨하는 말로 구차스럽게 굴었었다. 궁인(宮人) 하나가 죽자 연산은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강혼으로 하여금 애사(哀詞)와 재소(齋疏)를 짓게 했더니 그 글이 매우 아름답고 고와서 이로부터 사랑이 날로 두터웠다. 이 때에 이르러 교서를 초하는데 썼다가는 문득 지워서 종시 문장을 이루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매(狐魅)의 글이어서 어두운 밤에만 잘 쓰고 날이 밝으면 저절로 막힌다.” 하였다. 대개 폐주한 일은 처음 창산(昌山)이 계획하고 공(公)의 손에서 이루어져서 위태로운 것을 편안히 하였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되었으니, 실로 동방(東方) 만세(萬世)의 사업이었다. 다만 창산의 천성은 과단성과 결단성이 있으나 학술(學術)이 없고, 청천(菁川 유순정)은 성질이 너그러워 주장이 없으며, 공(公)은 거칠고 사나우며 근거가 없어 비록 충의(忠義)에 격동된 바 있어 공이 마침내 이루어진 일이지만 일하는 것에 있어서는 마땅함을 잃었다. 옛날의 은혜로써 적신(賊臣) 유자광을 용납했다가 후일의 화를 싹트게 했으며, 자질구레한 인아(姻婭)들에게까지도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다. 뇌물의 많고 적은 것으로 공로의 상하를 매겨 연거속구(連車續狗)의 기롱이 있어 지금까지 병통으로 여긴다. 공은 공을 이룬 뒤로부터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자처하는 실지가 없어 장의동(藏義洞)에 집을 지었는데, 장려(壯麗)한 것을 극진히 하여 이목(耳目)의 욕심을 다하고자 했다. 수상(首相)이 되어서는 부승(負乘)의 화를 깊이 살펴서 굳이 사양하여 사직함을 얻었으니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공(公)이 죽은 날에 조야(朝野)에서 무엇인가 잃은 것같이 여겼다. 임금이 조회를 파하고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며 은전(恩典)을 보통보다 더하게 하고, 친히 가서 조상하려 했으나 바야흐로 왜난(倭亂)이 있으므로 유사(有司)가 이를 막았다.
○5월에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세영(李世英)이 졸(卒)했다. 세영은 몸가짐을 맑고 검소하게 해서 세속을 따라 오르내리지 않았다. 국가의 법에 도승지(都承旨)는 인사(人事)의 행정(行政)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뇌물을 주어 청탁하는 일이 많았다. 세영이 승지가 되자 홀로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조당상(政曹堂上)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혐의하여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어찌하여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가.” 하니, 공은 말하기를, “보새(寶璽)를 받들고 임금의 명령을 출납(出納)하는 것이 승지의 책임이니,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쓰고 내보내는 것을 각각 그 재주대로 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있을 따름입니다.” 하니, 동렬(同列)들이 부끄러워하여 사례하였다. 안윤덕(安潤德)이 공(公)의 뒤를 이어 승지가 되자 한 달이 못 되어 그 인척과 옛사람들을 벼슬시켜 거의 다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더욱 공의 절개를 중히 여겼다. 이때 바야흐로 정승으로 기약했으나 불행히 일찍 죽으니 조야(朝野)가 애석히 여겼다.
○계유년(1514) 4월에 임금은 일찍이 정사를 논하는데, 이론이 많고 선비들의 습관이 점점 쇠퇴해 가는 것을 근심하여 친히 나가 정사를 보아 인물을 결정하고자 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인물을 따져 모든 관리의 자리를 채우게 하고 재추(宰樞)의 의논을 거두게 했다. 재추는 의논하기를, “대신의 진퇴는 마땅히 무리의 의논을 거두어서 상감의 마음으로 결정을 할 것이나 미천한 관리까지 어찌 반드시 친히 임금의 생각을 거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정사는 오직 영의정과 정광필(鄭光弼) 및 신(臣) 모(某)에게 승지(承旨)에게 특지(特旨)를 내려 결정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고사에 의해서 망(望)을 올려 승낙을 받았다. 임금의 뜻도 역시 친히 하관(下官)을 들어 쓰려는 것이 아니라, 상의하는 사이에 그 인물의 고하(高下)를 근심하고 또 아랫사람의 바라는 정을 실현시키려 함이었는데, 대신들이 이에 심상하게 의논을 올리니 물의(物議)가 그르게 여겼다.
○15일에 함경도 관찰사(종2품) 정광필(1462-1538)로 우의정(정1품)을 삼았으니, 영의정 성희안(成希顔)이 천거하였던 것이다. 그는 기국(器局)이 있고 응접(應接)을 잘하여 말하는 것과 모양이 너그럽고 아름다우며 규율이 심히 엄했다. 성희안은 그의 도량(度量)에 감복하여 말하기를, “광필 같은 이는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용이 없는 데서 보는 것 같다 하겠도다.” 하고, 공경하기를 신(神)과 같이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힘써 천거했다. 그가 감사(監司)로부터 계급을 더하여 찬성(贊成)이 되고, 찬성으로부터 정승이 된 것은 모두 희안의 힘이었다. 삼공(三公)에 빈자리가 있자 조야(朝野)는 모두 영사(領事) 김응기(金應箕 1455-1519)를 바라더니, 임금이 재추에게 정승을 추천시키자 송질(宋軼)이 응기를 추천하고, 유순(柳洵)은 속마음이 응기에게 있었으나 희안의 뜻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한가지로 정광필을 천거했던 것이다. 희안이 혼자 뽐내면서 말하기를, “오늘 정승을 뽑는 데는 마땅히 정광필을 뽑는 것이 마땅하고, 신용개(申用漑)로 그 다음을 해야 할 것이니, 응기 같은 사람은 비록 순수한 금이요 아름다운 옥 같지만, 국가에 일이 있을 때를 당해서는 능히 일하지 못할 것이고, 또 지위가 추부(樞府)에 올라서 국정(國政)에 참예하고 있은즉 반드시 다시 태사(台司)에 오를 것이 아니다.” 하니, 이는 실상 정승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음이었다. 응기(應箕)는 행동이 단중(端重)하고 마음을 정성과 공경으로 가져서 평생에 말을 빨리하고 얼굴빛을 서두르는 일이 없어 크게 성묘(成廟)의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희안(希顔)이 무리의 의논을 쫓지 않고 망령되이 헐뜯어서 취사하는 것을 거꾸로 하니 조정 의논이 애석히 여겼다.
○17일에 소릉(昭陵) 옛 무덤을 팠다. 소릉이 폐한 것은 전 역사에는 다만 기록하기를, “후모(后母) 소생 아우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노산(魯山)을 회복할 것을 꾀하다가 베임을 당했으니, 후모도 연좌되어 폐해지게 되었는데, 정부의 청으로 인하여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하였을 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소릉은 현릉의 배필이 되어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덕(德)과 행동이 겸하여 지극해서 크게 영릉(英陵)의 사랑을 받았고, 나이 21세에 노산을 낳다가 난산(難産)으로 인하여 병이 많더니,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광묘(光廟)가 즉위하니, 노산은 영월(寧越)로 피해 나갔다가 4년이 지난 병자년에 옛 신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 등이 함께 노산을 회복하기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들과 더불어 꾀한 자는 모두 한 시대에 명망(名望)있는 사람들이었다. 권자신이 이 계획에 참여한 것과 소릉이 자신에 연좌되어 폐함을 당한 것은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정축년(丁丑年)에 광묘가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대낮에 가위 눌리[魘]는 괴상한 일이 있다 하여 즉시 명하여 소릉을 폐하게 했다. 그때 사신(使臣)이 먼저 석실(石室)을 뻐개고 관(棺)을 끌어내려 했으나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해괴히 여겨 곧 글을 지어 제사지냈더니, 관이 비로소 나왔다. 3, 4일 동안 밖에 내버려 두었다가 명하여 백성의 예로 거두어 장사지내게 했다. 능(陵)을 파기 수일 전 밤중에 부인의 우는 소리가 능 안에서 나기를, “장차 내 집을 무너뜨리려 하니 내 어디 가서 의지한단 말이냐.” 하는 소리가 마을 백성들에게까지 들리더니 얼마 안 되어 변이 일어났다. 비록 언덕에 옮겨 묻었으나, 자못 영이(靈異)한 것을 나타내서 마을 백성들이 그 옛 능 자리의 나무나 흙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풍우(風雨)가 일어 서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경계시켰다. 부로(父老)들이 그 시말(始末)을 눈으로 보고 자세히 말하는 자가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추복(追復)한 것은 하늘이 경유(驚諭)함을 보였고, 조정 의논과 임금의 결단이 합치되어 50여 년의 귀신과 사람의 원통함을 풀게 되었으니, 종사(宗社)의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만 옮겨 묻기를 창졸간에 하였고, 수축하고 성묘함이 오랫동안 없어서 법물(法物 관)을 얻어 보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능을 파니 안팎 관(棺)이 모두 형체가 있고 염습(斂襲)한 것이 완전해서 관을 바꿔 쓰는 데는 다만 법의(法衣 왕후의 정식 의복)로 그 빈 데를 메울 뿐이었으니, 아,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5월 6일에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다시 태묘(太廟)에 모시었다. 모실 때에 알현하는 것과 올려 모시는[升祔] 예를 한결같이 처음 제도에 의하니, 모시고 제사지내느라고 뜰에 있던 자들이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새 능(陵)은 옛 현릉의 좌편에 있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멀지 않고 다만 소나무와 삼나무[杉]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관을 광중(壙中)에 내린 뒤에 두 궁의 소나무 한 그루가 4,5일이 못되어 무단히 말라버렸다. 시역제조(視役提調) 장순손(張順孫) 등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베게 하니, 바로 그 가린 것이 열려져서 두 능 사이에 다시 가린 것이 없어지므로 사람들이 모두 정령(精靈)의 감동한 바라 하였다. 또 능을 파던 날 옛 능을 둘러싸고 청명하던 날에 큰 비가 내리다가 얼마 후에 그쳤으니, 참으로 괴상스러운 일이었다.
○22일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임금이 경기(京畿)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고, 함경도는 기근이 들었다 하여 이달 15일에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을 줄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큰 비가 내렸다. 신미년 가을부터 해마다 비가 오지 않아 비록 가랑비가 있었으나 넉넉히 내리지 못하여 밭에는 남은 물이 없고, 샘과 못이 모두 말랐는데 경기도가 더욱 심했다. 함경도는 지난해부터 가물어서 북청(北靑) 근방 여덟 고을 들판에 푸른 풀이 없었다. 금년 봄에는 백성 가운데 자식과 아내를 파는 자도 있었고, 고을에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고기를 가져다가 주림을 채웠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역시 죽었다. 한 계집이 있어 그 어미가 늙고 눈멀어 붙들고 이끌어 걸식했으나, 둘이 다 온전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이끌고 한 고개를 올라서 잠시 쉬게 하고 딸이 통곡하고 남몰래 돌아오니, 그 어미는 길가에 쓰러져 죽었으므로 듣는 자가 불쌍히 여기고 슬퍼했다.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 한효원(韓效元)이 역말로 달려 급함을 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해운(海運)에만 의지하고 힘써 처치하지 않았다. 바다로 곡식을 운반하는 것은 함경도의 흉년이 든 이후로 관리를 보내서 배를 만들어 시험했더니, 다행히 올 여름에는 바람이 없어서 두 배가 안변(安邊)에 도착했다. 이제 또 관리를 보내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강원도 연해(沿海)의 관곡을 운반하게 했다. 좌도(左道)로부터 강원도에 이르고 안변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넓고 넓어 의지할 만한 섬 하나 없으니 만일 풍랑을 만나면 사람이 힘을 쓰기 어려운 터인데 요행으로 두 배가 거꾸로 뒤집히는 데서 벗어나기를 바랐으나 사람들은 모두 성사하지 못할 줄 알았다.
○6월 8일에 인사 행정에 특지(特旨)로 홍숙(洪淑)에게 예조 판서를 제수했다. 홍숙은 한미(寒微)한 집안의 출신으로 형제 세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고 출입하더니, 늦게 과거보는 글을 배워서 급제하여 10여 년이 못 되어 가선(嘉善)에 올랐으나 용렬하고 비루하며 아는 것이 없고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며 지각이 없고 추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형조 판서로 뽑혔다가 이제 또 특별히 예조 판서를 제수하니 여론이 이를 해괴히 여겼다. 대체 이 당시에 숭상한 것은 오직 말이 적고 웃음의 말을 좋아하는 것으로 재상의 체모(體貌)를 삼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본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사람을 쓰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았고, 전조(銓曹)에서 삼망(三望)을 주의(注擬)하는 데에도 임금이 혹 제비를 뽑아서 사람을 정하였으므로 물의가 크게 막혔다.
○7월에 큰 비가 내려 서울 평지에 물 깊이가 두어 자나 되었고, 냇가에 가까운 인가는 많이 떠내려가고 침몰되었으며, 오래된 돌다리는 곳곳이 무너지고 도성(都城) 밖의 사람들은 많이 빠져 죽었다. 사방이 모두 수해를 입어 산이 무너지고 성이 허물어져서 사람들이 압사하고 상해를 입은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로 해마다 가물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지 못하니, 임금이 비록 성심껏 사랑하여 어루만져 준대도 관리들이 폐습에 젖어 삼가지 않고 알지 못하여 구차히 문서에만 의지하여 백방으로 침범해서 임금의 뜻이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고, 조정의 명령이 사방에 행해지지 않은 채 시끄러이 문서대로만 해서 자질구레한 것만을 일삼으니, 식자(識者)들은 국체(國體)가 엄하지 못한 것과 기강이 서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했다.
○영의정 성희안(成希顔)이 졸(卒)했다. 성희안은 성격이 관대하여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큰 절의가 많아, 조정에 서서 강개(慷慨)하여 뜻세운 것이 구차하지 않으나, 배우지 못하여 계략이 없었다. 또 능히 아랫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지 못하고 발끈발끈하며 스스로 자기만을 잘하는 체하였기 때문에 정승으로서의 업적이 초초하여 공명(功名)이 크게 깎이었다. 전에 복상(卜相)하던 날, 소매를 걷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응기(金應箕) 천 명을 신용개(申用漑) 하나와 능히 바꾸지 못하며, 용개 천 명을 정광필(鄭光弼) 하나와 능히 바꾸지 못한다.”했으니, 그 돌보지 아니하고 망녕된 말을 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힘써 광필을 천거한 것은 비단 사사로이 좋게 생각한 것만이 아니고 역시 그에게 아첨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정광필과는 전부터 인척(姻戚) 관계가 두터웠는데, 몇 해가 되지 않는 사이에 수상(首相)이던 김수동(金壽童)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과 성희안이 서로 계속하여 죽으니 온 조정이 두려워하고 놀랐다. 김수동은 단정하고 침착하고 욕심이 적으나 착하고 부드러워 변변하지 못하여, 비록 나라의 안위(安危)를 맡을 신하[社稷之臣]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었다. 모두 중흥(中興)의 원훈(元勳)으로서 임금의 가장 오로지함을 얻었으면서도 훌륭한 공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한 세상에 인망이 있던 사람인데, 모두 자기 마음대로 욕심을 다하다가 잇따라 망하니,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성희안이 일찍이 평양 기생을 매우 사랑하더니, 그 기생이 머리털을 풀고 발을 벗은 채 남의 집에 도망해 숨었다가 뒤에 형조(刑曹)에 잡히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공(成公)의 밝음으로 족히 한 계집의 정상(情狀)을 볼 수 있을 터인데, 지나치게 반해서 죽는 날에 이르러서도 역시 이 기생을 자기 아들에게 부탁했으니, 아 괴상한 일이로다.” 하였다.
○8월에 나라의 법으로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 의논하는 일을 주장했는데, 중흥(中興)한 이래로 시호 의논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므로 특별히 홍문관 응교 이상에게 명하여 이 의논에 참여하게 했다. 이때 김수동(金壽童)의 시호를 경(頃)이라 하고, 유순정(柳順汀)의 시호는 무안공(武安公)이라 했는데, 정부에서는 이것을 명분과 실상이 맞지 않는다 하여 봉상시로 하여금 고쳐 의논하게 했다. 이즈음 시호를 의논할 적에는 그 자손들이 분주히 간청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시호를 얻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다시 고쳤으므로 의논하는 바가 모두 바름을 얻지 못했다. 이때 무관(武官)으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한 장정(張珽)이란 자가 죽었을 때, 안팽수(安彭壽)가 봉상정(奉常正)이 되었는데 그들의 청을 받고 시호를 충렬공(忠烈公)이라고 결정하니, 이로부터 시호에 충(忠)과 문(文)의 두 글자가 없으면 사람들이 모두 괴상히 여겼다.
○9월에 대궐 안에 배꽃[梨花]이 만발했다. 유진(柳軫 : 유자광의 큰 아들)의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도록 결정했다. 진(軫)이 늙은 어미를 구박해 내쫓고 아우 방(房 : 유자광의 작은 아들)을 죽였으니, 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인데도, 다만 불효와 부제는 본래 정해진 법이 없다 하여 의금부에서는 부모를 욕했다는 죄만을 의논하고, 조정 의논도 역시 이 법으로만 죄를 정하고자 말하니 이에 임금이 명하여 온 집을 변방으로 옮기라 했다. 오직 간원(諫院)에서 고집하여 불가하다고 말하니, 임금도 또 시종(侍從)에게 명하여 모여서 의논하게 했다. 이 의논에서는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임금이 특별히 용서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대부분 임금이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찬미하지만, 형정(刑政)을 베푸는 것이 불효보다 큰 것이 없고, 당장 베푸는 은혜가 마침내 큰 인의(仁義)를 해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중흥 이래로 형법(刑法)이 행해지지 않고, 간사한 신하가 나라를 그르쳐서 어둡거나 요망하거나를 일체 묻지 않고 도리어 벼슬과 봉급을 높여주고, 으레 공신(功臣)의 칭호를 더해주며, 이것을 받은 사람도 또 만족해 해서 제 스스로 뜻을 얻은 것처럼 여기고 다시 꺼리거나 두려워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의 풍속이 완고하게 부끄러움 없이 오직 자기의 이익만 취하고, 기강은 돌아다보지 아니하여 예의를 범하고 어지러운 짓을 하는 자도 그것이 악한 일인 줄을 알지 못했으므로 진(軫)이 죽음을 면했으니 몹시 가슴 아픈 일이로다. 유씨(柳氏)가 본래는 세족(世族)이었지만 유자광(子光 1439-1512)에 이르러 서자(庶子)의 몸으로 별안간 일어난 것이다. 당시 세상에 일이 많음으로 인하여 자기의 간사스러운 꾀를 팔 수 있었는데, 사람을 위험한 데로 넘어뜨리기를 좋아하고 착한 사람들을 멸망시켰다. 중흥(中興) 때에 희안(希顔)으로 인하여 다시 공신(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자 또 못된 습관으로 맑은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히더니, 화와 복은 징험이 있는 것이라 마침내 궁하게 바닷가에 가서 살다가 죽었다. 죽을 때에는 여러 해 동안 두 눈이 모두 소경이 되었고,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그 자손에게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낼 것을 허락했으나, 유진은 슬픔을 잊고 즐거운 낯빛으로 종시 초상에 가보지 않았으며, 방(房)도 역시 병을 칭탁하고 손을 대해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 아비의 장사지내는 것을 가보지 않더니 마침내 다 함께 망했다. 어찌 하늘이 무심하겠느냐.
우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일찍이 경연에서 극론을 펴서 위에 뽑아 올릴 종과 각부(各府)의 사령[皁隷]과 각진(各鎭)의 수군(水軍)이 사람은 적고 일은 늘 많아서 장차 능히 지탱하지 못하겠으니, 사람의 수효와 일의 힘들고 쉬운 것을 고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에 평안하게 하자고 하니, 곧 재상들의 의논을 모으게 했다. 재상들이 모두 옛 법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자 광필은 그 후부터 역시 우물쭈물하고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는 것이 없었다. 처음에 광필이 정승이 되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광필이 필연코 허위로서 넓고 큰 체통을 세우는 체하고 심원한 규율을 마련하는 체하여 사람들의 인망을 속이리라.” 하더니, 과연 앉지 못할 자리에 처하게 되자 수족이 모두 드러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제일 먼저 건의한 것은 기껏 사령들의 일 몇 가지뿐이고 다시 나타난 일이 없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기롱했다.
○10월 4일 밤에 번개와 천둥이 크게 치면서 큰 비가 오고 또 바람이 불었다. 지난달에는 꽃이 다시 피었고 이번에는 또 번개가 치니, 식자들은 기강이 없어지고 형벌이 나타나지 않을 징조라 했다. 14일 밤에 크게 번개와 천둥이 치고 또 비가 오니 명하여 천참(泉站)에서 사냥할 것을 정지하게 했다. 18일에는 구름도 없는 대낮에 우박이 오고 또 우레가 크게 울렸다.
○22일에 의정부의 종 정막개(鄭莫介)가 박영문(朴永文)과 신윤무(辛允武)가 난(亂)을 꾸민다고 밀고(密告)했다. 이보다 먼저 우레의 변고로 인해서 임금이 정전(正殿)을 피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에 나가서 친히 옥사(獄事)를 심문하다가 밤 사고(四鼓)가 되어서야 파했다. 23일 밤에 반역한 죄상을 모두 들었다. 24일 박영문과 신윤무를 모두 역모를 한 까닭으로 극형에 처하고 그의 아들들도 모두 목졸라 죽였다. 그들의 집은 추관(推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영문의 집은 모두 막개에게 주고 특별히 막개는 당상 상호군(堂上上護軍)을 제수했으며, 따로 은대(銀帶)와 의장(儀章)과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승지(承旨) 이사균(李思鈞)과 김극복(金克福)은 특별히 가선(嘉善)에 올랐고, 윤희인(尹希仁)과 유운(柳雲)은 문사관(問事官)으로서 모두 당상에 올랐으며, 사균에게는 역시 따로 금대(金帶)를 주었다. 임금이 처음에는 노영손(盧永孫)의 예에 의해서 추관과 고관(告官)에게도 모두 공신(功臣)의 이름을 더하려 했으나 정승이 막개가 고변(告變)한 것이 늦었다고 아뢰니, 상께서 애써 그 말을 따랐다. 막개는 본래 천한 사람으로서 교활하기 비할 데 없어 일찍이 박영문과 신윤무의 집을 출입하여 몹시 친했다. 박영문은 본래 흉악하고 교활해서 선비들이 자기를 배척하는 것을 미워하고 늘 당장에 정권을 잡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여 조정을 원망함이 날로 심하더니, 16일에 천참(泉站)해서 사냥할 때 영문이 지휘하는 장수가 되자 이에 못된 마음이 생겨서 저녁에 윤무의 집에 가서 옳지 못한 일을 꾀하였는데, 이때 막개가 숨어서 듣고 모든 말의 곡절을 얽고 보태서 만든 것이니 믿기 어렵다. 대개 영문은 조정에 변을 일으켜서 자기의 뜻을 쾌하게 하려 했으나, 윤무가 항상 사세를 들어 꺾었으며 영문은 같은 당파이기 때문에 죽음을 결단하자는 말까지 있었다. 윤무는 본래 약하기 때문에 그를 권면하기를, “저번에 그대와 함께 평성 박원종의 집에서 맹세했으니, 내 어찌 차마 그대를 배반하리오. 마땅히 그대를 좇아 주선하리라.” 했다. 중흥(中興)때에 평성 박원종은 두 사람과 더불어 모두 무부(武夫)로서 일어난 것인데 본래부터 부귀를 도모하고 의리를 도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때를 따라서 일을 처치하자는 약속이 있었으나 그 일은 자세하지 못하다 한다. 막개란 자는 밤낮으로 일을 꾀하더니, 일찍이 꿈에 자기 몸이 결박되어서 수레 위에 놓였는데 형벌을 받기에 임해서 군기감(軍器監) 앞에 이르자 문득 준마(駿馬)를 탔는데 모양이 몹시 장해졌다. 꿈에서 깨자 생각하기를, “이는 내게 상서로운 징조로다.”하고, 이에 뜻을 결정하고 고변(告變)했던 것이다. 이 옥사는 달리 증거가 없고 두 사람이 한 말을 막개가 들었을 뿐으로 오로지 막개가 고변한 말을 가지고 두 사람을 심문했다. 박영문(朴永文)은 연달아 두 차례 고문을 받았어도 오히려 일을 숨겼고, 윤무(允武)는 본래 병이 많았기 때문에 큰 매를 참지 못하여 매번 한 대만 맞아도 “그렇소. 그렇소.” 했다. 국조(國朝)의 법에는 대체로 난모(亂謀)에 관계되는 자는 모두 추삭장(麤削杖)을 쓰기 마련인데 매를 잡은 자가 연달아 10대를 때리면 팔뚝과 손가락이 시리고 아파서 다시 매를 들 수가 없었다. 또 낙형(烙刑)을 하므로 공술한 말이 한번 기울어지고 보면 다시는 변명하기가 어려웠다. 윤무가 한번에 먼저 자복하였으니 대개 영문은 흉한 마음이 심중에 쌓여 있었던 것이 나와서 말이 되었고, 윤무는 이 흉한 음모를 듣고 용납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기록하여 반열이 재상에 있었는데, 말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대역(大逆)이라고 논단하였으니, 본래부터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진압하지 못하겠거늘 그 아들까지 죽여서 죄를 감하는 조처가 없었으니 마음 아픈 일이로다. 윤무가 형벌에 임해서 집의(執義) 김협(金協)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김협아, 김협아, 국가에서 간사한 사람의 말을 듣고 말에 조그만 흠이 있다 해서 경솔히 대신을 죽이는데, 그대는 어찌 힘을 다해 구하지 않는가.” 했다. 협(協)은 본래 겁이 많고 아는 것이 없어 이 말을 듣고 무슨 괴상한 일이 있을까 의심해서 그날 밤 촛불을 밝히고 자지 않으면서 종들로 하여금 아침까지 떠들썩하게 하여 괴상함을 막도록 하니 물의(物議)가 그를 비웃었다. 송질(宋軼)ㆍ정광필(鄭光弼)ㆍ이사균(李思鈞) 등은 스스로 자기들이 적을 치는 데 힘이 있었다 하여 얼굴에 나타내어 서로 하례해서 무릇 조정의 은사(恩赦) 같은 이도 모두 찬성했다. 윤희인(尹希仁)은 본래 글 쓰는 낮은 관리요, 유운(柳雲)은 명사(名士)로 이름이 났는데 함께 당상(堂上) 벼슬에 오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름하여 삼절충(三折衝)이라 불렀다. 임금은 특별히 막개(莫介)가 충성과 절의(節義)가 있는 선비라 하여 궁중에서 보물을 수없이 하사하니 사기(士氣)가 상해져서 형세를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막개가 항상 의표(儀表)를 갖추고 나가 다니려 하면 시정(市井)의 일없는 자들과 동네 어린애들이 말을 앞뒤로 옹위해서 다니지 못하게 하니, 혹은 그의 영화로움을 사모하여 탄상(歎賞)하는 자도 있고 혹은 비루한 것을 경멸하여 비웃고 욕하는 자도 있어 조정 의논이 그와 함께 서기를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임금이 중히 여기고 당시 재상들이 그에게 의지하는 바이므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막개가 고변(告變)한 말 중에 영문(永文)이 영산(寧山)을 추대하려는 말이 있었다 하여 송질과 정광필이 앞장서서 말하기를, “영산이 이미 역적의 모의에 관계되었으니 마땅히 먼 곳으로 귀양 보내야 한다.” 하여, 그 뜻이 견성(甄城) 의 고사(古事)를 좇으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전교가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니 이르기를, “견성의 일은 반정(反正)하던 처음에 사세가 창황(蒼黃)해서 억지로 쫓은 것으로서 지금까지 마음 아픈 일인데, 어찌 마음으로 그 망녕됨이 없는 것을 알면서 죄를 더할 수 있겠느냐.” 하였지만, 송질이 조정에서 다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유순(柳洵)과 노공필(盧公弼)은 본래 늙고 병들어 집에 있고 조정 일에 간여하지 않았는데, 송질 등이 끌어내어 함께 일을 주장했고, 또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이상과 종친(宗親)의 이품(二品) 이상에게 부탁하여 함께 임금에게 청하기를 요구했다. 김응기(金應箕)는 학식이 조금 있어서 영산(寧山)의 일을 가지고 죄를 청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성질이 유약해서 능히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헌부(憲府)의 관리들은 모두 겁을 내어 함께 대궐에 들어가니 무리들은 말하기를, “영산(寧山)을 구하다가는 뜻하지 않은 화를 당하리라.” 하여, 도리어 죄 청하기를 더욱 급하게 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은 당시 재상들의 뜻을 구차히 따르려 했고, 또 임금의 뜻이 비록 겉으로는 간절하고 측은한 말씀을 내렸으나 속으로는 대신들의 행동을 보려 함이라고 망령되이 짐작했기 때문에 물의(物議)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죄를 청했던 것이다. 박열(朴說)은 속은 밝으면서도 거짓이 많고, 홍언필(洪彦弼)은 음휼하고 꾀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 일을 주장했으며, 그 밖의 대원(臺員)들은 모두 용렬한 자들이어서 많은 책망을 할 것이 없다. 질(軼) 등이 괴롭게 수일 동안을 다투다가 임금의 뜻이 돌아서지 않을 것을 알고 물러갔다.
○11월에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충후(忠厚)한 풍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온바, 유자광(柳子光)이 임금을 도운 공로는 고금(古今)에 없는 바이오니 그 죄가 있다해서 훈적(勳籍)을 깎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조(吏曹)의 파직시키는 관리들은 모두 어리석고 곧을 뿐 문채가 없으나 갑자기 그 벼슬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가 유자광이 공로를 힘써 칭찬한 것은 오로지 그의 비위를 맞추어 막개(莫介)를 상주게 하려는 뜻이고, 또 벼슬을 잃은 공신(功臣)들을 위안하려 함이었다고 한다. 또 파직당하는 관리들을 그대로 두려는 것은 역시 잡된 무리들의 기쁨을 삼으로써 재상의 기풍이 있는 체함이니, 대개 자기 몸은 임금의 사랑을 굳게 하고 거짓을 품어 국가를 그르친 것이라 물의가 이를 애석히 여겼다.
○12월에 지평 권발(權撥)이 혼자서 정막개가 참람되이 상을 받은 일을 아뢰자, 양사(兩司)가 각각 책임을 지고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권발은 정막개의 일을 동료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마땅히 아뢰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다시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여러 번 그 말을 고쳤다. 이때에 이르러 양사에서는 유자광의 일로 대궐에 나갔으나 오히려 우물쭈물하고 아뢰지 않다가 마침내 별도로 아뢰었다. 대사헌 박열(朴說)은 본래 편협한 사람으로서 그 논박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어 다투어 변명하고자 했으나 그 이치가 굴할 것을 알고 물러가니, 사람들이 모두 추관(推官)으로서 고변(告變)한 사람을 상주는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옛 일인데, 이제 공신(功臣)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크게 헤아려서 한 일이므로 다시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여, 모두 권발이 이의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여겼지만 입과 혀로 지껄인 공을 지나치게 상주어서 외람하게도 진신(搢紳)의 반열에 서게 하는 것이 끝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단을 초래할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궐내에 농사짓는 놀이를 할 것을 명하였다. 나라 풍속에 정월 보름날에는 짚을 묶어 곡식의 이삭을 만들어 가지고 비에 매달아 열매 많은 것을 형상하고 나무에 걸고 새끼를 꼬아서 풍년들기를 빌었다. 대궐 안에서는 국가의 풍속에 인하여 좀더 제도를 번잡하게 하여서 칠월편(七月篇)에 실린 인물을 모방해서 갈고 씨 뿌리는 모양을 했었다. 처음에는 기이하고 교묘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역시 근본을 힘쓰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뜻이었는데, 결국에는 좌우가 서로 갈라져서 이기고 진 것에 따라 상을 주므로 관리나 공장들이 다투어 새로이 교묘한 짓을 만든 모양을 지극히 진짜처럼 묘하게 꾸미느라고 물색하고 찾아 헤매서 시장이 텅 비게 되었다.
문관(文官) 이빈(李蘋)이란 자는 본래 심각하고 재능이 있었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어 우변(右邊)에 소속시켰다. 고사(故事)에는 역시 승지(承旨)를 나누어 좌우에 소속시켰는데 이 때 좌변에 소속시키는 자가 있으므로 부하에게 부탁하기를, “이빈이 우변에 있으니 그대들의 일이 낭패로다.” 하니, 부하들이 곧 분발하기를, “우리들이 일을 하는데 어찌 남의 밑에 있으리오.” 하고, 서로 잘하기를 다투니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다. 금년에는 광대[儺人]구경을 하고 불놀이 구경을 하는 것이니, 다시 쓸데없는 비용으로 놀이하는 제구를 극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여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모두 행하지 말기를 청했으나 모두다 조종조(祖宗朝)의 고사이니 갑자기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정부에서는 15일이 마침 월식(月食)할 때이니 안팎이 반성해서 재앙을 구제하고 다시 장난감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임금은 농사짓는 것은 반드시 15일날 보지 않아도 좋으며 비록 다음날에 보아도 해로울 게 없다 하였다. 대간과 시종이 여러 번 그 옳지 않음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농사짓는 것이 장난 구경하는 것만 못하니 이제부터는 마땅히 1년중 행사를 정지시키지 말라.” 하고, 억지로 말하고 변명하기를, “반드시 장난을 구경하려 하여 온 나라가 다툰대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하니, 대소 관리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갑술년(1514) 정월 1일에 군신(君臣)의 회례연(會禮宴)을 행했다. 야인(野人)과 섬 오랑캐들도 모두 공경하고 신하 노릇을 하여 예의에 어긋남이 없이 대소(大小)가 화락했다. 다만 시절이 아직 군색해서 뜰에 가득한 술과 안주가 모두 나쁘고 먹을 수가 없었다. 도승지 이사균(李思鈞)은 본래 일을 과장하고 허탄해서 예의를 익히지 못했더니 이 날 잔을 들고 꽃을 받들어 올리는데 혼미해서 절차를 잃었다. 노영손(盧永孫 :1507 대사성 이과를 역모로 밀고)은 본래 천한 병졸로서 고변(告變)한 것으로 출세해서 지위가 정2품에 이르니 남들이 비웃었다. 그러나 임금이 편벽되이 소중하게 대접하므로 종재(宗宰)들이 잔을 올릴 적에는 반드시 참여했었다. 이 날 영손이 다섯째 잔을 올리자 종척(宗戚)과 훈구(勳舊)들은 모두 참여하지 않으니 뜰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바라다보고 탄식함을 마지않았다. 정조(政曹)에 일러서 고세보(高世輔)를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삼았다. 세보의 아들이 일찍이 혜민교수(惠民敎授)로 있었으므로 정조에서 이로써 아뢰자 특별히 명하여 하종해(河宗海)와 서로 바꾸게 한 것이니, 종해는 일찍이 활인서 제조(活人署提調)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보와 종해는 모두 연산(燕山)의 더럽고 음란하던 신하로서 세보는 더욱 아첨함이 헤아릴 수 없었다. 반정(反正)한 뒤에도 의장(醫長)이 되어서 자못 부탁하고 청하는 것을 통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특별히 명하여 벼슬을 주었다. 임금은 또 잡술(雜術)에도 정신을 써서 지리(地理)와 운명(運命)을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불러보고 어의(御衣)를 하사하니, 술인(術人) 조륜(趙倫)이 일찍이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한다.
○2월에 명하여 반정한 날에 입직(入直)한 승지(承旨) 윤장(尹璋)ㆍ조계형(曹繼衡)ㆍ이우(李堣) 등의 공권(功券)을 추삭(追削)하게 했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은 대개 모두 인아(姻婭)로서 권균(權鈞)은 문 밖에 가서 누웠었고, 강혼(姜渾)과 유순(柳洵)은 조복(朝服)을 입고 대궐로 나가다가 군문(軍門)에 잡혔으나 모두 공신의 명부에 실렸었다. 이 세 사람은 폐주(廢主)가 곤궁한 것을 보고 몸을 던져 목숨을 맡겨야 하거늘 도리어 속이고 꾀어내서 달아났으니, 세론의 비웃는 바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절의(節義)로써 신하들을 책망하고 정부 육조(六曹)에 명하여 수의(收議)하게 했다. 유순은 기절(氣節)은 적지만 옳고 그른 것은 아는 사람인지라 혼자 아뢰기를, “신(臣)은 반정하던 날의 수상(首相)으로서 변을 듣고 창황해서 어찌할 줄을 알지 못했사온데, 또한 공신의 명부에 참여해서 후세(後世)에 부끄럼이 있는지라, 신은 세 사람과 실상 형적(形迹)이 같으므로 감히 의논을 아뢰지 못하나이다.” 하니, 듣는 자들이 옳게 여겼다. 송질(宋軼)은 폐주에게 사랑을 받아 벼슬이 종일품(從一品)에 이르렀더니, 반정하던 날에 분주하게 서둘러서 공신의 명부에 참예했다. 이 날 의논을 아뢰는데 혼자 아뢰기를, “인신(人臣)이 절개를 잃으면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할 것이오니 마땅히 법으로써 일을 처리해야 하옵니다.” 했다. 또 아뢰기를, “신이 폐조(廢朝)에 대해 역시 삼강(三綱)을 잃었으니, 오직 주상(主上) 받드는 것만 알고 폐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했으니, 그의 완고하게 부끄럼이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밝은 조정에 가만히 기록되어서 얼굴 붉어지네 / 竊錄明庭面有紅
하물며 간하는 자리에 있어 임금의 일을 도움이랴 / 況尙居諫補天工
우공은 망령되이 산을 옮길 계교를 했고 / 愚公妄作移山計
과보는 해 쫓는 공을 이루지 못했네 / 夸父難成逐日功
속된 사람 마침내 나라 정치를 그르쳤으니 / 俗子終能隳國政
적은 정성 어찌 상감의 총명을 이룰 수 있으랴 / 微誠安得徹宸聰
지금에야 비로소 전원에 돌아갈 계교를 결정했으니 / 如今始決歸田策
전일에 늙은 농부의 일 배우지 못한 것을 뉘우치네 / 悔不從前學老農
○3월에 양사(兩司)에서 함께 송질ㆍ홍숙(洪淑)ㆍ윤순(尹洵)ㆍ강징(姜徵)은 본직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었다. 송질은 본래 관직 잃는 것을 근심하는 비부(鄙夫)로서 공을 탐하고 부끄러움이 없어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는데도 한 가지 잘했다고 일컬을 것이 없었다. 일찍이 자기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을 제 완연(宛然)히 집에 있으면서 흥덕동(興德洞)에 집을 짓는데, 상복 입은 채 가마를 타고 대낮에 왕래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럼과 거리낌이 없었다. 전답을 영유(永柔) 등지에 수백 결(結)을 두고 고을 원에게 청하여 관청 사람을 시켜 다스렸다. 또 이윤검(李允儉)에게 물건을 구하니 윤검은 당시 평안도 절도사로 있었는데 본래 아첨하는 사람인지라 선척을 많이 만들어서 거기에 물건을 가득 실어 보내니 받고서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으니 이렇게 뇌물을 참람되게 받았다. 또 일찍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날더러 음양(陰陽)을 가리고 국가를 다스린다고 하면 잘못이다. 만일 녹을 먹고 갈 길을 좇는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만하도다.” 했다. 홍숙은 배우지 않아 학술(學術)이 없으며, 재물을 탐하여 양민을 종으로 삼고 소송 일으키기를 좋아하며 남의 전답을 빼앗았다. 말과 웃음을 잘하여 상하 사람들에게 잘 뵈는 것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상일을 수작하는 데 자기의 위에 설 사람이 없다고 했고, 임금도 또한 이로써 그를 갸륵하게 여겼기 때문에 갑자기 종일품에 올라 외람하게 정부에 참여했다. 집이 본래 빈궁해서 형제끼리 옷을 바꾸어 입고 출입했으나 여러 번 요직(要職)을 역임하여 부자가 되었다. 관기(官妓)를 길러 첩으로 삼으며, 집이 몹시 정하고 화려하며 첩도 비단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윤순(尹洵)은 연산(燕山)의 사랑을 도둑질하여 과거에 오른 지 5년 만에 갑자기 자헌(資憲)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가 또한 연산의 사랑을 받아 대궐 안에 출입하여 자못 추한 소리가 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 순의 자헌은 왕팔채(王八債)라.” 했다. 성조(聖朝)에 들어와서도 벼슬과 녹을 받고 그 아내를 대접하기를 평일과 다름없이 하니, 남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성질이 또한 비루하고 좀스러워 일찍이 함경감사(咸鏡監司)가 되었을 때, 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자가 많았으나 조금도 이런 것은 염려하지도 않고 날마다 문서를 가지고 좀스럽게 따지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강징(姜徵)은 본래 어둡고 용렬하여 재주와 행실이 없어 벼슬에 있으면서도 잘하는 일이 없었다. 근년 이래로 임금이 정신을 가다듬고 정치를 하여서 재상에게 희망을 두었으나, 모두 용렬하고 완고해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냈다. 그 중에도 송질과 홍숙은 임금은 소중히 여기던 터인데 뜻을 어김이 날로 심했고, 윤순과 강징은 남들에게 비웃음을 받았으나 오히려 육경(六卿)의 자리에 오르니 공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조정의 재상들이 모두 이런 따위가 많았으니 이를 다시 구별하려면 화단(禍端)이 생길까 두려웠다. 이때에 이르러 간원(諫院)에서 먼저 소(疏)를 올려 보고했으나 거기에도 그 실상을 지적해 말하지는 않고 오직 임금이 그들의 진퇴(進退)를 헤아려서 처리하기를 바랐고, 또 그 사직하는 것을 인해서 파직시키는 것이 거의 체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폐한 뒤에 사람들의 말이 더욱 심하므로 부득이 합사(合司)해서 아뢰었다.
○병자년(1516) 12월 25일에 우승지 신상(申鏛)이 노산(魯山 단종)을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노산의 묘(墓)는 영월군(寧越郡) 서편 5리 밖 길가에 있는데 모두 무너지고 높이가 겨우 2척 남짓 했다. 무덤 옆에는 여러 무덤이 널려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군왕(君王)의 묘(墓)라고 불러왔고 비록 어린애라도 능히 알아낼 수가 있었으며 또 여러 무덤은 모두 돌이 곁에 벌려 있는데 유독 이것만은 그런 것이 없었다. 당초에 노산이 죽던 날에 진무사(鎭撫使)가 와서 형벌하는 것을 감시할 제 핍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서 시체를 밖에 내버려두니, 읍재(邑宰 군수)와 종인(從人)들은 그 위엄에 겁내어 감히 시체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군(郡)의 수리(首吏) 엄흥도(嚴興道)란 자가 가서 곡하고 관(棺)을 가지고 가서 염습(斂襲)했는데, 그 관은 곧 관노(官奴)가 만든 것으로 화재가 무서워서 고을의 옥에 갖다 두었던 것을 갖다가 쓴 것이었다. 혹 다른 이론(異論)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즉시 이곳에 장사지낸 것이라 한다. 사기(史記)에, “노산이 물러나 영월에 있다가 금성(錦城)이 패했단 말을 듣고 자진(自盡)했다.” 하였으니 이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어서 한 말이었다. 대개 후일에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자들은 모두 당시에 아첨하던 자들이었고, 계병일록(癸丙日錄)도 자못 이같은 것이 많다. 혹은 말하기를, “노산의 묘(墓)는 충의(忠義)가 있는 무리들이 몰래 시체를 빼다가 옮겨 장사지낸 것이라.” 하나, 역시 근거 없이 전하는 말이다. 다만 고을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애통해 하고 제물을 차려 제사지내며, 심지어 길흉(吉凶)이나 화복(禍福)을 당해서도 모두 여기 나가서 제사지내서, 비록 부녀자라도 오히려 전해 내려오는 말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정인지(鄭麟趾) 같은 간사한 적신(賊臣)들에게 격동되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마치지 못하게 했으니, 아, 옛날부터 충절(忠節)의 선비란 반드시 대대로 녹을 받는 귀한 집안에서 나는 것은 아니로다. 당시에 임금을 팔아서 이익을 도모하고 반드시 그의 임금을 지나친 환란 속에 두게 한 연후에라야 마음이 쾌했던 자들은 그가 음군(陰君 염라대왕)을 볼 때에 어떻게 하였겠는가. 한편 촌에 있는 부녀나 마을 어린이들은 마음으로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흉변을 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울분에 쌓여 불평하면서 그 말이 입에서 나오고 소리로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사람의 성품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을 알겠다.
○소릉(昭陵)은 현릉(顯陵)이 동궁(東宮)에 있을 적부터 배위가 되어서 덕과 행동이 겸해 지극함으로 크게 영릉(英陵)의 사랑을 받았다. 나이 24세 되는 정통(正統) 신유년에 노산(魯山)을 탄생하다가 난산(難産)으로 인해서 병을 얻어 소생하지 못하고 7일 만에 훙(薨)했다.
○광묘(光廟)가 즉위하자 노산은 왕위를 내놓고 영월로 내려가 있더니, 이듬해 병자년에 옛 신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 등이 왕비의 아우 권자신(權自愼)과 더불어 노산을 회복할 것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패해서 왕비의 아우는 인해서 죽음을 당하고, 왕비는 연좌를 당하여 폐비가 되었다. 정축년에 정부의 청으로 인해서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소릉을 파고 재궁(梓宮)을 꺼내서 밖에 3,4일 동안을 내놓았다가 드디어 옮겨 묻었다. 신주를 종묘에서 내쫓고 현릉으로 하여금 혼자 태묘(太廟)에서 제사받게 하여 귀신과 백성들의 분함을 산 지 50여 년이 되었다. 정덕(正德) 임신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소릉을 회복하기를 청하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ㆍ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한 지 해가 넘었으나 임금이 허락을 하지 않으므로 진신(搢紳)의 반열에서도 화를 두려워하여 관망하는 자가 있었다. 내가 유종룡(柳從龍)에게 준 편지가 있다. 계유년 4월 17일에 소릉(昭陵) 구영(舊塋)을 열고 재궁(梓宮)을 고쳐서 새로 현릉(顯陵) 좌편 언덕에 모셨다. 교리(校理) 신(臣) 이모(李某)가 만장(挽章)에 말하기를,
해를 붙들어 황도(黃道 태양의 운행하는 궤도)에 오르고 / 扶日升黃道
구름을 타매 일이 이상하고 마땅하도다 / 乘雲事異宜
이치는 마땅히 돌아가는 곳이 끝이 있고 / 理當歸有極
하늘은 의당 비치는 것에 사사로움이 없네 / 天合照無私
종사에서는 새로운 경사가 열리고 / 宗社開新慶
건곤에는 옛 의식을 정했도다 / 乾坤定舊儀
미천한 신하 소장을 모셨는데 / 微臣陪素仗
눈물 머금은 채 애사를 쓰네 / 和淚寫哀詞
하였다. 5월 6일에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복위(復位)하여 태묘(太廟)에 모셨는데 한결같이 처음 제도에 의하여 배향(配享)하니 뜰에 있는 자들이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나는 불행히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폐조(廢朝)를 섬겨 권면하여 벼슬하다가 편히 쉬기 위하여 나가서 문소(聞韶)원이 되었더니, 하늘의 해가 거듭 밝아져서(중종 반정을 말함) 낡은 정치를 개혁하자 맨 먼저 시종(侍從)으로 부르시니, 소외되었던 종적이 미치광이와 소경처럼 함부로 떠들었건만 여러 번 상감의 권장하심을 입어 조정에 출입한 지 10년이 되었다. 감격하게 은혜를 받아 높고 벼슬에 뛰어오르니 당시 동배(同輩)들은 눈을 흘겼다. 스스로 보기에 부족하므로 몸으로 은혜 갚을 길을 생각하였으나 학문한 것이 없어 의거할 곳이 없으며, 성질이 또 소략하고 완고한데다가 겸해서 졸지에 일어난 몸이고 보니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어진 이를 밀어주고 선비를 좋아하는 데 처신할 방법이 없었다. 세상 일이 점점 변하여 마침내 불측한 화를 일으켰는데,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시의 선비들은 역시 모두 벼슬이 떨어져 귀양갔으며, 조효직(趙孝直) 공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죽었으니, 아, 사람의 죽음에 어찌 말할 것이 없으리오. 슬프다. 옳고 그른 것은 비록 한 때에 혼동될는지 모르나, 정상은 마침내 후일에 드러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 같은 자는 신하가 되어 잘한 일 없이 죄와 혼란이 얽히어 쌓였고, 비방과 꾸지람이 만 가지나 있는데도 오히려 입을 열어 먹을 것을 기다리고 사람을 향하여 말하고 웃으니 어찌 완연(宛然)한 하나의 추한 물건이 아니겠는가. 나는 조공(趙公)과 더불어 가장 친하였고 서로 알았으니 죽고 사는 것을 같이할 것이었는데 이제 거의 죽게 된지라, 내 자손들이 우리의 교정(交情)이 유명(幽明)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경인(庚寅) 제석(除夕)에 취함을 타서 붓 가는 대로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