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중국여행기(상하이-계림 2001)

청담(靑潭) 2009. 9. 1. 15:32

 

2001

중국 여행기

프롤로그

 듕국(中國)에 간다. 저 머나먼 이국 땅 중국에 간다. 박지원이가, 박제가가 사신일행을 따라가 그 앞선 문화 문물에 감탄하고 하루빨리 배우자고 주장했던 그 옛날의 선진 문명국. 고조선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다투며 도우며 섬기며 역사적 운명을  함께 하여 온 나라 중국! 실로 감격적인 설레임을 가지며 중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역시 우리 양 선생과 함께 하는 것이니 이는 결혼 20주년의 의미도 담겨 있고, 경제만 생각하다 해외여행을 자꾸만 미루다가는 결국 해외여행하기 힘들건데 에라 김호길 선생처럼 모두 덮어두고 떠나고 보자는 생각, 지난해 실패한 경제운용에서 돈이란 아끼기 위해 버는 게 아니라 잘 쓰기 위해 번다는 귀중한 경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여름철 요양성 길림성지역의 역사문화 탐방을 기다리지 않고 우선 당장 이 겨울부터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구이린 행을 감행한 것이다.

 9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국민소득이 일만 달러에 육박하고, 원화의 가치가 커짐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 해외 여행 붐이 일어나 이젠 해외여행에 한번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으나, 그러나 아직도 해외여행은 우리 서민에겐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집은 내가 1990년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일본 속의 한국역사 탐방단으로 일주일간 일본을 다녀온 바 있고, 1996년 여름 김호길 선생 내외와 함께 결혼 15주년 기념으로 동남아 여행(태국, 싱가폴, 홍콩, 인도네시아)에 다녀왔고, 그 다음해엔 양선생이 한달 동안 미국 미시간 대 영어연수에, 작년엔 우리 싼이 2월에 학교에서 4박 5일 동안 일본여행을 다녀온 것이 전부이다. 무릇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이긴 하나(국가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과 교사로서 중국의 역사와 지리와 사회모습을 공부하는 보람있는 여행을 다녀온 지금의 마음은 더 없이 흐뭇한 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첫째날(1월 15일)

 이번 여행은 우리 둘이만 떠나기로 이미 작정되어 있었다. 친한 사람들이나 이 지역 사람들과 어울리면 괜히 소란스럽고 번잡하며 제대로 공부가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사도 서울의 롯데여행사로 정하고 전주 지점에 신청하였다.

 김포공항 리무진 새벽 4시 30분 차로 가게 되었는데 초저녁에 폭설 주의보가 내리고 실제 함박눈이 쏟아지니 출발도 하기 전에 꺽정스럽고 마음이 심난하다. 눈길이 무서우니 기차로 갈까? 그럼 서울역에서 새벽에 내려 공항버스를 타야겠지? 인터체인지 간이 주차장에 전화를 하니 그곳 봉동은 눈이 웬말이냐고 반문한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2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6시 30분인데 벌써 공항이다. 휴게소에서 쉬는 일도 없이 무섭게 달렸으리라. 제1청사 2층 주택은행에서 처음엔 800불쯤 환불하려 했으나 물건은 사지 않기로 한 터이고 또 우리 돈도 거침없이 쓰인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있어 300불만 환불하였다. 8시에 롯데 가이드 김성희 양을 만나고 일행이 모였다. 모두 20명으로 남자가 여섯이다.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조직되어서인지 에티켓에 지나침이 없고 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아주 지나칠 정도로 남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여행기간 동안 조용하고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바로 내가 가장 걱정하던 부분이었으니까….

아시아나 여객기에 9:50분에 탑승하고 10:20분 드디어 출발이다. 그런데 좌석도 H석의 행운이다. 바로 오른쪽 창가다. 날도 화창해서 남쪽을 향해 날아가면서 강화도와 영종도 국제공항이며,  특히 군장지구 일대와 계화도를 비롯한 변산반도 일대, 새 만금 지역을 그리고 고창군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맛보는 감격이 여간 아니다. 예전에는 좌석 때문에 놓쳤던 이유려니와 정말 두개 정도의 군을 모두 한눈에 바라보니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비행기는 익산시와 김제시 및 부안 백산면의 상공을 거쳐가는 고로 도시들은 볼 수 없었으나. 군산, 장항, 부안읍은 똑똑히 눈 여겨 바라볼 수 있었다. 목포까지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때부터는 온통 구름이다. 예전에 보았던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크다. 1시간 20분만에 중국대륙이 나타난다. 행운이다. 구름 때문에  황해 바다도 제대로 보질 못했는데 또다시 중국 대륙은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엄청난 대도시 상하이의 북쪽 상공을 날아 양자강을 따라 비행기는 날고 있다. 지도를 펴들고 도시들을 확인한다. 난동시, 타이저우시, 우시시, 선진시를 거쳐 기수는 남쪽으로 돌려지는데 엄청난 양쯔강의 위용과 함께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대단한 호수들…그래서 이름도 湖北省이요, 湖南省이런가? 우리도 이를 본 따 황등제. 벽골제, 눌제의 아랫녘을 호남지방이라 불렀겠지. 아! 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의 장관이란! 비행기로 나르고 있는데도 가도가도 끝없는 저 넓은 들판. 1시간을 날아가도 그저 배산 만 한 작은 구릉밖엔 산이란 보이질 않는다. 과연 중국 대륙이다. 저만이나 하니 삼황 오제시대에 천국을 이루고 주나라 이후 수천만 수억에 이르는 인구를 먹여 살렸구나.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시차를 맞추니 4시간 걸려 1시 20분이다. 드디어 목적지인 구이린(계림)이다.


광시성(廣西省)구이린(桂林)


 이곳의 가이드는 흑룡강성 출신의 30대 전직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30대의 장경순씨. 장경순 전직 국회 부의장에 대해 얘기해 주고 50대 이상의 어른들을 상대로 한 멘트에 써먹으라 일러주다. 백마강이란 식당에서 물김치 등 한식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53도짜리 계림주 3잔을 마시다. 이곳 계림은 광시 장족 자치구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써 인구는 68만이요, 일찍부터 아름다운 산수로 널리 알려져 중국 남방산수화에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이다. 떠날 때 듣기로는 날씨가 흐리다더니 그런 대로 좋다. 기온도 6-8도로 그런 대로 괜찮다. 광서 자치구는 23.6만 KM²이니 우리 한반도보다도 넓고, 인구는 4600만 명이 넘으니 우리 대한민국과 똑같다.

 주민의 60%는 한족이나 좡족(장족), 묘족, 요족등의 11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중 좡족은 30%를 차지하여 좡족 자치구로 정해졌다. 좡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 인구가 제일 많은 1500만 이상이다(우리 한민족은 약 200만). 이곳이야말로 중국의 황하강, 양쯔강과 함께 중국의 농업지대의 젖줄인 주쟝강 일대로써 이강과 장강은 아름다운 산수의 대명사다. 주도는 난닝이다. 구이린시는 桂林인데 예로부터 계수나무가 많아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란 뜻이다. 가로수도 대부분 계수나무로 상징적이다. 인구는 68만인데 대단히 큰 도시이다. 세상에 이 깊은 내륙산중 도시의 인구가 전주시보다도 많다니 정말 사람이 많긴 많은 곳이구나 싶다. 예로부터 빼어난 풍치로 시인과 화가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어 왔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고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관광객은 대부분이 한국인이요, 그 나머지는 일본인인 듯 싶다. 아열대 지역이므로 거의 연중 농사를 짓고, 4계절은 있으나 눈은 없고, 산의 녹색도 그런 대로 유지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뿐 만 아니라 상하이 지역도 4-5월이나 10-11월이 관광 적기인데 여름은 무더워 차라리 겨울철이 6-9월보다는 훨씬 낫다고 한다.


◎상비산(象鼻山)

 계림의 주강인 이강(裏江)과 도화강(桃花江) 이 만나는 곳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이다. 강으로 기어드는 돌산에 굴이 뚫려 있어 옆에서 보면 마치 코끼리가 코를 담그고 물을 들이키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굴의 벽면에는 여러 글씨들이 음각되어 있고 선명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먹칠을 해놓은 것이 중국적인 특색이다. 이 산의 정상에는 명대에 세워진 높이 13,5M의 전탑인 보현보살탑이 있으나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처음 보는 중국의 전탑(塼塔)인데 상당히 크고 웅장한 모습이다. 미륵사탑의 크기쯤 되는가? 산의 아름다운도 아름답거니와 강과 어우러짐이 일품이다. 장족의 아가씨 4명이 해식아치 밑에서 모델노릇을 하는데 모델료는 1인당 우리 돈 천원이라 한다. 한국말로 ꡒ천원~ 천원~ꡓ하는데 듣기 좋지 않다. 예쁘기나 하면 아니면 양 선생이나 없다면 찍으려나? 이곳은 象山公園이라 하여 한창 정비중이었다.


◎복파산(伏波山)

 이강의 서쪽 연안에 있다. 입구에는 지하동굴인 환주동(還珠洞)이라는 해식 동굴이 있다. 2억만년전에는 이곳이 바다여서 해식동굴이 많다고 한다. 환주동이라는 이름은 옛날 한 어부가 동굴을 밝히는 진주를 훔쳤다가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진주를 다시 갖다 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입구에는 1669년에 주조한 큰 철불이 있고, 바위벽에는 많은 글씨가 새겨 있다. 소수민족 아가씨들이 가마우찌를 어깨에 놓고 함께 사진을 찍게 해주는데 2000원이라 한다.  비가 촉촉히 오고 있는데 상당히 가파라서 조심스럽고 , 정상이 좁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나 아찔하여 무섭기 짝이 없다. 내가 무서운건지 양선생이 걱정되어서인지는 나도 모르나 서둘러 데리고 내려 왔다. 어린 꼬마들이 십 수명이나 달려들며 꽃을 사라고 조르는데 불쌍한 마음은 전혀 없고 귀찮기 짝이 없다. 깡패 청년들이 옆에서 서성이는데 가이드 말로는 깡패들이 거느리는 아이들이라 한다. 시든 장미꽃 한 송이 혹은 종이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데 외국인만 만나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천 원이면 거의 일 달러인데 중국인 근로자들의 한달 벌이가 100달러이니 무서운 돈벌이다.

 1달러는 1200원이요 중국 돈 1위안은 150원이다. 따라서 1달러는 8위안으로 가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소수민족 쑈 관람

 5시 30분에 계산(桂山)호텔에 들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8시부터 소수민족 쇼를 관람하다. 테이블엔 1인당 맥주 1잔씩이 주어지는 데 여선생님들이 밀어주어 혼자 4잔을 마시다.

 소수민족의 예술인들로 구성된 쇼단인데 여러 소수민족들의 춤과 민속놀이를 소개하고 마지막엔 우리 한국의 농악과 아리랑도 불러 주었다. 연예인들이라서 인지 관광지에서의 사진모델 아가씨들과는 달리 대단한 미인들이 있어 볼 만 하다.  가장 기억에 남을 공연은 장족의 혼인 풍속으로 남녀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공을 던져 남자가 받고 남자가 그 여자가 마음에 들면 끈만 떼어내고 도로 처녀에게 던져 사랑을 확인한다. 공연이 끝난 뒤 공연자들이 호텔 로비에 나와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이나 팁을 받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조금 어설프고 안쓰럽다.


◎발 맛사지

 밤에는 먼저 중국에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말로만 듣고, 꼭 받아보라던 발 맛사지를 거금 20달러씩이나 주며 받아 보았는데 돈이 조금 아깝다. 양 선생과 나란히 누워 소수민족의 남녀에게 성을 바꾸어(나는 여성 맛사지 걸이, 양선생은 청년 맛사지사가) 1시간 20분쯤 받았는데 졸음이 와서 (나중에 양 선생이 전한 바에 의하면)약간의 코를 골며 잠이 들기도 하였으나 그저 그랬다. 좀 예쁜 여자였다면 기분이 좀 더 좋았을 것을 터이지만 그렇지 못해서인지 그저 한번 경험했다는 것 밖에…

승원이에게 전화하고 첫날의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날(1월 16일)

 7시에 일어나 커튼을 열고 바라다보니 시골 호텔답게 뒷뜰은 자연동산이요, 멀리는 계림 특유의 모습을 한 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호텔1층에서  뷔페식으로 식사하다. 한국인 여행객이 많기 때문에 뷔페도 한국인의 입에 맞도록 꾸며져 있다. 한식과 채소류로 간단히 하다.


◎천산(穿山)

 오전에 먼저 큰 구멍 뚫린 산인 천산( 穿山 )을 찾았다. 마치 한국식 정원처럼 자연스럽게 가꾸어진 공원으로 왼편으로는 큰 구멍(해식동굴)이 나있는 천산이요, 오른쪽으로는 7-80m 높이의 뾰족산이 있고 그 위엔 7층 전탑이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양선생이 아주 좋아하다. 도화강물이 시내를 관통하여 내려오고 있는데도 저렇게 맑다니 놀랍다.


◎보석가게

공원에서 나와 보석가게에 들렀는데 익산의 보석전시장에 비하면 구멍가게로써 교포들이 전적으로 우리 한국인 여행객들을 목적으로 만든 가게였다. 양 선생이 3만원 짜리 옥팔찌를 사다.


◎첩채산(疊彩山)

 일명 桂山이라고 한다. 산의 암층은 횡으로 겹겹이 겹쳐져 있고, 게다가 수목이 각층마다 무성하여 마치 여러 색의 비단을 접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입구는 큰 동굴인데 상당히 큰 달마대사좌상이 있고,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뒤로 돌아 산을 오르는데 산의 수목이 과연 아름답고 한참을 오르게 되어 있어 등산을 하는 듯 운동이 된다.

 정상인 월명암에 오르니 온 시가지가 다 보이며 멀리 계림의 아름다운 산수가 겹겹이 계림 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계림 시는 인구는 60만이 넘으나 도시모습은 지금부터 30여 년 전의 인구 30만일 때의 전주라고 하면 될까? 아직도 시내에는 백년은 됨직한 지은 지 오래된 가게에 우리 나라 50년대 식의 물건을 진열한 모습들이 수없이 보이고 시장의 가게들은 내가 중학교시절의 구시장 모습 같다.


◎한약 판매장

 계림 시립 중의원에 들렀는데 가관이다. 교포 장사꾼들이 시립병원 뒤에 마치 병원의 부속건물이것처럼 가게를 열고 흰 가운들을 입고 약장사 선전을 요란스레 한 다음( 무슨 기 차력사 흉내도 내고) 마치 본인들이 이 병원의 의사인양 행세하며 약을 파는데 어이없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건 장사나 사업이 아니고 완전히 사기꾼들인데 함께 같이 노는 장경순 가이드도 달리 보인다. 한국식 점심을 먹다. 맥주도 3잔이나 하다.


◎관암굴(冠巖窟)

 계림시에서 한시간 달려간다. 우리 버스 기사는 20대의 괜찮은 미남이다. 이틀동안 수고하고 있는데 성격이 좋은 청년이다. 중국은 23개省과 5개의 自治區 및 4개의 直轄市가 제일 위에 있고, 그 아래 市-懸-鎭-村이 있는데 이외에도 현급시니 뭐니 해서 행정구역이 복잡한데 대략 시와 현이 우리나라의 시, 군이요, 진은 면이라 할까? 그렇게 이해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는 이젠 진이 없어졌는데 중국에는 남아 있는 점이요, 또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진은 군사행정구역구역인 점도 다르다. 우리는 지금 초평촌이 있는 관암굴을 찾아가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계림의 아름다운 산을 한눈에 보여주는 곳인 듯 했다. 10달러씩을 주고 둘이 함께 타고 운전하는 전기열차를 타는데 너무 재미있다. 약 2km 남짓 타고 가면 관음굴 입구이다. 우리 고수동굴이나 성류굴과 대동소이한데 그 규모가 큰점 만 다르다 할까? 다른 사람들은 마지막날 여행소감에서 이 굴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하던데 나는 전혀 아니다. 그저 좀 큰 굴이구나 하는 생각밖엔 별 느낌은 없다. 오가면서 계림시 외곽 농촌의 살림살이를 유심히 살펴보니 겉으로 보기에 집 모습들은 그럴싸한데 집의 구조는 지극히 원시적이다. 정방형의 조잡한 붉은 벽돌집인데 문은 한군데요, 언 듯 보이는 내부는 정돈 안된 구질구질한 모습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농민들의 행색도 계림시민들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하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인 듯 한 아이들이 함께 소를 몰며 가는 모습이란 더없이 평화롭다.


◎ 이강(裏江) 遊覽

 초평촌에서 10여분 계림시 쪽으로 다시 나오면  이강을 만나게 되고 그곳 어느 마을에서 유람을 한다. 지금은 겨울철이라서 유수량이 적어 큰배가 다닐 수 없다했지만 이미 큰배가 예약되어 있었다. 겨우 10분을 내려가고 30분을 힘들게 거슬러 오는 별 재미없고 무의미한 유람이다. 강물도 적고 이미 산은 다 둘러본 상태이니 유람의 진미를 맛볼 수 없는 때문이다. 원래는 80여km를 6시간  유람하는 데 겨우 10분 동안 2-3km이니 그저 맛만 본 셈이다. 유람선 측에서 웬 안주 두 사라와 술 3병을 가져 왔는데, 술 생각이 슬며시 나면서도, 너무 지나친 접대인 듯 하여 가이드를 불러 알아보니 안주 한 사라에 우리돈 25000원이요,  술값은 별도로 내라한다. 세상에 참게 튀김 한 접시에 이만 오천원이라니…중국인 한 달 월급의 6분의 1이라니 참으로 장사하는 수법이 어리석다. 미리 얼마면 드실건지 물어본다면 한 사라 1만원씩, 술 한병에 5천원 정도면 먹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별 큰 재미는 없었지만 하안 단애가 연속된 모습을 실제로 생생하게 볼 수 있어 산 공부가 되었던 것이 수확이다.

 현지식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별 재미없었으나 계림주 5-6잔을 맛있게 마시다. 식사는 여선생님팀 5분, 따님들 팀3분 우리 둘해서 10명이 한 팀이 되어 하게 되었다. 아가씨가 이쪽 저쪽 테이블에 잔이 비는 대로 따라 주었는데 어제는 노인들이 거의 안 드시어 술이 남더니만, 오늘 저녁은 노인들이 계속 드시어 한 병이 모두 없어졌다.

 

◎가마우찌 쇼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가마우찌로 물고기를 잡는다. 일찍이 고려시대에 매로 꿩 사냥을 하였거니와 산에서는 매로 꿩 사냥이요, 강에선 가마우찌로 붕어 사냥이로구나! 우리가 탄 배의 양편에서 두 사람의 어부가 각각 홈을 판 작은 목선에 5마리씩의 가마우찌로 고기잡이 쑈를 하는 것이다. 가마우찌의 목을 줄로 묶어, 잡은 고기가 큰 것은 목을 넘기지 못하게 하고, 못 넘기게 되면 가마우찌가 배 위로 올라와 주인에게 빼달라고 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돌아와 9시 30분부터 쉬었다.



셋째날(1월 17일)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린다. 우산은 필요 없는 정도이다.


◎계림 민속 박물관

 8시 40분에 출발하여 박물관에 도착하다. 아주 작은 규모이며 소수민족들의 생활모습과 복장등이 조금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곳 광서좡족 자치구에는 장족(獐足), 묘족(苗族), 요족(猺族), 동족(侗族), 묘로족(苗老族), 모남족, 경족, 回族, 모로족, 수족 등 16개 소수민족이 산다. 참고로 중국엔 한족 외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는 데 그중 우리 한민족은 208만으로 11번째에 속하며 문맹률은35%로 가장 낮다. 우리가 삼국지에서 볼 수 있는 유주(柳州)가 이곳  류저우임을 오늘에야 알았다. 이곳에서 열차로 4시간 거리라 한다. 장족의 혼인 풍속은 여자가 공을 뒤로 던져 받은 남자와 짝이 된다. 이 같은 일은 평생 4번 기회가 주어진다. 남자는 처녀의 집에서 3년 동안 일을 하는 데 처녀의 부모에게 절대 복종하며 조금이라도 눈밖에 벗어나면 쫒겨 난다. 모로족의 풍속은 모계씨족으로서 모든 것이 여성중심이며 남자는 말참견을 못한다. 잘못하면 여자에게 역시 쫒겨 난다. 한편 묘족의 여성은 장식을 많이 하는 데 귀족의 경우 모두 30근이 되기도 한다. 솟대기둥(우리의 솟대처럼 새가 위에 앉아 있는 )주위를 남녀가 돌며 짝을 구하는 데 원하는 상대의 발을 밟아 결정한다. 장족의 혼인 풍속은 우리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비길 만 하다. 한쪽 켠에 민속과는 관계없는 귀금속 가게가 있고 우리 교포 여성들이 있으니 이해하기 힘든다. 어찌 이곳 민속박물관에 우리 교포들의 상점이 들어서 있을까? 중국인 여성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운영은 박물관측에서 하나, 한국인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교포여성들을 채용한 듯 하다.


상하이(上海)

 11시 10분 중국 서남항공 비행기가 상하이로 출발하다. 좌석 번호도 없고, 아무데나  앉는게 임자다. 다행히 자리가 비어 또 창가에 앉았지만 비가 오고, 구름위로 비행기는 나르는데 온통 상하이에 다 갈 때까지 구름일색이다. 운해 위를 나르는 모습은 마치 넓디넓은 평야에 엄청난 눈이 쌓여 있는 듯 하다. 저 운설 아래 지상에는 지금 비가 오는지 콩으로 메주를 쑤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기내식(우리 기내식만 못한 양식)으로 점심을 먹고 쥬스 한잔을 하고 나니 12시 30분이다. 갑자기 나타난 어마어마한 도시, 도시인 듯 하다가 또 농촌인듯한 모습이 종잡을 수 없는데 곧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기내 아나운스 멘트다. 아하! 상하이가 크긴 크구나, 아직 시내 중심에 오진 않았지만 상하이의 근교임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저 놀라운 들녘 넓은 들을 보라. 장관이다. 비행기를 20분을 날아도 저 아래는 산하나 안 보이는 논이요, 동네요, 주택이다. 저 끝없는 마을의 연속. 일직선으로 뻗은 가촌의 모습, 그리고 또 이어지는 마을, 작은 도시, 공장들…과연 상하이다. 세계 제1의 대도시 상하이답다. 시골마을은 우리네 오랜 농촌마을처럼 마음대로 형성된 게 아닌 성냥곽 붙여 놓은 모양으로 규격화된 집단마을의 모습이 대부분인데 어느 마을은 마을 공동광장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형성되어 위에서 보기에도 아주 멋있다. 대단히 아름답다. 우리나라의 시 군마다 하나씩 만들어 놓은 문화마을을 연상시킨다. 아! 결코 중국의 농촌이 모두 가난한 것 만은 아니로구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 농촌이긴 하지만 결코 어줍잖은 국민소득 조금 많은 것으로 중국을 우습게 볼 수는 없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너무 우쭐한 착각 속에 살고 있구나.  저 끝없는 듯한 들판, 논, 그리고 저 많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저력이 숨어 있는 것을 아지 못하는 것일 뿐이구나. 불과 2백년 전 만 하여도 우리는 저 중국을 무섭게 부러워하고 영영 따라잡지 못할 대국이요, 선진문화로 부러워하였던 것이 아니더냐?

 이곳 상하이는 직할시이다. 중국은 23개의 성, 4개의 직할시(뻬이징, 텐진, 충칭, 상하이), 5개의 자치구로 되어있으며 이 상하이는 면적이 서울의 9배요, 인구는 1400만이다.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1700만이니 우리의 경기도라 생각하면 틀림없다. 토쿄나 뉴욕도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상하이는 중국의 최대 도시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중의 하나이며 지금 중국의 최고 실권자인 강택림(장쩌민)주석과 주용기 총리가 이곳 출신이다. 도착하여 이곳 가이드를 소개받았는데 우리 교포로 아주 잘생긴 윤 영호라는 미남 청년으로 세련된 서울 표준어를 사용하고 지식이 정확하며, 중국과 한국의 정세와 미래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가진 괜찮은 30세의 청년이다. 아마 대학을 나온 청년으로 높은 수입을 찾아 가이드 생활을 하는 모양인데 북한에도 가이드로 100여 차례 다녀왔다며 비교적 북한의 실상을 가감 없이 소상히 여러 차례 말해주었는데 그 편견 없는 판단력과 정세 예측의 식견이 상당하였다. 기사에게 인사하였다. 린따거 니하우?(임기사 안녕하세요?) 오늘 상하이 기온은 11°C로 그지없이 따뜻하다. 해는 화창하고 계림보다도 온화한데 기실 어제는 영하 2°C로 상하이에선 놀라운 추위였다고 하며 우리가 날짜는 제대로 잡고 다닌다는 데에 두 가이드와 우리 모두가 동의하였다. 예원으로 이동하며 중국 최대의 축구장인 「8만명 체육관」을 보았다. 말 그대로 8만명을 수용하는 축구장으로 월드컵 한중전이 벌어졌던 곳이라 한다. 우리 서울의 올림픽 주 경기장 만하겠지. 바로 이 상해에 어제 저녁에 김정일이 왔다는 뉴스이다. 이 현우 할아버지가 어제 뉴스를 듣고 윤 선생에게 물었더니만 윤 선생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왜 상하이에 왔는지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 상하이는 92년경부터 본격적인 개방을 시작하면서 발전했는데 그 이전에 다녀간 사람들은 지금의 상하이를 몰라볼 정도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진 모습이라 한다.


◎예원(豫園)

 예원은 유열노친(愉悅老親-부모를 기쁘게 한다)에서 유래했는데 愉자와 豫자의 뜻이 같은 데서 연유한다. 400여년 전(?)  사천성주인 반 유단이 이곳에 사는 부모를 위해 지은 집이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예원으로 5분여를 걷는동안 시장을 거치고 연못을 거치면서 대도시 상하이의 시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시장 상가건물들은 지은지 몇 년 안 된다는데 마치 수 백년씩 된 듯하다. 3층 목조건물의 높이가 슬라브 상가 5-6층 높이는 됨직 하며, 엄청난 사람들이 밀려 다니는데 걷기가 힘들다. 꼭 중국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다. 예원을 통해 개인정원을 처음 보았거니와 그 호화로움과 아기자기함은 나를 놀랍게 하나 그 모습의 너무 지나친 인위적 작위가 큰 흠일 뿐만 아니라, 지방장관 한 개인이 어떻게 부정하게 치부하였길래 그런 돈을 모으는 것이며 어찌하여 그 부정한 돈으로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저런 어머 어마한  별장을 꾸밀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르신네들도 혀를 차시고 나는 한국식 정원이 대표격인 담양의 소쇄원을 소개했더니만 천 교수님은 다녀오셨다면서 전공이 국문학이며 민속을 연구하시고 계셔서 전국을 안 가보신곳 없이 수 차례씩 탐방하셨다 한다.


◎임시정부 청사

 버스는 임정청사로 향한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곳. 임정으로 가는 거리모습부터 놓치고 싶지 않다. 많은 책에서 상하이에서의 김구주석을 비롯한 임정의 우국지사들이 임정이 서로 분열하고 화합하지 못하며 일본이 만주사변 후 만주국을 세우고 본토침략을 가속화 할 때 끼니도 제대로 못 때워 동포집을 전전하며 걸식하듯 밥을 얻어 잡수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동동대고 청사 앞에 차가 멈추자 자못 감개가 무량하다. 정문으로 들어가 김구선생님 동상에 묵념을 드리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후문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저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 그리고 그분네들이 고생하신 이곳. 그저 나라를 구하고자하는 애국충정외에는 개인적 욕심이나 아무런 사심이란 없으셨던 저분! 그런데 오늘날 노벨상 받으신 어느 분은 온갖 권력과 온갖 명예와 온갖 지위란 욕심만큼 다 이루고도 마치 당신이 김구선생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것이 마땅한 양 자칭 타칭 선생님하는 모양새란 보기 편치 않다. 아하! 역사가 다 제대로 평가해 주려느니…

 마당로 보경리에 있는 이곳 청사는 임정에서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직후까지 사용하였으며 청사가 있던 여섯 지역 중 가장 대표적인 청사이다. 이곳 말고도 충칭에 임정청사가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이층과 삼층에 사무실 부엌 등 당시 살림살이의 모습을 재현하여 놓았는데 너무 깨끗하여 고생한 모습을 그릴 수 없거니와 안내하는 교포 아가씨의 눈길이 어찌나 매섭고 사무적인지 시정할 일이다. 몇 년 전 만 하여도 중국인이 살고 있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볼 때에는 이 집이 누추하기가 이를 데 없더니만, 지금은 삼성에서 구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한다. 어찌나 급히 안내가 이루어지는지 관리비용 찬조금 낼 기회조차 없이 바삐 따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바쁜 중에도 양 선생과 정문과 후문에서 여러 차례 사진을 찍었다. 듣고 예상했던 것보다는 이곳이 상당히 번화가요, 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고 비교적 깨끗이 주변이 정돈되어서 저으기 마음이 흐뭇하였다. 청사를 빠져 나와 외탄으로 향하면서 당시 프랑스 조계와 영국 조계를 구경하였는데 당시의 건물들이 아주 많이 남아있고 아주 지저분하게 사는 아파트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였다. 같은 상해시민의 집인데 어떤 아파트는 신식 고층 아파트요, 어떤 것은 차마 살수 없을 것 같은 더럽고 낡은 건물이니 공산주의 중국은 이미 공산주의가 아니다?


◎외탄

 외탄은 황포강가에 있는 상해시민의 휴식 공원이다. 8년 전 만하여도 해변이었는데 잘 정비하여 높이 쌓은 다음 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이 공원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 보다는 이 공원의 안쪽의 대형 석조건물들은 모두 20세기 100년의 상해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역사의 뼈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듯 한데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일본, 소련 등이 지은 것들로 실로 아름답고 육중하기 그지없고 우리의 구 중앙청이나 석조전을 연상시킨다. 서양식 복고주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그 숫자, 집중도, 다양성 면에서 세계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 한다. 수많은 건물들이 은행 등 금융업 건물들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바깥쪽으로 보이는 저 황포강과  황포강 너머 둥팡밍주(東方明珠)의 건물은 너무나 아름다워 현대식 건축미의 극치이다. 이 건물은 높이 468M의 방송탑인데 세계 제1의 방송타워이다. 이곳이 푸동(浦東)지구로써 1990년 개방이후 건설되었는데 면적이 522KM²로 여의도의 60배이며 해외 투자액이 300억 달러이고 세계 100대 기업 중 57개 기업이 진출하였고, 우리 나라도 삼성물산, 엘지전자, 극동건설, 포철, 포스코 개발, 한라건설 등이 5억 7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나중에 귀국하여 보니 이번 주일의 뉴스가 온통 김정일의 상해 방문인데 우리가 오늘부터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를 방문하는 3일 동안 김정일은 상하이를 철저히 시찰하고 있었다 한다.

 덩샤오핑(등소평)은 1979년에 선전(深川)을 경제 특구로 개방한 후 그 성과가 드러나자 5년 뒤 ꡐ상해를 개방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ꡑ고 고백하였다 한다. 중국의 경제 심장부인 상해를 빼놓고 중국대륙의 남쪽 끝인 꽝뚱(광동)의 심천 만 개방한 것은 전면 개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1990년 4월에 鄧이 상하이를 둘러보며 양쯔강을ꡐ용의 몸통ꡑ, 상하이를 ꡐ용의 머리ꡑ에 비유하고, ꡐ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푸동)가 빛을 발하고 용이 머리를 쳐들면 전 중국이 움직인다ꡑ하여 이때부터 개방되었으며 이젠 「동양의 맨해튼」이라 불리고 있다. 과연 저 아름답고 엄청난 건물들의 위용은 대단하다. 북한은 중국처럼 나진, 선봉지구만 형식적으로 개방하고 그 이상 개방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개혁 개방이 실패하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이번 주일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고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이 예상되자 서둘러 개방정책을 펴고자  김정일이 이곳을 방문한 것이며 김정일은 상해의 놀라운 변화와 성공에 큰 충격을 받고 관계자들을 나무라며, ꡐ젊은이들로 싹 바꾸어 버리겠다ꡑ고 화를 냈다는 보도를 후일 집에 와서 보았다.


◎훙코우(홍구)공원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불린다. 얼마나 사진도 많이 보고 들어왔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불러왔던 이름이며, 와보고 싶었던 곳이냐? 일찍이 1932년 4월 29일에 애국단 청년 윤봉길이 이봉창 의거에 이어 이 공원에서 열리는 천장절 기념식에서 식단에 도시락에든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죽이고 한국독립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치고, 9억 중국인을 일깨워 장 총통으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던 그 의거의 현장이다. 그 도시락 폭탄은 당시 중국군 소장이던 김홍일 장군(후일 1970년대 신민당 당수 역임)이 마련하였고, 기자로 변장하여 잠입하기 전 김구선생과 헤어질 때 선생님의 낡은 시계를 자신의 좀 나은 시계로 바꾸어 드렸다던 저 대한남아 윤봉길. 공원 시내에 있는 평형공원인데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될만하다. 연못자리가 당시 일본군의 연병장이며 이 부근에 일본군 부대가 있었기에 천장절 기념식을 이곳에서 하게 된 것이라는 가이드의 귀한 설명이다. 지금 의거 현장이라고 비석이 세워진 곳은 기실 실제 현장이 아니며 삼성에서 구입하여 윤 의사의 호를 붙여 매헌공원 이라 하며 정자도 세워져 있으나 실제 현장은 노신의 묘 앞이며 노신의 묘자리 뒤가 식장의 단이라 한다.

 노신은 20세기 전반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요, 사상가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유학을 배우다가 중국인의 정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아Q정전』 『광인일기』등이 대표작인데 그가 이 공원 부근에 살면서 날마다 산책하였기에 노신공원이라 명명되었다 한다.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두 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오후7시에 쑤저우에 도착했다. 교포가 운영하는 아리랑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왠지 다른 때와는 다르다. 무우 장아찌 등 몇 가지 밑반찬에 밥을 주어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먹기 시작하였더니 이어 반찬 두어가지가 나오길래 적당히 비벼서 먹고 있는 데 거의 다 먹을 즈음에야 먹을만한 돼지 볶음 등이 그제야 나온다. 나는 맛있게 먹고 난 뒤라 가이드에게 맛있게 잘먹었다고 인사하자마자 어르신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실 이 집은 고칠 점이 많다. 첫째, 한국음식인데 너무 짜고 돼지 볶음의 고추장은 우리 것이 아니어서 너무 매워 맛이 없다. 둘째, 한국음식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중국음식 마냥 순서대로 나와서 밥 먹은 뒤 반찬 나오는 식이다. 주인의 잘못이든, 가이드의 선택잘못이든 문제가 있긴 있어서 가이드에게 잘 설명하긴 했는데 가이드의 변명을 들으면서 교포들이 한국인들을 상대로 돈벌이하는 구조에서 나타난 아주 잘못된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계림에서의 한약장사패처럼…

 오늘밤 쑤저우에서 자게 되는 天平大酒店은 조금 교외 쪽에 있으나 홀이 크고 깔끔하다. 가이드 김양과 함께 셋이서 빠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캔맥주 밖에 없다. 캔 하나에 20위안이며 안주는 땅콩으로 공짜다. 열 개 마셔도 우리돈으로 3만원이지만, 우리 나라로 치면 캔 한 개에 3만원쯤 하는 셈이니 중국인 시민들이 호텔에서 캔 맥주를 마실 수는 없겠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런 자존심을 지켜 나갈 수 있을른지 요즈음의 우리 경제는 너무 걱정이다. 나는 그런 와중에 충격적인 경제 손실을 입고 큰 고통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며 이번 여행을 왔다. 물론 물질적인 회복은 포기했고…

  강소성은 약 10만KM²의 면적에 인구는 7천만이니 대한민국의 면적에 남북한 총인구만큼 살고 있는 엄청난 인구과밀 지역이다. 그만큼 옛부터 먹고살기에 유리한 곳이 아니었겠는가? 성도는 난징(南京)이며 이 난징은 일찍이 삼국시대 오나라의 도읍지이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의 서울이기도 하다. 대부분 해발고도 50M이하의 평야이고 양쯔강과 화이허강이 흐르며, 홍쩌호(洪澤湖)와 태호(太湖)같은 큰 호수가 있다. 중국최대의 호수는 파양호요, 그 다음이 유명한 동정호요, 그리고 태호라 한다.

 쑤저우(소주)는 장쑤성(江蘇省)에 속해있는 5번째의 도시인데 시의 전 인구는 600여 만 명이나 시내인구는 105만이다. 일찍이 춘추전국시대에 춘추 오패 중 오나라의 서울이었으며 수나라 때 대운하가 개통되자 天上天堂 地上蘇杭이라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중국에는 ꡐ소주에서 태어나고 항주에서 살고, 광동에서 먹고, 유주에서 죽어라ꡑ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소주가 번영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겠다. 도시 전체가 운하로 이루어져 있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소주를ꡐ동양의 베니스ꡑ라 불렀고, 아름다운 정원과 미인으로 유명하다. 또한 예로부터 비단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넷째날(1월 18일)

7시에 식사를 조금하고 8시에 첫 번째 목적지인 한산사로 향하다.


◎한산사(寒山寺)

 7세기 당나라의 시인 寒山과 拾得이 기거한 절로 유명한 자그마한 절이다. 한산이 지은 《楓橋夜泊》이란 시로 유명한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달은 기울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내리는 구나.

 강촌교와 풍교사이에서 고기잡이하는 배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구나.

 그는 후일 과거에 급제하여 큰 벼슬을 하였다 하며 습득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도 습득사가 있다고 한다. 5백 나한상이 특이하고, 70위안(약 1만원)만 내면 종을 치게 허락해주는데 예전에 박동명인가 하는 기독교 신흥종교 교주의 아들이 미국의 술집에서 종을 치고 당시 돈으로 2천 만원 어치 술값을 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문전에는 과연 지금도 소운하가 흐르고 둥근 다리인 풍교가 있는 소박한 분위기지만 당시 이 일대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주야의 구별 없이 배들이 오갔다 한다. 과연 이곳 수저우는 운하가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데 바로 운하의 도시다. 사실 비행기에서 볼 때에도 온 평야가 운하로 수많은 금을 그어 놓은 듯 했지만, 이 소주는 도시 내부도 그러한 듯 했다. 모두 7종 14획으로 쳐있다 한다. 대운하는 뻬이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1800KM인데 현재는 400KM만이 물이 있어 배가 운행되며 대부분 지류만 이용된다고 한다.

 절 뒤편에 상당한 목탑이 있는데 이 한산사와는 관련이 없고, 뒷편에 또다른 절이 생겨 탑을 최근에 세우고 관광객을 부른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호구공원(虎丘公園)

 이 공원은 산에 있는데 춘추시대 오왕 부차가 부친 합려를 매장했다는 곳이다. 장례를 지낸지 3일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관광객을 부르는 가마와 말들이 한가로이 쉬고 있다. 조금 오르니 시검석이 있는데 어느 책에선가 본듯하다. 이 돌은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삼아 잘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과연 그런  말이 생기게도 생겼다.

 조금 더 올라가니 천인석이라는 넓고 평평한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천명이 앉아 설법을 들었다 한다. 둥근 문을 지나면 검지(劍池)라는 조그만 못이 있다. 검은 못이라는 이 검지야말로 합려의 무덤의 문이 있는 곳이라 하는데 발굴하지 않고 있다 한다. 이를 보며 우리의 문무왕 해중릉이 생각났다. 못위의 암벽엔 왕희지의 글씨로 劍池라 새겨 있다. 산이 무덤인줄 모르고 정상에 雲巖寺塔이 세워졌는데 높이가 47.5M인 8각형 7층탑인데 약 15도 기울어져 있어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라 한다. 무덤을 만들 때 애검 3천자루와 비밀을 이유로 수많은 노역자들을 살육했다는 아픈 전설이 있는데 이 무덤 때문에 탑이 기울고 있다 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이 시대에 의거하여 생긴 말이다. 양귀비,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미인도 이때의 인물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한 말. 섶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뜻이다. BC 496년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월(越)나라를 쳐들어갔다가 월왕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그 아들 부차(夫差)는 이 원수를 갚고자 본국으로 돌아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ꡒ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ꡓ하고 외치게 하였다. 부차의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패하고 말았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말이다. 한편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오나라에 항복하였다. 포로가 된 구천 내외와 신하 범려(范)는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겪은 끝에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는 돌아오자 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거나 눕거나 늘 이 쓸개를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ꡒ너는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잊었느냐!ꡓ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이 상담(嘗膽)에 대한 이야기는 《사기(史記)》 월세가(越世家)에도 나온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쳐서 이기고 오왕 부차로 하여금 자살하게 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의 일이다. 이와 같이 와신상담은 부차의 와신과 구천의 상담이 합쳐서 된 말로 ꡐ회계지치ꡑ라고도 한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서로 미워하면서도 공통의 어려움이나 이해에 대해서는 협력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 이 이야기는 《(孫子)》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손자의 말로 ꡒ대저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 돕기를 좌우의 손이 함께 협력하듯이 한다(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加左右手)ꡓ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는 부득이 협력을 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 저라산(苧羅山)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방빈(倣)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 범여(范)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후에 서시는 범여와 함께 오호(五湖)로 도피했다고도 하고 또는 강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졸정원(拙政園)

 명나라 때 감찰어사였던 왕 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해서 지은 집이다. 부지의 60%정도가 연못이며 정말 대단한 개인 정원으로 온갖  누각과 정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테이블과 의자등 가구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여러 색의 매화 분재들이 정자에 있는 방에 놓여 있는데 가구들과 아주 잘어울린다. 어쩌면 매화가 저리도 아름다운지 영락없는 동양화의 그림 한 폭이다. 분재원의 분재도 볼만하다. 저리도 큰 정원을 아주 오밀조밀하고 자연의 정취도 자연스럽게 살린 훌륭한 정원이라 하겠다. 중국 귀족의 호화로운 생활모습의 극치라 할까?

 문밖으로 나오니 멀지 않은 곳에 큰 탑이 보인다. 북사탑(北寺塔)이라 하는데 우리의일정엔 없어서 바삐 사진을 찍었는데, 강남지역에선 제일 높은 76M의 탑이라 하는데 정말 우람하다. 아하! 황룡사탑이 저만 하였거니…황룡사탑이 82M이니 저보다도 컸을 거라고 상상하니 정말 엄청났지 않겠는가?


◎패션쇼 관람

 비단공장을 방문하였다. 쑤저우의 비단을 판매하기도 하는데 웬 패션쇼인가? 처음엔 별 볼일 없는 여자애들이 비단옷을 입고 소개 좀 하나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다. 소주 미인은 옛말이요, 이젠 미인이란 찾기 어렵다드니 여기에서 소주 미인을 보았다. 5명의 모델들이 씰크옷을 갈아 입으며 5-6차례 행진하는데 그중 두 명은 키가 180은 되나보다. 난생 처음으로 이런 미인들의 패션쇼를 구경한 것도 기억될만한 추억거리다. 기분이 좋다. 역시 미인을 보면 기분이 좋군!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분위기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앉아 찍은 거라 어쩔지 모르겠다. 값도 사고 디자인도 좋아서 식구들 선물로 넥타이 두 개, 내 손수건 3장, 스카프 3장, 양 선생 티셔츠를 사다.

 어느 작은 호텔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테이블에 한 자도 넘는 찜한 대 붕어가 놓인다. 보기엔 먹음직스러웠지만 별 맛은 없다.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2시에 항저우로 출발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운하의 지류들, 그리고 운하를 오르내리는 수많은 배들. 가끔은 연기를 뿜어내는 배들도 보였으나, 대부분은 오염방지를 위해 밧데리를 쓴다고 한다. 차가 밀려 지체되기도 하면서 무려 3시간 30분이나 걸려  항저우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소주와는 省이 다르다. 곧 저장성이며 우리말로는 절강성이다. 우리는 중국의 소설에서 흔히 강소성과 절강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만큼 역사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리라. 절강성 역시 면적은 10만KM²인구는 4200만이요, 성도는 바로 이곳 항저우이다. 산업은 강소성과 대동소이한데  강소성에 양쯔강의 하류가 있다면, 절강성의 항저우엔 항저우만이 있고 리아스식 해안과 그 앞엔 1800개나 되는 섬이 있다 한다.

 항저우는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보고나서 『세상에서 가장 곱고 멋있는 도시』라고 했을 정도로 중국에서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항주의 인구는 170만 정도인데 자전거가 110만대일 정도로 자전거의 물결을 이룬다.  일찍이 춘추시대에 월나라의 수도였으며, 5대 10국시대엔 오월의 수도요, 대표적으로는 남송의 수도로 유명하다. 소주와 함께 일찍 상공업이 발달하여 이미 13세기말에 90여 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포용하고 10여개의 시장에 여러 종류의 상점, 음식점, 극장이 줄줄이 서 있는 속에서 떠돌이 연예인, 이국인들의 발길도 잦아서 그 번화함이 원이 점령한 후에도 수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은퇴 후 ꡐ항주에 저택을 짓고, 소주의 미인을 얻어 광주의 음식을 먹고 사는 것ꡑ이 중국인 최대의 소망이라 하니 얼마나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항주에선 다른 지역의 가이드 활동을 허락치 않아 항주시만을 안내하는 새 가이드를 만났다. 흑룡강성 출신의 이민 4세로 아주 작고 귀여운 23살의 서 설매란 아가씨이다. 작고 아담한 黃冠호텔에 들었는데 길 반대편에도 호텔이 있고,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중심지이다. 호텔 바로 옆에 큰 마트가 있어 물건 구경 좀 가고자 하니 세 가이드 모두가 반대한다. 돈 잃을 위험이 있다고들 얘기하는데 한편으로는 싼 물건 값을 들킬까봐(?) 막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다. 우겨서 배 선생 내외분, 김성희, 서설매랑 같이 들어갔다가 너무 많은 젊은이들에 놀라 그냥 나와 버렸다. 솔직히 돈 잃을까 하는 두려움도 들어서…


    

다섯째날(1월 19일)

아침 호텔식이 매우 좋다. 윤영호씨가 얘기했던 대로다. 정말 중국차 많이도 마시고 있다. 식사후엔 커피도 한잔씩하고 있지만은 왠지 녹차문화에 젖은 느낌이다. 


◎육화탑(六和塔) 

 항주시의 남쪽 교외 전단강가의 월륜산(月輪山)에 있는 위풍당당한 탑이다. 전단강의 높은 물결을 가라앉히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현재의 탑은 1153-1168년에 세워 졌으니 남송 초의 일이다. 밖에서 보면 13층인데 실제로는 7층이요, 겉은 분명한 목탑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전탑이었다. 높이가 59.89M이니 대단한 위용이요, 내부는 건물과 같은데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전망이 좋다지만 시간이 없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뒤켠으로 올라가니 수호지에 등장하는 노지심과 무송의 동상이 있다. 그들이 한때 이곳에 살다 죽었다고 한다.

전단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용왕이 고기잡는 부모를 잡아갔다. 효성이 지극한 딸이 돌을 끊임없이 전단강에 던져 용왕을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용왕이 딸에게 애걸하였다. 용왕은 딸의 소원대로 부모를 돌려주었다. 』


◎악비묘(岳飛廟) 

 남송의 충신 악비를 기리는 곳이다. 악비는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큰 공을 세운 뛰어난 명장이나, 금에게 패하고 남송이 시작되자 금에 맞서 싸웠으나 화평론자인 재상 진회파에 의해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 진회가 죽자 그의 무고함이 드러나 추앙되었다. 무덤 앞에는 진회 부부와 부하 둘이서 무릎을 꿇고 있는 4개의 철상이 있는데, 악비에게 잘못을 빌고 있는 정말 해학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빌고 있는 광경이 얼마나 우스운지 소리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들을 때리고 침을 뱉기에 「침을 뱉지 말것」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서호(西湖) 

 10시가 조금 넘어 서호에 도착하였다. 항주에 서호가 없었다면 항주에 갈 이유가 없었다는 바로 그곳이다. 둘레 15KM의 타원형 호수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항주시내에 있을 뿐만 아니라 경치가 빼어나서 절색의 구릉과 계절을 장식하는 나무, 아침과 저녁으로 비오는 날과 개인 날, 그리고 춘하추동 각각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 한다.

 서호는 특히 저 유명한 백낙천과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은 곳이며, 소동파는 서호를 이곳출신의 미인 서시에 비유하여 서자호(西子湖)라 불렀다 한다. 서호는 일찍이 당나라 때 822년 항주자사로 부임한 백거이(낙천)이 쌓은 1KM의 白堤 와 11세기말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소식(동파)가 쌓은 2.8KM의 蘇堤로 나뉘어 진다. 약 30분동안 배를 타고 한바퀴 도는데 가랑비가 뿌리고 날이 흐린데 이것 역시 서호의 아름다움으로 친다고 한다. 서호는 개인날 보다는 흐린날이 좋고, 그 보다는 안개 낀 날이 좋으며, 그 보다는 비오는 날이 좋고, 그 보다는 눈오는 날이 좋고, 그보다는 밤이 더 좋다고 한다. 이 서호를 두 제방이 연결되어 둘로 나누었는데 소제에는 6개, 백제에는 2개의 아름다운 다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경치가 저토록 아름다워서인지 두 제방이 만나는 곳 바로 가까운 곳에  장개석 별장이, 그리고 조금 떨어져 모택동 별장이 있다 하였다. 말로만 듣고 실제 들어가 보지 못한 화진포의 김일성 별장이 생각났다.


◎곽장(郭庄)

 서호와 붙어 있는 작은 별장이다. 소제가 바로 앞에 놓여 있다. 아까 우리가 유람선을 타고 돌았던 큰 호수의 반대편에 있는 작은 호수 곁이라 할까? 아주 작고 아담한 별장이나, 오히려 양 선생은 졸정원보다 낫다고 말한다. 서호가 바로 앞에 놓여있고 연못의 물이 서호와 통하고 있어 경치도 그만인 깔끔한 곽씨의 정원이다. 이런 작은 정원에도 예외 없이 교포를 포함한 진주파는 장사꾼들이 별장의 한켠을 얻어 장사하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진주반지 하나씩을 구입하였다.


◎영은사(靈隱寺)

 곽장 옆에 있는 제법 고급스런 식당에서 식사하다. 극장식으로 꾸며진 식당인데 무대에선 어느 회사 직원들인 듯 싶은 남녀 사원들이 춤 연습을 하며, 음식들을 차리고 잇다. 맨날 노래방이나 몰려다니는 우리네 문화보다 훨씬 성숙된 모습이 아닐까? 서쪽으로 잠깐 달리니 영은사가 나타나는데 항주 사람들이 즐겨 찾을만한 곳으로 보일 만큼 경치가 좋다. 동진시대에 인도의 승려 혜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중국 10대 사찰의 하나인 만큼 규모도 크다. 절로 들어가면서 동굴벽과 동굴 입구의 벽위에 새겨 있는 여러 불상들을 살피며 지나니 이젠 아예 산기슭의 암벽에 온통 불상들이다. 이산이 비래봉인데 이곳에는 72개의 환상적인 동굴과 330개가 넘는 석굴 조각상이 있다. 수가 많다하여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심히 살피니 불상 하나 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이로다. 역시 중국이다. 우린 저만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마애불은 서산 삼존석불정도라 할까? 절로 들어서니 어머어마한 사천왕상이 있고 눈앞에 거대한 대웅보전이 나타나는데 높이가 33.6M라 한다. 이 대웅전을 찍으면서 카메라의 밧데리는 수명이 다하여 영은사를 제대로 찍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웅보전 안에는 19.6M의 목조 금색 석가모니불이 있어 거대하다. 이는 중국 최대의 목불 좌상이라 한다. 일본 동대사의 목조 와불이 생각났다. 석가 좌상의 뒷면에는 천태산에서 50스님이 석가를 만나는 장면이 진흙으로 빚어져 있는데 대단히 장엄하며, 그중 석가모니의 바로 위에 좌정하고 있는 스님이 신라의 김지장보살이라는 설명이었다.


◎용정 녹차촌

 차가 조금 달리더니 용정촌에 들어섰다. 시골인데 주택들이 깨끗하고 규모도 크다. 용정차로 돈을 벌어 주민들이 모두 부자란다. 안내 받은 집으로 들어서니 벽면에 장쩌민이며. 카터며, 엘리자베스 여왕이며 유명인물들의 이곳 방문 사진들이 걸려 있다. 우리 교포 사나이가 인사하며 입담 좋게 선전을 시작한다. 우린 평소 녹차를 마시자고 다짐하면서도 항상 커피만 마시는 고로 구입할 생각이 별로 없었으나, 배 선생님이 한국보다 가격이 너무 싸다며 1등품 3만원짜리 6통을 구입하는 바람에 모두들 사게 되고 우리도 2통이나 샀다. 마술 연출하듯이 통속에 꽉꽉 담아내는 모습에 혹하여 산 건 아닌가? 후일 집에 돌아와 마셔보니 국내의 다른 차들과 확실히 다르게 노란색이 약하게 우러나며, 많이 타면 오히려 쓰다. 이곳을 방문한 황제가 별맛 없다고 돌아가다가 입안에 남아있는 향기가 너무 좋다며 다시 돌아와 마셔보고 황실의 차로 정하여 황실차가 되었다는데 일리 있는 말이로되 솔직이 별맛은 없는 것 같다. 마트에서 보니 품질에 따라 값이 엄청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었고, 결코 싼것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크다. 아무튼 비싼 돈 주고 중국 현지의 용정차를 사왔으니 커피 그만 마시고 용정차를 즐깁시다. 건강합시다. 4시에 용정촌을 출발하여 마지막 숙박지인 상하이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무려 3시간이나 걸려 도착하였다.



다시 상하이(上海)

◎상하이 서커스

 그 유명한 상하이 서커스다. 중국 서커스는 수차례 TV를 통해 보아서인지 별로 신통한건 없다. 그저 자전거 타기, 접시 돌리기. 눈속임 마술 등이다. 쇼보다는 오히려 이 극장이 들어 있는 건물이 볼 만 하였다. 미국인이 지어 운영하다가 이젠 중국이 인수받아 운영되고 있는 호텔이라는데 출입구 로비의 웅장함과  3층까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의 장대함이 대단하다. 버스들이 건물안으로 드나들고…

  상해난생대주점( 上海蘭生大酒店)이라는 호텔이다. 마지막 숙소인데 그리 크지 않은 호텔이나 근처에 고층빌딩들이 많고 대 도로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중심부인 듯하다. 호텔은 작으나 방은 널찍하고 좋다는 우리 둘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가 7시 30분부터 9시까지 관람하고 9시 30분에 호텔에 들어갔는데 10시에 김정일은 열차로 뻬이징을 향해 상하이를 떠났다는 보도를 보았다. 참, 우연도 하다. 1994년 6월인가 내가 통일연수원에서 연수를 받는 중에 김일성 사망소식을 듣고 긴장하며 토론을 벌였더니만  오늘은 김정일과 상하이하늘아래 함께 있게 되니 말이다.



여섯째날(1월 20일)

 오늘은 중국여행의 마지막 날이나 기실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공항에 나갔다. 국제선과 거의 모든 국내선도 푸동공항으로 옮겼으나 서울행은 아직도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달러가 아직도 몇십 불 남아서 중국 술 두병을 기념으로 사다. 김양에게 창가자리를 부탁하여 양 선생과 떨어져 앉기까지 하였으나 구름 때문에 구경은 고사하고 남자 셋이 옆자리를 같이하여 힘들기만 하다.

 이제 중국여행코스 5개중 두 코스정도는 구경하였나 보다.

 제1코스 : 라오닝성, 길림성 일대, 백두산과 압록강 그리고 두만강과 퉁코우 고구려 유적지 등

 제2코스 : 세양(진의 서울), 시안(장안, 전한과 당의 서울), 뤄양(낙양, 후한의 서울), 뻬이징 (북경, 원과 청과 만주국과 현 중국의 서울)일대

 제3코스 : 이번 여행코스, 난징(남경, 삼국시대 오와 명나라의 서울)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음

 제4코스 : 홍콩, 마카오, 심천, 광저우 일대. 겨우 홍콩만 본 상태임.

 제5코스 : 타이완

 11시 20분쯤  출발하여 겨우 1시간 20여분만에 서울에 도착하니  시계를 한시간 앞으로 놓아도 1시 40분이다. 리무진으로 4시간 걸리고 엿새동안 주유소에 놓아둔 티코로 집에 오니 7시 반이다. 아주아주 즐겁고 보람있는 많은 공부가 된 가치 있는 여행이 되어 기쁘다. 천 교수님 말씀대로 1년에 두 번씩은 (우리는 아직 아닐망정) 열심히 아끼고 열심히 저축하여 곧 가까운 시일에 또다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돈의 포로가 되지 않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는 삶을 살도록 하자.                      

 2001년 1월 28일 밤 11시 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