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자해필담(김시양)

청담(靑潭) 2019. 6. 23. 18:56



자해필담(紫海筆談)

김시양(金時讓 1581-1643) 찬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시언(金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김언묵(金彦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석(金錫)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인갑(金仁甲)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서윤(庶尹) 홍이곤(洪以坤)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광해군 2)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인조 12)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인조 19)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하담집(荷潭集)』·『부계문기(涪溪聞記)』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내가 과거의 시제(試題)로 죄를 짓고 종성(鐘城)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0월에 배소(配所)에 이르러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꿈을 꾸니, 배소를 남쪽 지방으로 옮겼는데 고을 이름이 아래에 해(海)자가 있어, 평해(平海)나 흥해(興海)인 것 같으나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시를 지었다.

외로운 신하 죄를 범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을 / 孤臣觸犯罪當誅

천지처럼 포용하시니 성상의 은혜 특별하구나 / 天地包容聖渥殊

새북의 풍사를 떠나야만 되겠으니 / 塞北風沙可去矣

영남의 매죽에 아니 가고 어쩌리 / 嶺南梅竹盍歸乎

임금의 은혜 산처럼 무거우시니 / 御恩爲有丘山重

산 넘고 물 건너기에 길 멀다 말하소냐 / 跋涉寧論道路迂

인간의 온갖 일 모두가 꿈이라오 / 萬事人間都是夢

좋은 소식 꿈과 서로 맞기를 서서 기다리네 / 好音佇待夢相孚

그 뒤 7년 만인 무오년에 오랑캐의 변란이 있어서 서북 지방에 귀양간 사람들을 남쪽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렸다. 나는 영해(寧海)로 배소를 옮기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르러 그 꿈이 비로소 맞은 것이다. 길흉과 영욕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저 세력과 이익을 얻기 위하여 악착스럽게 도모하고 힘쓰는 자들은 너무나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정(稼亭) 이공 곡(李公糓)이 영해부(寧海府) 사람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런 까닭에 목은(牧隱 이색)이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소위 관어대(觀魚臺)니 유사정(流沙亭)이니 하는 곳이 다 그 구적(舊跡)이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유풍(遺風)을 아름답게 일컫기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감쇠(減衰)하지 않아서 자기네의 고장을 장식하고 있다. 근간에 고을 안의 유사들이 서원(書院)을 짓고 쇄주(祭酒) 우탁(禹倬)을 향사하게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이 고을의 관원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은은 그 문집 속에 불가(佛家)의 문자가 많다고 하여 배척하고 서원에 모시지 않았는데, 이 논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소위 학문이란 것은 충ㆍ효 두 글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목은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이 해와 별처럼 빛나니 학문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를 서원에 향사한들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문자 사이의 조그만 흠을, 털을 불어 헤치며 찾아내듯 함이 이에 이르는 것은 어떠한가 알지 못하겠다.


한윤명(韓胤明 1542-1593)의 자는 사형(士泂)으로 당시에 명망이 있어 생도들을 교수(敎授)하였는데, 선조(宣祖)도 잠저(潛邸) 때에 또한 그에게 수업하였다. 한윤명이 경서의 뜻을 강론할 때면 노소재(盧蘇齋 노수신 1515-1590)의 논리를 칭찬하였다. 선조가 그는 어떤 사람인가를 물으니, 한윤명이 말하기를,

“지금 시대의 큰 유학자인데 죄 아닌 죄로써 바다속의 섬에 귀양가 있습니다.”

고 하였다. 선조가 그에게 마음을 기울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사적(仕籍)에 있던 옛사람을 등용하였다. 소재는 전적(典籍)으로 조정에 돌아온 지 7년 만에 정승이 되었으니, 한윤명이 먼저 그를 포용한 힘이 많았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명종이 종실(宗室) 자제 3사람을 골라 사유(師儒)를 특별히 선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때 정승 정지연(鄭芝衍 1525-1583, 1549사마시, 1569별시문과, 1574대사성, 1579대사헌, 1581우의정 )이 교관으로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선조(宣祖)가 즉위하였다. 다음해에 이르러 정지연이 비로소 벼슬을 하였는데, 차례에 의하지 않고 특진되어 13년 만에 급작스럽게 정승이 되었다. 정지연의 숙부인 임당(林塘) 유길(惟吉 1515-1588, 1531사마시, 1538별시문과, 1552도승지, 1560대제학, 1572예조판서, 1583우의정, 1585좌의정)이 찬성(贊成)으로서 문형을 맡고 곧 정승을 하게 되었을 때에, 정지연이 바야흐로 과장에 있었는데, 정지연이 정승이 되었을 때에도 임당은 아직 경(卿)의 반열에 있었다. 정 정승이 2년 동안 재직하고 이미 졸(卒)한 뒤에야 임당이 비로소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갔다.


안세우(安世遇)는 총명하여 숙성하여, 중종(中宗)이 친히 부마(駙馬)를 간택하는데 세우가 열네 살의 나이로 피선되었다. 세우는 뜻이 공명(功名)에 있어서 공경(公卿)의 벼슬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아조(我朝)의 부마들은 녹(祿)만을 받는 서추(西樞)와 같아서, 조정에는 참여하지 못하므로 출세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안세우는 소를 올려 굳이 사양했다. 중종은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그의 뜻을 좇았다. 안세우는 과장에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늦게서야 진사에 합격하였다. 오래된 뜻이 허사로 돌아가자 항상 통탄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던 중 을사년(1545, 인종 1 명종 즉위년)에 이기(李芑) 등이 유관(柳灌)ㆍ윤임(尹任)을 반역죄로, 안세우는 사적(士籍)을 취득하려고 윤임의 어린 여종 모린(毛麟)을 교사하여 증인이 되게 한 뒤,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고변(告變)하였다. 이는 안세우가 윤임의 아내와 재종(재종)간의 친척이 되기 때문이었다. 반역의 옥사가 이미 성립되어 그는 상직(賞職)을 받았는데, 역시 현달하지 못하고 죽었다. 전일에 안세우가 공명에 뜻을 두지 않아 공주에게 장가드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면, 일생동안 부귀를 누렸을 것이니, 어찌 남을 무고하여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사문(斯文) 이경중(李敬中 1542-1584)이 전랑(銓郞)이 되었을 때에,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을 배척하여 화현(華顯)한 자리에는 의망하지 않았다. 정승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그때 장령(掌令)으로 있었는데, 어진이를 가로막는다고 탄핵하여 이경중이 마침내 파면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가 일어나자, 정여립과 서로 서신(書信)을 왕래한 사람은 다 추궁을 받게 되었다. 유서애(柳西厓)가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공 유양(白公惟讓)이 편지로써 정여립을 서애에게 추천하여, 서애가 회답한 일이 있으므로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상소하기를,

“그 때 정여립이 한때의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누군들 속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알고 미워한 사람은 오직 이모(李某) 한 사람 뿐이온데, 도리어 그는 어진 선비를 미워한다고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상은 명하여 이경중에게 벼슬을 주고 그를 탄핵한 대간(臺諫)에게 죄를 주어, 정인홍이 파면을 당했다. 그러자 정인홍은 서애를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였는데, 그가 신임을 받게 되자, 유서애의 무리를 배척하되, 어진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가리지 않고 오직 배척함이 혹시 가벼울까 두려워하였다. 그 화가 점점 퍼져서 지금에 이르러 더욱 깊었으니, 어찌 국가의 깊은 근심거리가 아니겠는가?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나자, 명종(明宗)은 윤원형(尹元衡 1503-1565)을 죽이고자 하였고, 조정의 논의도 또한 흉흉(洶洶)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또한 드러내 말하여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상이 이 광경을 보고, 하루는 강연(講筵)에서 한 문제(漢文帝)가 외숙인 박소(薄昭)를 벤 일에 대하여 그 시비를 물었다. 여러 신하들은 비로소 상의 뜻을 알고, 드디어 그가 정권을 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핵하였다. 그리하여 윤원형은 성문 밖으로 내쫓기어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윤원형이 상처(喪妻)한 뒤에, 그의 총애하는 첩으로 계실(繼室)을 삼고 부인을 봉했는데, 조정 재신으로서 이익만을 탐내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 그와 더불어 혼인을 맺었다. 윤원형이 패망하자 첩도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명하여 그를 천인(賤人)으로 되돌렸다. 을사의 난에 윤임(尹任)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윤임의 아비 윤여필(尹汝弼)은 비록 벼슬만은 빼앗았지만 그의 봉록은 죽을 때까지 주도록 명령하였으며,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옥체에는 하등의 영향이 끼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명묘(明廟)의 지극한 덕인 것이다.


원공 천석(元公天錫 1330- )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절조가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운 때를 만나 숨어 살면서 벼슬하지 않고 글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그가 혁제간(革除間)의 일을 쓴 것이 미묘하고 완곡하여 사필(史筆)의 바른 법을 얻었다. 자손이 그의 저서를 대대로 비밀히 간직하고 남에게 보이지 않았는데, 유계(遺戒)가 있어서라고 한다. 금년 12월에 나는 부형을 따라 임진의 병화를 피하여 치악산(雉岳山) 대승암(大乘庵)으로 갔는데, 사문(斯文) 원경명(元警鳴)도 거기에 와서 있었으니, 바로 원공의 후손이었다. 때로 그 유고(遺稿)를 내놓아서, 나도 일찍이 그 일단을 대략 엿볼 수 있었는데, 상세히 보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가 우(禑)ㆍ창(昌)의 일을 기록하기를, ‘전왕(前王)의 부자(父子)를 신돈(辛旽)의 자손이라고 하였다[以前王父子爲辛旽子孫]’고 하였다. 지금 뒤미쳐 생각하니 ‘라고 하였다’[以爲]라는 두 글자가 말 밖에 깊은 뜻이 있었다.

원공(元公)이 권양촌(權陽村 권근)을 두고 읊은 절구(絶句) 하나가 있는데, 한 구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각상에서 몸을 던진 양웅은 《태현경》을 초하였다 / 投閣揚雄草太玄

요사이 양촌이 의리를 말하누나 / 近有陽村談義理

세상 어느 때인들 어진 이가 나지 않으랴 / 世間何代不生賢

하였으니, 이 시는 양촌의 심사를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율곡(李栗谷 1536-1584)이 졸한 지 한 해가 넘었는데도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은 오히려 적소(謫所)에 있었다. 을유년 6월 조강(朝講)이 끝나자, 영상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말하기를,

“세 신하가 귀양갔을 때에 그를 아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 지나친 처사라고 하였습니다. 뇌성 벽력도 밤새도록 계속하지는 않사오니, 세 신하를 관대하게 용서하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세 신하가 혹시라도 상로병(霜露病)에라도 걸린다면 후회됨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헌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세 신하가 이이(李珥)를 거간(巨奸)이라고 하는데, 이가 과연 거간이오? 바른대로 말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사오나 본래 경솔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본심은 비록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면 결국은 그르치는 데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장은 있었습니다.”

고 하였다. 그러자 노수신은 말하기를,

“이이는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문장에는 또한 힘을 다하지 않았는데, 다만 대책(對策)에 있어서는 이어(俚語)를 섞어가면서 넓고 커서 다함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세 귀양간 사람은 다 사면되었다. 율곡이 선조(宣祖)와 군신간으로 만난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이호(尼胡)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병조 판서로서 자신의 말이면 상이 다 들으며 자신의 계책이면 상이 다 시행한다고 여겨, 사세가 창졸간에 있었으므로 일을 이룩하여 밝힌 것이 많았으니, 말을 바치고 부방(赴防)을 면제하는 등의 일까지 다 먼저 시행하고 사후에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의 논의가 일어나 그가 국정을 맘대로 한다고 삼사(三司)가 함께 공격하였는데, 전한(典翰) 허봉(許篈)ㆍ대사간 송응개(宋應漑)ㆍ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의 공격이 더욱 심했다. 상은 매우 성내어 박근원은 강계(江界)로, 허봉은 갑산(甲山)으로, 송응개는 회령(會寧)으로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는 둘로 나뉘어지고, 성균관ㆍ사학(四學)의 유생에 이르기까지 다 패를 나누어 소(疏)를 올려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는데, 박사 한연(韓戭)도 또한 그르다는 논의를 하였기 때문에 경흥(慶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몽학(李夢鶴)이란 자는 서울의 천한 서얼인데, 몹시 방자하고 건방져서 그의 아비에게 내쫓기었다. 호서와 호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한현(韓絢 ?-1596)이 선봉장이 되자 그의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조 29년 7월에 이몽학이 먼저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의 수령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잇따라 6ㆍ7개의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한현은 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이몽학이 진군하여 홍주(洪州)를 핍박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이 뜻밖에 일어났으므로 손을 써볼 계책이 없이 다만 성문을 닫을 뿐이었다. 도원수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檄文)을 보내어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대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무장 박명현(朴命賢)은 날래고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주노릇을 하느라고 고을 안에 있었다. 홍가신이 부르자, 박명현은 즉시 융복(戎服)을 갖추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이몽학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그의 무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김덕령(金德齡)이 나와 약속이 있고, 도원수ㆍ병사ㆍ수사도 다 내통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

하여, 여러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군사를 내어 주둔하게 되었을 때, 여러 무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속였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서 밤중도 안 되어 반군(叛軍)은 무너지고 말았다. 윤영현이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부르짖기를,

“적병이 무너져 흩어졌으니 나와서 뒤쫓아 치소서.”

하였으나, 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명하여 윤영현을 묶어서 잡아 오게 하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서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중은 비로소 후회하고 군사를 내보내어 추격해서 많은 포로와 수급(首級)을 얻었다. 그의 부하 임억명(林億明)이란 자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었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베임을 당하였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이란 사람은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인데, 용맹과 힘이 있었으며 스스로 둔갑술을 안다고 하였다. 이귀(李貴)가 그를 믿고 무군사(撫軍司)에 추천하기를,

“용과 범을 쫓아 잡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지혜는 제갈공명(諸葛孔明)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더하다.”

하니, 세자가 불러서 보고 장려하여 익호장군(翼虎將軍)을 임명하였는데, 선묘가 그 칭호를 초승장군(超乘將軍)이라고 고쳤다. 이때 온 나라가 두려워 떨며 그를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김덕령 자신도 또한 그렇게 스스로 믿어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술에 취하여 기세를 부리고 법을 어겨 쓸 만한 사람이 못되어, 적진과 3년을 마주 대했지만 한 치의 공도 없었다. 마침내 헛이름 때문에 이몽학이 무리에게 이끌려 이용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죽었으니, 이 또한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이다.

적당이 김덕령의 이름을 인용하자, 상은 매우 놀라 즉시 좌우를 물리치고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김덕령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고 또 친히 거느린 군사가 있으니, 만일 포박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유서애(柳西厓)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명령을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성(徐渻)이 새로 영남에서 왔으므로 반드시 사정을 알 것이오니, 청컨대 그에게 물어보소서.”

하였다. 서성이 대답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남쪽 고을에 있으면서 그의 하는 바를 보니, 망령되고 범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용맹과 힘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남보다 썩 뛰어난 것은 아니오며, 크게 민심을 잃어서 친히 거느린 군사들도 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비록 명령을 거역하고자 하여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잡아올 수 있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도망해 숨었다면 신이 잡아올 수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체포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습니다.”

하였다. 상이 위태롭게 여기니, 서애가 아뢰기를,

“서성이 어찌 감히 성상의 위엄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큰소리 치겠습니까? 그 말이 꼭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신이 보장하겠습니다.”

하였다. 서성이 말하기를,

“한명련(韓明璉)이 지금 영남에 있는데, 또한 용감하옵니다. 그를 시켜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金應瑞)로서 항복한 왜병(倭兵) 50인을 이끌고 조력하게 한다면 김덕령이 어찌 감히 맞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계산으로는, 김덕령이 반드시 손을 모아 포박을 받을 것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사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서성에게 명하여 급전(急傳)을 타고 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서성이 가다가 전주(全州)에 이르니,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미 김덕령을 진주(晉州)에 감금하고 있었다.

권율도 그가 명령에 거역할 것을 염려하여 은밀히 성윤문(成潤文)을 시켜서 도모하게 하였다. 성윤문이 은밀히 김덕령에게 군무(軍務)를 의논하자고 청하니, 김덕령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기(單騎)로 왔다. 좌정한 뒤에 성윤문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자네를 잡으라고 명하였네.”

하니, 김덕령이 즉시 꿇어앉아 말하기를,

“상의 명령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원컨대 나의 손을 뒤로 돌려 묶으시오.”

하였다. 성윤문은 그의 원통함을 가엾게 여겨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두 손에 수갑만을 채워서 옥(獄)으로 보냈다. 서성은 김덕령이 이미 갇혔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를,

“권율이 김덕령에게 이몽학을 치게 했는데, 김덕령이 4일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관망하므로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그 여덟 글자가 드디어 김덕령의 단안(斷案)이 되어 사죄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서성의 잘못이라고 했다.


평수길(平秀吉)이란 자는 일본 사람의 종인데, 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관백(關白)을 길에서 만났다. 좌우에 있던 호위병들이 죽이고자 하니, 관백이 그의 얼굴 모양을 기이하게 여겨서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다. 관백에게 총행(寵幸)을 얻어 장수가 되었는데, 문득 공로가 있었다. 드디어 정권을 잡고 그의 주인을 죽인 다음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싸우면 잘 이기고 공격하면 잘 빼앗았다. 마침내 여러 나라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며, 나라는 부유하고 군대는 강성하였다. 드디어 발호(跋扈)의 계책을 내어 우리 나라에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구실로 삼을 단서가 없으므로, 장차 중국에 침입하겠다 칭탁하고 우리 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우리 선조(宣祖)는 대의(大義)로써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수길이 그것을 전쟁의 꼬투리로 잡아, 임진년에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어 군사 약 20만 명을 거느리고 4월 13일에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ㆍ동래를 함락시키고 첨사(僉使) 정발(鄭撥)과 수사(水使) 박홍(朴泓)을 죽였다.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은 채 굴하지 않고 죽었다.

그때는 2백 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여 백성들이 싸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소문만 들으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그들의 칼날에 맞서지 못하였다. 적이 길게 달려 무인지경에까지 이르니,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상주(尙州)에서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였으며, 신립(申砬)은 충주(忠州)에서 패하여 전군이 몰살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니, 이산해(李山海)가 제일 먼저 서쪽으로 피난할 계책을 건의하여 상이 그대로 좇았다. 유홍(兪泓)이 대궐에 나아가 극력 간쟁하였으나, 상은 듣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서울을 지킬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유홍도 먼저 자기집 사람들은 피난가도록 시켜놓고, 겉으로 이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간사함을 많이 미워하였다. 이양원(李陽元)을 검찰사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하였다.

30일에 상이 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거둥하는데, 중궁 이하가 다 말을 타니, 보는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모든 관원들은 새떼가 흩어지듯 도망가고 호종(扈從)하는 사람은 겨우 1백여 명 뿐이었다.

5월 초 3일에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이산해를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로 평해(平海)에 귀양보내게 되니, 상이 유성룡(柳成龍)도 아울러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상도 또한 듣지 않았다. 아마 상이 이산해의 죄를 덜어주고자 하여 일부러 유성룡을 내쳐서 그 죄를 나누게 한 것으로써, 조정의 논의를 누르기 위한 처사였을 것이다.

이날 적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서울의 백성들은 창고의 물품을 훔치고자 하여 먼저 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거가(車駕)가 평양에 거둥하였다가, 적병이 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더 가서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6월 1일에 적이 우리 나라에 침입하고 대가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사실을 곧 중국의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호소하였다. 석성이 황제에게 말하여, 황제는 요동 총병(遼東摠兵) 조승훈(祖承訓)과 유격장군(遊擊將軍)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고, 은 3만 냥을 지정하여 우리의 행조(行朝)에 내려주었다.

8일에 조승훈이 진군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성은 이미 함락하였으나, 사유가 화살에 맞아 죽어 드디어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황제가 다시 영하 도독(寧夏都督)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이여매(李如梅)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楊元)의 군사도 다 여기에 예속시켜 섣달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계사년 정월에 평양을 포위하여 이기고, 길게 군사를 몰아 벽제(碧蹄)에 이르렀을 때에, 적을 얕보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적이 갑자기 이르니, 이여송이 크게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그러나 적은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4월에 이여송이 서울에 들어왔다. 군사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적을 추격하니, 적은 동래(東萊)ㆍ울산(蔚山)ㆍ사천(泗川) 등지에 머물러 보루를 쌓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8월에 거가(車駕)가 해주(海州)로 돌아와서 먼저 유성룡과 여러 관원들을 보내고 9월에 환도하여 잿더미가 되어버린 종묘 자리에서 오래도록 통곡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여송이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갔다.

임진란에 적병이 가득 차서 사람을 죽이고 무찌른 것이 끝이 없었다. 심산 궁곡에서도 또한 모면할 수 없어서 한 치의 편안한 땅이 없었는데, 목사 김공 시민(金公時敏)은 진주(晉州)를 굳게 지키면서 여러 번 적병을 쳐서 우뚝히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되자, 호남ㆍ호서의 연안 일대가 그를 힘입어 완전하였고, 국가가 중흥할 때에 병량(兵糧)과 기계(器械)를 모두 양호(兩湖)에서 마련해 왔다고 한다.

임진년에 각도에 명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였다. 호남의 관찰사 이광(李洸)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상이 서도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군중(軍中)에 명을 내리기를,

“대가(大駕)가 서도로 나가서 존몰(存沒)을 알 수 없으니, 이미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물러가 자신의 안전만을 꾀하더니, 행궁(行宮)이 무사하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호서의 관찰사 윤국형(尹國馨)과 함께 군사 12만 명을 연합하여 나아가 용인(龍仁)에 주둔하였는데, 적병 10여 기를 보고는 싸우지 않고 무너져, 사졸들이 서로 짓밟아 죽고, 살아서 돌아간 자가 몇 사람 없었으며, 군량과 기계는 다 적에게 빼앗겼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명하여 이광을 귀양보내고 권율(權慄)로서 대신하게 했다. 그리고 윤국형도 또한 같은 혐의로 파면되었다.

권율이 명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호남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여 나아가 행주(幸州)에 진을 치고 성원(聲援)하니, 적장 평수가(平秀家)가 서울에서 전 병력을 이끌고 와서 포위하였다. 권율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적은 온종일 크게 싸웠으나 죽은 자와 부상한 자만이 산처럼 쌓이다가, 해질 무렵에 평수가가 유시(流矢)에 맞고, 드디어 군사를 거두어 달아났는데, 행주에서 서울까지 쓰러져 죽은 시체가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임진 전공(壬辰戰功)의 제일이 되었고 차례를 뛰어 넘어 도원수를 제수받았다.

지사(知事)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임진년에 이조 참의로서 난리를 피하여 연안(延安)에 이르니, 부사(府使) 이모(李某)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적장 장정(長政)은 3천 명의 병력으로써 갑자기 쳐들어 왔다. 공이 일찍이 이곳의 부사를 지냈는데, 남긴 사랑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아전들과 백성들이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가 사수하기를 원하였다. 공이 드디어 부서(部署)와 항오(行伍)를 짜고 성을 나누어 지키기로 하였다. 돌쇠뇌포를 벌려 놓고 성루(城樓)와 망대(望臺)의 수리를 겨우 마쳤을 때에 적이 포위하였다. 공이 자기의 가속을 공청의 청사에 몰아넣고 그 문을 막은 뒤에 마른 마초(馬草)를 그 곁에 쌓았다. 그리고 성문에 땔나무를 높이 쌓은 다음, 그 위에 앉아서 군중에 명하기를,

“적이 만약 성에 올라오면 즉시 불을 놓아라. 나와 나의 가속은 맹세코 적의 칼날에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다 감격하였다. 이윽고 적이 개미처럼 성벽에 붙어 올라오므로, 공이 천 개의 솥에 뜨거운 물을 끓이게 하여 내리 부었다. 그러자 적은 섶을 짊어지고 진격했다. 공이 불을 묶어서 던지게 하니, 적이 빈 관(棺)을 이고 올라왔다. 공이 돌로써 내리치게 하니, 돌을 던지는 대로 떨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적이 힘을 다하여 관을 이고 있으므로 조금만 부딪치면 관이 문득 저절로 움직여서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싸운 지 사흘 만에 적은 해볼 방법이 없어서 달아났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그 공을 논하여 공을 초토사(招討使)로 승진시켰다.

선조 신묘년(1591). 정승 윤승훈(尹承勳)이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 흰 개미와 검정 개미가 바다에서 와서 부(府)의 땅에서 싸우다가 언덕처럼 쌓였다. 그때는 바야흐로 왜가 우리의 틈새를 노릴까 걱정하여 드디어 무신을 임용하여 윤공(尹公)을 대신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 왜병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모든 고을이 다 도륙을 당하였는데, 강릉 일대만이 병화가 조금 덜하였으니, 또한 알 수 없는 이치다.

정유년에 왜적이 전 국력을 경주하여 바다를 건너오니 장차 다시 준동(蠢動)할 징조가 있었다.

선조가 사신을 보내어 명 나라의 조정에 급한 사태를 보고하였다. 황제는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어 제독(提督) 마귀(麻貴)ㆍ유정(劉綎)의 군사 10여 만을 거느리고 동정(東征)하게 하고, 도독 진인(陳璘)은 수군을 이끌고 바닷길을 경유하여 나오게 하였다. 그때는 8월이었다.

적이 호남을 경유하여 길게 몰아 진격하는데 그들이 지나는 곳은 잔인하기가 임진년보다도 심하여,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그 코를 베었으며, 마을을 만나면 불질러서 숲과 나무도 남기지 않았다.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포위하니, 명나라의 장수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절도사 이복남(李福男)ㆍ부사 임현(任鉉)ㆍ접반사 정기원(鄭期遠)이 다 죽었다.

적이 승세를 몰고 올라와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에 이르렀다. 명나라 장수 혜생(嵇生)이 용감한 기병(騎兵) 3천 명으로써 적의 선봉을 쳐서 깨뜨리니, 적이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거두어 밤에 길을 영남(嶺南)으로 잡아 달아났다. 이에 호서ㆍ호남의 완전하던 고을들이 다 잔인한 파괴를 당하였다.

적장 평 행장(平行長)은 순천(順天)을 점거하고, 청정(淸正)은 울산을 점거하고, 심안도(沈安都)는 사천(泗川)을 점거하였다. 이해 겨울 12월에 양호(楊鎬)가 마귀(麻貴)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청정을 포위하고 그 외성(外城)을 무찌르니, 청정이 물러나 그 내성(內城)을 지켰는데, 땔나무와 식수의 길이 끊어지자, 거짓 항복을 약속하고 명나라 군사의 포위를 약간 늦추게 하였다. 장차 열흘이 되는 동안에 큰비가 와서 적의 군사와 말들이 얼고 굶어서 죽는 자가 많았는데, 사천ㆍ부산의 적이 와서 후원하니, 양호는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왔다.

명나라 조정은 양호를 소환하고 다시 만세덕(萬世德)을 경리(經理)로 보내고 병부 시랑(兵部侍郞) 형개(邢玠)를 보내어 서울에 군문(軍門)을 개설하게 하였다.

무술년에 유정(劉綎)이 나아가 순천을 포위하고 진인(陳璘)은 수군으로써 이에 호응하였다. 마귀는 울산에 주둔하여 신중을 기하고 싸우지 않았으며,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그때 마침 적은 수길(秀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든 진영을 다 거두어 도로 바다를 건너갔다. 이에 명 나라의 군사도 모두 환군하고 정병 만여 명만 머물러두어 진수하다가 3년 뒤(1590)에 철수하였다.

행장(行長)이 달아나는 것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수군으로 추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싸움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이순신이 유탄(流彈)에 맞았다. 편장(褊將) 손문욱(孫文稶)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북을 쳐서 싸움을 독려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명나라 장수 진인은 평소에 이순신의 지략에 감복하여 형제처럼 대우하였는데, 이날 이순신의 배에서 수급(首級)을 서로 다투는 것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다.”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진인은 말하기를,

“내가 보니, 통제사는 군율이 매우 엄하였다. 지금 그 배에서 수급을 다투어 문란하니, 이것은 호령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싸움이 이미 끝난 뒤에 물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명나라에서 왜적을 치자는 논의는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에게서 나왔다.

석성이 여러 장수들이 적을 구경만 하고 있어서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을 보고 있는데, 그 때 마침 변사(辯士) 심유경(沈惟敬)이란 사람이 강화(講和)할 계책을 헌의(獻議)하니, 석성이 옳게 여겼다. 적도 또한 거짓 강화를 청하므로, 석성이 그의 조정에 건의하여 임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誠)ㆍ도지휘 양방형(楊邦亨)을 책봉사(冊封使)로 삼아 평수길을 동왕(東王)으로 봉하였다. 이종성 등이 이미 행장(行長)의 진중에 들어가니, 수길은 봉왕(封王)을 받지 않고 꽤 능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종성은 틈을 타서 밤에 달아났다. 적이 군사를 보내어 뒤쫓았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정유년에 왜병이 다시 준동을 하자, 과도관(科道官)은 석성이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일을 그르쳤다고 논핵(論劾)하였다. 황제는 매우 성이 나서 석성을 옥에 가두고, 심유경을 거리에서 참형하였다. 석성도 마침내 옥중에서 병들어 죽으니, 사람들은 원통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고 재신(宰臣) 조반(趙胖)을 중원에서 생장하였다고 하여 사신으로 삼아 중국에 보내니, 고제(高帝)가 인견하고 태조의 건국한 일을 힐책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역대의 왕업을 창건한 임금은 거의 다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였으며 홀로 우리 나라만은 아닙니다.”

하고, 넌지시 명나라의 일을 지적하니, 황제는 이르기를,

“네가 어떻게 중국말을 아느냐?”

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신이 중원에서 생장하였습니다. 일찍이 폐하를 탈탈(脫脫 원나라 말기의 승상)의 군중에서 뵈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조반이 일일이 말하니, 황제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탈탈이 만일 있었다면 짐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은 실로 짐의 옛 친구이다.”

하고, 이어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써 대우하고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내었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고증해 보니, 명나라의 고황제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황각사(皇覺寺)에 붙여 있다가, 곽자흥(郭子興) 등이 일어났을 때 고황제는 그의 군에 예속되어 있었고, 곽자흥이 저(滁) 땅에 웅거하여 왕이라고 일컬은 뒤에 이르러 탈탈(脫脫)이 처음으로 장사성(張士誠)을 쳤다. 그런데 어떻게 고황제가 탈탈의 군중에 있었을 리가 있겠는가? 설령 고황제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혹시 그의 군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만 미미한 항오(行伍) 속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니, 조반이 어떻게 물색해 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다 제나라 동쪽 야인(野人)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용재총화》에서 붓 가는 대로 써놓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서사가(徐四佳)가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太平閒話)》등의 글을 보니, 그 국가의 일을 기록하는데는 반드시 정중하게 써서 서로 어긋나고 맞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으로 용재(慵齋)가 비록 널리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가공(四佳公)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다.


《용재총화》에 또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太祖)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일찍이 글 한 연을 짓기를,

석자의 칼머리로 사직을 평안히 한다 / 三尺劍頭安社稷

라고 하니, 한때의 문사들이 다 대구를 맞추지 못하였는데, 철성(鐵城) 최영(崔瑩)이 곧 맞추기를,

한 가지 채찍으로 건곤을 정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상고하여 보니, 태조가 시중이 된 것은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의 뒤였고, 최영이 죽은 것은 바로 위화도 회군이 있던 때였으니, 어떻게 그들이 수창(酬唱)할 수가 있었겠는가? 설혹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땅히 태조가 시중(侍中)이 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양녕대군 제(讓寧大君禔 1394-1462)가 세자로 있을 때에, 태종(太宗)의 뜻이 세종(世宗)에게 있는 것을 알고 곧 거짓 미치광이가 되어 사양하니, 태종이 드디어 그를 폐하고 세종을 세워 왕위를 전하였다. 양녕이 능히 재능을 숨기고 시세의 변천에 따라서 행동을 하므로 내외ㆍ상하에게 모두 환심을 샀으며, 세종도 또한 양녕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매양 금중(禁中)에 맞아들여서 술을 마시며 서로 즐기기를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번 연회(宴會)의 음식을 걷어서 그에게 주곤 하였다.

양녕이 사냥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여러 번 수레를 타고 성밖에 나가서 맞아 형제간의 지극한 정이 틈이 없었다. 광묘(光廟)가 즉위한 뒤에 왕자(王子)ㆍ대신(大臣) 등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양녕은 지혜로써 스스로 보전할 수 있었으며 광묘(光廟)도 또 높이 예우하고 혐의나 간극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임금의 지위를 양보하여 어진 이에게 미룬 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 않고, 능히 처음이나 끝이나 안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양녕은 소년 시절부터 문장에 능숙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성인의 덕이 있는 것을 보고 겉으로 글을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며, 미치광이가 되어 스스로 방자하니, 비록 태종이라도 그가 글을 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 중의 시축(詩軸)에 시를 쓰기를,

산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 山霞朝作飯

여라(女蘿)에 걸린 달로 밤의 등불을 삼는다 / 蘿月夜爲燈

홀로 외로운 바위 앞에 자니 / 獨宿孤巖下

오직 한 층의 탑이 있구나 / 惟存塔一層

라고 하였으니, 비록 문인이라고 불리는 이라도 반드시 이보다 멀리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 아들 5형제가 다 과거에 급제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할 만큼 겨우 몇 사람뿐이다. 전조(前朝)에는 우홍수(禹洪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이 있을 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지장(智長)ㆍ성장(誠長)ㆍ효장(孝長)ㆍ서장(恕長)이 있고, 안충후(安忠厚)ㆍ근후(謹厚)ㆍ관후(寬厚)ㆍ인후(仁厚)ㆍ돈후(敦厚)가 있다. 중묘조(中廟朝)에 박홍린(朴洪鱗)이 또한 형제 5인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에게 붙었기 때문에 남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극배(李克培)ㆍ극감(克堪)ㆍ극증(克增)ㆍ극균(克均)ㆍ극돈(克墩)도 또 다섯 아들이 등과했다. 선묘조(宣廟朝)에 윤서(尹曙)ㆍ호(晧)ㆍ철(㬚)ㆍ구(昫)ㆍ탁(晫) 등이 4년 사이에 서로 이어 등과하였으나 10년이 못되어 다 요절하고 생존한 자가 없었으니, 어찌 복을 누릴 만하지 못해서였겠는가?

조종조(祖宗朝)에는 생원ㆍ진사에 급제하거나 장원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장원으로서 뒤에 정승이 된 사람도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이는 《용재총화》를 상고하면 알 수 있다. 근래에는 매우 드물어, 오직 첨지 양응정(梁應鼎)이 생원과 중시(重試)에서 장원하고, 감사 정윤희(丁胤禧)가 급제와 중시에서 다 장원하고, 율곡 이이(李珥)가 생원과 급제에서 장원하고, 판서 강신(姜紳)이 진사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장원으로서 뒷날 정승이 된 사람은 오직 노소재(盧蘇齋)ㆍ박사암(朴思菴) 두 사람뿐이었으니, 어찌 인재가 세상과 함께 줄어들었단 말인가? 요즘에는 과거가 공평하지 못하여 인재는 더욱 낮으니, 비록 잇따라 장원에 뽑히더라도 귀하다고 할 만한 것이 못된다.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젊었을 때에 평양의 기녀를 사랑하여 매우 정을 쏟았는데, 그가 병사(兵使)가 되었을 때에는 기녀는 이미 죽었다. 공이 그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짓기를,

사람이 나서 한 번 죽는 것은 끝내 면할 수 없는 법이니 / 人生一死終難免

원컨대 선연동 안의 혼이 되거라 / 願作嬋娟洞裡魂

하였다. 선연동(嬋娟洞)이란 것은 기녀들의 묘지인 것이다.

공이 뒤에 호서(湖西)의 관찰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바로 참판 권응정(權應挺)의 서출 동생이었는데 문장에 능숙하였다. 홍주(洪州)의 기녀에게 지어준 시를 노래 부르기를,

인생이 뜻 얻으면 남북이 없나니 / 人生得意無南北

선연동의 혼일랑 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裡魂

라고 하였다. 심공(沈公)이 듣고 크게 칭찬하며 누가 지었느냐고 물으니, 기녀는 권응인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맞아들여 서로 본 뒤에 술자리를 벌이고 시를 지었다. 권응인의 시에,

백설가(白雪歌) 전해 듣고 지음한 지 오래건만 / 歌傳白雪知音久

청운에 길이 막혀 서로 낯 알기 더디었네 / 路阻靑雲識面遲

라고 하니, 심공이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의 재주가 이같이 높을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포의(布衣)의 교우(交友)로 정하였다고 한다.


좌상(左相)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이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일찍이 한 창녀(娼女)를 귀여워했는데, 그 창녀가 모 종실의 첩실이 되었다. 공이 매번 담을 넘어가 상종하다가 어느 날 밤에 종실에게 붙잡혀 결박되었다. 일이 매우 위급하였는데, 공의 형 김경원(金慶元)이 그때 장령(掌令)으로 있었다. 공이 화를 만났다는 것을 듣고서 즉시 달려갔으나 대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장령은 큰소리로 외치며 문을 밀치고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김경원 입니다. 제 아우가 기가 호방하고 단속함이 없어서, 좌우(左右)께 죄를 지었으니,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합니다만 그는 방금 식년초시(式年初試)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이 매우 정심하므로 반드시 대과(大科)에 급제할 것입니다. 좌우께서는 의기(義氣)가 높은 것으로 온 나라 안에 알려져 있는데, 어찌 차마 한 여자 때문에 한 사람의 재자(才子)를 죽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종실은 본래 호협(豪俠)하여 의기를 좋아하였다. 곧 섬돌을 내려와 맞이하여 말하기를,

“아름다운 수재(秀才)가 이러한 일이 있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소.”

하고, 즉시 결박을 풀어주고 술자리를 열어 취하게 마신 뒤에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번 과거에 급제하면, 내 마땅히 이 첩을 공에게 보내겠소.”

하였는데, 과연 갑과(甲科)로 뽑히었다. 3일 유가(遊街) 때에 그 종실의 집에 가서 그의 의기에 감사드리니, 종실은 드디어 자신의 첩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 여자가 뒤에 영천위(靈川尉)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죄를 짓고 의주(義州)로 유배가게 되었다. 공이 그때 홍문관(弘文館)에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와서 교외에서 전송하였다. 그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공은 정이 가는 대로 구속됨이 없이 이렇게 활달하였다.

만력(萬曆) 경술년(1580, 선조 13)에 내가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의 서울에 가게 되어, 오성(鰲城) 이상공(李相公)에게 출발 인사를 하려고 들렸다. 공이 말하기를,

“방예남(方禮男)은 나와 서로 아는 사람이니, 원컨대 그대는 그를 돌봐주오.”

하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선고(先考) 판서공(判書公)이 아직 급제하기 전 포천(抱川)에 살고 있을 적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게 되었지. 재종형 몽서(夢犀)가 청도 군수(淸道郡守)의 사위였는데, 청도는 종이의 산지이므로 판서공이 시지(試紙)를 요구했다네. 몽서는 허락을 하였는데, 시험 시기가 임박하자, 몽서는 종이를 권귀(權貴) 자제들의 요구에 모두 소비하고 약속을 실천할 뜻이 없었다오. 판서는 매우 분하게 여겨, 즉시 종이전에 가서 옷을 벗어주고 사니, 전의 노파가 말하기를, ‘공의 옥같은 얼굴을 보니 티끌 속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이와 같이 스스로 괴롭게 지내오?’ 하였다네. 판서가 몽서의 약속을 저버린 것을 말하니, 노파는 옷을 돌려주고 말하기를, ‘종이는 공이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어찌 감히 값을 받겠습니까? 공은 반드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할 것이니, 회시(會試) 때의 종이 또한 내가 제공하겠습니다.’ 하였다네. 판서가 드디어 여러 선비들 중에서 제일로 합격하고, 회시에서 또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과거에도 급제하였다네. 판서가 노파의 후의에 감사하여 극진한 예로써 대우하니, 노파는 은혜를 믿고 청촉하는 것이 뿔 없는 염소라도 내놓으라고 할 만큼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판서가 어려워하는 빛을 보이자, 노파는 곧 탄식하고 물러앉으면서, ‘공이 이미 부귀하였으니, 나를 잊는 것은 당연하지요.’고 하자, 판서는 부득이 하여 애써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네. 그의 자손이 번성하여 ☐☐☐한 자가 무려 수십 인이나 되는데, 방예남은 곧 그의 손자라네.”


숭선부원군(嵩善府院君) 임백령(林百齡 1498-1546)이 젊었을 때에 강경과(講經科) 초시를 보는데, 꿈에 강석(講席)에 들어가서, 사서 오경을 닥치는 곳마다 환하게 통하여 최상의 성적으로 급제하니, 장중(帳中)의 한 고시관이 말하기를,

“괴마(槐馬)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잘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미 꿈을 깬 뒤에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공은 마음 속으로 자부하고 드디어 그의 자(字)를 고쳐 괴마(槐馬)라고 하였으며 꿈속에서 강하던 장(章)에 대하여 무르익도록 외었다. 강석에 나아가니, 지적해 내는 장(章)이 다 꿈에서 강하던 것이었다. 공이 그에 수응(酬應)하여 외움이 막힘이 없고 문리도 겸하여 다 아니, 장중의 한 고시관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괴마일 것이다. 어떻게 그 능숙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드디어 자기의 꿈을 말하는데 공의 꿈과 서로 부합하였다. 공은 벼슬이 이미 높아진 뒤에 그의 자를 인순(仁順)이라고 고쳤다.


조진(趙振)이 왕자사부(王子師傅)에서 예산(禮山) 고을 원으로 나갈 때에 선묘(宣廟)가 부채를 하사하였는데, 부채에 시 두 수가 씌여져 있었다.

칼을 한밤에 어루만지니 기운이 무지개를 토하니 / 撫劍中宵氣吐虹

장한 마음 일찍이 우리 나라를 안정하려 하였는데 / 壯心曾欲奠吾東

연래에 한단(邯鄲)의 걸음됨을 면치 못하니 / 年來未免邯鄲步

서풍에 머리를 돌리며 끝없이 한하노라 / 回首西風恨不窮

전주도 되기 전에 변설이 번다하니 / 箋注未成辨說煩

고금의 시속 선비 얼마나 지껄였던고 / 幾多今古俗儒喧

그대는 보라. 한 조각 마음속을 / 君看一片靈臺裡

다만 맑고 빈 데 있고 말에 있지 아니하네 / 只在澄空不在言


무술 연간에 사문(斯文) 조우인(曹友仁 1561-1625)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이 선학(禪學)인 육상산(陸象山)에 가깝다고 논하고 이 시를 인용하여 증거를 삼았다가 크게 선조의 뜻을 거슬렸다. 대체로 신하로서 진언할 때에는 반드시 성실하고 간절해야만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조우인은 경솔하게 제 마음에 내키는대로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관(官)에서의 처사가 남의 비웃음을 면치 못하면서 앵무새 같이 말만 잘하여 경솔하게 임금의 학문의 깊고 얕음을 논평하였으니, 그가 믿음을 얻지 못한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목사 임형수(林亨秀 1514-1547)는 재주가 많고 호기가 있어, 곧게 향하고 앞에 거리낌이 없었다. 을사년에 윤원형(尹元衡)의 뜻을 거슬려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윤원형이 술자리를 열어 전별하였다. 공이 평소에 술을 잘 마셨으므로 윤원형이 여러 잔을 권하자, 공이 잔을 들고 기세를 올리며 말하기를,

“공이 과연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양대로 마시겠소.”

하였다. 윤원형이 얼굴빛이 변하다가 그쳤는데, 공은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잔을 잡고 한 말이 윤원형을 격동시켰다고 하였다.

명나라의 태조황제가 한(韓)ㆍ촉(蜀)을 평정하고 그 위주(僞主) 진이(陳理)와 명승(明昇)을 우리 나라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조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관작도 주지 말고 백성으로 만들지도 말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저택과 노비를 주어서 그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였다. 명승의 어머니가 밤마다 하늘에 빌어 말하기를,

“하늘이여! 우리가 파천하게 된 것은 오로지 촉나라 대신의 죄입니다. 대신이 대명(大明)과 서로 내통하고서 우리 군사는 동쪽만 힘써 지키게 하고 서남쪽으로 명나라 군사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드디어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지금 《통기(通紀)》를 고증해 보니, 촉장(蜀將)이 명나라 군사를 서남으로 끌어들였다는 기록이 없다. 명승의 어머니가 깊은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일을 알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통기》의 기록에 누락됨이 있는 것일까?

명승의 후손은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간혹 과거에 급제한 자도 있다. 그러나 진이는 아들이 없어서 제사가 끊어졌으니, 이는 아마도 임금을 시해하고 나쁜 일을 쌓는 것이 때를 타서 몰래 점거(占據)하는 것과 더불어 재앙이나 경사가 저절로 같지 않기 때문인가 보다.


사문(斯文) 심의(沈義 1475-?)는 심정(沈貞)의 아우다. 문장은 풍부하나 성품이 세상일에 어두워 왕연(王椽)같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또한 어리석은 것으로 자처하여 능히 드러내지 않아 화를 면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고 말한다. 일찍이 학관(學官)으로서 반궁(泮宮)에서 과시(課試)를 고사하였는데, ‘화이우(畵二牛)’라는 제목으로 부(賦)를 짓게 하였더니, 유생들이 지은 글은 모두 솜씨가 없었다. 심사문(沈斯文)은 잠깐 휴게소에 나가서 한 붓에 휘둘러 지었는데, 문장이 점 하나도 가할 것이 없었다. 그것을 서리(書吏)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아는 유생이 있거든 이것을 주라.”

하였다. 유생이 써서 올리니, 여러 시관들이 무릎을 치고 찬미하면서 말하기를,

“이 과장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글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사문은 흔연히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입니다.”

하여, 여러 시관들이 다 매우 탄복하였다고 한다.

심정이 비록 남을 시기하고 해치는 버릇이 있으나, 그의 우애만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심정이 남곤(南袞)과 함께 작은 방에서 밀의를 하는데, 사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창문을 열고 말하기를,

“둘은 일개 소인배들이다.”

라고 했다. 남곤이 매우 성내어 얼굴빛이 변하였다. 심정이 깨닫고 말하기를,

“나의 아우는 본래부터 천치이오니, 원컨대 상공께서는 용서하소서.”

라고 하여, 남곤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하루는 사문이 새벽에 깨서 울고 있으니, 심정이 말하기를,

“아우는 왜 우는가?”

하였다. 사문이 말하기를,

“꿈에 부모님을 뵈었는데 부모님 말씀이 ‘너는 작은 아들이므로 내가 매우 염려하여 어느 밭과 어느 종을 너에게 주고자 하였는데, 미처 그대로 하지 못하고 죽어서 마침내 잊을 수가 없다.’고 하시니, 내가 이 때문에 슬퍼합니다.”

하였다. 심정이 크게 감동하여 말하기를,

“부모님들께서 너를 생각함이 지극하신데, 내 어찌 그것을 아껴서 지하에 계시는 영혼을 위로하지 않겠느냐?”

하고, 즉석에서 문서를 만들어 주었다. 심정이 뒤에 그것이 거짓말인 것을 알고 사문(斯文)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또한 새벽에 일어나 거짓 슬퍼하니, 사문이 말하기를,

“형님! 무엇 때문에 슬퍼합니까?”

하였다. 심정이 말하기를,

“꿈에 부모님을 뵈었더니 부모님의 말씀이 ‘어느 밭과 어느 종을 너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셨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슬퍼한다.”

하니, 사문이 말하기를,

“봄꿈을 어떻게 다 믿겠습니까?”

하여, 심정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고려 때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이 공민왕의 조정에 벼슬하다가 역적 신돈(辛旽)의 뜻을 거슬리고, 몰래 그 아비를 업고 도망하여 영천(永川)에 사는 동년(同年)인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붙어 있었다. 신돈이 사형된 뒤에 비로소 돌아와서 벼슬이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 물러나 여주(驪州)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본조(本朝)의 아래에 오기(誤記)하여

“본조에 벼슬하였다……”

하였으며,《시림(詩林)》에주석을 달은 것도 그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선묘조에 경연관(經筵官) 홍적(洪廸)이 고치기를 청하니, 상은 다시 인간(印刊)해 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금상(今上) 3년에 《여지지(輿地志)》를 개간(改刊)하게 되어 공의 8대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그때 영상으로서 상께 글을 올려 선묘의 유교(遺敎)를 따라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상은 그 의견에 따라 유신들에게 명령하여 개찬(改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 아래에 변오(辨誤)라 하고 부기(付記)하기를,

“이 집이 공양왕 정묘년에 죽자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이 모두 시를 지어 조문했다.”

하였다. 정묘년은 바로 신우(辛禑) 13년이며, 그 뒤 2년을 지나서 기사년에야 공민왕이 비로소 임금이 되었으니, 개찬한 것이 서로 맞지 않음이 전과 다름이 없다. 이른바 유신(儒臣)이란 자들은 그때 옥당의 신하들에 지나지 않았으니, 견문이 얕으므로 이러한 과오가 있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한음은 문단의 영수로서 조상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씻어버리는 일이니, 진실로 마땅히 상세하고 신중해야 할 일인데, 또한 이와 같은 실수가 있었으니, 진실로 저술이 어려움을 알겠다.

나는 일찍부터, 《사기(史記)》에 ‘여불위(呂不韋)가 일찍이 한단(邯鄲)의 미인을 데리고 살다가 그가 임신한 것을 알고 초(楚)에게 바쳐, 1년 만에 아들 정(政)을 낳았으므로 시황(始皇)을 여씨(呂氏)라고 한다.’는 것을 의심했다. 이것은 그때 사람들이 시황을 매우 미워하여 천하에 꾸짖는 분섞인 말이고 공론은 아니다. 임신하면 열 달 만에 낳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기한이다. 요(堯)가 14개월 만에 탄생한 일이 있으나 그것은 천만 년에 한두 사람 있을 뿐이다. 여불위가 어떻게 정(政)의 출생이 1년 뒤에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초에게 바쳤단 말인가? 이것으로써 시황이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게 없는 것이다. 상론(尙論)하는 군자들이 아직까지 그것을 설파한 이가 없어 마치 하류(下流)에 천하의 온갖 더러운 것이 저절로 다 모이는 것과도 같다. 근래에 진정(陳霆)의 《양산묵담(兩山墨談)》을 보니, 영씨(嬴氏)를 여씨(呂氏)로 바꾸고마(馬)씨를 우(牛)씨로 바꾼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한단(邯鄲) 미희(美姬)의 일은 애매하고, 마우(馬牛)의 일은 의혹스럽다.”

하였다. 중국 문헌의 논의가 적은 나라의 좁은 소견과 같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런 까닭에 군자는 거슬러 올라가 옛날 어진이를 벗으로 삼는 것이다.

《양산묵담(兩山墨談)》에, 사마공(司馬公)이 《통감(通鑑)》을 짓는데, 당태종(唐太宗)의 시대를 기술할 때가 되자 홀연히 누른빛 도포를 입은 사람이 앞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잘 써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공이 그가 황제인 것을 알고 꿇어 앉아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악덕(惡德)이 많습니다. 신의 머리는 벨 수 있지만 붓은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나라 동쪽 야인의 허황된 이야기이다.

방현령(房玄齡) 등이 고조(高祖) 금상(今上)의 실록(實錄)을 올렸는데, 6월 4일의 일에 대하여 쓴 말이 은미한 것이 많았으며, 척비(刺妃)를 세워 후(后)를 삼고자 하니 위징(魏徵)이 간하여 중지하고, 아들 명(明)으로 하여금 소봉(巢封)을 잇게 하였다는 것을 바로 쓰게 하였으니, 황제의 영달함으로 어찌 이 일이 후세에 전할 것을 알지 못하고, 후세의 온공(溫公)에게 부탁하여 고쳐 주기를 빌었겠는가? 과연 이와 같았다면 반드시 방현령으로 하여금 직서(直書)하는 것을 즐겨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선묘(宣廟)가 일찍이 시신(侍臣)들에게 묻기를,

“나는 옛날의 어느 임금에게 비할 수 있는가?”

하니, 정이주(鄭以周 1530-1583)는 대답하기를,

“요순같은 임금이십니다.”

하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대답하기를,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 : 하나라 폭군인 걸왕과 주왕)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순과 걸주가 그렇게 대등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본바탕이이 고명하시니 요순같은 임금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인인 체하시어 간언(諫言)을 거절하시는 병폐가 계시니, 간언을 거절하고 스스로 성인인 체 하는 것은 걸주가 망한 것이 옵니다.”

하였다. 상이 얼굴빛이 변하고 용상(龍床)에서 안절부절하니, 좌우에 모신 신하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애 유성룡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에 비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를 들어서 말한 것은 경계하는 뜻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성낸 빛을 걷고 술을 하사한 뒤에 파하였다.


나의 꿈이 기이하고 잘 들어맞는다는 것은 이미 책의 첫머리에 썼다.

정사년 (1017, 광해군 9) 2월, 부계(涪溪)에 있을 때의 일이다. 꿈에 참찬 유간(柳澗 1554-1621)이 그의 아들 여각(汝恪)을 보내어 나에게 시를 보였다. 꿈을 깬 뒤에도 그의 한 글귀는 기억하였다.

시론은 정히 세 칠묵 같고 / 時論正如三漆墨

돌아올 기약은 한 돛의 바람을 얻기 어렵다 / 歸期難得一帆風

그러나 그 뜻을 알 수 없어 일기에 적어 두었다. 그뒤 2년에 유간이 시의(時議)에 거슬려서 울산 부사(蔚山府使)로서 북경에 다녀오라는 특명을 받았다. 그때 오랑캐가 발호하여 그 기세가 매우 팽창하였으므로 북경에 가는 사람은 다 바다를 건너야 할 근심이 있었다. 유간이 연경(燕京)에 간 뒤에 적이 요양(遼陽)을 점거하였기 때문에 길이 끊어져서 바닷길로 돌아오다가 배가 깨져 익사하였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라고 하겠다. 유간이 처음 떠나려 할 때에 내가 동료 이창기(李昌期)ㆍ서상서(徐尙書)와 함께 꿈을 말하고 유간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과연 맞으니, 듣는 사람들이 다 이상하다고 감탄하였다.

목사 김홍도(金弘度)는 아이 때 이름이 귀갑(歸甲)인데, 갑산(甲山)에 귀양가서 죽었고, 김정홍(金正弘)은 젊을 때 자가 의경(宜慶)인데, 또한 경원(慶源)에 귀양갔으므로,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긴다. 나의 벗 황석(黃奭)의 자는 존외(存畏)인데 임자의 화에 연좌되어 경흥(慶興)에 귀양갔다가, 7년 만에 배소를 순천(順天)으로 옮겨, 늙은 아전의 집에 붙어 있었는데, 그 집을 새로 짓고 경흥당(慶興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존외가 마침내 그 경흥당에서 병으로 죽었으니, 이것도 또한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를 살펴보니,

“조선을 격하시켜 진번(眞藩)ㆍ임둔(臨屯)ㆍ낙랑(樂浪)ㆍ현도군(玄菟郡)을 두었는데, 성제(成帝) 때에 석현(石顯)이 패하자, 그와 서로 교결(交結)한 자들이 모두 파직되고 오록 충종(五鹿充宗)이 현도군 태수(玄菟郡太守)로 좌천되었다.”

하였다.

《지리지(地理志)》에,

“현도군의 속현(屬縣)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군의 속현에 조선(朝鮮)ㆍ패수(浿水)ㆍ대방(帶方) 등의 고을이 있다.”

하였다.

《강목(綱目)》을 살펴보니,

“송(宋) 나라 원가(元嘉) 9년 가을에, 위주(魏主) 도(燾)가 연(燕) 나라를 쳐서 깨뜨리고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와서 영구(營丘)ㆍ성주(成周)ㆍ요동(遼東)ㆍ낙랑(樂浪)ㆍ현도(玄菟)ㆍ대방(帶方)의 여섯 고을, 백성 3만 호를 유주(幽州)에 옮겼다.”

하였다.

《동국사(東國史)》를 상고해 보니, 무제(武帝)가 4군을 두었다고 한 것은 근거가 있으나, 석현의 당이 나누어 배반하였다는 일은 성제(成帝) 때 고구려의 국토는 본래 아무런 변동이 없었고, 무제(武帝)가 4군을 둔 뒤에 곧 다시 우리 땅을 회복하였는데, 군읍(郡邑)이 붙어 사는 자의 다스리는 곳이 되었겠는가? 태무(太武) 때에 고구려가 한창 강성하여 풍홍암(馮弘庵)을 요동(遼東)에서 죽이고 그 땅을 소유하였으니, 연(燕) 나라에 들어가 옮겨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낙랑ㆍ현도ㆍ대방은 다 요동(遼東)에 있었던 땅이고, 처음부터 압록강 동쪽의 땅이 아닌 것이다. 또 고구려ㆍ조선은 나라의 이름인데, 《지리지(地理志)》에는 현도ㆍ낙랑의 속현(屬縣)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중국 사람들이 외국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듣는 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일이 사실과 어긋남이 이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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