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 懷
窓外靑山似削成(창외청산사삭성)
창밖에 청산 깍은 듯이 솟아 있어
愁時擧目轉分明(수시거목전분명)
시름 올 때 눈 들면 더더욱 뚜렷하네.
秋風日日吹巾杖(추풍일일취건장)
가을바람 불어와 나날이 옷깃 스치니
欲上高岑望玉京(욕상고잠망옥경)
높은 봉우리에 올라 서울이나 바라보고 싶구나.
▣권근(1352-1409)
이 시의 제목인 書懷의 뜻은 <회포(懷抱)를 적어 봄>이라는 뜻이다. 『금마지』에는 제목이 <미륵사>라고 되어 있다. 권근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양촌(陽村)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18세)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정몽주·정도전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성균관대사성·지신사 등을 거쳐, 1388년 동지공거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로서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앞서 이숭인(李崇仁)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부정한 재물을 모았다고 탄핵되어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그를 이어 명나라에 다녀온 권근이 상서하여 이숭인의 무죄를 주장하였다는 죄로 우봉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흥해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 : 현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팔봉동, 춘포면, 왕궁면 지역)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위 시는 익주 유배시 지은 시이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하여 예문관대학사·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참찬문하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에 독권관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박상충·이숭인·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 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에서 이를 진강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인 『불씨잡변』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제17회 마한서예문인화대전(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