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산동성 문화유적 답사기(2002)

청담(靑潭) 2009. 9. 1. 17:49

 

산동성 문화유적 답사기(2002)

 

 

 

 

프롤로그


  

  작년부터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의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에서 매달 학교에 월간지

 

를 보내오고 장보고 유적답사를 시행하였으나, 작년에는 연구학교니 장학지도니 하여 신청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금년에는 무침코 지원서를 냈더니만 행운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제2진 100명과 해양수산부 신임 사무관 10명, 관계자, 도합 118명이 5박 6일의 2002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답사를 다녀오게 되었다. 기실 나는 이번이 3번째의 중국여행이다. 1996


년도에 홍콩을, 작년 1월에는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및 게이린을 다녀왔다. 그러나 이번 여


행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그야말로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흔적과 산


동성 전반에 걸친 역사 탐방이기에 더욱 기쁘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첫째날-월요일(2002. 5. 13)

 


  양선생이 깜짝 놀라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5시 5분! 아니 이게 웬 일? 5학년이


되니 이젠 시간의 신이라던 靈力도 사라져? 이를 어쩌나? 기차는 5시 24분 출발인데... 아무


튼 일어나 눈만 씻고 이미 가지런히 챙겨져 있는 옷을 입었다. 바삐 서두르지는 않았으나


시계를 놓고 와서 양선생이 다시 올라가 시계를 가져오고 시동을 거니 시계는 5시 15분...근


데 이 바쁜 때 또 웬 안개인가? 양선생에게 서두르지 말라 이르면서 역전에 도착한 시각은


21분이다. 다행이 이른 시각이라 차가 많지 않고 신호가 깜박중이라 거의 막힘 없이 온 때


문이다. 온힘을 다해 플랫홈에 올라서서 한 쉼을 쉬고 나니 기차가 들어온다.


  수원에 8시 3분에 도착하여 터미널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인천에 10시 5분에 도착했다. 버


스에서 만난 전주교대출신의 후배님과 택시를 탔더니만, 이 기사가 제2 여객터미널을 모르


고는 제1여객 터미널에 내려 놓으려 하며 이곳이 중국가는 배를 타는 곳이라 우겨 경찰에게


물어 다시 되돌아 제2터미널에 도착하니 10시 32분이 되어 버렸다. 20분이나 시간을 낭비하


여 제 시간에 늦게 해놓고는 돈은 다 받으려 한다. 나쁜 사람이지만 여행 떠나는 기분을 망


치고 싶지 않아 화내지 않고 그냥 보내었다. 수속을 마치고 10시 40분에 배에 올랐으나 정


작 배는 2시에야 출발하였다. 배는 뉴 골든 브릿지 1호로 1만 6천톤 급이며 정원은 600명인


데 낡아서인지 소음이 크다. 나는 제6조이며 버스는 2호차에 배정되었다. 배의 룸메이트는


공주 정보고의 김진호선생, 강릉 강일여고의 신문주 선생, 함열중학교의 이혁선생이다. 나를


포함한 네명이 한조가 되어 답사를 하게 되었거니와 그중 김진호선생과는 호텔룸메이트가


되었다.


   배가 부두를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지하 선실에서 교수들의 강의가 있었다. 상당히 무덥고


좁은 강당에서 두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먼저 부산 외국어대 권덕영교수가 『장보고의 인물


과 업적』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장보고는 중국에서는 杜牧(803-852)에 의해 처음 소개되고


圓仁(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1960년대초 라이샤워교수에


의해 전세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래에 숭실대의 김문경 교수에 의해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인 정진술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특기할 내용은 고대의 항


해는 연안항해와 정 방향 항해이며 이는 나침반이 없었기 때문이며 해난사고의 두려움 때문


에 연안항해가 주류이라는 것과, 성종실록에 의하면 고군산군도에는 ‘왕릉 버금가는 대총


이 있고 그 안에서는 금은보화가 나왔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대의 해상세력의 주둔지로


보여진다는 설명이었다. 천인봉 사무처장과 코인여행사의 양천삼 사장의 중국여행에 대한


상식을 들은 뒤 기나긴 항해가 시작되었다.




둘째날-화요일(2002. 5. 14)


 

  아침 9시에 청도에 도착한다. 시차 1시간을 계산하면 정확히 20시간이 걸린 것이다. 실제


로는 10여 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청도는 중국어로 칭다오


이다. 산둥성은 면적은 15만 km²이니. 대한민국의 1.5배요, 인구는 9천만이니 대한민국의


두배이다. 이런 산둥성을 지금 우리는 그저 어느 한 지방을 돌아보러 가는 느낌으로 가고


있으니 과연 중국이란 얼마나 큰 나라이며,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커지고 있는 것인


가? 경상도나 강원도를 버스로 여행간다 하면 얼마나 언짢아들 하는지를 생각하면...


  靑島는 산둥성 제2의 도시로 인구 200만이 넘는 대도시이다. 청도는 뻬이찡에서 직접 관할


하는 도시로 경관이 매우 수려한데 소나무, 플라타나스, 아카시아 등 植生이 과연 우리나라


와 다를 바가 없다. 아파트 단지. 호텔들, 깨끗한 거리, 이층버스, 잔디공원 등이 눈여겨 보


여진다. 노산(勞山)으로 차가 달려간다. 1시간 넘게 달려 勞山이 나오는데 제법 경치가 수


려하다. 우리의 성악산이나 북한산에는 비할수 없지만... 이곳에 대청관(大淸官)이라는 도교


사원에 온 것이다. 한나라 때부터의 전통이 있는 대표적인 道官으로 그 규모에 놀랐다. 여지


껏 말로만 가르치던 당나라에서 발달한 당시의 도교의 모습을 실제로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되돌아와 청도세계무역중심이라는 호텔에서 식사를 하다. 식당에서 다른 여행사 직원으로


따라온 우리 부안여상 졸업생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려니와 우리 졸업생이 당당히 사회활동


하는 모습이 너무 흐뭇하다. 이제 산둥의 서쪽 끝자락 태안으로 이동한다. 가는 중에 치박시


의 고속도로변에 있는 고차박물관에 들렀다. 고속도로 공사중에 발견된 춘추시대의 전차 10


량과 32마리의 말이 매장된 모습 그대로 보여진다. 말과 마차가 화석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이처럼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3천년전의 중국인들은 저처럼 큰 마차를 타고 달리며 또


싸우며 살아간 것이리라. 놀랍다.


   한달전에 출고된 최신형 관광버스는 또 달리기 시작한다. 30대 중반정도의 대단한 미남 기


사이다. 칭다오에서부터 7시간 반만에 태안에 도착하였다. 산동태산화교대하라는 호텔에서


뷔페식을 하고 방에 들어가니 11시다. 여행사 가이드는 태안시의 유일한 4스타 호텔이지만


너무 낡았다며 이해를 구했으나 그런대로 괜찮았다. 양로즈씨에게 도착보고한 시간은 우리


나라 시간으로 정확히 0시다.




셋째날-수요일(2002. 5. 15)


 

   태안은 중국문화의 발상지이며 인구가 500만이 넘는다 하나 도시의 경관은 봐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다. 건물이며, 도로며, 상점의 모습이 우리나라 60년대의 모습 그대로다. 새로운


신흥도시나 발전하는 모습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같은 나라라고 도저히 믿을 수 가 없는 것


이다.


  泰山에 오르다. 중국에서 옛부터 5대 명산을 五岳이라 했는데 그 중 東岳이 바로 태산이


요, 이 태산을 五岳之長이라하여 제일로 쳤다. 일찌기 나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께서 친구


들과 주연시에 ‘태산∼ ’하시며 시조를 부르시던 모습이 선연하거니와 우리 한국사람들에


겐 마냥 신비스럽고 실재로는 존재치 않는 실존 저편의 산으로만 여겨지던 바로 그 산에 오


르는 것이다. 두어 달 전에 한나라당 내분때 김덕룡, 홍사덕 두 사람이 바람 좀 쐬고 오겠다


고 다녀왔다던 그 태산에 나도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웬걸 비는 제법 내리고 바람마저


불어대니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못한다 한다. 할 수 없이 주차장에서 400계단을 올라가 케이


블카 정류장에서 사진 찍고 구름 덮인 태산만 바라보다 내려올 수밖에...


  산에서 내려와 태황묘에 갔다 예정엔 없었지만 태산에 못 오른 대신 잡힌 일정이라 한다.


大廟라고도 하는 이곳은 태산신을 모시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태산신을 인간으로 형상화하


여 신상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리스의 신상과 같다. 역대의 황제들이 이곳에 와서 태산신에


제를 올렸다 하며 그 규모가 대단하여 마치 궁궐에 온 듯하다. 청주의 화양동서원과 함께


백성의 원성을 샀던 만동묘가 잘 이해되지 못했더니만 이곳에서 廟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된 듯하다. 조별로 또는 개인별로 많이 흩어져 모이는 데 시간이 낭비되며 2시간이 소비


되어 11시 30분에야 제남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태안시를 벗어나는데 중학생들이 자전


거들을 타고 줄지어 달려간다. 벌서 하교하나 했더니 점심시간이 되어 집으로 식사하러 가


는 모습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공산국가임에도 가난한지라 학생들에게 급식도 못하나


싶고 집에 간들 얼마나 맛있는 밥이나 있으랴 싶어 안쓰럽다.


  濟南市는 산동성의 성도(省都)로 산동성 제1의 대도시이다. 청도에는 2층버스가 있더니만


이곳에는 전기버스가 아주 많이 다니고 있다. 가로수인 플라타나스 나무를 옆으로 길러 인


도위의 하늘을 덮은 것이 이색적이며 성도인 만큼 사범대학이며, 기술대학, 예술대학 등이


보인다. 점심을 만두정식으로 하게 됐는데 내가 아직도 만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물만


두만 10여가지가 나오는데 모두 먹을 만 하다. 양이 너무 많아 모두들 가짓수대로 먹어보지


도 못한다. 내가 음식 중 제일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바로 만두와 탕수육이며, 오직 중국음


식이라면 짜장면과 짬뽕과 우동과 볶은밥 먹는 것이 고작이요, 내가 원해서 기타 값비싼 중


국음식을 사먹는 일이란 거의 없다. 작년 중국여행시에도 호텔 부페를 제외하고는 중국음식


들이 거부감이 들 정도였는데 오늘에야 그 여행사들이 아주 값싼 음식점만 데리고 다닌 때


문이란 걸 깨닫게 된다. 이번 연수는 호텔식 아니면 최고급 식당에서만 먹게 되면서 결코


중극음식을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다. 아무튼 식사 맛있게 잘한다는 얘기다.


산동성 박물관에 가다. 규모는 작으나 이곳에서 공룡의 뼈와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그릇들


의 대단함과 신석기 시대의 홍도, 백도, 채도 등을 실제로 볼 수 있음에 매우 감사하다.


  제남시를 벗어나면서 黃河가 나온다. 황하! 그 얼마나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강 이름인지!


그러나 모두들 강의 규모에 실망들이 대단하다. 강의 폭은 넓으나 대부분 논밭이요, 실제로


흐르는 물의 양이나 강물의 폭은 만경강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작년에 비행기 위에서 바라


다 본 양쯔강의 위용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저 황하의 범람으로 기름진 옥토가 만


들어지고 위대한 황하문명은 태어난 것이리니 너무 왕따 놓지 말지어다. 시간 관계로 제대


로 사진도 찍지 못하고 차를 달려 치박(緇博)시 근처의 제경공순마갱( 薺景公殉馬坑)에 도


착하였다. 앞서의 고마차 박물관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 규모가 훨씬 크다. 이


묘는 춘추시대 제나라 제경공의 묘로 600여필의 순마갱인데 지금은 105필의 숫말을 전시하


고 있다. 지금부터 2500년전의 제후국의 왕의 무덤에 제물로 바쳐진 숫말들의 규모가 저러


함을 통해 그 시대 통치자의 권력과 사치의 극단을 보는 듯하다. 이곳 치박(緇博)시가 바로


제나라의 수도였다. 이곳에서 독특한 이 지방의 비닐하우스의 모습과 엄청난 채소재배의 모


습을 보며 이것들이 바로 우리나라에까지 값싸게 수입되는 농산물인가 생각되었다. 그리고


산동성 저 넢은 평원에 저토록 끝없이 자라고 있는 것은 바로 키 작은 밀임을 확인하였다.


이 밀재배가 끋나면 수수를 심거니와 장예모 감독의 붂은 수수밭의 배경이 된 곳도 바로 이


곳 산동성이라 한다. 치박시에 도착하여 시내에 있는 강태공 사당을 관람하였다. 우리는


〈강태공〉 하면 으레 낚시를 연상하고 만다. 강태공은 주의 무왕을 도와 은을 멸하고 주


(周)를 세우고, 곧 제후에 봉해졌는 데 바로 이곳 치박시가 강태공이 다스린 제후국 제 (薺)


나라의 수도인 것이다. 강태공의 像뒤로 세 벽면에 그려진 강태공의 일대기를 그린 벽화가


대단히 재미있고 아름답다. 이미 어두운 밤이었으나 숙박지인 유방시로 향하였다. 금성대주


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니 이미 11시 반이다. 집에 전화하고 잠이 들었다.




넷째날-목요일(2002. 5. 16)


 

  일어나 밖을 보니 유방시의 규모도 크려니와 도시가 정말 께끗하고 아름답다. 태안시, 제


남시, 치박시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더니만 이제 다시 칭다오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로


나오게 된 모양이다. 호텔도 아주 고급스러운데 관광도시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대단한 모습이었다. 유방시의 면적이 충청남북도 만 한데 인구는 800만이 넘으니 정말 중국


이란 나라는 생각할수록 대단할지어다.


  유방에서는 잠을 잤을 뿐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4시간을 달려 덩저우의 등주수성에 도착


하였다. 덩저우-얼마나 귀에 익은 이름이며 가보고 싶던 곳인지!


  수성이란 말은 우리에겐 자뭇 생소하다. 守城이 아닌 水城이다. 동해바닷가 덩저우를 지키는


성인데 대단히 웅장하다. 삼국지를 읽을 때 연상되는 그런 성이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


가니 덩저우시가 나온다. 항구도 성안에 있어 고깃배들이 즐비하다. 정말 운치가 그만이다.


항구의 이층식당에서 점심부터 먹고 답사를 시작하는데 비가 제법 내리고 바람까지 분다.


모두들 비옷을 사서 입었다. 나도 추워서 20위안(3200원)주고 하나 샀더니만 엉터리다. 금새


찢어져 버린다. 그런데 이 도시는 옛날의 그 덩저우가 아니라는 교수들의 설명이다. 이곳에


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이라 한다.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칠 때 수군을 파


견한 곳이요, 수·당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군을 발진시킨 곳도 바로 이곳이요, 732년 발


해의 장문휴가 수군으로 공격하여 자사인 위준을 죽인 곳도 바로 이 곳이다. 그리고 그 이


후 신라와 일본의 사신이나 견당사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다. 저쪽 멀리 봉래각이 보인


다. 한 무제가 이곳에 와서 신선산을 보려 했으나 찾지 못하자 경치가 좋은 이곳을 蓬萊라


명명하여 전하여 오고 있다 하는데, 이는 이곳에서부터 옌타이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중국


유일의 신기루 현상을 볼 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 싶다는 설명이다. 진시황도 이곳에


서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여겨 불로장생의 신비의 약을 구하고자 했으며, 이때 서복이란 자


가 장담했다가 실패하고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는 정교수의 설명이 있었다. 혼


자서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얼굴이 눈에 익은 사람이 문안으로 들어온다. 엉겁결에 인사부터


건네 놓고 보니 최인호 선생이다. 지금 중앙일보에 장보고의 일생을 그린 海神을 연재하고


있거니와 내년에는 TV를 통해 다큐멘터리 8부작과 연속극도 준비되고 있는데 그 작업 차


KBS 기자들과 2주일간 취재중이라 한다. 한 시간쯤 달리니 옌타이다. 우리가 흔히 연대라


고 부르는 곳. 그리고 나는 여지껏 덩저우인 줄만 알고 있었던 곳. 군산시와 자매결연을 맺


은 곳이 바로 이 도시이다. 이곳엔 한국인들이 상당히 살고 있어 한국인학교를 방문하였다.


작년에 개교한 학교로 교감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다. 현재 중국의 고등학생들들이 방학이


거의 없고 토,일요일에도 대부분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이라 하며 직업을 갖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이다.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하긴 지


금 우리의 모습은 그보다 더하지--시내를 벗어 나는데 역시 신흥도시답게 깨끗하고 교외엔


별장같은 고급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살만한 도시로 여겨진다. 연태시 교외에 있는 대우중


공업 현지 공장을 방문하였다. 대우는 망했지만 지게차, 포크레인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현


지 법인으로 작년에는 중국 최대 판매량을 과시하였다 한다.


  한시간을 동으로 더 이동하니 그 유명한 위해(웨이 하이)에 도착한다. 지난 90년 한중 수


교이후 한국으로 가려는 조선족 동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인구 4만의 소도시가 이젠 200


만의 대도시로 커져 버렸다. 지금도 600여명의 보따리 장사들이 떼를 지어 인천과 위해를


왕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다. 위해국제대하에서 자게 되었는데 호텔 정면의 네온


싸인이 너무 화려하다. 마지막 밤이라 생각되어 신선생과 빠에서 맥주를 마셨다. 청도맥주


큰병(4홉)에 20위안(현재 1위안은 162원)이니 원가는 4위안 정도일텐데 비싸다. 호텔이고 또


외국인들에게 비싸게 받는 줄은 알지만 말이다. 그러나 땅콩안주 제공하고 3200원이니 우


리나라 생맥주집에서 먹는것보다는 조금 싼거지.




다섯째날-금요일(2002. 5. 17)


 

  오늘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이요, 아침에 제일 먼저 답사하는 곳이 우리일행의 이번 답사


의 하이라이트인 법화원 방문이다. 저 유명한 적산 법화원. 20년 넘게 말로만 가르쳐온 법화


원이다. 한시간을 달리니 영성시 석도진 항이 나온다. 지나가면서 보니 배들이 아주 많이


정박해 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군함들 같다. 이 석도진이야말로 장보고의 대륙진출의


거점이요, 신라방, 신라소, 조선소, 선박수리소등이 있던 곳으로 신라인들이 살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시골 동네길로 들어서 조금 가니 바로 법화원이다. 이곳의 산 이름이 赤


山이다. 마을이 아주 아담하고 정감 있어 가히 살만한 마을로 보이는데 대부분의 가정집들


의 규모가 크고 꽤나 잘사는 듯 보이며 자가용이 있는 집도 보인다.


  법화원에 들어설 때는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로 10여미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아담하다. 1988년경 일본인들이 엔닌을 기려 이곳을 중요시하여 찾기


시작하고 한중수교이후 한국인들이 찾아오자 영성시가 다시 세웠다 한다. 이 절은 장보고가


완도와 이곳, 두 곳에 세웠는데 항해의 안녕과 장보고 해운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절이었으


나, 당 무종의 도교 장려와 불교탄압으로 4만 2천여 사원이 폐쇄될 때 없어지니 겨우 17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한다. 일본인 승려 옌닌은 이곳에서 2년 6개월 정도 지냈는데 입당구법순


례기에 이 절에 대해 아주 소상히 기록했거니와 돌아올 때 장보고 선단의 배를 타고 정오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에 신라의 땅을 보았다고 하니 도무지 믿기 힘들다. 대단한 항해술이


다. 우리는 대형 여객선으로 20여 시간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경내에서 다시 최인호 선생을


만나 기념사진도 찍었다. 『별들의 고향』은 이제 전설이요, 10여년 전 조선일보엔가『


잃어버린 왕국』을 연재하여 한일고대사에 대 충격을 주더니만 최근에는 TV연속극 『상


도』로 명성을 날리고 이젠 그 좋은 머리로 장보고 대사를 통한 한중 관계사를 시작했다.


어느 사학자들보다 엄청난 위력으로 일반 독자와 시청자들, 즉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산 역


사학자이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내년 봄에 방영되는 다큐멘터리 『장보고』는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라는 장담을 한다.


  절 앞의 산 정상에 장보고 기념탑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성신여대 최민자 교수가


1994년에 세웠다는데 김영삼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대형 기념탑이다. 처음 안내 책


자를 읽으면서 웬 공명심이요, 어설픈 애국심인가 하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 사


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 정도면 의미 있는 일인 듯 싶고 가치 있게 돈을 쓴 듯


싶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수억대의 돈이 들겠으나 이곳에서는 우리 돈으로 수천만원으로 해


결했을 듯 싶어 부럽기조차 하다. 차에 올라 가까운 영성시의 낮은 언덕에 자리 잡은 리강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중국의 동쪽 끝인 성산두(成山頭)로 향했다. 성산산맥의 최 동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진두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고대로부터 태양신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는 데 중국의 역대 황제들도 여러 차례 이곳을 시찰했다. 진시황은 두 번이나 순행했다.


  일설에는 진시황이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며 한 무제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고 소정방이 백


제를 칠 때 13만 대군을 이곳에서 출진시킨 역사적인 곳이다. 1984년 총서기 호요방이 이곳


에 큰 비를 세우고 명필로 글씨를 남겼는데 그 의미가 심상치 않다.


《이곳은 옛부터 신비스런 곳이다. 저 동쪽의 일본과 한국은 이미 크게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이곳의 현명한 사람들이 더욱 노력하여 우리도 저들처럼 잘사는 나라를 만들


어 보자》라는 내용이라 한다. 이곳을 방문했다는 진시황과 한 무제의 대형 인물상이 위용


을 자랑하기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위해로 돌아가 배에 오르게 된다. 선물을 살 기회가 없었기에 호텔 앞 백화점에서 40


분의 시간을 주었는데 선물들을 사느라 매우들 분주하다. 나는 해외여행에서 일체의 선물을


사지 않기로 한 스스로의 다짐을 되새겨 지키기로 했다. 다음 여행부터는 부모 자식이외에


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나려 하며,(이번은 개인여행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


었다)역시 선물은 없다. 살만한 물건도 없는데 쓸데없는 외화 낭비라는 생각이며 꼭 선물할


일이라면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게 나으니까...


  오는 배는 골든 브릿지 2호인데 2만6천 톤의 대형여객선으로 소음도 없고 옥상의 전망도 아


주 근사하며 선내의 시설도 훌륭하여 여행하기에 아무 불편도 없고 마치 건물안에 들어온


듯 하다. 보따리 장사들의 무례함은 남녀의 구별이 없다. 남자들이 있는 방문을 젊은 여자가


벌컥 열며 핸드폰을 충전시키고 또 가져가고 하는데 일반손님들을 매우 무시하는 태도이다.


가이드들이 절대 조심하라 함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오후 5시에 출발하였다. 아스라이 멀어


지는 저 아름다운 웨이하이시와 그 오른편 산 너머로 붉은 해가 지는 모습이 어우러진 아름


다움은 대단하였다. 강당에서 반성회가 있었고 최인호 선생과 김문경 교수도 참석하였다.




여섯째날-토요일(2002. 5. 18)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나 망망대해이다. 열 시가 넘어서야 섬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12시가


되어 항구에 들어갔다. 인천항의 갑문식 도크를 여러 선생들과 함께 자세히 과정을 보며 그


원리를 공부하였다. 오는 데에도 18시간이나 걸렸다. 친해진 6조의 세분들과 헤어져 고속버


스로 내려왔다. 오후 5시 30분에야 여행이 완전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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