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관동유람기(2009년 8월)

청담(靑潭) 2009. 9. 1. 16:24

 

관동유람기(2009년 8월)

 

서언

  금년 여름방학에는 골프연수를 받았다. 2주일간 연수를 받고 일주일은 학교근무, 일주일은 국내여행을 계획하였다. 나머지 한주일은 계모임 들이 있어 바쁠듯하며 5주일간의 방학이 끝난다. 여행은 12일 승수의 생일에 맞추어 출발하여 15일의 숙희네 집들이 초대에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도록 짰다.

  주 여행지는 화진포로 정하고 경유지로 남이섬을 정하였다.


8월 12일(수)

  점심을 먹고 2시에 출발하다. 귀옥처제는 휴가를 받아 어제아침에 친구들과 홍천으로 떠났는데 우리는 이모 없는 이모집에서 만나 함께 자기로 하였다. 7시에 모두 모이고 승수 생일을 축하하다. 승원이 진로에 대해 놀라운 제언을 받고 승원이 뜻에 따라 진로방향을 전환하기로 하다. 10월초의 임용고시를 준비하여 학원에 다니고 있는 중인데 교직에 뜻이 전혀 없으므로 합격가능성도 전혀 없는 임용고시를 중단하고 정말 하고 싶은 디자인 공부롤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다.

  실로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다. 지리를 전공하였으나 3학년 때 국어복수전공을 시작하여 5년 반 만에 어렵게 졸업을 하게 되었고, 졸업이 늦음에 따라 복수전공 부가점수(2점)가 금년에만 적용되는데다 정보 부가점수 최고인 컴활1급(2점)이 없고 워드1급(1점)만 있는데 정보 부가 점수가 금년에 폐지되고, 한문 3급(1점)도 취득하지 못한 상태인데 이마저 없어져서 복수전공 2점을 안고 경쟁하는 유리한 상황으로 급변하여 쾌재를 불렀더니만 아닌 밤에 홍두깨다. 그러나 어쩌랴? 뜻이 없고 공부도 되지 않아 아예 자신이 없을 뿐 만 아니라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는 것을...... 가족이 이에 동의하고 승원이 뜻을 따르기로 하다.

  전문학원을 거치며 기초를 공부하고 대학원과정의 전문아카데미과정을 준비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모든 체면이나 주변인들의 관심과 주시를 무시하고 오직 우리 승원이를 위한 노력을 다시 최선을 다하여 뒷받침해주어야만 한다. 우리 승원이의 행복한 삶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8월 13일(목)

  아침 9시 반에 마포아파트를 출발하다. 승수와 승원이와는 이곳에서 헤어지다.  내가 아직까지 청평유원지와  남이섬을 가보지 못했는데 마침 기회라 여겨 이참에 두 곳을 들러보기로 하고 코스를 잡았다. 네비게이션을 퇴계원을 목적지로 하여 세종로를 지나 퇴계원까지는 잘 갔으나 퇴계원에서 길을 헷갈리기 시작했다. 잠간 구리시 방향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나와 곧 46번 국도를 타고 청평으로 갔는데 국도가 마치 고속도로 같아 예상 밖이었는데 새전군도로 마냥 길이 너무 좋으니 자꾸만 이 길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어서 더 힘이 드는데 이미 전라도마저 모든 길이 크게 변하는 등 세상 변하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왜 적응이 잘 안 되는 것인지!

  퇴계원까지 한 시간이나 걸리고 청평에 도착하니 11시 반이 되어 그냥 지나치고 남이섬까지 나아가 점심을 먹다. 12시에 도착했으니 2시간 반이 걸렸다. 남이섬에서 춘천 막국수를 처음으로 먹어 보니 맛이 상당하다. 南怡섬은 자연스런 멋은 있으나 내 취향은 아니다. 생각했던 만큼 아름다움이나 특색을 발견치 못하니 이곳이 아주 옛날부터 서울의 좀 있는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및 여행지로 유명한 곳인데 오늘의 남이섬은 느낌이 크지 않다.  오히려 남이장군(1441-1468)의 무덤이 있어 남이섬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북정가 (北征歌)

白頭山石 磨刀盡

豆滿江水 飮馬無

男兒 二十 未平國

後世 誰稱 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다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하리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 13)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올랐으며, 이어 서북변의 건주위를 정벌하였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하고 회군(回軍)할 때 지은 시인 북정가가 예종이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궁중에서 숙직하던 어느 날 밤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승진을 시기하던 유자광이 말을 덧붙여 남이가 모반을 꾸민다고 모함하여 강순과 함께 주살되었으니 참으로 방년 28세의 아까운 영웅이었다.

 

 

  남이섬에서 한 시간을 구경하고 나오니 두시 반이라 급히 떠날 채비를 하다. 이제 계속하여 46번 국토를 타고 춘천을 지나 양구를 지나 미시령으로 가고자 했는데 네비가 길을 홍천방향으로 인도하니 이틀 동안 아침 비만 홀딱 맞고  재미도 없이 이모는 홍천을 떠나 익산에 도착하였다는데 우리는 뜬금없이 또 56번 국도를 타면서 홍천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44번으로 갈아타고 소양호를 끼고 달리는데 좌우간 네비 덕분에 20여㎞ 더 달려 인제를 자나 원래 가려던 길과 원통부근에 서 만나다.

인제군 북면에서 44번과 6번이 함께 나란히 하더니 44번은 한계령으로 빠지고 이제 46번 하나로 달리게 되고 백담사 가는 길도 나온다. 6년 전(2003년) 여행 때 백담사에 들렀는데 양랑이 너무 좋아해 다시 가고픈 생각도 있으나 일정에 없으니 지나치기로 하다. 미시령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 사뭇 달린다. 마포에서 266㎞거리이고 도착시간을 6시로 잡았고 방도 구해야 하므로 마음이 조금은 급해진다.

  드디어 6시 20분에 화진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다. 오늘은 편하게 모텔을 잡고자 하여 화진포를 조금 지나 올라가니 대진중고등학교가 나오고 대진항이 있다. 이곳에 모텔들이 여러 개가 있어 쉬이 방을 잡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2㎞를 걸어 화진포해수욕장을 들러보고 다시 돌아와 식사를 한 뒤 대진해수욕장에서 잠시 산책을 한 뒤 잠을 청하다. 횟감이 곁들인 식사를 하고자 했으나 평일이고 또 많은 비로 인하여 배가 들어오지 않아 오징어도 없어서 횟집들은 문을 닫았고 대중식당에서 양랑은 황태탕을, 나는 이 곳 특유의 하얀 순두부탕을 먹었는데 황태탕에 대한 양랑의 저평가가 있었으나 내 입맛으로는 꽤 괜찮았다.

 

 

 


8월 14일(금)

  화진포는 중학교때 처음 알았다. 이씨스터즈가 부른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을 너무나 좋아하였다. 이씨스터즈가 부른 노래는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노래는 언젠가 저 멀고도 아름다운 화진포에 가 볼  수 있다는 꿈과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게 하는 환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운 노래다. 특히 이정자씨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6년 전인 2003년 여름에 양랑과 나는 프라이드베타를 가지고 화진포와 백담사와 설악산과 강릉을 2박 3일간 여행하였으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기억이 없다. 이번 여행도 주 목적지가 화진포가 되었고 남으로 내려오면서 강릉의 선교장을 두 번째 목적지로 삼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화진포로 가다. 먼저 이승만 별장을 찾았다. 구한말 독립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정부를 비판하다가 투옥되기도 하고 출옥 후에는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대와  하버드대 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한 뒤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이 되는 등 독립단체의 최정상급 지도자로써 평생을 나라를 위해 싸우고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959년에 우리는 「이승만 박사」라는 노래를 학교에서 배워 부르기도 하고 작은집과 학교 교무실에 있는 잡지의 사진들을 통해 이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확실하게 가졌었다.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독재를 허물면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 평가만 확대된바 있고,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강력한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이론을 확립하면서 소위 반체제인사들에 의해 이승만과 자유당도 박정희와 유신체제와 동일시하면서 균형을 잃은 부정적 평가만 난무하게 되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그래도 균형잡인 긍적적 평가도 함께 하고 있었으나 사회적 분위기와 국사교사 아닌 교사들에 의한 무분별한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저 평가 및 왜곡된 비난만 판을 치는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50대 교사들까지도 유신 이래 정치적 이념적으로 민주화세력에 속한 학자들의 독재체제비판에 동조하면서 비판에 만 익숙해졌고, 그러다 보니 정작 우리 자신들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너무나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판의 여야가 극단적 대립을 계속하는 한 (엄밀하게 말하면 소위 민주화투쟁세력이라 불리는 운동권들의 세력이 유지되는 한)대한민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젊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말하자면 현재까지도 이승만 박사와  이들에 의한 대한민국의 건국과, 박정희와 박정희에 의한 경제발전의 역사적 업적도 긍정적 평가보다는 항상 비판적 평가만 난무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주장과 억지가 여전히 잘 통하고 있다는 말이다.

  남북이 갈라진 상황이 계속되고 민족주의가 국민주의보다 더 기세등등 하는 한 대한민국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올바르게 자리하지 못할 것이다. 국민회 가입증서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어 있어 직원에게 시정을 요청하다.

  김일성 별장은 예전 여행시에는 공사중 이어서였는지 올라본 기억이 없다. 올라보니 경치는 그만이나 김일성이 휴양한 곳이 아니고 김정일 형제들이 다녀간 기록이 있는 곳이라 하며 그냥 멋지게 붙인 이름이며 반북한체제 전시물들이 있다. 

  이기붕 별장에는 이기붕의 가족사진들과 박마리아의 유품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이기붕 부통령의 아내인 박마리아가 이화여대의부총장이라는 사실에 ?여자가 어떻게 대학교의부총장까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정말 높은 자리로 여겼던 기억이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그 당시에 초등학교 일이학년 학생이 지도자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거나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보통학생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라 보여 지는데 이석한이 지금 왜 이렇게 작은 사람이 되고 말았나?

 

 

                                              

  

  부근에 있는 금강산 자연사박물관에도 다녀오면서 아름다운 화진포에서 오전을 보내니 10시 반이 되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관동팔경을 찾기로 하고 청학정(고성팔경)과 청간정(관동팔경)에 들르다. 양랑은 아주 좋아한다. 12시가 되어 낙산사에 도착하여 물회로 점심을 하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 무려 값이 1,5000원인데도 시켜서 먹어보다. 맛은 있으나 맥주 한 병에 4천원이나 하는 바가지 상술과 함께 3만 4천원 지불은 아깝다.

 4년 전에 낙산사에 불이 나서 거의 전소되고 동종도 녹아 버렸었다. 놀랍게 다시 중건되고 옛 모습을 거의 찾아가고 있어 다행이며 의상대는 주변 나무들이 줄었으나 경치는 여전하다.

 

 

 

 2시20분에 강릉으로 출발이다. 양랑이 제일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선교장이다. 기실 강릉에 내가 10여 차례 왔을 터이나 선교장에 단 한번 들린 기억이 나는데 관심 있게 보지도 못했다. 그저 학생들 지도하느라 건성으로 지나친 기억이다.

선교장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최고급 양반주택이다. 본래 왕족인 이내번(李乃蕃)이 집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처사(鰲隱處士) 이후(李后)가 건립하였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1816년에 이근우(李根宇)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집은 안채·사랑채·별당·사당·정자·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큰집으로 현재는 동별당과 서별당 중 서별당이 없어졌고, 사당이 1970년대에 재건되었으며 행랑채 일부가 헐렸다. 그 배치는 서남향으로 앉아 있으며,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집의 이름을 선교장(船橋莊)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집의 평면은 전면에 줄행랑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앞에 중문간행랑이 있고, 서쪽으로 사랑마당에 이른다. 안채의 평면은 부엌·안방·대청·건넌방으로 구성되며, 동쪽으로는 동별당, 서쪽으로는 중문간행랑채와 연이어 있다. 연못 가운데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하여 산을 만들었고, 선교장의 뒷편으로는 우람스런 소나무가 늘름하고 푸르르다. 지금까지 구경한 양반고택 중 최고의 건물배치와 아름다운 건축이 돋보일 뿐 만 아니라 규모에 있어서고 비할 바가 아니다.

 

 

 

 바로 이웃에 있는 김시습문화관에 갔더니 김시습이 강릉 김씨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한 것일 뿐 만 아니라 아예 볼 것도 없는 유명무실한 전시관이다.

  오죽헌에 가다. 오죽헌은 수학여행시 반드시 찾는 것이라 이미 수차례 가본바 있으나 그래도 강릉하면 오죽헌인데 안 가볼 수 없다. 예전보다 훨씬 넓은 부지를 확보하였는지 개발사업에서 나온 선사시대 분묘를 이전하여 여러 형태를 전시하여 학생들의 공부에 유익하게 만들어 놓았다. 금년에 신사임당 영정이 들어있는 5만원권이 발행됨으로서 세계최초로 화폐에 모자영정이 들어간 신사임당과 이율곡이라는 홍보용 프랑카드 내용이 재미있다.

  6시가 넘어서 숙소를 잡기로 하다. 예전에는 미처 가보지 못한 경포호 저편으로 가보니 신사임당 공원이 있고 한국최고의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모텔은 이미 휴일이 시작된 금요일이라 최하 10만원인데 젊은 학생들로 그득하고 시끄러워 민박을 찾다. 반드시 경포호 주변의 민박을 잡겠다고 고집하며 찾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경포호 입구 첫머리에 있는 수퍼겸용 민박을 잡았다. 방이야 허술하지만 경포해변에 가서 맥주한잔을 할 수도 있고 경포호를 바라보며 잠을 잘 수 있어 최고의 민박집이다. 경포해변을 거쳐 터미널에서 식사를 하고 경포대에 올라 둘이서 너무나 즐겁고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다. 솔직히 수없이 방문한 경포대이지만 정작 경포대정자에 오른 기억이 없는데 오늘 민박집 옆에 경포대가 있어 가면서 들리고 오면서 들리며 마음껏 경포대에서 경포호를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8월 15일(토)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출발채비를 챙기고 나니 8시가 다 되었다. 목적지는 죽서루와 환선굴이다. 원래는 환선굴만 보고 숙희네 집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이왕 정자를 보며 내려온 터라 너무나 유명한 그리고 가본 적이 없는 죽서루를 꼭 들리기로 계획하다. 아침밥을 먹지 못 한 채 죽서루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고 관동최고의 누각이라더니 역사도 깊거니와(1404년 건립)정말 천하의 절경이었을 장소에 그것도 삼척고을을 휘돌아가는 오십천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죽서루는 가히 보물이다. 떠나기 싫은 마음에 한 시간이나 지체하였는데 뜻밖에 정자아래 강물 위를 날고 있는 파랑새를 발견하여 사진도 찍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동학혁명시 불렀다는 녹두장군 노래 가사에 나오는 파랑새를 처음으로 보며 우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죽서루 주변에 오죽이 많았고 기암괴석들이 나열하고 있는데 그 바위에서 재래종 무궁화나무들이 자라고 꽃이 피고 있다며 양랑이 또 한번 크게 놀란다. 10시가 넘어가니 마음이 급하여 환선굴로 출발한다. 환선굴은 최근 10여년 전 쯤 개발된 곳 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들었다. 주차장에서 환선굴 입구까지 1.5㎞나 되고 섭씨 35°더위에 (동해안은 29도 정도였으나 저녁에 들으니 전국이 33도 ~ 35도였으며 밀양은 38도 3분이라는 살인적이 더위였다고 한다) 산을 오르느라  너무도 덥고 힘들어서 양랑은 매우 고생하였으나 굴입구에 도착하니 어찌나 시원한지 기분이 절로 좋다.

 

 

 

 

  죽서루로 가면서 삼척해수욕장입구의 표지판 옆에 수로부인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따로 있어 돌아올 때 들리기로 하였고 그래서 찾아보니 수로부인의 설화가 깃들인  그 현장으로 일명 《해가사 터》이다.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이었다. 향가인 《해가(海歌)》와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이다.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할 때 동행하던 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 곁에 바위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절벽에 철쭉꽃이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꺾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서는 이가 없었는데 암소를 끌고 지나던 노인이 꽃을 꺾어 와서는 《헌화가》를 지어 바쳤다. 이틀을 더 가서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을 때는 바다의 용이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이때 순정공은 한 노인의 귀띔대로 백성을 모아 《해가》를 부르며 막대기로 언덕을 치자 용이 나와 부인을 바쳤다.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구체적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삼국외사(三國外史)에 의하면 수로(水路)는 평소 방장산(方丈山) 운허사(雲虛寺)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는 자암존사(紫巖尊師)의 설법을 즐겨 들으려 함이더라. 수로가 부군(夫君) 순정공(純貞公)을 따라 임지로 가던 중, 방장산록을 지나며 자암을 못 잊어 詩 한 수를 지어 이를 전하려고 사자를 구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거늘 지나가는 견우노인(牽牛老人)을 붙들어 은밀히 청하더라. 詩에 曰


천 길 단애

바위 서리에

피온 철쭉도곤

닿기 고된 님하,

온 산과 들히

가람되어

나를 따르는데

그대 붉은 바위

홀로 올올함은

전세에

심은 한(恨)

사랑으로

태움인가?

아소, 님하,

이승에 못 닿을 사랑이면

만 길 바닷물결 끌어다

이 가슴

메우고져.



  견우노인 또한 평소에 자암과 교유하던 사이라 선듯 수로의 청을 들어 나서기는 했으나, 자암의 회한(回翰)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니 멋 적어 철쭉 한 가지를 꺾어 그녀에게 바치며 노래하기를


자암 곁에

모시던 손

이제 암소 먹이는 일도

다 그만 두고

날 두렵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곶 것거

받드리이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헌화가(獻花歌)라 이르더라. 어떻든 이로부터 노인은 끌던 소도 버리고 수로의 일행을 따라 가는데, 한 이틀쯤 걷다가 시종들이 잠든 밤에 몰래 부인을 업고 운허사를 향해 달려가것다. 마침 그믐 달빛에 눈을 씻던 자암이 문득 그 기(氣)를 잡자 장삼(長衫)으로 산등성이를 내려치며 날아와서 수로를 앗아 흑룡동(黑龍洞) 암굴(巖窟) 속으로 사라지더라. 급히 되돌아온 노인이 이르기를 해룡(海龍)이 그 갈기 위에 부인을 싣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하더라.

순정공이 바다를 향해 발을 굴러 서 있기를 사흘쯤 한 후 노인이 공 앞에 나아가

「뭇 입은 쇠도 녹인다 하였으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흑룡동 언덕을 막대로 치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 바다짐승도 또한 두렵게 여기지 않겠는가?」

고 하였다. 이에 노인의 말대로 언덕을 치며 노래를 부르니 사(詞)에



 

해가사(海歌詞)

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  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入網捕掠燔之喫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어 버리리라

 

  아침 안개 걷히는 흑룡동 암굴 위에 수로가 선녀처럼 드러나거늘 공이 달려가 붙들고 해중(海中)의 일을 물으니 수로 대답이


「칠보궁전(七寶宮殿)에


산해진미(山海珍味)


인간세(人間世)에 못 보던


맛이더이다」


노인이 곁에 서 있다가 큰 기침을 하며 일행을 재촉해 길을 떠나더라.

 

 

 


해가사터도 해수욕장이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저편 추암해수욕장에는 기암괴석인 촛대바위가 있어 그 경관이 화려하다. 분당에 5시까지 가기로 하였으니 갈 길을 재촉한다. 2시 10분에 엉덩이를 들었고 6시까지는 갈 줄로 예상하였으나 고속도로가 많이 막혀 7시 정각에야 분당 수내3동 수내중학교 정문에 있는 벽산아파트 204동에 도착하였다.

  숙희네가 살던 42평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였는데 15층이 42평이고 옥상에 붙인 2층이 원래는 24평이었으나 더 늘려져서 36평정도 되므로 실제로는 80평 2층집이었다. 경매로 7억5천 만 원에 사고 리모델링하는데 약 5천이 들었다하니 8억이 들어갔고 요즘 집값이 올라 10억쯤 간다고 한다. 숙희네 이사를 축하하고 난희네도 참석하여 오붓한 시간을 가지다. 세희의 건강은 한약을 먹으면서 확연히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최고 엘리트 과정 출신부부로 대학졸업후 20여년 넘게 직장생활하여서 알뜰하게 저축하여 분당에 싯가 8억-10억짜리 집을 장만하였으니 장한 일이며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8월 16일(일)

  아파트 입구가 수내중학교와 맞바라보고 있으니 아파트 찾기가 너무 쉽다. 윤서방과 함께 중앙공원 산책을 하다. 이 분당이라는 도시는 전적으로 서울시민들의 주거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조성된 대도시이다. 처음부터 마치 공원처럼 꾸민 데다가 상가는 적고 일체의공장지대가 없으니 공기는 맑고 탄천은 맑게 흐르며 아파트 숲이 우거지고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공원 산책길로 연결되어 있으니 정말 살기 좋은 도시다. 중앙공원은 화산이씨(이색의 후손) 종산인데 이곳에 조성한 공원이다. 숙희네가 부러 중앙공원 가까운 이 아파트에 자리를 잡아 오래토록 살고자 계획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9시에 출발하여 김제에 부모님을 모셔다드리고 돌제에 들러 익산에 돌아오니 오후 1시다. 4박5일의 긴 여행이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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