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그리움

종정초등학교

청담(靑潭) 2010. 7. 7. 20:27

 

종정국민학교

 

 

♣학교연혁

 

 

1939. 05. 09
종정 공립 심상 소학교 개교
1982. 03. 05
종정국민학교 병설유치원 개원
1996. 03. 01
종정초등학교 개칭
1998. 06. 08
본관 개축 준공
          1999. 03. 01
수월초등학교, 종정초등학교 분교로 격하
2007. 02. 28
종정초등학교수월분교 폐교
2009. 09. 01
제15대 한덕순 교장 부임
2010. 02. 12

제66회 졸업식(총 졸업생수 : 4,908명)

 

 

 

 

  졸업생은 약 5천명이다. 1회가 80세 정도이므로 졸업생 거의 모두 생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21회이며 현재 59세이다. 나이가 제일 많은 친구들은 62세로 환갑이 넘었다. 웃으운 일이다. 환갑이라니.... 아직도 우린 정말 젊다. 노인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쩌랴? 누가 자연의 이치를 거스릴수 있으리오? 친구들 모두 항상 건강하게 더욱 열심히 살고 더욱 긍정적 자세로 살아가자꾸나. 마음만은 언제나 젊은이로 살아가기 바란다.

 

♣학교현황 학생수는 모두 49명(초등35, 유치원14)이다. 각 학년 1학급씩에다 유치원이 한 학급으로 모두 7학급이다.

 

♣교훈 교훈은 현재는 바뀌었다. 우리는 아침 1교시 시작전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교훈을 소리내어 큰 소리로 합창하였다.

 

    일 사랑하자!

   이 배우자!

   삼 일하자!

   사 책임지자!

 

  우리는 입이 마르고 닳토록 아침마다 소리쳐 외쳤다. 그래 모두 모두 모든 인간들과 온갖 동물과 식물까지도 큰 마음으로 사랑하자.  그리고 죽는 날까지 배우자. 그리고 죽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자. 그리고 자신의 말과 행동과 직분에 충실하며 책임지자.    ♣교가

  만경강 푸른물에 하늘은 높고

  조종산 뒤에 두고 금산 앞둔곳

  두악산 기슭에서 영재 부른다

  우리학원 종정교 길이 빛내자.

  엄청 많이 불렀다. 중학교를 들어가서도 나는 가끔씩 혼자서도 부르곤 했다. 초등학교시절에 무턱대고 부르면서도 금산이 무엇인지, 두악산이 맞는지 모악산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동네 앞에 금산이란 산은 없고, 두악산은 산 같지 않은 산이며 저 멀리 기상있는 모악산이 우뚝 솟아 잘 바라다 보이기 때문이었다.

 

 

 ♣입학

  첫 눈인듯 싶었다. 하늘에서 가볍고도 큰 눈덩이들이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날리는 눈을 맞으며 1958년 12월 초 어느날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갔다. 종정국민학교는 바로 우리 동네에 있고 우리집에서 학교까지는 겨우 걸어서 3분 거리다. 종정국민학교는 날이면 날마다 놀러가는 곳인데도 정말 정말 예비소집에 가는 내 마음은 학교에 들어간다는 설레임으로 기분이 날아갈 듯한데 거기다 첫 눈마저 내리니 한껏 내 기분도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나야 기껏 3분 걸어서 왔지만 수록리 산치동이나, 상리 상서두나, 조종리 태메에서 온 아이들은 춥기도 할텐데 어찌 예비소집을 운동장에서 하였던 것인지 지금 같았으면 학교장 불신임감이다. 그러나 당시엔 강당이 없고 소집된 학생 120여명과 학부모들을 합하면 200여명이 넘었을 터이니 어디 마땅히 들어갈 장소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갑자기 눈이 올 줄 어찌 알았을꼬? 꼬마들이 눈을 맞으며 열을 지어 서있는 가운데를 선생님들이 장부를 넘기며 걸으시면서 이름을 부르며 학생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였다.

  

♣1학년

  1학년은 2학급인데  나는 1반으로 담임선생님은 강기갑 선생님이다. 우리 학교는 대개 학년당 2-3개 학급으로 모두 15학급 정도인데 전교생이 900여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기갑 선생님은 지금도 조종리에 생존해 계시며(87세) 여전히 많은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으시는 선생님으로 신화같은 존재이시다. 종정초등학교에서 1학년만을 맡으시는 최고의 1학년 전문가로 정평이 났다. 언제나 다정다감하신데 말을 듣지 않으면 벌칙은 하나같이 두터운 파커 만년필로 손가락을 연거퍼 지긋이 눌러 대신다. 일곱살 어린이들의 가녀린 엄지 손가락을 파커만년필로  (아프냐? 별로 안아플텐데...오호 많이 아프냐?)하시면서 연방 힘을 주시면 정말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당시 농촌인구가 70%요, 우리 백산면의 인구가 1만 명이 훨씬 넘어(현재 3500여명) 하나의 확고한 문화권을 가진 상태이었고, 종정초등학교 학구만 해도 20여개 자연마을에 인구는 5천여명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미취학 젖먹이들 빼고 강기갑 선생님과 십 수년을 연임하고 계신 임낙순 교장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1학년 1반 반장은 나였는데 공부는 나옥자가 더 잘했다. 지금도 공부 잘한 나옥자에게 가끔씩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매우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은 좋은듯 하다. 여학생들은 입학은 60여명이었으나 중도에 많이 그만 두어서 졸업생이 42명인데 그중  중학교에 겨우 10명이 진학하였고 가난한 수록골에 사는 새까만 옥자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지금은 전주에서 미장원을 경영하면서 아이들은 서울의 일류급대학을 졸업시켰으니 그녀는 배움의 한을 풀었다. 언제나 동창들에게 친절하고 명랑한 착한 여자다.

 

 ♣2학년

   2학년 1반은 강기선(기목) 선생님이 맡으셨다. 키가 크시고 조용한 성품이신데 반장인 나를 매우 이뻐하셨다. 10여년 전 만 해도 가끔씩 익산의 강외과에서 뵈올 기회가 있었고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셨다. 불행하게도 농협 상무이던 큰 아들 찬현이형이 갑자기 죽는 슬픈일을 당하시고 사모님도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다. 지금 88세이시며 조종리에서 사신다.

 

 ♣3학년

  3학년때는 2반이 되었다. 담임은  김귀곤선생님이신데 한달만에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갑자기 전근가시고 우리학교에 단 둘인 여선생님중에 뚱뚱이 김성남선생님이 담임이 되셨다. 김성남선생님은 황경동에 사시는 집안친척인 완수네집( 이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말쑥한 신사 이석원씨댁)에서 다니셨다. 김성남 선생님은 홀쭉이 유경자선생님과 함께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6년간을 근무하신 두 여선생님이시고 나는 두 선생님 모두 담임으로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이때 반장은 하진이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일이학년때 나보다도 더 착하고 얌전하기만 하던 하진이가 키도 크고 갑자기 더 공부도 잘하면서 자연스레 반장감투는 넘어갔고, 6학년때까지 내내 같은 반이었던 탓에 다시는 반장을 되찾지 못하고 말았다. 

 하루는 청소시간인데 담임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 살짝 엿보니 내용이 영어로만 쓰여 있는데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전근가신 김선생님인줄 알았다. 나는 두 분이 연애하는가보다고 굳게 믿었다. 비밀얘기를 하고 싶어 영어로 편지를 쓴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경 내가 이리북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하진이가 전하기를

 - 김선생님이 현재 원광대 경상대 학장이시며 네가 원광대 앞에 있는 북중에 근무한다하니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신다-

해서 연락을 드리고 두어 차례 약속도 했으나 사정상 뵙지는 못했다. 하진이가 그 당시 도청 행정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원광대 행정학과에 출강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김선생님은 교직을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하셨고 약사와 결혼하여 거부(?)가 되셨다고 한다. 1990년경에 50억 재산이 있어 장수군 근처에 전문대를 설립하시고 싶어 하진이에게 부지를 물색하여 달라고 강력하게 부탁하셨다는데 학교발전을 담보할 만한 마땅한 부지를 송과장이 찾지 못해 그 뜻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오늘날 전문대들이 학생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운영난을 겪고 통폐합을 추진중인 상황인것을 보면 차라리 잘 되었던 일인듯 싶다.  

  하진이란 지금 전주시장 송하진이며 저 잘난 친구 때문에 나는 계속하여 부반장만 하게 되고 하진이는 우리의 영원한 호프(희망)가 된다. 우리 동기 동창 120여명중에 아버지가 대학을 나온 사람은 오직 유일하게 나 이석한이지만, 아버지가 향촌의 유명한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선생이며 할아버지는 간재 전우의 학풍을 계승한 한학자인 송군장 선생의 손자인 송하진은 내가 넘기엔 너무 큰 친구였다. 착하고 공부잘하고 다재다능하여 무엇이든 잘했고 나는 그 벽은 내내 넘지 못하였으나 그런거 관계없이 우리는 좋은 친구다. 오직 내가 하진이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도 우리의 호프 송시장은 전주시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재선되었으며 전혀 부끄럽거나 야만스런 정치적 행태를 보이지 않으면서 탄탄대로를 걷는 너무 너무 훌륭하고 자랑스런 친구이다. 만나면 내게 스스럼없이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정치생리도 거침없이 말해주는 좋은 친구 멋쟁이 송하진!

 

 ♣4학년

  4학년은 유환규 선생님이 담임이시다. 존걸에 사시는데 묵직하신 분으로 이쁨을 많이 받았다. 일직 고향을 뜨셔서 다른 고장에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난다. 확인해 보아야 겠다. 이 해가 1962년이며 10월에 쿠바 미사일 사태가 났을 때 임낙순 교장선생님께서 운동장 조회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과감한 쿠바해상봉쇄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5학년

  5학년 담임은 정안기 선생님이시다. 이리에서 오셨던 것으로 알며 학교뒤에 있는 두 개의 사택중 오른쪽 사택에 사셨다. 6학년때 선생님댁에서는 젖짜는 염소를 길렀는데 우리 엄마는 내게 하루에 그토록 맛있는 우유(설탕을 넣고 약간 데운)한 그릇씩 마시도록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초등학교때 나 처럼 호강한 동기들은 아무도 없었다. 5학년때도 반장은 당연히 하진이가 맡고 나는 전교 어린이회 총무부장을 하였으며 운동회때에는 6학년 입상자들을 본부석으로 인솔하여 인사를 시키는 일을 맡았던 기억이 있다.

 

 ♣6학년

  6학년때 첫 담임은 유인렬 선생님이다. 상리가 집인 유 선생님은 종정초등학교에서 최고의 실력가로 유명했고 그래서 항상 6학년 담임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선생님의 아들은 1980년대 초쯤인가 사법고시 합격으로 아버지의 실력있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왠일인지 한 달만에 갑자기 유경자 선생님으로 담임이 바뀌는 이변이 일어나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이때까지 종정초등학교에서 유경자, 김성남선생님 모두 저학년만 맡았기 때문에 여선생이 6학년 담임을 맡은것은 대단히 쇼킹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도 전주에 살고 계시는 유경자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시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나의 눈에 너무나 깔끔하시고 엘리트 여성이신 예쁜 선생님이 담임이 되신 것은 좋았으나 후일 우리는 추억어린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나는 선생님이 해주신 말들을 지금도 잘 기억한다. 그 기억력이 공부에  활용되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해 부끄럽다. 유경자 선생님은 기전여중을 12등으로 나오시고 전주사범에 들어 가신다. 처음 부임한 금구 어느 초등학교에서 1년 근무하시고 우리학교에 오셨다. 그리고 종정에서 6년째가 된 1964년에 우리의 담임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나이는 26세, 우리는 가장 나이 많은 백남동이가 16살, 나는 일곱살에 들어갔기에 12살이다. 유경자선생님은 우리 학구내에서 가장 유명인사이신 황경동 유흥철씨집에서 기거하셨다.(어제 뜻밖에도 반갑게 유흥철 선생의 아들이며 1년 후배인 유성준 교수를 만나 유경자선생님이 완수네 집이 아니라 유교수 집에 기거하신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이를 바로 잡는다. 완수네집(이석원씨댁)에서는 김성남 선생님이 기거하셨다고 한다. 2020.9.29)

유흥철씨는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정치인으로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남성고 교장출신으로 후일 제3공화국 시절 야당 정치거물이 된 윤제술씨에게 패한 분이다. 나는 누구를 따라갔는지는 잊었지만 좌우간 8살의 초등학교 2학년의 나이에 10리나 되는 백석국민학교 국회의원 선거 후보 유세장에까지 진출하였다. 운동장에서 후보들이 타고 나타난 찝차를 보며 신기해 하였고 유흥철씨는 두 주먹을 불끈쥐며 열변을 토하였고 윤제술씨는

 -닭이 꼬꼬댁 꼬꼬댁하며 어쩌고 어쩌고 -

조용한 목소리로 연설하였다. 유흥철씨와 그 형인 유흥순씨는 어린 내 눈에는 상상도 안 되는 대농장들을 각기 경영하였다. 4학년(1962)때 쯤 언젠가 존걸에 사는 친구들과 황경동을 거쳐 존걸로 놀러 가면서 유흥철씨 농장을 들어가보았더니 수 많은 닭과 오리와 칠면조들이 있어 신기하게 구경하였고 친구들은 칠면조 알 하나를 훔쳤다. 후일 아버지께 들은 바로는 미국이 제공하는 농축산진흥자금을 대출받아 경영한 것이라고 한다. 그 양반이 더욱 나를 놀랍고 황홀하게 한 것은 지금 상상 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건데, 빌딩만큼이나 키가 큰 청마와 갈색마 어떤때는 반짝반짝하는 흑마 경주말을 20살 정도의 큰 아들과 나란히 한 마리씩 타고서 종정학교에 나타나곤 한 일이다. 나 보다 한 해 후배인 성준이와 채옥이 누나, 후일 내가 중학교때 이리사립 남성국민학교에 다니느라 함께 통학한 성준이 아래 여동생은 알지만 나보다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그 형은 전혀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은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구경하지도 못한 승마선수들이 쓰는 모자와 장갑과 긴 부츠형 구두와 멋진 승마복을 입고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윤기나고 귀족같이 아름다운 말 두마리를 타고서 유유히 운동장으로 걸어오고 우리는 운동장을 달리는 말 뒤를 부지런히 뛰어 따라 다녔다. 유럽 중세 장원의 영주나 기사가 따로 없었다.

  어떤 때는 유흥철씨가 우리를 한 사람씩 안아서 말에 태워주기도 하던 자상한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먼 후일 우리 선희 결혼식에 주례로 모셔서 인연이 되었고, 원광대에 편입하여 다니는 일개 젊은 대학생임에도 그 분은 교대를 졸업한 선생님이라 하여 존대해주시고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아아! 그 분이 비록 여러번 낙선하면서 정치에 실패하고 사업문제로 지역에서 비난도 받았지만 그 분의 큰 행동과 겸손함과 대인풍모는 요즈음 국회의원들 정도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일직이 제1공화국 시절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당선이 보장되는 자유당 공천을 거부하고 야당으로 입후보하는 패기를 보여주었으며 5대 때는 무소속 출마였다고 한다. 그 후 유신체제하인 1978년엔가 제10대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는데 전연 당선 가능성이 없는데도 아들 딸들이 아빠를 위해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의 끝없는 명예욕과 권력을 향한 무모한 도전과 아버지를 위한 자식들의 뜨거운 사랑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 보았던 기억이 있다.

유경자선생님은 6학년 때는 우리마을에서는 그래도 가장 잘사는 현수네집에서 기거하시게 된다. 아마 공부에 조금 약한 현수를 위해 이루어진 일인듯 싶다. 현수와 나 그리고 뚱뚱이 백상원(산치동이 너무 멀어 현수네집에서 하숙)이는 저녁이면 현수네 집에서 공부하면서 자주 함께 놀았다.

  수업시간에 현수와 나는 키가 작아 현수는 맨 앞줄에 나는 둘째줄에 앉았는데 우리 둘은 맨날 지휘봉으로 머리가 터지게 맞았다. 선생님 입장에서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현수와 조금 해찰이 많은 나는 우리 전라도 말로 <맨마드면 000>이라고 머리통 견디기 정말 많이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 과한 지도라고 여겨지고 당시에는 선생님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여럿이서 칠판에 낙서들을 하고  있다가 선생님께 들켯는데 나는 마침 여자를 그려놓고 있었고  갑자기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나한테 무슨 이유인지

 -이 여자가 나를 그린 것이냐?-

고 추궁한다. 만화그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전혀 담임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예쁜 여자를 그린것 뿐인데 괜한 오해를 하며 화를 지나치게 내고, 나는 교단에 무릎을 꿇고 발바닥을 많이 맞았다. 너무나 억울해서 그날 저녁 후일의 복수를 꿈꾸었으며 존경심이 사라졌고 졸업후에 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선생님을 굳이 찾아뵙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모두들 발바닥을 많이 맞았고 언젠가는 교실뒤에 있는 큰 히마라야시다를 오리걸음으로 끝도 없이 돌아야만 하는 초강력 기합을 받아 모두 녹초가 된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전주의 선생님댁을 친구들과 함께 방문한바 있는데 이미 선생님께서는 명퇴를 하셨고 부군께서는 전주대 영문과 교수로 계신 것을 알았다. 여전히 예쁘시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20여년 교직생활에 6학년 담임은 우리가 유일하기 때문에 대부분 우리 친구들을 기억해주시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2005년 하진이가 전주시장 입후보를 선언하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그날 기념회장에서 다시 반갑게 만나 뵈었다. 그날 수많은 참석자들 앞에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 훌륭한 제자를 두어 행복하다는 인사말을 하시는 영광을 누리셨다. 

  하진이는 우리반 반장과 전교 어린이 회장을 맡고 1반 반장인 필영이가 부회장을 맡았다. 나는 키가 작고 착하기만 하여(?) 도저히 어울리지도 않는 선도부장을 맡게 되었다.

  6학년이라 야간자율학습이 이루어졌다. 전기가 없으니 촛불이다. 두 명이 앉는 기다란 책상위에 촛불 하나씩 놓고 자율학습은 10시까지 이어진다. 중학교 진학률이 남학생은 70%요, 여학생은 겨우 25%인데 모두 참여한다. 그렇게 공부하고도 중학교에 진학 못한 성현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오늘날 성현이가 서울에서 사업으로 기반을 닦고 살고 있어 지난 2002년 제 3회 정기총회에서 37년만에 얼굴을 볼 수있었다. 우리는 연일 시험보고 채점하면서 입시공부를 했다. 우리 반에는 우리보다 일년 선배로서 입학시헙에 실패하고 재수하는 영진이가 있어 하진이를 선두로 정영진, 김광남, 나 이렇게 넷이서 우수그룹을 형성하였다. 1반에서는 우리와 성적이 비슷한 친구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여학생들중엔 1반의 옥자와 우리반의 영화(미국거주, 전문간호사)가 공부를 잘 했다. 6학년때는 그동안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도에 그만둔 여자애들이 많아서(중도 탈락자들이 15명 정도) 모두105명 정도인데 사실 절반 이상이 집들이 너무도 가난하여 공부할 여건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친구들이다. 결코 머리가 안좋아 공부못한 것이 아님은 내가 잘 안다. 우리 동기들 학교다닐때는 공부들 잘 안하던 놈들이 자식들 농사는 잘도 지었다. 하진이, 나, 되게 까불대던 강영이 세 사람이 자식하나씩 서울대를 보내고 또 하진이, 코질질이 존걸 재원이, 미술선생인 인석이 서울에서 택시기사인 성재는 자식하나씩 의사를 만들었고 창석이는 딸하나를 육군간호장교로 만들었다. 어린시절 가난으로 일곱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기도는 아들과 며느리가 철도공사 직원이다. 다들 다들 자식농사가 성공적이다. 어디가서든 우리 초등학교 동기들의 자랑거리로 당당하게 말한다.  

 

  영원히 잊지 못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 두개가 있다.

에피소드 1 : 4학년때 00종이가 사회시간에 책을 읽게 되었다. <6.25>가 나왔다. 00종이가 읽었다.

                 <육이오 이십오>...모두들 크게 웃었다. 선생님께서 고쳐주시며 다시 읽어 보라고 

                 말했다. 경종이가 다시 읽었다. <육이오 이십오>...  서너번 반복하고서야 바로 읽었

                 다.<육이오>라고...

에피소드 2 : 6학년 때 선생님이 일기 숙제를 내셨다. 어제의 일기를 차례로 읽었다. 00석이 차례

                가 되었다. 00석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어제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아침에 7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나서 세수를 하였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 국도

                먹었다. 그리고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집을 나와서 하진이랑 국진이랑 학교에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참 가다가 오줌이 마려워 오줌을 쌌다. 그런데 돌제에 와서 모종

                으로 올라가다가 똥이 마려웠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밭에 들어가 똥을 쌌다. 똥을 다 싸

                고 그리고 다시 학교에 가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고...그리고...) 모두들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당시에 중학교는 선발시험이고 성적에 따라 학교를 선택하고 입시를 치른다. 당시 전라북도에서 최고의 중학교는 전주북중인데 나는 실력은 차치하고 전주에서 학교에 다닐 경제력도 아무런 근거조차 없어 거의 상상도 못했지만 그런 중학교가 있다는 정보는 아버지와 담임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종정국민학교에서 진학하는 최고의 중학교는 이리 남성중학교이다. 그 다음은 이리 동중학교이다. 그 다음은 김제 중학교이다. 여자들은 이리여중과 김제여중이다. 나는 하진이 영진이랑 남성중학교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한다. 남성중학교에 원서를 낼 때 유경자선생님이 

 -합격에 너무 자신하지 말아라-

는 말로 은근히 겁을 주는것도 아니고, 나를 무시하듯  성의없이 던지시던 말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리시와 익산군 김제군 그리고 옥구군과 정읍군 일부지역에서 모여드는 남성중학교에 당당히 30%선으로 합격한다. 하진이는 역시 우수한 실력으로 3%선으로 합격했고 영진이는 13%선으로 합격하였다. 

 

  1968년 1월에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회장이었던 하진이는 1966년에 강암선생을 전주의 유림들이 교동에 집을 사주면서까지 전주이사를 간청하는 바람에 이미 가족이 이주하였고 친구도 전주고로 진학하여 떠났다. 중학교 3학년때 영진이와 하진이가 남중동의 말도 안되는 흙담집에서 자취하다가(나는 너무 누추하다고 거절했군요) 고교진학으로 헤어진다. 영진이와 나는 자연스레 남성고에 진학하였다. 영진이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외환은행 지점장을 거쳐 퇴직 후 작은 기업의 감사를 역임하고 현재는 중개업을 하고 있다. 익산지점 과장재직시 또 차장으로 재직시 자주 만나고 살 수 있었다. 지금도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시 해마다 두세번은 만나게 된다.

 

 

♣교장사택

   학교사택은 모두 4개가 있었다. 학교 뒤 편에 기와집 사택이  좌우로 두 채가 있었고 운동장 오른편에 교장 사택이 있었다. 그리고 교장 사택 앞쪽 길 건너에 한 채가 더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1939년에 종정초등학교가 설립된 이후 60년대까지만 해도 사택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었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교통사정이 급속도로 좋아진 1970년대에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교장 사택은 일본식이다. 대지는 약 300여평이고 주택평수는 30여평 되었을까? 큰 소나무 들이 집을 감싸며 솟아있고 치팽나무가 담을 둘렀다. 마당에는 엄청나게 소리가 큰 도르래가 있는 깊고 깊은 우물이 있다. 하늘처럼 높으신 교장 할아버지 임낙순 교장선생님이 사시는 집이요, 집은 크고 넓은데 학생들로서는 감히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교장선생님이 사시는 일본식 기와집이다. 임낙순 교장선생님은 무려 23년간 개교 초창기부터 정년퇴임시까지 종정의 교장으로 계신 분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임교장선생님이 교장을 역임해 오셨음을 익히 아는 나는 학교다닐 당시에 학교장은 아예 전근이라는것 조차 없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청소시간이면 학교에 우물이 따로 없어 교장사택의 우물물을 길어다가 청소를 하므로 유난히도 금속성 굉음을 울리는 도르래소리가 온 학교를 찌르고 뒤덮는다. 가끔씩 우물안을 들여다 보노라면 귀신이 나타나 나를 잡아챌 듯, 아니면 옆에 있는 친구의 잘못 실수로 우물속에 빠질 듯 무서운 생각에 머리가 쭈빗거려서 감히 어둡고 긴 우물속을 마음놓고 보기란 쉽지 않았다.

  교장 사택을 자주 들어가 본 사람은 우리 동기들 중에 아마 나 밖에 없을 것이 틀림없다. 교장선생님의 조카인 기소가 우리 1년 후배로 나와는 친하게 지내며 우리 할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이 거의 동년배시고 자주 사택에서 바둑을 두시므로 나는 종종 교장사택에서 두 분이 바둑을 두시는 동안 기소와 함께 놀았기 때문이다. 안방은 온돌로 개조하였으나 사랑방은 그때까지도 일본식 다다미 방이었고 무엇보다도 화장실이 신비로웠다. 당시의 시골집은 나무를 얼기 설기 새끼로 엮어서 똥항에 얹어 놓아 새끼가 썩으면 빠질 수도 있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한듯한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 화장실이 대부분이다. 학교화장실은 시멘트로 되어 그나마 깨끗한 편이었으나 아래가 너무 깊고 커서 어린아이들은 똥을 싸려면 정말 공포스럽고 무서웠다. 깨끗한 하얀 도기가 놓인 교장사택 화장실은 너무나 깨끗하여 변소, 또망(똥항)이라는 기존관념과 불결함을 깨버리는 청결한 곳이었다. 나는 이 교장사택의 크고 높은 집모양과 그 내부 구조의 합리성과 청결함을 통해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 누가 우리 전통가옥의 아름다움과 자연을 따르는 과학성을 얘기한다해도 전연 가당치 않는 국수주의적 자화자찬으로만 받아들였으며 이는 오늘날 아파트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실로 부자들이 사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이야 방도 많고 깨끗하며 상당한 과학적 합리적 구조를 엿볼 수 있었으나 많은 서민들이 살던 초가 삼간은 더 얘기하면 무엇하랴? 더구나 아주 가난한 친구들이 살던 오막살이 집이나 흙담집은 부억에서 때는 청솔가지 연기로 집이 온통 시커머서 손을 댈 수도 없고, 냄새가 나서 집에 들어갈 수 조차 없었음은 실제 그 시절을 살면서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온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오늘날 이 만큼 살게 되어 시골집도 리모델링하고 도시인은 대부분 아파트에서 살며 집을 지어도 크게 지으므로 그 시절 그 집 모습들은 옛 일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집을 짓는다면 정말 천정을 아주 높게 문은 아주 높고 크게 짓고 싶다. 작은 집이라도 조금은 공간은 크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린시절부터 영화를 통해 유럽의 집들을 보면서 가져온  주택에 대한 나의 고집스런 독특한 관념이다. 정년퇴임후 돌제 고향집에 지으려는 7평짜리 작은 집은 높고 넓게 지을 것이다. 주택 허가가 필요없이 짓기위해 비록 7평짜리를 짓지만 지붕과 천정을 높게 지어 내부공간을 늘리고 옆으로는 5평짜리 데크를 만들어 지붕을 얹으면 실제 사용공간은 12평이 되는 셈이다. 항상 기대가 크다.

 

 ♣윗점방과 아랫점방

  내가 아주 어린시절 그러니까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1957년쯤에는 정문 못미쳐 훗날 판용이네집에서 고사할머니가 점방을 열고 사탕등을 팔던 기억이 있다.(사실인지 꿈인지 부모님께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 할머니와 6촌 동서이시고 부잣집 할머니께서 웬 점방을? 아니 그럼 우리 옆집의 점방할머니는 언제 점방을 보셨나?) 학교에 들어갈때는 이미 점방은 두 개가 자리 잡았으니 하나는 후문입구에 있는 윗점방이요, 하나는 정문입구에 새로 문을 연 아랫점방이다.

  윗점방은 식동할아버지 내외가 운영하시고(운기네집) 아랫점방은 고창고모가 운영하였다. 두 점방 모두 학생들을 상대로하는 과자류와 학용품,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하는 주류와 사소한 잡화까지 판매하였다. 학생이 900여명이고 우리 마을인구가 500여명이니 요즘으로 치면 동네 수퍼규모는 되는 셈이다. 

  장사는 위치로나 주인들의 성품으로나 윗점방이 확실히 잘 되었으며 훗날 20대가 되어서까지 나도 겨울철 저녁이면 거의 매일 윗점방에 출근하여 모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거나 나이롱뽕을 쳐서 술내기를 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아까운 시간들이다. 내가 금년에 진학과 인성지도 차원에서 <자기관리 생활>이라는 책을 지어 전교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늘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나의 시간관리를 잘못한 부끄러운 과거사에서 나온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면 무엇하랴? 그런 환경을 딛고 일어서서 철저하게 자신의 미래를 위한 시간으로 만드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말 많은 시간은 헛되이 소비하였는데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운기네는 1980년대 이후 집을 비운 채 운기는 수도권에서 살고 있고, 그 동생인 재기는 한때 김제시 입구에 있는 주유소를 경영하였는데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점방을 하기전에 우리 옆집에 잠시 살았을 때 5년 선배인 목자고모가 나를 많이 예뻐하였고 나보다 세살이 많고 학교는 1년 선배인 희자고모는 재능과 미모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만 졸업한 것이 안타깝고, 팔자가 드센지 원만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는 못했다는 소식인데 평생에 두어 번 만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때는 1년 선배중에 6촌인 석영이 형, 옥정리의 재옥이형, 희자고모, 나, 이렇게 4명이 만화광이었던듯 서로 생기는대로 바꿔보았던 기억이 있다. 재옥이 형도 공부는 우등생인데 가난하여 중학교만 다녔던 듯 하며 김제에서 목공장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새 만화책을 얻을때는 기쁨과 감격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화를 통하여 상식이 풍부해졌고 시공간적으로 시야가 확대되었으며 상상과 공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다. 학교 도서실의 동화책과 서로 바꾸어 빌려보는 만화책들은 내게 많은 지식과 꿈을 주었다.

  아랫점방은 우리학교 말썽꾸러기 대장 용균이 아저씨와 나와 젊은 시절을 친하게 지낸 영균이 형네 집이다. 고창고모가 성질이 급하고 사나워서인지 5남 2녀중 지순이 누나와 용균이 영균이 아저씨는 비모범생이다. 용균이 아저씨는 6학년때 나이가 이미 16살이었는데 담임인 장흥선선생님이 등에다 <나는 나쁜놈>이라고 붓으로 써서 전교실을 순회방문하게 했는데 요즘음이라면 당장 파면깜이다.(생뚱맞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어제 서울의 모 초등학교 교사가 어린 학생들을 사랑의 체벌아닌 폭행사건으로 직위해제당하고 곧 파면당할 판이다.)장흥선 선생이 그 만큼 무섭기도 했지만 교사 체벌이 또 그 만큼 용인되던 시절이다. 부모들이 선생을 만나면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 주세요>라며 당부하던 시절이 아닌가? 영균이 아저씨는 나보다 1년 선배로 나와 함께 크면서 놀았다. 가난한 시절 그 집에서는 점심으로 고구마만 주니 우리집에서 놀면서 찬장에 있는 찬밥이라도 먹으라고 주면 정말 맛있게 먹곤 했다. 힘은 세지만 두되가 명석하지 못하니 언제나 내 말을 잘 듣고 내게 잘했다. 결혼도 하고 건설회사에 다니다가 다친 이후 기초생활수급자로 근근이 살아간다는 소식이며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가 내게 잘해준 어린시절의 고마움을 많이 갚으려 한다. 휴가를 나와 힘든 훈련때문에 귀대하기 싫다며 징징대는것을 달래고 달래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내겐 고마운 사람이다. 홍균 지순 용균 영균 연순 두균 복균이 형제자매인데 지금 그 집에는 홍균아저씨와 결혼 안하고 혼자사는 용균이 아저씨가 산다.

 

 ♣재건운동과 퇴비증산

   1961년 5월 16일이다. 우리는 3학년이었다. 오전수업만 있었는지 기도와 나는 하교하여 느긋하게 동네 뒷길(현재의 내 과수원입구에서 20m지점 근처에서 주저앉아 개미들과 장난하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나더니 비행기가 나타난다. 모정너머 재실과 샛밭둑위를 날아가는데 갑자기 종이뭉치를 떨어뜨리고 수 많은 종이가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였다. 나와 기도는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왠지 오늘 뿌리는 삐라(전단지)는 극장 쑈 선전 삐라는 아닌 느낌이 왔다.

  집에 뛰어들어가니 식구들은 마루에서 식사중인데 책보를 마루에 던지고 부리나케 삐라뿌린 샛밭둑으로 달려 갔다. 샛밭둑 우리 논밭이 있는 곳에서 삐라를 주웠다. 천천히 읽으면서 돌아왔다.

  5.16 혁명을 알리는 삐라였다. 국가혁명위원회 의장인 시커면 썬그라스를 낀 잘 생긴 장도영중장의 사진이 있고, 그 옆엔 못생긴 부의장 육군소장 박정희장군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혁명공약이 적혀 있다.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이하생략)

  나는 크게 웃으면서 기도에게 말했다.

<웬 장군이 저렇게 못생겼다냐? 그리고 어찌 장군의 이름이 여자이름이다냐?>

  내눈에는 박정희의 사진 자체가 새까맣게 인쇄되어 아주 못생긴 얼굴로 나타나서 잘생긴 장도영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웃기는 모습으로 비쳐지고 이름도 여자이름이어서  매우 우스웠다. 

 

  재건국민운동이 시작되었다. 1962년에는 마을단위로 학생단이 조직되어 아침등교는 함께 모여 단장의 지휘아래 열을 지어서 학교에 갔다. 학교가 있는 우리 마을 돌제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정에 모여 함께 등교하는데 모두 60여명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함께 모여 가는 단체활동이 매우 재미있었고 기춘이 아저씨가 단장이었다. 선생님들도 재건복을 입으시고 인사는 너도나도 모두들 만나면

<재건합시다!>였다. 

  퇴비증산운동이 시작되었다. 우리 4학년들도 낫을 가지고 등교한다. 반별로 일정량의 풀을 베어 학교에 납부하여야 하므로 점심먹고 풀을 베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업시간에 풀베러 나가기도 했다. 풀은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나는 매우 힘들었다. 평소에 집에서 소깔을 베거나 일을 많이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의 낫질이 너무 서툴러 남들처럼 빨리 납부량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마을 학생단이 두파로 나뉘어졌다. 단장인 기춘이 아저씨파와 비주류 용균이 아저씨파로 나뉘어졌는데 나는 당연히 평소에 연이나 스케이트를 항상 만들어 주는 용균이 아저씨 파에 속하게 되었다. 우리 파는 소수라서 대략 4학년 이상 남학생 칠팔명 정도나 되었다.

  어느 날 열여섯살이나 된 6학년 용균이 아저씨가 제안했다. 

<야! 우리 퇴비를  많이 만들어서  팔아보자. 그 돈으로 축구공을 사자!>

우리는 흔쾌히 모두들 동의하고 일요일에 낫들을 아주 잘 갈아서 서당너머 자학마을 입구로 공동작업을 나가 풀을 베기 시작하였다. 한번도 차보지 못한 가죽으로 된 정통 축구공을 가질수 있다는 희망에서 즐겁게 풀을 베었던 것이다. 그러나 왠걸 낫질에 익숙치 못한 내가 왼손으로 낫질을 하다가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엄청 많이 베어버려 피가 줄줄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작업은 중단되었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읍내로 나가 치료하고 몇 바늘인가 꿰맸다. 축구공의 꿈은 멀리 사라지고 오직 지금까지 내 왼손 검지에는 반달모양의 긴 흉터자국이 영광의 상처로 남아있다.  

  6학년때까지도 퇴비증산운동은 게속되었다. 학교 동편으로 우리 키로 두 길이나 되는 퇴비탑이 너댓개씩 쌓아졌다. 우리는 그 퇴비탑 위를 몰래 가끔씩 올라갔다. 아무도 안보는  높은 탑 위에서 우리는 고추놀이를 하곤 했다. 사춘기가 다 되었던지 잠지들을 내놓고 크기를 견주고, 여학생 이름을 대며 누가 좋아한다는 둥, 각자 누가 제일  예쁘다는 둥 여학생 얘기들을 했는데 선자 인기가 제일 좋았던가?

 

 

 

 ♣종정 제21회 동우회(동창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서 제대들을 한 시기인 1976년에 초등학교 동창계 모임을 만들었다. 우선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끼리 조직하였는데 처음 회원은 우리동네의 나, 현수 삼렬이, 기도, 자학의 준기, 강영이, 창석이, 일섭이, 국진이, 연동의 인석이 등이다. 처음에는 가장 생일이 빠른 준기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내가 총무겸 재무를 맡아 이끌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는 현수가 총무겸 재무가 되었다. 1990년대에 필영이, 불로동의 용태, 재원이등이 가입하고 2000년을 전후하여 너도나도 희망하면 모두 입회시키니 현재 용태가 세상을 떠났어도 모두 22명이다. 초창기에는 우리 모임 말고 다른 친구들이 만든 모임이 있었다는데 워낙 세가 약하므로 저절로 해체되었다. 필영이 가입후 그가 생일이 가장 빠르므로 회장도 필영이에게 넘어갔다. 이 모임은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으며 여학생들도 10여명의 모임이 있어 공동으로 계모임을 갖기도 한다. 이 두 모임의 인원이 35명 정도되기에 우리 동창회도 잘 유지되는 것이며 두 모임회원이 아닌 사람들은 겨우 10명 내지 20명 정도만이 일년에 한 번 개최되는 동창회에 가끔씩 얼굴을 내보이는 셈이다.  

  1980년경부터 조금 무리지만 연 20만원의 장학금을 졸업식때 학교에 전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상당한 돈이었으므로 임낙순 장학금 못지 않은 장학금으로 대접받았으나 학생수가 급감함에 따라 장학금에 대한 무용론이 대두되어 반대움직이 있었고 내가 강력히 고집하며 장학금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현재도 비록 적은 액수지만 연 3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종정초등학교 익산 향우회  1994년엔가 아파트 입구에서 강민구 후배(현 마동동장)를 만났더니 향우회를 소개하며 가입을 권유한다. 모임에 나가보니 대부분 시청과 경찰서등 관공서에 근무하는 선후배들 모임이다. 11회에서 28회정도까지 가입되어 있는데 대부분 그런대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사람들의 모임으로 결코 일반적인 의미의 동창회도 아니고 향우회도 아닌 일종의 계모임이다. 많은 후배들이 선배들의 고집스런 보수적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여 현재는 16명 정도만 남았다. 11회 선배들 이하 모두 퇴직하여 은퇴자 모임처럼 되었다. 나와 25 회까지의 후배들(정승섭  소방경감, 강창곤 소방경정, 강민구 시청 사무관, 유기천 시청 6급)만 현역이다.    강유두 강기원 강다현 선배등 좋은 선배들과 강재춘 친구 및 좋은 후배들이 함께 하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고향선후배들의 모임은 오래토록 지속하고자 한다.

 

 

 ♣우리 동기 동창회 조직과 현황

■제1차 동창회(1968.2)

  1968년 어느 겨울 날 필영이를 우연히 버스에서 만나 동창회 개최를 추진하자고 결의하고 준비를 시작하였다. 2월인데 지금 생각해도 되게 추웠다. 잠바도 없어 겨우 교복만 입고 추운 바람을 헤치며 우리 둘이서 청승맞게 20여개나 되는 마을을 두 세번씩 일주일간이나 돌아다녔다. 전화가 없으니 도리가 없는데 다행히 친구들은 모두들 집에 있다. 중학교 진학 못한 남녀 동창들도 모두 집에 있다. 취업이 되는 때도 아니요, 관광지에 놀러가거나 친척집에 놀러갈 차비도 없는 시대이니 집에 들어 박혀있을 밖에 도리가 없는 시대다. 수록리 영순이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상리에 가서는 홍금자를 아무리 불러내도 숨어서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하고,  용태네 집에서는 예전부터 나를 예뻐하시던 용태엄마의 따뜻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잠도 잤다. 학교를 다니거나 못다니거나 간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너무나 반가이 맞아들 주었다. 

  그리하여 1968년 2월 13일엔가 모교 교실하나를 빌려 종정국민학교 제21회 제1차 동창회가 개최되었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카메라도 빌렸다. 내가 사회를 보고 퀴즈문제도 준비하여 게임도 하였다. 앙드레 김을 묻는 문제도 있었고 모교 서편 여자 화장실이 몇칸이냐고 묻는 넌센스문제를 내기도 하였다. 노래자랑시간에 나는 남진의 <가슴아프게>를 남진 흉내를 내며 뽄때나게 불렀다. 중학교 3학년때 나는 공부는 열심히 안하고 장관익이라는 친구와 함께 대중가요에 빠졌는데 나는 남진을 좋아하고 그 녀석은 나훈아를 좋아하였다. 아무튼 고생 무지하게 했던 첫 동창회였고 필영이와 나는 가슴 뿌듯하였다. 하진이는 이미 전주 도시놈이 되어 가버려서 주소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몰라 연락도 못했던지 참석치 못했다. 하진이가 참석치 못하였으므로 유필영이가 동창회장을 맡고 내가 총무를 맡았다.

 

■제2차 동창회(1969.8)

  1969년 여름이다. 제2차 동창회를 개최하였다. 무더운 여름날 선풍기도 없는 교실에서 과자와 참외와 수박들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1차때는 중학교에 많이 다니고 있기에 참석률이 좋았지만  2차때는 고교진학을 못한 친구들이 많은데다가 나이가 18살이 되었으므로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은 눈부신 경제성장에 힘입어 이미 수많은 공장들이 생겨나서 서울등지로 직장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여 주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만의 동창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때는  학교에 다니든 다니지 못하든 그저 친구로만 생각했을 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의 말 못할 아픔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제3차 동창회(2003.6)

 

2002년이었다. 우리 21회 총동창회 모임이 여지껏 개최되지 못하므로  21회 동우회에 가입하지 못한 40여명의 남자친구들과, 여자동창계에 가입하지 않은 27명의 여자동창들은 40년간 동창회모임이 없어 동창들과 함께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남성고 21회 총무로서 졸업30주년을 준비하느라 초등학교에까지 신경을 미처 쓰지 못하고 있었으나 2001년 5월에 행사를 치르고는 곧바로 총무를 사임하고 초등학교 총동창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2002년 가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송하진이 학생회장이었으므로 준비위원장으로하고 유필영이가 지금까지 회장자격을 유지한 상태이므로 부위원장으로하여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6월 실로 34년만에 동창회를 개최하게 된다.

 

 

종정초등학교 21회 동창회 제3차 정기총회

 

녹음 우거진 유월

 

  참으로 먼 시간여행이었습니다. 1969년 8월 어느 무덥던 여름날 모교에서 함께 만난지도 서른하고도 네 해가 갔답니다.

  모두들 오십이 넘은 어른들이 되었다지요? 그래도 마음은 종정의 그 운동장 그 아름다운 시절이 그립습니다.

  은사님을 모시고 열리는 우리 21회의 세 번째 모임이 6월의 녹음 속에 개최됩니다.

  보고싶은 벗들이여! 망설임 없이 찾아오십시오. 어린 시절 동심의 그림을 그려보게요. 그리고 깊은 정을 다지고 싶습니다.

- 사랑하자! 배우자! 일하자! 책임지자! -

 

2003. 5. 6

 

종정초등학교 제21회 동창회장 송 하 진 드림

 

 

 

             

            

 

 

종정초등학교 21회 동창회 제3차 정기총회 안내

  □일 시 : 2003. 6. 7(토요일). PM 5시8

□장 소 : 익산시 그랜드 호텔

□회 비 : 3만원

 

종정초등학교 21회 동창회 제3차 정기총회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장 송하진(동창회장) 부위원장-유필영(부회장)

위원 류효영 홍성재 류삼열 이기조

       강성순 정복희 박지순 강명희

                                           ■집행위원장 이석한(총무이사)

위원 이현수 김준기 윤재원Ⅰ 정기선

       윤희원 유강영 윤재원Ⅱ 강해정

 

   2003년 6월 7일 윤주홍, 유경자 선생님을 모시고 70여명의 친구들이 반갑게 다시 만나게 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100여명 이상의 친구들의 소재가 거의 모두 파악되고 그리운 강성현, 김광남이도 만나게 되었다. 윤정화도 왔고 4학년때 전학갔던 유덕순(상리 아이들 빼고는 오직 나만 기억하고 있던)이도 만나게 된다.  

 

 

■그 이후 (2010.7)

 

2006년에 하진이가 전주시장에 입후보하게 되면서 회장은 필영이가 맡고 총무는 내가, 재무는 효영이가 맡아서 동창회를 매년 개최하였지만 실제 거의 모든 일은 효영이가 맡아 주었다. 나도 교감 연수를 받고 발령 대기중이라 별로 크게 열정을 쏟아주지 못했다. 필영이와 나는 차제에 집행부를 개편하기로 한다. 언제까지나 우리가 동창회를 이끌것이 아니라 이만 하면 체제가 잡혔으므로  다른 친구들이 앞으로는 맡아가도록 했다. 누구보다도 동창회장을 맡아해보려는 의욕이 큰 박영수를 내가 강력히 추천하여 2009년부터 회장을 맡도록 하고 언제나 혼자 애쓰면서 고군분투하는 유효영이 계속 총무겸 재무를 맡아 두사람의 동창회에 대한 큰 충정과 협력속에 나름 잘 운영되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5월의 정기모임과 12월의 연말모임(전북도내)을 개최하고 있다.

 

 

 

2015 종정초등학교 제21회 졸업 50주년 기념 행사

○2013년부터 내가 회장을 맡았다. 2년후 졸업 50주년 행사를 기획하고 선언했다. 우선은 지지부진한 동창회를 재건하기 위함이며 곁들여 송하진 친구의 지사등극을 크게 축하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나아가 향후 새로운 운영의 변화를 꾀하기 위함이다. 총 2천만원의 발전기금 모금을 생각했으나 친구들이 너무 놀라며 지나치다 하므로 1천만원으로 하향조정하고 추진중인데 생각보다 친구들의 호응도가 높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반드시 성공시켜 친구들을 기쁘게 하겠다. 종이문서 발송을 없애고 내가 직접 핸드폰 메시지로 발송하고 개별적으로 전화를 통해 추진하기로 한다.

 

 

종정초등학교 제 21회 졸업 50주년 기념한마당 안내
종정 21회 친구들 모두 안녕하시죠? 2003년 6월 7일, 익산에서 졸업 38주년 행사를 치른지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모두 다시만나 졸업 50주년을 기념하고 100세시대를 맞아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여 향후 30년의 동창회의 발전과 결속을 다지는 모임을 은사님들을 모시고 모교에서 개최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자랑스런 친구 송하진의 전북지사 취임을 축하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 일시 : 2015년 4월 18일(토 ) 오후 2시
●2:00~2:30 등록
●2:30~3:30 공식행사
●3:30~4:30 공연
●4:30~5:00 사진촬영
♧ 장소 : 종정초등학교 강당
♧ 일정 : 오후 6시 익산에서 식사
오후 9시 공식일정 마감
이후 스케줄은 유동적으로 진행
♧ 회비 : 오만원

 

명예대회장 송하진
대 회 장 유필영
추진및 집행위원장 이석한
자문위원 박영수
추진위원 정기선 유효영 박지순 홍성재 정복희 정일섭 유택영 강명희
집행위원 유강영(기획 ) 윤재원( 진행 ) 이현수( 재정 )
 

※종정 21회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안내사항
1. 2003년 행사에는 65명(남39,여26 )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는 친구들은 모두 참석할 것으로 믿습니다. 미처 전화번호 파악이 되지않아 메시지를 받지 못하는 친구를 알면 즉시 제게 연락 주시고 함께 참석해 주십시오.
2. 추후 다시 기념행사 개최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며, 앞으로는 참석하는 동창을 중심으로 서울과 지방에서 번갈아가며 모임을 갖습니다. 단, 발전기금 기부자는 예외입니다.
3. 동창회 발전기금을 모금하며 10만원 단위로 합니다. 기부금 납부자는 참가비는 별도로 내지 않습니다. 참가비는 5만원 입니다.
농협 이현수 : 352 0883 3367 03
기부금과 참가비는 위 계좌로 송금하시기 바라옵고, 모두 3월 말까지 송금처리(이름명시 )하여 주십시오. 기금은 아껴가며 동창회를 발전시키는데에 잘 활용하겠습니다. 많은 협조 바랍니다.
4. 종이문서 연락은 일체 없습니다. 곧 제가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 잘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2015년 3월 4일
추진및 집행위원장 이석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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