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할머니 이지출(1906-2005)

청담(靑潭) 2010. 6. 28. 09:44

할머니 이지출(1906-2005)

 

 

  세간에서 말하는 오복(五福) 이 있습니다.
①수복(壽福) - 오래 사는 것
②부귀(富貴) - 재물과 명예가 넉넉한 것
③강녕(康寧) - 건강하게 사는 것
④유호덕(攸好德) - 덕을 좋아하여 행하는 것〃싫다
⑤고종명(考終命 )- 명대로 잘 살다가 편히 죽는것이 오복이라고 합니다.  

 

  9988234라는 말이 있습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아프시다가 사흘이 되는 날 돌아가시면 가장 행복한 삶과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할머니는 오복중 부귀만 빼고는 많은 복을 누리신 겁니다. 만 99세까지 정말 건강하게 사시다가 이틀동안 병원에 입원하시고 세상을 뜨시기가 너무 서운하신지 돌아가실것은 전혀 예상도 못하시고 곧 퇴원하시는줄로만 아시더니만 사흘째 되는 날 육체의 기가 빠져 나가면서 조용히 저 세상에 계신 할아버지 곁으로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년 전 어느날인가 꿈에 할아버지께서 크나 큰 뽕나무 뿌리아래에 계시면서

 ‘어서 이리 들어오라’ 는데 너무나 무서워서  

‘싫소’하며 안들어 가셨다고 하셨답니다.  생에 대한 애착이 무지 강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일제에게 외교권을 강탈당하고 보호국이 되어 통감부가 설치되던 해인 1906년에 김제군 월촌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열 여섯의 어린나이에 결혼 1년만에 상처하신 18세의 할아버지에게 3.1독립만세운동 2년 후인 1921년에 재취로 시집오셨습니다. 월촌면에서 우리 고향인 백산면 돌제까지는 삼십리 거리입니다. 호랑이 처럼 무서운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 그리고 시부모 아래서 시집살이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두 작은 할아버지 식구와  두 동서 식구들까지 함께 살 때에는 가족수가 2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장손 며느리로 그날 그 날 밥 짓는 쌀을 퍼주기까지 하시는 호랑이 시할아버지 아래서 두 동서들과 함께 당시에는 누구나 그러했듯이 새볔부터 일어나 밥짓기, 물깃기, 쌀 방아 찧기, 빨래하기, 길쌈하기, 옷다리기 등으로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다행히 우리 할머니는 체구는 작지만 강단이셔서 평생 크게 아프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키는 대략 젊은 시절엔 150세티 정도였을 것 같은데 뼈가 굵으시므로 아마도 젊으실적 몸무게는 55-60킬로그램은 넉넉히 나가셨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제 기억에 60대까지만 해도 논밭일도 억척으로 하시고 무거운 몇 말의 곡식도  머리에 잘도 이셨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다섯을 낳으셨다고 들었는데 아버지만 유일하게 남으셨으니 자식복이 박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외아들이라 서둘러 18살 고교 1년생인 아들을 결혼시켜 6.25 전쟁중인 1951년에 20살의 며느리를 맞았습니다. 딸이 없기에 딸자식의 효도를 받는 다른 할머니들을 매우 부러워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아들은 딸자식만 못한 듯 합니다. 대개 딸은 자기 마음대로 친정부모에게 효도함에 사위가 오히려 함께하지만, 아들이 친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면 며느리가 걸림돌이 되는 가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마음이 착하지 않은 건 아닐까요?

 

 학교에 들어가기전 내 나이 다섯살때는 할아버지께서 이웃 마을인 공덕면 황산리 소재지에서 한약방을 하시게 되어 아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집에서 황산까지 10리길을 할머니와 함께 걷다가 내가 다리가 아프다하면 훌적 업고 걸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도 나는 매주 자가용으로 시골집과 농장을 찾아 그 길을 다닙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걷던 다섯살때의 그 기억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내가 중학교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 엄마의 할머니에 대한 불만과 다툼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린 며느리에 대한 배려문제, 남에게 지나치게 인정을 베푸는데 대한 불만등이었는데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의 불손한 언행은 나를 슬프게 하고 엄마에게 항의하면서 엄마와 나와의 갈등마저 생겨나 버렸습니다. 4년제 대학을 나오시고도 취직이 어려운 시대인지라 집에 게시다가 시작하신 사업이 실패하여 힘드신 아버지는 고부간의 문제를 푸는 지혜를 발휘하시지 못하셨고, 힘든 살림에 오직 자식을 잘 가르쳐 보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엄마에게는 아끼며 절약하는 습관이 없이 그저 남에게 베풀기만 좋아하시며 욕심없이 살아가는 할머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내 눈에는 할머니에게 불손한 엄마의 태도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매우 어려웠지요.

 

  고부간의 갈등(엄마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일어나는)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제 성격과 달라서 지나치게 부드러우시고 강하지 못하신 아버지는 전혀 해결책을 찾지 못하셨고, 어머니의 할머니에 대한 미움은 이미 병(우울증)이 되어 끝내 치유되지 못한 채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어머니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가끔씩 보아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머니를 원망은 할지언정 미워하는 말씀은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천성이 너무나 착하신 분이셨습니다.

 

 

  1983년 우리 승수가 태어나고 1985년에는 승원이가 태어나자 이 해부터 할머니가 아이들을 돌보시게 되어 고창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18년간을 익산의 신동아파트와 지금 살고 있는 동산동의 삼성아파트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므로 해서 고부간의 갈등을 없이 하였습니다.

 

  신동아파트에서는 임교수네 딸인 보은이와 상은이가 우리 승수와 승원이의 소꼽동무여서 그 애들의 외할머니와 친해지셔서 4년반 동안 잘 지내셨습니다. 할머니 나이 86세에 삼성아파트로 이사하였고 11년간 우리 두 내외가 출근하면 노인당에 가셔서 점심을 드시고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집에 오셔서 기다리시는 너무나 건강하고 즐거운 세월을 만족하시면서 보내셨습니다.

 

  늘 ‘손자덕에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구나!’ 또 ‘우리 석한이 장가가는거 보고나 죽나했더니 여태살았는데 승수 장가 가는것은 못보겠지?’ 하시며 당신의 건강은 정말 잘 챙기셨습니다. 100살이 다 되시도록 날마다  목욕하셨고, 끼니는 꼭 챙겨드시되 과식은 하지 않으셨습니디. 항상 손과 발을 문지르시거나 움직이시며 간단한 운동을 하시고 부지런하셔서 수시로 집안을 쓸고 닦으셨습니다. 몸이 편찮으셔서 우리를 힘들게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전혀 무의도적으로 장수비결을 모두 스스로 실천하시며 사신 분입니다. 호적이 당신의 큰 언니와 바뀌어져서 1897년생으로 되어 있어 1990년대초 행정기관의 전산화작업시 오류발생으로 컴퓨터에 뜨지 않아 공무원들이 당황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호적상 익산시에서 최고령으로 인정되어 장수비결을 묻는 전화도 자주오고, 중학생들이 사회과 모듬학습 과제를 하기 위해 우리집을 방문한 일도 있었습니다. 해마다 정월초가 되면 시장님이 보내오시는 선물을 받으시며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2002년 이제 아이들도 집을 떠나있게 되고 곧 연세가 100세가 되시니 돌아가실 날이 많이 남지 않으시므로 우리 부모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계시기로 요청하여 3년간 아들내외와 사시다가 저 세상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지금 누구나 보면 부러워할 고향 백산저수지 곁 양지바른 명당자리 선산묘역에 나의 고조할아버지 이하 친족들과 함께 할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워계시고 나는 고향집에서 가까우므로 가끔씩 찾아 뵙니다. 할머니는 영원한 나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증손녀 승원이가 머리를 빗겨 드리고 있네요 (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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