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가야의 향기 창녕을 찾아

청담(靑潭) 2009. 9. 1. 16:31

이글은 1995년경 마한향토사학회에서 창녕지역 답사를 가게되어 미리 조사해 보고 정리한  내용이다.

 

1. 신라진흥왕척경비


지정번호 : 국보 제33호


지정년월일 : 1962.12.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시 대 : 삼국시대 (진흥왕 22년:561년)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


은 1914년 2월 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 교장 교본랑장에 의해서였다. 그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


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


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이나 대석


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기 비문의 통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면을 간 다음 외연에 비석의 형상


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우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있다.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아 말행은 3자 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우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


은 순수의 년시, 사적, 수가인물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열기는 속부.인명.직관.직위를 표


기하여 삼국시대 신라 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자경 4cm이다. 앞부


분이 마멸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한반도에 전하는 비석으로는 최고의 것이다.




2. 술정리동3층석탑




지정번호 : 국보 제34호


지정년월일 : 1962.12.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이 탑(塔)은 원래 노변(路邊)에 있었고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의 일부가 들어


가 있었으나, 1965年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하여 정화 보존 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해서 수리하였다. 이때 3층 탑신상면(塔身上面)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향로


향용기(靑銅香爐形容器), 황색(黃色)유리제(製), 사리병(舍利甁), 사리(舍利) 7립(粒), 향편(香


片), 유리소주(小珠)등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본탑(本塔)을 동탑(東塔)


이라 함은, 한 사찰내(寺域內)에 쌍탑(雙塔)이 건립(建立)된 때문이 아니라 술정리(述亭里)에


2기(基)의 석탑(石塔)이 유존(遺存)하는 고로 붙여진 명칭이며, 서(西) 삼층석탑(三層石塔)은


본탑(本塔)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중기단(二重基壇)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基壇)은 이중(二重) 4개의 면석(面石과 4개의 갑석(甲石)으로 조립되었고, 상하(上下)


기단(基壇)의 면석(面石)에는 모두 탱주(撑柱) 2주식(柱式)이 각출(刻出) 되었다. 탑신부(塔身


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石)이며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각층 5단이고


상륜부(相輪部)는 전실(全失) 되었다. 세부 양식에서 신라 석탑의 통식(通式)을 따르고 작풍


(作風)에 있어 장중명쾌(莊重明快)한 기풍이 있는 석탑이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


(各部)의 수법도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불국사(佛國寺) 삼


층석탑(三層石塔)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그 제작 또한 그와 멀지 않은 시기로 추정된다.




3. 술정리서3층석탑




지정번호 : 보물 제520호


지정년월일 : 1970. 6.24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309-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신라식 일반형석탑으로 2중기단 위에 세운 3층석탑이다. 상층기단 면석 중앙은 별석으로 문


비가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양우주가 조각되고 옥개받침은 5단이다. 상층기단의 각 면석의


조각은 곡선의 아름다운 안상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보주가 남아 있다. 기단은


8개의 면석으로 조립되고 각주는 4매씩 되었으며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1석이다.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술정리 동 3층석탑보다 떨어지며 시대 역시 떨어진다.






4. 창녕석빙고


지정번호 : 보물 제310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시 대 : 조선시대




건조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믿을만한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다만


조선조 시대에 중수하였다고만 보는 빙고이다. 이는 구조양식의 측면과 장빙의 풍이 그 당


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이다. 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


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


축되었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시설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 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정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정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벽은 잡


석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이 되게 표면을 치석하였다. 이러한 구조양식은 석빙고의 전형


적인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이 석빙고가 약간 작을 뿐이다. "崇


禎紀元後再壬戌 二月初一日如四月初十日畢"이란 각자가 보이고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있다.



5. 탑금당치성문기비

 


지정번호 : 보물 제227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294


시 대 : 통일신라(헌덕왕 2년: 810년)




일명 인양사비상이라고도 하는데, 인양사의 금당(金堂) 후편에 세워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


다. 이 일대는 전답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로 인정되는 문양의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


되고, 또 유명한 삼층석탑 2기가 여기서 500m떨어져 있어 당시에는 대가람이었던


것 같다. 비각안에 두부가 없는 전고 55cm가량의 비교적 좋은 작품으로 보이는 석조좌상 1


軀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지금 창녕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또 비도 한국전쟁때 피해를 입어


서쪽편에 총탄 흔적이 있고 북쪽편 비상에도 총탄 흔적이 뚜렸이 생겼다. 구부와 리수 대신


에 장방형의 대석과 옥개형의 개석을 얹은 이형의 비(碑)로 불사조성에 관하여 기록한 특수


한 비석이다.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있는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료사등의


조성 연대와 소요된 양식에 관하여 낱낱이 기재하였다. 앞면과 양측면은 비문(碑文)이 새겨


져 있고, 뒷면 전부에는 우아한 기법으로 승상이 양각되어 있다. 앞면의 비문(碑文)은 비제


(碑題)없이 10행으로 각(各) 행(行) 28자(字)를 자경(字經) 4cm의 육조본로 새겼다. 비문(碑


文)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6. 창녕송현동석불좌상


 

지정번호 : 보물 제75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이 불상은 커다란 암석을 이용해 조각된 마애불(磨崖佛)로 암벽을 이용했으나 통상의 평면


조각이 아니고 좌불(坐佛)의 돋을 새김이 두드러지며, 특히 암석 자체가 보주형(寶珠形)으로


생겨 자연 광배(光背)를 이루고 문양은 없다. 불상의 얼굴은 안으로 미소를 머금은 풍만한


모습이며,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1단의 선을 마련한 특징적 표현을 안고 있다. 수인


(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下體)에는 두발을 표현하


지 않았다. 우측만 걸친 법의(法衣)는 유려하게 표현 하였으며 전체적인 체구, 얼굴, 의문(衣


文)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과 같은 양식을 직접 모방했다. 그러나, 어깨가 당당한


데 비하여 다소 움츠렸고 체구가 옆으로 지나치게 벌어져서 힘이 없어 보이는게 흠이다.




7. 창녕송현동고분군


 

지정번호 : 사적 제 81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2일대


시 대 : 가야시대




목마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교동고분군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수십여기가 2개의 고분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기슭의 것이 송현동 고분군이고,


도야리로 통하는 도로 아래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교동고분군이다. 표면상에 나타난 봉토는


대형분이고, 무덤의 형태와 구조는 교동고분군과는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추정 되어진다.


즉, 삼벽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여러개 놓은 뒤 막지 않은 벽을 통해 시체를 안


치하고 나머지 벽을 쌓아 막았다. 전체의 위로 흙을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고, 내부의 공간


은 장방형이 되게 한 가야시대무덤의 일반형으로 되어 있는 고분군이다.





8. 창녕교동고분군



지정번호 : 사적 제 80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129일대


시 대 : 가야시대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과는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를 사이


에 두고 서남쪽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이다. 이 고적군은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 가고 지금은 일부만 국내에 남


아 있다.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들은 횡구식(橫口式) 또는 횡혈식(橫穴式) 고


분이었다고 하며, 유물은 금봉관을 비롯하여 순금이식(純金耳飾) 등 각종 귀금속으로 된 장


신구와 동.철제의 무구, 토기 등 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일본인이 남긴 발굴 보


고서가 간단하여 교동 고분분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고분중 21기(基)는 지금까지 복원한 것인데 그중 1기(基)는 입구쪽을 개봉했다. 구


조는 현실(玄室)과 연도의 구별이 없고 다만 장방형(長方形)이 평면횡혈식(平面橫穴式)석실


로 삼면의 측벽은 크고 작은 돌덩이이고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덮은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개략적인 보고서가 출판되기는 하였으나 그 많은 유물들의 출토 경위와 유구(遺構)들의 특


징이 자세하게 밝혀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9.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지정번호 : 보물 제519호


지정년월일 : 1970. 6.24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시 대 : 통일신라, 고려






통일신라시대(하대석), 고려시대(상대석)약사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16개 꽃잎이 겹쳐진 부연


이 아름답게 새겨진 대좌위에 앉아 있는 여래좌상이다. 수인은 약사전인인데 약호는 없어진


듯하다. 상하대석의 솜씨가 달라 하대석은 우수하여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상대석


은 거칠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도 약간 조잡한 느낌이 있으나 고려대의 작품


으로는 가작으로 생각된다.






10.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지정번호 : 보물 제295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관룡사 서쪽의 봉우리인 용선대 마루에 동향(東向)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높은 대좌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좌상(坐像)


은,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직하며 얼굴은 4각형이지만 풍만하다. 목의 삼도(三道)


는 가슴까지 내려와서 형식화(形式化)를 지향하고 있다. 결가부좌한 모습에 통견의 법의는


몸에 밀착된 것이며, 몸은 통일초기처럼 당당하지는 못하나 통통하고 안정감을 주며, 특히


하체의 의문은 형식화되고 있고 광배는 결실되어 있다. 대좌의 상대는 반구형이며, 판내에


화문이 있는 종변 련화문이 앙련으로 조각되고 중대석은 8각이며 각 모서리에 주형이 있다.


이 불상 바로 앞에 대하석만 옛 모양 그대로 완전히 남아 있는 석등이 있는데, 등은 없다.




11. 관룡사 대웅전


 

지정번호 : 보물 제212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시 대 : 조선시대(광해군 9년:1617년)




이 건물은 1965년 해체.보수 공사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 태종 원년에 창건하여 임진


왜란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에 중창하였고, 그후 영조 25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관룡사 사적기에는 숙종 30년(1704) 가을의 대뢰우로 금당 부도가 유실되고 주


승 20여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후 38년(1712)에 이 대웅전과 기타 당옥은 재건한 것으


로 되어 있어 상량문과는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으나, 건물에 관한 한 상량문을 더 중시해


야 옳을 것 같다. 팔작지붕의 다포집계 건물로 비교적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


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뒷쪽에 치우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


게 했다. 고주(高柱)를 의지하여 불단을 설치했고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으며, 천정은 우물


천정이지만 중앙 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한 것이 좀 특이 하다. 出目은 내외 모두 2出


目으로 동일하고 그 상단에 살미첨차의 끝은 3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12. 관룡사 약사전




지정번호 : 보물 제146호


지정년월일 : 1963. 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시 대 : 조선초기 추정




신라(新羅)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年代)는 미상(未詳)으로 건축수법상(建築手法


上) 조선초기(朝鮮初期)로 추정되는 소불당(小佛堂)이다. 사적(事蹟)에 약사전(藥師殿)이 임


진왜란때 유일하게 소실(燒失)을 면했다고 기록된 점과 그 후의 산사태로 화를 입었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이다.




13. 관룡사 석장승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6호


지정년월일 : 1983. 8.12


소재지 :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


시 대 :




관룡사 입구에 좌우 마주보게 2주가 서 있는데, 일명 돌장승, 벅수라고도 하며 민속적인 어


떤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곳으로부터 관룡사의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의 구


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에 남녀상을 각각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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