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한상설 (1955-1983)

청담(靑潭) 2010. 11. 5. 17:38

후배 한상설(1955-1983)선생

 

  1975년, 내가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은 나지 아니하고 일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남들은 공무원도 되고 막노동도 하더라만 나는 그 어떤 목표도 없이, 강한 용기도 없이, 굳은 의지도 없이 무의미한 세월만 보냈으니 지금도 이 시절을 반추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행히 어머니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의지로 그 어려움속에서(우리 둘째 동생인 은희가 고3이 되고, 셋째인 숙희도 곧 중학생이 되는 시기)대학 편입을 허락하시어 원광대 사대 국사교육학과에 편입하게 된다.

   내 나이 스물 넷에 다시 대학 2학년이 되니 남들에게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는 내가 부족하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그 누굴 원망할 수 있으리오? 늦게 대학 2학년에 다시 다니기에 느끼는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어려운 가정에서 대학을 두 번 다니는 그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요,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더 컸다. 대학에 들어가니 동학년들이 대개는 이년에서 사년 후배까지 두서너살 아래인데 그 중 고교 후배가 셋이 있었다. 그 중 두 명과는 항상 붙어 살게 되었는데 하나는 이 글의 주인공인 한상설 선생이요, 또 하나는 현재 모 대학 예술대 학장인 한대희 교수다. 두 사람 모두 키가 180cm이니 지금이야 조금 큰 정도로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키였고(고교때 한 반 60여명 중에 180cm이상은 그저 하나 정도) 한상설이는 몸무게도 80kg이 넘어 이리시내 번화가인 영정통 거리에 함께 나서면 그 만한 등치 찾기가 어려웠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씩은 쳐다보았다. 아무튼 1976년 봄, 키도 크고 등치도 크고 걸음도 뚜벅 뚜벅 무게감있게 내딛는 싸나이 한상설 후배와의 아름다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역전앞 <고향다방>이 우리들의 연락처다. 핸드폰이 없는 시대에 가장 서로 소통이 편한 방법이 바로 아지트를 정해 놓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으레 함께 시내로 나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 따로 나오게되기도 하는데 그럴때면 <고향>에 들러 행선지를 확인한 후 다음 행동을 취한다. 서로 만나고 헤어짐에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대야가 집인 한상설과 주현동이 집인 한대희와 김제 백산이 집인 나 셋이는 그렇게 마냥 2년동안 붙어 살았다.

  두 한씨는 대야면 한마을 바로 옆집에서 태어나고 상설이가 대희의 재당숙이다. 두 집 모두 부농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자란 사람들이다. 상설이는  부모님이 대야에 살아계셔 통학을 하고 대희네는 어머니가 초등학교 교사시고 아버지는 군산에서 사업을 하시나 집은 익산이어서 우리는 종종 대희네 집에 가게 되고 자는 일도 많았다. 두 사람은 대학생으로 용돈에 어려움이 없으나 나는 함께 어울리기 힘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기꺼이 차값과 막걸리 값과 목욕값을 감당해 주었다.(내가 발령을 받은 뒤 그 빛을 아주 잘 갚았다.)

  우리 셋이는 70년대 시골 사립대생의 자유로움을 한껏 만끽한 점에서 정말 추억에 남는 행복한 시간들이 많았다. <고향다방>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기도 하고 생맥주집에서 시드러지게 <불놀이야>를 불러대기도 하고 팝송을 좋아하는 한대희와는 음악다실에서 몇 시간씩 팝과 포크를 들으며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유제두와 임재근의 미들급 라이벌전을 보고자 대전으로 TV시청 원정을 가기도 했으니 오늘날 생각하면 약간은 부르주아 대학생들이다. 아무튼 좀 산다하는 두 동생덕에 나도 덩달아 잘 나가던  대학시절이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봄 한상설이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본인은 물론 우리 모두 충격이 컸지만 다행히 만성이어서 본인의 강한 의지로 학교생활은 잘 해 나갔으며 아픔을 잘 극복해 주었다. 언젠가는 답사여행을 하는중에 내게 노래를 불러 달라하면서 죽음에 대해 말하기도하고 삶에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졸업하면서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불교철학을 전공하였고 석사학위 취득후 1981년부터는 모교에서 교양한국사 강의를 시작하였다. 학문과 강의와 불교신앙을 통하여 아픔을 극복하면서 병환을 잘 이겨나가고 있었고, 그는 서울에서 공부하게 되고 나는 발령을 받아 고창에 살게 되었지만 만남은 여전하였다. 1979년 10.26사태 전날 둘이 만나 술을 마시고 여관에서 자고나서 아침에 사태소식을 듣고는 함께 만세를 외친 기억도 있다.(존경하는 위인이신 박대통령의 죽음은 애도하지만 그 순간에는 유신체제가 끝난다는 기쁨으로 자연스레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82년 여름에는 우리 부부와 그의 여자친구인 권선생, 그리고 다른 동문들과 함께 운일암 반일암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82년 가을, 고창 해리중에 근무하던 내게 놀러와서는 심각한 상의를 구하였다. 삶의 의지와 애착이 아무리 강하다고해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예견은 이미 되어있는 상태에서 결혼결정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에 주저하지 말고 결단을 내리도록 주문하였다. 그 해 겨울 그도 사랑하는 제수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백혈병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한상설과 결혼하는 그녀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희생을 감수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참으로 숭고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한 가정은 1년이 채 가지 못했다.

  1983년 6월말 그가 심각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세브란스에서 퇴원하여 예수병원에 입원한 어느 날 찾았더니 정신이 들었다가도 갑자기 잃곤 하는데 내게<형수님 건강하신지, 뱃속의 애기도 건강한지>부터 챙기고는 이내 다시 정신을 잃어 병원을 나오고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참으로 나와 우리 집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과 정성은 컸으나 나는 그를 위해 온 정성을 쏟지 못한 죄책감을 오래토록 떨쳐내지 못했다.

  7월말에 그는 갔다. 스물 아홉 젊은 나이에 아내 권선생(현 교수)과 어머니를  남기고 갔다. 그의 뜻에 따라 한줌의 재는 임진강에 뿌렸졌다고 한다. 어머니와 권교수 두 분의 아픔은 얼마나 컷으리오만 결코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하는 한대희(현 교수), 최완규(현 교수), 김성기(현 대학연구관), 그리고 임홍락(현 고교교사), 봉준영(현 중등교사)을 중심으로 생전에 형제처럼 지내던 벗들이 추모비를 세웠다.

   우리들의 뜻을 담아 대학원 조교이자 한대희 선생의 약혼자이신 박선생이 비문을 짓고 그녀의 아버지로 시인이신 박항식 교수께서 감수하여 주시고 서예학과의 어느 교수님이 글씨를 써주셨다. 그를 가장 아끼시던 홍윤식 교수님(당시 동국대 교수)과 그를 사랑하는 벗 30여명이 모여 대야 생가 뒤 선산에 추모비를 세웠다.

  1983년 추모비를 세운 이후 해마다 7월 하순 일요일을 택하여 우리는 비석을 찾아 그가 좋아한 쇠주를 한잔씩 따르고 함께 마셨다. 그러나 10여년이 채 못되어 여럿의 참석이 시들해지고  마지막에는 한교수를 따르던 후배인 채수환교수와 나, 이렇게 둘이서만 10여년 넘게 찾았다. 집에 들러 홀로 사시는 어머님도 찾아 뵈웠다.

  그의 어머님이 아들을 잃으신지 20여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픔을 잊지 못하게 해 마다 찾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다는 채교수의 의견을 들어 21세기 시작 이후 그의 비도 찾지 못하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가다보면 그의 추모비가 있는 산이 보인다. 지날 때 마다 그를 생각하며 그가 그리워진다. 항상 넉넉하고 남자다운 가슴이 큰 사나이 한상설이 보고 싶다.

  만약 그가 죽음을 맞지 않고 살아 있다면 비록 후배지만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소중한 사람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의 아내이자 영원한 연인인 권선생도 대학에 근무하면서 굳굳하게 사는데 소식만 전해 들을 뿐 만나기가 차마 두려워 여지껏 찾지 못한다. 그는 비록 가고 싶지 않은 먼 곳으로 떠났으나 결코 내 곁을 아주 떠나지 않았다. 틀림없이 나와 권선생이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가는지 지상의 모습을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군산 은파호 둘레길로 운동하러 가는 길 - 10여 년 만에 양드리와 함께 한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마을에는 예쁜 전원주택들이 눈에 띠며 부티가 나는데, 큰 기와집으로 기품있던 그의 옛 집은  빈터가 되고 텅 비어 있었다. 한선생을 기리어 우리가 세운 추모비도 흔적조차 없었다. 인자하신 그의 어머니는 서울 큰 아들댁에 가신뒤 세상을 뜨시고 이때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으며 한선생의 추모비도 없어지고 그 자리엔 다른 사람들의 묘가 들어섰다고 한다. 그가 살았다면 저리 되었을까? 이젠 그의 고향 외덕마을에서 따뜻했던 그의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슬프다. 세월의 무심함이여! 인생의 덧없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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