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열하일기

청담(靑潭) 2010. 7. 20. 10:24

열하일기

 

1. 박지원 1737(영조 13)~1805(순조 5)

   대저 우리 동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사신들이 육로 혹은 바닷길을 통하여 중국을 다녀오고 통일신라대는 중국을 이웃마을처럼 무시로 드나드는 항해술이 있었음은 장보고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연 4회 정도 사신단이 구성되어 중국을 다녀오는 것외에는 일체의 해외여행이 없었으니 중국의 문화문물을 체험하고자하는 실학자들의 열망이 얼마나 컷을지는 짐작이 가고 남는다.오늘날 우리는 TV를 통해 전 세계 방방곡곡을 간접체험하며 여앨을 즐기고 실제로 해외 여행에 열광하고 있다. 2010 금년 여름 해외여행자수는 1700만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단연 아시아 최고의 해외여행국이라고 보도된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중국여행기는 17세기초 아신으로 중국을 세번이나 다녀온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도 나타나지만 18세기 들어 대표적인 글로 박제가의<북학의:1778> 이덕무의 <입연기:1778>등이 있다. 당로는 세게문명의 중심지요,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서 서양의 문화가 유입되고 시점에서 이상은 크나 오직 성리학에 갇혀 있는 좁은 땅덩어리 조선에서 살아가는 17,8세기 당대의 선각자들인 실학의 중심인물들로서는 베이징의 문화를 실제 접하고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고픈 열망이 얼마나 컸겠는가? 연암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나 연행사로 떠나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중국에 가게되는 천재일우의 행운을 잡는다. 이후 1809년 역시 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다녀오는 김정희의 선진 중국문화에 대한 흠모와 애정도 열화와 같았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이다. 1783년 무렵에 일단 탈고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개작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수습은 그가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에는 그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드러냈다.

 

  나는 <그린비>에서 출간한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박지원의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나 박지원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느끼는 감동이나 철학을 다시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지기 위해 이 공간을 마련하였다. 박지원을 통하여 오늘날 아주 좁아진 지구에 살면서도 다른 세계를 찾아 여행은 계속하고 있으나 생각은 여전히 아직도 좁고 좁은 시야에 갇혀 사는것은 아닌지 다시금 내 자신을 돌아보며 더욱더 호연지기의 지경에 다다르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중국여행기간

  박지원의 삼종형 박명원이 정사로가는 사행은 진하겸 사은사행이며 당시 청의 황제인 건륭제(1711-1799)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다.  1780년 5월25일에 한양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 27일에서울에 도착하였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3. 중국여행경유지

한양 - 의주 - 성경(선양) - 산해관(진황다오) - 황성(베이징) - 열하(청더) - 황성(베이징) - 산해관(진황다오) - 성경(선양) - 의주 -한양

 

4. 여러 사유들

 

사유1        6월 24일

 

  조선의 돈은 중국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가지 못한다. 은을 가지고 가서 물건을 사며 물물교환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돈을 중국에 마음대로 가지고 가며, 1천원짜리 돈은 기꺼이 1달러의 값을 쳐주며 가난한 사람들이 천원만 달라고 조르며 따라 다닌다. 호텔에서 하룻밤 묶고 아침에 침대에 1달러만 놓으면 된다. 아!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중국이 다시 일어섰다. 금년 상반기 국민총생산액(GDP)이 일본을 넘어서서 당당히 세계 2위가 되어버렸다. 앞으로 20년 이내에 미국을 앞지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구매력지수(ppp)는 우리의 1/4일 정도이니 국민생활수준은 중진국 정도(국민소득 7000달어정도)라는게 다행이라 할까?

  우리 국민소득이 2만달러이고 일본이 3만5천달러인데 물가가 비싸므로 구매력지수는 우리와 대동소이하다. 2018년이면 우리가 추월할 것으로 보도 되었다. 아! 드디어 우리가 일본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는 순간이 바로 눈 앞인 것이다.

  절대블가능할 것으로 보이던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18C 우리 실학자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을 20C 후반에 우리가 앞섰다. 이제 그들이 다시 우리를 뒤 쫓고 있다.

  20C 전반 우리를 지배하던 일본은 절대 극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으나 지금 우리가 추월하기 직전이다. 이 모든 상황은 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역사적 출현으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으나 소수 좌파내지 과거의 소위 민주세력들에 의해 그 업적이 계속 훼손되거나 모함받거나 악선전되고 있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민주화시대가 이미 가고 민주화가 이루어졋는데도 시대적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시계는 여전히 80년대 시점에 머무르며 변할 줄을 모른다. 비양심적 정치모리배들인 그들이 지금도 정치계의 일정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니 역사의 진실이 제대로 인정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반드시 역사는 진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국가의 발전을 잠시도 멈출수는 없다. 통일도 중요하고 여야간 정권투쟁도 없앨 수야 없지마는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자들은 우리가 용서해서는 안된다. 역사의 발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꾀하여야만 한다. 다시는 동아시아의 노리개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당히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진국으로 우뚝서고 주변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은 오직 잘사는 방법이외엔 없다. G20을 다음달에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일이요 큰 기쁨이다.

  오늘날 배우지 못하고 한미한 가정에서 성장한 이들도 잘살게 되어 부자가 되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살며 어려운 이웃과 주변을 보살피면 결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역사에 절대 불가능은 없다.

 

 

 

 

사유2         6월 27일

  중국인들에게는 <외기>와 <강의>가 있다. 처음 공부를 할 때 음과 뜻을 함께 배우는 우리와 달리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그저 사서의 문장을 입으로 외우기만 한다. 외우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 다음에 스승에게 뜻을 배우는데 바로 <강의>이다. 연암은 수많은 중국인들을 만나 대화하게 되는데 그들은 대개 아는것은 아주 많아 처음에는 지식인으로 여겼다가 깊은 대화를 나눌라치면 대부분 그 의미를 알지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외우기만 하고 정작 정식교육은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대저 정보화시대에 정보는 홍수처럼 밀려온다. 2010 금년에는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이제 모든 정보가 손바닥안에서 나온다. 많이 알고 있으면 지식인인가? 아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그저 정보를 알기만 하는것이다. 정규교육을 받고, 좋은 책을 읽고, 사유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유3          6월 28일

 

  <당서>에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 부른다’ <지지>에서도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부른다 ’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안다.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이를 믿고 평양에 평양에 정전이 있다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하면 이를 믿는다. 그러나 만일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랄 일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이를 해괴한 말이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옛 땅이며 숙신, 예, 맥등 동이의 여러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아라, 영고탑, 후춘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것을 모른다. 아! 후세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밝히지 않고 제멋대로 한사군을 모두 압록강 안쪽에 몰아놓어 견강부회하면서 구차하게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패수를 찾으니 어떤이는 압록강을 패수라하고 어떤이는 청천강을 패수라하고 어떤이는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땅은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 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사적에 따라 패수의 위치를 앞으로 당기거나 뒤로물러나게 하는 까닭이다. ----

 

 당시의 지식인들조차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에 갇혀서 고구려의 영역마저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역시 박지원은 지식인이요 뛰어난 학자이다. 우리의 고대사를 실증적으로 밝혀가면서 우리의 고대사를 정확히 인식할 것을 주장하며, 사대정신과 소아적 역사관을 일갈하고 있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이 분분하다가 최근에야 정리되어가는 과정이고, 패수의 명칭에 대해서는 예전에 많은 의아심을 가지던 터에  연암의 주장을 통해 얻은 바가 크다.

 

 

 

사유4         7월 8일

 

  요양성의 술집 한쪽에는 금빛 글자로 쓴 깃발이 펄럭인다.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다.

 

이름을 듣고서 마땅히 말을 세울것이고

향기를 찾아 잠깐 수레를 멈추리라.

 

  박지원은 깃발을 보고 술을 마시고 싶어져서 들어간다. 오늘날에도 통할 것 같은 정말 재미있고도 멋진 CM송이 아니겠는가?

 

 

 

 

사유5         7월 8일

  요양성의 술집 한쪽에는 요동이라하고 그 뒤 위만조선에 속한다. 한나라 말기에는 공손도가 차지하고 수와 당때에는 고구려에 속했다. 거란은 이곳을 남경이라하고 금은 동경이라햇다. 원은 지방행성을 두었고 명은 정료위를 두다.지금은 요양주이다.이곳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기고 신요양이라 하였다.

 

  구요동성은 요하강 하류에 위치한다.오늘날 잉커우부근에 위치하며 구요동성은 이곳에서 동편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것이다.  2005년에 해우회와 백두산에 갈때 배로 도착한 항구가 바로 잉커우(영구)이다. 현재 요양의 성도는 선양(센양)이니 19세기에는 곧 성경이다.

 

 

 

사유6         7월 13일

  

 백로지(白鷺紙) 하얀 해오라기 같은 종이라는 뜻이다.

 기상새설(속일기霜賽굿할) 연암이은 길거리 점포 문설주에서 가끔 본 글자인데 처음에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 희기가 서리를 능가하여 백설을 걸고 내기할 수 있다 -

  장사치들이 자신들의 심지가 깨끗하기는 서릿발같고 밝기로는 저 희디흰 눈보다도 더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글씨를 써주어도 전당포 주인이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며칠뒤에야 깨닫게 되는데 실은

 -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

  는 뜻으로 실은 국수를 말하며 국수집 앞에 걸어 있던 글자였다.

 

 

 

 

사유7         7월 15일

 

  중국에서는 험준한 검각(장안에서 촉으로 가는 길인 대검산, 소검산의 험한 길)이나 아홉구비로 꺽어져 가파르기 짝이 없는 대항같은 지역이라도 역시 수레를 몰고 간다.

 

   천공개물과 농정전서를 구해 연구한다면 가난에 찌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우리나라 백성들을 얼마쯤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1. 내고향 김제시에 검산동이 있다. 바로 우리 부모님이 사시는 부영아파트 바로 앞마을이다. 내가 어렸을때부터 대검산과 소검산에 우리 신평이씨 친척들이 여럿 살고 있음을 들어 잘 각인되어 있는 마을인데 지금은 부모님 이계셔 자주 가게 되었다.

 도대체 중국에서도 험한 곳을 이름한 것인데 아주 예전에는 지금의 검산동도 그렇게 험하게 여겼던 것인가? 우리 지명중에는 중국의 지명을 갖다 붙인 이름이 너무 많지만 우리 지역 명칭이기에 기록하여 둔다.

 다른 예를 들어 본다. 중국 구이린(桂林)시의 전주(全州ㆍ취안쩌우)현은 이름뿐만 아니라 한자도 똑같다. 전주현은 구이린의 12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 홍콩, 마카오와 가까우며 인구는 78만명, 면적은 4천21㎢이다. 전주시보다 인구는 15만명 많고 면적은 17배가량 넓다. 천년고도(古都)인 이 도시가 전주라는 이름을 쓴 것은 939년께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757년 전주라는 지명을 처음 쓴 것보다 180여년 뒤, 이후 전주가 후백제의 수도였다가 멸망(936년)하고서 3년이 지난 뒤다.
  중국 전주현에는 금산사(金山寺)와 기린산, 완산, 태평 등 전주시내와 주변에 있는 이름과 동일한 지명이 여럿 있다. 전주시는 이들 지명의 유래와 의미도 비슷하다.
  여기에 1919년에 설립된 전주고등학교는 전북 전주고와 같은 해에,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진 고교이기도 하다.  묘족과 요족이 대부분인 이 도시에서는 음식도 김치, 장아찌 등 우리와 비슷한 발효 식품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우리가 과거에 썼던 절구와 맷돌, 외다리 방아를 사용하고 솟대 신앙 등이 남아 있는 등 문화적 연관성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두 전주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앞으로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내가 예전에 <채석강 한담>이라는 일므으로 수필을 써본 일이 있다. 채석강이니 적벽강이니 하는 아름다운 명칭도 그와 같다.

 

2. 중국의 수레 활용을 설명하며 박지원은 한탄한다. 우리 조선의 교통의 악조건과 수레이용이 없음과 상업의 후진성과 백성의 가난함을 한탄한다. 그러나 조선은 외적침입의 두려움 때문에 도로를 만들지 않고 다리를 만들지 않고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자급자족적 산업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고 백성들의 가난구제에 힘쓰지 않았다.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왕조를 위한 정치이고 양반을 위한 정치였다.

 

  1960년대말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박정희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든다고 하니 야당이 난리를 치며 반대하고 지식인들마저 반대가 심했다. 반대한 사람들이 후일까지 그 반대가 옳았다고 주장하는것은 보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교원평가, 일제고사, 성과급제, 교육과정, 수능시험, 교장공모제)등이 마치 구테타하의 개혁처럼 졸속으로, 선동적으로 밀어부쳐지고 이에 6개 시도의 진보교육감들이 반대하고 저항하여 교육정책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에서 이 정부의 교육정책의 추진방식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정책이 몰아부치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나 졸속정책들이 성공할수도, 성공해서도 안된다고 보는 입장이며 솔직히 예고 없던 교장공모제로 마음이 아프고 이 개혁은 포퓰리즘이며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결과가 훨씬 클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틀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미래지향적 큰 밑그림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창조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옳은 방향이며 그의 리더십은 탁월하다고 믿는다. 그의 실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고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국력신장 노력과 국력신장을 통하여 만들어나가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의 제고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노력은 절대적으로 옳은 방향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만이 장차 머지않아 틀림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21세기 동북아시대에서 결코 종이 아닌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인들(김종필, 이회창)이 마치 내각책임제가 대세이며, 이 만큼 민주주의를 경험한 우리도 내각책임제를 할 때가 되었다고 망발을 한다. 내가 그 분들의 인격과 우리나라의 역사발전에 공헌한 바를 일정 인정하지만, 내각책임제 운운에는 조소를 금치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내각책임제를 시행하면 권력을 나누고 합치고 싸우고 토론하느라 지금의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만 못하랴? 지금의 정치모습에도 우리국민들은 환멸을 느끼며 정치인들을 구더기보듯 하건만 저 인간들은 아직도 정치가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인지 저들을 위한 것인지 분간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국민과 역사를 무시하고 저희들 정치인들을 위해 정치가 존재하는 것인양 여기니 어찌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으리오?  저런 인간들에게 정권이 주어지면 우리의 역사는 퇴보하리라. 신은 다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

  2008년의 촛불시위에서 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국민을 설득하지 않고 밀어부치면 성공할 수 없다. 국민들이 마치 하나같이 바보라도 된 양 반미 친북좌파들의 선동에 장난하듯 축제에 참여하듯 무비판적으로 이명박정부에 반기를 드는 기회로 삼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오며 촛불을 들지 않던가? 이성보다 감성이 완전히 우위에 서서 대중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이명박정부가 아무리 미래지향적 정치를 지향하며 바른길을 간다해도 국민을 이해시키지 못하며 밀어부치면 성공할 수 없으리라. 세종시 수정안의 실패에서 그치지 않고 4대강 사업도 더 어려울지 모른다. 

  무슨일이든지 미리 계획하고 충분히 설명하여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며 지지를  받으면서 추진하면 성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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