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포크 여행

송창식과 우리는

청담(靑潭) 2010. 9. 3. 10:18

송창식과 우리는

 

 

  1971년도 쯤 어느 날 저녁 라디오 공개방송프로를 통해 송창식을 알게 됐다. 노래가 끝나면 방청객들의 환호가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일직이(?) 가요를 좋아하여 60년대에 남진과 나훈아가 노래하면 방청객들이 자지러지고 나역시 그랬던 기억들이 있으나 기타만 가지고 노래하는 포크가수 송창식도 저런 열성팬들이 있고 또 그가  새로운 가요 장르인 포크계의 최고의 자리에 놓인 사람임을 이 때 알게 된다.

  

  1968년부터 송창식은 트윈폴리오로 윤형주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여 곧 이듬해인 1969년에 해체되었다는데 당시에 우리는 이들을 잘 몰랐다. 주로 서울에서 음악다실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고 더우기 나는 고3인 1970년에는 오직 공부만 하느라 거의 노래를 들은 기억조차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크를 알게된 후 나는 이미 60년대 후반에 돌풍을 일으킨 신중현 음악(김추자, 펄 시스터즈, 장현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트롯트와는 단절하고 포크에 빠져든다. 송창식의 한번쯤은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한번쯤

한 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오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와 가는데 왜 이렇게 망설일까 나는 기다리는데 뒤돌아보고 싶지만 손짓도 하고 싶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지 한 번쯤 돌아서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겁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왔을 텐데 왜 이렇게 앞만 보며 나의 애를 태우나 말 한 번 붙여 봤으면 손 한 번 잡아 봤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천천히 걸었으면 기다려 봐야지 천천히 걸었으면

 

  송창식의 노래는 트윈풀리오가 부른 <하얀 손수건><축제의 노래><웨딩 케익>을 비롯하여 <피리부는 사나이> <딩동댕 지난여름> <꽃보다 귀한 여인> <비와 나>등 수 많은 노래를 무지하게 많이 듣고 불러댔지만 <한번쯤>은 그 중에도 노랫말이 큰 감동이었는데 당시 20대 초반인 내게는 이 노래가 당시의 남녀 젊은 청춘들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잘 표현한 것이 너무나 놀라울 뿐이었다. 고2학년 내지 대학초년생인 착한 남학생이 첫눈에 반한 예쁜 여학생을 무작정 따라가고 있는 광경이 숨가쁘게 다가오며 그 두사람의 가슴뛰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듣리는듯 하고 또 듣고 부르는 내가슴까지도 마구 뛰었다. 

  시에는 정말 소질없고 문외한인 내게 이런 가사는 유명시인들의 시보다도 훨씬 실감나고 강하게 어필되었는데 이는 이러한 노래들이 당시의 시대상과 젊은이들의 마음을 아주 잘 표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딩동댕 지난 여름>은 동서학동 하숙집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마구 엉터리로 두드리는 기타에 맞추어 무지 불러댔다. 도대체 무슨 한이 많아서? 아니면 바닷가 추억이 무에 그리도 강해서? 큰 방에 계시는 주인 아저씨 의식도 안하고 그리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고 스스로 부끄러워 평생에 나를 위한 채찍질이 되고 있다.  

 

 70년대가 가고 나의 20대도 가고 80년대가 되고 나는 교사가 되고  결혼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음악선생을 통하여 <우리는>이라는 노래를 알게된다. 1976년엔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처음 듣고 그 곡조가 너무 좋았더니만 이노래는 역시 가사가 일품이다. 쉬리 프르뒴의 <사랑>이라는 시 못지 않은 감동을 주는 놀라운 애정시이다.

 

 

 우리는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로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 하세월을 기다려 우리는 만났다
 천둥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만났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우리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은
 우리는 마주잡은 손끝 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기나긴 겨울밤에도 춥지 않은
 우리는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연인

 수 없이 많은 날들을 우리는 함께 지냈다
 생명처럼 소중한 빛을 함께 지녔다

 오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정녕 나는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가? 연예인들이 부자가 되고 초호화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영화배우나 탤런트는 용서가 되는데 의미있는 가수들은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조용필과 송창식과 조영남이 그런 집에서 산다고 한다. 두 조씨는 용서가 되는데 송창식은 안된다. <부자는 천당에 가려면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큰 부자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면 이미 그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영혼은 찾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본인도 모르게 썩은 영혼이다.어찌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노래가 나올 수 있으며 그가 부르는 노래에 그런 혼이 담겨질 것인가? 딴따라다.

  서울에서 50평대 이상 호화대형아파트는 10억대이나 내가 사는 전주나 익산에서는 3억내지 4억이면 입주한다. 입주한지 몇 년 지난 아파트는 2억 5천만원짜리도 있다. 나는 그런 대형 호화아파트에 입주하기를 별로 바란적이 없다.

  대형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아 구경하노라면 내가 상투에 짚새기 신고 양복입은 것처럼 왠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고, 무주의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교장이 평소에는 본인의 중형차를 타다가도 어떤때는 한번씩 사모님의 중고 SUV차를 가지고 오시는데 이를 오해한 우리학교 졸업생이“교장선생님은 차를 두 대나 가지고 있으면서 이차 저차를 번갈아 가며 타고 다닌다”면서 대학친구에게 교장선생님을 비난하더라는 말을 듣고 느낀바가 많아(교사는 고급차를 타는 것도 조심스럽다) 나는 교직에 있는 동안에는 평범한 차를 타고 오히려 퇴직하고 노인이 되었을때 젊은이들에게 존중받는 차원에서 조금은 좋은 차를 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 대부분의 서민들은 자가용은 꿈도 못꾸던 80년대 중반에 모 지방대학의 미술교수가 외제차를 비롯한 자가용을 혼자서 3대씩 가지고 탄다는 말을 듣고(팩트임) 크게 분개했던 일도 있다. 설령 그림을 비싸게 팔아 돈이 많다하더라도 그게 어디 대학교수가 할 일인가? 그림쟁이다. 송창식이 부자가 된건 잘 된일이나 부디 언제까지나 호의호식과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항상 외롭고 힘든 사람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시인이 되고, 우리의 인생을 따뜻하고 찬란하고 아름답게 지탱하여 주는 우리의 우상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20일(2010. 9.20 월요일)에 MBC에서 <놀러와>라는 프로에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씨가 출연하여 정말 재미있는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 주에 제2회가 방송된다고하니 기대도 크다.

 1. 네 사람은 1960년대 말에 알게 된다. 조영남(1945년생) 윤형주(1947년생)가 먼저 교회성가대에서 알게 된다. 윤형주와 송창식(1947년생)이 함께 노래하게 되고 트윈폴리오를 결성한다. 후일 김세환(1948년생)도 함께 하게 된다.

 2. 한 시대에 이들이 만나 이장희 김민기 양희은 등과 새로운 우리의 대중음악 장르, 소위 한국포크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들을 이어 오늘날 또 다시 한국의 새로운 대중음악을 창조하여 아시아에 대중음악의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이수만(1952년생) 양현석(1969년생) 박진영(1972년생)이 있다. 대단한 수재들이며 공부가 아닌 음악으로 성공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이끌어가며 국력을 신장시키니 부러운 사람들이요 훌륭한 사람들이고 대단한 사람들이다. 

 3. 조영남씨는 시대의 이단아(윤여정과 이혼하고 그 뒤 아주 젊은 여성들과 동거를 여러번씩이나 하였는데 최근에 동거하던 20대 여성과 헤어진 뒤 요즘 애인은 어느 20대 아나운서라데요)라서 아주 불쾌한 사람이며 별로 그의 노래도 안좋아하는데도 예전에 <제비>를 18번으로 한적이 있고, 요즈음에는 <모란동백>을 즐겨 부르니 나도 참 이상합니다. 이 사람이 윤형주등 세사람으로부터 비정상인간형이라면서 집단공격을 받으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자인하는 데서 내 마음이 조금 편해 졌다. 웃기는 인간이면서 재미있는 인간형이다.

 4. 송창식이 아주 젊었을 적에 거짓말도 자주하고(홍대에 다닌다고 속이고, 심지어 등록금 잃어버렸다고 까지 했다는 조영남 공격에 어쩔줄을 몰라했다) 스스로 지금도 철이 안들었다며 <죽는 날이 철이 드는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외다.  

 

 지난 달 말 두 번에 걸쳐 MBC에서 방영된 <놀러와>는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젊은 네티즌들이 3-40년전에 저런 대단한 포크가수들이 있었다는데 놀라고, 시적인 노랫말과 아름다운 선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오직 포크만 좋아하면서 남들로부터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에서 재미없는 노래만 한다느니, 흥을 깬다느니 핀잔도 많이 듣고(반 농담으로) 우리 양드리로부터도 시대가 변한지 수십 년인데  아직까지도 오직 포크와 발라드만 좋아한다면서 놀림도 당하곤 했는데 이번 프로를 본 젊은이들이 포크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니 영원한 코리안 포크 맨인 나로서는 대단히 기쁜 일이다. 2010. 10 첫주

 

  세시봉이 요즘 그 인기가  대단하여 전국 투어를 계속한다고 합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이들을 좋아하고 지금까지도 이들과 함께 살아왔고 이들의 음악의 아름다움과 진가를 주장해 왔지만 이처럼 다시 되살아 날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사자들은 오히려 나보다고 더놀래는 모습입니다. 사실 세시봉 3총사와 이장희가 원래 주인공인데 음악적으로 한국형 포크와 별 관계없는 조영남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하여 끼어든 것은 그들과 함께 노래를 같이한 당세대인 나로서는 매우 못마땅한 일입니다. 조영남은 세시봉 3총사와는 전혀 다른 음악세계의 또 하나의 대형가수일 뿐이기에 말입니다. 2011. 4. 26

 

  

 

 

 

 

 

맨처음 고백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번 먹는데 하루 이틀 사흘

 

돌아서서 말할까 마주서서 말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일 주일 이 주일

 

맨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 쭈물 바보 같으니

 

화를 내면 어쩌나 가버리면 어쩌나

눈치만 살피다가 한 달 두 달 세 달

 

내일 다시 만나면 속 시원히 말해야지

눈치만 살피다가 일 년 이 년 삼 년

눈치만 살피다가 지나간 한 평생

 

  만난지 300일이 넘으면 꽤나 오래 사귄거라는 게 이 시대 사랑 풍속도라데요. 젊은이들이 이런 사랑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요? 다시 10대로 되 돌아 간다해도 나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2010. 11.11 빼빼로 데이 저녁 정확히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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