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미륵산 가는 길에 지나다

청담(靑潭) 2024. 6. 15. 14:57

미륵산 가는 길에 지나다.

〔彌勒山途中經過〕

 

오횡묵(吳宖默 : 1834~1906)

 

황차 심은 것을 보기 위해

일부러 소씨가 사는 집에 찾아갔다.

 

종소리가 들리니 절이 있음을 알겠더니

댓바람 소리에 다시 수레 멈추었다.

 

골짜기 새들은 지저귀며 화답하고(谷鳥鳴相應)

숲속 꽃들은 웃으면서 피려한다.(林花笑欲舒)

 

지나오며 구경했던 기이한 풍경은

그 동안 들어왔던 뜬 바위를 말하리라.

 

저자 오횡묵은 1874(41)에 무과에 급제하여 1877(44) 수문장을 시작으로 부사과, 감무감, 공상소 감동낭관, 영남 별향시, 박문국 주사를 거쳐 1887(54) 정선군수에 임명된다. 그 뒤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를 거쳐 내금위장겸 공상소 인감, 징세서장을 지내다가 다시 지도군수, 여수군수, 진보군수를 지내고 190067세의 나이에 익산군수로 와서 1902년에 평택군수가 되고 1905년에는 품계가 종2품이 되었다가 1906년 면직되었다. 이때가 73세인데 거의 20여 년 동안 무려 9개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한 지방행정의 전문가였다 할 수 있다.

 

익산군수로 재직한 기간은 17개월인데 이때 전라북도의 양무감리(토지측량사무의 총책임자)를 겸하여 힘든 시절을 보낸 모습이 이 기록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록 무관출신이었지만 문장과 학식이 뛰어난데다 인품도 훌륭한 사람으로 하필 흉년을 고통에 빠진 익산의 백성들을 위하여 세심하고도 정성어린 방안들을 세우고 지시하는 수많은 기록들을 대하게 된다. 오늘날 선거로 선출한 시장 군수들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는 하나, 선거 때의 부끄러운 일로 당선이 무효되기도 하고 부정한 사건이 드러나 그만두기는 일이 허다한 모습을 본다. 가난한 형편 속에서 서울집을 떠나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도 절대 부정하지 않고 올바른 목민관의 자세를 견지하며 오로지 백성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힘들어하는 모습에서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업무파악이 정확하고 계획과 추진함에 있어 치밀하기가 그지없는 행정전문가였다. 그의 치적과 인품을 보여주는 내용이나,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할 만한 것들을 찾아 적는다. 당시의 백성들의 삶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능력 있는 수령들이 기록한 것 만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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