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와트 답사기
▣프롤로그
작년에는 해외여행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었는데 2월에는 성우회에서 필리핀에 다녀오고, 8월에는 해우회에서 백두산을 다녀왔었다. 금년에는 양선생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앙코르와트에 다녀오기로 합의하고 전주신성여행사를 통하여 일정이 잡혔다. 여행비는 120만원이며 날자는 1월 7일부터 12일까지 5박6일이다. 학교에서는 55명의 교사 중 무려 30명이 해외에 나가는데 그중 3명은 두 번을 나가게 되므로 사람수로는 27명이 되는데 어쨌든 절반이 해외에 나가게 되는 셈이다.
나는 이번이 여덟 번째의 해외여행인데 웬만하면 호주와 뉴질랜드, 또는 터키와 그리스로 가고 싶었지만 액수도 만만치 않고 또 곧 얼마 후면 앙코르 와트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보도에 놀란 양선생이 하루빨리 앙코르에 가기를 원하므로 쉽게 결정이 났다.
그동안의 해외여행 경험은 다음과 같다.
1. 1990.12-일본-조선일보사 후원 일본속의 한국문화 탐방
2. 1996.8-태국, 홍콩, 싱가폴, 인도네시아-김호길 선생 부부와 함께
3. 2001.2-상하이, 항조우, 쑤저우, 계림
4. 2002.5-산뚱반도-해상왕 장보고 연구회 후원
5. 2002.7-백두산, 연변, 뻬이징
6. 2005.2-필리핀
7. 2005.8-백두산
▣제 1일(1월 7일)
일행은 전주 분들과 익산 분들인데 16명이라 한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익산의 동산동을 거쳐 북부시장에서 나머지 익산 분들이 타시기로 되었다. 4시에 버스가 도착하였고 전주 분들이 여덟 분이며 익산사람들도 여덟 분으로 모두 16명이며 가이드까지 17명임을 알았다. 양선생은 왠지 익산사람들 중에는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북부시장에서 타시는 분들이 양선생의 계모임 선배들이었다. 일행은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16명이다.
인천공항에 7시 30분에 도착하여 10시 40분에 비행기가 떴는데 운이 없게도 창가자리에 배정이 안 되어 창밖 구경은 못하니 서운하다. 비행기는 베트남 에어라인 보잉707로 새 비행기이며 스튜어디스가 마치 한국인 여성들 같다. 호치민시(왕년의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3시 10분에 도착한다. 4시간 30분이 걸렸고 우리나라와 시차가 2시간이라서 시간은 1시 10분이 되어 버렸다. 우선은 귀국할 때까지는 2시간은 더 살게 되는 셈이다. 우리가 1960년대에 월남전쟁에 참여하여 전쟁을 치른 곳, 우리의 경제번영에 큰 도움을 받은 곳,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슬픔이 깃들인 곳, 아직도 우리나라와의 인연이 계속되며 한국의 경제발전을 선망하고 한류열풍으로 친근감이 있는 나라가 바로 이 베트남이다. 아직도 고딘 디 엠 대통령이나 구엔 반 티우 대통령, 구엔 카오 키 수상 등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나라이다. 한국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난 뒤 호텔에 일단 짐을 풀기로 하였다. 4시에 Equatarial호텔에 여장을 풀고 30분후에 출발하여 시내 관광에 나섰다. 어제 저녁에 TV에서 《연인》이라는 옛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그 배경이 사이공이다. 사이공이 아주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큰 변화를 느낄 수는 없고 번화가 지역은 깨끗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은 든다.
가이드는 변재권씨인데 50살가량의 중년이다. 몇 가지 월남말을 배웠다. 신짜오(안녕하세요) 깜언(감사합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 당시 한국군들이 물건을 구입하였다는 쩔렁시장, 차이나 타운, 노트르담 성당, 중앙우체국 등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다. 이 나라 학제는 5-4-3제이며 4년제 대학생은 징집이 면제되고 남녀모두 2달씩 군대에 입대하여 훈련으로 끝난다고 한다. 아오자이 입은 학생들이 아주 산뜻하며 멋쟁이의 아오자이는 대단하다. 아오자이 속으로 브래지어와 팬티라인이 비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로 보인다. 사람들의 키는 남자가 그저 160cm, 여자들은 150cm인데 고등학생이나 20대들 중에는 남자가 170이 넘고 여자는 160이 넘는 아이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가로수의 크기가 놀랄 만큼 큰데 오크나무라 한다. 대부분 150여년 되었다 하며 빌딩의 10층높이만 하다. 호텔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하루일정이 끝났다.
▣제2일(1월 8일)
오늘은 메콩델타를 답사하는 날이다. 사이공은 西貢이라는 뜻이라 하는데 서쪽의 조공을 바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사이공강주변의 수상촌 모습을 구경하였다. 아직도 최하 빈민층들이 그 주변에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는 공산주의이므로 주5일제가 엄수되며 54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다. 식생활은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여 보신탕을 먹고 삼계탕이 있으며 뱀탕도 먹는다고 한다. 국민소득은 500불인데 호치민시는 2500달러라고 하니 시골의 생활은 아주 어려우리라 여겨진다. 월급은 평균 6만원인데 생활수준은 소득에 비해 아주 높은 편이라 한다. 그 이유는 1975년 월남패망이전의 재산들을 금이나 다른 보석으로 보유하고 있는 등 다른 재산이 은닉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인듯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예를 들면 6만원 월급쟁이가 1만 원 짜리 식사를 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국도1번이 이 나라 가장 큰 도로라는데 우리나라 4차선 일반 국도만도 못하다. 하노이까지는 1740km로 버스로 2박 3일이 걸린다고 하니 대단히 길기는 긴 나라이다. 자동차 값은 대단히 비싸서 무쏘가 3200만원이며 마티즈가 1300만원이라 한다. 이 나라에 석유매장량이 풍부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개발하여 상당량이 들어오고 있다고 들었다. 가는 길에 한국인 가이드 출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휴식하였다. 사이공에서 74 킬로 떨어진 미토시에 있는 메콩강 삼각주는 맹글로브 나무에 토사가 쌓여 삼각주를 형성하였고 윈터카카오나무가 포크레인 바퀴 같은 모습으로 흙을 굳게 하여 이루어진 모습이라 한다. 메콩강 삼각주에는 네 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에서 유니콘 섬으로 들어가 여자들이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정글을 탐험하며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마침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와서 그들과 가까이서 대화하여 보았다.
베트남 문자는 1881년에 알렉산더 신부가 만든 문자를 사용하고 있어 알파벳으로 되어 있 다. 교사들은 월급이 적으므로 방과 후에는 부업이 허용되고 촌지도 허용된다고 한다. 효도심이 대단하여 가정지상주의로 생활하며 모든 것이 부모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커서 대규모의 스승의 날 행사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시험은 모두 주관식으로 보며 국가고시를 통해 중학교에 입학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므로 교통은 혼잡하기 그지없으나 사고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들만의 무언이 교통질서로 움직이며 오토바이 행렬사이를 뚫고 길을 건너는 실력들이 대단하다. 가장 번화가인 《돈 코이》거리에서 발 맛사지를 받으니 아주 상쾌하다. 베트남의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들로부터 1시간 30분 동안 받았는데 아예 전신맛사지를 해주어서 좋았고 그래서 팁은 6불을 주었다.
저녁에는 선상 식사를 하였다. 배에서 식사하고 노래하며 30분여 항구를 한바퀴 도는데 용기를 내어서 《 Love me tender 》를 불렀다. 마이크 성능이 좋지 않았지만 선상의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듣고 있기에 호응이 있나보다고 느꼈긴 했는데 노래가 끝난 뒤 우리 팀들의 많은 칭찬이 더 기분을 좋게 하였다.
▣제3일(1월 9일)
오늘의 일정은 구찌터널을 관람하는 일이다. 베트콩이라는 말은 원래 越共이라는 말이니 월남에 있는 공산당이라는 뜻이 되겠다. 10년간 지속된 월남전에서는 미군이 57,000명이 전사하고 한국인이 5,000여명이 전사했다. 구찌란 古支라는 뜻이며 오래된 지역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가는 길에 고무나무를 구경하였으며 생산량이 세계2위라 한다.
이 나라에도 3D현상이 만연하여 잘못된 현상이 너무 일찍 왔다는 설명이 수긍이 간다. 오토바이는 약 200만원인데 뜨거운 가족애로 가족들이 서로 돈을 모아 한대씩 구입한다고 한다, 이곳 구찌마을에는 옛부터 프랑스와의 게릴라전에 사용하던 땅굴이 있던 것을 월맹정규군 3만 6천명이 싸울 수 있도록 터널공사를 더 확장한 것이라 한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국가유공자로 정하여 치외법권 지역이 되었으며 가장 일찍 1986년부터 사유재산이 인정되었다고 한다. 시골 가옥들이 아주 규모도 크며 깨끗하여 도무지 500달러 나라 집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좋고 먹을 것은 큰 걱정이 없는 나라로 보인다.
종교가 허용되어 있으나 선교나 포교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1234년에 이왕조가 망하고 진왕조가 들어설 때에 왕족들을 학살할 때 왕자 및 일족들이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온 것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는 일인데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내가 우리 신평이씨도 화산이씨와 같이 당시 왕자의 사촌의 후예임을 일행들에게 설명하여 주었다. 196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에 처음 보도되어 아버지가 오려서 보관하신 것을 1970년 중반에 대동보 편찬시 그 내용을 서문에서 소개한 바 있었으나 그 뒤의 보도에서는 화산이씨만 언급되고 몇 년전 베트남 정부의 초청으로 화산이씨 종친회대표들이 초대되어 크게 환영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신평이씨는 언급이 없고 또 우리 종중에서도 이제는 우리보다 후진국인 베트남왕족에 대한 관심도 없는 터라 나도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 상황이다.
1975년 이전에는 미국과 한국 등이 이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한다는 명목으로 이 나라를 도와 전쟁을 수행하였더니만 이젠 이 나라가 공산주의로 통일되어 베트콩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미국 등은 원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세계화에 동참하여 미국과 우리나라의 자본을 끌어들여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며 발전하는 베트남 집권자들의 지혜가 숭고하다. 아직도 오직 정권유지만을 위해 문을 걸어 닫고 폐쇄적인 정치와 경제를 운영하며 미국을 적으로, 자본주의를 적으로 하여 핵으로 위협하며 세계적 빈국으로 나라를 만들어놓고 탈북자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데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큰소리만 치면서 권력유지만을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저 김정일과 그 집권세력은 민족 역사의 대 죄인이다.
구찌터널에서는 짠 티근 양등 여러 전사들의 구찌유격대와 투입된 월맹군들이 미국과 싸우면서 총 1만 2천여 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점심은 부근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었는데 아주 평화롭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여사장의 모습에서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낀다. 돌아오는 호치민 시 외곽의 개인주택들이 훌륭하기에 물었더니 저택들은 대개 2-3억 정도이며 대 저택은 5억 정도라 하니 집값은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도 3억 들여 집을 지으면 저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타워팰리스 등 그저 60평 아파트 한 채가 15억이라 하면 정말 한국 강남의 아파트 투기는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치 않다. 노무현 정부가 아무리 잡아보려 해도 누리는 자들의 무서운 저항과 놀라운 투기술은 이 정부가 도무지 당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30년의 월남전으로 인한 파괴와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베트남사람들의 노력과 의지를 보면서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오후 6시 30분에 역시 베트남 비행기로 캄보디아로 떠났다. 180여명 정도가 타는 중형비행기라서 창밖을 볼 수는 있었지만 캄캄한 밤이니 볼게 무에 있으리오? 사이공의 불빛만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한시간 후인 7시 30분에 씨엠립(씨엠 레이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캄보디아의 가이드는 총각인 박도형(30세)씨다.
▣제4일(1월 10일)
캄보디아 여행의 첫날이다. 몇 가지 인사말을 배운다. 섭섭하이(안녕하세요?) 업군(감사합니다) 싸싸(예뻐요)
앙코르 와트다. 바로 이곳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 아니었는가? 큰 기대와 설레임으로 오전에는 주 사원인 앙코르 와트 이외의 여러 사원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앙코르 와트 사원을 관람한다. 가는 길에 캄보디아인들의 미의 기준이 여자는 하얀 피부요, 남자는 배가 나온 것이라하므로 〈내가 바로 딱 미남〉이라 하여 함께 웃었다.
앙코르 왕조는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 초까지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 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이곳 앙코르와트가 있는 앙코르 시는 크메르 왕조의 중심지로써 앙코르 왕조는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게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이었다.
□앙코르 톰(큰 왕성)
1. 입구의 문
성안의 인구는 100만이었다 한다. 입구는 다리가 놓여있고 아래에는 50여m의 해자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입구의 문이 있는데 12세기 초에 이 사원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의 상이 있다.
2. 바이온 사원
모든 돌은 사암이다. 왕이 사는 곳이다. 일반백성들이 사는 곳은 모두 없어지고 밀림만 남았다. 54개의 탑과 216개의 불상이 있다. 54명의 영주를 상징한다고 한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의 보조와 시장모습, 서당모습등과 온갖 서민들의 생활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 부조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거니와 안타깝지만 우리나라의 조각미술과 비교가 아니 될 수 없다. 참으로 훌륭한 예술이다. 압살라의 여인(춤추는 여인)상이 대표적이다.
3. 밥푸온 사원
많은 훼손이 있는 관계로 아직 프랑스에서 복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사진만 한 장 찍었다.
4. 중앙사원
구 왕궁터를 나가는 문을 지나니 중앙사원인 피미아니카스가 있다. 대단히 넓다. 이 곳에서 일행이 한참동안 휴식을 취했다. 코코낫을 먹고 많은 분들이 선물용으로 실크 목도리를 샀다.
5. 코끼리 테라스
중앙사원을 나오니 큰 코끼리 조각이 있는 곳이 코끼리 테라스이며 사암과 라테라이트석으로 쌓아져 있다. 십자모양의 연단이 대단히 크며 아래로는 넓은 광장과 승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승리의 문들이 세워져 있다. 넓은 광장은 연병장이라 한다.
6. 따께오 사원
미완성으로 남은 사원이며 차를 타고 지나면서 설명을 들었는데 정말 일체의 조각을 볼 수 없다.
7. 타프론 사원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만든 사원이라 한다. TV를 통해 보았을 때 가장 놀랐던 모습은 바로 이사원에서 볼 수 있다. 무너져 내린 건물사이에 엄청나게 자라난 나무들 그리고 그 나무의 뿌리들이 건물과 함께 어울려 옛 찬란한 문화의 폐허된 모습을 실감케 하는 곳이 바로 이 타프론 사원이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사원안에서 떨어진 돌조각을 한개 주어 주머니에 넣은 것이 귀국시에 작은 말썽을 일으켰다.
□앙코르 와트
대단히 큰 식당에서 대단히 훌륭한 다양한 메뉴의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앙코르 와트사원에 가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의 선왕인 수리야바르만 2세부터 건축한 사원인데 1113-1150 간, 즉 37년간에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사원이니 도대체가 인간의 힘으로는 그리고 오늘날의 기술과 힘과 온갖 과학을 동원한다하여도 불가능할 것 같은 불가사의 한 것이다. 이 사원은 비시뉴신에게 바친 사원이며 자신의 무덤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해자의 길이가 200m이며 다리의 길이는 230m이다. 아! 사원의 웅대함이여! 3층으로 되어 있는 중앙 건물과 주변을 한바퀴 두른 회랑의 규모도 그 장엄함에 감탄할 뿐이다. 언젠가 TV에서 본대로 중앙 3층을 오르는 일이 조금 겁이 났으나 양선생이 용감하게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에 나도 따라 올랐다. 오르는 데는 아무렇지도 않더니만 내려 올 때는 매우 가파라서 위험하여 나보다도 양선생이 다칠까봐 걱정했더니만 마을 아이들은 슬리퍼 신은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 우습다.
▣제5일(1월 11일)
오늘은 시간이 느긋하다며 9시에 출발한다. 목적지는 1천년 전에 만들어진 인공호수인 툰레샵 호수이다. 길이가 서울에서 부산가기만 하며 동남아시아지도에도 표시될 정도로 호수가 아니라 마치 바다이다. 호수주변에서 배를 띠워 사는 사람들이 많고 그 배후습지의 길가에 오두막같은 집들을 짓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엄청 많다. 호수에 더 있는 수많은 배들이 어떤 것은 가옥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상점이며 식당이다. 아이들은 관광객들에게 〈원 달라!〉를 외치며 다라이에 타고서 묘기를 보이기도 한다. 교사 월급이 월 45달러(교사중 최고라는 영어교사)인데 아이들이 하루에도 몇 달러씩 번다니 아주 공평치 못하다. 단돈 천원이라고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1975년부터 4년 동안 벌어진 공산당 내전으로 폴포트 정권의 크메르 루즈(붉은 크메르) 의해서 800만 국민 중 300만명의 양민이 학살당한 것이 저 유명한 킬링필드이다. 무능한 국왕 시아누크아래 공산당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내전으로 캄보디아는 초토화되었다. 미국이 비호를 받던 론놀정권이 무너지고 부터의 일이다. 현재는 시아누크가 아들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는데 식당이나 호텔에 저 무능한 시아누크가 6번째 왕비 및 아들인 왕과 함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니 괜히 부화가 치민다. 한때는 김일성에게 의탁하여 평양에서 지내던 저 인간이 아직까지도 입헌 군주제라는 미명으로 상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후진국의 비애다. 장기집권자인 훈센의 얼굴마담이 아니런가?
선생보다는 외국인 가정부가 월급이 많다는(5만원) 나라, 장가가려면 아직도 수백만원씩의 지참금을 내야하며 돈이 없으면 월세로라도 처갓집에 갚아야한다는 크메르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평양 랭면집에서 하게 되었다. 두어 가지 공연을 해주며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외화벌이하는 저들이 가련하다. 아가씨들은 기예단 소속으로 중국과는 달리 3년간 근무하는데 개인외출은 일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시엔립 비행장을 떠난다. 먼저 들어간 양선생이 가방을 통과시키다가 문제가 생긴 듯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는데 아이쿠1 바로 그 돌멩이이다. 재빨리 김대옥 가이드에게 말하여 해결지었다. 5달러를 주고 해결하였다는데 이젠 기념 돌맹이 가져오는 일도 그만 해야겠다. 9시 35분에 도착한 호치민 비행장에서 1시 20분가지 기다려야 한다.
▣제6일(1월 12일)
새벽 1시20분에 출발하여 4시간 40분 걸려 8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짐을 찾아 9시에 인천을 출발하여 익산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오는 길이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인지 매우 피곤하여 오후에는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대로 의미있고 즐겁고 건강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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