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통일교육원 2주일의 행복
1. 통일교육연수 신청과 강사 자격증
지난 5월 통일원 산하 통일교육원에서 주관하는 통일교육전문강사 연수과정 신청공문이 왔기에 곧 바로 신청하다. 교사가 대상이라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모두들 관심이 큰 통일문제를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고, 통일에 대해 학생들에게 특강도 하고 싶고, 퇴직후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연수에 통일교육강사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199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16년 전에 통일교육원에서 2박3일의 연수를 받을 때, 수업시간중에 긴급뉴스로 김일성의 사망소식이 전해져 모두들 놀라고 북한에 향후에 대해 전망하는 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북한의 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정은 2010.8.9 - 8.20까지 이며 모두 80시간(뒤에 바뀌어 72시간)이다. 6월이 되어도 연수자 명단과 연수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서가 내려오지 않아 혹시 잘못된게 아닌가 해서 직접 교육원에 전화하여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우리 전북에서는 전체 56명중 모두 5명이 참가하는데 그 중에 현동필 교장과 내가 들어 있어 교사들의 자리를 빼앗은게 아닌가 염려도 했으나 교육중에 들으니 신청자가 부족하여 일주일 과정에 신청한 도덕교사들을 이 과정으로 일일이 권유하여 가까스로 연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작년에 통일교육지원법이 제정되어서 북한관련학과 졸업생 20여명을 대상으로 제1기 통일교육전문과정이 실시되었고 우리가 제2기로서 통일교육전문반 교원반이라고 한다.
공문상으로는 분명히 제1기 통일교육전문강사과정이라고 하고 통일교육전문강사 자격부여라고 기술하였으므로 참가자들은 당연히 자격증을 수여하는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교육원측의 의도는 달랐다. 처음 시작하는 장기과정이라서 설계에서부터 집행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으나 교육생대표들과 교육원측이 대화와 타협으로 원만한 합의를 도출하였다. 교육과정은 <통일교육전문과정>이라하고 기수는 제2기가 되었으며 수료증에 ( ~수료하였기에 전문통일강사자격을 드립니다)로 표현하기로 하여 연수생들의 불만은 무마되었다. 그리고 인력풀을 작성하여 가동시키고 학교통일교육강사로 활동하도록 관리하고 지원한다는 재확인을 받았다.
2. 서울로 출발
학교보충수업으로 3주를 근무하다. 방학이라지만 무주의 관사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무하고 토요일과 일요일만 쉬는데 토요일 일요일도 모임으로 보내는데다 무더위라서 양드리와의 여행은 꿈도 못꾸며 지내고 학교장의 특별배려(?)를 받아 3주째인 8월 4일부터 4일동안 쉬게되어 원광대 병원과 신대균내과에서 건강검진을 받다. 위내시경검사에서 2년전보다 식도와 위 모양이 아주 좋지 않고 위의 아래쪽에 1mm정도 크기의 용종이 하나 발견되어 예수병원에서 떼어내는 수술을 받으라는 신원장의 말에 따라 연수후 받기로 하다. 양드리도 나와 비슷해서 둘이 똑같은 약을 장기간 복용하게 되었다.
CT검사에서는 간이 뿌옇게 막이 덮힌듯한데 이는 지방간이라 하며 지방이 덮힌 것으로 간기능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술조심, 음식조심(육류배제, 채소섭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술은 입가심이요, 고기를 멀리하고 채소를 즐길지니라. 6월부터 술을 마시면서도 단 한개피도 피우지 않았으니 담배는 됐고 술을 줄이고 채소 즐기는건 어렵지 않다. 오래 건강하게 살다죽는것이 내 생사론이니 잘 지킬지어다.
원광대 검진결과도 여전히 이상지질혈증(고지혈증)이 의심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으니 음식물 섭취에 조심해야 한다. 운동을 열심히 하여 허리둘레를 줄이십시오. 99cm인데 90으로 줄이시지요.
이번 연수로 2주일을 서울에 머물게 되니 몇가지 욕심이 생겼다. 첫째는 우리 양드리와 방학중에 아무런 여행을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서울의 궁궐탐방을 하고자 함이요, 또하나는 그동안 서울지리에 어둡고 운전에 자신이 없어 서울에서 마음놓고 운전을 하지 못했으나 이번에 차를 가지고 올라가서 네비게이션을 믿고 수업후와 쉬는 날에 서울을 마음대로 다녀서 서울운전에 자신감을 갖기로 한 것이다.
8일(일요일) 오전에 출발하여 낙성대 승원이 원룸에 들르고 승수와 함께 가족이 모여 베트남 식당에서 맛잇는 식사를 한뒤 1월부터 승수가 살아온 역시 관악구 신사동에 있는 승수 원룸에도 들렀다. 좁디 좁으나 기거할만은 하다. 요즘 대학생들이 원룸비가 비싸져서 학비 아끼느라 월세 30만원 이하로 살 수 있는 고시원을 찾는데 발을 뻗기도 힘들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 딸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미래를 낙관한다.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라.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오늘 사회과 임선생 병가가 갑자기 발생하여 적절한 기간제 교사 구하는 일이 힘들어 걱정이 태산이더니 최선을 디해보니 금방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우리 승수와 승원이도 반드시 해 내리라. 어쩌다 청년실업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려움을 겪는고?
애들 이모집인 마포현대아파트에 도착하여 민경이도 만나다. 동아방송대 실용음악과생인 민경이가 기획사에서 연습하노라 힘들어 해서 6년장기 연습생계약을 포기하고 2학년에 복학하여 우선 졸업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잘 한 일이다. 가수가 되는 것도 별로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오후에 햇볕이 뜨거우나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오늘 아파트에서 바라만 보았던 서강대 뒷산을 오르기로 한다. 아파트에서 천천히 걸어서 30분거리인데 50M의 낮은 산이다. 이름은 노고산이다. 큰 길 입구를 막아놓아 동네노인에게 오르는 방법을 여쭈니 바로 옆에 놓인 사다리로 오르라고 알려 주신다. 운동하시는 분들이 여러분 계시고 정상에는 바위가 몇 개 있고 최근 비가 많이 와서인지 상당히 음습하고 산책길도 정돈이 부실하다. 산이 관리되지 않은지 오래된 느낌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산이 서강대 소유이며 주민들의 입산을 원칙적으로 금지 하고 있다. 비록 서울 대도심에 있는 작은 산이지만 잠자리가 날고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서울이 삭막하다고? 이처럼 작은 산에 들어와도 빌딩하나 안보이고 소음도 없으니 모두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서강대 후문길을 막아놓았으므로 다들 정문이나 남문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캠퍼스로 내려와 서강대를 처음 들어간다. 고등학교 우리반에서 윤종철이 서강대에 진학했는데 모 회사 부사장이다. 마포현대에 가면 수시로 서강대부근을 산책하나 들어와 보니 캠퍼스가 다른 대학에 비하면 비좁은 느낌이다. 오늘 예수회에서 창립한 대학임을 처음 알게 되고 우리나라에 16세기 종교개혁때 카톨릭의 로욜라가 창시한 예수회(제수이트교단)가 있는 줄도 처음 알게 되다. 대학내에는 로욜라의 동상이 있고 남문밖에 제수이트교단 본부가 있었다.
마포현대 주변의 산을 잘 살피며 인터넷의 지도를 찾아 확인하다. 우선 복도에서 1시방향으로 보이는 산이 연대와 이대 뒷산인 안산(300m)이다. 이 산에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시내전경이 그만이라고 한다.
오른쪽으로 2시 방향으로 높은 봉우리가 두개가 있어 하나는 인왕산(338m)이요 또 하나는 바로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342m)이다. 인왕산 뒤편으로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 : 만경대(800m) 백운대(830m) 인수봉(803m)>인 것 같은 봉우리들이 보인다. 인수봉은 안보이고 아마 노적봉과 만경대와 백운대인듯 싶다. 형제봉(467m) 좌편으로 보현봉(714m), 문수봉, 나한봉인듯한 봉우리들이 보이나 정확히는 아직 알수가 없다. 거의 3시 방향으로 아주 멀리 보이는 산은 의정부와 남양주에 걸쳐 있는 수락산( 638m)으로 보여진다. 이런! 서울 사람들 공휴일이면 갈 곳도 많다. 사실 모두 북한산 자락인데 봉우리가 하도 많으니 하나 하나 찾아다니면 재미가 솔솔 할 것 같다. 내 반드시 언젠가 다 찾아 즐기리라.
이모네 아파트 베란다에서 9시 방향으로 남양주시에 있는 천마산(812m)이 아주 멀리 보이고, 10시 방향으로 남산(262m)이 보인다. 비록 우리 아들이 살 집이지만 내가 찾을때면 이왕이면 남산과 밤에 보이는 남산타워의 야경을 즐기려고 앙드리의 미움을 받아가며 4동에 아주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건만 그 이후 바로 앞에 삼성래미안이 들어서서 아파트 앞 전망이 엄청 깨끗하게 변한점은 좋기도 하지만 남산 전망은 아주 놓쳐 버린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14층의 이모집은 남산전망이 대체로 남아 있어 다행이나 10월초에 전세기간이 끝나고 인수하여 우리 아이들이 살게 되는 우리집은 11층이라서 남산이 아예 보이지 않을것 같아 그렇다면 큰 낭패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오른편 1시 방향으로 우면산(293m)으로부터 청계산(612m)이 보이고 2시 방향으로는 철탑이 있는 서울대뒷산인 관악산(629m)이 보인다. 관악산 오른쪽 조금 먼 곳에 우리 승수가 한 달간인가 파견나갔던 철탑이 있는 삼성산(477m)이 보인다.(기술한 산들에 대해서는 실제 올라보지 않고 눈으로만 보면서 인터넷을 통해 탐색한 것이므로 반드시 후일 하나 하나 정확한 확인을 필요로 한다)
3. 연수생활
8월 9일(월요일)
북한산 자락의 아름다운 통일교육원
아침에 통일교육원 네비를 찍으니 강변북로로 가도록 지시하는데 일산방향으로 가서 우회전하도록 나타난다. 자신이 없는지라 원래 마음먹은대로 죄회전하여 강변북로를 타고 동호대교를 지나 중랑천을 타고 내부순환도로를 달려 태릉부근에서 강북구청으로 향한다. 1시간만에 도착하니 어렴풋이 16년전 생각이 나고 정말 북한산 자락에 자리잡은 통일교육원에 다시 온 것이 감개무량하다(연수후 통일교육원 홈페이지에서 2000년에도 2박 3일의 연수를 수료한 것이 확인되었고 내가 자기관리를 잘못했는지 나이스 연수이력에도 올라있지 않아 어처구니가 없다) 스위스 풍의 예쁜 건물들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울려 마치 중세의 대영주가 사는 장원의 성에 온 느낌이다. 10년 만에 다시 맛보는 행복한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 전북에서 참여한 사람은 군산서흥중 현동필 교장(나와 룸메이트, 53세) 군산기계공고 김승호 교무부장선생(공업교사, 50세) 화산중학교 정성모선생(35세), 태인고 차정숙선생(48세)이다.
일과는 오전 9시에 시작하여 80분 강의 2강좌, 쉬는 시간은 20분이다. 점심은 아주 아주 맛이 있고 (나는 전라도 전주와 익산에서 사는데 왜 서울 음식이 더 맛있어?) 커피는 공짜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고 오후에는 1시에 시작하여 2강좌에 분임토의 1시간 20분으로 5시40분에 끝난다. 현교장과는 재작년에 직무연수를 함께 받은 일이 있고 전문직으로 근무하시고 작년에 교장으로 꽤나 일찍 승진하신 분이다. 통일교육 연구학교여서 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김승호선생은 전체 참석자 53명 중 거의 유일하게 통일교육과 어느면으로나 관계가 거의 없음에도 기어이 받고 싶어 참가하였다 하며 분임별 2명씩 발표하는 예비시연에도 나서는 용감성을 보일뿐 만 아니라 수업도 잘 하시는 분이다. 도덕교사인 정성모선생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사립인 화산중의 설립자이자 현재에도 교장인 심의두 교장의 동생 심의겸 선생이 나와 대학 졸업동기인데 3년전에 안타까운 생을 마쳤다고 한다. 화산중 출신의 유일한 현역교장인 원광중의 전경욱 교장이 나의 절친한 벗이니 내가 화산중과 인연이 있다. 우리고등학교 동창인 영생고 국방호 수석교사(영문학 박사)도 화산출신이요, 나의 영원한 동료이자 사람좋은 후배인 우리학교 이인근 기숙사 운영부장도 이 학교 출신이다.
차정숙 선생은 역시 사립인 태인고 윤리교사이신데 40대 여교사 답게 매우 차분하신 분이다. 다섯이 작으나마 인연이 되었으니, 앞으로 통일교육전문강사 모임을 통하여, 또 우리끼리도 한번씩은 만나는 기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태인고에는 고등학교 동창인 양재진 선생이 있고 태인고에서 근무하다 2003년에 공립으로 전입되어 부안여상에서 만나 근무한 인연으로 모임까지 하고 있는 아끼는 후배인 정읍고의 변진섭 선생이 있다.
이번 연수에 참여하신 분들의 대부분은 도덕윤리교사이고 사회과 교사들이 약간 있다. 관리자가 5명(교장1명, 교감 3명,연구사1명)이 있다. 많은 선생님들이 통일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연수도 많이 받고 오랫동안 각 지역에서 통일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해오신 분들이 많았다. 상당수의 고참 경력교사들은 나처럼 전문강사자격증 취득을 목적으로 오신 분들이다.
예전에는 겨우 2박 3일이어서인지 교육원 부근에 있는 애국지사묘역들을 일일이 찾지 못하여 아쉬웠던지라 이번에는 광복절도 맞는 만큼 모두 일일이 찾기로 마음 먹다. 저녁식사후 고향멤버 넷이서 이준열사묘와 이시영선생묘를 찾았다. 산책후 수퍼 맥주로 한잔하며 인사를 나누다. 다음에도 기회가 자주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차선생님을 제외(?)시켰다가 차선생님께 눈치 먹다.
16년전 연수시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나의 말에 여러분들이 -이번엔 김정일 차례 아니냐?-며 응수하여 웃다. 나는 이번 연수에 젊고 잘 생긴 김태호 총리가 임명된 것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다. 일류대 나오고 미스코리아 되는것이 신기하더니만 일류대 나온 영화배우보다 더 멋있는 젊은 미남 총리는 또 처음이다. 그런데 이글을 마무리하는 오늘(8월26일)까지 진행된 3일간의 청문회를 통하여 본 김태호는 여지껏 내가 생각했던 멋있고 능력있는 젊은 정치인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 준(1859-1907) 고종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다 순국
이시영(1869~1953) 호는 성재, 국권침탈 후 온 집안이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독립군 양
성. 임시정부 요직을 거쳐 초대부통령 역임
8월 10일(화요일)
아침 6시에 기상하다. 혼자서 아침 산행하여 김병로, 신익희선생묘역을 찾다. 지난 연수에도 이 분들까지는 찾아 뵌 듯하지만 다시 뵈었다.
김병로(1887~1964) 호는 가인. 순창출신. 일본 유학중 잡지<학지광> 편집장,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광복후 한민당 창당. 초대 대법원장 역임
신익희(1892-1956) 호는 해공. 임시정부 요직 역임. 광복후 제헌의회 의장.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유세중 이리
에서 별세(호남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오후에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저녁뉴스에 우이동 계곡에서 1명이 사망했는 보도가 있다. 교육원 바로 뒤의 둘레길 입구에서도 차량 한대가 계곡에 주차하여 있어 소방대가 끄집어 내느라 애를 쓰는 모습을 보았는데 주인은 술을 먹고 물에 떠내려가다 다쳐서 입원했다 한다. 옆에 계시던 분의 말로는 다친 사람의 재산이 100억이라던데 아이고 그사람 재산이 아까워서라도 술조심 해야겠다. 전라도와 서울지역에서 폭우가 쏟아져 피해가 있고 우연히 우리가 있는 이곳 우이동계곡에서 사망사고가 난 모양이다. 많은 비로 인해 우리 3분임 모임행사도 취소되었다.
8월 11일(수요일)
6시에 일어나자 마자 차를 몰아 우이동 유원지로 출발하다. 비가 많이 와서 우이동 등산로는 어둡고 음침하다. 상당히 큰 먹거리 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집모습이나 조형물등이 마치 70년대 모습이다. 들리는 말로는 이곳 북한산 계곡에 자리한 국립공원내 상가들을 장차 곧 모두 철거한다고 하니 이 가든들이 바로 철거대상이라서 보수나 증축, 또는 신축도 하지 않아 저리된 모양이다. 우이동까지 지하철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맞는 말인듯 하다. 도선사길은 잘 정비되고 주변 상가들로 깨끗하다. 도선사 주차장까지 갔으나 시간이 어쩔지 몰라 마음이 바빠 절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도선사길이 근대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우이동 계곡이며 우이동 골짜기에 온 소회가 크다. 도선사 가는 길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836m)와 인수봉(803m)과 만경대(800m)라는데 대단한 절경이라, 북한산(옛 지명은 삼각산)은 과연 설악산 못지 않은 명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이동 계곡은 아름다운 백운대와 만경대와 인수봉의 절경을 바라보며 흐르는 계곡을 말함이로다.
초등학교때 부르던 윤석중 선생의 <기러기>라는 동요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기러기떼 기럭 기럭 어디로 가니
남쪽으로 날아가다 북한산에 들렀지
북한산 단풍 한창이겠지
요담엘랑 단풍잎을 입에 물고 오너라
북한산 단풍이 얼마나 이쁘길래 요담엘랑이란 이름이 붙은 단풍나무가 있을까? 도대체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단풍나무 명칭이 이해가 안되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즐겨 부르기만 하다가 중학교때인가 불현듯<요담엘랑>이란 (요 다음에는 꼭)이라는 뜻을 깨닫고는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가을이 아니어서 요담엘랑 단풍잎을 보지 못해 아쉽기 그지 없구나!
2주간의 행복한 연수가 시작되고 모처럼 느끼는 최고의 행복, 최고의 만족한 시간들이다. 양드리와 통화하며 실컷 자랑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시내여행을 함께 계획하다.
판문점 방문이 있는 날이다. 무려 16년만에 다시 방문하게 된다. 천안함사건 이후 판문점 경계가 삼엄해졌다 한다. 판문점 가는길에 차창을 통해 백운대와 만경대와 인수봉이 있는 북한산(옛지명은 삼각산 ), 그리고 그 북쪽에 있는 도봉산(717m), 중랑천 우측에 소재한 수락산(638m), 수락산 아래에 있는 불암산(508m) 등의 위치를 확인하였으며 이곳 도봉구와 노원구 주변의 경관은 참으로 한편으로 수려하고 한편으로 위엄이 있어 근사하기 그지 없다. 실로 우리나라에서는 바위와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산으로는 설악산이 제일이요, 이곳 북한산 자락이 그 다음임을 누구도 부정하기 힘드리라.
저녁에 현교장과 김선생 차정숙선생은 친구 만나러 가고 정성모선생과 맥주 한잔하다. 강원도 청소년통일수련원 연구사님들과 합석하여 유익한 대화를 나누다. 소위 청소년통일수련관임에도 체험활동 위주의 통일교육만 강조하며 통일이론교육예산이 전혀 잡혀 있지 않아 통일강연초청 한번 하기 힘들다는 말씀에 씁쓸하다. 이 자리에서 이번 연수공문과는 달리 강사자격증 수여는 없고 자격을 인정만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고, 이후 많은 논란과 갈등이 있었다. 학교장에게 전화로 안부를 전해드리다.
판문점에서 (오늘 저 앞 판문각의 북한측 병사사진이 모든 중앙지 1면에 실렸다)
8월 12일(목요일)
아침에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고 순국선열묘를 찾았다. 이번에 북한산 주변 4지역에 둘레길을 조성하였는데 이곳 역시 원래 있던 길을 약간 손을 보고 표지판을 세워 둘레길 이라고 이름 붙였다. 유림, 양일동, 김창숙, 서상일, 김도연, 신숙선생묘를 차례로 참배하다. 내일 모레가 광복절인데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의 묘가 벌초도 안되고 대부분의 봉분에는 아예 잔디가 없고 잡풀만 무성하며 봉분이 일부분 허물어진 묘도 있다. 도대체 국립공원내에 있는 애국선열들의 묘지이고 일반인들의 참배가 이어지는 곳인데 관리자는 누구인 것인가? 설령 관리책임이 국립공원에 있다손 치더라도 가족들은 관리에 전혀 무신경하다는 것인가?
우리 일반 사람들도 할아버지, 아버지묘를 저리 방치하지 않거늘 애국선열들 자손들 너무 무심하다. 저녁에 오늘 앙드레 김 선생의 별세소식을 들었다. 76세라 하며 50년을 우리나라 최고의 디자이너로 자리하시면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너무나 아름다운 옷들을 창조하시니 그 공이 정말 대단한 분이다. 일직이 1968년 1월에 초등학교 동창회때 내가 퀴즈문제를 내서 상품을 줄적에 앙드레 김 선생을 묻는 문제가 있었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영화를누리셨는데 개인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성성이 강하여 결혼을 못한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 그래서인지 양자 하나를 두고 살았다 하며 일반인들과의 어울림 없이 살았으니 겉으로는 화려하나, 안으로는 외롭고 쓸쓸하였다는 그 분의 고백이 이해가 간다. 오늘이 우리 아들 이승수 생일이라 승원이랑 이모네집에 와서 엄마가 해준 밥을 함께 먹었다 한다. 축하 전화만 하였다. 27년전 우리 아들이 내게 준 행복은 언제나 유효하다. 앞으로도 그러려므나.
통일교육전문강사 자격증아닌 수료증만 발급한다는 소식에 반발 움직임이 대두되었으나 분임장 대표들이 교육원측과 원만히 합의하였다 한다. 수료증 문구에 < ~수료하였으므로 통일교육전문강사 자격을 부여합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한다고 하며 추후 자격증 수여가 이루어지면 소급 적용하기로 하였다 한다.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싸워서 해결될 일이 아니며 또 나는 내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도하고 또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3분임이 저녁식사후 함께 나가서 막걸리 파티를 하다.
유 림(1894-1861) 만주에서 독립투쟁. 무정부주의 운동. 임시정부 국무위원. 해방후 독립노동당 당수
양일동(1912-1980) 옥구출신.1935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간 복역. 제3~5대 민의원.1970년 신민당 정
무위원. 제8대 국회의원.1973년 민주통일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1977년 민주통일당 총
재. 제10대 국회의원. 나와 형제처럼 지내는 채수환 교수 아랫집에서 출생한 야당 지도자
김창숙(1879-1962) 임시정부 부의장. 이승만정권에 항거. 성균관 대학교 창립하여 초대 학장
서상일(1887-19620) 독립운동가. 대동청년당 조직.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총무역임. 진보계열
김도연(1894-1967) 호는 상산. 한국민주당 총무. 초대 재무부장관. 2.8독립선언으로 2년간 투옥. 1942년 조선
어학회사건으로 2년간 투옥.1945년 한국민주당 총무, 1947년 입법의원. 제 3·4·5·6대 국회
의원(1954~63), 민주당 최고위원, 국회 민의원 부의장.
신 숙(1885-1967) 천도교 지도자. 독립운동가. 남북협상대표단
8월 13일(금요일)
아침에 국립4.19묘지를 찾아 참배하다. 이전 연수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저녁 6시면 문을 닫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연수에 아침 6시에 문을 연다는 것을 알았기에 운동도 할 겸 반드시 찾기로 하였으나 그간은 다른 선열들 묘역을 먼저 찾느라고 늦게 되었다. 금년이 4.19 민주혁명 50주년이다. 민주시민혁명당시에 희생당한 학생과 시민들의 영령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김영삼대통령때 성역화하여 아주 큰 규모로 아름답게 조성되고 조형물들도 대단히 아름답고 웅장하여 감격스럽다. 이때 서울시경국장으로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이 유충렬씨로 우리 고장분인데 처음에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복역중 사면되어 오늘까지도 생존하여 계시며 고향에 세운 대학이 바로 <벽성대학>이다. 아나운서 출신의 유정현 의원이 그 분의 손자이다. 이것도 역시 역사의 수수께끼다. 유충렬선생도 자기 직분에 충실한 것일 뿐 무슨 죄가 있으랴? 어떤 이상한 사람들이 사람을 열명도 더 죽이고 성폭행을 한 인간들에게까지도 <인권이네>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없네> 하는 이상한 논리로 인간이라 할 수 도 없는 아니 인간은 커녕 동물이하의 흉악범들을 비호하며 사형제도 폐지를 외친다. 그러다가도 요즈음 성폭행범들로 인하여 국민 감정이 고조되고 흉악범들은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면 소리없이 수면아래로 들어가고 잠잠해지면 또 다시 희생자 가족들의 찢어지는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단체와 사회활동을 위해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런데도 그들이 훗날 인권운동가로 추앙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요, 실체와의 괴리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소중해서 절대로 인간이 인간을 판결하여 죽일수 없노라!
역사와 철학이 빈곤한 자들이여! 차라리 그처럼 치열한 인간사랑의 정신이라면 전쟁반대 운동을 벌이는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수천 수만의 억울한 죽음을 가져오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그대들의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소중함이란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모두에게 적용해서는 안되며 사람답게 사는 사람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답게 살면서도 억울하게 죽어가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정신이 악마인 사람아닌 사람들마저도 인간이라 하면서 감옥에 모시고 국민의 세금으로 밥 먹여 주고 잠 재워주고 건강하게 살라며 대접해 주자는 것인가? 악마 같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착한 짐승이나 산새들의 목숨이 더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았으면 한다. 오늘 모처럼 오전수업이니 기분 나이스!
마포로 가는 길은 시내를 택하였다. 작년에 마포에서 화진포로 가는 길에 세종로와 종로를 거쳐가기는 했으나 솔직히 성북구나 강북구길은 잘 모른다. 네비가 가라는 대로 미아리와 광화문을 거쳐 세종로를 지나 무려 1시간 반이나 소요하며 도착하다. 생리현상을 해결 못하여 매우 힘들다.
오후에는 양드리와 함께 효창공원을 찾았다. 승수가 2006년 제대후 2년여 숙대옆에 살았는데 그때 공원에 들어가보지 못했기에 오늘은 운동삼아 걸어서 가기로 했다. 날이 더워 여유롭게 걸어 30분만에 도착한다. 후문입구에 대한노인회총본부가 있고 조금 들어가니 대한노인회서울지부가 있다. <노인이 되어도 이 정도에서는 놀아야지 내가 어디 시골 노인당에서 놀수 있나?>라는 내 딴에는 위트라고 한 소리가 웬일로 오늘은 양드리에게 조금 먹혀들었는지 반응을 보여준다.
이 효창공원에는 엣날부터 유명한 효창운동장이 있고 김구선생의 묘역및 거대한 백범 기념관, 이봉창 윤봉길 선생 백정기 의사의 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의 묘도 있다. 모두 찾아 뵈었으나 문이 닫혀 있어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다.
10월이면 입주하는 아파트 리모델링 비용을 업자와 상담하니 비용이 그리 크지 않아 다행이다. 적어도 10년은 살 예정으로 예쁘게 꾸며주고 싶은데 큰 부담이 없으니 다행이며 너무 다 갖추어 버리면 우리 아들 결혼할때 신부(누가 되려나? 윤정이?)가 재미 없으니 가구는 되도록 구입하지 않기로 하다. 현재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보기에.
김 구(1876-1949) 호는 백범. 독립운동 지도자. 임시정부 주석
이봉창(1900-1932) 독립의사. 일본에서 천황 폭탄 저격미수
윤봉길(1908-1932) 상하이 훙커우 공원(답사함) 일본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
백정기(1896-1934) 정읍 영원출신의 독립투사. 무정부주의운동가. 영원면에 사당이 있고 답사했음.
이동녕(1869-1840)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직무대리,주석, 임시의정원 의장 역임
조성환(1875-1948) 임정 국무위원.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신민부 외교부위원장
차이석(1881-1945) 105인사건으로 복역. 임정의정원 부의장 및 국무위원.
8월 14일(토요일)
오전에는 아침에 공덕삼성래미안 4차 아파트 공원을 산책하다. 13년간 소비자 만족도 제 1위라는 아파트 답게 공간활용을 잘하여 아름다운 공원들을 꾸며 놓았다. 특히 공덕삼성래미안 4차가 경사를 이용한 자연공간활용과 조경이 뛰어나서 우리 양드리는 여간 탐을 내는게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러울거 없노니 코 앞에 놓인 곳이고 우리 아파트와 문을 내어 통하도록 조치하여 놓았으며, 내가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나를 몰아 낼 사람 아무도 없으니 무슨 근심이랴? 그냥 내 아파트이거니 생각하면 되지요.
오후에 처제랑 셋이서 본격적인 궁궐 답사에 나서다. 먼저 택시로 경희궁으로 가다. 경희궁은 광해군때 지어지고 인조이후 조선후기 250여년 간 정궁으로 사용된 궁궐이며, 동궐인 경복궁과 대비하여 서궐이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소실되었으므로 무려 인조부터 철종때까지 임금이 살았으니 긴 세월 동안 조선의 정치가 이루어진 곳이다. 서울의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이 경희궁이 3대궁이며 그외 창경궁과 덕수궁(경운궁)이 있다. 기록으로는 조선후기에 경희궁과 소실뒤 곧 다시 지은 창덕궁이 모두 정궁구실을 하였다하니 판단이 어렵고 더 조사가 필요하다. 넓은 궁궐터는 일제가 강점한 뒤 경성중학교를 짓고 이를 이은 서울중,고가 있다가 지금은 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이 되었고 그 뒤편으로는 서울시 교육청이 자리잡고 있다.
후원으로 가보니 옛시절에는 창덕궁처럼 뒤로 산이 있어 물이 흘렀던듯 하고 지금도 큰 바위틈으로 적은 양이나마 물이 흐르고 있어 시원하다. 남은 건물들은 훼손이 없이 아주 잘 보존되고 있으나, 작은 궁궐로 전락한 모습이 애처럽다. 하지만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아 외롭지는 않은 모습이다.
정문을 나서 왼편으로 돌아 서울 역사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아름답다. 오늘 반드시 찾고자 한 곳이 바로경교장이다. 김구선생님이 귀국후 사시다가 안두희에 의해 돌아가신 역사의 현장이다. 지도상으로 분명 이 근처인데 물어도 물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 한참만에 찾아보니 강북성심병원 주차장에 있다. 병원재단이 인수했다는데 그 사실이나 위치나 팽개쳐진듯한 모습이나 모두 개운치가 않다. 다시 경희궁 정문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 성곡미술관으로 향하다. 1960년대 쌍룡그룹 창업주이며 공화당 중진이었던 성곡 김성곤(1913-75)의원을 기리는 미술관인데 입장료를 받는데다 전시물이 그리 흥미를 주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재벌오너이며 집권당의 핵심중진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1971년 오치성 내무장관 불신임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는 정계를 은퇴하고 63세에 세상을 떴으니 아쉬운 삶을 마쳤다. 당시 3선 개헌을 강행하던 시기에 박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하여 저질러진 부끄러운 시대상이다.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대시는 양드리를 꼬셔가며 기어이 사직공원으로 간다. 사직공원은 농토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사직단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곳이었으며 종묘사직을 붙여서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 되었다.
광화문으로 향한다. 내일은 광복절 65주년이라 행사가 크고 광화문은 6.25때 불에 타서 박정희 대통령시절 콘크리트로 지어졌는데 이번에 10년 걸려서 옛 광화문을 제자리를 찾아 복원하고 드디어 내일 현판식을 갖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 때 옛 중앙청 건물(일제때 총독부건물)을 헐고 경복궁 원래의 건물들도 복원되어 본래 모습을 조금을 되찾은 것이 된다. 옛 중앙청 건물은 다행히도 허물기 전에 답사해 두었다. 물론 저 뒤편으로는 현재 청와대(일제때 총독관사) 본관건물이 광화문과는 약간 다른 11시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북악산과는 오히려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사진도 찍으며 광화문을 구경하고 이화장에 가려다가 광장의 행사장에 가보니 오늘 밤 8시에 광복 65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린다. 양드리가 매우 피곤해 하므로 일정을 바꾸어 이화장은 다음으로 미루고 저녁식사를 하고 음악회를 본 후 귀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의 식당골목에서 일식우동을 먹고 커피숍에서 기다리다가 음악회가 시작된다. 진행은 다음과 같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광복 65주년 기념 음악회장에서
인사 - 오세훈시장
지휘 - 정명훈
악단 - 서울시립교향악단
성악가
소프라노 케슬린 킴-미국활동, 세계적 성악가, 오페라 및 가곡 그리운 금강산 열창
테너 김재형-유럽에서 활동, 오페라 및 가곡 선구자 열창
바리톤 김주택-청년, 이태리국립음악원 유학중, 국제공쿠르 다수 입상, 오페라 및 가곡 비목 열창
합창단 -서울시립합창단, 그란데 오페라 합창단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와 라트라비아타를 세 성악가가 열창
한국 락의 대부 신중현, 정명훈, 서울시향이 안익태의 한국환상곡과 신중현의 애국가 연주
전 출연진이 아름다운 강산 합창
캐를린 킴과 김재형의 노래실력이 대단하다. 우리 한국의 국력이 요소요소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였고 성악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성악가들인데 정말 감동적이다. 가끔씩 비가 뿌리는 중에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애국가와 아름다운 강산을 함께 부르며 앵콜을 하는 모습 또한 큰 감동이었다. 나도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면서 괜히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짐짓 그러지 아니한 척 태극기를 크게 흔들며 감동에 빠져 들었다. 아! 아름다운 우리 강산! 행복한 대한민국! 정치인들 시민단체들 싸우지들 마세요~ 먹고 살기들 힘들어 그러시죠? 나만 옳다하지 마시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틀리다 하며 흑백논리로 몰아부치지 마시고 선동으로 포퓰리즘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하지 마시고 서로 서로 이해를 구하고 토론하시고 타협점을 찾으시고 용서하시고 악수들 하세요. 국민들이 정치와 사회단체들 때문에 피곤한거 아닐까? 해외여행 때 행복하고 연수원에 들어와 행복한 건 갈등과 분열과 싸우는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보여주는 뉴스와 멀어지기 때문이랍니다. 오늘 나라사랑 생각만 하면서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수준높은 오페라와 우리가곡을 현장에서 들으니 정말 행복 최고다.
8월 15일(일요일)
오전 내내 발표자료를 정리하다. 이미 연수 오기전에 충분히 내 나름대로 준비한데다 구태여 크게 컨셉을 바꿀 생각이야 없지만, 일주일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기고 다들 열심히 준비하니 나도 점수와 관계없이 놀 수 많은 없지 않은가? 지도안도 수정하고 발표문도 수정하고 PPT도 수정하다.
오늘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통일세를 언급하였다. 독일은 통일 20년 만에 이제 어느 정도 통일후의 불안정이 해소되고 유럽의 최강국으로서의 면모를 확보하고 EU의 핵심국가로 자리잡았다. 독일의 통일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커서 우리사회에서는 통일을 원치 않는 분위기가 팽배할 정도이다.
하지만 통일은 우리가 원한다고 금방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듯이 반대로 어느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고 본다면 반드시 통일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독은 통일당시 인구가 서독의 1/4이고 국민소득은 60-70%였다. 그런데도 사회적으로 안정되기까지 20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정말 앞이 캄캄하다. 인구는 절반이요 국민소득은 1/20이니 수치상으로는 20배가 힘들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독일을 벤치마킹하며 그 보다 훨씬 더 빠르게 더 잘해 낼 수 있는 저력을 분명히 우리는 가지고 있다. 세계 최빈국에서 반세기 만에 G20이 된 나라가 아닌가? 한국개발원조사에 의하면 급격한 통일비용은 점진적 통일에 의한 비용보다 무려 7배, 약 2천조원이 필요하다 한다. 그러니 우리가 미리 미리 준비하는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며, 북한의 당연한 과잉 반응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좋은 방안을 마련하였으면 한다.
또한 대통령은 1994년 김영삼 대통령때 발표한 <민족공동체 방안>과 이 정부에서 제안한 <비핵개방3000>을 기본으로 하고 단계적으로 <평화공동체-경제 공동체-민족공동체>의 과정으로 통일을 이루고자함을 밝혔다. 대단히 환영하는 바이다. 다만 단계가 기존 방식과 말만 다를 뿐이다. 기존 방식은 <상호협력-남북연합-민족공동체>이다. 행여 김대중정부에서 2000년에 발표한 6.16 남북공동선언의 2항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으로 인하여 마치 우리가 북한의 연방제안에 동조하는 듯한 묘한 여운을 남긴것을 아예 잠재우기 위해 단계을 수정한 것으로 보고 싶다.
그러나 만일 남북연합(EU와 비슷한 형태)이 이루어 진다고 치자! 우리가 북에 대해 원조하는 부담은 크다. 그러나 그로 인한 분단비용은 최소화시킬 수 있고 북한동포들을 우선 먹여살릴 수 있고, 남북간에 경제적 발전을 위한 상호 이익을 최대화시킬 수 있으니 못할 것도 없다. 우리 정부가 걱정하는 것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과 우리사회의 일부 친북좌파들의 동향이 걱정일텐데 아니 우리 국민들이 누군데 김씨세습왕조 정부에 대해 비판의 입은 못질하고 북한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미와 동조만 해대는 친북좌파들을 용인하리오? 어쩌면 지나친 기우일 수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방식은 안된다.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다. 땜질식 통일이다. 다시 부서지고 깨질 수 있다. 21세기 새로운 대한민국의 창출이 절대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1세기에 절대 용인될 수 없는 김씨세습왕조와 무너지 버린 공산주의 사상을 붙잡고 경제적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무너져버린 북한이 어떤 방식을 동원해도 다시 일어서기란 불가능한데 이를 지원하는 우리 내부만 분열하고 갈등하고 국민들을 고통스럽고 불만은 팽배할 것이니 잘못되면 역사의 시계방향을 거꾸로 돌려 버릴 수도 있다. 연방제는 결코 현명한 통일 방식이 될 수 없다.
언젠가 평화적으로 자연스럽게 남북한 8천만 동포의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차분하게 그러나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여야 한다. 곧 그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리 멀지 않았다.
오후 3시에 마포현대를 나서다. 양드리는 승원이에게로 가서 모녀가 하룻밤을 함께 한다고 한다. 내부순환도로를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가서 가보고 싶던 정릉에 가기로 하다. 정릉은 이태조의 계비인 강씨의 능이다. 10만평정도의 산이 아직 능원으로 남아 있어 많은 지역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운동하는 산이 되어 있다. 능은 잘 가꾸어져 있다. 1398년 세자책봉문제에 간여하여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려다가 방원의 반격으로 소생인 방번과 방석이 살해당하는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잠들어 있어 그 행위에 대한 비판은 저리하고 자식잃은 어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일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한 분을 만나 애기해 보니 고창고 출신이며 이의방선생의 제자이다. 참으로 대성고에 함께 근무하면서 내게 많은 정과 도움을 주시고 큰 힘이 되어주신 형님이 정년퇴직하셨음에도 한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기 짝이 없고, 퇴직후 우울증세까지 있으시다니 조만간 찾아뵈어야 한다.
정릉은 북악스카이웨이와 접해 있으며 정릉유원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말 그대로 능원으로서 사적지이고, 정릉유원지는 그 보다 더 북쪽으로 북한산 기슭에 있었다.
8월 16일(월요일)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다. 아침에 지난 번에 미처 찾지 못했던 신하균 묘역과 광복군 합동묘역을 찾다. 신하균선생은 신익희선생의 아들로 바로 신익희선생묘역의 옆에 있는데 규모가 너무 작아 영락없는 일반인들의 묘같아서 찾아내지 못하고 그냥 내려 왔었다. 광복군 합동묘역은 예전에 참배했으나 다시 확인한 것이다. 합동묘역에는 광복군 18인이 모셔져 있다
교육원 입구에 이몽룡선생묘 표지판이 있는데 한참 찾았다. 교육원이 울타리가 쳐져 있으므로 밖에 있는줄로 여기고 점심 때 나가보려 했더니만, 등잔밑이 어둡다고 젠장 교육원내 기슭에 아주 잘 자리잡고 있다. 식사후 현교장과 함께 올라가 보니 연수원의 관리를 받는지라 그 많은 애국지사 묘역중 가장 잘 관리되어 있다. 이묭룡선생의 묘자리가 진실로 명당이로다.
오늘 객관식 시험이 있었다. 5개 교과에서 출제되었는데 경제 문제가 어렵다고 행정파트에서 걱정하며 약간의 힌트를 주었으나 정작 너무 쉬워서 모두 맞은듯 하여 확인이 필요 없었다. 또 확인하면 뭐하나?
저녁에는 모처럼 전북인 모두 시간이 허락하여 가까운 리이브 카페에서 맥주 한잔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다.
모처럼 서울에 2주일을 거주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다. 가까운 대진대 김성진 교수, 호원대 서울캠퍼스 한대희 교수, 일산의 봉준영선생, 제자인 주선섭, 집안형인 이재오 선생등을 생각만 하고 모두 포기하다.
신하균 : 신익희선생의 아들로 독립투쟁. 제 3,4,5대 국회의원
광복군 합동묘역 : 광복군으로 1943.7-1945.8 까지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순국
한 애국선열 17위를 모신 합동묘역
이몽룡 : 독립투사. 기독교 대표로 3.1 독립선언 33인중 한 분.
8월 17일(화요일)
아침에 차를 몰아 조병옥박사묘를 찾다. 어릴 때 라디오 연속극을 통하여 미군정하의 해방정국에서 경무총장을 맡아 수도청장을 맡은 창랑 장택상과 함께 치안책임자로 활동하던 모습들이 마치 TV를 보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넓은 묘역에 당당하게 모셔져 있고 이 산길에도 등산객이 상당히 많다. 내려온는 길에 공터에서 주민들의 에어로빅하는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건강을 관리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김승호선생과 걸어서 솔밭공원과 여운형 선생묘를 찾았다. 솔밭공원은 옛 우이동의 큰 소나무들을 잘 보존하여 조성한 공원으로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큰 솔밭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녁산책을 나오기도 하고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다. 여러사람에게 물어서 겨우 여운형선생묘를 찾아가니 큰 길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으나 문을 굳게 닫아 들어가지는 못했다.
도선사길로 들어서서 손병희선생묘를 찾다. 묘역이 어느 누구의 묘역보다 잘 정비되었는데 천도교측에서 관리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역시 굳게 닫힌 문이 있어 들어가지는 못하다. 무려 1시간 반을 걸어 힘들었고 교육원 가까이 도착해서 김선생과 시원한 생맥주 500CC를 무려 세 잔이나 마셨다.
참 나도 너무하네! 연수오기 전 건강검진시 내시경검사결과 술을 조심하라 하였거늘 안마시는 날이 없군요? 폭주하지 않고 안주도 많이 들지 않으며 생맥주 겨우 두 세잔인데 하는 마음의 위안으로 마시는 기분좋은 시원한 생맥주 매우 좋아요. 대신 소주는 앞으로 안 마실래요.
조병옥(1894-1960) 호는 유석.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해방 정국에서는 경찰총수를 지냈으
며 정부수립후 UN대표단. 내무, 외무장관. 1960년 제4대 대통령 후보로 선거운동중
중병으로 미국에서 급서
여운형(1886-1947) 호는 몽양. 임시정부조직및 활동. 신한청년단 당수. 1930년대이후 국내에서 활동하
였고 국내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광복후 조선건국준비위원장. 좌우합작을 추진하
다 암살당함.
8월 18일(수요일)
아침부터 비가 줄기차게 내리네요. 우리 전라북도에 계속 비가 많이 내리고 여산에서는 큰 피해도 있다고 중앙뉴스로도 전해진다.
오후 한 나절은 내일 시연발표 연습시간인데 다른 분임들은 개인적으로 준비하나, 우리 분임은 모두 직접 담당교수 앞에서 예행연습을 한번 하고나니 아무 걱정이 없다. 현교장은 발표주제와는 약간 방향이 다른 지도안을 준비하였으므로 담당교수에게 지적을 받고 주제를 달리하느라 매우 힘들어 하신다. 내가 <통일한국의 미래>로 주제를 제안하고 개요를 설명해 드리다. 주제는 정했으나 지난 휴일에는 쉬지도 못하고 PPT를 준비하고 이후 교수에게 지도를 받아가며 지도안을 겨우 완성하시고 발표준비가 끝나니, 편한 마음으로 연수에 나섰다가 뜻밖의 시달림(?)에 상당히 버거워하며 피곤해 한다. 외국어전공에다 가르친지가 10년이니 그러지 않으시겠는가?
저녁에는 정선만 선생과 김승호 선생이 맥주한잔 하자는 제안인데, 경남의 황선생님, 서서울중 전 교감선생님과 강원도통일학생수련원의 두 연구사님들의 제안도 있어 모두 합석하여 통일교육전문강사반의 장래에 대해 많은 발전적인 활동방향을 논의하다.
8월 19일(목요일)
오늘은 시연회(실기시험)가 있다. 우리분임은 오전에 하게 되어 있어 천만 다행이다. 일찍 끝내고 오후는 편안히 쉬거나 산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대단히 열심히들 준비하고 발표도 잘한다. 특히 30대 젊은 교사들이 PPT구성과 발표능력이 우수하다. 나는 내 생전 프리젠테이션 수업은 처음인데다 파워포인트 기능도 전혀 없다. 그래도 이번 연수로 인하여 파워포인트 기초는 다시 알게 되고 (10여년 전에 호원대에선가 몇시간 배운 기억이 있다) 프리젠테이션 수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출세했다. 파워포인트를 많이 공부해서 젊은 교사들처럼 화면도 예쁘게 만들고 음악도 동영상도 올리도록 하겠다.
시연은 9시 20분에 시작하였고 우리 분임이 11명인데 내가 9번째이므로 11시 반에 하게 되었다. 나는 원래 중학교 도덕시간으로 45분 수업지도안을 짠 것이 아니고 고등학교 1개학년 특강으로 계획되었으므로 특강 3번째 시간으로 <남북한의 통일정책(방안)>이라는 주제로 미리 준비한 강의를 읽는 방식으로 시연하였다. 지도안에 의한 통일관련강의를 해본적이 없으므로, 그리고 통일관련 논술에 대비하는 이론적인 특강이므로 화면만 보고 강의하기가 어려워서 별 수 없이 취한 조치이다. 다행히 어제 한번 사전 연습이 있었고 작성하면서 대체적으로 기본 암기가 되었으므로 시선을 원고에 고정하지만은 않고 조금이나마 자연스러워서 다행이다. 점수는 별 관계 없는고로 무사히 창피하지 않게 마친것으로 만족!
오후는 자유시간이므로 먼저 가까운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1476-1506) 묘를 찾다. 자동차로 불과 10분만에 도착한 연산군묘는 그 규모는 작으나 그런대로 아담하게 꾸며져 있고 잘 관리되고 있다. 관리인도 있고 방명록도 비치해 두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포악하고 무능한 왕으로 낙인되고 중종반정으로 쫒겨나 군으로 강등된 사람이라 릉이나 원으로 불리지 못하고 묘로 불린다. 7살의 어린 나이에 폐비윤씨가 죽음을 당하고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미의 죽음에 대해 알고부터는 포악한 품성을 드러내어 두 번의 무오사화(1598)와 갑자사화(1504)를 일으키고 폐위된다. 비록 왕이라 하나 불행한 삶을 살다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매우 불상타!
연산군 묘 앞에 서울시 보호수 제 1호인 큰 은행나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나무는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가 높고 크다고 하는데 나는 가보지 못했으나 일직이 초등학교때 양평에서 군대생활하신 아버지로부터 들어서 그때부터 잘 알고 있다. 다음으로는 우리 무주에서 자동차로 불과 20분거리에 있는 충북 영동군에 있는 영국사 은행나무가 아주 일품이다. 무주에 오기 전에는 10여년 전 양드리와 충북지역의 문화재 답사 때 한번, 그리고 3년 전 전주제일고 등산모임에서 온 일이 있는 영국사는 이제 바람 쏘이러 나가는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내가 그 만큼이나 익산에서 먼곳에 근무하는 거지요. 국도로 아파트 정문에서 학교 정문까지 어쩌면 100km 가 딱 들어 맞는지 몰라요?길을 건너면 정의공주묘가 있다. 정의공주(1415년∼1477)는 세종 임금의 8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는데 언니 정소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세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으며 매우 총명하여 훈민정음 창제 때 세종을 크게 도운 공주로 알려졌다. 공주는 안맹담과 혼인하여 궐밖에 살고 있으면서도 아버지 일이라면 열과 성을 다했는데 무언가 만들기 좋아하던 세종이 발목에 조그만 칼심이 박혀 의원들마저 당황해 할 때 정의공주가 자석으로 칼심 조각을 빼낸 뒤 술 찌개미로 붓기를 가라앉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이 부부의 무덤이다. 산자락 낮은 양지 녁에 자리잡아 명당자리다.
자! 다음은 지난 주에 미처 주차장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어쩔지 몰라 올라가 보지 못한 도선사로 간다. 다시 가보니 주차장에서 단 5분거리다. 신라말 승려이자 풍수지리설을 들여온 도선이 862년에 창건한 절이라고 하며 1968년에 육영수여사의 도움으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절 규모는 꽤 크며 서울에 소재하고 북한산 삼각산 아래 자리한 절이므로 흥성하는 모습이 엿 보인다.
자! 이렇게 보고난 후인데도 아직 시간은 3시 반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무심코 북한산(삼각산)정상으로 가는데 까지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오르며 내려오시는 분에게 정상까지의 소요시간을 물으니 겨우 1시간 반이란다. 야호! 절호의 기회다. 무거운 비만 체중이지만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북한산에 오를 수 있는 호기다. 인수봉(803m)을 돌아 1시간 20분만에 정상인 백운대(837m)에 올랐다. 동쪽 정면으로는 강북구와 도봉구가 보이고 바로 왼편으로 그 유명한 인수봉이요, 2시 방향으로는 만경대(800m)다. 바로 이 세 봉우리가 소의 뿔 같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리다가 오늘날 북한산이 된 것이다. 시 한수 읊고 가자.
가노라 삼각산아
김상헌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병자호란때 척사파로 삼학사 중 한 분인 김상헌(1570-1652)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읊은 시이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아마 이 때 지은 시로 보이며 귀국한 뒤 대로(大老)로 추앙받았고 83세로 죽은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니 팔십평생을 부귀 영화도 누리고 절개로서 효종때는 왕으로부터까지 큰 존경을 받고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니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다.
김상헌에 대해 적다보니 평생을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하시고 민주화에 앞장서시며 온 국민의 존경을 받으시던 김수환추기경님이 노무현 정부시절에 노빠들과 일부 과격반미친북주의자들의 지나친 행동에 조언말씀을 하시자 소위 사회 지도자라는 인간들이 추기경님을 맹비난하고, 무지하거나 아직 어린 노빠들이 벌떼같이 인터넷을 통해 욕질하던 치욕스런 우리의모습이 생각나네요. 정말 그 시대가 갔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이 마비되고 무시되고 선동과 감성만이 지배하던 무서운 시대를 이끌던 혐오스런 인간들이 국회의원으로 사회지도층으로 정치지도자로 남아서 애국자로 행세하며 국회에서 길거리에서 떠들어 댄다. 그 인간들을 포함한 국회의원들이 엊그제(8월 24일인가?) 국회의원 단 한번만 해도(뺏지 한번만 달면)월 120만원 지급받는 국회의원 연금법을 모두들 힘을 합하여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한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내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찬성하였다가 인터넷 공격을 무수히 받고 개정안을 내겠다며 궁색한 변명을 한다.
다시 가보자 북한산으로. 북한산의 아름다움은 저 아래에서도 능히 보이지마는 정말 정상에 올라보니 장관이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그처럼 백운대와 인수봉을 찾았구나! 가까운 인수봉에 여섯사람이 올라가 있는데 옆에 계시는 아주머니가 <저 분들 모두 가족이래요. 여자도 한 명 있어요>라고 알려주신다. 과연 그들이 자일을 잡고 내려오는데 아휴!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보기에도 아찔하다. 줄을 잡고 이 까짓 백운대 오는 것도 쬐끔 무섭더라니 언감생심 인수봉은 평생에 오를 꿈은 아예 꾸지 말아야지. 오르나 마나 지척에서 인수봉 바라보았으니 오른거나 진배없제?
내가 일직이 등산을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은 20대에 산에 찾아다닐 만한 경제적 여건이 안되었기 때문이다(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입니다). 젊은 시절에 오른 산이라고는 1974년에 강민석 김용성과 함께 덕유산 향적봉(1614m)에 오른 것이 거의 유일하다. 우리나라의 5대 명산은 북한산 설악산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이라니 이제야 모두 오르게 되었으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부끄럽고 아쉬운 것은 아직도 설악산에는 수 없이 갔으나 정작 정상인 대청봉에 오르질 못했네요. 지리산 천황봉과 한라산 백록담에는 작년에야 올랐으니 산을 얘기하면 부끄럽지요. 그래도 백두산에는 두 번이나 갔고 청정한 날 천지의 장관을 만끽했으니 이만하면 부끄러움을 조금은 씻을 수 있는 건가?.
1시간 5분만에 하산하면서 너무 더워서 정말 계곡물 몇 바가지를 들이킨다. 이 깊은 산에서 흐르는 물이니 얼마나 깨끗하리요? 마음놓고 실컷 마셔댔다.
저녁에 총무과장 여러 사무관 및 직원들과 6분의 교사들이 중국식당에서 식사하며 대담을 하다. 여러분들이 연수내용과 강사활용문제 및 통일교육활성화방안에 대해 의견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무려 3시간이나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북한산성에 오른 건 난생 처음, 저 앞이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
정상인 백운대이며 저 앞은 더 유명한 인수봉, 저 멀리는 도봉산
8월 20일(금요일)
오전에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통일연수원장님의 강의를 통해 우리나라가 나아가고 있는 진정한 통일 추구방안 및 방향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게 되어 큰 수확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무슨 정부가 들어서도 통일의 방향과 목표는 같다. 자유민주주의 통일이다. 한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창조하는 통일이다. 그러나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유화책도 필요하다. 그러나 때에 따라 강경책도 필요하다.반드시 어떤 정책만이 옳고 어떤 정책은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하면 안된다. 방법론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대북정책에 대해 나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맹비난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형이하학적 관점이 아닌, 북한의 변화와 태도와 자세에 따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주변강대국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우리 정부의 대응전략에 대해 분석해 보는 수준의 아마츄어 정도라도 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수료증을 받았는데 생년월일이 맞지 않아 돌려드리다. 수료증 이수번호도 2010이 210으로 되어 있어 모두 다시 제작하여 보내주기로 하였다.
김승호선생과 함께 출발하다. 날이 너무 무더워서인지 정말 운전이 힘들고 졸려서 혼났다. 김선생 아니었으면 졸음 때문에 4시간 만에 익산에 도착하기 힘들었을 게 틀림없다. 행복 끝이다.
7시에 종정초등학교 선후배 모임에 나가 식사하다. 실은 지난 봄에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으신 강기원 선배님이 궁금하여 나간 것인데 아직 한방병원에 계신다고 한다. 존경하는 선배인데 아직 문병을 못하여 죄송하고 조속히 찾아 뵙기로 하자. 평소에 나의 일을 성실하게 도와준 고등학교 동창인 박완규 어머님 문상을 갔는데 정작 친구는 대만에 갔다가 바삐 귀국하고 있다고 한다. 익산시 의회의장을 하신 그의 형님혼자서 문상객을 맞고 계셨다. 방학동안 내내 만나지 못한 전경욱 교장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반갑게 만나 한잔하며 내일 전주에서 열리는 육일회(전북06교감연수동기회이며 내가 회장)에 함께 가기로 하다. 언제나 현명하고 정겹고 다재다능하며 으젓하고 판단력이 뛰어나고 항상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여 나가는 자수성가하신 멋쟁이 훌륭한 친구 전경욱 교장은 정말 내게 소중하고 고마운 친구다. 이만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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