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을 통해 보는 女性 12人
Ⅰ. 들어가는 말
장 상 이화여대 총장이 一人地下 萬人之上이라는 국무총리에 내정되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건마는 대한민국 건국이래 대통령은 차치 하고라도 무려 40명이 넘는 총리가 탄생하는 동안 여성이 총리 물망에 오른 일도 거의 없던 것으로 안다. 물론 대한민국의 여성이 그 동안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양성평등을 위한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회적 인식과 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낸 성과는 대단히 놀랍다고 본다. 재산상속의 평등이 확립되고, 호주제도의 개편논란 등이 부각되는가 하면, 승진에서의 불평등이 해소됨에 따라 각 군 사관학교 및 경찰대학의 입학, 여성 장군, 여성 경찰서장, 여성 시장, 여성 세무서장이 탄생하고, 신세대들의 가사분담 및 각자의 재산관리 등에서 21세기를 열면서 최근 10여 년 동안에 이루어지는 양성평등의 변화는 실로 대단하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란 다양성을 가지고 있어 이슬람의 여성들은 지금도 직장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가 하면, 아직도 일부다처제의 악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여성의 자유 연애도 불허되어 그 가족에 의해 처벌되는 경우도 종종 보도되곤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보다 더 유교적이라야 할 중국은 50년의 사회주의 경영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면에서 남녀 평등이 서구 이상으로 실현되고 오히려 여성의 사회활동이 남성보다 왕성하고 남성은 가사를 맡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근대까지만 해도 서양 역시 전적으로 남성위주의 사회였음은 우리와 다름 아니다. 19C에 영국에서 모든 성인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고 20C 들어 1928년에야 영국에서 비로소 완전한 남녀평등의 선거법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양은 짧은 기간에 영국의 대처 수상, 미국의 울브라이트 국무장관, 아일랜드와 핀란드에서의 여성대통령의 탄생, 그리고 같은 아시아에서도 스리랑카,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대통령과 수상이 탄생하였음에도 우리나라는 정치적 실권은 전혀 없이, 단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어 내각 통할권만 가지는 국무총리에 이제야 여성이 임명된 것은 너무 뒤늦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에 일개 국무총리에 비할 바 아닌 국가와 민족의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이나 족적을 남긴 여성은 많다. 명성왕후, 유관순, 김활란, 임영신, 박순천, 이태영 박사 등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다 하겠다. 우리가 근대 및 현대사의 인물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근대 이전의 역사에 등장했던 주목할만한 여성들에 대하여는 사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정난정이나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논개, 황진이, 혜경궁 홍씨, 기타 신사임당등을 제외하면 잘 알기가 쉽지 않다. 세계사적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C 당의 측천무후와 8C의 양귀비, 15C 프랑스의 잔 다르크,16c의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 18C 신성로마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19C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등이 널리 유명한데, 우리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던 여성들을 찾아 새롭게 조명하여 보는 것은 나름대로의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마침 이 글을 준비하는 중에 조선일보에 여인열전이 연재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이미 조선일보에 실린 인물을 중심으로 우리역사에 족적을 남겼거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할만한 여성들을 모아 소개하고자 한다.
Ⅱ. 한국의 여성(고대~근세)
1. 고구려․백제를 세운 소서노 (召西奴) - 기원전 1세기
우리 역사에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라를 창업한 위대한 여성이 있다.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성이다. 2000여 년 전 동부여왕 금와의 보호를 받던 유화부인의 아들 주몽은 왕자들의 위협을 피해 졸본(오늘날의 환인)으로 건너간다. 이곳에는 졸본부여(일명 구려국)가 있었다. 졸본지방의 유력자인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는 남편 우태가 사망하고 두 아들 비류․온조 만 둔 29세의 과부로 임신한 부인 예씨를 두고 망명해온 21세의 주몽과 결혼한다. 주몽은 해씨 성을 버리고 고씨 성을 취한다. 그녀는 주몽을 내세워 졸본의 토착세력들을 통합해 나갔다.
처음에 졸본의 토착세력들은 주몽을 무시했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스물 한 살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세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기는 불가능했다.ꡐ삼국사기ꡑ 백제건국기사에 ꡒ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대(厚待)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ꡓ라는 기록은 여성에게 인색한 ꡐ삼국사기ꡑ로서는 이례적이다. 그 만큼 고구려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예씨 소생인 친아들 유리가 찾아오면서 권력 쟁탈전이 벌어진다. 패한 소서노는 두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이들은 기원전 18년 하남 위례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뒤에 백제(百濟)가 된다. 이때 왕이 된 온조와 바닷가를 고집하다 실패한 형 비류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소서노는 분개하여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고 온조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에게 패하고 전투중에 전사한다. 이때 나이가 61세라 하며 미추홀(오늘날의 인천)에 머무르고 있던 비류는 소서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달려온다. 그리고 자신이 소서노를 말리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 속에서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희미하게 부각되지만, 소서노의 역사적 위치와 중요성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 금관가야의 왕비 허 왕후 - 1세기
인도 아유타국의 열 여섯 살짜리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부모님의 꿈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이 동시에 같은 꿈을 꿨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더 놀란 것은 꿈의 내용 때문이었다.
ꡒ어젯밤 꿈에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ꡐ가락국(금관가야)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ꡑ고 말씀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니 거역할 수가 없다."
그녀에게 이역만리 머나먼 가락국으로 출가하라는 얘기였다. 허황옥은 아유타국과 가야 사이 동맹관계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수많은 보물들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기 집단과 토착세력을 화학적으로 융합시켰다. 허황옥은 서기 42년에 건국된 가락국(김해의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혼인한다.
조선시대 문적인 ꡐ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ꡑ(金官古事及許性齊文集)은 허왕후가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ꡐ장자 거등은 태자에 봉해졌고, 차자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됐다ꡑ고 전한다. 어머니의 성을 따른 성씨는 김해 허씨와 여기서 갈라진 양천 허씨, 태인 허씨, 인천 이씨 등이다. 이들은 아직도 수로왕이 시조인 김해 김씨와 통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장남은 수로왕을 따라 김해 김씨가 되고, 차남은 자신을 따라 김해 허씨가 되게 했던 것이니, 이들은 현대판 평등부부의 선구자인 셈이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김병모 총장은 허 왕후 일행이 인도의 아요디아 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 사천성의 보주 일대에 머무르다가 서기 47년 한 조정에 저항하다 강제로 추방당하자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오늘날의 상하이에 이르렀으며 서기 48년경 해류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는데 아주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1세기경에는 중국에서조차 인도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기이므로 인도의 아유타국과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는 불가능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3. 희대미문(稀代未聞)의 남성 정복자 미실 -6세기
신라왕실은 근친 결혼이 보편적이었다. 예를 들면 갈문왕 김입종은 법흥왕의 아우인데 형인 법흥왕의 맏딸인 지소태후와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았다. 또한 그의 첩에게서 낳은 딸인 만호는 이복 오라비인 진흥왕의 아들인 조카 동륜태자와 혼인하며, 남편이 죽자 또 다른 이복 오라비인 숙흘종과 사통하여 만명을 낳으며 이 만명이 김유신의 아버지인 서현과 애정행각을 벌여 김유신을 낳는다. 그런가 하면 법흥왕은 김입종이 죽자 혼자된 딸을 염려하여 딸에게 박영실을 둘째 남편으로 삼게 하였다. 신라 왕실의 혼인풍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진흥왕의 첫부인은 사도부인인데 바로 박영실의 딸이다. 지소태후는 박영실과 그 딸인 며느리 사도를 몹씨 싫어하여 큰 화근이 된다.
진흥왕(재위540-576) 중기부터 진지왕(재위576-579)과 진평왕(재위579-632) 초기까지 약 40여년의 신라는 미실에 의해 좌우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세 풍월주 미진부가 법흥왕의 후궁인 묘도와 몰래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지소태후와 박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에게 시집간다.
●박영실과 인척관계로 지소태후에 의해 쫒겨 난다.
●유명한 화랑 사다함과 사통한다.
●미실을 그리는 세종을 위해 다시 궁중에 불려지고 정부인이 된 융명을 밀어내고 다시 정 부인이 된다.
●사도태후에 의해 진흥왕의 큰아들 동륜태자(남편인 세종의 조카)와 사통한다.
●진흥왕을 섬기다.
●풍월주를 없애고 원화가 된다.
●화랑인 설원랑(미생의 친구)과 친동생인 미생과 정을 통하다.
●진흥왕의 둘째아들 금륜(후일 진지왕)과 정을 통하다.
●동륜의 아들 진평왕(당시 13세)과 관계를 맺다.
설원랑이 죽자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지내며 ꡒ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다ꡓ라며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4. 김춘추와 결혼한 문희 - 7세기
김유신의 동생이자 무열왕 김춘추(AD603-AD661)의 부인인 문희는 각간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둘째 딸이다. 서현은 대가야의 왕자 무력의 아들이고 만명은 진평왕의 어머니 만호태후가 남편 동륜이 죽자 이복 오라비인 갈문왕 입종의 아들 숙흘종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만호태후는 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서현이 가야계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지체가 낮은 진골이었기 때문이다. 서현은 만명부인을 데리고 만노군(萬弩郡․충북 진천)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어느날 김유신은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와 축구를 하다가 일부러 옷끈이 떨어지게 한 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문희와 김춘추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1년쯤 지나자 임신을 했다. 문희는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으니 이는 곧 신라 왕실의 핏줄과 가야계 군사력의 결합이기도 했다.
그 결과 김춘추는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 뒤를 이어 신라 29대 왕에 등극,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는다. 이 결혼은 훗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니 김춘추와 그녀의 자손들은 대대로 신라 왕실을 장악한 것이 그것이다. 즉, 태종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명의 왕을 중대(中代)라 하는데, 중대는 문희의 직계 자손들이었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계라는 말은 신라사회의 최고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5. 신라의 세 여왕
□선덕여왕(재위632-647)
진평왕의 세 딸 중 둘째인 덕만이 왕이 되니 선덕여왕이다. 첫째인 천명공주의 남편인 김용수가 진평왕의 4촌으로 왕위를 이을 대상이었으나 그가 폐왕(진지왕)의 자식이라 하여 화백회의를 거쳐 최초의 여왕이 된다. 용수의 아들이 김춘추요 용수가 죽자 천명이 시동생인 용춘에게 재가하여 훗날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이 된다. 당태종 이세민이 보내온 모란 그림과 꽃씨를 보내왔을 때 그림에 나비 없음을 지적하며 ꡐ남편 없이 혼자인 것을 조롱하였다ꡑ고 해석하였다. 어느 날 여왕에게 당나라 태종(太宗)이 진홍․자색․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다.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뜰에 심게 했다. 과연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아 여왕의 예언이 들어맞았고,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고 묻자, 여왕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하며, 그것은 배우자 없이 홀로 사는 자신을 업신여긴 비유라고 말했다.
그녀는 김용춘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두 명의 남편을 더 얻었다 한다. 김용춘은 선덕여왕의 남편이자 형사취수(兄死取搜)하여 언니인 천명까지도 아내로 삼았으며 이들은 모두 5촌 조카딸들이었다.
□ 진덕여왕(재위647-654)
선덕여왕의 4촌으로 왕이 되었다. 당에서 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직접 지은 《태평송》을 올려 외교관계의 강화를 꾀하였다
□ 오해 많은 진성여왕(재위887-897)
진성여왕은 정강왕의 누이로 신라의 세 번째 여왕에 올랐다. 신라가 진성여왕 때문에 망했다는 통설은 과연 맞는 것일까. 삼국사기 진성왕 조(條)에는ꡒ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魏弘)과 통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ꡓ 그러나 숙부인 위홍은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으나 즉위 다음해에 죽고 만다.
근래에 발견된 황룡사 탑지에서 황룡사 9층목탑의 중수책임자였던 위홍이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동생이라는 내용이 나오자 그녀는ꡐ역시ꡑ음녀였다며 그녀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시각이 맞음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는 신라 당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불륜이나 추행이 아니었다.
ꡐ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ꡑ는 ꡐ삼국사기ꡑ기록이나 ꡐ삼국유사ꡑꡐ왕력(王曆)ꡑ조의 ꡒ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大角干)이다ꡓ라는 기록은 둘 사이가 공인된 관계였음을 말해준다.
둘이 신라 사회의 성 윤리를 어기고 간통한 사이였다면 죽은 위홍을 ꡐ대왕ꡑ으로 추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ꡐ삼국사기ꡑ에 기록된 오빠 정강왕의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도 음녀와는 거리가 멀다.
ꡒ나는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경 등은 선덕․진덕여왕의 고사에 의거해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강왕이 진성여왕을 후사로 삼은 것은 위기타개를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다. 선덕․진덕여왕이 위기의 신라를 구해내고 신라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역할을 진성여왕에게서 기대했던 것이다. 이미 진성여왕 즉위 당시 신라는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진골 귀족 사이에 반란이 잇따랐다. 불과 20년 사이에 4번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강왕은 여왕을 세워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진성여왕은 정강왕의 믿음에 보답하듯 즉위하자마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그녀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애민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집행할 인재들이 없었다. 선덕․진덕을 보필했던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인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재위 3년(889년) 상주 지방에서 원종과 애노가 주도하는 난이 일어나자 진성여왕이 진압하라고 보낸 내마(柰麻) 영기(令奇)가 성을 장악한 반군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 반란의 계기가 ꡐ국내 여러 주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결핍되어 국왕이 사신을 파견해 납세를 독촉한 것ꡑ 때문이라는 ꡐ삼국사기ꡑ 기록은 이 무렵 신라의 국가시스템이 붕괴했음을 말해준다. 위홍은 그녀의 일급 참모였지만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황룡사 9층목탑을 중수하고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향가집 ꡐ삼대목ꡑ(三代目)을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인물이지 위기관리 인물은 아니었고 또 일찍 사망했다. 재위 5년 양길(梁吉)의 부장 궁예(弓裔)가 강릉지역을 공격하고, 재위 6년에는 견훤(甄萱:진훤)이 완산(完山: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녀가 던진 승부수가 최치원이었다. ꡐ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ꡑ으로 당나라에 문명을 떨친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년) 17년간의 채당(滯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세계제국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철학과 행정능력을 신라에서 발휘하고 싶었으나 진골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폐쇄적인 신라에서 중하위 지방관을 전전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런 최치원에게 진성여왕은 재위 8년(894년) 난국타개책을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최치원은 이에 따라 시무 11조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이를 즉시 가납하고 최치원을 6두품 중의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했다. 그러나 그의 시무책은 진골귀족들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이는 신라 개혁안의 좌절을 의미했다.
그 결과 재위 10년에는 빨간 바지를 입은 도적인 적고적(赤袴賊)이 지방은 물론 서라벌의 모량리까지 약탈하는 등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진성여왕은 이런 사태에 책임지고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재위 11년(897) 6월 ꡒ근년 이래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不德) 때문이다ꡓ라며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효공왕)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6대 혜공왕이래 국왕이 피살되거나 자결하는 등 신라 하대의 혼란은 오래되었어도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양위한 임금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왕위를 내놓고 북궁(北宮)에서 거주하다가 6개월도 안된 그 해 12월 세상을 떠난 데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책임정치 실현은 후대에 신라 망국의 책임에 대한 자인(自認)으로 악용됐다. 그러나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ꡐ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ꡑ에서 최치원은 ꡒ(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ꡓ고 적어 그녀를 성군으로 묘사했다.
6.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 14세기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가게 되어 원실의 궁녀가 된다. 목은 이색이 ꡒ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ꡓ고 말할 정도로 비참했던 시절이었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라면 황제 순제(1320~1370)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ꡐ원사(元史) 후비열전ꡑ이 ꡒ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ꡓ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황후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빠앤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ꡐ자정원당ꡑ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대 기근이 발생하고 홍건적이 일어났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ꡐ원사ꡑ는 순제가 ꡒ정사에 태만했다ꡓ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황제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베이징을 빼앗기고 고려의 제주도에 망명을 요청하였으나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북쪽 몽골초원으로 쫓겨가야만 하였다.
7. 성의 자유를 실천한 어우동 (?-1480)
조선시대는 남성들의 축첩을 허용하면서 여성이 이를 질투하면 쫓아내도 되었다.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에 순종하며 박제화된 삶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어우동은 달랐다. 조선초 성종시대(15세기), 승문원 지사(정3품) 박윤창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난 어우동은 집안이 부유했고 자색도 뛰어났다. 그녀는 종친 이동(李仝)과 혼인하였다. 그는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았다. 그는 남성의 주인이었다. 결혼 후 그녀의 첫 상대가 천한 신분의 은장이(銀匠)였던 점부터가 어우동의 삶이 지닌 혁명성을 예고한다. ꡐ용재총화ꡑ는 ꡒ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다가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음탕한 짓을 했다ꡓ라고 적고 있다. 친정으로 쫓겨난 어우동은 곧 여종과 길가의 집을 구해 독립했다. 어우동의 애욕 대상에는 전남편의 친척이기도 한 종친 이난도 들어 있었다. 이 난은 어우동의 자색도 자색이지만 한시를 종횡으로 짓기까지 하는 재능에 반해 어느 날 자신의 팔뚝에 이름을 새겨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이는 스스로 어우동의 소유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이난 뿐 아니었다. 종을 매매하는 일로 만난 전의감(典醫監)의 박강창과 길에서 만난 서리 감의향(甘義享)도 팔뚝과 등에다 이름을 새겨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 어우동과 여종은 길가의 집에서 오가는 남자를 점찍었는데, 여종이 ꡒ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또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서 가지실 만 합니다ꡓ라고 말하면 어우동은ꡒ아무개는 내가 맡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ꡓ며 남성들을 분배했다.
여성에게 큰 감옥일 뿐이었던 나라 조선에서 어우동은 아버지와 남편, 아들에게 속하지 않은 유일한 독립여성이자 남성들에 대한 선택권을 쥔 유일한 자유여성이었다. 사실 어우동의 이런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공간에 뛰어든 것은 그런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남성 사대부들이었다. 그것도 종친에서 공신 출신 벼슬아치까지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종친 이기(李驥)는 단옷날 그네 뛰는 어우동의 모습에 반해 남양군(南陽郡)의 경저(京邸)에서 정을 통한 후 어우동의 길가 집에 드나들었다. 적개․좌리공신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어유소(魚有沼)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祠堂)에서 어우동과 정을 통했다.
이런 사실들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사건이 한번 드러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종친과 공신, 그리고 벼슬아치들을 중심으로 관련된 사내만 20여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근엄한 종친․사대부들의 위선적인 애정행각이 드러나면서 조정은 섹스스캔들의 충격에 휩싸였다. 어우동이 이난, 이기와 함께 의금부에 구속된 가운데 수사가 확대되자 대부분의 남성들은 관계를 부인했다. 성종은 결국 어우동만을 음부(淫婦)로 몰아 ꡐ삼종지도ꡑ의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ꡐ대명률(大明律)ꡑ의ꡐ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ꡑ에 비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늦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그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와 통정했던 남성들은 성종 13년 8월 이난과 이기가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고 조선의 남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삼종지도를 가르쳤다. 1985년 이장호(李長鎬) 감독, 이보희(李甫姬)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참고
가.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어을우동(於乙宇同)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에 간통한 죄는, 율이 장 1백 대, 도(徒) 3년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은 속(贖)바치게 하고, 고신을 거두고서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7월 9일)
[義禁府啓: “方山守瀾、守山守驥, 於乙宇同, 爲泰江守妻時通奸罪, 律該杖一百、徒三年、告身盡行追奪。” 命贖杖, 收告身, 遠方付處]
나. 사헌부 대사헌 정괄(鄭佸)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은 생각건대, 어을우동이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고서 음란함을 자행하였으니, 명교(名敎)를 훼손하고 더럽힌 것이 막심합니다. 마땅히 사통한 자를 끝까지 추문하여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는데, 의금부에서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의 초사(招辭)에 의거하여 어유소(魚有沼)ㆍ노공필(盧公弼)ㆍ김세적(金世勣)ㆍ김칭(金偁)ㆍ김휘(金暉)ㆍ정숙지(鄭叔墀)를 국문하도록 청하였는데,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은 완전히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으시고, 김칭ㆍ김휘ㆍ정숙지 등은 다만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하였으니, 김칭 등이 스스로 죄가 중한 것을 아는데, 어찌 한 차례 형신하여 갑자기 그 실정을 말하겠습니까? 신 등이 의심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난(瀾)이 조정에 가득한 대소 조관 중에 반드시 이 여섯 사람을 말한 것이 한 가지 의심스럽고, 어유소ㆍ김휘 등의 통간한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니 두 가지 의심스럽고, 난이 이 두 사람에게 본래 혐의가 없고 또 교분도 없는데, 반드시 지적하여 말하니 세 가지 의심스럽고, 김칭ㆍ김휘ㆍ정숙지 등은 본래 음란하다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 네 가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만일 그들을 가볍게 용서하면 죄 있는 자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청컨대 끝까지 추문하여 그 죄를 바르게 하소서.”하였고, 사간원에서 또한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의 죄를 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8월 5일)
[司憲府大司憲鄭佸等上箚子曰:臣等以謂 ‘於乙宇同, 以士族婦女, 不辨貴賤, 不計親疏, 恣行淫亂, 毁汚名敎莫甚。’ 宜窮推所私者, 而痛治之, 禁府據方山守瀾招辭, 請鞫魚有沼、盧公弼、金世勣、金偁、金暉、鄭叔墀, 而有沼、公弼、世勣, 則全釋不問, 金偁、金暉、鄭叔墀等, 則只刑訊一次, 而釋之, 偁等, 自知罪重, 豈一次刑訊, 而遽輸其情乎? 臣等所疑者非一。 瀾於滿朝大小朝官, 必言此六人, 一可疑也; 有沼、金暉等通奸之狀, 言之甚明, 二可疑也; 瀾於此二人, 素無嫌隙, 又無交分, 而必斥言之, 三可疑也; 金偁、金暉、鄭叔墀等, 素有淫亂之名, 四可疑也。 今若輕赦之, 則有罪者何所懲乎? 請窮推, 以正其罪。司諫院亦請魚有沼、盧公弼、金世勣罪, 皆不聽]
다.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에게 시집가서 행실(行實)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絞於乙宇同。 於乙宇同, 乃承文院知事朴允昌之女也, 初嫁泰江守仝, 行頗不謹]
위에서 실록 기록을 살펴보았지만 어우동은 음행(淫行)이 문제가 되어, 결국에는 교형(絞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성종 시대에 활약한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당대에 겪었던 어우동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어우동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수(泰江守)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이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方山守)와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하였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어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보냄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권5)
[於宇同者知承文朴先生之女也。其家殷富。女婉孌有姿色。然性蕩放不檢。爲宗室泰江守之妻。泰江不能制嘗請工造銀器工年少俊丰。女悅之。每値夫出。衣婢服坐工側。贊美造器之精。遂得私引入內室。日縱淫穢。伺其夫還則潛遯。其夫審知事情遂棄之。女由是恣行無所忌。其女僕亦有姿。每乘昏靚服。出引美色少年。納于女主房。又引他少年與之偕宿。日以爲常。或於花朝月夕不勝情欲。二人遍行都市。故爲人所摟。其家不知所之。到曉乃還。嘗借路旁家。指點往來人。僕曰某人年少。某人鼻大。可供女主。女亦曰某人吾敢之。某人可給汝。如是戱謔無虛日。女又與宗室方山守私通。守亦年少豪逸。解作詩。女愛之。邀至其家如夫婦。一日守到其家。適女春遊不還。惟紫袖衫掛屛上。遂作詩書之曰。玉漏丁東夜氣淸。白雲高捲月分明。間房寂謐餘香在。可寫如今夢裏情。其他朝官儒生年少之無賴。無不邀而淫焉。朝延知而鞫之。或栲或貶。流遠方者數十人。其不露而免者亦多。禁府啓其罪。命議宰樞。皆云於法不應死。合竄遠方。上欲整風俗。竟置於刑。自獄而出。有女僕登車抱腰曰。女主勿失魂。若無此所事。安知復有大於此事者乎。聞者笑之。女雖穢行汚俗。而以良家女被極刑。道路有垂泣者]
8.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1563~1589)
여성․빈자의 아픔을 노래한 16세기 ꡐ저항시인ꡑ허난설헌(1563~1589). 동인(東人) 영수 허엽(許曄:1517~1580)의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8세에 ꡐ백옥루상량문ꡑ(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그녀는 오빠 허봉(許封)의 주선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웠다.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그러나 조혼 풍습에 따른 14세의 결혼은 불행한 미래에의 초대장이었다. 남편 김성립은 집을 떠나 과거공부에 전념했는데, 그런 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함께 과거공부를 하던 친구가 ꡒ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ꡓ는 말을 지어내자, 여종이 이를 난설헌에게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술과 안주를 마련해 ꡒ낭군께선 이렇게 다른 마음 없으신데 / 같이 공부하는 이는어떤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ꡓ라는 시와 함께 보냈다.
그러나 조선여성에게 호방한 기질은 불행의 씨앗일 뿐이었다. 그녀는 시를 통해 부부관계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됐다. ꡐ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ꡑ(寄其夫江含讀書)란 시에서 ꡒ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ꡓ라고 노래하고, 시 ꡐ연꽃을 따며ꡑ(采蓮曲)에선 ꡒ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 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얼굴 붉혔네ꡓ라고 남편에 대한 수줍은 애정을 노래했다. 그러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아붙이는 조선에서 여성의 모든 적극성은 비난받았다. 게다가 과거에 거듭 낙방한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은 이런 왜곡된 현실과 맞서기 위해 시를 무기로 선택했다.
난설헌은 ꡒ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 탄 그 꼴ꡓ이라는ꡐ색주가의 방탕한 사람에 대한 노래ꡑ(大堤曲)로 남편을 풍자했다.
ꡒ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ꡓ라고 읊은 시ꡐ한정(恨情)ꡑ은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 받은 그녀가 의지할 곳은 두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비극이 잇달았다.
ꡒ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 땅이여 / 두 무덤 마주보고 서 있구나ꡓꡐ곡자ꡑ(曲子)라는 시는 불행이 거듭되는 운명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녀는 시로써 조선의 사대부를 조롱하고 모순된 사회에 저항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억압과 빈자에 대한 불평등을 동일시하는 강한 개혁지향성을 드러냈다.
ꡒ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 고루(高樓)에선 노래 소리 울렸지만 / 가난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 /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ꡓꡐ감우ꡑ(感憂)란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질곡에 대한 분노였다.
ꡒ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 뉘 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 손으로 싹둑싹둑 가위질하면 /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ꡓ 시 ꡐ빈녀음ꡑ(貧女吟)은 노동자의 아픔을 노래하였다. 그녀가 남긴 시들이 동생인 허균에 의해 ꡐ난설헌집ꡑ(蘭雪軒集)으로 간행되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 출간되었다.
훗날 연암 박지원이 ꡐ열하일기ꡑ에서 ꡒ규중 부인으로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조선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ꡓ라고 말한 것처럼 사대(事大)의 나라 조선의 남성들은 명나라를 통해 역수입된 그녀의 명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됐다. 그녀가 남긴 시들은 여성 차별의 왕국 조선의 영역을 넘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한 그녀의 승리이기도 했다.
〔앙간비금도〕
9. 그리움을 노래한 지성인 기생 매창 (1573~1610)
성(姓) 이(李), 본명 향금(香今). 자 천향(天香), 호 매창(梅窓) ․ 계생(桂生) ․계랑(桂娘). 부안(扶安)의 명기로서 가사(歌詞) ․한시(漢詩) ․시조(時調) ․가무(歌舞)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 재 다능한 여류 예술인이었다.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등 70여 수 외에도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작품집인 《매창집(梅 窓集)》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1668년(현종 9)에 구전(口傳)하 여 오던 작자의 시 58수를 모아 판각(板刻)한 것이 있다.
명성이 전국에 퍼저서 많은 사대부들이 찾았으며, 현감을 지낸 이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있다. 허균과는 10여 년 간 친구로 사귀었는데 허균은 매창을 이렇게 그렸다.〈비록 얼굴은 뛰어나지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애기를 나눌 만 했다.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저녁이 되자 조카딸을 침실로 보내 주었다 〉이에서 보듯 그녀는 절개를 지켰으며 오직 스므 살에 만난 마흔 여덟의 촌은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유희경은 천민으로 상장례(喪葬禮)에 밝아 이미 유명하였고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였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보고 나서 이런 시를 남겼다
남국의 계량 이름 일찍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사 참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그러나 유희경은 임진란에 의병으로 출전하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매창은 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움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의 옷자락을 잡으니
그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내며 찢어 졌군요
저고리 하나 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주신 온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것이 두려워요
유희경은 난이 끝난 뒤 천민신분을 벗어났고 종2품 가의대부 벼슬을 받는다. 그러나 가정을 가진 양반이 된 그는 쉬이 매창을 찾지 못한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두 사람은 헤어진지 15년만에야 다시 만났다.
버들꽃 붉은 몸매도 잠시동안만 봄이라서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선녀인들 독수 공방 어이 참겠소
무산에 운우의 정 자주 내리세
외로운 산비둘기 물가로 돌아오고
날 저문 모래밭엔 안개까지 내리는데
술잔을 맞들고서 마음을 주고 받지만
날이 밝으면 이몸이야 하늘 끝에 가 있으리
둘은 다시 헤어지고 님은 서울로 돌아갔다. 매창은 님과 함께 다닌 곳들을 찾아 그리움을 달랬다. 그리고 3년만에 숨을 거두었다.
맑은 눈 하얀이에 푸른 눈썹 계랑아
홀연히 뜬구름 따라 너의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땅에 묻어주리
정미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10. 새시대의 개척자 소현세자빈 강씨 (?-1646)
소현세자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병자호란(1636)의 패전에 따른 인질로서였다. 대궐을 떠나 수 천리 나라 밖 심양까지 갔다. 인조 15년(1637년) 2월 서울을 떠난 강씨 일행이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지나 심양에 도착한 때는 4월이었다. 소현세자가 정치적 일에 몰두하는 동안 강씨는 심양관의 경제문제 해결이 자신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심양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행은 192명이었는데 이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였다. 당시 심양의 남탑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적은 ꡐ심양장계ꡑ 인조 15년 5월조는 속환가가 수백 또는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녀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인조 17년에 심양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00 냥을 보내 면포(綿布)․표범가죽(豹皮)․수달피(水獺皮)․꿀 등을 무역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청나라는 물품 부족에 시달렸다. 강씨는 청나라 지배층의 두둑한 지갑을 조선의 질 좋은 물품과 연결시키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면포․표범가죽뿐만 아니라 종이와 괴화(槐花) 등 약재와 생강도 좋은 무역품이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무역을 통해 경제에 눈을 뜨던 인조 19년(1641),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에서 농사짓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동남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촌(魯哥村) 두 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사하보(沙河堡) 근처의 150일 갈이와 사을고(士乙古) 근처의 150일 갈이를 농토로 제공했는데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였다. 강빈은 처음에는 한인(漢人)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한인들의 값은 은 25냥~30냥이었고 소 값은 한마리에 15냥~18냥이었다.ꡐ심양장계ꡑ에 따르면 인조 20년에 농사로 거둔 곡식은 3319석이나 됐다. 강빈은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 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 농군들이 더욱 열심히 일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덕에 수확물은 더욱 많아졌다. 강씨는 조선의 농법이 가미된 이 농산물을 만주 귀족들에게 팔았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강빈의 경영수완 덕에 인질 생활 초기 울며 호소하는 조선인들로 가득 찼던 심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ꡐ인조실록ꡑ 23년 6월조는 ꡒ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ꡓ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인질 생활에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제 이들 부부가 귀국해서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되면 조선은 변화할 것이었다.그러나 인조는 이런 강빈과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그는 강씨가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한 후 소현세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 23년(1645) 2월 9년 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다. 이때 심양관에는 4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수완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 달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인조는 재위 24년 3월 강빈을 폐출해 친정으로 쫓아냈다.
ꡐ인조실록ꡑ은 ꡒ강빈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ꡓ고 적고 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일로 사약을 내려 강빈을 죽였다. 당시 사관이 ꡒ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ꡓ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실용주의적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그녀가 만들려던 개방의 나라, 실용의 나라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 조선은 여전히 유학과 중농주의만을 고집하며 실학자들의 중상주의는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하였고, 청에 대한 멸시와 숭명사상은 고수되었다.
Ⅲ. 마치는 말
바야흐로 21C는 여성의 시대라고 예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리적 힘을 내세운 남성중심의 역사가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가정과 국가운영의 결정권은 항상 남성에게 주어져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나 엘리자베드 여왕 같은 위대한 여성들이 존재했으나 한시적이거나 지역적으로 부분적이었다. 20C들어 서구에서 자유주의의 발전에 힘입어 여성들의 자유와 권리가 신장되어 선거권이 주어지는 등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법적인 면에서 남녀 동등의 권리가 주어지고 여성들의 정치․사회적 진출과 활동은 두드러졌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1960년대부터의 경제발전에 따라 여성의 진학률의 급상승과 직업을 통한 사회적 진출로 말미암아 이제 남녀가 함께 이끌어 가는 사회로 변모되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들의 종중 재산의 상속을 위한 법정투쟁에 이어 여성들만의 종중이 조직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나타난 이혼율의 증가로 인한 가족해체 현상, 모든 면에서의 양성동등화의 추구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 등 부작용도 없지 않으나 시대적 변화요구에 따른 거부할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5천년의 우리 역사에서 앞에서 소개된 10명의 여성들 외에도 시대를 초월하여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그 능력을 크게 발휘하거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굳굳이 살아간 수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움직여 가는 지구촌의 모습은 이제 여성권의 신장이라는 움직임속에 여성의 역할은 한층 증대되고 이제까지의 남성중심에서 남녀 동등의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는 전개될 것으로 본다.
※참고문헌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 왕조실록(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 왕조실록(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신라 왕조실록(박영규)
◇이야기 가야사(김정복, 이희근)
◇한권으로 읽는 고려 왕조실록(박영규)
◇조선왕조실록(CD)
◇조선일보《여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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