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남한강 유역 문화답사기

청담(靑潭) 2009. 8. 29. 11:55

 

남한강 유역 문화답사기


(2001. 7.30 ∼ 8.1)




□ 들어가는 말


지난 7월 18일에 1학기 종강을 하고 직원연수를 다녀왔다. 이틀동안 보길도를 매우 즐겁게


여행하였다. 보길도는 작년 2월에 양선생과 둘이서 이미 다녀온 곳이다. 답사를 다녀오면 반


드시 기록을 해야 되는데 항상 게으름 피우다 잊어버리곤 한다. 1990년 일본 문화탐방도 아


직 정리하지 못했거니와 1996년의 동남아 여행기도 컴퓨터에 옮기지 못했으니 나의 무식과


무계획성과 게으름이란 더 말해 무엇하리. 그래서 이번 답사기는 당장 지금 적고 있다. 그리


고 이참에 그 동안 미뤘던 동남아 여행기, 일본속의 한국 문화 탐방기 등도 정리하여 보고


자 한다.


방학을 하면 꼭 여행계획을 세우는데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실천에 옮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도 직원여행을 다녀오고 4일간은 문화원 제4기 문화학교 강의 준비 차


만경강 이곳 저곳을 수시로 드나들고, 4일간은 문화원에 출근하며 마지막날(7월 27일)엔 선


암사와 낙안읍성 답사를 다녀왔다. 28일과 29일은 종정초등학교 계모임으로 대아리 통나무


집에서 1박 2일의 모임을 가지니 별로 편하게 휴식한 것 같지 않아 또 일순간 게으름 피우


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양선생의 강력한 재촉으로 30일 아침 이미 세워진 계획대


로 출발하였다. 이번 부부 문화답사는 2박 3일 여정이요, 지역은 여러차례 가 본듯하지만 관


광버스로 피상적으로만 본 기억밖에 없는 곳, 충주-단양-영월-제천등지이다.




□ 첫째날(7월 30일)


이것 저것 준비하고 11시에 출발하다. 이번 여행은 이제 5개월밖에 안된 신형 레조로 가게


되니 저으기 자신도 붙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경기지방에 어제부터 200mm의 큰 비가 내렸


고 계속 큰비가 온다는 뉴스에 걱정도 크다. 하지만 핑계대기 시작하면 또 여행 못가지 하


는 생각과 걱정하면서도 반드시 가겠다는 양선생의 의지가 커서 출발을 단호하게 결정한 것


이다.


죽암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길을 재촉하여 중부고속도르를 거쳐 증평 인터체인지에서 충주


를 향하다. 도대체 기억으로 청주는 여러 차례 지났는데 충주는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일정에 넣었는데 사실은 탄금대와 중원 고구려비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오후 2시쯤 충주에


도착하였다




충주




♠탄금대


그 유명한 탄금대에 오다.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 신립 장군이 임진왜란 때 최후의 방어선


으로 지키다 목숨을 끊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남한강이 휘돌아 나가는 곳으로 경관이 수려


한데 비까지 보슬보슬 내려 정취를 더하여 준다. 우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역사속으로 들어


가 아름다운 경치에 마냥 취해 즐거웠다. 충주시는 그 이름에 비해 발전이 많이 더딘 듯.




♠중원 탑평리 7층석탑(국보 6호)


중원 고구려비로 가는 길에 지도에 이 탑이 있어 들러보니 대단


한 탑이다. 규모도 크거니와 신라탑 양식인데 상당히 웅장하고 기


품이 있다. 왕궁리 5층탑과 한번 대비할 만 하다. 석가탑과 정림사


지탑을 전형적으로 비교하고 말이다.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


우리나라의 비문중 진흥왕 순수비와 함께 가장 유명한 비석인데도 나는 오늘 처음이다. 며


칠전 신복룡 교수가 이 비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이병도 실증사학파를 비판하였거니와 장


수왕시의 건립은 맞지만 아직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는 글들이 인터넷에 떠 있다. 장


호원으로 가는 지방도로와 제천으로 가는 지방도로의 갈림길에 이 비는 외롭게 서 있다. 아


하! 장수왕이 바로 이곳 남한강 위까지 정복하고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세운 것이로구나. 발견된 지 20여 년 만에 이제야 찾게된 것이 역사교사로서 조금은


부끄럽다할까?






단양




♠단양 적성비(국보 198호)


70년대 말 고고학계의 최고의 성과로 중원 고구려비(1979)와 단양 적성비(1978)의 발견을


들기도 하거니와 나는 발견된 지 20여년 만에야 중원 고구려비를 찾아보고 그곳을 떠나 두


시간 후에는 이곳 적성비 앞에 섰다. 그래 바로 이곳 이 지방이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 다툼


으로 밀고 밀리면서 5세기엔 장수왕이 고구려비를, 그리고 6세기엔 신라 진흥왕이 적성비를


세운 것이다. 바로 남한강을 놓고 양국이 영토쟁탈전을 벌렸음이 확인 되었다. 적성비는 지


금은 단성면 소재지 뒷산의 적성산성에 있으나 이곳의 옛 지명은 적성현이다. 지금은 바로


이웃면이 적성면인데 차라리 적성 소재지에 세워 적성 점령에 도움을 준 이들을 칭송할일이


지 저 높은 산중턱에 세워 직접 보기에는 이 더위엔 포기다. 괜히 15분여나 등산하며 양선


생을 끌었다가 바로 이곳이겠지 하며 찾았더니만 또 저 높은 곳에… 이로부터 등산여행은


은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이름 붙이며 웃었다.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읍내에서 자기로 하고


관광농원, 호텔 등을 알아보다 결국은 베니스장으로 결정하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5층방을 잡기 위해 1만원 더 투자하여 4만원을 주었는데 김치찌개도 맛있고 음식이 영


락없는 호텔식이다. 돈은 절반도 안내고 마치 호텔에 투숙한 듯 한 느낌을 주게 하는 베리


굿 모텔! 사장님의 친절도 만점.








□ 둘째날(7월 31일)


♠도담삼봉


9시에 행장을 꾸려 도담 3봉으로 향했다. 남한강 한 가운데 장군봉을 중심으로 세 봉우리


가 솟아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한 것도 이에서 연유하였다


한다.




♠석문


도담삼봉을 내려다 보며 20여분을 등산하여 200여 미터 올라 석문에 가보다. 석회암 아치


형 석주인데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지 않을까? 중국의 계림에서는 많이 보았지만 우리


나라에선 흔한 게 아닌 것이 바로 이곳이 우리 나라 제일의 석회암지대이기 때문이다.




♠수양개 유적 전시관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사적 398호)의 구석기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읍내에 전


시하고 있는데 무료이다. 수양개 유적은 중기 구석기에서부터 청동기 유적층까지 층위를


이루었으며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 중 가장 넓게 발굴된 곳이다. 구석기 유물전시관은 처


음이며 구석기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밀개, 긁개, 찌르게, 자르개, 몸돌, 격지, 돌화살촉,


돌그물추 등을 보며 중기 구석기 시대의 망치떼기 등 직접떼기와 후기 구석기 시대의 돌날


수법, 눌러떼기등의 간접떼기 제작법을 보았으나 간접떼기는 이해가 어렵다. 기타 좀돌날몸


돌과 슴베찌르게도 보다.




♠노동동굴(천연 기념물 258호)


저 유명한 고수동굴은 지난 97년 2월에 영주 안동지역 가족여행 때 구인사와 함께 들렀기


때문에 이번엔 다른 굴을 보기로 하고 노동굴을 찾았다. 아주 깊고 높은 굴이니 동양에서


최대의 수직동굴이라 한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단 그저 시원하고 또 등산을 하는 동굴이


란게 특징이다. 밖으로 나와 입구로 내려와 보니 정말 많이도 올라갔다. 200m짜리 등산 한


폭은 족히 된다. 그저 간간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풍경이 너무 이국적이


다. 쇠락한 관광지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향산리 삼층석탑(보물 405호)


가는 길에 보물 405호인 삼층석탑이 있어 들리다. 작고 아담한데 영락없는 신라석탑. 동네


한가운데 고즈넉이 앉아 있다. 영춘교 못 미쳐 회창가든에서 거금 3만원에 쏘가리 메기 잡


탕을 먹었는데 영 우리 전라도 맛이 안나 별로다. 양선생은 맛있다니 돈은 아깝지 않다.




♠온달성(사적 264호)과 온달동굴(천연 기념물 261호)


온달성에 올라보자고 기세 좋게 둘이서 약속했으나 나부터도 영 자신이 없다. 그저 조금


올라만 보자고 2-30여m 오르다 말고 동굴로 가다. 온달이 평강공주와 헤어져 이곳에 성을


쌓고 지켰던 곳이니 아름다운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사랑이야기와 어우러져 기억될만한 곳


이다. 거기다 저 소백산의 아름다움과 남한강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하는 데야 말할 것 없다. 온달동굴은 좁고 아름다운 동굴이다. 맑은 물이 마치 시냇물처럼


흘러가며 내는 소리가 아주 상쾌하다.


영월




♠김삿갓 묘


난생 처음 와보는 이곳 경상도 영월은 김삿갓 묘부터 찾았다. 19세기 방랑시인 김병연의


묘이다. 그가 일찍이 젊어 이곳으로 낙향하였는데 그의 조부가 선천부사일 때 홍경래에게


항복한 사실을 모르고 과거에서 그를 비난하였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할아비임을 알고는 방


랑하게 되었다 한다. 방랑하다 전라도에서 죽었는데 그 아들이 이곳으로 모셔 왔다고 한다.


지역 문화단체에서 이곳을 알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많은 시비를 세우는 등 노력하는 모습


이 역력했으나 조금 저급한 모습이어서 볼품은 없었다.




♠조선민화 박물관


김삿삿 묘에서 나오다 민화 박물관이 있어 들렀다. 개인이 소장한 민화를 이곳에 박물관을


세우고 전시한 것인데 생각보다 다양하고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양선생이 아주 기뻐하며


즐겨 감상하였다. 목아 박물관과 같은 모습의 사설 박물관인데 매우 보기 좋고 의미 있고


또 부럽기도 한 모습이다.




♠고씨동굴(천연기념물 219호)


벌써 6시 30분이 되어 관람이 어려울 줄 알았으나 휴가철이라고 8시까지 관람이 허용되어


6시 45분에 입장하였다. 고수동굴만은 못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아름다운 동굴이다. 영월읍


에 8시가 넘어서야 도착하여 가든장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그런데 시장바닥 백반도 못한


음식으로 조금 불쾌하다. 맛은 없어도 깨끗하긴 해야 하는데 맛도 엉망, 볼품도 엉망. 치킨


한 마리에 맥주 3병을 사서 돌아와 함께 마시니 배부르다.




□셋째날(8월 1일)




♠어라연 계곡


말로만 듣던 동강과 어라연 계곡. 무지무지한 기대를 안고 갔으나 큰 실망. 동강의 자연경


관은 빼어났으나 어라연 계곡은 걸어서 6km라니 포기할 수밖에…더구나 길을 잘못 들어(순


전히 엉성한 안내 표지판 덕분이다. 양철판에 동네 사람들이 써서 내어놓은 모습으로 길가


에 비스듬이 기울어져 서있어 혼란만 준다)무려 20여 리를 곡예 운전하며 고개를 넘어 고생


하여 갔더니만 그곳은 어라연이 아니라 순전히 레프팅 타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어라연 계


곡은 포기했지만 너무도 아쉬워서 어라연쪽 뒷동산으로 20여분 걸어가다 돌아왔다. 그렇게


도 요란하게 알려진 어라연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기어오듯 다녀오는 자가용 2대만


만났다. 이곳은 어라연은 없고 레프팅 타러오는 젊은이들의 훈련장 같은 인상만 남았다.




♠청령포-관음송(천연 기념물 349호)


원래 장릉은 답사 계획이 있었으나 이곳은 장릉 옆에 있기에 들렀는데 하마터면 땅을 칠


뻔 하였다. 단종이 17살에 이곳 청령포에 귀양와 홍수 때문에 읍내로 옮겼는데 청령포의 자


연경관이 그만이다. 남한강이 삼면을 휘감아 돌고 남쪽 면은 절벽으로 막힌 천혜의 요새이


다. 배를 타고 건너니 TV「왕의 눈물」에서 본 곳이다. 어소인 기와집과 초가 한 채를 지


어 놓았는데 순전히 관광객들을 위한 일종의 전시장이다. 그 옆에 소나무 숲의 경관이 너무


나 빼어난데 그 중에도 관음송(천연 기념물 349호)의 위용은 실로 대단하였다. 내 일찍이 소


나무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 수많은 소나무를 보았으나 이런 소나무는 처음이다. 대단하다!


단종의 슬픔을 보고 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릉(사적 196호)


단종이 왕위에서 쫒겨 나고 2년 뒤 이곳에 귀양와서 1년도 못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단지 몇 개월을 채 살지 않았는데 이곳 영월은 온통 단종의 고을인 듯 느껴졌다. 저 아름다


운 장릉의 소나무숲과 장릉안의 갖가지 건물들의 모습이 차라리 서울의 대궐모습이다.




제천




♠의림지


대저 국사수업에서 초기국가시대의 삼한을 공부할 때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밀양


의 수산제, 상주의 공검지 등이 소개되는데 우리 벽골제는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제 지방자치 시대들어 농업수리박물관을 짓고 복원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왼편에


우리 큰동서가 3천 여평의 대지를 3년 전에 구입하여 그간 지평선 축제기간중 주차장으로


시청에 대여하다가 두어 달 전부터 음식점과 주택을 지어 이미 이사까지 하였고, 그곳에서


처남과 함께 식당을 경영하기 위해 준비중에 있으니 내가 김제에서 태어나고 갯다리(두월천


과 원평천이 이곳에서 만나 벽골제를 만들고 이 곳에서 가장 큰 다리가 바로 갯다리이다)에


서 주워져 왔다는 것과 합하면 벽골제와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다. 황등의 황등제와 정읍의


눌제도 이미 없어지고(이미 15세기말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


음)흔적만 남았는데 과연 의림지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하던 터이다. 아니 저 푸르른


물! 그리고 아름다운 저 경관! 의림지는 생생히 살아 있었다. 아직도 600정보의 논에 물을


대주고 있었으며 관광지로 크게 이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안내판에는 이곳 의림지의 서쪽을


호서라 한다고 설명되어 있어 이채롭다. 이곳에서는 앞의 세 저수지 아래를 호남이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오는 길에는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하여 속으로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빗길의 고속도로


교통사고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박달재를 넘어(실제로는 구 도로여서 비껴오게 되어 있


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망설이며 오는 중에 어찌하다가 충주쪽으로 빗속을 뚫고 내


어 달렸더니만 아니 중원 고구려비를 또 다시 만나는 아이러니-별수 없이 시내를 다시 들


러 증평으로 나오니 이번 여행은 네 시· 군을 한바퀴 돌아온 모습이다. 밤 8시에 도착하니


피곤도 하지만 소원을 성취한 듯한 값진 여행이었고 특히 양선생이 만족하는 모습도 아주


좋다. 양선생은 마음속으로 내내 비로 인한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이 끝나기를 기도하였노


라고 애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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