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이 석 한
Ⅰ. 고인돌이란?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 의 일종이다. 거석문화는 자연석이나 가공한 돌을 사용한 건조물로, 고인돌외에 선돌(立石), 환상열석(環狀列石:Stone Henge),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墓)등이 있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 支石墓 )로도 부르고, 중국에서는 석붕( 石棚 ) 또는 대석개묘( 大石蓋墓 )라 하며, 기타지역에서는 돌멘( Dolmen )이나 거석( 巨石 ) 으로 부른다.
Ⅱ. 한국의 고인돌의 기원
A. 자생설
우리나라에 가장 밀집 분포하고 형식도 다양하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데서 나온 주장이다. 설령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고 또 오랜기간 축조되어 어느 지역의 고인돌보다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보는 설이다.
B. 남방 기원설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 稻作 )문화와 함께 중국 동부 해안 지방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설은 우리나라의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등 서해안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는데서 나왔으나, 중국 동해안 지역 가운데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은 절강성 뿐이고 그나마 40여기에 지나지 않는데다 형태도 다르기 때문에 주장에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C. 북방 기원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요녕지방의 돌널무덤( 石棺墓 )에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돌방무덤( 石室墳 )의 뚜껑돌이 1매석으로 대형화되면 개석식( 蓋石式 ) 고인돌이 되고, 지하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면 북방식 고인돌이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중국 요령지방 주변과 시베리아등 북방지역과 서유럽 사이에는 고인돌이 분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지역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는 북방식이 남쪽에는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유사한 개석식 고인돌이 요녕성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남·북방의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고인돌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Ⅲ. 고인돌의 축조 시기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죠몽( 繩文 )시대 후기에서 야요이( 彌生 )시대 중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는 선사 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거석 숭배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청동기 시대로 알려져 있다.
A. 신석기 시대 축조설
고인돌이 씨족 공동 무덤의 성격을 띠며 그 주변의 간석기,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된다는 점에 근거 한다.
B. 청동기 시대 축조설
중국 요녕 지방의 고인돌 연대에 비기어 기원전 2000년대 말기설과 기원전 1000년대 초, 중기설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기원전 8세기설이 유력하게 받아 들여진다. 하한 연대는 BC 3-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Ⅳ. 고인돌의 형태
A. 북방식( 탁자식 )
잘 다듬은 판석 3-4매로 짜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상의 돌을 얹은 것으로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으로도 부른다. 대형북방식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세운다.
B. 남방식 ( 바둑판식, 기반식 )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을 쌓은 무덤방(묘실 )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으로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며, 무덤방은 없는 것이 많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괴었다.
C. 개석식 ( 무지석식 )
지하에 만든 무덤방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큐슈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 라고도 한다.
Ⅴ. 고인돌의 위치와 부장품
A. 위치
청동기인들은 영원 불변의 자연물,즉 돌에 대한 숭배나 신앙심에서 거대한 바위를 이용한 기념물을 축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다시 활동할 수 없도록 시체를 매장한 뒤 큰 돌로 덮은 것이 아닐까? 주로 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위, 산 기슭, 고갯마루등 사람이 활동하는 주변에 세웠는데 이는 무거운 돌을 얻고, 옮기기 쉽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B. 부장품
고인돌의 출토 유물에는 크게 석실안에 부장햇던 의례용 유물과, 석실 주변에서 발견되는 실생활용 유물이 있다. 의례용 유물에는 무기류, 토기류, 장신구류등이 있으며 무기류가 가장 많아 간돌검과 돌화살촉등이 있다. 청동기는 비파형 동검이나, 청동 도끼등이 있다.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된다. 고인돌에서 출토된 인골을 보면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는 것이 보통이지만, 북방식 고인돌은 무덤방안을 몇 개의 칸막이로 막은 공간에 여러 사람을 묻은 특수한 예도 있다.
Ⅵ. 고인돌의 축조
고인돌의 제작은 채석 - 운반 - 조립의 단계로 진행된다. 덮개돌은 대개 10t 미만이지만 대형은 20-40t에 이르며 100t이상되는 초대형 덮개돌도 있다. 덮개돌은 대개 주변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바위를 이용했는데, 덮개돌의 측면에 일정한 구멍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떼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 떼어낸 돌은 축조할 장소로 옮겨지게 되는데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겨지게 된다. 즉, 둥근 통나무 여러개를 엇갈리게 깔고, 덮개돌을 옮겨 놓은후 끈으로 묶어 끌거나 지렛대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운반해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흙을 경사지게 돋은 위로 끌어 올린후 흙을 제거했다고 추측된다. 대개 30여톤의 돌을 운반하는데는 약 200여명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아 족장의 무덤으로 보거나, 일정한 지역안의 혈연 혹은 지연으로 뭉친 공동체 사회의 공동 무덤으로도 볼 수 있다.
Ⅶ. 전북지방의 고인돌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등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며 바다에 인접한 곳에 밀집해 있다. 그 중 동북 아시아에는 중국의 절강성에 40여기, 요녕성에 300여기가 있으며 일본에는 600여기가가, 한반도에는 3만여기가 분포한다.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라도 지방의 2만여기가 바로 그것이다. 북방식 지석묘의 대표적인 것으로 강화도 송해면과 하점면 부근리의 고려산 북쪽에 30여기가 있어 사적 137호로 지정되어 있고, 길이는 7.1m 폭 5.5m의 대형 고인돌이 있다. 전남에는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등에 고인돌군이 있다. 우리 전북 지방에는 부안 고창일대에 널리 분포하며 거의가 남방식이다.
A. 부안 구암리 고인돌군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 귀암부락 ) 707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 103호로 지정되었다(1963년). 모두 13기의 지석묘군으로 그중 가장 큰 것은 길이 6.3m, 폭 4.50m 의 구갑형에 두께 0.69m로 남방식 지석묘중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B. 고창 죽림리·상갑리 고인돌군
고창군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의 분포 지역이다. 그 수는 대개 2천 여기로써 고창읍의 매산리와 죽림리일대, 아산면 상갑리, 해리면,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등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중 고창읍 도산리 고인돌은 북방식 이어서 특이하며, 아산면 운곡리의 고인돌은 높이 5m, 길이 7m, 폭 5m로 우리 나라 최대 크기이다 .
죽림리일대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거리에 위치하며 매산마을을 기점으로 동서 약 1,764m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표고 15m - 50m의 범위내에 군을 이루며 등고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이 고인돌군은 1965년 국립 박물관에 의해 3기가 발굴 조사된 이래 1990년 전라북도와 원광대학교의 주관으로 3개월에 걸친 현지 조사에 의해 442기가 조사되었으며 파괴·매몰된 108기를 합하면 550여기가 확인되었다. 고창의 고인돌은 그 숫자의 방대함 뿐 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 즉 북방식인 탁자식, 여러 매의 벽석이 지상에 노출된 지상 석곽형, 남방식인 바둑판식, 기타 개석식등 다양한 형식이 분포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인돌 연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치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죽림리 일대의 고인돌군은 사적 391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에 세계인류 문화유산으로의 지정을 신청해 놓은 상태로 이의 성취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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