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蓀谷) 이달(李達) 자료집
■머리말
16세기 최경창(崔慶昌) ·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三唐詩人으로 불리는 손곡 이달에 대한 자료와 그가 쓴 시들을 모으려 는 시도를 하다보니 송준호 선생 편저 『손곡 이달 시 역해』까지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무려 300여수가 수록되어 있어 정말 구입하기 잘 했다는 생각이다. 손곡 이달은 우리 신평이씨 종친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명인물 중 한 분이기에 보다 나의 관심이 매우 큰데 따라서 우리 신평이씨 족보와 관련하여서도 조사해보고자 한다.
이 책, 저 책에서 모아놓은 자료들과 이번에 구입한 송준호 선생의 책을 활용하여 두서없이 우선 묶어 본다.
■이 달(1539 ~ 1612)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 서담(西潭) · 동리(東里),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부친은 영종첨사 이수함(李秀咸)이며, 홍주의 관기(官妓)에게서 태어나 서자로 성장하였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許筠)과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에게 시를 가르쳤다. 허균은 스승인 이달이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나 서얼이기 때문에 불우하게 사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제자 허균(許筠)은 이달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당시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다가,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다가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 · 가(歌) · 음(吟)과 왕유(王維) ·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달은 시도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唐詩)를 익혔다. 『이태백집』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외웠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예전과는 다른 시를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 · 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 · 허봉 · 양대박(梁大樸) · 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였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과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이달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傷)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정서가 무르녹아 있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가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 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 대표작으로 이달이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꼽았다.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 높이 이른 시는 왕유 · 맹호연 · 고적(高適) · 잠삼(岑參)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 · 전기(錢起)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 · 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이달은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 여관에 얹혀살다가 작고하였다. 무덤은 전해오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었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1623년 이수광(李睟光)이 지어준 서문만이 전한다.
1. 西潭集跋(서담집발) :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유형(柳珩, 1566-1615)이 엮은 이달(李達, 1539-1612)의 시문집인 <서담집(西潭集)> 서문
국가가 시작된지 2백년, 시를 쓰던 선비라면 어찌 고달프지 않았을까마는 송(宋)의 시인들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이라는 주장도 많았고 아래로는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진량(陳亮, 1143-1194)이었다. 조선 땅에는 송(宋)나라 사람들보다 낫다고 하는 상투적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이 비로소 당(唐) 시의 경지를 시로 쓰고 있다.
파변(頗變=신변(新變))을 줄곧 습득하던 이 시기에 바로 서담(西潭) 이달(李達)이라는 사람이 나왔다. 받아본 것들로는 그 수준이 당(唐) 시의 경지와 어슷비슷하였고 시(詩)로 한 동안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에 충분하였다. 나 라는 사람이야 늦게 태어나서 최(崔)도 백(白)도 직업 얼굴을 맞대지 못하였고 오로지 서담(西潭) 이달(李達)을 만나보았다. 이십대에 홍양(洪陽, 충남 홍성)에서 서로 우연히 알아보았으나 전란 속에 헤어져 인연이 끊어져버렸다. 이렇게 피차(彼此) 신의 손에 맡겨버린 채 사귐이 20여년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는 가버렸고 한두 편의 글이 사람들에게 있었는데 그 모두가 귀중하다 할만 했다. 늘 그 온전한 모음집으로 보지 못하는 부족감을 겪다가 이제 황해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유공(柳公)께서 최경창(崔慶昌)의 조카라는 신분으로 또 어려서 이달(李達)에게 배운 사람으로 이렇게 그의 시 쓴 것들을 모아서 이름을 지었는데 <서담집(西潭集)>이다.
전부 1권(卷)의 분량인데 이제 막 인쇄를 할 작정이라 그에 따라 내게 보였고 내가 선집의 꼬리를 달도록 하였다. 그러한 그의 수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이제 내 손에 넣고 또 일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시는 참신하였으며 구성지게 아름다웠고 또 어느 땐 따끔한 충고를 받게 되었다. 5언절구(五言絶句)와 7언절구(七言絶句)는 특히 당(唐) 시대의 경지에 가까운 시 들이라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의 두 봉우리가 보이고 어떤 것은 그 이상이었다. 비록 당(唐) 시대 최 전성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고 따라서 장적(張籍)과 왕건(王建)의 풍격이다.
소소한 학파(學派)라 할 수 없는데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런 것을 세상에 전하는 것은 이로써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하여서이다. 나야 원래 그 사람의 시를 좋아하였으므로 유공(柳公)의 그 뜻에 더욱 기뻐할 수 있었다. 본 원고를 마치고 어렵게 돌려보낼 수가 있었는데 이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기다리면 되겠다.
그리고 선택이 되기를...
■주1 : 서담집을 엮은 유형이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때는 1614-1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현재 서담집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1618년경 허균이 생존 마지막에 손곡집을 엮을 때 자신이 가진 200여수와 유형으로부터 얻은 130여수를 얻어 엮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서담집의 시들은 손곡집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 허균 저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의 자는 익지(益之)로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1345(충목왕1)~1405(태종5))의 후손이다. 그는 어머니가 천인(賤人)이어서 세상에 쓰여질 수 없었다. 원주(原州)의 손곡(蓀谷)에 살면서 자신의 호(號)로 하였다. 이달은 젊은 시절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한리학관(漢吏學官 사역원(司譯院) 소속 관리)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을 따라 노닐며 서로 마음이 맞아 아주 기뻐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달은 한창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의 시법(詩法)을 본받아, 그 요체를 터득하여 한번 붓을 잡으면 문득 수백 편을 적어 냈으나 모두 농섬(穠贍)하여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하루는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이달에게 말해주기를,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 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되네. 자첨(子瞻 소식의 자(字))의 시는 호방(豪放)하기는 하지만 이미 당시의 아래로 떨어지네.”
하였다. 그리고는 시렁 위에서 이태백(李太白)의 악부(樂府)ㆍ가음시(歌吟詩),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이달은 깜짝 놀란 듯 정법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다. 드디어 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예전에 숨어 살던 손곡(蓀谷)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다.
《문선(文選)》과 이태백 및 성당(盛唐)의 십이가(十二家)ㆍ유 수주(劉隨州)ㆍ위 좌사(韋左史)와 백겸(伯謙)의《당음(唐音)》까지를 꺼내서 문을 닫고 외었다. 밤이면 날을 새운 적도 있었고,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5년을 지내자 어렴풋이 깨우쳐짐이 있었다. 시험삼아 시를 지었더니 어휘가 무척 청절(淸切)하여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어졌었다.
그리하여 당 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장편(長篇)ㆍ단편(短篇) 및 율시(律詩)ㆍ절구(絶句)를 지어냈다. 글자와 구절을 단련(鍛鍊)하고 성음(聲音)과 운율(韻律)을 췌마(揣摩)하면서, 법도에 부당함이 있으면 달이 넘고 해가 가도록 개찬(改竄)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10여 편을 지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들 사이에서 읊자, 모두 감탄해 마지 않으며 깜짝 놀랐었다. 최고죽(崔孤竹)ㆍ백옥봉(白玉峯) 등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고, 제봉(霽峯 고경명)ㆍ하곡(荷谷 허봉)과 같은 당대의 시로 이름난 분들이 모두 성당(盛唐) 풍의 시를 짓는다고 추켜 세웠다.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아려(雅麗)하여 수준 높게 지은 것은 왕유ㆍ맹호연ㆍ고적(高適)ㆍ잠삼(岑參)에 버금하고,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劉長卿)ㆍ전기(錢起)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신라(新羅)ㆍ고려(高麗) 이래로 당시(唐詩)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정말로 사암(思菴)이 고무시켜 준 힘이었으니, 그건 진섭(陳涉)이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을 열어 준 것이라고나 할까.
이달은 이 때문에 이름이 우리나라에 울렸고, 귀하게 여겨져 그의 신분은 놓아두고도 칭찬해 마지않는 분들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3~4명의 거장(巨匠)들이 있었다. 그러나 속인(俗人)들 중에는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줄줄이 이어 있어,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덮어씌우며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끝내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아담하지 못하고 성품도 호탕하여 검속(檢束)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속(時俗)의 예법에 익숙하지도 못하여 이런 것들 때문에 시류(時流)에 거슬렸었다.
그는 고금(古今)의 이야기를 잘했으며,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술을 즐겨 마셨다. 진(晉) 나라 사람(왕희지 등을 가리킴)에 가깝도록 글씨도 잘 썼다. 그의 마음은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먹고 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아서 사람들 중에는 이 때문에 더 그를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평생 동안 몸을 붙일 곳도 없어 사방으로 유리(流離)하며 걸식(乞食)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궁색한 액운으로 늙어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야 곤궁했어도 불후(不朽)의 명시를 남겼으니 한 때의 부귀로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지은 글들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인데 내가 가려서 4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하였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태사(太史) 주지번(朱之蕃)은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았다. 만랑무가(漫浪舞歌)라는 시를 읽고서는 격절차상(擊節嗟賞)하면서,
“이 작품이 이태백(李太白)의 시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도 이달의 반죽원(斑竹怨)이라는 시를 보고서,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호)의 시집 속에 넣어도, 안목(眼目) 갖춘 사람일 망정 판별하기 쉽지 않으리라.”
했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망언(妄言)을 할 사람이겠는가. 슬프다. 달의 시야말로 진실로 기특했었다.
3. 손곡집 서문 : 허균(1569-1618)
※송준호 『손곡 이달 시 역해』편
...동시에 손곡영감이라는 분이 있어서 처음엔 두보와 소동파를 호음(정사룡 : 1491-1570)에게서 배워서 그 읊은 시들이 이미 광범위하면서도 치밀하여 순수하게 익숙해져 있었으나, 최경창․백광훈과 사귀게 되면서 깨달아 부끄러움을 알고 이미 배운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다시 배웠는데, 그의 시는 근원적으로 이백의 시를 뿌리로 삼아 우승과 수주의 시에 출입하면서 분위기는 온화하고 풍취는 뛰어나면서 발상은 곱고 맑아 그 고운 것은 남위․서시가 고운 옷에 환하게 화장을 한 듯하고, 그 온화한 것은 봄볕이 온갖 꽃들을 쪼이는 듯하고, 그 맑은 것은 서릿발이 거대한 골짜기를 씻어낸 듯하고, 그 밝고 맑은 소리가락은 저 아홉 하늘을 향한 생황소리에 학이 오색구름 밖을 맴돌아 나는 듯하여, 노을 비단과 바람피리를 흡인하여 자리 잡은 옥과 굴러가는 구슬 등에 더하여 펼쳐지게 하여, 옥 소리를 내서 이것을 가다듬게 하면 비파처럼 슬프고 구슬프면서도 진주알이 부딪치듯 하고, 조절하여 이것들을 잘 안배하면 천리마가 굽을 접치고 용이 움츠리듯 해서, 그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천천히 가게 하면 잔잔한 물결이 도도히 흘러 바다로 가는 듯하고, 태산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치면서 하얀 구름이 흰 개 모양으로 바뀌는 것 같으니, 개원․천보나 대력 시기에 갖다 놓아도 그흠결로 인해서 왕창령이나 잠삼의 열에 다음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나라 모든 유명 시인들과 비교할 경우에는 그들을 또한 똑바로 구십리 거리로 후퇴시킬 것이다.
영감님은 신분적 지위가 미천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지은 바 시 작품들이 여러 천 편 되었으나 모두 흩어지고 유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못난 내가 소년이었을 적에 둘째 형님의 명령에 따라 영감님께 시를 공부하면서 시 짓는 방향을 알게 되었는데, 영감님이 궃기게 되자 그 남긴 작품들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을 것이 안타까워 평일에 내가 들어서 기억했던 200여 수의 시를 모아 인쇄하려는 차에, 또 홍상사 유형으로부터 이어서 130여 수의 시를 얻어서, 이군 재영으로 하여금 편집을 하게 해서 여섯 권을 만들었다. 무릇 영감님의 시는 우리나라 모든 명 시인들의 그것들을 뛰어 넘으니, 어찌 나의 보잘 것 없는 글로 인하여 남아질 수 있게 되는 것이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남은 시들을 거두어 모아서 기필코 천년을 전해지게 하려는 것이 못난 나의 마음이니, 그 어찌 부처님의 머리를 더럽힌다는 꾸지람을 피할 수야 있겠는가? 아래위로 수백 년 간에 이르기까지 여러 원로 분들을 평가하면서 영감님에까지 이른 것은 극히 주제 넘게 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북을 쳐서 외친 꼴이지만, 요컨대 오랜 후에는 논평이 정해질 것이니, 설마 어찌 내 글의 본지를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겠는가? 이에 드디어 이 서문을 쓴다.
...만력 무오년(1618) 봄에 허단보는 서문을 쓰다.
4. 손곡집 서문 : 임상원(1638-1697)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깊이를 가진 사람은 오직 이씨이다. 이씨는 신분이 아주 미미하여 세상에서 천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떠돌아다니고 곤궁하고 초라하였으며, 그것들이 빠짐없이 시에 다 보여지고 있다. 그 흥취를 말고 멀리 부쳐놓고 소리의 마디가 또렷하게 하여 합쳐서 이루어진 작품들은 족히 한 시대의 진부한 것들을 깨끗이 씻고, 엣 사람들의 발자취를 밟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거룩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때에 허단보가 경망하고 약싹 빨라서 이씨를 기리는 글을 이용해서 시 보는 안목을 내세워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 족히 공평한 평가가가 될 수는 없지만, 저 허단보에 비겨서 이 이씨가 훨씬 뒤지는 사람이라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이씨는 어느 위치가 마땅하겠는가? 이를 테면 최경창과 백광훈을 포괄하고 권석주와 짝이 된다고 해도 거의 과찬이 아니라 하겠다.
...경주부윤 허요수가 궁중 서고에 있는 원고를 얻어내서 장차 간행하려고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드디어 평일에 <품평해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써서 준다. 계유년(1693) 정월 육일에 서하 임상원은 적다.
■주2 : 손곡집이라는 이름으로 두번째 시집이 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는 허균이 1618년에 엮은 것이며 두번째는 75년 뒤인 1693년이다.
5. 제호집(霽湖集)제 9권 : 양경우(梁慶遇:1568~ ?) 著
○고제봉(高霽峰 : 고경명 1533-1592)이 이달(李達 1539-1612)을 대접함
제봉 어른이 말하기를,
“내가 이달을 맞이하여 서산(瑞山)으로 왔을 때 그를 동각의 윗방〔東上房〕에 머무르게 하고, 휘장을 치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시종 및 모든 도구들을 한결같이 별성(別星)의 예에 따랐네. 한 달이 못 되어 서울에 있는 명류(名流)와 지구(知舊)들은 내가 이달을 과분하게 대접한다고 책망하였네. 서찰이 훌쩍 날아왔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 비방하는 의론이 성행하니 반드시 그대에게 액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네. 나는 그래도 동요하지 않았고 서로 변론하지도 않았다네. 이달이 돌아갈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비방이 그쳤네. 그 후 관직이 체직되어 서울에 들어가자 전일에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던 사람들이 모두 내가 우거(寓居)하던 집에 모여서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라고 묻기에, 나는 ‘그대들이 듣던 대로다.’ 하고 대답하였네. 이에 더욱 놀라고 분노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들어 보시오. 허억봉(許億鳳)은 그 천함을 논한다면 관노(官奴)요. 그런데도 젓대를 잘 불어 연유(宴遊) 때면 매번 그를 초청해서 비단자리에 앉힙니다. 이달은 비록 외가가 없지만 그 부친은 사대부이니, 관노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또한 멀지 않겠소. 젓대를 잘 분다는 것 때문에 비단자리에 맞아들여 천한 관노임을 잊은 것이라면, 세상에 드문 재주를 사랑하여 비어 있는 객관에 두고, 바닷가에서 실컷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이고 한가히 노는 관비 한 명을 짝해주어 그 객지 생활을 즐기게 해주는 것이 어찌 불가하오?’ 하였다. 그러자 나를 책망했던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소.’ 라고 했었네.”
○이달(李達)의 시
내가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제술관으로 서경(西坰) 유근(柳根) 어른을 따라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義州)의 옛 이름)으로 향하는 길에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손곡 이달은 70세가 넘어 성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양의 늙은 관기와 관노들은 그의 젊었을 때 행락(行樂)하는 것을 자세히 말해주기를,
“지난날 학사 서익(徐益)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을 때, 학사 최경창(崔慶昌)이 본부(本府)의 서윤(庶尹)이 되어 이달을 부벽루(浮碧樓)에 머무르게 하고 기녀 중 가장 이름 있는 사람 및 노래 잘하는 사람과 거문고 잘 퉁기는 사람 모두 10여 명을 가려 그들로 하여금 이달을 모시게 하여 떠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서윤 최경창은 매일 석양에 공무(公務)를 마치고 찰방 서익과 함께 가마〔肩輿〕를 타고 부벽루에 이르러 술잔을 돌리고 시를 지으며 극진히 즐긴 후 술자리를 파했는데, 최경창이 임기가 다하여 조정에 돌아가고 나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뛰어난 재주를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부벽루 판상(板上)에는 정지상(鄭知常)의 절구
비 그친 긴 둑에 풀빛이 푸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랫소리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르겠나 / 大同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가 있는데 옛날부터 절창(絶唱)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학사 최경창이 술자리에서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늘 이 누대에서 시를 지어서, 산천과 어조(魚鳥)에 대해 거의 다 읊조렸소. 그러니 글의 제목을 정하여 한 절구씩 짓도록 합시다.”
하였다. 서익은〈채련곡(採蓮曲)〉으로 제명(題名)함이 좋겠다고 말하자 서윤 최경창은 판상의 시(정지상의 시)로 운을 삼자고 하였다. 세 사람은 각각 붓을 잡고 더 낫게 짓기를 힘써 각고한 끝에, 최경창과 서익이 먼저 짓고 이달이 이어서 완성했는데, 마침내 이달의 작품을 절창으로 추대하였다. 그 시는 즉,
들쭉날쭉 연잎에 연밥 많으니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사이에 아가씨들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娘歌
돌아갈 땐 횡당 입구에서 만나자 약속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애써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 辛苦移舟逆上波
라고 하였다. 서윤 최경창과 찰방 서익의 작품이 꼭 이에 뒤진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달의 작품을 제일로 삼고 붓을 놓은〔閣筆〕 일이 있었으니, 그 포의(布衣)를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알 수 있다. 이는 손곡이 나에게 자세히 말해준 것이다. 나의 우견(愚見)을 말하자면 제 2구의 ‘상간(相間)’ 두 글자는 온당치 않은 듯하다.
6.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제5권 : 허균(1569년~1618년)著
※손곡(이달 : 1539-1612)집 서(蓀谷集序) : 한국고전번역원 편
...같은 때에 손곡옹(蓀谷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에 두보(杜甫)와 소동파(蘇東坡)를 호음(湖陰)에게서 배웠다. 그 읊고 읊조린 것이 이미 웅대, 치밀하였으나 최경창과 백광훈을 사귀게 되자 배움의 허술함을 깨닫고 진땀이 흘러내리므로 그간 배운 바를 모두 버리고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의 시는 공봉(供奉 이백(李白)을 가리킴)에 근본을 두었고 우승(右丞 왕유(王維)를 가리킴)과 수주(隨州 유장경(劉長卿)을 가리킴)를 드나들어 기운이 다사롭고 지취가 뛰어나며 빛이 곱고 말이 담담하며 그 곱기는 남위(南威 춘추 시대의 미녀)와 서시(西施)가 성복(盛服)하고 밝은 화장을 한 듯하고,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을 덮는 듯하며, 그 맑음은 서리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흐르는 듯하고, 그 울림의 통량함은 마치 높은 하늘에서 학 타고 피리 부는 신선이 오색 구름 밖을 떠도는 듯하며, 끌어당기면 노을빛 비단과 미풍의 잔물결 같고 깔아놓으면 구슬이 앉고, 옥이 달리며 두드리고 갈면 비파의 애절함과 구슬의 울림이요, 억제하고 누르면 기마(驥馬)가 멈추고 용이 움츠렸고, 그 일없는 때에 천천히 걸음은 평탄한 물결이 넘실넘실하여 천리를 흘러가는 듯하며 태산의 구름이 바위에 대질러 흰 옷도 되고 푸른 개도되어,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ㆍ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ㆍ대력(大歷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의 사이에 놓아도 왕유(王維)와 잠삼(岑參)의 대열에서 멀리 기울이지 않으며, 우리나라 여럿 이름난 작가들과 비교하면 그들 또한 눈이 휘둥그래져 90리나 물러설 것이다.
옹은 지체가 미천하여 사람들이 귀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많으니, 저술한 것이 여러 수천 편이었으나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옹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아는 데 힘입은 바 있다.
그가 죽으매 남긴 글이 민멸되어 전하지 못하는 것을 아까워하며 평소에 기억하고 있던 시 2백여 수를 모아 판각하려고 했는데 또 상사(上舍) 홍유형(洪有炯)의 처소에서 1백 30여 수를 얻게 되어 이군 재영(李君再榮)을 시켜 합하여 모으고 분류하여 여섯 권을 만들게 하였다.
옹의 시는 우리나라 여러 이름난 작가를 넘어섰으니, 어찌 나의 글을 기다려 썩지 않는 것이 되랴. 그러나 남긴 시들을 주워 모아 천 년 뒤에까지 전하자는 것이 나의 마음인데 부처님의 머리를 더럽혔다는 나무람을 회피하겠는가?
위아래 수백 년에 이르러 여러 노대가(老大家)를 평하고서 옹을 언급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참월(僭越)하여 한 시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오래 되면 의논은 정해질 것이니, 어찌 한 사람도 말을 아는 자가 없겠는가? 드디어 이를 써서 서를 삼는다.
옹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달(達)이며 자는 익지(益之)로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호)의 서후손[庶裔]인데 손곡(蓀谷)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7.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 24권
○봉래(양사언)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
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
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
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
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
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
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
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
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
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
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8. 손곡 이달 시 역해 서문 : 송준호 편저 머리 글
...삼당시인이 모두 모국어처럼 한자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지만, 손곡은 다른 두 사람이 조어와 구상에 유의하면서 자아..의 의식과 대상들을 숨김없이 표백하고 형상화했던 것과 달리, 자중적이고 자존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장군이나 여인, 신선 등과 같은 중국의 전설적, 설화적 인물들을 대리적 인격체로 하여 이들을 작품의 주체로 삼아 묵시적으로 자아소망의 대리만족을 도모하기도 하고, 자아 울분의 대리호소나 대리 해소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시 의식의 전반적 경향은 자아의 신분적 한계상황에 대한 피동적 수용과 감응으로 인한 한애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고 있을 뿐, 그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응과 비판을 시도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손곡시의 당풍적 성공은 주관적으로는 작자 자신이 목표한 미적 자원에의 도달이며 성취였으나, 객관적으로는 자기 망각이요 철저한 모방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선진의 남을 따르는 꿈을 실현, 획득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아 본질의 상실이라는 자기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손곡의 시적 성향은 그 당시 강조되던 시적 풍조와 작자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적이이기보다는 정적이며, 객체화의 회화성 보다는 주정화의 음악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9. 손곡시 3수
■江陵別李禮長之京 :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이예장과 작별하며
桐花夜煙落(동화야연락)/오동꽃은 밤안개 속에 떨어지고
海樹春雲空(해수춘운공)/바닷가 나무위로 봄 구름은 흘러가는데
芳草一杯別(방초일배별)/향긋한 풀 내음에 한 잔 술로 이별하지만
相逢京洛中(상봉경락중)/서울에서 서로 다시 만날 날 있으리.
■佛日菴贈因雲釋(불일암증인운석):불일암에서 인운스님에게 주다 .
山在白雲中(사재백운중)/산은 흰 구름 속에 묻혀 있는데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스님은 흰 구름을 쓸지 않네.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길손이 오자 문은 비로소 열리고
萬壑松花老(만학송화로)/온 골짜기에 송화꽃만 시들어가고 있네.
■靈谷尋春(영곡심춘) : 영곡의 봄놀이
東峯雲氣沈翠微동봉운기심취미/
동쪽 봉오리 구름이 산자락에 잠겼는데
澗道竹杖尋芳菲간도죽장심방비/
산골물따라 대지팡이로 고운 풀 찾아 나섰다.
深林幾處早花發심림기처조화발/
깊은 수풀 어느 곳에 이른 꽃이 피었는지
時有山蜂來撲衣시유산봉래박의/
때때로 산벌이 옷소매에 달라 붙는다.
10. 新平李氏 족보상의 이달
※신평이씨 상계전(태을 이병호저)
1726년에 간행된 2간보인 <병오보> 쌍매당 이첨의 손자인 昶(창)에 대해 [손곡 이달이 그의 후손이고 달의 후손이 죽산에 산 적이 있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3간보(1798)와 4간보(1851)에 [창은 해주목사인데 후손은 미상이다. 혹은 손곡 이달이 그 후손이라고 하여 주부(종6품) 수함의 서자인데 현재 쌍매당의 후손인지 여부는 미상이다.]라고 되어 있다.
손곡 이달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신평이씨와 인척이기도 한 제자 허균이 여러 번 손곡 이달은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평이씨 문중에서는 서자라서 그런지 그를 인정함에 답단한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문중에서는 그가 쌍매당의 후손임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평이씨 최고의 인물인 쌍매당 가문의 후계가 누구인가를 놓고 계파간에 갈등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계파가 아닌 손곡 이달을 그 직계 혈손으로 인정하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또 손곡 이달이 서얼이고 천재다운 기행 탓에 세간의 평판이 썩 좋은 편은 못되는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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