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고구려 유적 답사기(2002)

청담(靑潭) 2009. 8. 29. 11:58

 

고구려 유적 답사기

 

 

(2002.7.30∼8.4)




◆들어가는 말◆


 

   지난 5월에 해상왕 장보고 유적 답사를 다녀왔으니, 금년에는 처음으로 한 해에 두 번이나 해외에, 그것도 중국에만 두 번 가게 되

었다. 진작부터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가, 해우회에서 해외여행을 계획하기에 내가 나서서 고구려 유적지 답사로 목적지를 정하였다. 그러나 모은 돈이 겨우 한 가족 당 30만원인데 경비는 최하 250만원이 들고, 게다가

김호길, 김병근 내외는 작년에 뻬이징에 다녀온 바 있기에 억지춘향격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고, 여행코스가 용정에 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4월에는 김해공항에서 중국 민항기가 산중턱에 부딪혀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더니, 한달 뒤에는 따렌에서 바다에 추락하여 100여명이 죽었다. 중국 항공기 사상 수 십 년 만의 대형참사라고 하지마는 두 사고 모두 한반도 주변에서 발생하였거니와(상하이→김해·뻬이징→따렌), 특히 따렌 사고는 김호길 선생이 추천하여 가려하는 여행사가 만든 일정표대로 여행하면 마지막 돌아오는 날 타는 비행 코스라서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중국민항(CPA)아닌 아시아나나 대한항공으로 갈 작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여섯 가정이 함께 가려던 여행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우리 둘이서만 따로이 계획을 세워 나서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내성 코스가 들어가는 중국여행 코스는 거의 모든 여행사에 개설되지 않고, 다만 인터파크라는 여행사에서 상당히 저렴한 가격(95만원)으로 제시되어 있어 신청하게 되었고 무려 15개 여행사에서 모은 인원이 12명이라 하였다. 이틀 전까지 9명이라 하더니만 전날에 인원은 12명이요, 열차숙박이 이틀이나 된다며 양해를 구하였다. 어차피 고생을 각오하고 떠나는 여행이기에 불평 없이 승낙하였다.




◆첫째 날(7월 30일)-長春市◆


 

  인천 공항에서 모두 만나는 시간이 7시 30분이기에 전주에서 3시 발 공항버스표를 예매하였다. 29일 밤엔 익산의 해우회 멤버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집에 와 쉬다가 집 앞에서 1시 30분에 택시를 잡았다. 공항버스는 7시에 도착하고 곧 수속을 밟았다. 함께 일행이 된 사람들은 4가족 12명이다.

  비행기는 조금 늦게 10시 10분쯤 출발하여 10시 50분에 장춘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보다 1시간 늦은 곳이니 1시간 40분 거리다. 11시 35분에 밖으로 나와 가이드를 만나다. 가이드는 24살 먹은 길림대 무역학과 4학년인 이영수라는 청년인데 착하게 생긴 사람이다.

  장춘은 인구 250만의 길림성의 성도이다. 길림성의 인구는 2718만이니 북한보다 많다. 이중 교포가 118만이라 한다. 우리 교포는 흑룡강성에 40만, 라오닝성에 20만이 산다고 한다. 전 체 중국 교포가 220만이니 동북 3성에 180만이 산다고 보면 되겠다. 장춘은 중국 최초로 자동차를 생산한 곳이요, 영화 제작소로도 유명한데 다 옛이야기다. 돌아보아도 공업도시로 서의 모습이 아니요, 규모도 중소기업들로 보인다. 이외에 대학이 많고 삼림이 유명하다. 14년간(1931-1945) 옛 만주국의 수도로도 유명하다. 흠! 최규하 전 대통령과 진의종 전 총리가 20대의 젊은 사무관으로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관동군 육군 중위로, 집안의 삼례 아저씨가 측량기사로 근무하던 그 만주국의 수도인 것이다. 객가식부(客家食府)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답사를 시작하였다.


◎남호공원


  항저우의 서호 같지는 않지만 장춘 사람들이 많이 사랑하고 찾아오는 공원이다. 연꽃이 피어 아름답고 무더운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고기를 잡는 사람, 두 나무에 돈을 주고 사는 작은 그네 같은 줄을 매고 잠을 자는 사람들 모두 한가롭다. 청화백자 도자기를 수 만개를 끈으로 엮어 어마어마한 용을 만들고 있다. 촌스러운 모양이지만 중국사람들은 워낙 용을 좋아하니 있을 수 있는 일이리라.


◎국립영화 제작소


  과거 60년대쯤에나 영화를 찍던 곳인가 보다. 건물은 그럴듯해 보였으나 도무지 보아야할 의미가 없는 곳이고 에어컨 시설이 안되어 덥기 그지없다. 중국인들은 볼만한 모양인데 우리일행은 중국 사극 찍는 장면은 조금 재미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어 가이드에게 중단을 요구하였다. 가이드도 흔쾌히 동의하여 내가 만주국의 황제 부의(푸이)의 궁성에 가기를 건의하였다. 기꺼이 40위안(6천원) 씩을 내고 위황궁을 돌아보게 되었다.


◎僞皇宮


  1932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국의 황제였던 부의의 궁이다. 가짜 황제의 궁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만주국 황제가 거처하던 궁성으로는 참으로 초라하지만 궁궐의 모양은 갖추어 있고 침실과 접견실 집무실 등에 가구 등이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다. 오른쪽엔 당시 아주 잘 지은 건물이 있었으나 황제가 끝내 입주를 거절하여 쓰이지 못했다 하는 데 도청을 무서워해서였다 한다. 혹 일본을 미워하는 심정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겨우 우리 학교의 본 건물만 하였으나 상당히 고급스럽고 아기자기 하며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2층 건물에 수 십 개의 방이 있는데 역시 궁궐이라기 보다는 총독의 관사라 하면 어울릴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하긴 조선의 총독이 살던 청와대를 비교한다면 맞지 않는 얘기지만 … 지금 까지도 만주 사람들은 푸이를 미워하는 마음들이 변치 않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감정도 식을 줄을 모른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네 명의 아이들의 공부하는 태도가 아주 바람직하다. 부모들이 그저 단순한 관광이라기보다는 고구려 문화를 답사하기 위해 사전 공부도 시켜왔거니와 능동적으로 가이드에게 묻기도 하면서 보고 듣는 내용을 기록하는 모습에서 참 착하고 예쁘게들 크고 있구나 하는 흐믓함과 우리승수와 승원이를 생각하면 밀려오는 슬픔이 교차하였다. 정말 자신의 미래에 대한 비젼과 희망과 꿈과 도전과 끈기와 용기와 자신감이 그렇게 밖에 없는 것일까? 그냥 감정과 감각대로 적당히 즐겁게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부모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대학 졸업은 시켜줄 것이니 먹고사는 것은 알아서 책임지라는 건 나의 자식 키우는 무능력을 드러내며 자식에 대한 협박이 아닐까? 도대체 어쩌면 저토록 소중한 시간들을 친구들과 수다로 낭비하고 잠으로 낭비하는 것일까? 왜 부모의 걱정근심을 간섭과 잔소리로 치부하며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저토록 자신의 일을 창의적으로 스스로 이끌

어 나가지 못하고 부모의 방침과 지도는 가볍게 흘려 버리는 것일까? 두 아이의 능력과 운명이라고 방치하기에는 너무나 슬픈 일이어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희망을 잃은 슬픈 아빠가 되어 버렸다.

위황궁을 보고 나서 무덥고 피곤하기에 음료수나 마실까하여 가이드에게 요청하니 찻집을 안내한다. 상당히 고급 찻집이며(차 한잔에 20위안) 아가씨들이 여러 차를 설명하며 판매도 하는 곳이다. 20위안이면 중국인들의 이틀간 수입인데 이런 곳에 올 리 없고 한국인들에게 차를 팔기 위해 만든 업소이다.

  남양촌이란 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다. 보신탕 1인분이 10위안(1500원)이요, 수육 한 접시가 15위안(2300원)인데 우리한테 커피 한잔에 20위안(3000원)을 받는 저 商魂.이번 여행은 내가 네 번째의 중국여행임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초행이라서 여행사의 부탁으로 총무를 보기로 한바 있어 가이드와 상의하니 기사는 하루 팁이 20달러이고, 가이드는 30달러선이라 한다. 역전에서 기사에게 2만 4천원을 주니 만족해 한다.

  이제 밤 열차로 집안으로 떠난다. 6인 1실인데 복도와 침실이 열려 있다. 3층이며 꽤나 답답한데 창문을 열면 바람이 세게 들어와 덥진 않았다. 밤 9시에 출발하였다. 밤 열차는 옷 갈아입는 일이 제일 힘들고 씻는 일도 힘이 드는데 중국인은 여성들도 남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더라 한다. 5시에 잠이 깨어 밖을 보니 끝없이 이어지는 산이요, 푸른 녹지의 연속인데 영락없이 강원도요, 충청도의 산맥들 곁을 지나는 듯 싶다. 전혀 이국적이 아니요, 내 민족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바로 내 땅이다. 농부들은 이미 일어나 들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고 있고, 조랑말들도 보인다. 밭은 수수밭의 연속이다. 그리고 달맞이꽃이 보인다. 그래 바로 우리 땅이다. 고조선의 땅이요, 고구려의 땅이요, 발해의 땅이러니 우리의 조상이 터 잡고 살아온 곳 바로 이 땅이다. 삼국통일의 역사성을 곰씹으니 실로 아쉽고 분함이 그지없다. 아침 6시에 통화(通化)에 도착하였다. 이곳 가이드는 김광숙씨인데 36세로 공무원이며 산동대학 출신인데 아르바이트중이라 한다. 아주 박식하고 똑똑한 여성으로 1급 가이드이다.




◆둘째날(7월 31일) -集安市◆


 

   통화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가이드 이영수군은 돌아가다. 위황궁 입장료 6천원을 포함하여 4만 2천원을 주었는데 고맙게 받았다. (중국 봉급생활자의 월급은 대개 우리 돈 10만원 내외이다.) 집안으로 차를 달리니 감회가 크다. 이곳 통화시에 비류수가 흐르니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금와의 아들들을 피해 도망하다 고기와 자라떼의 도움을 받았다는 고주몽 설화에 나오는 그 강의 본류로 보인다. 고주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름 주몽(朱蒙) ·추모(鄒牟) ·상해(象解) ·도모(都慕).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왕(東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 유화는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자기를 유인하여 사통(私通)하고는 돌아오지 않아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 있다 하므로,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다.

  금와왕의 구출을 받은 유화는 금와왕의 방안에 유폐되었다. 그때 하늘에서 유화를 향해 햇빛이 비쳤다. 유화는 그 햇빛을 피했지만 햇빛은 유화를 따라다녔다. 햇빛을 받은 유화는 갑자기 해산 기미를 보이더니 이윽고 커다란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이를 매우 불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알을 돼지의 먹이로 주어 버렸다. 그러나 돼지가 그것을 먹지 않자, 이번에는 그것을 길에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우마 (牛馬) 조차도 이를 피해 지나갔다. 또한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알을 감싸 주었으며, 깨뜨리려고 해도 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그 알을 낳은 어머니 유화 부인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유화부인은 그 알을 이불로 싸서 따뜻한 아랫목에 놓아 두었다. 마침내 그 알을 깨고 그 속에서 씩씩한 아이가 나왔다. 이것이 한국의 난생신화(卵生神話)의 시초이다. 큰 알을 깨고 태어난 사내아이는 용모가 단정했다. 자라나면서 활을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또한 마술에도 능통해 신동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활의 명수를 소위 주몽(朱蒙)이라고 하는 풍속에 연유하여 그 이름을 주몽이라 불렀다. 활을 잘 쏘고, 마술에 능했다는 것으로서 수렵민이나 기마민들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알은 마치 태양의 형태를 본뜬 것 같은 둥근 알이었기 때문이다.

  주몽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천손이었으며, 또 수신 하백을 외조부로 하여 태양신과 수신의 복합신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수직적 (垂直的) 세계관이 그 기둥으로 되어있다. 금와왕이 키운 주몽은 왕이 두려워할 만큼 신동이었다. 왕자들은 후사를 두려워하여 모두 주몽을 죽여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이려 시도해 보아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주몽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세 하인을 거느리고 동부여를 도망쳐 남하하여 엄수(淹水) 기슭에 이르렀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수를 행해 주몽은 소리쳤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데 강을 건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 주몽의 외침을 듣고 물고기와 거북이 달려와서 등을 나란히 하여 다리를 만들어 주몽을 건너게 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이쪽 기슭으로 건너서자 물고기와 거북은 간데 없이 흩어져 버리고, 뒤쫓던 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했다.

  무사히 졸본주(卒本州)에 이른 주몽은 BC 37년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천제의 가호와 태어나면서부터의 타고난 신술(神術)에 의해 비류왕 송양(松讓)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고구려의 기초를 굳혔다. 주몽의 본래 성은 해씨(解氏)였으나 고구려를 세우고 고씨(高氏)로 바꾸었다. 해(解) 는 태양의 해라는 말과 같은 음이며 또한 태양은 높다는 의미이므로 성을 고(高)라고 하였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 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버스 속에서 고주몽 설화와 동북3성 즉 만주의 역사 지리적 변천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게 멸망후 사실상 우리의 영토에서 완전 이탈하였으며, 17C 청이 封禁 地域으로 정한 이후 漢族의 출입을 금하다가 19C에 개발이 시작되고, 우리 민족도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발해 이후 벼농사도 재개되었던 사실을 설명하였다.

  고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 졸본(홀본)인데 지금은 환인이라 부른다. 그곳 환인에서 2 대 유리왕이 이곳 집안으로 AD3년에 천도하게 된다. 이제 무려 424년간 고구려의 서울이었으며 평양보다도 더 많은 고구려 역사유적과 숨결이 남아 있는 집안에 가는 마음은 설레고 있다. 수업시간에 국내성의 지명을 지안현(집안현) 퉁코우(통구)라고 가르쳐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성과 환도성 앞 부근이 퉁코우요, 이젠 큰 도시가 되어 집안시이므로 퉁코우 란 지명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가는 길에 장이 서있는 시골마을을 지나면서 모두 내려 구경하였다. 烟爐鎭이란 작은 마을인데 10일장으로 상품들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다. 공산품 도 최 하질 상품이며 농산물도 집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다. 옷장사 하는 30대 중반의 예쁜 여성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올리고 앉아 있는데 앞에서 속옷이 다 보인다. 여러 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고, 치마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분방함은 엿볼 수 있으나 팬티까지 보이는 건 너무 한다 싶으나 나는 男子! 나쁠 것 없다. 버스로 2시간을 달려 집안시에 도착하였다.


◎ 집안 역사 박물관


  10시에 도착하여 박물관에 들어갔다. 1958년부터 개관하였다는데 초라하기 그지없어 박물관이란 이름도 어색한데 하물며 우리의 고구려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 생각하니 그 초라함에 슬픔이 앞선다. 그저 어느 무덤하나 발굴하여 시골 군청 옆 창고하나 비워서 전시하는 형국이라 할까? 사진이 아닌 모두 벽화들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한걸 보니 10여년 전 전시물을 아직도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고구려 무덤형식이 비교적 소상히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되어 있다.


A. 적석총(돌무덤)


①적석묘-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돌들을 덮은 무덤.


②방단 적석묘-제일 아래는 큰 돌로 쌓고, 그위는 적석묘와 같음.


③방단 계단식 적석묘-장군총처럼 큰돌로 맨 위까지 쌓았으며 내부는 적석묘임.


B. 흙무덤


①봉토 석실묘-평지에 방을 만든 형태


②봉토 동실묘-지하에 방을 만든 형태


 

◎환도산성


  아직 11시이기에 환도산성을 먼저 보기로 하였다. 산상왕 12년(209년)에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며, 동천왕 20년(246)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함락되었고, 동천왕 21년(247) 평양성(지금의 평양이 아님)으로 천도하였고, 고국원왕12년(342) 환도성으로 옮겼는데 연의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왕모와 5만명이 납치되기도 한 비운의 성이다. 단순히 외적을 막기 위한 산성이 아닌 200여 년간의 궁성으로 보는 견해들이 유력하다. 우리의 환도성이건 만 집안현에서 발굴을 한다하며 사진촬영도 못하게 한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천혜의 요새인데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없다. 성안의 깊숙한 진입을 금하고 있다. 이 천혜의 요새를 관구검은 뒷산을 넘어 쳐들어와 함락했다 한다. 연못인 음마지엔 물도 거의 없이 잡초만 우거져 있다. 내려오면서 산성하 무덤떼는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채 행여 감시인에게 걸려 벌금이라도 물을까봐 혼강 사진만 한 장 찍고 나왔다. 비기 와서인지 환도성 앞 혼강은 맑고 세차게도 흐르는구나.



◎국내성


  이미 책자와 사진을 통해 국내성은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시내 의 큰길가에 유적지로 겨우 모습을 유지하며 서 있었다. 1980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m로 총 둘레가 2686m나 되는 쾌 큰 평지성이었다. 1975년 발굴 당시 모두14개의 치(雉)의 흔적이 있었고, 치의 위에는 포루(鋪樓:누각)가 있고, 모두 6개의 옹성문(甕城門)이 있었다 한다. 1921년 성을 전체적으로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광복때 까지만 해도 성벽들은 7-8m높이로 보존이 되다가 인구가 늘어 나면서 윗 부분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한다.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곳은 성의 북쪽이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바로 압록강이다. 저 압록강. 그러나 물은 더럽고 강폭은 그리 크진 않았다. 바로 앞에 벌등도가 있어 물은 두 갈래로 흐르고 있다. 벌등도는 북한땅인데 눈앞에 보이는 압록강 저 편의 산들이 모두 북한 땅이다. 이 곳에 오면 모두 들린다는 쇠고기 불고기집에서 한참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데 아니 이신효 생과 임홍락 선생이 놀란 눈으로 웃으며 다가온다. 이신효 선생의 인솔로 익산고 교사자녀들 8명, 임홍락 선생 내외. 배흥선 선생 내외, 처음 뵙는 이종범 선생 등 14명의 답사단이다. 이들은 전적으로 고구려 유적답사를 목표로 환인과 집안 그리고 가는 길에 백두산과 용정을 들러 심양으로 나가 귀국하는 3박 4일코스라 한다. 이도백하로 가는 열차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용정 대성중학교에서도 잠깐 스쳤다.


◎五恢墳 五號墓


  이곳 집안에는 무려 1만 2천기의 무덤이 있다. 그중 23기의 무덤에 벽화가 있는데 공개되는 유일한 무덤이 바로 오회분 오호묘이다. 자는 군사들이 전쟁 때 쓰는 투구나 음식을 담는 그릇을 뜻하는 것으로 다섯기의 큰 무덤이 마치 투구나 바리(그릇)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라서 오회분이라 한 것이다. 이 무덤들은 돌 위에다 직접 그림을 그렸다.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가니 바로 현실이 나온다. 대단히 화려한 벽화가 어지러이 그려져 있는데 규모가 크고 장엄하다. 네 벽의 사신도를 비롯하여 무려 39마리나 되는 용이 그려져 있고 천장은 모줄임 양식으로 줄여 나갔는데 그 천장에도 마치 그리스 신들을 방불케 하는 신들이 그려져 있다. 10 여년전 예술의 전당에서 고구려 벽화전이 열렸을 때 구입한 사진첩을 아깝게 잃어버린 일이 참으로 애석하다.


◎將軍塚(장수왕릉)


  이곳 무덤 중 가장 큰 무덤은 천추릉인데 고국양왕릉으로 보고 있다. 무려 85M×80M이며 무덤 자리만 2060평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유명한 건 바로 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높이가 12.4m, 한 변의 길이는 31.58m나 된다.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일컫는 장군총은 위용이 대단하다. 방단 계단식으로 큰돌들을 겉에 쌓았으며 네 면에는 거대한 괴임석들을 걸쳐놓았다. 후면의 괴임석이 작고 하나가 깨어져서인지 후면 좌측이 무너지고 있어 영락없이 미륵사탑을 보는 느낌이다. 5층에 묘실 입구가 있는데 들어가 보니 방이 대단하다. 변의 길이가 5M, 높이가 5.5M이며 천장석은 하나의 돌로 거대하다. 오회분처럼 두 개의 棺床이 놓여 있다. 427년에 장수왕은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으나 이미 무덤은 이곳에 만들어 놓았기에 무덤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무덤인데도 그 모양이 아주 아름답고 정리도 잘 되어 있다. 경기도 양주시의 고교생들의 동아리에서 단체 답사를 하러 온 모습을 보다. 대단하다. 역사교사인 내가 이제야 와보는데 학생들이 이곳까지? 뒷편 우측에는 딸린 무덤이 하나 있는데 장수왕릉과 똑같은 축소판 무덤 위에 고인돌이 있고 그 안에 관을 둔 모습인데 규모가 크다.

  예전에 세 개였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 한다. 고인돌 위에 오르니 시원하기 그지없어 모두 올라가서 땀을 식혔다. 능 앞 계단에서 이번 여행의 유일한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6위안(900원)을 주고 알이 작은 중국사과를 사서 일행에게 나누어주고 먹어보니 꽤나 맛이 있다.


◎광개토대왕비


  드디어 오게 되었구나.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에 내가 오게 되었구나. 기어이 내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되었구나. 높이 6.39M의 세계 최대의 비석이다. 1637년 봉금제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고 1876년 봉금해제 이후 1880년에 어느 농부가 발견하여 관청에 보고하여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때는 들판에 초가 몇 채가 있는 사진의 모습이 남아 있다. 414년에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높이 6.39m, 너비 1.95m의 선돌 모양의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1775자의 글자를 새겼다. 그중 142자가 판독이 안되고 있다. 이 비의 제1면은 고구려의 건국내력을, 제2면과 3면은 대왕의 정복사업의 업적을, 4면에는 묘의 관리문제를 기록하였다. 1928년 집안현 지사의 발기로 아담한 비각이 세워 졌었는데 지금의 비각은 1982년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발견 당시의 사진과 지금의 비석을 보면 윗 부분이 결코 같지 않다. 서길수 교수(책명:고구려 역사 유적 답사)도 이점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머리 부분은 아무래도 수상하며 제 모습이 아닌 듯 하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은 이 비를 일명 바위책이라 하거니와 동양 3국이 가장 주목하는 비이다. 이 비석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 부터 속민이었기 때문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


를 건너오므로 백제를 부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문장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이설, 일본군의 변조설, 왜의 새로운 규정설 등 벼라 별 주장과 각기 다른 해석들이 많으나 고구려가 주인공이므로 이를 감안하고, 당시 강력한 고구려가 신라를 보호하고, 왜와 백제는 같은 편인 상황에서 위의 해석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백제와 왜는 가야를 괴롭히며 왜들이 가야지방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호태왕은 신라를 돕고 왜 및 백제를 친 다음 신라에 대한 정치적 구속력을 더욱 강화하였던 것이며, 백제로부터 일종의 항복을 받아낸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보고 싶다.

  집안은 광개토대왕비 발견당시 20여 호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인구가 21만이요, 조선족이 1500명 가량 산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비에서 200여 미터 마을길을 걸어 올라가니 호태왕릉이 나온다. 다른 데는 관광 안내원들이 있어 입장권을 판매하고 안내하지만 이곳은 찾는 사람들이 적어서인지 비문에 근무하는 여성안내인이 동행하여 능까지 안내한다. 도착하니 능지기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데 우리 교포라 한다. 이 능은 정방형인데 한 변의 길이는 66m나 된다. 높이가 14.8m, 면적이 1318평으로 장군총의 네 배가 넘는다. 이 대왕릉도 원래는 장수왕릉처럼 방단 계단식 적석총으로 그 위용은 엄청났을 것이나 모두 무너저 큰돌의 일부만이 남아있고 큰돌의 안에 쌓았던 잡석들 만 보인다. 집안시가 훠언히 내려다보이는 뒷동산 에 올라온 듯한 느낌이다.

  봉분의 규모에 비해 현실은 규모가 아주 작았는데 생전의 왕의 뜻에 따른 듯싶다는 의견이다.  그래 우리 서민은 32평도 감지 덕지인데 이회창씨는 85평짜리 빌라를 3개나 쓰고, 장상 총리 서리는 45평을 두 칸 털어서 살았다니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 나는 죽어 한 평의 반의 반이면 족하다. 부끄럽지만 양 선생이 기와조각 하나를, 내가 잡석 중 예쁜 돌 하나를 집어들었다. 안 선생도 기와조각을 주웠다고 자랑이다. 저 멀리 씨름도가 있는 각저총이 보인다.




◆셋째날(8월 1일)-백두산·연변◆


 

   집안에서의 답사가 4시쯤 일찍 끝나고 다시 통화로 나가 이도백하로 가는 열차를 타게 된다. 이틀간이나 열차숙박이어서 제대로 샤워를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터라 모두 목욕탕에 가기로 하였다. 6시에 통화에 도착하여 남새시장을 구경하였는데 과일이 많다. 엄청 싸지만 먹고 싶지는 않다. 나는 워낙 밥을 잘먹고 있기 때문인데 아이들은 깨끗치 못해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한다. 그래 너희들은 우리와 다르지. 가난을 모르고 살아 왔으니깐….

  식사를 마치고 최고급 목욕탕에 40위안(6천원)씩 주고 들어갔다. 샤워실은 우리 목욕탕만도 못한데 2층 휴식실로 가니 쉬는 침대와 음료, 양주 코너에 맛사지 등도 할수 있는 성인용 사우나였다. 어린이가 들어온 것이 신기한지 아가씨들이 인근이에게 말을 걸며 아주 예뻐한다. 11시에 기차는 이도백하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임홍락 선생팀과 술 한잔을 하고 잔 탓인지 새벽6시가 되어서야 눈을 뜨니 창 밖은 끝없는 밀림이다. 장백산맥이 가까운 때문이리라.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키가 크며 쭉죽 뻗어 자라 있다. 우리와 분명히 다르다. 그 밀림숲을 열차가 헤쳐가고 있다. 역 주변에는 구릉지에 비교적 큰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도백하에 7시에 도착하였다. 김광숙씨는 돌아가고 맞이하는 새 가이드는 중학교 중국어 교사인 남춘란씨이다. 우리말이 약간 서투른 연변말투다. 이도백하는 시내 인구가 15만이며 조선족은 극히 적다고 한다. 장백산으로 가는 중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장백산 안내소까지의 시멘트 길을 밀림을 뚫고 달리는 기분이 매우 상쾌하다.


◎장백산(백두산)천지


  천지까지는 찝차를 이용한다. 7인승인데 왕복 10달러이다. 비가 오는 고로 천지 보기는 영 틀렸다고 생각은 했으나 혹시나 하는 기대도 약간 가지면서 출발하였다. 구름을 뚫고 달려 천지 위에 도착하니 광풍이 몰아치고 비가 약간 내린다. 아! 백두산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늘아래 가장 높은 곳에 내가 섰다. 천지는커녕 5m 앞도 잘 보이질 않는다. 모두들 신이나서 추위도 잊은 채 신들 났다. 사진만 찍고 내려오려니 못내 아쉽지만 어떡하리. 내려오면서 야생화를 찍기 위해 부탁하여 잠시 정차하고 사진을 찍었다. 5분 정차하였다 하여 1만 2 만원에다 8천원을 붙여주라는 가이드의 상술이 너무 한다 싶었다.


◎장백폭포


   장백폭포에 갔다. 백두산 뒤로 쑹화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 옛날 숙종때(1720년) 청의 목극동과 조선의 박권이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를 세울 적에 목극동은 이곳 지리에 밝은 지리학자인데 반해 우리의 박권은 일개 지방관리로 지리에 문외한이었다 하니 어찌 간도땅을 우리의 땅으로 만들 수 있었으리오? 실제로 이곳에 와보니 너무 많은 작은 강들이 혈관처럼 뻗어 있을지니 「西爲鴨綠 東爲土問」이란 글자를 해석함에 있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비가 와서인지 폭포가 장쾌하게 떨어지고 중국인 관광객도 아주 많다. 노천수가 무려 82° C나 되어 계란이 삶아진다. 세 개를 사서 먹다. 온천수에서 목욕하는데 요즘말로 장난 아니다. 45°C라는데 들어가기 힘들다. 물이 그리 좋지는 않다.


◎용정


   점심을 먹고 연길을 거쳐 용정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이 웬일인가? 가이드가 연길에서의 비행기 시간도 모르고 용정코스는 회사에서 지시받은 바 없다한다. 조금 강하게 얘기해서 용정엘 가게 되었는데 가이드의 표정이 나쁘다. 연길에서 용정까지 50분이 소요된다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실제 25분) 해란강과 윤동주를 만나러 간다는 기쁨에 들뜬 이심미 선생이나 아이들의 즐거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대성중학교 2층에 있는 윤동주 전시실에 올라 가지 못하도록 결사적으로 막는다. 비행기 시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중얼거리는 말은 회사에서 혼난다는 투다. 계약이 안되었기 때문이란다. 이런 저질 가이드가 있을까? 설령 그 렇다 하더라도 회사를 통해 인터파크에 항의를 하면서라도 기왕에 갔으니 최선의 서비스를 해야 하지 않나? 연길로 나오는 길에 무섭게 혼을 내고 영 기분들이 우울했다. 게다가 똥차 기사팁을 8만원을 요구하며 자기는 더 받아야한다는 투다. 이런 빌어먹을 연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한국인들이 돈을 물쓰듯하며 물을 흐려 놓아서인지 아예 한국에서의 돈 가치만큼 우려내려 한다. 실례로 중국에서는 생수 한 병에 1위안인데 외국인에게는 3위안에 판다. 그런데 연변에서는 우리에게 천 원을 내라한다. 천 원이면 6위안이 넘으니 6배가 넘지 않는가? 아무도 사지 않았지만 정말 너무 한다. 대성중학교내의 윤동주 시비 앞에서 겨우 사진 한장씩 겨우 찍고 10분도 못되어 다시 차에 올랐다.


◎연길시


  연길시는 연변 자치주의 중심도시이다. 연변자치주는 자치구와는 달리 길림성 소속의 자치주이다. 즉, 省급이 아니라 市급이라는 얘기다. 모두 6개의 시와 5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시가 연길시로 인구가 44만이요, 용정시는 32만이다. 우리 동포들이 가장 먼저 이주하여 살게 된 곳이 용정으로 70%가 교포이다. 연변은 정말 논이 많은 평야이기도 하거니와 밭은 다른 중국과는 전혀 달리 우리의 밭처럼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하고 있어 영락없는 우리의 시골 풍경이다. 연길시는 예상보다 큰 도시이며 우리교포들의 모양새가 다른 도시의 중국인들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예쁘다. 하긴 10여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온 돈이나 이 곳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가? 그것도 마치 시기치는 것 같은 수법으로…잘사는 것이 이해가 된다. 비행장 광장은 한국인들로 만원이었으며 젊은이들의 노래 소리와 열기가 대단하였다. 비행기는 8시 40분발이었는데 정시에 출발하는 일은 거의 없다한

다. 9시 10분에야 출발하였으며, 가이드들이 표를 사기 위해 땀흘리는 무질서는 가관이었다.

  엉터리 가이드인 남춘란에게 기본인 4만원만 주려다가 땀흘리는 모습이 가여워서 5만원을 팁으로 주며 잘 타일렀다.(기사에게는 무려 5만 5천원을 주었는데 지입차라고 사정하는데 꼼짝 못하고 3만원을 더 준 것이다. 연변에 대한 조언도 없는 터라 하소연인지 협박성 애원인지 모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아니 여행사에 돈 내고 관광하는 우리가 지입차와 무슨 상관이 있나? 인터파크의 무계획성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뻬이징에 10시 45분에 도착하였다. 중국 비행기가 아주 깨끗하였다. 前門建國호텔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넷째날(8월2일)-뻬이징◆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이다. 이미 상하이 같은 큰 도시도 가봤으나 이곳 북경은 인구가 무려 1700만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도시이다. 상하이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드넓은 도시가 새롭게 변하는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은 1368년에 원을 쓰러뜨리고 처음엔 남경을 도읍으로 정했지만, 영락제때 북경에 자금성을 짓기 시작해 1421년에 정식으로 천도했다. 명 성조 영락제가 수도를 만들 당시에는 원의 대도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새롭게 건축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이 현재 북경의 주 골격이 되었다. 명을 이은 청(청)도 북경을 수도로 삼아 오랫동안 정권을 지켜왔으나 북경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곳 뻬이징은 원(1206-1368)과 명(1368-1644) 그리고 청(1616-1912)의 오랜 수도였던 곳이라는 얘기다.


◎정릉


  명의 황제는 모두16명이다. 그 중 태조 주원장은 남경에 묻히고, 2대인 혜제는 행방불명이다. 4대 인종은 쫒겨나 다른 곳에 묻혀 모두 13명의 황제묘가 모여 있는데 공개하여 관람시키는 이 정릉은 임진왜란당시의 황제인 신종의 묘이다. 가는 도중에 멋진 포즈의 동상이 있어 물으니 이자성의 동상이라 한다. 명을 멸망시킨 농민의 지도자라서 공산주의사회에서 영웅시되었던 듯 싶다.

  신종은 48년간 재위하였는데 미리 지어 놓은 이 지하궁전에서 많은 여성과 지냈다는 비판을 크게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입구의 비문엔 글자가 없어 無字碑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시 5만 군사를 보내 도와준 은인이라 하여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니 조선의 지나친 숭명사상에는 쓴 웃음이 지어진다. 청주에 있던 만동묘가 바로 그것이다. 하긴 요즘 민주당이 이회창씨 아들 병역비리 정국을 5년만에 다시 이끌어내는 꼬락서니에 비하면 그래도 낫지. 정치 사기꾼 무뢰배 조폭 집단 민주당은 해도 너무 한다.

  지하 묘궁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서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황제는 죽어서도 저런 곳에 살고 싶어했구나. 이집트의 황제도, 고구려의 왕들까지도…

  약 제조회사인 보문당에서 한약제 파스와 무좀약을 구경하다. 이과대 (한의과 전공)출신의 잘 생긴 청년이 약을 팔기 위해 불에 달군 쇠사슬 줄에 손바닥을 대고 약을 바르는 실험을 하는 모습에 너무 놀랐다. 제약회사 취직을 위해 1년 반 동안 저런 실험을 해야하다니…중국의 한의학과 한의사제도는 우리처럼 잘 정비되지 않아서 한의사는 존경의 대상도 아니며 일반 병원처럼 신뢰하여 찾지도 않으며 돈을 크게 벌 수도 없는 상황이라니 이제 동양의학은 우리가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이 아닌가? 문화의 다름은 저렇다.


 

◎만리장성


  드디어 만리장성이다. 중국이 가장 자랑하는 문화유산 만리장성.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낸 인류 최대의 역작이다. 대운하와 함께 중국이 자랑하며 한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 이곳이다. 아! 북경의 더위! 만리장성을 오르는데 땀이 온몸을 적셨다. 섭씨 38。C란다. 아니 내 사전에 38。C는 일찍이 없었다. 어린 시절 35도면 너무 더웠고, 36도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언젠가 대구가 37도요, 우리 익산이 36.5도라는 더위가 왔던 기억은 있다. 대단하다. 그 더위 속에서 모두들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즐거운 표정들이다.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30%정도이고 70%는 온통 한국인인데 언제부터 만리장성은 한국인들이 점령하였던가요? 관구검은 환도성을 뒷산을 넘어 점령했다는데 우리 한국인은 돈으로 만리장성을 점령한 것이로구나.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른 뒤 5분 정도 걸어 오르는데 양선생은 포기하였다. 그러나 우리 양선생 대단할시고… 산 오르는 일 빼놓고는 힘들단 말 한마디 없이 즐겁기만 한 모양이다. 여행은 만병 통치약?


◎용경협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용경협이다. 중국 최대의 산수는 계림이 으뜸이요. 장가계와 용경협이 다음이라 하며, 이 용경협을 작은 계림이라 한단다. 용경협은 원래의 자연그대로는 아니고 댐을 막아 이루어진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경치이다. 산모양은 계림만은 못하나 호수와 어우러진 아름다움은 대단하다. 그리고 호수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등의 시설이 놀랍고 엄청 시원한데 밖과는 15도 차이라니 지금 23도 정도라는 얘기였다. 더운게 아니라 그냥 시원할 따름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나 시원함보다 100배나 놀라운 일은 관광객의 100%가 우리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용경협을 전세라도 냈단 말인가? 서양인, 중국인은 찾기가 힘들다. 과연 한국인들은 자연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치여 아예 오지 않는 듯 싶다. 한국인들을 실은 배들이 연이어 우리 배를 스치며 지나가는데 월드컵 때의 ‘대∼한∼민∼국’응원이 계속 터진다. 그래 이렇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낸 우리 한국인이 자랑스럽고 용기와 자신감을 주며 리더쉽을 발휘한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 전문인들, 땀흘려 제품을 생산한 가난했던 근로자들과, 수출전쟁을 이겨낸 저 무역전선의 이름 없는 역군들의 공로가 아니던가? 이제 중국이 무섭게 따라붙는 상황에서 가일층 분발해야하거늘 저 정치인들 하는 꼬락서니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음에 며칠째 정치 뉴스 모르 고 지냄은 어쩌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저녁밥을 먹고 발 맛사지를 하였는데 40위안(6천원)에 무려 40분이나 아가씨가 힘차게 등, 손, 발을 맛사지 해준다. 시원하다. 계림의 발 맛사지는 만원이었음에도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음에 비해 싸고도 좋다. 20살 안팎의 젊은 아이들이 돈을 벌자고 저런 일을 하나 싶기도 하지만 어쩌랴 이젠 자본주의 경제이고 돈은 벌어야만 하는 것을…오늘 하루 24명 정도 하였다니 대단하다. 1인당 천 원의 수입이면 2만 4천원이요, 그러면 대략 일주일 수입을 하루에 버는 일이니 인기 직업이겠다. 일년 내내 저 일에 종사한다니 젊은이들이 안쓰럽다. 가이드 장흥국씨는 통화부근의 시골 출신인데 동갑또래(28세)가 동네(70여호)에 모두 27명이고 혼자만 도시에 나왔다고 하며, 거의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한다. 더구나 모두들 초등학교만 나오고 도시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대화도 잘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다. 반 처녀들은 모두들 도시로 나가버렸다 한다.

  북경의 물은 너무 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물이 세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도대체 비누를 칠하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움직이지 않고 뻗뻗하며 도대체가 씻는 것 같지가 않다. 10시 20분에 호텔에 들다.




◆다섯째 날(8월 3일)-뻬이징◆


 

◎자금성


   자금성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넓다는 느낌보다는 장엄하다는 느낌이다. 천안문 광장의 전면에는 정양문이 있는데 외국 사신들이 입궐하는 첫 문이라 한다. 우리가 자는 전문 건국호텔의 명칭도 정양문 앞에 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전루가 이어지고 대로를 건너 천안문 광장인데 천안문 좌우에는 국회와 기타 관청이 있고 노동자 기념탑도 광장에 서 있다. 천안문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문과 궁을 지나게 되는데 그 문들의 위용이 대단하다. 모두 24만평이요, 9999칸이라 한다. 단문, 오문, 대한문, 태화전, 대화문,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그리고 후원인 어화원이 마지막에 놓여 있다. 규모가 참으로 대단하여 서양인들의 눈에도 엄청난 중국의 힘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중국의 민족은 모두 56개인데 그중 한족이 93%이고, 1억이 55개 소수민족이다. 우리 조선족은 220만으로 14번째이며 연변에 150만 그리고 이곳 북경에는 10만이 살고 있다.

  티베트 문화원에 들렀는데 우리 조선족 한의사들이 티벳산 약제로 지은 약을 판다. 진료를 받고 간과 콜레스트롤을 예방하는 약 2달분치를 무려 3000위안(46만원)에 사다. 건강이라면 돈 아까운 줄을 모르지. 좌우간 잘 먹자! 그리고 건강하자! 술은 적당히 하자! 담배는 무조건 피우지 말자!


◎이화원


  이화원은 보통 시태후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황실의 여름 궁궐로 보인다. 호수를 만들어 그 옆에 궁궐을 지었다. 고종 건륭제가 그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며 96만평 이다.(호수가 72만평) 시태후가 집무하던 인수전이 있고 아들 광서제를 유폐시킨 옥보당이 있는데 문을 걸어 잠그고 밥만 넣어 주었다 한다. 벽돌로 쌓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시태후는 함풍제(1850-61)후궁으로 아들이 동치제(1861-75)가 되니 섭정이 되고 동치제가 죽자 조카인 광서제(1875-1908 실제로는 젊은 남자와의 사이에 나은 아들이라 함)를 왕위에 앉혀 통치한 여자다. 광서제의 개혁을 막기 위해 무술정변을 일으켜 중국의 근대화를 가로 막았다. 우리의 민비와 비견해 볼만한 데가 있다. 참으로 표독스럽고 권력의 화신으로 보이는 저주스런 여인이다.

  728M의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長廊을 지나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렀다. 밤에 2급 써커스를 관람하였는데 공연시간이 겨우 40분으로 시시하다. 처음으로 일찍 8시30분에 호텔에 들다.




◆여섯째날(8월 4일)-뻬이징◆


◎옹화궁


  옹화궁은 세종 옹정제가 태어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이제 궁이 아닌 라마사원이 되어 있다. 옹정제 사후 아들 건륭제가 라마사원으로 만들었다 한다. 첫째는 어머니의 불심을 위하고, 둘째는 아버지의 살생의 죄를 씻고, 셋째는 티벳과의 융화를 꾀하기 위함이라 한다. 건물들은 궁궐에 비해 안정감이 있고 화려하며, 세 금동불상의 예술미가 아주 뛰어나고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목조 입상이 있다. 일본의 도다이사에는 세계최대의 와불이 있고, 한때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의 불상은 동양 최대의 금동불상이라 하였고, 또한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최대의 석탑이라 하였으니 최대도 많다.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3시 10분발 비행기로 크고 믿음직하다. 인천에 6시에 도착하고 입국수속에 1시간이나 걸려 7시 30분 공항버스에 탔다. 익산 인터체인지에 밤 11시 12분에 도착하여 전화로 불러놓은 콜택시를 타고 11시 40분에 집에 도착하였다.




◆마치는 말◆


  전체 경비가 무려 300만원이 넘게 들고 이틀간이나 열차 내 숙박에다 뻬이징에서는 섭씨 38 °C의 무더위 속에 치러낸 답사이지만 그 흐뭇함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역사 교사로써 국내성의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뻬이징의 만리장성과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연변을 다녀온 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여 저 위로는 두만강 변의 길림에서 백두산, 그리고 집안의 압록강을 직접 가보고 중원의 뻬이징과 중국동부의 산동성과 황하강을, 그리고 양쯔강 일대의 상하이 와 항주와 소주등을, 그리고 남쪽의 계림과 홍콩을 4차에 걸쳐 여행함으로써 중국을 어느정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고대에 주나라이후 한나라와 당의 오랜 서울이었던 시안을 먼저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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