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2005.8.6-12)
프롤로그
해우회에서는 3년 전에 해외여행을 논의한 적이 있다. 당시 김호길 선생이 총무였는데 김 선생의 학부형으로 한미여행사를 경영하고 있는 이수남 사장과 두어 번 술까지 먹으면서 해외여행을 타진했으나 나는 250만원 정도를 들여 부부 단체 여행을 하느니보다는 적은 돈으로 답사를 하고 싶어 반대했고 재작년에 내가 총무를 맡으면서 월 3만원의 회비가 잘 적립되어 가고 있으니 이 돈을 모아 배편으로 백두산을 가자고 제안하였는데 이 제안이 통과되어 드디어 3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미 장춘-집안-백두산 -연길-북경을 답사한 바 있으나 이번 코스는 심양-백두산-연길-도문이어서 심양에 관심이 크고, 지난 답사 때 백두산 천지를 전혀 보질 못했기에 다시 가서 천지를 보고픈 마음도 있어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떠났다.
이번 여행에는 모두 18명이 참가하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석한-양순옥-이승원 가족
김호길-박숙경 가족
강거희-황영애 가족
김병근-최은희 가족
유정효-이동원-이경희-(이치수) 가족
정귀우-김혜진 가족
김종기-양회순 가족
유영상-박양덕 가족이다.
한미여행사 김부장
우리 승원이는 아직까지 해외여행 경험이 없어 매우 안타깝던 중에 여행을 함께하자는 부모의 제안에 흔쾌히 따르니 대단히 기쁜 일이다. 이제 지리와 국어를 담당하는 교사가 될 텐데 백두산 등정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꼬임을 잘 받아주었다.
제1일(8월 6일)
익산에서 6시에 출발하도록 되어있어 4시 반에 일어났다. 4박 7일의 여행인데 이틀은 배안에서, 이틀은 기차에서 자게 되고, 호텔에서 2박하는 꽤나 힘든 한여름 여행이니 고생을 각오하고 떠난다. 승원이는 8시에 집에서 출발하도록 하였다.
예정대로 인천 제1국제터미널에 10시에 도착하였다. 사랑하는 우리 승원이는 20분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어 만났다. 서울의 클럽 코인여행사에서 가이드가 나왔는데 꼭 여고생 같은데도 나이가 무려 24세요, 전문 가이드가 아닌 사무원이라 가이드 같지 않았고, 우리 익산의 잘생긴 김부장도 나중에 알고 보니 이수만 사장의 친구인데 해외여행 성수기라 사람이 없는 고로 부탁을 받고 심부름하기 위해 따라온 것이었다. 12시에 승선하였는데 배이름은 1만 2천톤의 자정향이며 우리는 1등실(4인 침대)에서 지내게 된다. 배는 1시에 출발하였다. 베이징 기준시는 우리보다 1시간 느리므로 시계를 12시에 맞추었다. 이제 밤을 세워 이 배는 영구항을 향해 달린다. 영구는 라오닝성의 항구로 라오뚱 반도의 좌측 안쪽에 위치한다. 내가 아직까지 압록강 서쪽의 요동과 요서를 직접 밟아보지 못하더니만 뜻밖에 가게 되니 너무 기쁜 일이다. 사실 나는 영구항이 단동(안동)부군의 작은 항구인줄 알았고 안봉선 열차를 타고 심양(봉천)으로 가게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고스돕을 치는데 나는 우리가 준비해간 오디주에 얼큰하여 잠이 들었다.
제2일(8월 7일)
오후 3시에 영구항에 도착하였다. 무려 27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니 고대인들의 항해술을 생각하면 그저 감탄뿐이다. 현지 가이드인 36세로 자칭 교사라는 김혜란씨가 합류하고 우리 일행은 버스로 갈아타고 심양으로 달린다. 전체 일행은 버스 2대에 50여명이 되었다. 우리 제1버스에는 익산팀 19명에 어르신 4명(70대)과 일가족 4명하여 모두 27명에 김혜란씨 까지 28명이요, 제 2버스도 그 정도 되는 듯하다. 영구를 벗어나니 심양(센양)-대련(따렌)간 고속도로가 훤하다. 약 350km이니 서울 목포간 정도나 되는 듯싶다. 라오닝성 면적이 대한민국정도 되고 인구는 4천만이라 하니 또 한번 중국의 광대함을 느끼다.
6시에 심양에 도착하여 열차로 갈아타고 6시 30분에 출발한다. 이 기차는 심양에서 출발하여 장춘과 길림시를 거쳐 도문까지 가는 특별열차라 한다.
제3일(8월 8일)
4시 20분에 잠이 깨었는데 밖을 보니 이미 날이 새었다. 그래! 이곳은 우리나라와 경도는 같은데 시간은 1시간 늦으니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이미 5시 20분이라 밝을 수밖에! 5시경에 돈화시를 지난다. 통화인가 의심이 나서 옆에 있는 중국인에게 글로 물으니 이곳은 돈화이고 통화와는 다르다고 알려준다. 그래 지도를 찾아보니 통화는 이미 가 본 바 있는 집안시 위쪽에 있는 상당히 큰 도시이고 돈화는 길림 못미처 있는 도시이다. 6시에는 안도시를 지나는데 의왕시 초등학교 보이스카웃 큰 떼거리가 우르르 내린다. 백두산은 연길에서 보다 이곳에서 더 가깝고 이들은 우리와 코스가 다른 모양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모두 2개의 현과 6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린성에 속해 있다. 두개의 시는 연길시와 도문시이며 그중 연길시가 주의 수도이며 조선족은 150여만 명으로 전제 인구의 30%가 넘는다고 한다.
심양을 떠날 때의 산 모습은 온통 민둥산으로 나무숲을 보지 못하더니 우리 자치주로 들어서서는 산에 숲이 나타나고 연길에 가까워지면서부터 논들이 보인다. 지난번 여행때는 그저 연길시 주변의 논만 보다가 오늘은 심양부터 온 만주를 모두 일거에 보게 되니 간도와 다른 만주지방과의 자연과 농업의 차이점을 확실히 알겠다.
7시에 연길에 도착하다. 이곳에서 연길 현지 가이드가 인사를 하는데 이름은 이승철이라는 아주 똑똑한 27세의 청년이다. 이곳을 흐르는 강은 부르화 통화강이라 하는데 버드나무강이라는 뜻이라 한다. 식사를 마치고 8시 30분에 용정으로 출발하였다. 30분 만에 용정에 도착하여 해란강을 바라보며 일송정을 멀리서 보면서 대성중학교에 도착하였다. 3년 전의 여행 때 시간이 모자라 2층의 역사관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가이드를 혼내주고 팁 문제로 혼내주고는 한편으로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쉽게 잊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실컷 구경하게 된다. 우리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이곳에 자리한 용정중과 다른 4개의 학교들이 합쳐져서 대성중이 되었는데 윤동주와 문익환 선생 등이 다닌 유명한 학교이다. 버스는 백두산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 중국어를 배우다.
□니하오? 니하오마? (안녕하세요?)
□시에세 (감사합니다)
□짜이쩬 (안녕히 계십시요)
□츠 팔로마 (식사 하셨어요?)
□신 콜라 (수고하셨습니다)
12시에는 북한이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든 전시관에 도착하였다. 자수그림과 인삼 등 토산물을 판매하는데 아무도 사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들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물건들만 진열해 놓았으니 어찌 판매가 되리오? 외화벌이를 하려면 시대와 정서를 알고 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을 모르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3시 30분에 드디어 2,670m의 천문봉에 오르니 천지가 코앞이다. 예전에 구름밖에 보지 못하고 되돌아 왔던 터라 오늘은 산 아래에선 비가 비치고 구름이 보여 걱정하였더니만 올라보니 맑게 개어 마치 우리를 기다린 듯 하다. 감격에 사진도 많이 찌고 내려와서는 장백폭포로 향하였다. 오늘은 폭포 뒷산으로 시멘트 계단도로가 완성되었는데(지난번 왔을 때는 공사중이었다.)그 길로 천지를 직접 만지기 위해 올라갔다. 힘들었지만 양순옥도 기를 쓰고 잘도 간다. 계단수가 900개가 넘는다는 길을 올라보니 천지물이 눈앞에 보이며 폭포로 흐르는 물과 그 주변의 풀숲이 마치 영화에서 보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광경이다. 감동이다. 이곳이 철벽봉 뒤이며 차가운 천지물에 손을 씻고 양순옥은 춤을 추었다.
백산호텔에 묶게 되었는데 백두산 근처의 호텔들은 말이 호텔이지 장급 여관이다. 그래도 방은 깨끗하여 잘만 했는데 나는 천지에 오르느라 힘들어서인지 김호길 선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어 버렸다.
제 4일(8월 9일)
5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도문시에 가서 두만강을 보는 일정이다. 白頭山은 나도 미처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인데 글자 뜻 그대로 눈이 덮혀ꡐ머리가 흰 산ꡑ이라 한다. 중국인들은 長白山이라 부르는데 ꡐ오랫동안 흰 산ꡑ이라는 뜻이라 한다. 도문으로 가는 길에 진주가게에 들렀고 연길시에서 점심을 한 뒤 도문으로 향하다. 점심이 아주 좋아서 저녁식사도 이곳으로 정하였다.
圖們은 토문과 발음이 비슷하다. 백두산 정계비에 ꡐ西爲鴨綠 東爲土問ꡑ이라 하였기에 나는 한때 동쪽은 토문강이라는 의미는 곧 두만강을 뜻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두만강 이북지역이 바로 간도요, 만주족의 본거지였음을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결코 圖們이 土問과 같을 수 없고 200년을 비워둔 텅 빈 땅에 들어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우리 민족의 땅이라 주장함에 결코 부끄러움이 없고 만주족은 이미 간도와는 전혀 관련 없이 라오닝성 안산시 주변에 작은 자치현을 가지고 수 만 명이 살아가며 근근히 만주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장차 통일이 되면 백두산 문제와 간도문제가 중국과의 사이에 영토분쟁으로 비화할 소지가 있고, 그에 대비하여 중국은 만주사의 중국사 편입에 심혈을 기울이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두만강이다. 너무나 작은 강이려니와 푸른 물도 아니다. 오염이 되어서라는 가이드의 설명이지만 결코 그 이유만도 아니다. 만주지역의 거의 모든 강들의 색이 푸른색을 띠지 못하고 쇳물 색깔이다. 두만강은 흙탕물로 보인다. 대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북한 땅 가까이 다가가니 북한국 병사가 나와 ꡐ돈! 돈!ꡑ하며 애걸한다. 미처 준비하지 못하였기에(돌로 싸서 던져야만 땅에 닿을 수 있음) 주지 못하였는데 뱃사공이 다시 가까이 다가가 주었으나 이젠 병사가 나오지 않아 줄 수 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던져 버렸다면 나중에 주어 갈 터인데...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놓치고 그냥 북한 병사들이 안타깝고 북한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저런 북한인데도 오늘(15일) 서울에서는 광복 60주년 남북한 통일축제가 열리고 미군철수를 외치는 한총련 및 여타 사회단체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으니 정말 어수선한 나라이다. 통일을 정치에 이용하는 노무현 정부가 한심스럽다. 김일성이와 김정일이는 대를 이어 60년을 이용하고 있지마는 우리 노무현 정부도 革新으로 안되니 聯政을 내놓고 연정으로 안되면 統一祝祭로 정권을 유지하자는 양상인데 이 정권이 빨리 끝나고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으로 믿음직하고 안정적이며 또 미래지향적이며 경제를 살리면서 세계 최 일류국가를 만드는 실용적 정권과 위대한 지도자를 창출해 내야만 한다. 정말 2007년의 대선은 너무나 이 나라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결코 이 나라 이민족 내 인생에 있어 통일만이 살길이 아니요, 통일이 아니면 죽음도 아니요, 통일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통일은 무력이 아니고 평화적이며 북한이 궤멸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은 참 명제임에도 그저 노력하고 축제열고 마구 도와주면 곧 통일이 올 것처럼 떠들며 이용하는 이 정권과 통일지상주의 사회단체들과 한총련 아이들이 지겹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남북한 문제에 정치생명을 걸고 대권을 향하고 있는 듯 보여 답답하다.
간도라는 명칭은 이곳 도문의 앞인 온성시와 양주시 부근에서 1860년대에 귀양와 살고 있던 주민들이 3년 흉년을 견딜 수 없어 월경하면 참수하여 걸어놓는 무서운 법을 피해 두만강 사이에 생겨난 사이섬을 개간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대처 우리 민족이 간도지방을 개척한 시기와 일치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인 듯싶다.
연길에 오는 길에 곰 사육장을 방문하고 식사를 마친 뒤 6시에 심양행 열차에 오르다. 이번에는 1인당 1만원 2천원인가를 내고 4인실을 탔으며 밤에는 부부 뽀뽀 1분 타임 시간을 가지는 등 대단히 즐거웠으나 다른 손님들에게는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비쳤을 터이라 죄송한 일이었다.
제 5일(8월 10일)
6시에 심양역에 도착하다. 이곳 가이드로 우리 1호차에는 26살의 강영씨가 안내를 맡았다. 7시에 한국인 타운이 형성된 서탑거리에 있는 한식당 〈희래원〉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된장찌개에 김치가 반찬인 싸디 산 음식으로 그저 그렇다. 8시에 중산공원에 들렀는데 손문 선생을 기념하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8시 30분에 新樂新石器遺蹟 博物館과 遺蹟址를 찾았다. 이곳 마을이름이 신락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움집과 그 안에서의 생활모습을 아주 잘 공부가 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는데 관리는 조금 허술한 편이다. 심양시는 이 유적을 대단히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듯 이시대인들을 ꡐ태양족ꡑ이라 부르고 시청모양도 이를 상징하여 디자인 되었음을 보았다. 10시에는 심양고궁에 갔다. 누르하치는 조상이 간도지역에 살다가 심양지역으로 이주한 뒤 무순지역에서 태어나서 1616년에 후금을 세운다. 그는 1626년에 죽었는데 그 아들이 청태종이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우리를 괴롭힌 자다. 그가 1643년에 죽고 아들인 순치제 세조가 1644년에는 명을 완전히 평정하고 자금성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30여 년간의 궁성이다. 실로 심양에 오기 전까지는 이곳에 이런 궁성이 있는지도, 30년간 심양이 후금의 중심이었는지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왜 베이징에 가지 않고 심양에 살았는지도, 세자비 강씨가 어찌 하여 심양에서 개척사업을 벌여 교민 구제사업을 벌일수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수가 없더니만 이제야 궁금증이 확 풀리니 참으로 큰 공부가 되었다. 2만평정도의 궁성인데 아기자기하고 실용적으로 잘 지어진 훌륭한 고궁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2시에 북한식당 〈평양 모란관〉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음식이 깔끔하고 아주 맛이 그만이다. 평양냉면도 시켜 맛을 보았는데 한 그릇에 1,500원이련만 나쁜 가이드들이 냉면값이 7천원이라 속여 순진한 이치수 가족과 2호차 손님들에게 폭리를 취하여 가이드 불신문제가 생겼다. 이후 참깨와 잣도 5킬로그램에 1만원하는 것을 1만 8천원에 팔아 불신이 컸으며 클럽코인에 알려 조치를 취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동포 여행객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행동이 도를 넘어 예의도 인간성도 상실하고 아주 돈에 미쳐버린 여자들 같았지만 참으로 연민의 정도 들기도 한다. 우리는 아무 물건도 사지 않기에 피해가 없지만 일행들의 분노는 이해가 간다.
오후 3시에 안산시에 도착하였다. 안산시는 라오닝성 제 3의 도시로 인구가 수백만이다. 玉佛苑이라는 절에 갔다. 대단히 크고 아름다운 옥돌이 만주족 자치현에서 1960년에 발견되어 1994년부터 이곳에서 불상조각을 시작하며 이절이 지어지게 되었고, 아직도 절은 확장중이었다. 최근에 지은 사원이지만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절이 만들어지고 있다.
4시 30분에는 탕강자 온천에 가다. 이곳은 황제가 다니던 온천이라 하며 5천원을 주고 때도 밀어 보았다. 7시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식당인〈한국관〉에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중국환구대주점〉이라는 4성급 호텔에 들은 뒤 강거희 선생방에서 맥주파티를 열었다.
제6일(8월 11일)
이제는 출발이다. 아침밥을 뷔페로 먹는다더니(식권도 받았음)식당이 오늘은 운영되지 않는다며 5위안짜리 도시락을 준다. 기가 막힌 일이다. 뷔페식사비는 26위안이라서 물값 포함 6위안을 공제하고 1인당 20위안씩을 환불받았는데 2호차는 어른들이 그만두라며 환불받지 않아 가이드 수입이 되어버렸다니 가이드들 소행이 엽기적이다.
영구에 도착하여 11시에 자정향에 승선하여 올 때의 그 방에 다시들 숙소를 정했다. 배는 12시에 출발하다.( 우리시간 1시)
제7일(8월 12일)
인천에 3시 30분에 도착하다. 4시에 버스가 출발하여 익산에 7시 30분에 도착하여 삼겹살로 식사를 마치고 전주팀이 떠나니 6박7일의 긴 여정이 끝난다.
에필로그
네 번째의 중국여행이다. 지난번에 길림성과 고구려유적을 답사하는 일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라오닝성과 심양을 공부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역사교사로서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음에 만족하며 이글을 마친다.
'즐거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안문화탐방(2005) (0) | 2009.09.01 |
---|---|
서천·보령·부여 여행(2005) (0) | 2009.09.01 |
가야의 향기 창녕을 찾아 (0) | 2009.09.01 |
관동유람기(2009년 8월) (0) | 2009.09.01 |
백록담과 천황봉(2009.6.9-12) (0) | 200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