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현황 및 전망

청담(靑潭) 2009. 9. 1. 20:46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현황 및 전망















                   일시 : 2004. 10. 1(금)

                   연수자 : 이석한







전 주 제 일 고 등 학 교




1. 東北工程 프로젝트의 의미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는 중국 국경 안에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역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의 시작이다. 고구려사를 비롯하여 고조선사, 발해사를 자의적으로 해석, 한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고 중국의 변방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음모이다.

 중국 주장대로 고구려사가 중국역사라면, 한강 이북 지역은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5,000년의 역사가 아닌 일본 역사보다도 짧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 강역도 한강 이남으로 축소된 역사와 전통이 없는 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니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악의적인 역사왜곡이다.

 중국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고구려사에 대한 대대적인 연구를 시작한 이래  2002년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국책사업으로 하여 북경사회과학원 산하의 연구소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04년 4월에는 그 연구과제가 발표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거센 국민적 항의와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향후 5년 간 우리 돈으로 환산 약 3조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는 사업으로 이를 통해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2.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목적

 중국은 漢族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 우리 민족인 조선족은 약 200만 명으로 주로 동북 3성(일명 만주 : 라오닝성, 흑룡강성, 지린성)에 살고 있으며 그 어떤 소수민족과는 달리 조선족은 자신들의 언어와 글자를 현재도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이미 구 소련에서는 1992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어 15개국으로 분열되었으며 현재에도 체첸 같은 나라들이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역시 공산주의가 사실상 소멸되고 있는데다가 일직부터 티베트는 인도에 임시정부를 두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장차 한국을 배후에 둔 조선족은 가장 염려스러운 소수민족이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맺어진 이후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만주벌판을 여행하면서 ꡐ이곳은 바로 우리의 옛 고구려 땅이다ꡑ라는 외침은 중국인들에게 경계심을 가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장차 남북한이 통일되고 만주의 200만 조선족이 힘을 합치는 한민족의 민족주의의 표현인 大韓國主義가 생성되면 반드시 한․중간에 영토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므로 현재 중국의 영토인 만주에 대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고정시킴으로써 미래의 영토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고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동북공정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나아가 여타의 많은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사업이라 하겠다.


3. 한중 구두 합의 5개항(2004.8.24)

한국민의 거센 반발과 동북공정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일자 한국과 중국 두 나라는 중국의 고구려사왜곡 문제와 관련해 한-중 우호협력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고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발전을 위해 중국이 지방 정부를 포함한 정부 차원에서 교과서․출판물 등에 의한 왜곡이 더는 없도록 ꡐ필요한 조처ꡑ를 취하기로 했으며, 고구려사 문제를 정치화하지 않기로 하는 등 5개항의 양해사항에 구두로 합의했다.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 간 중대 현안으로 대두된 데 중국 정부는 유념하고

△한-중 우호협력 관계의 손상 방지와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발전을 위해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정치 문제화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중국은 중앙․지방 정부 차원에서 교과서․출판물 등에서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 쪽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처를 취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하며

△학술교류를 조속히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서기 1세기를 전후해 삼국시대를 구성한 정권에서 고구려사를 삭제함으로써 촉발된 한-중 외교분쟁은 일단 진정 국면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합의가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ꡐ구두 양해ꡑ라는 점에서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미 고대에 중국의 모든 서적들이 고구려는 한민족의 역사이지 결코 한족이 지배하는 중국의 역사가 될 수없음을 입증하고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중국에서는 동북공정 사업을 명령한 장쩌민이 물러나고 후진타오가 최고권력자가 됨으로써 이 문제는 새로운 해결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낙관적인 해석을 하기도 하며, 최근 중국의 역사학자 100여명이 후진타오 주석에게 결코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동북공정 사업은 중단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는 보도도 있었다.


4. 한․중 국경문제의 발생 가능성 문제

 장차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영토문제는 동북3성 전 지역이 아니라 간도문제에 있다. 1712년 조선정부와 청국 정부는 양국간의 영토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사실 만주지역은 일찍부터 고조선과 고구려의 뒤를 이어 발해의 영토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거란이 세운 요의 영토이었다가 여진족이 세운 금의 영토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도 거란과 여진이 흩어져 살던 곳이어서  중국이 직접 통치한 적이 없는 지역이거니와 특히 청나라는 200만의 여진족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이주한 후 자신들의 본거지인 간도지역은 봉금지역(1660)을 선포하여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이 지역에 우리나라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자 영유권을 해결하기 위해 정계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계비의 비문에는 그 경계를 서쪽은 압록(鴨綠), 동쪽은 토문(土門)으로 한다는 것과 양국 수행원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로 인해 비로소 조선․청 두 나라의 경계선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간도의 개척에 착수하자 수많은 조선인이 이미 이곳에 들어가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므로 조선은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한 뒤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함으로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은 토문은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백두산 북쪽의 송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하여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1909년 우리의 외교권을 약탈한 일본이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남만주의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넘겨주었다(간도협약). 그러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거니와 일본과 청사이에 1945년 이전의 양국 사이에 맺어진 모든 조약은 무효임을 선언한 바 있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자동 폐기된 상태이다. 따라서 남북한이 통일이 되면 간도의 귀속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이 틀림없다. 최근 일본이 당시(1909)에 제작한 송화강의 상류를 토문으로 표기한 지도가 발견됨으로써 우리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사진 참조) 

 


▲ 두만강 북서쪽에 토문강 표기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답사도' 에 명기된 지명들.① 토문강 ②두만강 ③정계비를 세운 백두산 ④ 압록강. '토문강'을 ②로 보았던 간도협약의 체결 내용과 달리 일본 역시 ① 이 토문강임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