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청도 답사기 (2009)
2009. 5.11(월)
어청도는 우리전북에서는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제일 큰 섬은 위도인데 1981년에 해리중학교에서 직원여행으로 위험하게도 동호항에서 고깃배를 빌려 다녀오고 그 뒤 1998년에는 부안여상에서 직원여행으로 다시 다녀온 기억이 있다.
두 번째 큰 섬은 고군산군도인데 1993년부터 두 번 정도 학생생활지도차 여름방학 때 2박3일간씩 다녀오고 2005년엔가 양선생을 위하여 함께 당일로 다녀왔다.
어청도는 중학교시절 그러니까 1967년경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뒤 우리집이 아주 어려운 시기에 전기다리미와 전기 안마기인가를 판매해보신다고 아버지께서 어청도에 가신다는 말씀을 들은 아픈 기억이 있다. 다녀오신 후 어청도에 많은 고깃배가 들어오고 상당히 큰 어항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때 어청도에 대하여 알게 되고 언젠가 한번 다녀오리라 생각했으나 실천하지 못하다가 기어이 오늘 기회가 온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학교에서 필리핀 연수(우수 신입생14명과 학교장등 교직원6명)가 시작되어 월요일과 화요일이 가정학습일이 되었는데 양선생은 출근하니 더 없이 좋은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사전에 인터넷을 통하여 완벽하게 조사하였는데 비가 조금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으나 무시하였다. 9시 배이므로 집에서 8시 10분에 출발하였다. 안전하게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뉴어청 훼리호로 갔는데 연도에 잠시 들리고 정확하게 2시간 30분이 걸린다. 가격은 편도 22,900원이다. 오늘 들어가는 배에는 낚시꾼들 네 분 외에 다른 여행객은 없다. 연휴가 끝난 월요일이니 당연하지.
어청도는 행정구역은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이며 군산에서 72㎞떨어져 있어 전북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어청도는 물 맑기가 거울과도 같아 어청도라 불리어 졌다고 한다 어청도의 “청”은 맑을 청(淸)이 아닌 푸른 청(靑)자를 쓰고 있다. 그것은 BC 202년경 중국의 한고조(漢高祖)가 초항우(楚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패왕 항우가 자결하자 재상 전횡이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망명길에 올라 돛단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목적지 없이 떠다니던 중 중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이 섬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른 청(靑)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군산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72㎞, 중국 산둥반도와는 약 300km정도의 거리로서 개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중국과 가까운 곳에 우리나라 영해기선 기점중 하나인 어청도가 있다. 어청도는 조선왕조 말엽 충남 보령군 오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구군에 편입된 섬이다.
〈양자강〉이라는 중국집에서 되게 맛없는 이상한 짜장면을 무려 5천원에 먹고(시내는 4천원), 〈어청도 민박〉집에 숙박을 정한 뒤 등대를 찾아 갔다. 어청도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의 정략적인 목적에 의해 건설되었고 군산항과 우리나라 서해안의 남북항로를 통항하는 모든 선박들이 이용하는 중요한 등대이다. 등탑은 백색의 원형 콘크리트 구조이며 조형미를 살리기 위하여 등탑 상부를 전통 한옥의 서까래 형상으로 재구성한 보존가치가 있는 등대이기도 하다. 또한 상부 홍색의 등롱과 하얀 페인트를 칠한 등탑, 그리고 돌담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그 모습이 바다와 너무 잘 어우러져 다른 등대보다 그 자태가 더 아름답다. 고도 61m에 위치하여 약 37㎞ 떨어진 바다에까지 그 등광(燈光)을 비추고 있다. 특히 해질녘 등대 주변의 해송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은 직접 본 사람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산길로 왕복 1시간 정도 걸어서인지 피곤하다.
초등학교 부근에 치동묘가 있다. 바로 전횡을 섬기는 사당이다. 관리가 안 되어 흉하다. 전횡은 싣고 온 식량이 모두 떨어지자 어청도 앞 바다를 오가는 군량미를 운반하는 선박을 보면 군사성이라는 산 위에 올라가 쇠로 만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수송선박이 어청도로 대피하도록 하여 군량미를 탈취. 식량을 이어나가기를 몇 년 동안 계속하자 중국의 왕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전횡을 불러 들였으나 전횡이 명을 거역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 후 부터 살게 된 사람들이 백제시대 우루왕 13년에 치동묘라 이름하여 마을뒤쪽에 사당을 짓고 주민들이 당산이라 부르며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부락주민이 온갖 정성을 모아 1년 간 재앙을 몰아내고 안위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미신파라는 신세대에 밀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 전횡사당에는 전횡의 초상화가 붙어 있는데 이 초상화는 치동묘가 세워진 얼마 후 공주에 있는 스님이 꿈에 현몽으로 나타나 그 길로 어청도를 찾아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초상화가 완성된 단계에 이르러 한 쪽 귀를 그리고 반대쪽 한 쪽 귀만 그리면 되는데 그리던 도중에 갑자기 붓이 떨어지면서 그만 죽고 말았다. 그 후 수년 동안 그대로 있다가 어느 날 또 다른 스님이 나타나 전횡의 초상화를 완성하여 근래에까지도 초상화의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 원색에 가까운 채로 보존돼 있는데 현재는 그 초상화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고 옆에 사는 40대 분이 설명해 준다.
봉수대를 찾았으나 중단하였다. 주산 부근 전체가 해군 기지로 레이더 탑 같은 시설이 두 군데가 있어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괜히 군사시설을 염탐하는 것으로 오인될까봐 무섭기도 하고 산속을 혼자 다니는 것 자체도 두렵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봉화대는 군사시설 안에 있어 들어갈 수 가 없고 내 추측대로 군사용 봉화대는 아니라는 어청도 공소 집사의 설명을 들었다. 옛날에 봉수대였다면 오늘날 등대구실을 한 것이리라.
저녁부터 식사는 〈군산식당〉에서 하게 되었는데 깔끔하고 주인여자의 정성이 깃 들인 식사여서 먹을 만하다.
이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청도의 풍경이 하나 있으니 젊은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고 식당에서도 회식하는 군인들과 부사관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곳 어청도가 해군기지인 때문이다. 한때는 3-4백명의 해군들이 있고 지휘관도 중령급이었는데 지금은 100여명정도이며 소령이 지휘관이라고 한다. 해군이라면 멋진 하얀 해군복에 진해같은 도시에서 멋있게만 근무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먼 오지의 섬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해군에 대한 낭만적 인식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러고보니 섬에 있는 주산의 거의 대부분이 군사시설이요 군인들의 막사 같은 건물들이 차지하고있고 관광객이 없는 오늘 같은 평일에는 그저 주민 100여명에 100명이 넘는 군인들 뿐이어서인지 온통 군인들의 섬인 듯 여겨질 정도이다. 저녁에는 소주 한 병을 먹고 TV를 보다 11시쯤 잠이 들었다.
2009. 5. 12(화)
새벽 4시도 안되어서 잠이 깨니 할일도 없고 TV도 안 나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하루도 못되어서 벌써?오늘 나가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에 무거운 기분을 덜었다. 식당이 9시에 문을 연다기에 9시반 쯤 방을 나서니 민박집 아주머니가 군산에 안개가 끼어 오늘 배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한다. 어제 부슬비가 겨우 내리다 말다 하는듯 내렸고 밤새 약간의 비가 내린 정도이고 이젠 그 마저도 없이 날이 괜찮은데 ?이것 참 낭패다?는 생각 밖에 없다. 학교에 출근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이제 더 이상 볼 것도 별로 없는 이 섬에서 내일까지 도대체 무얼하며 지낼까 하는 걱정이 태산이다. 오전은 공소에 가보기로 하고 언덕위에 있는 공소를 찾으니 관리인이 무언가 짐을 들고 가고 있다. 내 또래쯤 되는 사람인데 서수면 출신이다. 공소는 그래도 몇몇 신도가 있어 운영된다고 하며 군인들은 참석자가 없다고 한다. 이분이 윗뜰에다가 닭을 키우기 시작하여 닭장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어 도와주며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우리 민박집에 든 어제 같이 온 낚시꾼 일행들이 고스톱을 치고 있어 구경하며 한나절을 보내다. 태안과 안성에서 오신 분들인데 회사에서 은퇴한 근로자 분들로 여겨지고 50대가 두 명이고 60대가 둘인데 참 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연락을 취하여 이처럼 함께 바다낚시를 다닌다는데 경제적으로 그리 부유한 사람들은 아닌데도 생업을 제치고 여유를 부리는 모습은 그리 썩 좋은 모습은 아니다.
저녁에 밤낚시를 간다하여 구경하러가자 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따라나섰다가 해변 바위로 내려가기 시작하자마자 내 뒤에서 내게 후레쉬를 밝혀주던 60대분이 갑자기 고꾸라져 구르는 바람에 일행이 너무 놀라고 재빨리 철수하였다. 다행히 찰과상 정도여서 참으로 다행이다. 그래서 안전한 부두에서 하게 되었고 손바닥크기 정도 이상인 우럭들을 비롯한 수십 수의 고기를 낚게 되어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하였다. 바람이 약간 쌀쌀하여 나는 11시에 들어와 잠을 청하였다. 문병주 선생으로부터 저녁 6시쯤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는 전화를 받고 10시 반쯤에는 무주에 도착하여 행사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2009. 5. 13(수)
오늘은 탈출일이다. 어제 권이철 교무부장에게는 미리 연락하였지만 아침에 교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고는 오전에 낚시하는 분들이 방파제 옆 큰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양지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노는 데서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들어온 배에 오르다. 날씨는 청명하다. 집에 오니 4시다. 그 엣날의 영화는 어디로사라지고 이젠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모두들 떠나고 주민도 거의 없는 너무나 조용한 섬, 사리때라고는 하나 고깃배들도 거의 고기잡이 나가지 않고 정박해 있는 한가로운 섬, 그저 두 척의 군함과 훈련하는 해군들의 모습만이 보이는 쓸쓸한 섬이 되고 만 어청도다.
수십년 동안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려니 한 섬 어청도. 전라북도의 가장 동북지역인 무주에서 근무하는 내가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어청도에 방학아닌 휴일을 빌어 다녀왔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를 부여하고 싶고, 비록 작지만 그래도 무언가 한가지를 해낸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은 보람이 있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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