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그리움

남성고등학교

청담(靑潭) 2010. 9. 27. 20:56

 

 

 

 

 

 

 

남성고등학교

 

입학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까지도 전 세계 어느나라에서나 어느 한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 현재의 그 사람의 지위와 인격이 가장 핵심요소가 되겠지만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잘 파악할 수가 없는고로 반드시 그 사람의 역사를 찾아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의 출신지역도 보고 학력도 보게 되는데 학력은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어느대학을 나왔는지를 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는지를 알게 된다. 

  1980년대 초부터 평준화가 진행되어 요즈음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서울대학교니 고연대니 카이스트니 포항공대니 하면 인격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의 능력을 일단 인정하게 되고, 우리 지역사회에서는 전고니 전여고니 남성고니 이리고니 군산고니 신흥고니 하면 좋은 학교 나왔다고 일단 인정을 받는다.

  나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다행이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끄럽게도 조금이나마 인정을 받으며 살아 왔으니, 실로 나에게 남성고등학교는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작용하여 왔고 고맙고도 부끄러운 일이로되 내 인생에 주어진  크나큰 덤이었다.

  그토록 공부도 열심히 안하고 그래서 공부도 별로 못하던 내가 입학시험을 보니 예상외로 중간성적으로 합격하게 되어 속으로는 무척 부끄러웠으나 겉으로는 그리 공부 못하지는 않은 척 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니 우수생의 상당수가 전고로 가고, 성적이 안나오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다른 고교로 빠져 나가고, 다른 중학교에서 그래도 우수하다는 학생들이 많이 입학했는데 왠 이해못할 결과인 것인고?

 

 

 

 

 

 

 

1학년

 1학년 2반이다. 지정만(사업,전북대 총동창회 사무총장) 구연호(기업체 사장) 장관익(초등교사,작고) 김용문(고교교사) 문영찬(사업가) 홍기표(목사) 등이 우리 반 내 근처에 앉았던 친구들이다. 관익이는 중학교 3학년때 부터 연속 한 반이 된다. 중3 때도 나와 친하고 싶다면서 번호를 정할 때 내 옆에 살짝 붙더니만, 고등학교에서도 다시 한 반이 되고 옆 번호이다. 중학교 1학년때 36번, 2학년때 46번, 3학년때 56번이었는데 예상외로 키가 자라지 않아(나는 내 키가 후일 175cm정도 되고 그래서 당시로는 매우 크고 멋있는 사나이가 될 줄 예상했는데 어이없이 빗나갔다. 아버지가 174cm이셔서 당시로는 꽤나 큰 키이시고 체중도 80kg이셨는데 나는 여성 유전자가 우성이었나보다. 양가 남자들은 대부분 큰데 우리 할머니가 작으셨다. (네 분의 외삼촌들이 모두 173cm이상 177cm까지인데 대준이 삼촌과 나만 170cm가 못되는 슬픈 운명(?)을 물려 받았으나 체격은 괜찮아서 체중이 80kg이 되는 덕택에 작은 사람 취급은 받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고등학교 1학년에 다시 36번이 되었다. 이 때부터 장관익이라는 친구와는 운명적인 만남인것 같은 생각이 든다. 1학년때 김용문과 함께 트리오라고 할 정도로 붙어 지내며 친하게 지냈고 나중에 모두 교사가 되었다.

  담임은 김진악선생님이시며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고 즐거운 수업을 해 주셨다. 우리 은사들이 대부분 고교 선배이시고 서울대 사대출신이시기에 실력이야 정평이 났고 김진악 선생님은 우리가 졸업한 후 배재대학으로 옯기셨다.

  우리 학교가 중학교때부터 체력단련을 중시하여 학교에 등교하면 곧장 운동장을 돌아 철봉에 단 한번이라도 매달려야 교실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이것은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좋은 체력훈련이자 건강교육이었다. 그래서 고교생이 되어 우리들 대부분은 차오르기와 배차기를 못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고 턱걸이는 기본이 7-8개였다.  6.26동란과 52년과 54년의 대흉년을 거치며 태어나고 자랐으니(우리 동기들은 49년생, 50년생도 있고  51년생이 상당수가 되며 52년생이 대부분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고 그래서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았지만 친구들이 다들 체력만큼은 좋았던 것은 전적으로 저 아침등교 운동덕분이었던 것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당시 고등학생인 우리들 중 전교에서 가장 큰 학생이 184㎝이었고 반에서 175㎝ 이상이 그저 한둘이 있었다. 배구선수들이 있었지만 겨우185-187㎝였으니 요즘 아이들과 10㎝의 차이를 보인다. 당시 우리들의 평균키는 168㎝정도였는데 요즘은 173㎝라 한다. 평균키는 5㎝ 차이라지만 요즘 고등학교학생들은 180㎝이상이 한반에 5-6명씩 되고 175㎝가 안되면 친구들이 놀린다니 격세지감이로다. 대한민국이 변하고 발전하였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다.

  이처럼 체력을 중시하는 학교방침이 강하였고, 연합고사나 학력고사 체력장이 생기기 전에 우리학교에서는 우리학교만의 체력장이 운영되어 가장 최고급이 E급으로, E급취득자는 약!0%였고 나는 공부는 10%에 못들면서 체력장 E급은 3년간 해마다 획득하였으니 그것 참 장하다. 달리기 턱걸이 뜀뛰기 허리굽혀펴기 공던지기 배차기 차오르기 등등 모두 고루 기본은 웬만큼 했기에 취득한 것이다. 아무튼 학생회간부와 학급실장과 규율부원들이 칼라로 제작된 간부뺏지를 찼고 체력장 E급취득자들은 역시 칼라로 제작된 E급뺏지를 당당히 차고 다녔고 그 위상은 간부뺏지 이상이었다.

  내가 요즘 아침운동하면서 호기심이 일어 100M 달리기를 해보니 15초 6이 나온다. 솔직히 고등학교때도 달리기는 잘하지 못해서 14초 5정도 뛴 것으로 기억되는데 40년이 지났는데도 이 정도면 휼륭하나요? 고교때 12초대를 뛰었다는 50세의 부장들과 겨루자고하니 다들 겁(?)먹고 거절한다. 정말 열심히 아침마다 연습하여 15초대 임을 체육부장에게 확인받아야 겠다.

  특별한 추억도 아름다운 기억도 별로없이 고등학교 1학년의 시절이 흘렀는데 시골에서 버스통학을 하기 때문에 항상 오후 5시 50분차로 집에 가게 되니 무슨 추억거리가 그리도 있을 수 있으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정이 근심가득하던 차에 다행히 국민학교교사부족으로 일반대학출신 모집이 있어 중등교사 자격증이 있으시던 아버지께서 군산교대에서 연수를 받으시고  고창군 후포국민학교로 발령이 나셔서 집안 경제가 조금은 풀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선희는 이미 학업을 중단해야 했었고 지금까지 큰 아픔으로 남게 된다.

  학교에서 전교생이 유도를 주 1시간씩 하게 되어 체육대회때는 유도로 뛰었다. 중학교 3년동안은 체육대회때 씨름을 했는데 고등학교때는 3년간 유도만 하게 되었다. 씨름성적은 기억에 별로 안좋았으나(중3때 결승에서 뼈대가 좋고 깡이 있는 모 친구와 5분간 승부가 나지 않아 허리가 끊어지는줄 알았었다. 뼈가 약한 내가 결국 무너졌다. 그 친구도 서울교대에 진학하여 현재 교사이다.)  유도성적은 좋았다. 수업시간 외에 개인적으로 도장을 정확히 일년간 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가을 어느 일요일에 전 선생님들께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가정방문행사가 있었다. 중학교 이후 처음 생긴 일인데 영문법을 담당하시는 김형두선생님께서 백산면을 담당하여 조종리(강재춘)를 거쳐 우리집까지 오셨다. 마땅히 드릴 것도 없어 겨우 마루에 걸터 앉으시고 엄마와 몇 말씀 나누신 뒤 가셨다. 작은집 (석영형)댁을 들린 뒤 박석리(윤주일)를 거쳐 남산리로 가신다고 하셨다. 남산리에는 우리 동창인 강신묵과 강영석 그리고 1년 선배들이 둘이나 있었다. 당시 이리에서 선생님이 버스를 타시고 시골의 학생들 집에 오시는 것은 크게 기억될만한 사건이다.(하긴 우리 아버지가 축구를 워낙 잘하셨는데 1951년 이리공고 1학년때 축구선수로 발탁하려고 학교에서 체육선생님, 교감, 교장이 각각 한번씩 이곳 돌제까지 찾아오셨으나 끝내 할아버지의 승락을 받아내지 못하셨고 아버지는 축구선수는 커녕 고1 열여덟에 우리 어머니와 결혼을 강제 당하시는 역사를 쓰셨다.)  김형두선생님은 해방후 이미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인텔리 선생님이시고 풍채가 좋으시며 인자하시고 품위있고 교양있으신 세련된 선생님이시다.

  내가 양드리와 결혼할때 우리 둘이 남성 동문중심의 써클에서 만났으므로 주례는 남성의 은사로 정하자고 한뒤  우리 두사람이 모두 강의를 들은 은사님으로 정하기로 범위를 좁히자 가장 모시고 싶은 분으로 김형두 남성고 교장(후일 남성여고에서 정년퇴직)으로 정하고 주례를 부탁드렸고 기꺼이 맡아 주셨다. 양드리는 재학시 교감선생님으로 예뻐해주셨다지만 나는 1년때 영문법 배운것외에 별다른 인연이 없었으나  나도 기꺼이 모시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리집에 단 한번 가정방문 오셨던 그 인연이 크게 작용하였던 듯 싶다.

 

 

2학년

   2학년 2반이다. 담임은 정병호선생님이시다. 역시 장관익이 함께 2반이 되고 이 때 이종철(초등교사) 이윤수(중학교교사) 성시종(사이버대학 총장) 이완수(사업가) 이정용(전 국회의원비서관, 뉴질랜드 이민)  임세훈(목사) 김기호(사업가) 김용문(고교교사)등과 친한 사이가 된다. 졸업후 9인회가 조직되어 20여년간 잘 운영되다가 졸업 20주년 이후 작은 갈등과 다양한 직업들로 인한 참석저조로 모임이 결렬되다시피 되어 안타까우나 그 책임의 일부가 당시 총무인 내게 있어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내가 동창회 일을 보게 된 1994년 이후 연 1회 만나는 동기 전체 체육대회에서 모두 만나기를 제안하여도 잘 모이지 못하게 되면서 약해지고 무너졌으니 동창회만 챙기느라 정작 9인회는 못챙긴 꼴이다. 다른 친구들이 친구들 모임을 잘 지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마음만은 우정을 가지고 있다.  

  유도가 하고 싶어 명성유도장에서 1년 열두달 열심히 했다. 미처 입단 심사는 보지 못했으나 유도수업시간 대련에서 대여섯명은 연거퍼 무난하게 이겨나갔다.(질 때까지 계속 다음 번호와 대결하므로) 가장 친한 장관익이가 두 손을 힘주어 뻗으며 몸을 붙여주지 않아 배대뒤집기로 넘어뜨리고 목조르기를 하는데 끝까지 바닥을 치지 않아(항복하지 않으려고) 결국 그의 몸이 축 쳐지고 선생님이 살려 내셨는데 두고 두고 미안하였다. 3학년이 되어 공부에 집중하느라 운동은 중단했다. 가끔 땀내나는 유도복이 그리울 때가 있는데 다시 해보고 싶은 유혹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난 달에 100m를 15초대로 주파해 보겠다고 스프린터 흉내내다 무릎뼈 고장난 주제에 웬 유도를 ? 그러다 두 다리 몽땅 다치기 십상이지 ?

  난생 처음으로 한 학기동안 자취를 했다. 당시 이리공고 못 미쳐서 오른편으로 꺾어 밭길과 논길을 200여m 내려가면 산아래 집 서너채가 있었는데 방값이 싸다하여 어머니가 얻은 집이다. 일자형 집에서 두 세대가 살았고 대준이 삼촌(남성중1학년)과 기현이 아저씨(남성중 3학년)와 함께 자취를 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남파 5거리에서 북부시장으로 내려가는 사잇길이 여전히 나 있는데 그 길의 끝이 북부시장 큰 4거리이고 오른편으로 소라단 가는길인데 큰 길 안쪽 성호연립부근으로 생각된다. 집뒤는 소나무 산이어서 샌드백을 걸고 힘껏 쳐대고 그 뒤 논 건너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무섭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자취집 앞으로 많은 학생들이 도보통학을 하였는데 소라단(솔밭안)숲을 지나면 나오는 오늘날의 영등동과 어양동에 사는 시골학생들이었다. 이 사실은 몇년 전 익산향토사를 쓸 때 영등, 어양, 부송동 지역을 조사하면서 이곳에 살던 이현복선생으로부터 들었고 우리 동서 형님도 그곳이 원래 고향이어서 확인해 주셨다.

  대부분 내가 김치찌게(두부와 콩나물을 넣고)를 맛있게 끓여 먹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오직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바로 김치찌게요 그 밖에는 자신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나는건 또 울 엄마의 조건없는 자식사랑이요 헌신이로구나. 어머니 사랑합니다.(눈물이 핑 돌아 작업중단) 옆집에는 초등학교 4학년 선경이와 2학년인 충경이가 40대 엄마와 살았는데 우리방에 자주 놀러오고 귀여워 했다. 무슨 공장이 하나 있었고 작은 여호와의 증인교회가 있어 신도들이 예배를 보기 위해 시내에서 오곤 했다. 다음해에 자취시작한지 불과 6개월만에 기현이가 전주상고에 수석입학하여 전주로 가게 되면서 자취를 중단하고 고3때는 다시 버스로 통학하게 된다. 대준이 외삼촌은 건축을 전공하여 현재 건축회사 이사이고, 기현이 아저씨는 경영학과를 나와 세무서 사무관인데 퇴직하면 세무사가 되겠다. 

 2학년 1년동안 유도장 다닌일 이외에 기억되는 것은 독서 써클 <고전독서회>에 매주 나간 일이다. 기독교 학생회관에서 매주1회 모임을 갖고 고전을 함께 발표하고 토론회를 가지는 모임인데 주로 남성고, 이리고, 이리여고 2학년들로 구성된 모임이었고 친구인 박병규가 회장이었다. 나는 주축 멤버도 아니고 3학년때는 공부하느라 나가지 못했지만, 그 모임은 상당히 오랬동안 대를 이어 나갔다고 하는데 최근 언젠가 40대 어느 선생님이 내가 남성 21회라하니 박병규를 말하며  자기가 그 회원이었다고 하면서 초창기 회장인 박병규와 주축 멤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을 보고 흐뭇했다.

 

3학년

   3학년이 되었다. 대학입학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가 중학교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오지 않았으니 성적은 도저히 내입으로는 말할 수 가 없을 정도이다.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처음으로 우열반이 편성되었는데 3년간이나 함께 노래나 좋아하고 공부를 소홀히 한 장관익과 함께 열반인 2반이 된다. 영어선생님인 김팔곤 선생님이 담임이다. 솔직히 공부를 안하고 못하게 되었으나(그 어떤 핑계도 댈수는 없다) 열반에 속하게 된 나 자신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함께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한답시고 노력했으나 3월 모의고사를 보니 3학년 올라 올때 받은 성적(등수) 딱 그대로다. 3월 20일경 관익이에게 강력한 제안을 했다.

“앞으로는 매달 보는 모의고사에서 절대로 성적이 하락해서는 안된다. 선의의 경쟁을 시작하고 성적이 한등수라도 떨어지면 실컷 빵을 사주는 벌을 받기로 하자”

  친구도 흔쾌히 승락하고 우리는 정말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는 예비고사 시험인데 6개교과 전과목을 다본다. 국어, 수학, 영어, 사회(일반사회, 한국지리, 세계지리, 국사, 세계사, 국민윤리), 과학(물리, 화학, 생물, 지학), 선택(상업)모두 치른다. 대학입학정원의 두 배수를 뽑으므로 합격만 하면 되며 점수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원대학에서 본고사를 치른다. 문과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를 본다. 우선 상업부기를 너무 몰라 교무실에 드나들며 선생님을 힘들게 하여 1개월에 완전하게 알게 되었다. 월간 계획과 주간계획 일일계획을 세워가며 철저히 반복학습을 계속해 나가고 공부이외의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을 끊었다. 밥을 먹을때에는 한손으로 책을 들고 보았다. 화장실에서 반드시 책을 보았다. 이발소에 가면서도 책을 들었고 이발중에도 한손을 내밀어 책을 들고 보았다. 한달만인 4월 모의고사에서 중간성적이 나왔다. 중간고사에서 20%대 성적이 나오고 1학기를 마치는 6월모의 고사와 기말고사에서는 30%대선이 나왔으나 더 이상의 변화는 기대하지 못했다. 우리 반 69명중에서 내가 제일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하지만 워낙이 뒤쳐진 영어와 수학때문에 그 이상의 진전은 어려웠으나 우리반에서는 김영학에 이어 가장 좋은 성적이 나왔다. 이제 2학기에 우수반에 갈 수 있게 되었으나 원통(?)하게도 우열반이 폐지되고 평준화가 되는 바람에 한번 열반학생이 되어버린 불명예를 영원히 씻지 못하고 오늘날에도 동창모임에서 가끔씩 우열반 얘기만 나오면 나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다. 2학기에 1반이 되어 정병호선생님이 담임이 되셨고

“네 성적이면 그 대학은 충분히 가겠다.”시던 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모집정원15명에 경쟁률은 4.8 대 1이었는데 72명의 응시자중 16등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수학을 잘 보지 못해 일어난 일이지만 떨어진다는 생각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가 막상 당하고 보니 재수할 일이 걱정이었고 함께 그 대학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친구집을 철로길로 다녀오다가 하마트면 소리없이 다가오는 열차에 내 아까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너무 상심이 커서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크락숀 소리가 들리고 옆길 신작로를 지나는 트럭에서 나는 소리거니 했고 무심코 철길에서 내려와 갓길을 걸어간지 10초(?)뒤 기차가 재빠르게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무서운 일이었다.

  이로부터 어려운 경제때문에 학원에도 다니지 못하며 집에서 공부하는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서 20세 청춘의 힘든 고난의 시기가 2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종철과 황형택 선배와 한동희등이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태양독서실에서 동고동락하는 슬픈 시절이었다. 해양대를 나와 외항선을 타던 한동희와 전주교대를 나와 교직에 있던 장관익은 세상을 떠났다. 박병규는 사업에 실패하여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이지만 큰 딸은 한의대를 다녔으니 한의사가 되었겠다. 시청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한병희는 아들딸 잘 키워 놓았으니 큰 걱정 없으나 더 건강해지길 바란다. 종철이는 평교사지만 부인의 가게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자식농사도 잘지어 지난 달에 큰 딸 시집보내고(통신공사 근무 부부) 자알 살고 있고, 황형택 선배는 장학사로 역시 나름 자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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