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기문(逸史記聞)
撰者未詳
○ 일본의 괴수 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했다. 드디어는 명나라를 침범할 계략으로 현소(玄蘇) 등을 보내서 우리나라에 글을 전하기를 ‘길을 빌리자[假道]’고 말하였다. 그 말씨가 너무도 오만하므로 우리나라는 대의를 들어 그 사신을 물리쳐 끊었다.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수길은 막장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서 정병 20만을 뽑고 평행장(소서행장(小西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종조신 (宗調信)) 등을 선봉으로 삼아 우리의 8도를 짓밟고 우리의 5묘(廟)를 헐고 우리의 삼경(三京)한성ㆍ개성ㆍ평양 을 함락하고 우리의 두 능(陵) 선릉(宣陵:성종)과 정릉(靖陵:중종)임 을 불태웠다.
다행히도 명나라 천자가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도독 이여송(李如松)으로 남북 관병(南北官兵) 4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하므로 드디어 평양 대첩을 이룩했다. 그리고 정유년(1597, 선조 30) 난리엔 양 경리(楊經理)와 마 도독(麻都督)을 보내어 직산(稷山) 대첩을 이룩했으며, 무술년(1598)엔 군문(軍門 명 나라 관직명)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이 서로(西路)의 제장들을 각각 파견하여, 도독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로 들어와 울산에 주둔했고, 도독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로 들어와 사천(泗川)에 주둔했으며, 도독 유정(劉綎)은 서로 들어와 순천(順川)에 주둔했고, 도독 진인(陳璘)은 뱃길로 들어와 적을 노량(露梁)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마침 수길이 일본에서 죽자 적들은 군병을 철수하여 모두 돌아갔다.
○ 이에 앞서 대마도 도민들은 배로 화물을 실어다 우리의 쌀과 포목을 바꾸어 감으로써 그 생활을 유지해 왔는데, 병란을 치른 뒤부터 그들은 굶주리고 헐벗어 생활이 곤란케 되었다.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는 연달아 귤지정(橘智正)을 시켜 포로 되었던 남녀를 보내오며 화친을 요청하고 시장을 개통할 것을 애걸하였다.
○ 한편 원가강(源家康 덕천가강(德川家康))은 관백(關白)이 된 뒤 스스로 변명하기를,
“임진ㆍ정유의 변란 때, 나는 관동(關東)에 있어 일찍이 전쟁에 관여한 일이 없었으니, 조선은 나와 원수 될 것이 없으므로 화친하기를 청한다.”
하므로, 우리나라는 승려 송운(松雲) 유유정(兪惟正)을 일본에 보내어 적정을 정탐하고 포로 된 남녀 1천 3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를 요동에 있는 각 아문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 병오년(1606, 선조 39) 겨울. 일본 국왕 원가강은 수교문(修交文)을 보내어 우호를 통하는 한편, 병란 때 우리의 두 능을 침범한 범인 두 명을 압송해 왔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나이 20여 세로, 임진년엔 5세도 채 못 되는 나이였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사복시에 삼성(三省) 을 설치하고 그들을 국문, 처형하고는 국치를 씻었노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다 그 실없음을 비웃었다.
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 등이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일본에 가게 되자, 참판 윤안성(尹安性)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회답사라 이름 하여 어디로 간단 말인가 / 使名回答去何之
오늘의 이 화친 의의를 모르겠네 / 此日和親意未知
한강에 머리 돌려 강가를 바라보라 / 試向漢江江上望
두 능의 송백 가지도 안 돋았네 / 二陵松栢不生枝
이 시는 장안에 전송되어 식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 만력 35년(1607, 선조 40)은 곧 선조대왕 즉위 41년인데, 가을부터 겨울까지 여러 달 동안 옥후가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조회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목왕후(仁穆王后 선조의 계비 김씨)는 손수 언문교서를 써서 빈청(賓廳)에 내리고 세자에게 전위 문제를 논의하라고 유시하였다. 영의정 유영경은 밀계(密啓)를 올려 이를 막는 한편, 원임대신을 배제하여 참여하여 듣지 못하게 하였다.
영창대군 의(㼁)는 이때 겨우 세 살이었으나, 광해(光海)는 동궁에 있은 지 20여 년인데, 사리에 어둡고 괴팍하여 제 마음대로 하므로, 선조는 그가 장차 막중한 짐을 지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매우 걱정한 나머지 폐립(廢立)할 뜻을 갖고 있었다. 유영경이 선조의 이러한 뜻을 받들기 위하여 전위의 하교를 막은 것이었다.
○ 무신년(1608, 선조 41)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의 소장이 영남에서 올라왔다. 그 소장의 사연은 대개, 사직을 위태롭게 도모한다고 유영경을 몹시 공격하였는데, 심지어는 사미원(史彌遠)이 제왕(濟王) 횡(竑)을 임의로 폐한 고사를 인용,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삼사(三司)는 계를 올려 정인홍을 변방으로 멀리 정배하는 한편, 이이첨ㆍ이경전(李慶全)ㆍ정조(鄭造) 등이 몰래 인홍을 사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소를 올렸다 하여, 그들도 모두 양계(兩界)로 귀양 보냈다. 상은 또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제후의 아들은 천자에게 명을 받은 자여야 비로소 세자라 이르거늘 지금 세자는 천자가 봉하였는가? 나라 사람들이 아는가?”
라고 하여, 조야가 크게 놀랐으며 닥쳐올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더니, 2월 초하루에 선조가 수라를 들고 그날로 폭사했다. 조야는 모두 독약을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으나,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 줄은 역시 알지 못했다. 선조는 임종시에 일곱 사람의 재신에게 유언하기를,
“불선한 내가 왕위에 오른 후로 신민(臣民)에게 죄지음을 깊은 골짜기에 빠지는 것처럼 여겼는데, 홀연히 중병을 얻었소. 무릇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은 수(數)요, 사람이 죽고 삶은 명(命)이오. 마치 밤과 낮을 어길 수 없듯이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대체 무슨 말을 또 하겠는가? 다만 대군이 아직 어려서 그의 장성함을 보지 못하니 그것이 근심일 뿐이오. 내가 죽은 뒤,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니, 만의 하나라도 사설(邪說)이 있거든, 바라건대 제공들은 보살펴 붙들어 주오. 감히 이를 부탁하는 바이오.”
하였다. 이른바 일곱 신하는 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신흠(申欽)ㆍ한준겸(韓浚謙)ㆍ서성(徐渻)ㆍ박동량(朴東亮)ㆍ허성(許筬)이었다.
○ 15일. 삼사(三司)의 고변으로, 임해군 진(珒)을 진도에 안치하는데, 미처 귀양 가기 전에 교동(喬桐)에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무장(武將) 박명현(朴命賢)ㆍ고언백(高彦伯)ㆍ민열도(閔說道)ㆍ양학서(楊學瑞) 등이 임해군과 내통하였다 하여 모두 장살(杖殺)되었고, 종실 서흥군(西興君)ㆍ홍산군(鴻山君)ㆍ수산군(守山君)도 모두 여기에 연루되어 장살되었으며, 이 때문에 죽은 궁중 노비들의 수효도 거의 백 명에 이르렀지만, 그 단서는 잡지 못했다.
○ 금군(禁軍) 김위(金渭)는, 임해군의 궁노(宮奴)가 철퇴와 칼을 싸 가지고 들어가는 상황을 목격하였노라고 소를 올려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켰는데, 그는 그 공으로 송산군(松山君)에 봉해졌다. 이 후로 소를 올려 고변하는 자가 잇따라 생겨났다.
○ 한강(寒岡) 정 선생 구(鄭先生逑)는,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전은의 설[全恩之說] 을 주장하였는데 사론(士論)이 장하게 여겼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영의정으로서 또한 차자를 올려 구명을 호소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좇지 않았다.
○ 7월. 명나라 조정은 도사(都司)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을 보내와서 임해군의 미친병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밝게 조사하였는데, 이때 임해군은 교동에서 배를 타고 서강(西江)으로 오면서 거짓 미친 행동을 하여 그들 차관(差官 명나라 사신)에게 보임으로써 듣는 이들을 슬프게 하였다.
이날 임해군은 즉시 배소로 도로 돌아갔으며, 삼공(三公)은 왕대비의 명으로 백관들을 거느리고 차관에게 글을 올려 임해는 왕통을 이어 받을 수 없다는 사리를 극력 진술하였으며, 성균관 유생 신득연(申得淵) 등과 장안 백성 고덕창(高德昌) 등도 교외(郊外)에서 글을 올렸다. 이는 대개 임해군이 젊을 적부터 소행이 어그러져서 크게 인심을 잃은 탓이었다. 때문에 조야에서는 광해가 왕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오히려 두려워했었는데, 막상 광해가 즉위하니 포학무도하여 그 근심됨이 임해보다 더 심하였다. 선조가 폐립할 뜻을 두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식을 알기로는 아버지가 제일이란 교훈이 참으로 격언이다. 임해군은 위리 안치된 지 1년이 채 못 되어 별장 이정표(李廷彪)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겨울에 보인 별시(別試)에, 박자흥(朴自興)ㆍ조길(曹佶)ㆍ허요(許窑)가 급제하고, 변헌(卞獻) 또한 급제하였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이는 이르기를,
“문중(門中)ㆍ동내(洞內)ㆍ혼가(婚家)의 경사 자리인데, 산승(山僧)은 또 어찌해서 그 사이에 끼었는고.”
하여, 한때 그 말이 성행되어 잠을 막는 이야기거리로 되었다. 이는 곧 박승종(朴承宗)ㆍ이이첨ㆍ정조(鄭造)ㆍ허균(許筠)ㆍ조탁(曺倬)등이 시관이 되어 급제시킨 것이니, 박자흥(朴自興)은 박승종의 아들, 이이첨의 사위, 정조의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허요는 허균의 조카요, 조길은 조탁의 아우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허균은 사정을 썼다고 승복하여 함열(咸悅 지금의 전북 익산군 함열면)에 유배되고, 허요는 삭과(削科)되었다. 까닭에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의 호)는 허균을 전별하는 시에서,
가령 과거에 사정을 썼다 하여도 / 假令科第用私情
아들ㆍ사위ㆍ동생보다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
유독 허균만이 그 죄를 받으니 / 獨使許筠當此罪
세간에서 공정한 길이란 과연 행키 어려워라 / 世間公道果難行
하였다. 변헌은 또한 승려로서 환속한 사람인데, 대간에서 아뢰어 삭과하였으니, 매우 우습다.
○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 좌찬성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에게 왕자(王子 봉성군 완(鳳城君岏))를 죽이고 창기에 빠진 과실이 있다고 극구 헐뜯었다. 성균관 유생 이목(李楘) 등 5백여 인은 소를 올려 양현(兩賢)을 구해(救解)하는 한편, 인홍이 양현을 무함한 죄를 진술하였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소두(疏頭) 최유연(崔有淵)ㆍ이민구(李敏求)ㆍ한필기(韓必起) 3인을 금고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재임(齋任) 등 5명을 비롯한 모든 유생들이 모조리 성균관을 비우고 가버렸다. 이때 성균관 지사(知事)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은, 유생들을 돈유하라는 명을 받고 성균관에 와서 절구 한 수를 읊조리기를,
거문고 소리 끊어진 독서재 에는 / 絃歌聲斷讀書齋
저녁나절 새 파람만 옛 거리에 메아리 지네 / 向晩東風響古街
보슬비 한 뜰에 방초는 우거지는데 / 微雨一庭芳草合
석양에 말없이 빈 뜰을 내려 오네 / 夕陽無語下空階
하였다. 이때 지평 박여량(朴汝樑)이 그의 스승 정인홍을 위하여 몹시 그 도(道)를 찬양하고 양현을 헐뜯었다. 좌의정으로 있던 오성부원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올린 차자에서,
“조식(曹植)의 문하에 인홍이 없었던들 도가 더욱 높았을 것이고, 인홍의 악함은 여량을 얻어서 죄가 더욱 깊다.”
하였는데, 한때의 명언이 되었다.
○ 임자년(1612, 광해군 4) 2월. 황해도 역적 김세제(金世濟) 일명 경립(敬立)이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의 꾀임으로 김직재(金直哉)와 더불어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 김직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가 된 사람으로, 임진년 난리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적에게 포로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적에 의해 삶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서도 얼굴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여 사판(仕版)에 끼이지 못한 지가 오래였다. 사대부치고 누가 김직재와 더불어 역적을 공모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참판 윤안성(尹安性) 부자와 사인(舍人) 정호선(丁好善) 형제들이 다 여기에 연루되어 같은 날 하옥되고, 그 외 평소 자기와 감정이 있는 자를 많이 끌어들였으므로 여러 날 구속되었다. 윤안성ㆍ정호선 등은 석방되었으나 양원(梁榞)ㆍ이호양(李好讓)ㆍ신열(申悅)ㆍ광산령(光山令) 등 수십 인은 그 이름이 김백함(金伯諴)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므로 모두 멀리 변방에 유배되었다.
○ 신율은 오히려 옥사가 차차 누그러질까를 겁내어서 유팽석(柳彭石)이란 자를 매수하여 주육을 듬뿍 먹이고 잡아매어 왕옥(王獄)으로 보내면서 신황(信黃)을 잊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른바 신황이란 자는 신천(信川)에서 귀양 사는 승지 황혁(黃赫)을 말한다. 유팽석은 상경하자 곧바로 황혁의 이름을 들어 모역의 괴수로 만들었으므로, 황혁은 그의 손자 황상(黃裳)과 첩의 소생 황곤건(黃坤健)과 함께 모진 신문을 받고 죽었다.
○ 그의 첩 전춘앵(囀春鶯)은 해주 기생이었다. 그는 노비 수십 식구와 함께 주인의 억울한 사정을 샅샅이 진술하였으나 그 진술이 무분별하여 죽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편지 왕복을 하였다 하여 조수륜(趙守倫) 선생은 신문을 받다가 죽고, 정자(正字) 이덕수(李德洙)는 이산(理山)으로 정배되었으며, 권석주(權石洲) 또한 시안(詩案)이 죄가 되어 곤장을 맞고 정배되었는데, 겨우 동대문을 나서다가 죽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궁궐 버들 짙푸르매 꾀꼬리 이리저리 날고 / 宮柳靑靑鶯亂飛
온 성안 오얏 꽃ㆍ복사꽃 봄볕에 아양 떠네 / 滿城桃李媚春暉
온 조정은 모두 태평세월 구가하는데 / 朝家共賀昇平樂
뉘라서 바른 말이 포의에서 나오게 하였나 / 誰遣危言出布衣
○ 포의(布衣)는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인데, 그는 전시(殿試)의 대책문(對策文)에서 시국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 말이 광해의 비위를 많이 상하게 하였으므로 이에 노한 광해는 곧 그의 이름을 방(榜) 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양사와 삼공이 번갈아 차자를 올리므로 비로소 복과(復科)되었다.
○ 유팽석은 역모에 참여하여 알았다는 이유로 역시 신문을 면치 못하게 되자, 그는 마음에 깊이 뉘우치면서 말하기를,
“신율이 나를 그르쳤구나.”
하였다. 결국 그는 매를 맞아 죽었을 뿐 아니라, 형(刑)이 사후에 뒤쫓아 시행되었다. ‘이상하도다. 가벼이 간악한 사람의 달콤한 말을 믿다가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자신이 빠지게 되면서도 깨닫지 못한 자’라는 말은 바로 팽석을 두고 한 것이다.
○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의 침실 뒷벽에, ‘차군만리행(嗟君萬里行)’이란 구절이 완연히 쓰여 있었다. 자획으로 봐서 한 집안 사람의 글씨도 아니며, 그렇다고 바깥사람의 손이 미칠 곳도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광해군이 외딴 섬에 안치되게 된 것은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이이첨의 집에서 빚은 술이 변하여 피가 되었다는 설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게 전해졌다. 이 역시 멸족의 화를 당할 조짐이 벌써 10여 년 전에 미리 보인 것이리라.
○ 계축년(1613, 광해군 5) 4월 28일. 사형수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은 이이첨의 꾀에서 비롯되었다. 응서란 자는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서자로서, 서양갑(徐羊甲)ㆍ심우영(沈友英)ㆍ허홍인(許弘仁)ㆍ유인발(柳仁發)ㆍ박치의(朴致毅)ㆍ이경준(李耕俊) 등과 뜻이 합하여 사생을 같이할 벗을 맺었다. 그들은 모두 이름난 집의 서자들로 문예까지 곁들였는데 혹 선학(禪學)에 몰두하기도 하고 때론 병서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소 오가면서 교분을 둔 자들은 곧 허균ㆍ이재영(李再榮)ㆍ이사호(李士浩) 등의 유였다.
○ 무신년(1608) 봄. 서양갑ㆍ심우영 등은 이경준ㆍ김경손(金慶孫) 등과 연명으로 소를 올려 벼슬길을 터주기를 바랐으나 시행이 되지 않자, 앙심을 품고 돌아가 여강(驪江 한강 상류)에다 토굴을 파고 한집에서 살 계획을 하였으며, 기린도(麒麟島 황해도 옹진(瓮津)에 있는 섬)에 곡식을 쌓아 후일의 관군을 대피할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혹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본뜨기도 했는데, 그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 계축년(1613) 봄. 장사꾼 하나가 동래(東萊)에 가서 은(銀)을 무역하여 서울로 올라오다가 조령(鳥嶺)에서 피살되었다. 그 은장수의 종 춘상(春祥)이 뒤를 밟아 여주(驪州)까지 달려와서 드디어 도적들의 거처를 밝혀내고 곧 포도청에 이를 보고하여 비밀리에 체포하고 보니 바로 박응서였다.
○ 광창군(廣昌君) 이이첨은 영창대군이 늘 대비 곁에 있는 것을 매우 못 마땅히 여겨 온갖 간사한 꾀를 내서 대군을 죽이고자 하는 판에 응서의 죄가 참형에 해당함을 듣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먼저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의 집으로 찾아가 허리 굽혀 절하니, 희길은 이를 피하고 감히 받지 못하면서,
“알 수 없습니다. 영감께서 저에게 절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였다. 이첨은 말하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복상(福相)이 많소. 오래지 않아 반드시 큰 공훈을 세울 것이니 지극히 축하할 만하오.”
하였다. 그리고 밤에 일가인 이의숭(李義崇)을 다시 포도청에 보내어 가만히 응서를 꾀어서 말하기를,
“너의 죄는 참형에 해당한다. 그냥 죽기보다는 차라리 내 말대로 소를 올려 고변하는 것이 어떠냐? 영창(永昌) 추대를 그 종지로 만들고 또 평소에 절친했던 사람과 무사들 중 쟁쟁한 사람들을 끌어넣어 그 일을 사실화시킨다면 비단 죽음만 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훈(正勳) 또한 기록될 것이다.”
하니, 응서는 살 길을 얻었노라 기뻐하며 옥중에서 글을 올리되, 이첨의 지시대로 따랐다.
또 이응준(李應俊)을 끌어넣어 격문을 만들었다 하고, 김경손(金慶孫)ㆍ김평손(金平孫)은 격문을 전하노라 하였다. 그 격문에, ‘참 용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니 가짜 여우가 먼저 우는구나[眞龍未起 假狐先鳴]’라는 말이 있는데, 참용은 영창을 가리키고 가짜 여우는 광해를 뜻한 것이라 한다.
○ 서양갑ㆍ심우영ㆍ유인발ㆍ이경준ㆍ김경손 등은 투옥되고, 박치의ㆍ허홍인은 도망하였는데 수일 뒤에 허홍인은 이양백(李養伯)에게 붙들렸고, 박치의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허홍인ㆍ심우영 등이 잇따라 처형되었다. 서양갑은 자기의 어머니가 모진 매를 맞는 것을 보자, 흥분하여 소리를 치기를,
“전하에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의를 내세워 적(賊)을 친 것이거늘, 어찌해서 반역이라 하옵니까?”
하고는, 부왕을 시역한 것, 형을 죽인 것, 손윗사람을 간음한 것 등을 들어 큰소리로 뜰에서 외쳤다. 사관들은 차마 이것을 사책에 쓰지 못했다고 한다.
○ 5월 초 6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ㆍ안악군수(安岳郡守) 김래(金琜)ㆍ진사 김규(金珪)ㆍ현감 심정세(沈挺世)ㆍ동자(童子) 김선(金瑄) 등이 모조리 하옥되고, 16일 종성 판관(鍾城判官) 정협(鄭俠)의 진술로 걸려든 신상촌(申象村 흠(欽))ㆍ이월사(李月沙 정귀(廷龜))ㆍ김선원(金仙源 상용(尙容))ㆍ한청평(韓淸平 응인(應寅))ㆍ황회원(黃檜原 신(愼))ㆍ한서평(韓西平 준겸(浚謙))ㆍ판서 서성(徐渻)ㆍ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ㆍ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ㆍ최 영흥 기남(崔永興起南 영흥은 영흥 부사를 말함)ㆍ김상준(金尙寯)ㆍ안창(安昶)ㆍ조희일(趙希逸)ㆍ조위한(趙緯漢)ㆍ한시일(韓時一) 등이 서소문 바깥에서 심문을 당하니, 곡성이 하늘에 진동하고 기상이 처참하였다.
오성(鰲城 이항복)은 이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정협을 천거하여 종성 판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스스로 미안하게 여겨 사직을 고하였으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영의정으로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편전 앞문에 엎드려 영창을 죽이자고 청하였다. 영창의 나이 그때 겨우 아홉 살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으니, 어찌 당을 지어 반역할 리가 있겠는가? 한음의 덕망은 조야가 모두 머리 숙여 왔었는데, 이날의 처사는 중론이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 고변이 있은 처음에 대관 중에서 맨 먼저 영창을 죄주자고 청한 자는 장령 정호관(丁好寬)이며, 폐모(廢母)를 청한 이는 장령 정조(鄭造)ㆍ윤인(尹訒)이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으로 폐모를 청한 이는 진사 이위경(李偉卿)인데, 이위경의 소하(疏下)로는 성하연(成夏衍)ㆍ채겸길(蔡謙吉) 등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진사 어몽렴(魚夢濂)ㆍ박자응(朴自?) 등과 명륜당에서 서로 힐난하다가 위경 등은 박자응에게 내쫓기어 혜민서에 소청(疏廳)을 차리고 영창대군과 김제남의 죄부터 청한 다음 대비 폐위에까지 언급하였다.
그리고 박자응 등은 성균관을 점거하여 어몽렴을 소두(疏頭)로 삼고 소를 썼는데, 화의 근본을 제거할 것을 주 내용으로 하였다. 이는 곧 영창대군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김제남도 죽여야 함을 가리킨 말이었다.
○ 이때 서인(西人)으로 불리는 자들은 칠신(七臣)이 구금된 이래로 조정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으며, 남인들은 다만 그 성패를 좌시할 뿐이었다.
한편 대북(大北)은 이이첨이 정조ㆍ윤인ㆍ한찬남(佷纘男) 등과 더불어 원흉인 정인홍을 방패로 삼고, 광해의 사랑을 독차지한 김 상궁(金尙宮)과 결탁, 그를 심복으로 만들어 광해군을 미혹시킨 뒤에 전적으로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당을 많이 만들어 요직에 배치하게 되자, 마을에서 부형을 배반하고 벼슬을 바라는 자들이 날마다 그 문으로 운집하였다. 그들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의 처형과 모후(母后)의 폐출론을 들어 다투어 소장을 올리고 초야의 공론이라 하였다. 이것은 모두가 이이첨과 허균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다.
○ 소북(小北)인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초방(椒房 후비의 궁전)의 지친으로 앞뒤에서 한편이 되어 상대와 맞서는 태세를 이루었는데, 희분은 폐중궁(廢中宮 광해비)의 오라비요, 승종은 세자빈(世子嬪)의 할아비로서 그 세력은 이첨과 좋은 적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창(三昌)이라 불렀으니 즉, 이첨은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이요, 승종은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이요, 희분은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빈의 아비 박자흥(朴自興)도 이첨의 사위였다. 세자빈의 아비와 할아비로서 조정을 제맘대로 움직이는 터였지만, 형상을 숨기고 남을 넘어뜨리는 이이첨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이첨도 군상과의 관련을 굳게 함이 저렇듯 오로지 하였지만, 또한 그들의 사이를 동요하기는 어려웠다. 이첨의 간악 혹독함과 유희분ㆍ박승종의 탐심은 다같이 방자하기 형언할 수 없지만, 유와 박의 재주는 이첨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첨의 재주는 악한 짓을 하는 데는 가장 잘하였다.
○ 박승종이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폐모하자는 의논을 심히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조직(趙溭) 등이 상소하여 모후(母后)를 구원하다가 오랫동안 갇히게 되었다. 승종이 그들을 백방으로 보호하여 끝까지 심문한 적이 없고 보면, 또한 희분의 유는 아니다. 그런데 그 후 박홍구(朴弘耈)가 재판관이 되자 아뢰어 조직을 심문하였다. 광해군은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창덕궁으로 옮겼고 대비는 그대로 서궁(西宮)에 있었다. 그러므로 폐모론이 일어나자 대비전이라 부르지 않고 서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정에 벼슬하는 자들은 모두 대비에게 사은숙배의 예를 오히려 폐지하지 않았는데, 정사년(1617) 겨울, 희분이 병조 판서가 되어 서궁에 숙배하지 않았다. 자전(慈殿)에게 숙배의 예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희분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폐비하자는 의논을 모아 정청(庭請)한 것도 희분이 부임한 지 5~6일 후였다.
○ 대북 사람들은 그때까지 박승종이 다른 의론을 내세울까 두려워 몇 년간 정청을 발의하지 못하다가 희분의 한 번 거취에 결정되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에 이론이 발의되자,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북청(北靑)에 유배되고, 영의정 기자헌은 애초에 유배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배소에 가지 않았다. 전 승지 정홍익(鄭弘翼)은 종성에 유배되고, 전 목사 이신의(李愼儀)는 회령에 유배되었다. 정언 김덕함(金德諴)은 온성에 유배되고, 정자 김지수(金知粹)는 경원에 유배되었다.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이는 판중추부사 윤방(尹昉)ㆍ전 판서 김상용(金尙容)ㆍ참판 오백령(吳百齡)ㆍ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권(金權)ㆍ동지 오윤겸(吳允謙)ㆍ첨지 이경직(李景稷)ㆍ정랑 박자응(朴自凝) 등이었다.
○ 계축년(1513, 광해군 5) 가을, 유학(幼學) 조경기(趙景起)는 정조ㆍ윤인을 베어서 인륜과 기강을 바로잡기를 청하였고, 갑인년 2월, 사직(司直) 정온(鄭蘊)은 소를 올려, 대비에게 효도할 것, 영창의 호를 추복(追復)할 것, 정조ㆍ윤인ㆍ정호관을 국경 밖으로 추방할 것, 정항(鄭沆)을 효수하여 국민에게 사죄할 것 등을 청하였다.
○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 유생 정복형(鄭復亨)ㆍ권심(權淰)ㆍ이안진(李安眞) 등이 잇달아 소를 올려 정조ㆍ윤인의 폐모하기를 주장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광해는 분연히 말하기를,
“정조ㆍ윤인 등이 가벼이 대론(大論)을 발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시끄러운 싸움터로 만들었으니, 삭직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러다가 갑인년 겨울, 다시 특명을 내려 정조ㆍ윤인의 관직을 회복시켜 경연에 두게 하였다. 그러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차자를 올려,
“정조와 윤인을 대간에 복귀시킨 것은 곧 모후를 폐출할 조짐이라고 바깥 의논이 자자합니다.”
하였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곧 사관을 보내어 완평부원군에게 힐문하기를,
“이 말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말일 것이오. 임금을 섬기는 데 속이지 않는 것이 대신의 직분이니, 경은 사실대로 대답하오.”
하였다. 완평부원군은, 길에서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광해는 세 차례나 사관을 보내어 반복 힐문하였지만, 완평부원군은 끝내 길에서 흘려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양사(兩司)는 이원익이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서 임금의 악을 수창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이내 여강(驪江)으로 추방하였으며, 또 남이공(南以恭)을 전에 이원익이 체찰사로 있을 때 종사(從事)로서 그의 집에 왕래하면서 조정을 비방하였다 하여, 변방에 유배하기를 청하였다.
○ 을묘년(1615) 3월, 진사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은 각기 유생 30여인을 거느리고 잇따라 소장을 올려 정조와 윤인을 죄주기를 청하고 이원익을 구원하다가 무적은 거제에, 택뢰는 남해에, 효성은 진도에 각각 유배되었다.
○ 정미년(1607) 겨울, 선조대왕의 옥후가 편치 못할 때이다. 궁중에 드나드는 무녀(巫女)가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비 박씨)의 혼이 옥체에 빌미가 되었다 하여, 궁중에서 유릉(裕陵)으로 사람을 보내어 재앙을 물리치게 한다는 말이 바깥으로 번져 나왔다. 박동량(朴東亮)은 곧 의인왕후와 종남매 간이므로 이 말을 듣자, 김제남이 이를 금지하지 못한다고 통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 말이 원정(元情) 중에 미치게 되어 이로 말미암아 양궁(兩宮) 저주의 옥사가 크게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궁녀들 중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던 향이(香伊)ㆍ환이(環伊) 등 4~5인이 사사되고 장님무당 고성(高城)에게도 또한 형이 내려졌다.
○ 김응벽(金應璧)의 공초에 ‘목릉(穆陵 선조능)에도 저주한 곳이 있으니 파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 윤중삼(尹重三)과 선공제조 송순(宋諄)을 파견하여 응벽을 감독해서 능을 파게 했는데, 현궁(玄宮)까지 거의 파 들어가자 응벽은 다시, 저주가 이 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릉(成陵 성묘(成墓)즉 광해 어머니 능)에 있다고 하였다. 다시 즉 성릉 으로 가게 하였는데, 수레가 거의 동네 어귀에 이르자 갑자기 자살하였다. 사실 응벽의 생각은 두 능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키자는 것이었는데, 광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흉적의 속임수에 빠져 능침에 욕을 끼치고 선조의 영령을 놀라게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을묘년(1615, 광해군 7) 여름, 유학 조직(趙溭)은 소를 올려, 주상과 대비가 양궁에 따로 있는 것이 옳지 못함을 극력 진술하였다. 그 소 가운데, '천일(天日)을 격리했다. 모후를 유폐했다. 적막한 궁에서 귀신과 더불어 이웃 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승정원에서 조직을 불러들여 묻기를,
“전부터 양궁에 따로 거처한 것은 유독 오늘만이 아니거늘 네가 '유폐'란 말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니, 조직은 대답하기를,
“옛적에 따로 거처한 것은 또한 오늘과 같은 거조가 있어서 그러했습니까?”
하였다. 조직은 곧 구금되어 신문을 당하다가 멀리 외딴섬에 유배되었다.
○ 한음(漢陰)이 계축년에 올린 차자에서 영창대군의 죄를 들어 말한, ‘천천히 방침을 하더라도 어찌 편의한 것이 없으리이까?’라는 것은 명백하지 못한 것 같고 차자의 내용도 긴요한 말이 없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폐비 때 수의(收議) 중에서 명백하고 정대(正大)하기로는 오성(鰲城 이항복)이 첫째요, 그 다음은 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이었다.
○ 이이첨은 유희분과 박승종을 몹시 꺼려 그들을 넘어뜨릴 음모를 생각함에 극단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 교리 정문익(鄭文翼)은 유희분과 박승종의 심복으로 해주에 있었으므로, 한찬남은 허균과 꾀를 통하여 봉수(烽燧)의 부정을 적발한다고 칭탁한 뒤에, 선전관 유세증(兪世曾)을 해주에 파견, 무뢰한들을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주에 고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 책자를 바쳤는데, 정문익의 이름이 첫줄에 쓰여 있고, 무신 김흠(金欽)ㆍ김선(金瑄) 등 4~5인과 서울에 있는 조사(朝士)들의 이름이 많이 적혀 있었다.
이때 해주 목사 최기(崔沂)는 그 내력을 환히 알았으므로,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고변자를 장살(杖殺)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졌다. 한찬남은 최기가 고변자를 죽여서 그 흔적을 없앴다 하여, 그를 의금부로 잡아다가 역적죄를 적용, 장살한 다음 사후에 전형(典刑)을 추시(追施)하였다. 그리고 최기의 아들 최유석(崔有石)과 조카 최유함(崔有涵)ㆍ최유영(崔有泳)은 다 극형을 받았으며, 사위 유찬(柳燦)은 옥중에서 죽고, 외손과 친속들은 변방으로 정배되었다. 또 정문익은 외딴섬으로 유배되고, 해주 사람 김흠 등 수십 인도 죽거나 아니면 유배되었다. 이연평(李延平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과 김창일(金昌一)은 최기가 붙들려 올 때 길 옆에 나와 보았다고 하여, 중도 부처되었으며, 유찬의 아들 유시영(柳時榮)과 유찬의 동서 윤훈거(尹勛擧)도 다 장류(杖流)되었다. 최유석의 아내 이씨는 곧 한음의 손녀로, 남편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다가 약을 마시고 자결하니 사람들은 모두 불쌍히 여겼다.
○ 허균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아들로, 명문에 태어났고 또 그의 문장은 당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천성이 요망하고 행실 또한 괴이하였다. 상(喪)을 입는 동안에 기생을 가까이 하는가 하면 참선도 하고 부처도 섬기는 등 보고 들어서 깜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만년에 대북에 투신하여 이이첨을 깍듯이 섬겨 폐모론을 담당하였다. 그는 괴상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낙천군(洛川君) 김개(金闓)ㆍ사간 신광업(辛光業) 등으로 심복을 삼았는데, 그 종적이 간교하고 비밀스러워서 단서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형에게 죄를 지어 향당(鄕黨)에서 용납되지 않는 하인준(河仁俊)ㆍ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ㆍ서상안(徐尙顔)ㆍ남정엽(南正燁) 같은 자들이 그의 문으로 폭주하여 열 명씩 백 명씩 떼를 지어 다투어 소장을 올려 폐모하기를 주청하였다. 혹 성균관에 근거를 두어 출세의 디딤돌을 삼기도 하고, 미리 과거 제목을 내서 급제의 길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살에 편지를 묶어 서궁에 쏜 것은 극히 요괴하였으며, 방(榜)을 걸어 남문에 통유한 것은 더욱 참혹하였다.
○ 무오년(1618, 광해군 10) 8월이 되자, 도성이 떠들썩하고 조야가 시끄러워졌다. 내란이 조석 간에 일어난다면서, 이고 진 행렬이 밤낮으로 잇따르고, 달리는 말과 수레는 거리를 메꾸었다. 그 비참한 정경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 장령 한명욱(韓明勖)은 계를 올려, 남문에 방(榜)을 건 것은 필시 하인준이므로 이 자를 엄중히 국문한다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인준을 국문하니, 그는 허균이 잘 안다고 끌어들였다. 허균을 국문하자, 그는 일일이 진술했는데, 곧 폐비를 칭탁하여 궐내를 범하자는 역모였다. 그리하여 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도 모두 처형되고 김개는 결국 장살되었다. 광해가 망하기 전에 이 무리들이 먼저 처형 되도 매우 통쾌한 일이다. 신광업(辛光業)은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반정 초에 처형되었다.
○ 광해는 음란하고 포학한 것이 날로 심하여져서 널리 후궁을 선발하였으니, 허 숙의(許淑儀)는 부사 허경(許儆)의 딸이요, 윤 숙의는 현감 윤홍업(尹弘業)의 딸이요, 홍 숙의는 군수 홍매(洪邁)의 딸이요, 원 숙의는 수사(水使) 원수신(元守身)의 딸이요, 임 숙원(任淑媛)은 임몽정(任蒙正)의 첩의 딸이요, 정 숙원은 정지한(鄭之罕)의 누이동생이요, 김 상궁은 천한 노비의 딸이요, 이 상궁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 첫 벼슬을 시도하는 음관(蔭官)이나 변장(邊將)ㆍ변수(邊守)를 희망하는 무신이나 감사 또는 수령을 제수 받으려는 문사들은, 남몰래 궁중의 하인을 통하여 다투어 뇌물을 바치었다. 때문에 숙의의 친정집과 상궁의 일가붙이들은 권세가 혁혁하여 문 앞이 항상 붐비었다. 비단 함부로 벼슬자리를 노리는 자와 죽을죄가 면제되기를 바라는 자들만이 달려가서 빌붙는 것이 아니라, 상전을 배반한 노비, 묵은 빚을 받으려는 자들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평소 이익을 탐내는 몰염치한 자들은 부귀공명을 누리게 되고, 예의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는 몸을 끌고 용감히 물러났다.
○ 광해군 역시 관직을 제수할 때에 바치는 은이 많고 적음을 봐서 그 품계를 높이고 낮추었다. 또 인경궁(仁慶宮)ㆍ경덕궁(景德宮)을 짓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여 담장을 넓히었고, 산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거대한 뗏목이 강에 잇따랐다. 세금을 한정이 없이 징수하여 민력이 고갈되었고, 장정을 자주 징발하는 바람에 중들이 성 안에 가득했다. 이때에 터를 바치거나 돌을 바치거나 은을 바치거나 목재를 바치거나 혹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거나 혹 숯을 태워 쇠를 불리거나 한 자들은 다 이마에 옥관자(玉貫子)를 붙이는 반열에 서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오행당상(五行堂上)’이라 불렀다. 이충(李沖)은 여러 가지 채소를 헌납하여 호조 판서에 오르고, 한효순(韓孝純)은 산삼을 바치고 갑자기 정승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산삼 각로를 사람들은 다투어 흠모하고 / 山蔘閣老人爭慕
잡채 상서는 세력을 당할 수 없네 / 雜菜尙書勢莫當
○ 식년(式年)에 실시하는 강경과(講經科)를 보면 응시하는 자들이 서서 삼경 중에서 각각 한 대문씩을 미리 외어서 과거 때 배강(背講)하므로 통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대북(大北)의 자제라면 글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다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일곱 대문을 통하는데 원하는 대로 해준다.[七大文通從自願]’라는 말이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다.
○ 누군가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양근 군수(楊根郡守) 이재영(李再榮)의 대작으로 급제하자, 어떤 이는 시를 이렇게 썼다.
양근 태수 불이 나게 드나들더니 / 揚根太守往來忙
감사댁에 경사 났네 / 方伯家中慶事昌
○ 김충보(金忠輔)는 초명이 김유영(金有永)인데, 그는 최희남(崔希男)의 배반한 종으로 성병사(成兵使)의 계집종 은종(銀從)의 남편이다. 그는 유희분을 배알하고 각 집의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여 그 이익을 유희분과 나눠 먹었다. 유희분은 그 사람됨을 착하게 여겨 그를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천거하였는데 일자무식이라 하여, 순검사(巡檢使) 권반(權盼)에게 내침을 당하였다. 유희분은 은을 상납하게 하여 통정대부로 승진, 장기 현감(長鬐縣監)에 제배하였다.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옮겨 조도사(調度使)를 겸한 그는, 여러 읍을 순력하면서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아 궁궐 건축비로 보조하는 한편, 그 나머지는 유희분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몹시 기뻐하여 가선대부로 포상하였다.
은종(銀從)의 아비 언종(彦從)의 묘가 군위(軍威) 땅에 있는데, 김충보가 군위에 도착하여 본현(本縣)을 시켜 요전상(澆奠床 산소에 차리어 놓는 제물)을 갖추어 그 묘에 제사하게 하였다. 향소(鄕所) 이종가(李從可)는 제물을 가지고 가서 묘 밑에 앉아 탄식하기를,
“세상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언종은 사사노비인데, 내 사족(士族)의 자식으로서 언종의 제물 감독관이 될 줄이야 예전엔 미처 생각도 못하였다.”
하고 씁쓸해 하였다. 이 또한 젊은이들에게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겠기에 여기에 기록한다.
○ 양주(楊州) 대탄(大灘) 근처에 나이 스무 살이 지나도록 장가를 못 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논밭과 노비를 팔아 조도령(調度令)에게 베를 바치고 통정대부 직첩 한 장을 샀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일러 ‘도령님 첨지[都令主僉知]’라 불렀다.
또 경상도 진해에 처녀 한 사람은, 부모가 다 돌아가자 그 유산을 물려받아 비단과 베를 많이 쌓아 두고 있었는데, 조도사(調度使)가 강제로 처녀에게 숙부인(淑夫人) 직첩을 받게 한 뒤 그의 비단과 베를 빼앗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아기씨 부인[阿只氏夫人]’이라 불렀다. 세상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겠다.
○ 정몽필(鄭夢弼)은 이조의 서리 정애남(鄭愛男)의 조카로, 몰래 김 상궁과 통하여 늘 궐내에 있으면서 사람 죽이고 살리기를 하고픈 대로 하였으며, 수령과 변장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사간 조경 일장(趙絅日章 일장은 조경의 자임)의 종이 주인을 배반하고 정몽필의 집에 들어간 뒤, 주인이 되찾을까 염려하여 백단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정몽필은 곧 포도청에 부탁하여 군졸을 풀어 일장을 체포, 변소에 감금하고 그를 윽박질러 문권(文券)을 만들어 바치게 한 뒤에 놓아 집으로 돌려보냈다. 반정 뒤에 그는 종루(鐘樓)에서 효수되었다.
○ 노적(奴賊)은 곧 건주위(建州衛 만주에 있는 여진족의 근거지)이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봄, 적의 세력은 치열하고, 병마 또한 정예하였다. 그들은 중원을 가리켜 남조(南朝)라 부르는 등 말씨가 매우 불손하여 장차 함부로 날뛸 조짐이 있었다. 이에 천자는 진노하여 양호(楊鎬)를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로 삼고 이여송(李如松)을 총병(摠兵)으로 삼는 한편, 특히 도독 유정(劉綎)을 보내서 10만 군대를 조발하고 또 우리나라에 명해서 건주(建州)를 협공하게 하여 적의 섬멸을 함께 약속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았다. 그들은 병졸 2만을 거느리고 행군, 우모령(牛毛嶺) 산채에 도착하자, 유정의 10만 병졸은 적에게 대패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교 유격(喬游擊)은 목을 매어 죽었다. 군병들은 서로 짓밟아 시체는 1백여 리에 깔렸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장수와 졸병을 친히 거느리고 무장을 푼 다음 적에게 투항하였다.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는 좌영장(左營將)으로서, 대장의 항복을 보고 그 분함을 이기지 못했는데 심하(深河)에 이르러 버드나무를 의지하고 화살을 뽑아 적 8~9명을 연달아 쏘아 죽였다. 화살이 떨어지자, 그는 칼을 휘둘러 적을 베다가 칼이 부러지니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 노적(奴賊)은 그 나무를 불러 ‘장군류(將軍柳)’라고 하였다.
○ 신유년(1621) 겨울,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처음 유격 장군이 되어 임반(林畔)ㆍ용천(龍川) 등지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노적 수천 기(騎)는 얼음을 이용, 압록강을 건너와 밤중에 모 도독의 진영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유격 장군 모문룡은 말을 타고 달아나고 한군(漢軍) 천여 명은 거의 다 죽어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민들은 한 사람도 노략질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대개 광해군이 비밀히 강홍립에게 분부하여 노적에게 투항하게 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그 후 모문룡은 가도(椵島)에 들어가 자리 잡고 대장기를 세워 대중을 불러 모았으며, 요동 백성을 불러들여 시장을 넓혔다. 군량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져갔고 물자는 중국에 의지했다. 그리하여 변방을 진압한 혁혁한 큰 공은 없었지만, 때때로 병력을 과시한 조그만 공로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게 보고함에 이르러서는 사실보다 지나치게 과장함으로써 일약 도독의 지위로 뛰어올라, 분수에 넘치는 개부(開府)의 높은 대접을 받았다. 10년의 영달과 부귀가 하루아침에 원통하게 죽고 마니, 아! 애석하고 애석하다. 그는 원숭환(袁崇煥)에게 참살되었고 원숭환 또한 뒤에 환관에게 피살되었다 한다.
○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은 부득이한 거사였다. 광해는 악행이 상주(商紂)보다 심하고 죄는 양광(楊廣)보다 많았으니, 진실로 할 만한 세력만 있다면 누구나 베는 것이 옳았다.
거의 공신(擧義功臣) 1등은, 김유(金瑬)ㆍ이서(李曙)ㆍ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ㆍ김자점(金自點)ㆍ이귀(李貴)ㆍ심기원(沈器遠)ㆍ심명세(沈命世)ㆍ최명길(崔鳴吉)이요, 2등에는 이시백(李時白)ㆍ장유(張維)ㆍ이시방(李時昉)ㆍ김경징(金慶徵)ㆍ심기성(沈器成)ㆍ원두표(元斗杓)ㆍ이해(李澥)ㆍ홍진도(洪振道)ㆍ신경유(申景裕)ㆍ이항(李沆)ㆍ구인후(具仁垕)ㆍ최내길(崔來吉)ㆍ신준(申埈)ㆍ이중로(李重老) 등이며, 3등엔 김연(金鍊)ㆍ이후원(李厚源)ㆍ조흡(趙潝)ㆍ유백증(兪伯曾)ㆍ박정(朴炡)ㆍ유구(柳䪷)ㆍ송영망(宋英望)ㆍ신경식(申景植)ㆍ신해(申垓)ㆍ홍서봉(洪瑞鳳)ㆍ홍진문(洪振文)ㆍ이의배(李義培)ㆍ이원영(李元榮)ㆍ홍효손(洪孝孫)ㆍ한여복(韓汝復)ㆍ이기축(李起築)ㆍ노수원(盧守元)ㆍ이덕부(李德符)ㆍ이사주(李師周) 등이었다.
○ 반정하던 날, 의거하는 장수들이 제각기 무리를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 해는 벌써 황혼인데,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의 군사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그날 믿는 바는 오직 이서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였다. 주상(主上 인조)이 친히 연서관(延曙館)까지 마중을 나가서야 비로소 모두 합세하여 행군할 수가 있었다. 한밤중에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 선봉이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돌격,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곧 장신(張紳)의 장인으로, 일찍이 양(兩) 대장과 더불어 내응하기로 서로 약속됐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졸은 한 사람도 나와서 방어하는 자가 없었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은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반정 군을 맞아들였으며, 제장들은 주상을 받들어 인정전(仁政殿)에 오르게 했다. 궐내에 입직한 관원들은 앞을 다투어 숙배를 드리는데, 보덕 윤지경(尹知敬)만은 천천히 직소(直所)에서 나오더니 어좌 앞에 서서 말하기를,
“거조(擧措)를 알고 난 후에 절하겠소.”
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이는 종묘사직을 위한 계교요.”
라고 말하자, 지경은 급히 절하였다.
도승지 이덕형(李德泂)은 군사들의 손에 붙들려 들어왔는데, 영문을 몰라 숙배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칼로 치려고 하니, 연평(延平)이 그를 붙들며, 말하기를,
“이는 곧 반정이요.”
하자, 덕형은 비로소 꿇어 절하였다. 백관ㆍ상하ㆍ군민들은 다 주상을 받들어 보위(寶位)에 앉게 하였다. 아! ‘연서(延署)’라는 참언(讖言)이 이날에 와서 꼭 들어맞았으니, 만사는 다 미리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인정전에 등극한 후에 광해부자의 있는 곳을 알지 못해, 상하는 모두 허둥대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이윽고 어떤 장사꾼이 와서 광해가 뒷담을 넘어 도망해서 지금 자기 집에 숨어 있다고 보고하는가 하면 또 내관인 배(裴)씨는 와서 폐동궁(廢東宮)이 담을 넘어와서 저의 집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곧 군병을 풀어 궐내로 태워오는 한편 양 대장은 곧 경운궁(慶運宮)으로 달려가, 문무 백관과 상하 군민이 다 성상(인조)을 추대한다는 뜻을 대비 전에 아뢰고, 어보(御寶)를 바쳐 대비의 처분을 기다렸다. 대비는 곧 어보를 성상에게 돌려 종사와 신민의 주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광해의 불충ㆍ불효함과 백성들에게 포악한 죄를 들어 폐하여 광해군으로 삼아 강화도로 내쳐 안치하고, 폐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柳)씨도 함께 위리 안치했으며, 폐세자는 폐빈 박씨와 함께 위리한 후 별장(別將)을 정해서 지키게 하였다. 상은 음식과 의복을 후하게 보내주고 때때로 내사(內使)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하였다.
○ 반정 때, 종사관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은 다 낭관을 제수하고, 김경징(金慶徵) 역시 좌랑을 제수했다. 김원량(金元亮)에게는 사평(司評)을 제수하여 정훈(正勳)에 기록하고 그 나머지 홍제원 집결에 동참한 자들도 유생ㆍ무사를 막론하고 다 6품 이상을 주어 외직 또는 내직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훈공은 별단에 기록하였다.
○ 군문(軍門)에서 행형 한 명단은, 김 상궁(金尙宮)ㆍ박정길(朴鼎吉)ㆍ한찬남(韓纘男)ㆍ백대형(白大珩)ㆍ박홍도(朴弘道)ㆍ정몽필(鄭夢弼)ㆍ강익(姜翼)ㆍ윤천생(尹天生)이고, 정형한 명단은, 이이첨ㆍ이원엽ㆍ박응서ㆍ이홍엽(李弘燁)ㆍ이익엽(李益燁)ㆍ이위경(李偉卿)ㆍ정조ㆍ윤인ㆍ정인홍(鄭仁弘)ㆍ윤유겸(尹惟兼)ㆍ원종(元悰)과 내관 조귀수(趙龜壽)ㆍ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ㆍ유세증(兪世曾)이고, 베기만 한 명단은, 이정원(李廷元)ㆍ유희분ㆍ유희발(柳希發)ㆍ채겸길(蔡謙吉)ㆍ황덕부(黃德符)ㆍ한정국(韓定國)ㆍ한정국(韓正國)ㆍ한안국(韓安國)ㆍ한희(韓暿)ㆍ한오(韓晤)ㆍ윤삼빙(尹三聘)이다.
○ 반정 이튿날 표신(標信)을 보내어 박엽(朴燁)을 평양에서 베고, 정준(鄭遵)을 의주에서 베었다. 정준은 정조의 아우인데 의주 부윤으로서 당시 의주부에 있었기 때문에 오랑캐에게로 달아날까 염려해서 사사(賜死)한 것이며, 박엽은 뇌물을 많이 바침으로 해서 광해의 총애를 받아 평안 감사가 되었는데, 살인하기를 마치 쑥대 베듯 하여 관서 지방의 백성들에게 원한을 맺은 자였다.
이해 정월 보름날 밤에 박엽은 시인 변헌(卞獻) 등과 더불어 법수교(法水橋) 위에서 달 놀이를 하였는데, 술이 얼큰해지자 절구 한 수를 이렇게 읊었다.
평양 감사 한 대이건만 / 一代關西伯
법수교는 천 년이라네 / 千年法水橋
아마도 오늘밤 저 달이 / 只應今夜月
끝내는 가련한 밤이 되리 / 終作可憐宵
시의 애절함이 그의 평소 작품과는 딴판이다. 그의 죽음의 징조가 이미 이 시에서 보여 진다.
○ 각 도에서 작폐(作弊)한 네 조도사(調度使) 김순(金恂)ㆍ김충보(金忠鞴)ㆍ왕명회(王明恢)ㆍ지응곤(池應鯤) 등 4명은 각기 현지에서 효수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씻어 주었다. 박종주(朴宗冑)는 대구에서 참했는데, 그는 대북파의 명사로서 남의 논밭과 노비를 빼앗아 영남 사람들의 원망을 산 자이며, 양호(梁護)는 제주에서 효수하고 그의 재산은 몰수하여 호조에 충당했는데, 그는 목사로서 백성을 착취한 자이다.
○ 13일 밤,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은 탈출 도주하여 양주로 달려갔다.
마침 박안례(朴安禮)가 부사로 있었으므로 자흥은 거기서 군병을 조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반정의 정확한 소식을 듣고는 곧 군사를 해산하고 단기로 도주하여 그의 아버지 박승종과 함께 과천에 있는 어떤 절에서 자결하였다. 그의 옷 속에서 유표(遺表)가 나왔는데, 거기에,
“신 승종 부자가 능히 바로 구원하지 못해서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조정은 곧 그의 일가붙이들을 시켜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염(斂)하여 초빈(草殯)하게 하였다. 박승종 부자는 혼조(昏朝 광해조)와 가까운 사돈으로서, 그 형세가 장차 보전하기 어렵게 되자 하루아침에 자결하였으니 마땅하다 하겠다.
승종의 거리낌 없는 탐욕과 방종은 사람들이 운운하는 바이지만, 염치라곤 도무지 없고 사치와 탐욕이 극에 달한 유희분(柳希奮) 정도까지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 그에게는 사류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고, 폐모론이 진작 결정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보면, 그에게 공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또 그가 반정 소식을 듣고 표(表)를 남긴 뒤 자결한 것은 곧 그의 마음이 죽고 사는 데 그렇게 구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자응(自凝)은 정청 때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소 거처하는 방을 ‘읍백(揖白)’ 백이란 곧 서방(西方)으로, 이는 곧 서궁(西宮)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라 이름 한 자인데 유희분의 아들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박승종의 논밭과 노비는 다 적몰되었으니, 송 태종(宋太宗)이 한통(韓通)을 포증(褒贈)한 전례 로 볼 때 성조(聖朝)에 대한 유감이 없지 않다.
○ 6월 초 3일, 강화도에 위리 안치된 폐 세자가 땅을 파고 울타리 바깥으로 도망쳐 나왔다가 순라군졸에게 발각되었다. 이때 연평군 이귀는 도헌(都憲), 이준(李埈)은 집의, 심기원ㆍ김자점은 지평, 윤황(尹惶)은 사간, 김상(金尙)은 정언으로 있었는데, 연평군과 김자점ㆍ심기원은 법대로 처벌할 것을 주장했고, 윤황ㆍ이준ㆍ김상은 전은(全恩)을 주장했다. 이날 이준은 철원 부사로, 윤황은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김상은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각각 보냈으며, 폐 세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다. 폐빈 박씨는 이보다 먼저 목을 매어 죽었으며, 폐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은 이해 가을 스스로 굶어 죽었다.
폐 세자가 울타리 밖으로 나올 때, 그의 소매 속에서 편지 하나가 나왔는데 이는 곧 황해 감사에게 발송하려는 것이었다. 황해 감사 이명(李溟)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는데, 연평군의 적극적인 구원으로 곧 석방되었다.
○ 홍제원(弘濟院)에서 진영을 짤 때에 멀리서 온 군졸들은 그 대부분이 유생들과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잡탕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못하였다. 이때 역적이 된 이괄(李适)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 아직 왕께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는데, 김명숙(金明叔)의 부름을 받고 군관들을 거느리고 진중으로 나왔다. 대장은 무신 중에 대장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은 이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그를 대장에 추존하고 곧 승상(繩床)에 앉힌 뒤 양 대장 이하 모두 그에게 재배하니, 그때서야 군중은 엄숙한 기율이 서는 듯하였다.
뒤에 반정의 공을 논함에 있어, 이흥립(李興立)을 도감대장(都監大將)으로써 내응(內應)한 공이 많다고 하여, 1등 훈(勳)에 기록, 공조 판서를 제수했는데, 이괄의 이름은 3등 훈에 기록 판윤(判尹)을 제수하였으므로, 그는 마음에 원망을 품고 역모의 뜻을 몰래 쌓아오던 중, 마침 조정은 평안남도 국경을 칠 양으로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에 주둔케 했으며, 이괄로 부원수 겸 평안도 병사를 삼아 영변(寧邊)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정병 2만을 요청하므로, 조정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충청ㆍ경상ㆍ전라의 군사에서 뽑아 보내 주었다. 이때 유몽인(柳夢寅)ㆍ이유림(李有林)ㆍ황현(黃鉉) 등이 모역죄로 처형된 뒤라서 도성 안에는 많은 변괴가 있었기 때문에 도감 장관 중 성안에서 사는 이가 거의 10여 가에 이르렀는데, 대장이 영을 순식간에 각 집에 전달한다면 그것은 곧 군병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하여 인심이 뒤숭숭해서 아무도 그 전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 갑자년(1624, 인조 2) 정월. 문회(文晦)ㆍ우(李祐) 등이 고변하기를, ‘이괄과 그 아들 이전(李荃)은 모역할 기미가 뚜렷이 있다’고 하자, 승평(昇平 김유(金瑬)) 이하는 무고(誣告)로 여기고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연평군만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사실이든 거짓이든 고변이 일단 들어 왔으니, 이괄을 체포하여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은 연평에게 이르기를,
“이괄이 어찌 모역할 리가 있겠느냐? 체포하여 국문하자는 이귀의 계청(啓請)을 나는 괴이쩍게 여긴다.”
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모두 연평의 계청을 그릇된 것으로 여겼는데 문회와 이우 등의 고변이 또한 의심이 없는 듯하므로 금부도사 심대림(沈大臨)과 선전관을 영변(寧邊)에 보내서 이전을 나문(拿問)하게 하였다. 이들이 안주(安州)에 도착하자 그 소식이 벌써 병영에 알려졌다. 이때 이괄은 한명련(韓明璉)명련은 이때 귀성(龜城) 순변사로 있었음 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군병을 일으켜 급히 자산(慈山)으로 출병케 하고, 자기와 합세해서 서울로 들어가려는 계책을 꾸미는 한편, 관하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아문 바깥에서 군병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도사와 선전관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이괄은 이들을 잡아 뜰 안으로 끌어들여 칼로 난도질하여 불 속에 던진 다음, 항복해 온 왜병 수백 명으로 선봉을 삼아 그날로 행군하였다. 이들이 안주(安州)를 거치지 않고 자산 길을 택한 것은 그때 도원수가 기성(箕城)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성(山城)에 진을 친 이들은 한명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별장 유순무(柳舜懋) 등 4인은 각기 수백 명씩 인솔하고 밤을 타 도망하여 곧장 원수부(元帥府)로 가서 죄를 내리기를 기다리니, 원수는 믿어 의심치 않고 전날보다 더 낫게 대해 주었다. 명련이 자산에 이르자, 이괄의 군대는 그 위세를 더욱 떨쳤다. 삼남에서 선발한 군병과 본도의 군병이 모두 이괄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도원수는 군병 없는 장수로서 다만 남이흥(南以興)과 정충신(鄭忠信)이 인솔하는 군병 수천 명만을 이끌고 적진 뒤에서 서서히 행군하여 황해도 경계로 들어왔다. 아군은 신교(薪橋)에서 크게 패하고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에 이르러,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평산 부사 이확(李廓)은 역시 적에게 패했다. 이중로는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확은 쌓인 시체 속에서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적병은 곧장 임진강까지 이르는데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가듯 하였다.
○ 2월 초 8일. 대가(大駕)는 남으로 옮겼으며, 초 10일 적병은 서울에 입성, 경복궁 옛터에 진을 쳤다. 흥안군(興安君)은 일찍이 이괄의 추대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왕을 뒤따르지 않고 뒤에 처져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괄은 군병으로 그 궁을 호위하는 한편 거리에 방을 붙여, 성 안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본업에 종사케 하였으며, 또한 성 안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백관을 배치하여 조정의 형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동안 세력을 잃었던 사람과 무뢰한들이 잇따라 모여들어 그 수조차 알 수 없었다.
○ 11일. 원수(元帥)는 제장들을 독려, 합전함으로써 마지막 승부를 결정하는데, 남병사(南兵使) 이수일(李守一)ㆍ황해 병사 변흡(邊潝)ㆍ안주 목사 정충신(鄭忠信)ㆍ철산 부사(鐵山府使) 민여검(閔汝儉)ㆍ중군(中軍) 남이흥(南以興)ㆍ별장 유효걸(柳孝傑)과 조시준(趙時俊)ㆍ첨사 이경정(李慶貞) 등이 각기 부하를 거느리고 길마봉 위에 결진, 성 안을 굽어보았으며, 종사관 김기종(金起宗)은 여기저기 왕래하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때 이괄은 저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를 칠 때 한 것처럼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적을 섬멸한 뒤에 모여서 밥을 먹자’ 하고, 군사를 내몰아 싸웠다. 그리고 성중 사람들로 하여금 성에 올라 이를 구경하게 하였다. 싸움이 어울린 얼마 뒤 항복한 왜병이 올려보고 쏘는 조총의 화약 연기가 서풍에 날려 자욱한 안개처럼 진중을 가로 덮었다. 그러자 적병들은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질서를 잃고 갈팡질팡 방향을 잡지 못하였다. 이를 틈탄 아군은 용기 백배, 총과 활과 돌을 비 오듯 퍼부으니 적은 이를 지탱하지 못해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 위에서 관전하던 백성들이 성문을 굳세 닫고 소굴을 소탕하니, 이괄은 항복한 왜병과 친신군관(親信軍官) 얼마만을 거느리고 그길로 삼전포(三田浦)를 건너 이천(利川) 꽃고개로 달려갔다. 그는 마을로 들어가 말도 먹이고 밥도 짓다가 그날밤 군관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에게 참수되어 머리는 행재소(行在所)에 전달되었고,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말을 타고 탈주, 오랑캐 땅으로 잠입하였다.
○ 대가(大駕)는 금강을 건너서 공주(公州)에 머물다가 5일 만에 환도하였다. 신경진(申景禛)과 심기원(沈器遠)은 흥안군을 마음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수일 동안 갇혔다가 파직 방송되었다.
○ 당초에 금부도사의 장살(戕殺) 장계가 올라오던 날 밤, 그 진위 여부를 변별하지 못한 탓으로 39인이 일시에 참살되었으니, 이는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변고로 나라의 명맥이 그때 벌써 상했던 것이다. 원통하고 억울함을 이루 다 말하겠는가?
○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 북쪽 오랑캐 8만여 기가 밤에 의주(義州)를 습격해 왔는데, 이는 강홍립(姜弘立)이 인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한윤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해서 강홍립을 격분시키기를,
“반정 후에 강씨 일문은 모조리 살육되었다.”
하니, 강홍립이 격분하여 오랑캐 추장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켜 앞장서서 이들을 인도한 것인데, 강홍립이 거느린 적병 또한 뛰어난 정예 군병이었다. 강홍립 강홍립은 전에 원수로 있을 적에 자봇 민심을 얻었던 탓으로 평안도 백성들은 강홍립이 선봉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싸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의주의 함락은 뜻밖이었으므로, 부윤 이완(李莞)ㆍ판관 최몽량(崔夢亮)의 패전이나 인산첨사(麟山僉使) 김제정(金濟鼎)의 죽음은 괴이할 게 없는 듯하나, 능한(綾漢) 산성의 궤멸, 안주의 패배는 강홍립이 꾀인 소치가 반드시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강홍립은 포로된 김진(金搢)을 통해서 숙부와 형이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비로소 자기가 한윤이 꾀임에 넘어갔음을 알았다고 한다.
○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은 능한산성에 있다가 적에게 포로 되었고, 평안 병사 남이흥과 안주 목사 김전(金悛)ㆍ영유 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 등은 모두 안주로 들어가 성 머리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성공치 못할 것을 알고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 적병이 승승장구하자, 평안 감사 윤훤(尹暄)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는 황주성을 포기하였다. 적기(賊騎)가 이미 평산(平山)에 이르니 대가는 강도로 행차하는 한편,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을 보내서 강홍립을 중개로, 강화를 청하였다. 적이 왕자를 인질로 요구하자, 원창군(元昌君)을 왕제(王弟)로 삼고 이홍망(李弘望)을 사신으로 하여, 적의 진영에 보내니 적은 크게 기뻐하여 용골대(龍骨大)ㆍ유덕(劉德) 등을 보내 와서 어전에서 삽혈(歃血)하고 형제 됨을 약속, 하늘을 가리켜 맹세한 뒤 돌아갔다.
○ 이홍망 등이 심양(瀋陽)에 들어가니 적의 추장은 특별히 우대한 뒤 예를 갖춰 돌려보내 왔으며, 이로부터 호국(胡國)의 사신이 뻔질나게 오가고, 주화(主和)ㆍ척화(斥和)의 논란이 다시 일어 조정은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남송(南宋) 때의 일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른바 강화를 주장하는 측의 의도는,
“우리의 세력은 약하디 약하여 쇠잔한 병기와 조각난 갑옷으로 곳곳에서 패했다. 종묘사직은 섬에 붙어 있고 만백성들은 모조리 어육(魚肉)이 되었다. 게다가 적의 기병들은 벌써 도성을 육박했는데 저 종택(宗澤)ㆍ악비(岳飛)ㆍ한세충(韓世忠)ㆍ유기(劉錡) 등과 같은 명장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우선 화친을 허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단 물러나게 한 뒤에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병력이 조금 강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함이 불가할 것이 없다.”
는 것이다. 이들은 저 왕황(汪黃)ㆍ진회(秦檜) 등이 어버이를 잊고 원수를 섬겨 국토 회복의 대책을 저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화친을 반대하는 자들의 의도는,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지국으로써 2백 년 동안 명나라를 아버지로 섬겨왔다. 노적(奴賊)은 천조에게 더없는 큰 원수이니, 천조에게 더없는 원수이고 보면, 우리나라에 또한 불공대천의 원수다. 이 불공대천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어 어전(御前)에서 삽혈하였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러한 욕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는 것이다. 이들은 그 의논이 당당하고 늠름함이 추상같아서, 저 호담암(胡澹菴)ㆍ진동(陣東)ㆍ구양철(毆陽澈) 의 상소에 비해 조금도 못할 것이 없지만, 나라 형편이 어떠함은 알지 못하고 다만 비분강개한 마음만을 품었으니, 한낱 처사(處士)의 큰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10월, 횡성(橫城)의 이인거(李仁居)가 모반, 군사를 모아 충청도로 향하려 했다. 전의현(全義縣)까지 이르렀단 말이 전해지더니, 다시 조금 후에 들리기를 벌써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한다. 이인거는 전 교리 이추(李樞)의 손자로, 젊을 적부터 횡성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함께 직접 농사짓기에 힘쓰며 자기의 명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아 옛 은자(隱者)의 풍이 있었다. 반정 후에 조정이 그에게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을 특별 제수하였는데도 그는 사직소를 올리고 그 직에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의 절개를 더욱 높게 보고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하였다. 이즈음에 조정이 노적과 더불어 강화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는 명목을 세워 바쁘게 마을로 뛰어다니면서 군인을 모집하기도 하고 때론 관가에 들어가 무기를 빌리기도 하였다. 그가 팔을 걷고 큰소리를 치면 노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여 그 당황하고 급급한 모양을 만약 옆 사람에게 보게 한다면 경악할 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서 곧 원주로 달려가 이를 보고하니 목사 홍보(洪?)는 이인거 부자를 체포, 서울로 보내어 모두 형을 받게 하였다.
대개 홍보와 이탁남 등이 역전 끝에 그들을 체포했다는 설도 극히 우습기는 하지만, 설사 고요(皐陶)가 법을 집행한다 하더라도 인거의 죄는 반역이란 이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고 한 자로 전에 이미 왕돈(王敦)과 환온(桓溫) 등의 무리가 있지 않았는가? 왕돈ㆍ환온은 군왕의 나라를 찬탈한다는 말을 차마 못해서 군왕의 측근을 맑힌다고 명목을 세운 것이니, 역적 치고는 심한 자이다. 이인거의 마음은 처음부터 역모에 뜻을 둔 것은 아니나,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는 것이 곧 역모가 된다는 것을 몰랐으니, 곧 이치를 밝게 살피지 못한 해독이 결국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것이다. 수십 년을 산중에 은거하면서 읽은 것이 무엇이며, 궁구한 것이 어떤 이치란 말인가?
○ 무진년(1628, 인조 6) 정월. 전 승지 유효립(柳孝立)은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ㆍ전 좌랑 정심(鄭沁)ㆍ전 전적 김탁(金鐸)ㆍ진사 유두립(柳斗立) 등 수십 인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여 도감 장관(都監將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남몰래 결탁 내응을 삼고, 초 3일에 거사하려 했다. 그런데 정랑 허적(許?)ㆍ참판 홍서봉(洪瑞鳳)ㆍ유학 최산휘(崔山輝) 등의 고발로 관리 등이 에워싸고 그들을 체포할 때 수레에 무기를 싣고 입성하는 10여 명도 함께 잡았다. 국청을 설치하고 국문하여 모두 처형하였으며, 고발자 들은 공훈이 기록되었다.
○ 을축년(1625). 박홍구(樸弘耈)의 아들 박지장(朴知章)과 그 조카 박성장(朴成章)ㆍ박윤장(朴潤章) 등이 진술한 초사에 그 역모의 형태가 낭자하였으나 이들(유효립 등)만큼 흉악 처참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당인 임취정(任就正) 부자(父子)는 꿋꿋하게 참고 유효립과 함께 모역한 실상을 승복하지 않았으나 그의 조카의 고함에는 숨길 수 없어 끝내는 곤장 밑에서 죽었으니, 그들에게 다행이다. 그리고 평소 그의 집에 드나든 이종충(李從忠)ㆍ윤홍선(尹弘先)등도 역시 모두 죄를 인정하고 죽었다. 이들은 모두 임취정과 함께 공모한 자들이었다.
○ 정축년(1637, 인조 15)정월. 윤운구(尹雲衢)의 억울한 죽음은 송광유(宋匡裕)의 무고에서 연유되었는데, 찰방 조존중(趙存中)은 소를 올려 사실을 말하여 구원하다가 도리어 죄를 얻은 자다. 이러한 일은 근자에 드문 일로서 이미 윤운구가 무고하게 죽는 것을 보고도 자기의 몸은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소를 올려 그와 더불어함께 죽음에 나아가고자 하였으니, 이쯤 되면 죽음으로써 벗에게 허락한다는 의리에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겠다. 어떤 이는 ‘양숙(養叔 조존중의 자)의 이러한 행동은 윤운구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더러 자신에게 해가 있는 일이니만치, 맨손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옛적 동경당인(東京黨人)으로 죽은 이들이 모두가 천하의 명현(名賢)들이었기 때문에 도요장군(度遼將軍) 황보규(皇甫規)는 서주(西州)의 호걸로서 그들에게 끼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곧 소를 올려 함께 죽기를 자청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정은 그의 죄를 묻지 않았고, 후세 사람은 잘못이라 아니하였다. 오늘의 양숙은 황보규보다 한층 더하다. 평생 죽음으로 서로 허락한 친우가 남의 모함에 걸려 역적의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고 있으니, 남은 목숨이 지기 전에 행여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까 하고 소를 올려 구원을 펴보는 것이 이렇듯 급한데, 어느 겨를에 자신의 보존을 돌보겠는가? 그러다가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와 한 몽둥이 밑에 달갑게 죽을지언정 혼자 세상에 살아 있지 않겠다는 것이 곧 그의 뜻이었다. 아! 양숙의 기절(氣節)이야말로 전국 시대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 하겠다.
○ 경오년(1630, 인조 8). 목릉(穆陵 선조의 능)을 이장한 것은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서 비롯되어 여러 술사(術士)들의 황당한 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목릉의 재궁(梓宮 임금의 관)에 물이 침범했다는 말이 이미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으니, 능지를 옮겨 잡는 것을 어찌 말겠는가? 현궁(玄宮 광중)을 파본 결과 흙은 여전히 건조한 채 물기가 젖어든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으니, 그 뒤 술사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의 난을 일으킬 때, 명목은 모 도독(毛都督)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자기의 부귀를 위함이었으니, 천 리 바깥 고도(孤島)에 조정의 호령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심세괴(沈世魁)가 유흥치를 멸하고 대신 그 무리를 통솔했으니, 마치 당 나라의 번진(藩鎭)의 폐해와 유사하였다.
○ 계유년(1633) 여름. 한성부의 못물이 며칠 동안 피처럼 붉었으며, 7월 17일엔 인정전(仁政殿) 안의 기둥이 벼락을 맞은 데가 두세 곳이었다.
○ 을해년(1635) 7월 13일. 비바람이 크게 일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으며 막 패어난 벼이삭이 거의 말라 죽었다. 목릉(穆陵)의 석물은 바닥에 넘어지고 축대는 무너져서 흡사 파헤친 모양과 같았으며,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능)의 수백 년 묵은 교목(喬木)에 벼락이 떨어졌다. 홍서봉(洪瑞鳳)은 예조 판서로서 직접 목릉에 가서 살펴본 뒤 돌아와서 아뢰기를,
“능위가 무너진 것은 곧 비바람에 의해 무너진 것이요 결코 벼락에 맞은 것이 아니옵니다.”
하고, 그때 오정승(오윤겸 (吳允謙))은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역시 살펴보고 돌아와 아뢴 것이 예조 판서와 동일하고, 참봉의 치보와는 딴판이었다. 때문에 참봉 홍유일(洪有一)은 곧 심문 받고 삭직 추방되었다. 당초에 참봉의 보고는,
“능위에 번개불이 대낮 같고 천둥소리가 밤새껏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튿날 살펴보니 능위와 석물이 앞에 진술한 바와 같기에 사실대로 보고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원종(元宗)을 태묘(太廟)에 부(祔)하는 일이 겨우 며칠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영의정의 보고에, 그것은 재변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대례(大禮)를 이미 전에 잡아 놓은 날로 행하였다. 몇 달 뒤 홍서봉은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해 12월 초 9일 인렬왕후(仁烈王
后 인조의 비)는 산후(産後)에 승하하였다.
○ 병자년(1636, 인조 14) 3월. 노적이 천자를 참칭하고 용골대(龍骨大)ㆍ마보대(馬保大) 등을 보내었다. 그들은 청군(淸軍) 백여 명과 몽고 병 수십 기를 인솔하고 와서 인렬왕후의 빈소에 치제(致祭)하고자 하였으니, 그 저의는 황제 됨을 자랑하고 싶은 한편, 우리나라가 저희들을 후히 접대하는 것을 몽고에게 보이려고 함에 있었다. 그들이 입성하자, 조정에서 그들을 대하는 예절이 전에 비해 조금 엷었으므로, 그들은 마음이 자못 불만스러운 참이었는데, 사신을 참하고 문서를 불살라 황제의 참칭을 크게 물리치라는 장령 홍익한(洪翼漢)의 상소와 성균관 유생들의 잇따른 소장은 그들의 마음을 한층 의아하게 하였다. 또 그들은 우리의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휴대한 것이 평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크게 놀랐으며 곧장 시가지로 나가니, 아이들은 부서진 기와를 던지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따라 다니었다. 그들은 도성을 벗어나 흩어져 여염집으로 들어가 말을 빼앗아서 거두어 귀로(歸路)로 향하였다. 조정은 그들의 오감에 대해서 방임한 채 다시 묻지 않았다.
한편 위에서는 8도에 유지를 내려 화친을 통렬히 배척하는 뜻을 보였는데, 평안도로 보낸 유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그들은 그것으로 실증을 삼아 우리나라가 약속을 배신했다고 하여 강물이 얼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우리 조정은 이러한 적의 실정도 염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변방의 일을 일체 도외시하였다.
○ 11월, 조정은 박로(朴?)를 심양(瀋陽)에 보내서 기미책(羈縻策)을 쓰려 하였는데, 이미 그들은 군병을 동원한 뒤였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었으랴? 박로가 겨우 황주(黃州)에 이르렀을 때 적병들이 벌써 육박해 왔으므로 그는 한 마디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14일 벌써 용골대와 마보대가 거느린 수백의 기병은 사현(沙峴 모래내)에 도착했다. 대가(大駕)가 강화로 옮기기 위해 남대문에 채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사현에 있다는 말이 또 들려왔으므로 최명길ㆍ이경직(李景稷)ㆍ신경진(申景禛) 등을 보내어 다시 화친을 요구하였다. 용골대ㆍ마보대 등은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깊숙이 들어와 화친을 성언(聲言)하였으나 사실은 후원 부대가 이르기 전에 우리의 전투계획을 그르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가는 수구문(水口門)을 벗어나 겨우 남한산성에 이르렀는데, 이날 아침 일찍이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전(嬪殿)은 벌써 강화로 떠났고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平大君), 원임영돈령부사 윤방(尹昉), 영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 판서 강석기(姜碩期), 판서 이상길(李尙吉), 회은군 덕인(懷恩君德仁), 해숭위(海崇尉 선조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남편)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판윤 김경징(金慶徵), 참판 이민구(李敏求)ㆍ여이징(呂爾徵), 승지 한흥일(韓興一), 필선 정백형(鄭百亨)ㆍ윤전(尹銓), 봉상시 정 이시직(李時稷), 익위사 강위빙(姜渭聘),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瑩) 등이 그뒤를 따랐다.
체찰사 김유(金瑬)는 그의 아들 김경징으로 검찰사(檢察使)를, 이민구(李敏求)로 부사(副使)를 삼아 강도(江都)의 사무를 주관케 하고, 유수(留守)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게 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에 미처 호종하지 못한 이는 예조 판서 조익(趙翼), 전 참의 심지원(沈之源)ㆍ홍명형(洪命亨), 돈령부 도정 심현(沈誢), 전 장령 송국택(宋國澤)ㆍ이강(李綱), 전 병사 정호서(丁好恕), 부사 한언(韓琂), 전 승지 유성증(兪省曾), 좌랑 유황(兪榥), 교리 윤명은(尹鳴殷)ㆍ박종부(朴宗阜), 좌랑 이행진(李行進), 정자 정태제(鄭泰齊)ㆍ윤양(尹瀁), 전 정자 조희진(趙希進), 현감 윤훈거(尹勛擧), 감찰 최지위(崔地緯)ㆍ이선(李䆄)ㆍ홍처준(洪處俊), 찰방 정언원(丁彦瑗)ㆍ이경선(李慶先)ㆍ전 도사 이공익(李公益)ㆍ이관(李瓘), 전 세마 허국(許國), 직장 심억(沈檍), 현감 윤효생(尹孝生)ㆍ권익경(權益慶), 군수 이돈오(李惇五)ㆍ윤탄(尹坦), 주부 고진민(高振民), 첨지 이무림(李武林), 전 승지 최유연(崔有淵), 전 정랑 심척(沈惕), 좌랑 임선백(任善伯), 첨지 최보남(崔輔男), 참봉 최노(崔櫓), 전 수사 민인길(閔仁佶), 현령 윤복원(尹復元), 도사 윤인연(尹仁衍), 감역 권억(權嶷), 선성수(宣城守), 위성령(渭城令), 우참찬 박동선(朴東善), 전 참의 이명한(李明漢), 전 승지 이소한(李昭漢), 전 교리 이일상(李一相), 전 정자 이가상(李嘉相), 좌랑 신휼(申恤), 주서 임전(林), 전 도사 이시필(李時苾), 봉사(奉事) 한진하(韓振夏), 종묘 직장 여이홍(呂爾弘), 현령 민광훈(閔光勳), 봉사 지봉수(池鳳壽), 사직 참봉 이진행(李振行), 현감 채충원(蔡忠元), 개성 도사 홍정(洪霆), 수릉관(守陵官) 홍보(洪?), 참봉 홍주명(洪柱溟)ㆍ홍주언(洪柱彦)ㆍ이영(李翎)ㆍ조시량(趙時亮), 전 수찬 김설(金卨), 전 익찬 김향(金嚮), 첨정 조척(曹倜), 풍덕 군수 이성연(李聖淵), 고양 군수 권훈(權勛), 교하 현감(交河縣監) 강문성(姜文星), 교리 심동귀(沈東龜), 전 목사 이영식(李永式), 연계령(連溪令)ㆍ낙양령(洛陽令), 전 세마 신익륭(申益隆), 감목관 심핍(沈愊), 전 감찰 이장영(李長英), 정자 이정영(李正英), 경기 도사 목행선(睦行善), 현령 박창(朴敞), 참군 윤강(尹?), 참봉 신광일(申光一), 전 창방 안철명(安哲命) 등이었고, 나머지 생원ㆍ진사ㆍ유학ㆍ무신과 전에 삼의사(三醫司)에 벼슬하던 이와 금군(禁軍) 등은 종사(宗社)와 빈전(嬪殿)이 계신다 하여 모두 강화도로 들어갔다.
○ 15일. 적병의 선봉이 남한산성 밑에 진을 쳤는데, 잇따라 들어오는 자가 10만에 달했다.
애석하도다. 용골대와 마보대가 거느렸던 군사는 수백에 불과했으며, 밤낮 2천여 리를 달려온 나머지 추위와 굶주림이 극에 달했었다. 이때 우리는 도감의 포수(砲手)가 4천여 명이요, 어영군(御營軍) 또한 수천 명이었으니, 이 중에 정병 1~2천 명만 뽑더라도 지칠 대로 지친 적의 선봉 수백 명 꺾기는 썩은 나뭇가지 꺾듯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뒤에 도착한 적의 후원 병 들이 어찌 이처럼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겠는가? 묘당에는 이런 계획을 낸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산성은 두 달 동안 포위되었다가 끝내는 임금을 적들에게 내주었으며, 허다한 생령들이 모두 어육이 되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 적중에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강화도로 도망해 와서 다들 말하기를,
“서울에 있는 노적들이 열 명쯤 태울 만한 나룻배 백여 척을 독촉하여 만든다.”
하니, 장신(張紳)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노적이 아무리 사납다고 하지만 어찌 육지에서 배를 띄우겠는가? 한강에 얼음이 풀린 뒤에 적선이 만약 강을 따라 온다면 우리는 전선(戰船)을 가지고 낱낱이 깨뜨려 침몰시킬 것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런데 나룻배가 통할만한 곳은 갑곶(甲串)ㆍ광성(廣城)ㆍ연미정(燕尾亭)ㆍ승천부(昇天府) 네 나루뿐이요, 그 나머지는 물길이 험악하여 쉽사리 배를 띄울 수 없으며, 또 연미정ㆍ승천부ㆍ광성은 서로의 거리가 거의 10리나 되기 때문에 배를 띄우기가 또한 편리하지 못하였다. 갑진(甲津)은 나룻길이 매우 좁아 일위(一葦)로도 건널 수 있을 정도인데 나룻머리 의심스러운 곳 한 군데도 방비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호적 수십 기가 강 언덕에 달려오곤 한 것은 이곳 지형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었는데, 강도의 제장들은 전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천연적인 참호인 강이 여기 있는데 북쪽 군대가 어떻게 날아서 건너온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날을 보내는 이도 있었으므로, 진사 김익겸(金益兼)ㆍ윤선거(尹宣擧) 등은 글을 올려 이를 풍자하였는데, 그 가운데 ‘와신상담할 이때에 술잔이라니[嘗薪在卽 杯盤非詩]’란 말이 있었다.
○ 21일 밤. 통진 현감(通津縣監) 김적(金迪)이 치보하기를,
“노적이 배를 운반해서 갑진(甲津) 건너편에 도착한 자가 대략 수만 기나 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본 강화부의 병선은 모두 광성(廣城)에 정박되어 있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거느린 선단(船團)은 연미정(燕尾亭)에 있었기 때문에 갑진에 정박된 배라곤 한 척이 없었으며, 변란에 대비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 22일 새벽. 유수 장신(張紳)이 비로소 수군을 거느리고 배에 올라 갑진으로 향했는데 5 리를 채 못 미쳐서 적군이 홍이포(洪夷砲)를 쏘았다. 거위 알 만한 포탄이 날아와 갑진창(甲津倉) 앞에 떨어지는데 이것에 맞은 사람은 모두 가루가 되었다. 유수가 탄 배가 가리산(加里山) 밑에 정박하자, 뒤따르는 모든 배들은 차례로 정박하고 다시 전진하지 못했다. 강진흔(姜晉昕)의 병선도 맨 선두의 배가 포탄에 맞았으므로 강진흔 또한 겁에 질려 움츠리고 감히 출전하지 못하였다.
정포만호(正浦萬戶)가 화살을 무릅쓰고 배를 띄워서 돌진하는 바람에 적신 한 척이 여기에 부딪혀 강 속으로 침몰하였다. 이쪽의 배 한 척이 포탄에 맞아 부서지자, 만호의 배 단독으로는 감당키 어려워서 우군의 배 속으로 달아났다. 결국 갑진 일대는 적선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는 채 적선 수십 척이 멋대로 오갔다. 적병이 물을 건너와 언덕으로 오른 뒤에야 강화 중군(中軍) 황현남(黃顯男)이 겨우 칡뿌리를 캐러 간 자들을 모집, 천 명이 차지 않은 사람 으로써 장신이 전날에 군졸을 풀어 칡뿌리를 캐러 보냈기 때문 비로소 방어 계획을 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힘이 상대가 되지 못하여 몸이 적의 흉악한 예봉에 죽고 군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 이에 앞서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ㆍ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ㆍ전 승지 유성증(兪省曾) 등은 모두 소모사(召募使)로 나가 각기 수백 명씩 모집해 돌아와서 강변의 요소를 나누어 수비하였는데, 적병이 상륙했다는 말을 듣자, 아무런 계략이 나지 않아 영을 내려 진을 해산한 후 배를 타고 바다로 들기도 하고 피하여 산으로 오르기도 하였다. 대개 소모사의 본래 의도는 그들이 거느린 유생들은 병기를 알지 못하는 자들인 만큼 목적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배에 탄 적들을 올라오지 못하게 할 따름이며, 짧은 도검 따위로 접전하는 일은 응당 마음에 기약한 바가 아니었다. 또 갑진의 수비가 깨진 뒤엔 군진을 해산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은 곧 오합지졸로 모아진 유생들의 손엔 칼 한 자루가 없으니, 적들과 맞싸우는 것은 곧 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형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 검찰사(檢察使) 등은 성중으로 들어오지 않고 강안(江岸)에서 배를 타고 달아났다. 적병의 선봉이 성 안으로 육박하자, 승지 한흥일(韓興一)은 성문을 닫고 성안의 남녀들을 규합, 마치 방어계획이라도 세우려는 듯이 하였으니, 이 얼마나 오활(迂濶)한 일인가? 정예병사와 건장한 무부로서도 천연적인 참호인 강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수백이 채 안 되는 힘없는 남녀들로 태반이나 허무러진 성첩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빈전은 사태가 어쩔 수 없음을 이미 알고 두 살 난 원손(元孫)을 부모(傅母)에게 맡겨 환관 한 명과 함께 성을 나가 멀리 피하도록 하니, 송국택(宋國澤)은 자기가 탄 말을 부모에게 주고 자기는 도보로 수행, 한 척의 배를 겨우 얻어 타고 섬으로 피했다.
○ 우참찬 박동선(朴東善)과 참의 심지원(沈之源)은 동문으로 나가 각기 배를 타고 피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마치 방어를 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 양 대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과 참의 홍명형(洪命亨)ㆍ경력(經歷) 장우한(張遇漢) 등이 앞에 서 있는데, 김상용은 서문루에 싸움을 독려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며, 양 대군을 서문루로 권하여 보냈다. 그리고 경력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는 관청의 일을 점검해야 되니, 여기에 있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장우한이 가자, 그는 앞에 놓여 있는 화약궤에 불을 붙이게 하니 남문루는 즉시 공중에 날았다. 홍명형(洪命亨)과 김익겸(金益兼) 등도 이 불길에 싸여 죽었다.
○ 판서 이상길(李尙吉)의 농장이 선원촌(仙源村)에 있었는데, 강화로 천도한 이후 그는 연로하므로 국록을 먹지 못한다고 스스로 농장에 있었다. 그는 중대한 일이 아니면 결코 성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적기가 상륙했다는 소문을 듣자, 아들 이경(李坰)을 불러 분부하기를,
“너는 마땅히 소모사(召募使)가 되어서 너의 직분을 다해야 한다. 결코 이 늙은 아비는 생각지 말라. 이 아비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벼슬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었으니, 적이 만약 입성한다면 사직과 죽음을 같이하는 것이 곧 나의 직분이다.”
하고, 가사를 정리한 후 성 안으로 들어가 적을 꾸짖고 죽었다. 적도가 성 밖에 결진하면서 즉시 성 안을 도륙하지 않은 것은 성 안에 정병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알았던들 무엇을 꺼려서 도륙하지 않았겠는가?
○ 구왕자(九王子)는 곧 통역 정명수(鄭命壽)ㆍ김돌시(金乭屎)를 통해 성 안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성을 나와 강화를 청한다면 그것을 허락하겠노라.”
하므로, 곧 경력 장우한을 시켜 쇠고기와 술을 들려 보내서 구왕자 보기를 요구하니, 구왕자는
“수상이 나와야 들어줄 수 있다.”
하였다. 윤방(尹昉)이 나가니, 그들은 다시,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와야 된다.”
고 하였다. 이튿날 다시 가니, 구왕자는 드디어 윤방을 접견하고 다시 승지 한흥일을 불러 강화의 뜻을 비로소 밝혔으며, 그리고 궐내에 들어와 빈전을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서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 한 뒤, 그들은 병사들을 풀어 성 안의 재물과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김반(金槃)의 부인 서씨, 장차주(張次周)의 처 김씨, 정백창(鄭百昌)의 부인 한씨, 김유(金瑬)의 부인 유씨, 장유(張維)의 부인 박씨, 김경징(金慶徵)의 부인 박씨, 정효성(鄭孝誠)의 부인, 윤선거(尹宣擧)의 처, 김진표(金震標)의 처 등이 모두 목을 매어 자결하였고, 강석기(姜碩基)ㆍ장신(張紳)의 부인, 장우한(張遇漢)의 처는 궐내로 들어간 덕분에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그 외 나이 젊고 인물이 고운 부인들은 다 붙들려 갔다.
○ 구왕자가 거느린 공(空)과 경(耿), 두 적(賊)의 병사들은 또한 경내에 가득 퍼져 곳곳을 뒤져 여자와 명주 및 보물들은 싹 쓸어가지고 돌아갔다.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이달(정월) 30일, 구왕자는 우리의 빈전과 양 대군을 위시하여 성 안에 남아 있는 대소신서(大小臣庶)들을 강제로 육지로 내보내 모두 남한산성으로 보내어 이들을 산성 안에 과시, 속히 출성하도록 종용하였다.
○ 강화도 촌사(村舍)에 있던 도정(都正) 심현(沈現)은 적기가 입성했다는 소문을 듣자, 곧 조복을 입고 띠를 맨 후 남한산성을 향해서 네 번 절하고는 부인과 함께 목을 매어 죽었으며, 이시직(李時稷)은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아들에게 보내고 친구 송시영(宋時瑩)과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정백형(鄭百亨)의 죽음 또한 옛 사람에 비해 부끄럼이 없는 죽음이었고, 그 외 심척(沈惕)ㆍ강위빙(姜渭聘)ㆍ이돈오(李惇五)ㆍ윤전(尹烇) 등이 모두 난병(亂兵)들에게 죽었으며, 유생과 부녀자 중 효(孝)와 절개를 위해 죽은 자는 이영(李翎)ㆍ김씨ㆍ오(吳)씨 등으로 일일이 다 들 수가 없다.
○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두 달, 왕사(王事)에 힘쓴 자를 보면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䂓)는 진작 군대를 이끌고 대가가 입성한 지 며칠 안 되어서 올라왔으나 진을 채 치기도 전에 적기들이 갑자기 닥쳤으므로 그는 광주의 험천(險川)에서 대패, 겨우 몸만 살아났으며, 병사 이의배(李義培)는 어디로 갔는지 끝내 소식이 없었고,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의 군병은 광주(廣州) 광교산(光交山)에서 자멸하였다. 감사 심연(沈演)은 가장 뒤늦게 출병, 자신이 충주에 앉아서 이천(利川)의 쌍령(雙嶺) 싸움을 감독 격려하였고, 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은 군병이 모두 전멸, 몸마저 보존하지 못했으며,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는 춘천과 양평 사이에 진주하여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을 보내어 검단산(黔丹山) 싸움에서 조그만 승리를 거두었으나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남도병사 서우갑(徐右甲)ㆍ북도 병사 이항(李沆)은 지평(砥平)ㆍ양근 사이까지 바싹 진군하였으나 끝내 입성하지는 못했다.
○ 한편 산성에서는 시위(侍衛) 신료들이 모두 항오를 짜서 밤낮으로 성첩을 지켰으나 군량이 거의 떨어져서 형세는 궁색하게 되었다. 게다가 또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어 빈전과 양 대군이 성 밑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 제장들 중에는 왕에게 출성을 권하는 자도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이 동요될까 두려워 다만 화친을 내세워 강화를 반대하였던 대간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을 묶어 적진에 보냈을 뿐이고, 정월 30일에 출성을 결심하였다. 이때 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참판 정온(鄭蘊)은 성을 등지고 일전을 감행 사생을 결판하자고 청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목 놓아 울다가 자결하려 했는데, 자제들의 만류로 죽지 못했다. 왕이 출성한 뒤 이들은 각기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들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지가 온통 비린내 나는 중에서도 오히려 늠름한 생기를 느끼게 하였으니, 사실 이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의 2백 년 기강을 누가 붙들었겠는가?
○ 홍익한은 서윤(庶尹)으로서 이때 평양에 있었는데, 전에 장령으로 있을 적에 올린 ‘사신을 참하고 문서를 태우라’는 소장으로 인하여, 역시 심양에 잡혀갔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이 정기가 있고 당당하여 죽을 자리에 죽을 소원을 가지고 털끝만큼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헛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를 수 없다.
○ 노적의 두목이 포위를 풀고 돌아갈 때, 동궁전과 빈전, 봉림대군과 부인이 심양에 끌려갔고, 삼공(三公) 육경(六卿)의 자제들 또한 볼모로 끌려갔으며, 나이 젊은 부녀자들은 시녀라는 명목으로 역시 선발되어 갔었다. 그 외 약탈된 남녀들은 매겨진 값을 받고서 놓아주기를 마치 노비를 매매하는 예와 흡사히 하였다. 그 극도로 흉악한 그들의 짓은 도리어 먹이를 훔쳐먹는 개나 쥐와 같았으니, 옛 유요(劉曜) 나 석늑(石勒) 의 죄인이다. 아골타(阿骨打).ㆍ홀필렬(忽必烈) 등을 어찌 만분의 1이나 따르겠는가?
○ 이해 겨울, 용골대ㆍ마보대 두 노적은 칙사랍시고 서울에 왔는데 그 소행을 자세히 살펴보매 참으로 개돼지였다. 그들은 여러 다른 호적들과 함께 여곤(餘捆 무대(舞臺)인 듯하나 미상) 위의 광대놀이를 구경하는데 몸을 기울이고 손을 흔들며 그 모양을 흉내 냈다. 그리고 밥을 먹을 적에 밥상머리에 끄떡거리는 모양과 강제로 기생을 데려다 놓고 상하가 번갈아 간음하는 일은 차마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대할 수 없게 하였다. 금나라ㆍ원 나라 사람이 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중원(中原)에 들어가 임금이 될 리가 있겠는가?
○ 경진년(1640, 인조 18) 겨울, 호적 용골대는 유석(柳烓)과 이규(李碩)의 계사(啓辭)에서 어떤 논을 듣고는 김상헌(金尙憲)의 이름을 자세히 몰라, 오목도(梧木道)와 함께 와서 용만(龍灣)에 주재하고 척화신(斥和臣) 지사양(至斜陽)을 찾았다. 우리나라엔 본래 사양(斜陽)이란 이름이 없다고 대답해도 될 터인에,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은 김상헌의 이름을 써서 용골대에게 제시하니, 정(正) 조한영(曹漢英)과 유학 채이항(蔡以恒) 등이 잇따라 그들의 이름을 그 옆에 병서(竝書)하려고 하였다. 이항 등이 다 불리어 북송(北送)되자, 조정에서는 청음(淸陰 김상헌)을 의주로 보내어 용골대에게 넘겨주었다. 청음을 심문하기 위해 용골대 앞으로 끌고 들어가자, 청음은 그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용골대가 묻기를,
“너는 무엇을 범했는지 낱낱이 말하라.”
하자 청음은,
“나는 알지 못한다. 만약 쭉 지적해서 말한다면 그에 따라 대답하겠다.”
하였다.
“너의 국왕이 출성(出城)할 적에 너는 어찌해서 따르지 않았느냐?”
“내가 늙고 병들어 걸음을 걸을 수 없으므로 따르지 못했다.”
“직명(職名)을 받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나의 노병 때문에 조정은 애당초 나에게 직을 제수하지 않았다. 어떤 직을 제수하였는데 내가 받지 않았다고 하느냐?”
라고 대답한 뒤 다시,
“너희는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느냐?”
고 되물었다. 용골대는 말하기를,
“네가 국왕에게 수군을 허락하지 말라고 권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수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내가 비록 국왕에게 권했지만, 조정은 내 말을 쓰지 않았다. 이는 군신간에 서로 주고받은 말이거늘, 타국인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니, 오목도(梧木道) 등은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가장 다루기 힘든 늙은이구나.”
하였다. 청음은 조한영ㆍ채이항 등과 심양에 들어가 각기 별실에 구류되고, 신득연 역시 구금되었다.
○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정축년(1637) 초여름. 동궁전을 모시고 심양에 갔다가 돌아온 무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홍서윤(洪庶尹 서윤은 익한(翼漢)의 벼슬)의 생사를 여러 호적들에게 캐어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처음엔 살아있다고 다들 말하다가 다시 은밀히 물으니, 그제 서야 벌써 죽었다고 하면서, 말에 항거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심양에 갈 적마다 널리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대답은, 당한(當汗) 이 홍모(洪某)를 묶어 앞에다 놓고 무릎을 꿇게 하였으나 끝까지 끓지 않으므로 한(汗)은 전년에 쓴 척화소(斥和疏)를 내 보이면서,
“내가 어찌해서 황제가 될 수 없느냐?”
하니, 홍모는 말하기를,
“너는 명나라의 역적이거늘, 어찌 황제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니, 한은 대노하여 곧 칼을 뽑아 참살하였다고 한다.
○ 일설에는, 평양(平壤) 사람 가달(假㺚) 이용길(李龍吉)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홍서윤을 아직도 정표(旌表)하지 않았느냐…… 그가 죽은 날은 초 5일이다.”
하였다고 한다.
홍서윤이 데리고 갔던 종 무작금(茂作金)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28일에 상전(上典)께서는 심양의 한 관소(館所)에 갇혀 있었는데, 호국의 박사관(博士官)ㆍ예부랑(禮部郞) 등이 와서 연회를 차려놓고 통역을 통해 7~8번, ‘황제가 보낸 것이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면서, 먹기를 십분 권하자, 상전은 답하기를, ‘나는 죄인으로 잡혀온 사람이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무례한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끝내 젓가락을 들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성이 나서 치워버렸다……"
하고, 또 말하기를,
“25일에 용골대가 와서 연유를 묻는다고 역관을 통해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들어왔느냐?’ 하니, 상전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척화를 제일 먼저 주장한 대간으로 붙들려 왔다……’ 하매, 용골대는 다시 묻기를, ‘너희 나라엔 조정의 관원들이 많은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어찌 너 한 사람뿐이겠는가?’ 하니, 상전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비록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핑계하겠느냐?’ 하였다. 그는 재삼 간청해 묻기를, ‘너 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을 터이니, 꺼리지 말고 바로 말하라.’ 하니, 상전이, ‘지난해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갔을 적에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끊자고 청한 이는 다만 나 한 사람뿐이었다'고 대답하자, 용골대는 웃으면서 가버렸다.”
고 하였다.
○ 《북행일기(北行日記)》에 홍익한(洪翼漢)의 기사는 이러하다.
○ 정축년(1637) 2월 12일 밤. 유지(有旨) 안의 사의(事意)에 의하여 도사 전벽(田闢)은 증산 현감(甑山縣監)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나에게 차꼬를 채워 평양 두리도(豆里島)로 압송하고, 거기서 다시 금 나라 한(汗)의 진영으로 보내 그의 명을 듣도록 하였다. 이는 곧 지난해 봄에 있었던 척화의 일 때문이었다. 이날 나는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말하여 차꼬를 풀어줄 것을 애걸했지만, 대중은 들어주지 않았다. 조금 후에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찾아와 지극히 위로해 주었다. 내가 말하기를,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천한 이 목숨이야 논할 것이 없소. 내 비록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어찌 한 번 죽는 것쯤을 두려워하겠소. 더구나 군명(君命)이 계시는데 도망한들 장차 어디로 가겠소. 다만 밥을 먹고 길을 뜨도록 이 묶음이나 늦추어 주면 좋겠소. ”
하니, 이순민은 대중을 애써 권유해서 풀어주게 했다. 식사를 하고 나니, 밤은 2경이 되었다. 강을 건너서 밤새도록 달리니 말이 피곤해서 더 갈 수가 없었다. 드디어 어떤 곳에 멈추고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 13일. 새벽에 죽을 먹고 온종일 먹지 않은 채 말을 달렸다. 밤중에야 숙천(肅川) 지경에 도착, 민가에 들어 말도 쉬이고 잠깐 휴식하였다.
○ 14일. 닭이 울자 일어나서 출발했다. 진시에 안주(安州)에 도착하니, 방어사 이준(李俊)은 금나라 한(汗)이 이곳을 지나 이미 멀어졌으니, 형세가 필시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에게 공문을 보내어 조정에 여쭙게 하고, 인하여 변대 중으로 하여금 압송하여 선천 부사에게 넘겨 의주로 보내게 하였다. 이날 오후 안주를 출발하자, 눈이 많이 내렸다. 판관 김통가(金通可)는 쌀과 약과(藥果)를 보내 노자로 쓰게 했다. 박천군(博川郡) 앞에 이르니, 눈은 더욱 쌓이고 밤은 깊어 길을 잃었는데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인가를 찾아 들어가 잠깐 쉬었다.
○ 15일. 첫닭이 울자마자 길을 떠났다. 주인 늙은이가 가는 사유를 듣더니 재삼 안타까워하면서, ‘공강정(控江亭) 앞으로 해서 빙복(氷腹)을 건너라’고 나에게 길을 일러주었다. 이른 아침에 가산군(嘉山郡)에 달려 들어가니, 군수 이탄(李坦)이 정주(定州)로부터 와 있었다. 말 위에서 이별하면서 잠깐 이야기하고 달려 정주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야 능한성(綾漢城)으로 갔다.
○ 16일. 새벽에 능한성을 떠나 말을 달려 오시엔 선천(宣川)의 검산성(劍山城)에 닿았는데, 여기서 변대중은 나를 인계하고 뒤에 처졌다.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그것을 이시□(李時□)에게 전하게 하고 곧 말을 빨리 달려 축시에 의주(義州)의 백마산성(白馬山城) 남문 밖에 당도, 공문을 바치어 내가 온 사유를 알렸다.
○ 17일. 여명에 부윤 임경업은 영을 내려 성문을 열었다. 그는 자리로 나를 맞이한 뒤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만, 공의 이번 행차는 참으로 남아다운 일이요, 살아서는 능히 대의(大義)를 붙들었고, 죽어서는 청사를 빛낼 터이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의 소장 하나로 말미암아 나랏일이 크게 그르쳐졌으니, 어느 틈에 다른 말을 하겠소.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제발 서둘러서 군명을 지체하지 않게 해 주시오.”
하니, 부윤은 나의 행자(行資)를 묻고 필요한 모든 것을 일체 갖춰 준 뒤, 곧 나를 압송해 갈 사람을 차출했는데, 그는 곧 미곶 첨사(彌串僉使) 장초(張迢)로 가만리(家萬里) 용천(龍泉) 사람이었다. 이날 오후 나는 의주의 옛 성에 나와서 잤다.
○ 18일. 새벽에 길을 떠나는데 강의 얼음은 아직도 단단했다. 구룡만(九龍灣)에서부터 구련성(九連城)을 지나 금석산(金石山)에서 말을 먹이고 계성(桂城)의 각참(覺站)에서 잤다. 이날 저녁 비와 눈이 섞여 내리므로 나무를 가지고 숙소를 만들어 의지하였다.
○ 19일. 봉황성(鳳凰城)을 지나 송참(松站)에서 잤다. 호인(胡人)이 와서 무슨 사명을 띠고 왔느냐를 묻고 또 안주(安州)의 수군에 관한 일과 섬 안의 일도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하니, 그는 곧 가버렸다.
○ 20일. 통원보(通遠堡)까지는 아직 10리를 못 미쳤는데 찬기가 뼈에까지 사무치므로 한 곳에 멈춰 물을 끓여 먹으려는데 호인 넷이 와서 보고는, 목을 매고 멀리 온 까닭을 물었다. 그 연유를 갖춰 말해주니 그들은,
“공이 무슨 죄가 있소. 심양에 도착하면 한(汗)이 곧 석방해서 돌려보낼 것이오.”
하였다.
저녁에 통원보에 당도하여 잠을 잤다. 이 통원보는 압록강에서 2~3일 거리로 전엔 명나라 땅이었는데 지금은 허허 벌판이 되어 산천이 거칠고 초목이 우거지니, 답답한 깊은 숲에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우리는 한 곳에 머물러 나무를 얽어 움막을 치고 사초(莎草)를 베어 그 위를 덮었다. 그 춥고 고생스러움은 말하지 아니해도 알리라. 밤이 되자 그곳 수보관(守堡官)이 와서 우리의 오는 목적을 묻더니 곧 심양에 보고하였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사를 그때그때 마련해 주었다.
○ 21일. 통원보에서 길을 떠났다. 눈이 온 뒤에 바람이 크게 일었는데 도중에서 배앓이로 무척 괴로웠다. 억지로 길을 걸어 두건보(斗建堡)에서 잤다.
○ 22일. 천주참(川珠站)에서 잤다.
○ 23일. 옛 요동(遼東) 이괘리(梨掛里)에서 잤다. 어떤 노인이 와서 꼬치꼬치 묻고 갔다.
○ 24일. 사아보(沙阿堡)에서 잤다.
○ 25일. 오전에 심양에 도착했다. 용만(龍灣)을 떠난 후 심양에 닿은 것은 9일 만이다. 짐을 들고 싣고 가는 호인들, 포로 되어 가는 남녀, 우마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가다보니, 한 낙타 등에 짐이 가득 실렸는데, 상서원(尙瑞院) 보가(寶家 어보(御寶)를 간수하는 집)가 얹혀 있었다. 너무도 참담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옆 사람은 남의 속도 모르고 위로할 뿐이다. 지내는 참(站)마다 거의가 중화인 으로서 가달(假㺚)이 된 자이며, 위(位)에 있는 진달(眞㺚) 약간 명이 주장하였다. 중화인 들은 묶여진 나를 보고 그 까닭을 알고 나서 한탄하기를,
“참으로 충신이오. 만약 우리 대명(大明) 천자께서 이를 아신다면 얼마나 격려하겠소. 남아가 이쯤 되고 보면 죽어도 빛이 날 터인데 무엇이 한이겠소. 공은 참으로 충신이오.”
하고, 번갈아 위로해 주었다. 통원보에 도착하던 날, 동궁전과 대군을 한(汗)이 데리고 가더라는 소문을 듣고 의주(義州) 여자 난향(蘭香)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오는 동안 이르는 곳마다 물으니, 그렇다고도 하고 모른다고도 했다. 필시 믿을 만한 말 일텐데 의지해 물을 데가 없으니, 그저 참통 할 밖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날 용골대가 와서 연유를 묻고 갔다.
○ 26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27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28일. 한이 박사관ㆍ예부관을 관소(館所)에 보내 주연을 베풀고 문답하였다. 박사관이 농을 걸기를,
“이번 길에 미녀를 얻어 돌아왔소.”
했다. 미녀란 곧 북병사 이항(李沆)의 딸이다.
“그녀는 늘 우리 시아버님을 뵙고 싶다고 말한다.”
하고, 이내 크게 웃었다.
○ 29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3월 초 1일. 소식이 없었다.
○ 초 2일. 초 3일. 소식이 없어 쓸쓸히 앉아 율시 한 수를 읊었다.
양지쪽 언덕에 새싹 돋으니 / 陽坡細草坼新胎
우리 안에 갇힌 새 더욱 서러워 / 孤鳥樊籠意轉哀
초나라 풍습인 답청은 마음에도 없으나 / 荊俗踏靑心外事
금성의 벌주 마심은 꿈속에 아련하다 / 錦城浮白夢中來
바람이 모래를 날리니 음산이 움직이고 / 風飜夜石陰山動
눈이 얼음덩이 속에 들어가니 월굴이 열리네 / 雪入靑澌月窟開
실오리 같은 목숨 굶주리며 겨우 부지했지만 / 飢渴僅能聊縷命
평생 처음 오늘에야 눈물 볼을 적시네 / 百年今日淚盈腮
○ 조선의 누신(累臣) 홍익한은 척화에 대한 뜻을 역력히 피력할 수야 있지마는 피차 말이 전혀 익숙해 있지 못하므로 부득이 글로 쓰노라.
“무릇 천하는 모두가 형제가 될 수는 있지마는, 천하에 두 아버지의 아들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서로 숭상하여 왔으며 간하는 신하는 오직 곧은 절개로써 기풍을 삼았다. 지난해 봄에 나는 마침 대간의 소임을 맡았는데, 금나라가 맹세를 변하여 황제라 참칭하니, 내 생각엔 과연 맹세를 변했다면 이는 패륜의 형제요, 황제를 참칭했다면 이는 두 개의 천자라고 여겨졌다. 한 집안에 어찌 패륜의 형제를 두며, 한 세대 안에 어떻게 두 천자가 있겠느냐? 더구나 금나라는 우리 조선과 새로 교린(交隣)의 약속을 하고서 먼저 그것을 배신했고,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옛 부터 보살펴 주는 은혜를 베풀어 그것을 더욱 깊게 맺고 있는데, 깊은 결속의 은혜를 잊고 먼저 배신하는 공약(空約)을 지키란 말인가? 이는 사리에 매우 합당치가 못하다. 때문에 먼저 이 척화의 의견을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함은 곧 신하된 자의 직분이요,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하의 직분이란 충과 효를 다하는 것뿐이거늘, 위에 계신 임금과 어버이를 안전하게 모시지 못하여 왕세자와 대군은 다 포로가 되었고, 노모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한 상소의 맹랑한 진술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의 화패(禍敗)를 가져왔으니, 충과 효의 도는 모두 말살되었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만 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가운 바이다. 내 피로 북[鼓] 틈을 바르고 내 혼이 하늘로 날아 고국에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상쾌하겠는가? 이 밖에 다시 할 말은 없다.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