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그리움

전주교육대학

청담(靑潭) 2014. 12. 29. 11:21

 

전주교육대학

 

 

  1973년 친구인 종철이와 전주교대에 입학하게 된다. 뜻밖에 서울에서 근로자로 직장생활하던 장관익을 다시 만나게 되고, 고교시절 면식만 있던 송명용이를 만나 고교 동기 4명이 함께 대학을 다니게 된다. 경제적 여건과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들어가게 된 대학이지만 친구들이 있고 많은 고교동문들이 있어 대학생활은 매우 즐거워졌다.

 

  학교생활은 거의 써클(동아리)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전교생 720명이 어느 한 써클에는 거의 틀림없이 가입하였고, 두 개의 써클에 가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남성고 중심으로 조직된 성화에 들어갔는데 2년 동안 대학을 다닌건지, 성화에 다녔는지 모를 정도로 써클이 학교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칠 정도였다. 성화는 특정한(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조직의 목적은 없고 남성고, 남성여고 출신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가입하여 주축이 되고 다른 고교출신들까지도 일부 가입시켜 봉사활동이나 등산 등 대학생활을 보다 즐겁게 함께 하고자 하는 평범한 동아리였다.

 

  당시 유신체제가 막 시작 된 해라서 써클 회합도 공고문을 작성하여 학생과장의 확인도장을 받아 게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유신독제체제에 반대한다는 생각은커녕 현실정치에 대한 토론조차 거의 해보지도 못하는 그런 대학생활이었다. 교수들도, 학생들도 현실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언급도, 대화도 없었다. 따라서 정치토론이나 비판이란 거의 들어보는 일이 없이, 다른 대학과의 별다른 교류도 없이 동서학동에서 이루어지는 초등교사가 되기 위한 작은 대학생활은 훗날 스스로를 상당히 부끄럽게 했다. 당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날 생각하면 비록 대부분 어려운 가정환경에 의해 지방의 작은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기는 하지만, 나라와 사회와 더 어려운 처지의 또래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그저 포크송과 청바지와 통기타 그리고 막걸리에 젖어 살아간 조금은 부끄러운 대학생활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을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15%에게만 주어진 대학생으로서의 우월감을 동시에 가지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의 대학생활의 낭만만 찾던 이중적이고 부끄러운 모습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선택반은 사회반(일반사회·국사·지리)을 택하였다. 반대표(학과대표)를 맡았고 2학년 1학기 답사때는 1968년에 완공된 임실의 섬진댐과 칠보 발전소, 김제의 실크공장을 견학한 후 시골의 우리 집에서 국수로 점심을 먹었었다. 2학기에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부대표와 사소한 언쟁을 벌인 일이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대표로서의 나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 지적하는 부대표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유 불문하고 간단하게 사과하면 되는 일을 그저 변명논리로 일관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도리도 아니었다. 여전히 잊지 못하는 부끄러운 추억이다.

 

  2학년이 되어성화대표까지 맡았다. 형곤이는 총무를 맡아 정말 열심히 봉사한 후배다. 김제에서 시내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며 통학하기에 힘들어 겨우 두 달 만에 하숙을 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고마운 일이다. 당시 하숙을 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자취를 했다. 졸업 때까지 용성이와 한 방을 쓰며 동서학동에서 하숙했다. 대학생답지 못한 우리의 행동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참아주신 인자하신 주인아저씨 내외분이 고맙기 그지없다. 날마다 친구들이 들락거리고 떠들었으니 아마 오늘날 같았으면 한 달도 못되어 쫓겨났을 것임이 틀림없다. 여름방학 때면 신리로 농촌봉사활동을 나가 대형텐트를 치고 봉사 활동한 추억, 등산을 가서 이미 졸업한 선배 여학생들과 포크댄스를 추던 기억, 전주공고와의 축구대결에서 전반전을 41로 지다가 휴식시간에 모두들 비분강개하여 승리의 결의를 다진 뒤 후반전에 4골을 넣어 54로 이긴 것 등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요, 마이산을 소주병 대병을 들고 마시며 오르던 상범이의 걸걸한 모습도 생생하다. 나를 포함하여 용성이 명용이 관익이 종철이 모두 하나같이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으면서도 연애를 할 생각은 별로 시도하지도 않고 그저 그 여학생들을 소재로 서로 놀리고 장난치고 하던 것도 특이한 추억거리다.(더 이상의 언급은 불가능하다) 온통 써클 중심으로 생활하는데다 써클이나 선택반에 여학생들이 있어 친하게 지내므로 유난히 혼자서만 특정한 이성과의 연애에 빠지기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화에서 1년 후배인 우리 양드리를 만나 서로 사랑하고 운명이 시키는 대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전주교대와 성화는 오늘의 나의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준 텃밭이다. 아마도 내가 전주교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의 양드리도, 나의 아들도, 나의 딸도...상상하기에 매우 겁이 나는 일이다.

 

성화를 함께한 동문들이 졸업직후 계를 조직했다. [성우회]이다. 관익이가 1989년에 일찍 세상을 떴고, 형곤이가 경기도에 발령받고, 배병주가 서울의 중등으로 옮기면서 이탈하였으나 [성우회]8쌍 부부 16명이 여전히 함께 한다해외여행은 두 번 다녀왔으니 1차는 20051월에 필리핀에 다녀왔고, 2차는 20101월에 이집트·그리스·터키에 다녀왔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부부동반 모임이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성우회]이니 언제까지나 더욱 행복한 모임이 되도록 더욱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우리 동기인 명용이와 종철이, 용성이가 이미 은퇴하였고 이번엔 내 차례다. 1년 후면 7명이 은퇴를 하게 되고 호적이 늦어진 조석이만 남는다고 한다.

 

  우리 12회 동기는 발령이 늦어져 많은 고생들을 하였으나 오히려 그 덕분인지 전화위복이 되어 나처럼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한 친구들과 다른 직업으로 전환한 친구들이 상당히 많고 승진자도 다른 기수에 비해 유난히 많다. 역경을 이겨내면서 이루어진 일이라 여겨진다. 초등교장들은 전북뿐 만 아니라 경기도, 서울에 그 수를 헤일 수도 없고, 중등에는 전북에만도 4명의 교장이 재직 중이며 전북대와 모교의 교수도 있다. , 박종만 동기회장(현 교장)은 우리 동창회를 아주 잘 이끌어 나가는 훌륭한 친구다.

 

  오늘날 전주교육대학교는 우리 시대처럼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주로 시골출신들이 모이는 대학이 아니고, 집안 좋고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이 너도나도 모여드는, 그래서 들어가기 대단히 어려운 대학이 되어 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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