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현대 인물 11인
들어가는 말
21세기 제3의 물결(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 신석기 혁명-산업혁명-정보혁명)속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 제 13위의 경제 대국을 이루었는가 하면, 정보화의 선진국으로 세계 제1의 인터넷 사용국이 되어 불과 30여 년 만에 가장 가난한 분단국가에서 세계를 이끌어 가는 앞서가는 국가가 되고 있다. 이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20C 100년 동안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인들의 목숨을 바치는 처절한 몸부림과, 어두운 백성을 일깨우려는 선각자들의 각고와,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 정의를 지키고자 노력한 대쪽같은 선비와,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애쓴 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본 글은 20C에 한국인으로서 아니 전북인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간 분들의 족적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함께 조명해 본다는 의미에서 구성해 본 것입니다. 1999년부터 전북일보에서 제정하여 연재한 《20세기 전북인물 50인》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치, 애국항쟁, 사회, 종교의 각 분야에서 존경할만한 훌륭한 업적을 쌓은 분들 중에서도 이미 고인이 된 분들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우리 시민들이 알아 둘만한 인물을 선정하여 게재하였습니다.
1. 호남 의병장 임병찬(1851~1916) : 군산시 옥구읍
ꡒ신(臣)은 본래부터 재지(才智)가 없고 또한 늙음에 병까지 겹쳐서 처음 모의를 시작할 때부터 그 형세가 막히기를 십중팔구나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거의(擧義)할 것을 끌어오면서 세월만 보내다가 이제 그 계획이 다소 정해지고 인사들이 모여들었기에 이제 이달 12일에 전(前) 낙안(樂安)군수 신(臣) 임병찬을 보내어 먼저 의기(義旗)를 꽂게 하였습니다ꡓ
이 글은 1906년 면암 최익현(1833-1906)(구한말의 큰 유학자요, 위정척사운동의 대표격인 인물)이 고종에게 바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의 일부다. 최익현이 임병찬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구한말 일제에 항거해 민족정신을 드높인 의병운동은 흔히 3단계로 나눈다. 첫째가 을미(乙未)의병, 둘째가 을사(乙巳)의병, 셋째가 정미(丁未)의병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 정미의병은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의병운동은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거나 자손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다. 깊은 산속에서 굶주림을 안은 채 며칠을 헤메야 했고 엄청난 사람이 묘비명 하나 없이 죽어가야 했다. 또 마을이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의로운 정신은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우리 민족이 뿌리를 보존할 수 있는 고갈되지 않는 수원지였다. (후일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 독립투쟁의 기반) 임병찬이 최익현과 함께 일으킨 의병운동은 둘째 번 을사의병에 해당한다.
임병찬(林炳瓚)은 1851년 2월 옥구군 서면 (현재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임용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시중(時中, 뒤에 中玉), 호는 돈헌이라 하였고 본관은 평택이다. 네 살에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지을 만큼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동네에서는 신동으로 통했다고 한다. 15살에는 전주에서 치른 향시(鄕試)(문과의 소과인 생원 진사시의 초시로 500여명을 뽑음)에 수석합격을 했다고 전한다.
1882년 그의 나이 31살에 태인현 산내면으로 이사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등 어지러운 세태를 보고, 산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려했던 것이다.
임병찬 연보
▲1851년 군산시 옥구읍에서 출생
▲1882년 정읍시 산내면으로 이사
▲1886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 낙안군수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
▲1906년 3월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함께 의병봉기
▲1906년 6월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
▲1912년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대장
▲1913년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겸 사령장관
▲1914년 일본 총리대신과 총독면담 요구하다 체포
▲1916년 거문도에서 서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그러나 1886년 조정에서 거문도에 진(鎭)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감독관에 추천하자 관직에 나아갔다. 거문도진이 예정대로 완공되자 조정에서 그에게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에 임명하고 그의 선대 3대를 추종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이어 낙안군수(낙안읍성으로 유명)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면서 먼저 아전들의 폐단을 시정하고 죄 없이는 단 한대의 매질도 하지 못하게 엄히 다스렸다. 또한 체납된 세금과 쌀을 모두 추징하여 적폐를 일소하였다. 이에 감복한 주민들이 사례를 하고 선정비를 세우려 했으나 모두 물리쳤다. 말하자면 명목민관이요, 청백리였던 셈이다.(이때 고부군수 조병갑은 태인군수였던아버지 선정비를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착취-동학농민혁명 발발)1890년에는 차례로 군산진, 성당진, 법성포진의 겸관(兼官) 사관(査官)을 겸하였다.
이후 1893년 관직을 버리고 종성리로 이사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자를 모신 사당과 흥학재(興學齋)를 지어 제자들을 모아 한학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가르쳤다.
그럴 즈음 대한제국은 점차 기울어, 1905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이르자 전국의 선비들이 비분 강개 하였고 여기저기 장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임병찬도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크게 실망,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를 옮겨 장사지내고 아버지의 묘 아래서 시묘살이를 하기로 작정했다.
이때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려 동지를 구하던 참이었다. 즉 전주의 전우(田愚)(간재로 부안의 계화도에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침, 송군장과 윤제술이 제자)와 호남의병을 일으키고, 거창의 곽종석과 연락하여 영남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인물을 물색 중 군사전략에 뛰어나다는 군수출신 임병찬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장성의 기우만 이항선 등도 그를 찾아와 함께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을 권했다. 1906년 3월 24일 73살의 최익현이 그의 묘려(墓廬)를 직접 찾아왔다. 이날 임병찬은 그를 맞아 사제(師弟)의 의로써 구국의 길에 동참키로 다짐했다.
의병의 봉기는 그 해 6월 4일(윤 4월 13일) 태인(현재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첫 깃발이 올랐다. 이에 앞서 임병찬은 자신의 재산 5백여 석을 처분, 군량과 화승포 구입에 사용하였다. 또 각 도와 군에 윤통문(輪通文) 군율(軍律) 등을 발송하는 등 의병모집과 군량 및 병사훈련을 도맡았다.
무성서원의 강회(講會)에는 80여명의 의병이 뜻을 같이 했다. 그들은 태인읍을 거쳐 정읍을 공략했다. 인근 흥덕 등에서 호응해 오는 의병들이 크게 불어났다. 순창 구암사에서는 포수 채영찬이 다른 포수 수 십명을 데리고 합류해 왔다. 이어 곡성을 점령하고 순창으로 회군했을 때는 의병의 수가 6백여 명으로 증가했다. 순창에서는 왜군과 접전하여 격퇴시켰다.
그들이 각 고을에 도착하면 군수는 도망하거나 엎드려 사죄하며 환영했다. 그것은 그들이 의병이기 이전에 거유(巨儒) 최익현과 군수를 지낸 임병찬이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순창군수 이건용은 의병에 참가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고 진영은 9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순창에 진을 치고 있던 6월 12일, 전주와 남원에 주둔한 진위대가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일제의 침략을 놓고 같은 동포끼리 싸울수 없어 의병을 해산토록 했다. 하지만 잠깐사이, 중장군 정시해가 전사하고 최익현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선 최제학 나기덕 이용선 유해용등 13명은 체포되었다.
이들은 전주 진위대를 거쳐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었다. 당시는 군대해산 전이었지만 군사지휘권이 사실상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다. 일본군은 최익현에게 3년, 임병찬에게 2년, 그리고 나머지 의병들에게 태(笞) 1백대에서 감금 4개월까지를 선고했다. 결국 최익현과 임병찬은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고 최익현은 그곳에서 단식절명하고 말았다.
임병찬은 1907년 1월 방환되었으나 그해 말 전주주재 일본수비대에 다시 붙잡혀 천안수비대에 갇혀야 했다. 같은 해 말 순창군의 노촌 헌병소장이 일본 천황이 내렸다는 은사금 첩지를 전하러 왔지만 이를 냉정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임병찬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를 도모했다. 1912년 고종의 밀조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조직을 확대 강화했다. 그 해 12월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보내 이인순 곽한일 전용규 등과 협의케 하는 한편 유생 임태홍 임창현 김덕장 등과 같이 호남지방의 조직정비에 착수했다.
1913년 2월 전라남북도 순무총장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그는 호남지방의 조직을 완료하고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이명상 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에게 ꡐ국권반환요구서ꡑ를 제출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주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많은 간부와 동지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경무총감과 면담, 국권반환및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6월 1일 재차 총리대신과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일제에 의해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며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독립에의 염원을 안은 채 단식으로 목숨을 거두었다.(최익현과 함께 한말 의병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유생) 저서로 「돈헌문집」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1871~1909) : 정읍시 덕천면(당시 고부군)
증산교단은 대종교 화랑도 천도교와 함께 한국민족종교의 대종을 이루는 한국고유의 종교이다. 한때는 교도가 없는 고을이 없을 정도였고 교조 증산대성(甑山大聖)의 종교사상은 이후의 한국종교에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 증산종단과 증산교의 종교사상이 정상적인 평가를 받아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경상도 경주 용담(龍潭)에서 최수운(崔水雲)이 동학(東學)을 창도한지 40년 뒤 모악산 밑에서 정읍 고부(古阜)의 유생(儒生) 강일순(姜一淳, 1871~1910, 호 증산)이 동학과는 다른 대도(大道)를 얻었다고 부르짖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증산은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객망동에서 대를 이어오면서 농업에 종사하여 온 아버지 강흥주와 어머니 권씨 사이에서 그곳 강씨 문중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증산교계 교전인 대순전경(大巡典徑)에 의하면 권씨의 태몽에 하늘이 갑자기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커다란 불덩이가 내려와 자신의 온 몸을 덮고 천하가 밝아짐을 보았다고 한다. 이어 잉태한지 13개월만에 증산을 낳았는데 태어날 때 아버지의 꿈에 하늘에서 두 선녀가 내려와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꿈을 깨어보니 그가 태어날 방에는 이상한 향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는 다른 학우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우수하였다. 그러나 가세가 곤궁하여 한때 남의 집에 고용살이까지 해야 하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틈틈이 견문을 넓혀 소년시절에 이미 학자로서의 명망을 얻을 정도였다. 그가 21세 때에 김제군 초처면 정씨 집안으로 혼인했는데 정부인은 한쪽 다리가 약간 짧아서 절름거렸다. 이 사이에 딸 강순임을 두었다.
증산 강일순 연보
▲1871년 정읍 고부에서 출생
▲1892년 김제 초처면 정치순과 혼인
▲1895년 처가에서 서당 열고 훈육
▲1897~1900년 전국 일주하며 득도
▲김경흔으로부터 태을주(증산교 주문) 얻어 1901~1908년 모악산 대원사에서 기도
▲모악산을 중심으로 김형렬 집 등에 머물며 천지공사 벌임
▲1909년 김제 동곡약방서 의통 (괴병 비법)을 남기고 화천(별세)
증산은 한 때 처가에서 서당을 열어 훈장으로 있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유(儒)불(佛)선(仙)의 모든 책을 비롯, 의복(醫卜) 음양(陰陽) 술서(術書)까지 탐독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그를 비범한 도인(道人)이라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따라다녔으나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여한 사람들에게 이 싸움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동학혁명이 끝난 후의 사회적 참상과 혼란을 목격한 그는 국가와 민족,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천지의 대도를 얻고자 결심했다. 이후 그는 1897년부터 3년 간 세상의 실상을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이 기간에 충청남도 비인 사람인 김경흔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 주문(흠치흠치太乙天上元君흠치리야都來흠리함리娑婆아)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에서는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주역(周易)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특히 김일부는 ꡐ정역ꡑ을 저술하여 조선후기 신종교에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후천개벽(後天開闢)(동학과 증산교에서 주장하는 현세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는 사상).의 이론적 틀을 세운 사람인데 그와의 만남은 강일순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산은 이처럼 여러 종교의 교리에 몰두하는 한편 이보(耳報)와 영안(靈眼) 등 초능력을 배우기도 하고 선후천(先後天)의 천기변화를 가늠하며 국제정세와 동서의 문화형태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구도기간 중 그는 전혀 직업을 갖지 않고 방랑하며 이따금 기이한 능력을 보여 광인이나 기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는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31세(1901년)때 모악산 동편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 수개월간 송주(頌呪)하며 기도와 이적을 행했다. 득도와 이적 소문을 듣고 찾아온 김형렬(金亨烈)을 상면하고 그 후 김형렬 집(당시 전주군 우림면 하운동)을 본거지로 삼고 자신이 옥황상제로서 인간세상에 하강한 몸으로 ꡐ이제 來世를 當하여 앞으로 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순결한 마음으로 天地公庭에 참여하라.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ꡑ하고 김형렬 및 그를 따르는 몇몇 종도들에게 태을주(太乙呪)와 시천주(侍天呪) 칠성경(七星經) 오주(五呪) 등을 읽힘으로써 증산교의 교단은 시작되었다. 이 때 증산을 신인(神人)으로 신봉하고 입교하려고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지자 고수부(高首婦)의 집을 수부소(首婦所)로 정하고 공사에 열중하였다.
이후 김제군 금산면 동곡(銅谷)리에는 광제국(廣濟局), 차경석의 집을 포정소(布政所), 김경학의 집을 대학교(大學校), 신경원의 집을 복록소(福祿所), 신경세의 집을 수명소(壽命所) 등으로 정하여 각지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을 거느려 나갔으며 종교적인 체계는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망정 그 규율은 점차로 정돈되었다.
교리면에서 볼때도 유불선 삼교(三敎)는 물론 당시 성행하던 동학에서 배제하던 서교(西敎, 기독교)까지도 흡수시키려는 큰 안목으로 대국적인 종교활동으로 그 면모를 일신시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그러던 중 6월 선정(禪定)에 들어가 9일만인 7월5일 홀연 탐음진치(貪淫瞋癡)의 사종마(四種魔)를 물리치고 광명혜식(光明慧識)이 열리며 천지의 현법(現法)을 깨닫는 이른바 천지공사를 마지막으로 1909년 6월 24일 화천(化天, 사망)한다. 자신의 화천을 예언한 다음 미래에 다가올 괴병을 극복할 수 있는 비법인 의통(醫統)을 전했던 그는 화천 이후 교단의 창시자로서뿐 아니라 절대자 또는 상제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까지 그를 따르던 종도(宗徒)는 최초의 종도인 김형렬을 비롯하여 모두 64명이었다.
증산은 음양상수(陰陽象數)의 이법에 의해 우주가 움직이며 이 운도(運度)를 상제(上帝)의 권능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명계(神明界)와 인간계가 서로 밀고 당기므로 운도와 신명․인도공사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지상선경(仙境)을 이룬다는 것. 인도공사의 과정에서 사람이 심기를 수련하면 신격화되어 신명과 교통을 하고, 도통이 되어 모든 일에 달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증산교계 번창에서 현재까지
증산이 화천하고 종도들이 흩어질 무렵 그가 옥황상제의 자리로 또는 미륵으로 돌아간 것이므로 때가 되면 다시 출세할 것으로 믿고 있던 수부소의 주인이었던 고수부(高首婦, 차경석의 이종누이 고씨)가 신체에 이상한 기운을 느껴 증산을 교조로 하고 스스로 교주가 되어 하나의 종교집단을 창설(1914년), 선도교(仙道敎)라는 교명을 붙여놓고 포교를 시작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단의 형성기를 맞게 된다. 이 때 고수부의 언행이 증산의 행위와 비슷하고 그의 기행이 또한 증산의 이적과 흡사하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자 이 소문을 전해들은 증산을 따르고 신봉하던 이들이 증산이 다시 이 세상에 재림한 것이 아닐까 하여 모여들었고 일반 신도들도 모여들어 교세는 날로 번성하여 갔다. 이렇게 차차 교세가 확장되어가는 중 종도 차경석이 교권을 쥐자 1919년 고수부는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 가서 교당을 세우고 태을교(太乙敎)라 이름하였다. 이를 기화로 종도들이 각각 자신이 정통한 교통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씩 교명을 들고 교세를 형성, 김형렬이 미륵(彌勒)불교, 안내성은 증산대도교, 이치복은 제화교(濟化敎), 박공우는 태을교(太乙敎), 문공신의 교파, 김광찬의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으로 교파가 분립되어 갔다. 다시 이 교파들 중에서 보천교의 간부였던 신현철의 태을교본부, 이상호의 대도교, 최위석의 서울대법사, 채경대의 삼성교, 강상백의 수산교, 김승례의 김강도, 김환옥의 보화교, 여처자의 선도교, 김계수의 무을교, 김종렬의 임술교, 한병수의 인천교, 박인택의 원군교, 장기준의 순천교(법문파), 유원봉의 미륵계 등 실로 많은 분파가 발생했으며 다시 이들의 교파중에서 분파를 거듭한다.
이처럼 강일순이 죽은 뒤 그 제자들에 의해 하나의 종교집단 체제를 점차로 갖추게 되면서 한때는 80개의 교파를 이룬 대교단이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는 보천교와 같은 1백만 교인을 헤아렸다고 하는 교파도 있다. 이들 대부분 모악산 지역에 산재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도 있고 하여 한때 침체상태를 면치 못했으나 8․15해방과 함께 다시 일어나 오늘날 60여개의 교파를 이루며 우리나라 신흥종교계에서 굴지의 교단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강오 전 전북대교수는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를 계통별로 분류하여 강일순을 교조로 하는 모든 교파를 통털어 증산교계라 불렀다. 일제시대 때 증산교계에서 발생한 보천교는 후천개벽으로 인한 새로운 왕국건설과 내세의 액운을 주창하면서 교인들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모아들이고 혹세무민하는 사교로 지목을 받은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 뒤 상해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유동렬장군이 주도하여 증산교통정원(甑山敎統整院)을 만들어 증산교계의 모든 교파통합운동을 벌이면서 비행기 헌납금을 낸 바 있었는데, 6․25사변 때 이것이 원인이 되어 공산당으로부터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었다. 또한 증산교계의 모든 교파가 절박한 내세와 신화도통(神化道通)을 주장하는 것이 교리의 핵심으로 하고 있어 일반 세인들로부터 조소를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같은 실정에서 증산교 교단은 대부분 침체를 거듭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증산교단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73년 서울에서 ꡐ증산진법회ꡑ가 출범, 지금까지의 포교방법을 탈피해 많은 학자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벌인 끝에 ꡐ증산사상연구회ꡑ라는 학술단체를 조직하여 증산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오고 있다.
경상도 함안 출신의 조철제(趙哲濟;일명 鼎山)를 중심으로 하여 파생된 태극도(太極道)의 도주(道主)가 죽고 그 유명(遺命)대로 박한경이 제2세 도주가 되었는데, 조철제의 아들인 영래(永來)와의 사이에 알력이 심해졌다. 그 갈등이 노골화하자 박한경이 추종자들과 상경하여 성동구 중곡동(中谷洞)에 자리를 마련하고 '대순진리회'라는 간판 아래 포교를 시작하였다. 분파된 여러 갈래의 증산교 교파들 중에 가장 조직성을 갖춘 종교단체로서 능동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며 활발하게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서울로 옮겨와 사회봉사 활동도 병행하며 교세가 급성장하자 1971년 종단 본부 건물인 도장을 짓고, 1987년에는 여주에 대규모의 수도장을 건립하였다. 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포천군 포천읍에 대진대학교을 설립, 운영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고등학교 7개, 크리스트교(개신교, 카톨릭 포함)-불교-원불교 다음의 교세로 성장)
증산교는 사교(邪敎)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현재 상천법지(象天法地), 즉 하늘의 법을 지상에 정착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지상선경(地上仙境)을 목표로 한국민족종교로서의 틀을 다지고 있다.
3. 3대 부통령 함태영(1873~1964) : 김제시 진봉면
(중학교시절 우리고장에서 부통령이 나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하고 큰 자부심)
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咸台永)은 한말의 명법관이요,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인물이다. 또한 기독교 교직자로서 평생 우리나라 기독교 발전에 헌신해 왔다.
송암(松岩) 함태영은 풍운의 한말,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한 1873년 김제군 진봉면 정당리에서 태어났다.
이 일대에는 강릉 함씨 일족이 3백여 년 전부터 자리잡고 터를 일구어 왔다. 함씨 일가는 남의 논밭을 얻어 경작하는 처지여서 그렇게 윤택한 생활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주가 있어 부친 함우택(遇澤)은 남의 집에 서당을 차려 놓고 훈장을 하였고 작명 관상 풍수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김제 만경 일대에서는 함학자나 함풍수 함지사(地師)라 불렸고 50여 살에 전라좌수영 도시무과에 합격한 후에는 함의관(議官)이라 불렸다.
함태영은 1889년 16살때 부친이 벼슬길에 올라 서울로 떠날 때 같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나중에 통정의관(通政議官)과 함께 한성부원(漢城府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문호 개방과 동학혁명 등 갈수록 갈피를 못잡아가는 국내외 정세속에서도 사숙을 전전하면서 면학에 힘을 기울이며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1895년에 함태영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였다. 이 법관양성소는 대한제국 조정에 의해 세워진 법관양성 전문기관으로 서양의 사법제도를 이 땅에 첫 도입한 것이다. 그는 6개월 과정의 이 양성소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22살에 법관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때 같이 입학한 사람 중에는 이준 열사가 있었다.
함태영은 이듬해 3월 한성지방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돼 처음으로 법관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1910년까지 경기재판소 판사, 한성부재판소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法部) 법률기초위원, 대심원 판사 등 다채로운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나 불의를 응징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몇 차례 면직의 고비를 겪어야 했다.
함태영 연보
▲1873년 김제군 진봉면 출생
▲1895년 법관양성소 수석졸업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1898년 독립협회사건 입회검사,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대심원 판사 역임
▲191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헌장기초위원
▲1919년 3․1운동 주도
▲1921년 평양신학교 입학
▲1923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 회장
▲1949년 제2대 심계원장
▲1952년 제3대 부통령
▲1954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55년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64년 91살로 별세
그가 검사시절에 담당했던 사건 중 널리 알려진 것이 독립협회 사건이다. 독립협회는 미국에서 귀국한 청년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정부의 부패와 집권층의 비리를 용서없이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1898년 10월 이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시국에 관한 6개조의 개혁안이 채택되어 고종에게 주청하기에 이르렀다. 고종도 이를 약속했으나 실행하지 않자 독립협회는 정부탄핵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 혁파령(革罷令)을 내리고 중심인물 17명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수구파와 황국협회의 테러분자, 고종까지도 이들을 중죄로 다스리도록 압력을 가해 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 검사는 사건을 세밀히 조사한 결과 국체(國體)변혁의 대역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 적용죄명을 대명율(大明律) 잡범편 불위응조(不爲應條)로 바꿔버렸다. 결국 담당재판관 한규설(1905 을사조약시 참정대신으로 반대)은 피고 이상재 남궁억 등에게 각각 태형(笞刑) 40대에 처한다는 재결을 내렸다.
이러한 강직함이 발단이 되어 그는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법관으로서 그의 탁월한 능력을 높이 산 조정은 그를 다시 재임용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미 그가 물러나기 3년 전부터 공소원 검사로서 뜻을 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이때부터 함태영은 잃어버린 조국과 자신을 찾고자 독실한 기독교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11년 장로교 연동교회 장로에 취임하였고 1918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헌장기초위원으로 한국교회사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에 들어 함태영은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하였다.
3․1운동은 천도교의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그리고 기독교의 이승훈 함태영,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주동이 되어 거족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 중 기독교 계통을 규합하는데 있어 함태영의 활약은 빼놓을 수 없다.
ꡐ함태영 전기ꡑ를 쓴 김정준 교수(한국신학대)에 따르면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추진되었다. 하나는 이승훈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지방의 장로교 계통, 다른 하나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감리교 계통의 움직임이었다. 이중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함태영이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그 중심적인 위치에서 3․1운동을 이끈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는 오화영 정춘수 오기선 등과 자주 만나 기독교의 단일화에 힘을 기울였거니와 다시 천도교의 최린 등과도 만나 거사를 같이 하는데 주요 역할을 하였다. 함태영은 교회내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호남 영남 평안도 등 지방별로 교회대표자를 방문하여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에 서명할 도장을 받아 두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함태영이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규합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33명이 아닌 48명(당초 거사에 참여한 사람은 49명이었으나 한사람이 이탈하여 옥고를 치른 사람은 48명)에 포함된 사실이다. 이는 거사 이후에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최린 등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물러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일로 함태영은 주동인물인 손병희 최린 한용운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승훈 등과 함께 징역 3년의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출옥 후에는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수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교직자의 활동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1923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과 1929년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 1930년 조선예수교 서회(書會) 이사, 1933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 회장, 1939년 조선신학교 이사 등을 역임했다.
8․15 광복과 함께 그는 미군사령관의 최고 자문기관인 ꡐ민주의원(의장 이승만)ꡑ에 선출되어 정치활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1949년에는 지금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제2대 심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제3대 부통령에 출마,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의 그늘에 가려 이렇다할 업적을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1954년에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에 취임하였고 1955년에는 대한기독교 장로회총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다사다난한 세월을 헤치며 항상 인화단결을 신념으로 살아온 그는 1964년 91살을 일기로 영면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어 의정부에 안장되었다. 이에 앞서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4. 한국 사법의 화신 김병로(1888~1964) : 순창군 복흥면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그는 우리나라 사법의 화신이요 법조계의 큰 스승(師表)과 같은 존재다. 청빈과 강직, 의연한 자세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기틀을 다졌으며 또한 단연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꼽힌다. 가인이 1953년 10월 제1회 법관훈련 회동에서 당부한 「법관의 몸가짐론」은 지금도 법조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금과옥조로 회자된다.
그것은 첫째 세상사람으로 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둘째 음주를 근신해야 되겠다는 것, 셋째 마작과 화투등 유희에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것, 넷째 어떠한 사건이든지 판단을 하기 전에 법정 내외를 막론하고 표시해서는 안되겠다는 것, 다섯째 법률지식을 향상시키고 인격수양을 해야 하겠다는 것 등등이다.
이같이 그는 법관의 올바른 몸가짐이야말로 사법부 독립의 결정적 요소로 생각했다. 그의 올곧은 자세야말로 이승만 정권의 갖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원동력이었다. 며느리의 부탁을 받고 손자의 중학교 입시결과를 알아 보러 학교에 갔던 가인의 비서관이 혼났던 일화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그의 추상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법대 최종고 교수의 표현대로 「이 나라 사법의 틀과 뼈대를 세워 놓은 터주요 어른」이었던 가인은 1888년 1월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가인의 15대 할아버지는 호남의 거유(巨儒) 하서(河西) 김인후요, 아버지 상희(相熙)씨는 사간원의 정언(正言)을 지냈다. 어머니 고씨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 2대 독자였던 가인은 어린 시절 무척 외롭게 자랐다. 여섯살 나던해 할아버지가,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그래서 8살이던 1896년 집안의 기둥이던 할머니 박(朴)씨가 가인을 위해 독서당을 세워 한문공부를 시켰다. 이어 1899년 네살 위인 연일(延日) 정(鄭)씨를 신부로 맞았으나 이듬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12살 나이에 집안의 가장노릇을 해야했다. 가인은 1902년부터 2년여 동안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던 간재 전우(田遇)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6세 되던 1904년 개화지 목포로 옮겨 일신(日新)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가인 연보
▲ 1888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출생
▲ 1902년 간재 전우 문하에서 성리학 배움
▲ 1906년 순창에서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함
▲ 1910년 일본대학 전문부 등록
▲ 1915년 일본대학 및 명치대학 법과졸업,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고등연구과 수료, 경성전수학교 조교수
▲ 1919년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
▲ 1920년 변호사 자격 얻음, 항일사건 1백여건 변론
▲ 1924년 조선변호사협 이사장
▲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 1946년 미군정 사법부장 취임
▲ 1948년 초대 대법원장 취임
▲ 1957년 대법원장 정년퇴임
▲ 1963년 민정당,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 1964년 76세로 별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분개하여 자살할 것을 생각했으나 그만두고 귀향, 순창에서 최익현(崔益鉉)의 의병에 가담하는등 두차례에 걸쳐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9년 이웃 전남 담양군 창평으로 집을 옮긴후 고정주(인촌 김성수의 장인)가 세운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속성과 6개월을 마치고 22세 되던 1910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대학 법과 청강생으로 등록했으나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다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明治)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1915년 일본대학 및 명치대학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대학원 과정까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교수로 부터 일본변호사 시험 권유를 받았으나 조선인은 응시자격이 없어 포기하고 만다.
이 해에 귀국, 경성전수학교(서울 법대 전신) 조교수로 발령을 받고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 법대 전신)에도 출강한다. 하지만 변호사 자격 취득을 위해 1년 동안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를 거쳐 32세되던 1920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대동단사건을 비롯 김상옥사건, 조선공산당사건, 6․10만세, 옥구군 소작쟁의, 원산노동자 파업등 1백여건 이상의 변론을 맡아 「민족변호사」또는 「사상변호사」로서 열변을 토하였다. 특히 백두산 인근 2백여호를 집단학살한 펑펑고을 화전민사건은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현지에 내려가 일본의 만행을 파헤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대구학생비밀결사, 광주학생사건, 단천농민학살, 간도공산당 사건과 안창호 변론 등에 나서게 된다. 이같은 변론과 함께 1924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이사장,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선출되어 국내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축을 이룬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가인의 활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내리고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가족을 데리고 은거, 농사를 지으며 수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해방이 되자 가인은 송진우․백관수 등과 함께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여운형 등 건준세력과의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다. 이어 미군정 및 남조선과도 정부의 사법부장 자리를 맡았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 9년4개월 동안 우리나라 사법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재임중 가인은 법전편찬사업을 주도하고 법원의 체계를 세우는데 심혈을 쏟았다. 판결을 둘러싸고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면서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나갔다. 이처럼 청빈하고 지조가 높았던 가인도 퇴임후 정치에 투신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4․19혁명의 불길 속에서 자유법조단을 결성, 뛰어든 1960년 7․29 선거에 고향 순창에서 민주당의 홍영기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게다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정치를 군인에 맡길수 없다하여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는 등 야당 단일화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병석에 눕게 된 가인은 1964년 1월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수유리에 유택을 모셨다.
5. 한국정치사의 큰 족적 백관수(1889~1950납북) : 고창 성내면
ꡒ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 최고 민족의 하나이다.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요, 한번도 통일한 국가를 잃고 이민족(異民族)의 실질적 지배를 받았던 일은 없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에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얻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이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기필코 이룰 것을 선언하노라ꡓ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디딜 틈없이 모여 들었다.사회자의 소개로 등단한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는 차분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일본경찰의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래도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 되었고 이어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끝이 났다. 이날의 선언이 바로 역사적인 「2․8선언」으로 20일 뒤 조선을 뒤흔든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에는 백관수를 비롯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윤창석 김상덕 서춘 최근우 이종근 송계백 이광수 등 11명이 서명했다. 당시 동경에 없었던 이광수와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의 대표는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 되었다. 이로 인해 백관수는 1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함께 한국 근대사에 큰 맥을 이룬 근촌(芹村) 백관수는 1889년(고종 26)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태어났다. 선조때의 명신이자 이름난 선비였던 백인걸(白仁傑)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도진(道鎭),어머니는 고씨(高氏)였다.
백관수 연보
▲ 1889년 고창군 성내면에서 출생
▲ 1910년 군산 금호학교 졸업
▲ 1915년 경성법률전수학교 졸업,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 1917년 일본 명치대학 법과 입학
▲ 1919년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 주도로 투옥
▲ 1926년 조선일보 편집인겸 영업국장
▲ 1927년 신간회 창립위원, 제2회 태평양회의 참석
▲ 1937년 동아일보 7대 사장 취임
▲ 1945년 조선민족당 창설, 한국민주당 창당
▲ 1946년 민주의원, 입법의원
▲ 1948년 제헌국회의원 당선, 법제사법위원장및 헌법기초위원
▲ 1950년 6․25 사변으로 납북
그는 5살부터 호남의 거유인 간재 전우(田愚)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다. 하지만 당시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민비 시해사건이 터지는등 국내외 정세가 뒤숭숭하던 때였다. 그가 15살되던 해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에는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다. 이 무렵 백관수는 평생의 동지 김성수와 함께 신학문의 스승인 한승이(韓承履)를 만나게 되어 2년에 걸쳐 군산 금호학교에서 물리 수학 영어 등을 배웠다.
이에 앞서 그는 김성수를 통해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송진우는 김성수를 집으로 찾아갔다 김성수가 백관수와 더불어 변산 내소사 청연암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같이 입산했던 것이다. 송진우와 김성수는 담양의 창평학숙에서 만나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때 의기가 투합, 입지(立志)를 세운 세소년은 나중에 까지 서로 협력하며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금호학교를 졸업한뒤 김성수와 송진우는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고 백관수는 부모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경성법률전수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 학교를 마치고 바로 YMCA에 들어간 백관수는 민족지도자인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사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적극적인 YMCA 활동 덕분에 백관수는 1917년 일본에 유학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28살의 만학이긴 하나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明治) 대학 법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학우회에 가입, 주도적인 활동을 벌였다.
때마침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자 국내외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이 힘을 얻게 되었다. 장덕수가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고 이승만의 밀사가 서울을 다녀 가는등 자못 움직임이 활기를 띠었다.
동경에 유학중이던 백관수도 송계백을 송진우에게 보내 독립선언서 내용을 전달했다. 이 선언서는 백관수가 기초하고 춘원 이광수가 손을 본 명문으로 꼽힌다. 동경에서는 이 선언서를 인쇄할 곳이 없으니 활자만 구해 보내주면 국내와 시기를 맞춰 동시에 거사하자는 뜻에서 였다. 그러나 송계백이 상처를 입으면서 까지 짊어지고 온 활자는 일경의 감시 때문에 인쇄시설을 확보하지 못해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독립선언서는 프린트에 의존해 찍어야 했다. 유학생 10여명이 백관수의 하숙집에 모여 1주일 동안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1만부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2․8 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1920년 3월 출옥한 백관수는 중단했던 학업을 1921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후 기독교청년회의 일을 보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 1924년 조선일보사 취체역(取締役)을 맡았으며 1926년 12월부터는 편집인과 영업국장을 겸임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손문(孫文)이 사망하는가 하면 조선공산당이 처음으로 조직되는등 국내외 정세가 혼미했다. 이에 자극받은 백관수는 민족주의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김준연 안재홍 백남훈 홍명희 최두선 등과 함께 1925년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결성했다. 그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가 국내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연정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는등 민족진영의 단합을 시도했다.
1927년 2월에는 민족 단일조직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자 이에 가담했으며 7월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제2회 태평양회의에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 사설 ꡐ보석(保釋)지연의 희생ꡑ이 문제가 되어 주필 안재홍과 함께 구속되고 이로 인해 조선일보는 1년4개월간 신문발행이 중단되었다. 1932년에는 홍문사(弘文社)를 설립, 월간지 동방평론을 발간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3년만에 폐간을 당하였다.
1937년 5월 그는 동아일보 제 7대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9개월만에 막 해제 복간된 상태였다. 그는 발행인과 편집인에다 편집국장까지 맡아 일제의 집요한 언론탄압에 맞서야 했다. 일제의 한글교육 폐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전쟁 강요 등이 그것이었다. 이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자 일제는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했다. 그는 이에 저항하여 끝내 폐간계를 날인하지 않아 1개월간 구금되는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로부터 해방되던 해까지 5년동안 낙향, 시작(詩作)과 붓글씨를 벗하며 침묵의 나날을 보냈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상경, 조국의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정국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등 어수선했다. 좌우익의 이니셔티브 다툼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김병로 등과 함께 좌우익의 타협을 모색했으나 좌초되고 원세훈 조병옥 이인 나용균등 민족진영으로 조선민족당을 발기했다. 이 발기회가 바로 한국민주당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는 한때 한민당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에는 고향인 고창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초대 법사위원장및 헌법기초위원으로서 헌법제정및 정부수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50년 서상일과 함께 첫번째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2표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그로 부터 석달후 발발한 6․25 사변은 그에게 돌이킬수 없는 비극을 안겨 주었다. 서울 원남동 자택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공산군에 의해 강제 납북되고 만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6. 현대사의 거인 김성수(1891~1955) : 고창군 부안면
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19발의 조포가 울려 퍼졌다. 관공서와 가정에 조기가 게양되고 묵념 시간도 마련됐다.
「…어진 마음 따슨 손길 길이 두고 못 잊으라 / 온 겨레 마음의 별 인촌선생 그 이름이여」. 시인 조지훈이 쓴 가사에 나운영이 작곡한 조가가 흐르는 가운데 인촌 김성수 선생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함태영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이기붕 국회의장과 김병로 대법원장 등을 부위원장으로 한 국민장의위원회가 구성돼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엄했던 장례식은 바로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근현대사에 인촌이 차지했던 비중을 함축적으로 드러낸 장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같은 각도에서 보더라도 긍․부정의 양면적인 면을 갖는 경우가 많아 일도양단으로 평가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인촌역시 격동기 역사에 대한 이념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엇갈린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인촌의 위치와 영향력, 이념적 가치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도 인촌이 남긴 족적 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다. 우리 근현대사를 통틀어서도 한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에서 인촌 만큼 두루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도 찾기 힘들다.
정치적으로 대한민국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뒤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교육 및 사업자로서 고려대와 동아일보, 경성방직의 창립자다. 생전은 물론 유명을 달리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까지 정치가․교육자․사업가로서 추앙받을 수 있는 인촌의 굵직굵직한 경력과 업적들이다.
인촌 김성수 약력
▲1891년 고창 출생
▲1908년 군산 금호학교 졸업
▲1914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1915년 중앙학교 인수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1920년 동아일보 창간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
▲1932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 취임
▲1945년 한국민주당결성
▲1946년 고려대 설립, 민주당 수석 총무
▲1951년 5월~52년 5월 제2대 부통령
▲1955년 병환으로 별세
◇교육자로서의 인촌
인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연구자들이라 할 지라도 교육에서 만큼은 인촌의 공을 높이 사는 것 같다. 인촌 역시 여러 분야중에서도 특히 교육에 관심을 두었고, 교육자로 불리우길 원했다 한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사회 첫 발을 중앙학교 인수로 시작했으며, 다른 분야로 사업을 늘릴 때도 학교 일만은 거의 손을 떼지 않았던 사실에서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읽게 한다.
인촌은 일본 유학생활을 통해 일찍이 민족 교육에 눈을 뜬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육을 통해 근대문명국가로 발전한 일본을 직접 체험한 인촌은 근대적 시설을 갖춘 민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교육을 통한 실력 향상만이 광복의 길이라는 신념을 유학시절에 갖게 됐다는 것.
1929년부터 1년8개월간 유럽과 미국의 여러 명문대를 돌아보며 대학 설립에 대한 꿈을 확고히 한 인촌은 1932년 당시 경영난을 겪던 민족 유일의 전문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보성전문 당시 6만여평의 부지에 지어진 고딕식 석조건물이 고려대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뛰어난 조직력 사업기반 넓혀
정치적으로 인촌은 잘 알려진 대로 지주 집안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집안의 경제력은 그가 교육자 혹은 사업가로서 자리잡는 데 큰 힘이 됐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사회 첫 발을 내딛은 중앙학교 인수에서부터 경성방직, 동아일보 설립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모두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 중앙학교 인수 당시에 양부로부터 3천 두락의 토지를 받았고, 보성전문 인수때는 생부로부터 5천석 추수의 토지와 양부로부터 5백석 추수의 토지에 6천여평의 대지를 받았다 한다. 자수성가가 아닌 집안의 경제력이 인촌을 있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부유한 집안이었던 배경 만으로 인촌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그 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도 많았지만 모두 인촌 처럼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인촌은 집안의 재산만으로 사업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을 만들 때 1인 1주 모집운동을 벌여 전국의 유지들을 끌어들였고, 보성전문학교나 동아일보 설립때도 국민주주 운동을 통해 소요 자금의 상당 부분을 마련했다.
◇인격이 재력 앞서
춘원 이광수는 1931년 쓴 「김성수론」에서 인촌의 성공을 「시세(時勢) 2+재력 3+인격 5」라는 공식으로 풀었다. 춘원 처럼 공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인촌을 접한 많은 인사들이 인촌의 성공을 그의 인격에서 찾고 있다.
현민 유진오는 선비이면서 온후하고 성실한 인품에다 평생을 좌우명으로 삼은 「공선사후」(公先私後)에 입각한 정론과 정도를 걸었다고 인촌을 평가했다.
미당 서정주는『어려운 시대를 살던 동포들에게 타작마당이 되어주고 길도 되어주었으며 때로 냇물이 되어주고 논밭이 되어준 고향 같은 분』으로 그렸다.
인촌의 절약 정신은 잘 알려진 사실. 서울에서 고향을 찾을 때 5원을 아끼기 위해 20㎞거리의 정읍에서 줄포까지 걸었으며, 전차비를 아끼기 위해 학교까지 10㎞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다 한다.
◇人材 부자
인촌을 이야기 할 때 「인재의 거부」라는 말이 꼭 따라다닌다.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는 평생 지기였으며, 현상윤․김병로․최두선․김준연․조만식․현준호․조소앙․김도연․홍명희 등은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인물들. 인재들의 뒷바라지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주변에 항상 사람이 모였던 이유가 될 것 같다.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백30명에 이른다는 게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씨의 이야기다.
◇정치인으로서 인촌
일제 식민지 아래 사업을 키우고, 이승만의 단독정부를 지지한 것이 진보적 연구자들로부터 「기회주의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또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한 글과 연설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체제내 민족운동을 일제에 타협적이라는 등식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들도 후에 전향해 일제 총독 정치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교육 운동이야 말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해방후 소용돌이 정국에서 인촌은 한민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민당에 대해서는 친일파와 지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결집한 보수적 성향의 「지주당」이라는 혹독한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격동기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긍정적 면도 무시할 수 없다. 허정은 인촌이 개인적 야심을 가졌다면 정치적으로 훨씬 큰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거인이었다고 술회했다.
7. 국회부의장 나용균 (1895~1986) 정읍시 영원면
우리나라 정치사를 돌아보면 대개 타협과 화합 보다는 갈등과 반목이 먼저 떠오른다. 최근 여야(與野)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태만 보아도 독선과 아집, 그리고 상대의 발목잡기가 일상화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를 수렴․조정해, 국민을 편안케 해야할 정치권이 오히려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상대의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대인 풍모의 정치, 국민들은 그러한 정치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백봉(白峰) 나용균(羅容均). 그는 이러한 때일수록 떠오르는 인물이다.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야당지도자로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선각자. 금도(襟度)를 지닌 정치인.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전형적인 신사(紳士). 나용균은 이같은 인물로 현대 한국정치사에 녹녹치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나용균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1895년 11월 정읍군 영원면 운학리(현 정읍시 영원면 운학동)에서 나도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근동 일대에 널리 알려진 부호였다. 그리고 그의 집과 가까운 이웃(이평면 조소리)에 동학혁명의 횃불을 높이든 전봉준(全琫準)이 살고 있었다. 전봉준은 나(羅)씨댁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나용균의 할아버지 나정집(羅正集)은 그의 비범함을 알고 총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동학혁명이 끝나자 나정집은 동학에 내응(內應)했다는 혐의로 전라감영에 붙들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나용균이 커서 독립투쟁과 민주화 운동에 나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소년시절 완고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19살 나던 1914년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동경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수학하던 중 1919년 「2․8 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2․8선언은 한국인의 민족혼을 동경 한복판에서 떨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날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 3백여명이 운집했다.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가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경시청 순사들이 들이닥쳐 주모자급 12-13명을 간다(神田)경찰서까지 연행했다. 나용균도 구금 투옥되었다. 그는 당시 운동자금의 대부분을 대었고 감방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나용균 선생 연보
▲1895년 11월 정읍군 영원면에서 출생
▲1919년 2월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2․8독립선언 주도로 투옥
▲1919년 7월 상해 망명, 대한민국임시 의정원 의원 피선
▲1921년 원동혁명자대회(모스크바) 참석
▲1923년 영국 런던대 유학, 1930년 귀국
▲1945년 한국민주당 결성, 사무국장 맡음
▲1948년 제헌의원 당선, 국회내무치안위원장
▲1950년 민주국민당대회 의장, 1954년 정책위원장
▲1958년 4대 국회의원, UN총회 대표
▲1960년 5대 민의원 당선, 보건사회부 장관
▲1961년 가족계획협회 조직, 초대회장
▲1963년 6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1964년 국제의원연맹대회 부의장
▲1966년 아시아의원연맹대회 운영위원장
▲1979년 광복회, 독립동지회 고문
▲1980년 제헌동지회 의장
▲1986년 별세
나용균은 1919년 7월, 출옥하자 마자 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길을 떠났다. 상해에서는 마침 임시정부 의정원회의가 열렸고 다른 2명과 함께 전라도 대표로 선출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이에 앞서 4월 1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는 이동녕의 주도로 상해․국내․노령(露領)등 각 지방의 대표자 29명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여 민주공화제를 표명하면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정식(李庭植)교수(美 펜실베니아大)가 1969년 박권상씨와 함께 나용균을 만난 대담록에 따르면 그는 1921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혁명자대회에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명 동방(東方)피압박자대회라 불린 이 대회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레닌이 소집한 것이다. 우리 대표들은 소련이 약소민족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그들의 원조를 끌어내기 위해 참석했다. 여기서 나용균은 한국의 독립도 공산혁명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에 서명을 강요당하였지만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이것은 대표의 수임사항이 아니고 사실과도 어긋난다하여 끝내 거절했다.
혁명자대회에 참석한후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내분에 휩싸인 독립운동 진영의 단합에 부심했다. 당시 독립운동은 지역별 인물별 이념별로 나눠져 그 정돈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22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고 그는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위원장에는 남형우, 회계에 김철․원세훈, 서기에 나용균․서병이 각각 뽑혔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나용균은 1923년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정세를 더욱 익히기 위해 영국유학을 결심하였다.
배를 타고 런던에 도착한 그는 처음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비가 너무 비싸 런던대학으로 옮겼다. 당시 런던대학에는 라스키 교수 등 정치 경제분야에 탁월한 교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7년을 체류했다. 이 기간이 그에게는 신사로서의 품성을 닦는 계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영국유학을 마친 그는 1930년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동안 고국에서는 그의 부친이 일제에 의해 18번 가택수색을 당하는등 자식의 뒷바라지로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귀국후 일제의 갖은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시골집에서 조용히 농원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토지개량사업을 해보라는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한때 전남에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당시 3천석을 추수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나용균은 동지를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사무국장에 선임되어 정치활동을 벌였다. 1948년 치러진 5․10 선거에 정읍(甲구)에서 출마, 무투표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국회 내무치안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미국 의회에서 대한(對韓)원조안이 부결되자 신익희 국회의장과 함께 국회대표로 미국에 건너가 원조안의 부활에 진력, 결국 교섭에 성공하였다. 같은 해 민주국민당 대회에서 의장에, 1954년 민주국민당 정책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에는 고향에서 다시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같은 해 UN 총회 대표로 뽑혀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60년에는 5대 총선에서 초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민주당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61년에는 가족계획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국민적 기대와 4․19 혁명 정신을 저버리고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신구파(新舊派)의 고질적인 싸움으로 치달았다. 민주당의 양대세력은 흔히 신파와 구파로 구분되었다. 1955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민국당이 반(反)이승만 세력을 모아 민주당으로 출발하는 과정에서 한민당- 민국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수구파(구파)와 자유당 정권에 반기를 들고 새로 야당대열에 합류한 신진세력(신파)이 한지붕 아래 모인 것이다. 추종하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조병옥파(구파)와 장면파(신파)라고도 불렸다.
신파와 구파의 대립은 1956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표출되기 시작해 1960년 대통령선거 후보 선출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1961년 2월집권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갈라섰다. 이같은 과정에서 나용균은 신구파의 화합에 앞장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5․16 쿠데타를 불러 들였다. 그는 1963년 민정당을 조직, 최고위원에 피선되었으며 6대 총선에서 당선돼 야당몫의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1964년에는 국회에 국제의원연맹지부를 설치하고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의원연맹대회에 참가, 대회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66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의원연맹대회에서 운영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이후 1979년 광복회와 독립동지회고문, 1980년 제헌동지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에는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1986년 91살로 작고,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8. 항일투쟁 한평생 백정기(1896~1936) : 부안군 주산면
우리 민족은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침략해오는 주변 민족에 대하여 피로써 항쟁하면서 민족 존영의 명맥을 수호해왔다. 그 중에서도 최근세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행위는 그 규모와 성격이 가장 크고 잔혹한 것이었을 뿐더러 마침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강토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살륙하고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독립투쟁도 심각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불행하게도 한 때 그 같이 치욕의 역사를 면치 못했다 할지라도 그 반면 민족의 혼이 죽지 않았고 불굴의 항쟁력으로 민족 전체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기에 민족의 위대함이 있다. 이것이 민족정신의 기반이요, 민족사의 전통이다. 건양(建陽) 원년인 1896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분개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고종(高宗)이 비(妃)인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을 피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임시 옮겨 거처했던 그 시기 이 지역 독립운동가 구파(歐波) 백정기(白貞基)의사가 출생했다. 백정기의사는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살때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해서 정읍이 고향처럼 됐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을 업으로 살아나온 백의사는 편모 슬하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남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똑똑한 소년으로 주위의 촉망을 한몸에 받아왔다고 도 기록에 남아 있다. 강인하였으며 남을 위하는 일을 잘 하였고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으며 남달리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그의 나이 11살때 소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잃는 통한의 아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 무렵 전국을 휩쓸고 유행하고 있던 ꡐ오적배들이 오조약을 만들어 삼천리 강토를 왜놈들에게 팔아먹고 있다ꡑ는 동요를 부르며 그는 이미 이때부터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백정기 연보
▲1896년 부안 출생
▲1919년 인천 일본군 시설 파괴 기도
▲1920년 서울 중부경찰서에 체포
▲1924년 일본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 폭파 시도
▲1925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참여
▲1928년 중국 남경의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대표로 참석
▲1932년 흑색공포단 조직
▲1933년 상해 홍구공원 습격, 현장에서 체포
▲1936년 41세를 일기로 일본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서거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활발한 성격에 미소년의 용모를 지닌 의사는 13살 되던 해 명문과 부호로서 이 고을 일대에 이름을 떨치던 창녕(昌寧) 조(曺)씨 문중의 규수 팔락여인(1966년 작고)과 혼인하게 된다. 부호인 처가쪽에서 빈한한 가세인 의사를 위해 5백여석이라는 재산을 주었으나 의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이같은 당돌하고도 늠름한 기품에서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인간적 넓은 도량과 소양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이와같은 사내로서의 분별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장래를 말해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특히 이 때부터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하여 이 고을의 부자였던 의사의 처가는 왜놈들의 수탈정책의 과녁이 되었으며 이 광경을 눈으로 본 의사였기에 그후 항일투쟁의 정신적 무장을 공고히 다지는데 큰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주경야독으로 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 다시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도 높아 고향에서 일이 있을 때면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등 비범한 청년 백정기는 점진적으로 항일투쟁의 골격을 키워나갔다. 그는 적진을 뚫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철저히 알아야한다는 병법을 새기며 일본어를 익히는 등 일본을 궤멸하기 위한 단계를 한발 한발 이행해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2월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을 목격한 것이 의사의 행동력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는 급히 고향에 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평화적인 운동을 일제가 무력으로 탄압과 살륙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가 피를 흘려서 독립을 쟁취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애국적 장지를 안고 고향을 등지게 되는데 이때부터가 이른바 의사 백정기의 찬연한 투쟁시절로 접어드는 본격적인 항쟁사를 기록한다.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 파괴에 나선 것. 이을규(건국 초대감찰위원)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등과 함께 경인(京仁)간의 일본인 기관을 습격하려 한 이 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큰 사건이었다. 만주(滿洲) 펑톈(奉天)으로 망명,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던 의사는 이듬해 겨울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가 일시적으로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민함을 발휘, 임기응변으로 광부 행세를 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24년 일본에 밀입국한 의사는 동경에서의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꾀한다. 이때 일본 천황(天皇)의 암살기도에 참여하지만 이 거사 역시 실패에 돌아감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上海)로 재차 망명하게 된다.
이 천황 암살기도에는 몇 가지 후일담이 전해진다. 이 일을 계획할 때 의사의 용모에 매혹된 모리(森)라는 묘령의 일본여인이 모든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했으며 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의사가 체포 직전의 비운에 빠지게 됐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을 빠져나왔다는 일화도 그 중 하나.
상해로 건너간 의사는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게 되며 한때 농민운동에도 투신한다. 특히 이 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일종의 파괴성 국제조직으로서 의사가 이 조직에 가입하게 된 것은 일제 타도의 근본 목적이 그들의 붕괴에 있고 그 붕괴는 철저한 일제의 파괴밖에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결국 수많은 항거를 전부 행동화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의사가 1928년 중국(中國) 남경(南京)에서 열린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 회의에 조선(朝鮮)대표로 참석한 것도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이라는 국제조직을 통해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 침략의 마수를 제거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연장으로서의 참여인 것이다.
1930년부터 상해에서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의 주요인물로 활동 중 1932년 청년연맹 예하의 결사대로 BTP라는 흑색 공포단을 만들어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기관들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한다. 이 무렵 의사가 벌인 거사로는 여순(旅順)에서 일본 수송선 1만5천t급의 폭파를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해외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되리만큼 큰 사건이었고, 다른 여러 곳의 폭탄의거와 함께 일본 관민에 준 위협은 적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 1933년 이강훈(李江勳) 이원훈(李元勳) 등 동지들과 함께 홍까우(虹口)공원에서 주중(駐中) 일본대사 유기찌(有吉明)와 일본 대사관원 그리고 친일 중국인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암살계획에 참여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이 계획의 사전누설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의사는 이 거사를 마지막으로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나가사끼(長崎)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일본의 법정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36년 5월 22일 41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1946년 6월 8․15해방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된 동지 이강훈의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봉환, 서울 효창공원 안에 안정돼 ꡐ3의사 묘ꡑ로 불리운다. 1963년 백의사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실로 짧은 의사의 일생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한 일제의 타도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던 애국적 장지로 일관하였던 일생이기도 하였다. 우리를 빼앗고 우리를 죽이는 적에게는 투쟁을 통한 철저한 응징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의사의 애국정신이었고 독립투쟁의 목표였다. 그래서 의사의 생애에 점철된 항일사(抗日史)는 오직 행동을 통한 투쟁으로 일관됐던 것이다.
9. 초대 상공부장관 임영신(1899~1977) : 금산군 금산읍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국민외교의 선구자 종교적 교육관을 완수코자 했던 교육자 승당은 한편으로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기독교인인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등 친일분자로 일컬어지는 이중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ꡐ승당 임영신의 애국운동연구(동방도서 간, 1994)ꡑ를 펴낸 성신여대 이현희교수는 승당의 일제 강점하의 행적은 교육자로서 민족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혹 1945년 이후 한때 벼슬길에 나갔다 해서 승당을 지탄할 수는 있지만 친일파로 몰아부치는 것은 승당 흠집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승당이 중앙보육학교를 일제에 철도학교로 사용토록 한 것은 그 당시 시대상황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다. 승당의 80평생(1899~1977)은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로서 영광과 시련․고난의 일생이었다.
승당은 전북 금산읍(현 충남 금산) 상옥리에서 아버지 임구환씨와 어머니 김경순씨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승당 부모는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사상에도 적극적이었으나 딸은 가정적이고 평범한 여성으로 커주기를 바랐기에 유난히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승당은 진학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승당은 14살때 금산을 방문해서 금산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있던 전주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미스 골든(기전여학교 설립자)을 찾아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 골든선교사가 전주 기전여학교 입학원서와 초청장을 보내옴으로써 결혼을 강요하며 진학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서 1914년 기전여학교에 입학, 중․고등 4년과정을 거쳐 1918년 졸업하게 된다.
승당의 인물됨과 애국정신은 학교생활에서부터 나타난다. 일본어시간에 입을 열지 않는 등 혼자 항일의식을 다지고 있었던 승당은 같은 반 동무인 김연실 집을 방문했다가 연실의 아버지인 김인전 서문교회목사(후에 임시의정원 의장과 학무총장대리 등 역임)를 만나면서 한국역사에 제대로 눈을 떴다. 기전여학교사 박현숙선생을 중심으로 승당과 유현정 오자현 송귀내 유채룡 등 6명이 기도회를 조직, 나라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매일 드렸으며 김목사에게서 ꡐ동국역사ꡑ책을 얻어다가 이를 여러권 베껴서 전교생에게 돌려 읽도록 하다가 골든교장에게 들통 나 책을 서문교회에 모두 파묻는 사건도 있었다. 승당을 비롯한 기도회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공주회(公主會)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부르는 일본국가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도 거부했으며 교실에 붙어있는 일본천황 사진에서 눈을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찔러 장님을 만들어놓는 등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들은 또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풍습에도 과감히 반대, 쓰개치마 벗기 시위를 벌였다. 학교에 많은 기부금을 낸 아버지 덕분에 퇴학을 면한 승당이지만 이 일로 학생 5명이 퇴학처분을 당하자 승당은 퇴학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등교거부운동, 동맹휴학운동을 주동했으며 결국 학교측으로부터 쓰개치마를 입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퇴학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승당 임영신 연보
▲1899년 전북(현 충남) 금산읍 에서 출생
▲1914년 전주기전여학교 입학
▲1918년 전주기전여학교 졸업
▲1919년 전주 독립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
▲1923년 도미(渡美). 이승만에게 문서 전달
▲1926년 남가주대학 입학
▲1933년 중앙보육학교 인수, 교장 취임
▲1941년 중앙유치원 설립
▲1944년 여자국민당 창당, 당수 취임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46년 중앙여자대학교 설립, 학장 취임
▲1947년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 설립, 이사장 취임
▲1948년 초대 상공부장관 취임
▲1949년 민의원 의원 당선
▲1950년 상공일보사 사장 취임
▲1950년 제 2대 민의원 당선, UN 한국대표로 도미
▲1953년 중앙대학교 초대총장 취임
▲1958년 영신여자중학교 설립, 교장 취임. 낙양중․공업고등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59년 대한교육연합회 이사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 총재고문
▲1963년 제헌동지회장, 한국부인회장
▲1965년 대한교육연합회 제 10대 회장 취임(67년 11대 회장, 69년 12대 회장)
▲1966년 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
▲1968년 미국 아이젠아워상 수상
▲1972년 중앙대학교 및 중앙학원 이사장
▲1977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당선, 서거(중앙동산 안장)
졸업 후 기전여학교 은사인 이순길 교사의 소개로 충남 천안군 양대리 광산촌 마을의 양대국민학교 교사로 부임, 이 학교에서도 기도동지회(결사대)를 만들고 중국 상해에서 지하운동을 하는 비밀회원을 만나는 등 애국일념을 놓지 않았다. 1919년 2․8독립선언 등 독립운동의 흐름 속에서 3월1일을 이틀 앞두고 거지차림으로 학교를 찾아온 함태영(제 3대 부통령 역임)을 만난다. ꡒ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알리라ꡓ는 한마디 말과 함께 전해받은 독립선언서를 양대학교 비밀결사 반장 서용란의 집에서 비밀리에 수백장을 등사, 드디어 3월1일 서울에서부터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몸에 감고 상복차림으로 전주행 기차에 올랐다. 이렇게 승당이 일본 경찰에 발각될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무사히 전주에 도착함으로써 전주 장날인 3월13일 정오 남문 인경소리를 신호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이 만세운동으로 승당을 비롯한 여학생 13명을 포함, 3백여명이 검속됐고 일본 형사의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당한 이들 여학생들에게 전주지방공판에서 일본인 판사는 승당에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그리고 다른 동지들에게는 1년에서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승당은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검찰이 원심판결에 불복함으로써 1919년 9월3일 대구복심재판소에서 있었던 재판에서도 원심을 확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승당은 일경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그해 11월 일본 히로시마고등여학교(히로시마여자전문학교)에 편입해서 2년만에 졸업하고 충남 공주의 영명학교 교사를 지냈다가 1923년 도미 길에 오른다. 유태영에게서 건네받은 관동 대지진 때 학살된 수천명의 한국사람 사진첩과 사건자료를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승당은 이승만을 만나 서울에서 갖고 온 편지와 사진 등을 건넸으며 이승만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 이 자료를 보이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미국 남가주대학에 입학해서도 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할 생각으로 학업 외 청과물장사, 주유소 경영, 불도저 운전까지 돈버는 일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한인교회를 세워 선교사업을 전개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업무를 뒷받침했다. 미국생활 중 이승만의 청혼을 받기도 했던 승당은(이승만의 ꡐ승ꡑ을 따서 호를 지음) 남가주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지 10년만에 귀국, 서울YMCA 총무에 취임했다. 진정한 민족교육을 위해 학교설립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않고 있던 승당은 서울 흑석동 일대의 토지 20만평을 매입해서 운영난을 겪고 있던 중앙보육학교(1918년 설립)를 1933년에 인수하는 것으로 ꡐ의에 죽고 참에 살자ꡑ는 이념을 펼치게 된다. 승당은 모자라는 학교건립비를 충당하기 위해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루스벨트대통령 부인을 만나는 등 노력 끝에 후원회를 조직하고 중앙보육학교 교사와 기숙사 유치원을 세웠으며 현재의 중앙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모금운동 중 재미실업가 한순교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처음부터 가정생활이 원만치 못했으며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승당의 귀국을 계기로 혼인생활은 마감된다.
일제 치하의 한국땅에서 승당은 항일운동을 위한 만남 내용이 담긴 편지를 핑계로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폐인 상태까지 가게 됐다. 미주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지지하던 승당은 광복 후 이승만 중심의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 의장(이승만)비서로 일하면서 유엔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등 그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승당은 이 때 조선여자국민당을 창당, 전국 여성들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평등하게 확보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적 정치체제 건설을 표명한다.
반탁이다, 신탁이다 우왕좌왕한 끝에 1948년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두달 후 개원된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하기에 이르렀는데, 승당은 이승만의 두터운 신임에 의해 초대 상공부장관에 취임, 한국 최초의 여성장관이 되었다. 대통령의 권유로 안동 민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당선되면서 정치가로서 집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2대 민의원(전북 금산, 여자국민당)을 거쳐 1960년 3월의 4대 대통령선거와 5대 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임영신이 부통령 출마선언을 한 것이다.
승당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치에서 손을 떼기 시작해서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며 대한교육연합회장, 상공일보 경제일보 등의 사장, 한국부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1968년 아이젠하워상, 69년 대한민국 청조근정훈장 등을 수상했다.
10. 검찰의 양심 최대교(1901~1992) : 익산시 삼기면
우리의 검찰사를 돌아볼 때 흔히 정의와 원칙 보다는 굴절과 오욕의 역사를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사가 정치적 격변이었고 검찰도 그 장단에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때로 정권의 압력에 굴신(屈身)의 자세를 보였고 또 때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의를 외면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공명정대한 검찰권 행사를 위해 「잘 나가는 자리」를 먼지처럼 털어버린 분도 있었다. 화강(華岡) 최대교. 그는 우리 검찰사에 청렴강직의 표상으로 남아있는 신화같은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름 앞에는 「검찰의 양심」「대쪽같은 검사」「누룽지 검사장」「고무신 검사장」「최(崔」고집」「한국의 피에트로(이탈리아의 추상같고 깨끗한 검사)」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다. 최대교는 18년의 검찰생활 동안 자의로 사표를 세번 던졌다. 매번 엄정한 검찰권과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1949년 초대 서울지검 검사장 시절. 당시 정인보(鄭寅普) 감찰위원장으로 부터 한장의 고발장이 날아 들었다. 현직 임영신(任永信) 상공부 장관이 1948년12월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상공부 직할 적산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으로 부터 2백70만환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음해 3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생일 기념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현금 5백95만환을 조선전업을 비롯한 산하단체에서 거둔 혐의였다. 그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임장관을 수양딸 처럼 생각했던 李대통령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통해 수사중단 압력을 가해 왔다. 현직 장관이 뇌물을 받았다고 하면 미국이 원조를 끊을 것이니 국가의 장래를 위해 수사를 중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여성단체들도 성명을 내고 유일한 여성장관을 엄호했다. 그러나 최검사장은 만약 뇌물을 받은 장관을 처벌하지 않으면 오히려 미국의 원조가 끊길 것이라며 기소할 뜻을 비쳤다.
최대교 고검장 약력
▲ 1901년 익산시 삼기면에서 출생
▲ 1916년 익산공립보통(현 금마초등)학교 입학
▲ 192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 1929년 일본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 193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 1935년 평양지방법원 검사
▲ 1944년 전주지법 정읍지청 검사
▲ 1945년 전주지검 검사장
▲ 1948년 서울지검 검사장
▲ 1952년 감찰위원회 감찰위원
▲ 1955년 변호사 개업
▲ 1960년 서울고검 검사장
▲ 1964년 변호사 개업
▲ 199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 1992년 91세로 별세
이렇게 되자 법무부 장관으로 부터 정식 공문이 날아 왔다. 「장관 도지사 판사 검사 등에 대한 범죄를 기소할 때는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통첩이었다. 이와 함께 이 사건을 「기소유예 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려 왔다.
이에 대해 최검사장은 검찰총장을 경유, 즉시 회신을 보냈다. 「형사소송법상 기소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권한이며 법무부 장관이 검사의 구체적 사건에 간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곧 바로 현직 장관을 불러 직접 10시간 넘게 조사한 뒤 배임 및 배임교사, 수뢰등 혐의로 기소해 버렸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특별재판부를 구성, 관련 피고인 대부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任피고인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최검사장은 깨끗이 사표를 던졌다.
같은 해 6월에 발생한 김구(金九)선생 암살사건 때도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 배후관계를 둘러싸고 끝없는 의구심이 일었다. 암살범 안두희(安斗熙)가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헌병사령부에서 수사를 맡은데다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을 김구선생이 당수로 있던 한독당의 내분으로 몰아 갔다.
경무대는 한독당원 7명에 대한 영장신청을 검사장을 제쳐 놓고 검찰총장이 서울지방법원장에게 직접 하도록 했다. 최검사장의 성품을 아는 李대통령이 그에게는 일체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이웃 관사에 있던 법원장으로 부터 우연히 이를 전해들은 최검사장은 사표를 써들고 검찰총장을 찾아갔다
최검사장은 일본통치하 초임검사 시절부터 옳다고 믿는 일에는 서슴없이 자리를 내던질 정도로 소신이 뚜렷했다. 그가 부산지검 검사시절 사표를 던져 총독부의 압력을 물리친 일화는 널리 퍼져, 조선 법조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때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담당검사인 그에게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해 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인 순사에 대한 기소장과 자신의 사표를 동시에 검사정(檢事正․지금의 검사장)에게 올리고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그 순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경찰서에 가서 일본인 순사를 조사하기에 앞서 입회서기에게 미리 빵 2개를 사두도록 했다. 경찰서장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그를 초대했지만 그는 빵 2개로 요기를 하며 조사를 마쳤다.
이같이 깨끗한 그의 몸가짐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가짐 뿐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에게도 한점의 얼룩이 튀는 걸 꺼렸다.
1962년 제15회 고등고시 형사소송법 담당 고시위원으로 임명받았을 때였다. 전 해에 1차 시험만 붙고 2차에 떨어졌던 큰 아들 종백(鍾伯․당시 22세로 연대 법학과 4년)씨가 사법과에 응시한 상태였다. 그는 내각 사무처장 앞으로 고시위원 사직서를 우송했다. 혹시라도 출제나 채점에 사사로운 부자의 정이 생길까 두려워 아예 고시위원을 사퇴한 것이다.
그는 또 정읍 지청장으로 있던 일제 때 시골에서 씨암탉을 들고 관사를 찾아온 동생에게 『속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뇌물인줄 알테니 앞으로는 빈손으로 오라』고 나무라 동생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처럼 청렴하다 보니 그의 생활은 고달팠다. 일제때부터 전근을 많이 다녀 2남4녀의 자녀를 낳은 곳이 각기 다를 정도였고 40년 넘게 28평짜리 낡은 한옥에서 살아야 했다.
정부수립후 검사장 봉급이 1만7천환 이었으나 그것으로는 쌀 한가마도 사기 힘들었다. 그래서 부인 최기효(崔基孝) 여사를 비롯 가족들은 봉투를 만들어 내다 팔았고, 서울중에 다니던 종백씨는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수업시간에 집으로 ㅉ겨 오기도 했다.
최검사장은 이 무렵 도시락 대신 누룽지를 갖고 출근, 사무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남모르게 먹었다. 어느날 직원과 기자들에게 이 장면을 들켜 누룽지 검사장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6․25 사변후 부산 피난시절에는 고무신 좌우짝을 바꿔가며 신었고, 서울고검 검사장 시절에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관용차를 탈수 없다하여 집에서 걸어서 출근하곤 했다. 이처럼 일생을 청렴과 결백, 근검과 절약으로 일관하면서도 동네 꼬마들에게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11. 선비정치가 윤제술(1904~1986) ; 김제시 백산면
ꡒ운재선생을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흐뭇하고, 그리고 선생이 계신 자리에는 언제든지 고담준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국가의 대사가 있었고, 예술이 있었고, 많은 해학과 유머가 있었습니다.… 내 일생에 있어 가장 큰 지도와 영향을 준 분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어른을 잊을수 없고 평생을 두고 흠모하고 받들 것입니다ꡓ
1986년 7월 운재(芸齋) 윤제술(尹濟述)이 작고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당시 민추협공동의장)은 이 땅의 마지막 선비 정치인에게 이같은 조사(弔辭)를 바쳤다.
윤제술 또한 김대중을 특별히 아꼈고 그의 회고록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ꡒ인간의 힘 이상의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ꡓ라면서 인간완제품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밖에도 함석헌 문익환 김영삼 현석호 유청 등이 그에게 뜨거운 애정을 표했다. ꡐ송골학형(松骨鶴形)의 외곬 야당인ꡑꡐ해학과 대쪽 성품의 선비정치인ꡑꡐ기예용판(氣․藝․勇․判)의 미덕ꡑ등. 이처럼 선비정치인으로 추앙받았던 윤제술은 망국의 기운이 감돌던 1904년 3월 김제군 백산면에서 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살에 동네 서당에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천자문, 사자소학, 동몽선습 등을 각 열흘만에 떼어 동네에서 신동으로 통했다. 또한 9살에 전주로 나와 2년 동안 서예를 배워 신필로 불렸다.
13살에 세살 위인 송이순(宋二順)씨와 결혼했으며 작고하던 해까지 회로했다. 처가는 같은 백산면으로, 서예의 대가 강암(剛庵) 송성용이 그의 사촌처남이다. 송성용의 부친 송군장(宋君章)은 당시 이름난 선비였으며 윤제술의 호 운재(풀향기 운, 집 재)를 지어 주었다.
그는 14살에 부안 계화도에 있던 거유(巨儒) 간재 전우(田愚 1841-1922) 문하에 들어가 2년반 동안 한학을 배웠다. 간재는 윤제술을 지극히 총애했으며 그도 두고두고 그의 높은 선비정신을 추앙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의 밑바탕이 그때 마련되었다고 술회했다.
운재 연보
▲1904년 김제군 백산면에서 출생
▲1918년 간재 전우 문하에서 한학수학
▲1920년 중동학교 입학
▲1925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1929년 중동학교와 보성중 성남중에서 16년간 재직
▲1946년 남성중고 초대교장 취임, 8년간 재직
▲1954․1958․1960년 김제에서 3․4․5 대 국회의원 당선
▲1963․1967․1971년 서대문구에서 6․7․8대 국회의원 당선
▲1964년 민정당 원내총무
▲1968년 국회부의장에 선출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 최고위원
▲1986년 서울 누상동에서 82살로 별세
신학문에 뜻을 둔 그는 서울로 올라가 1920년 중동학교에 들어갔다. 국문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양주동이 같은 학년이었다. 서당물림으로 한문밖에 모르던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수학한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1년간 독학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25년 21살에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학생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師) 영문과에 합격했다. 그때 영문학을 택한 것은, 동양을 대표하는 한학을 어느 정도 배웠으니 서양을 대표할만한 학문을 갖추어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였다고 한다. 봉건사상에 젖어있던 그는 그곳에서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윤제술은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간, 그리고 보성중에서 3년 남짓, 성남중에서 2년여를 근무했다. 성남중에서는 교두(校頭)인 김석원이 일제에 아부하느라 영어과목을 폐지토록 하자, 이에 항의 교감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고향 김제에서 낚시를 벗삼던중 해방소식을 들었다. 서울로 올라가려 했으나 뜻밖에 이춘기(李春基)씨가 찾아왔다. 전주의 갑부 백인기씨의 미망인 이윤성(李潤成) 여사가 사재를 내놓아 설립한 남성(南星)중학의 초대교장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이때 이씨는 화성학원의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윤제술은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교장에 취임하되,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는 교장에게 인사권을 주고 재단에서 간섭하지 말라, 둘째는 교직원의 처우에 전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8년간 교장을 맡는 동안 남성을 사학명문의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실력있는 교사를 데려와 후히 대접했고, 그 대신 불쑥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참관했다. 매일 전교생들 앞에서 훈화를 했고, 이리시내 전 학교가 미군철수 데모를 벌이기 위해 교문밖으로 몰려갈때 몸으로 막아 수업을 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또한 도(道) 학무국이나 문교부에서 공부와 관계없는 부당한 지시가 내려오면 그냥 뭉개버리기가 예사였다. 남성고의 강당이름 유성당(惟誠堂)은 그의 교육정신이 깃들인 그의 글씨다.
윤제술은 1954년 교직을 떠나 김제에서 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50살로, 큰 부엌에 가서 큰 손으로 살림을 맡아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무소속으로 나온 그때 그의 별명은 ꡐ작대기ꡑ였다. 당시 자유당과 민국당 두개의 정당이 지게의 짐인데 그것을 받치려면 자신같은 작대기가 필요하다는 연설에서 연유한 것이다.
윤제술은 3․4․5대를 김제에서, 6․7․8대를 서울 서대문구에서 연속 당선되었다.
국회에 처음 들어갈 즈음 정국은 그야말로 혼미 상태였다. 사사오입 개헌사건과 대통령후보 해공(海公)신익희의 급서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1958년 4대에 재선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천부의 연설솜씨로 일약 선배정치인들을 앞질렀고 때로는 투사로, 때로는 선비로, 정가의 주목을 받았다. 4대 때는 보궐선거가 실시된 강원도 인제(麟蹄)지구에 김대중 후보 지원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1960년에는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대통령후보 유석(維石) 조병옥씨가 도미(渡美) 치료차 떠나면서 남긴 ꡒ낫는데로 지체없이 돌아오겠다ꡓ는 마지막 성명서를 작성했다.
5대 국회에서는 문교위원장으로 활약했으나 5․16 쿠데타로 정치정화법에 묶여 1년여를 쉬어야 했다. 정화법에서 풀리자 군사정권에 항거하면서 1963년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윤보선을 적극 밀었다. 참모장격으로 선거전략과 지원유세를 도맡다시피 했다. 당시 여수 유세에서는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제기, 눈길을 끌었다.
6대는 김제 갑․을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람에 조한백(趙漢栢)씨에게 양보하고 전라도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서울 서대문구로 옮겼다. 6대때는 제1야당인 민정당 원내총무를 맡았고 7대에서는 국회부의장으로 일했다.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격돌한 대통령선거에서는 사력을 다해 김대중 선거운동을 벌였다. 8대에서도 김대중을 키우는 일만 했으며 1973년 9대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정계를 사실상 은퇴했다. 그는 말년을 인왕산 자락 종로구 누상동의 낡은 단층집 관산루(觀山樓)에서 서예와 등산으로 보냈다. 그를 찾는 후배정치인과 제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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