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전주교대를 졸업했으니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야 하는데 이미 두어해 전부터 발령이 늦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1970년을 전후로는 초등교사가 모자라 중등교사자격증을 가진 4년제 대졸출신들을 선발하여 연수를 하고, 심지어는 일반고교출신과 농고출신들까지 선발하여 연수를 시킨 후 발령을 내기도 했는데 아마도 수급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모양이었다.
발령이 언제 날지도 모르는데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는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1년을 집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힘든 한 해였다. 용성이는 원광대에 편입하였고 종철이는 누나의 식당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관익이는 고등공민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나는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집에 눌러 앉았다. 젊은 내가 어디를 찾아서라도 취업을 하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막노동이라도 해야 하는데 부끄럽게도 집에서 농사일이나 거들며 지낸 1975년은 내 인생에 가장 부끄러운 한 해다. 다행이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친구들(종철이와 용성이)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많은 동기들은 공무원시험을 통해 여러 기관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정말 어려운 경제형편 임에도 편입을 허락하셨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끝없는 사랑이 아니면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전북대는 극히 편입이 어렵고, 영생대는 야간이며 전주에 있으므로, 집에서 쉬이 다닐 수 있는 원광대에 편입하기로 했다. 국사교육학과에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인 영선이를 통해 원광대 사범대졸업생들도 대부분 임용이 잘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편입시험을 치르게 된다.
○국사교육학과에서 2명을 선발하는데 8명이 응시하였다. 함께 편입한 고교 후배인 한 대희(현 교수)와 만난 인연이다. 2학년에 편입하고 보니 모두들 몇 년 후배들이다. 한상설(별세 : 전 대학강사) 봉준영(현 고교교사) 최완규(현 전북문화재 연구원 이사장) 같은 고교후배들을 포함하여 75학번 학과생은 모두 25명 정도인데 7-8명 정도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마음들이 착한 이들과 함께 공부한 2년은 매우 행복한 세월이었다. 어려운 집안형편이지만 큰 걱정 없이 공부했고, 젊은(?)친구들과 막걸리도 어울려 많이 마셨다. 나이가 많은 선배라 해서 『할배』라는 별칭도 얻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학교에서 나오면 역전앞에 있는『고향다방』을 중심으로 연락하며 한상설, 한대희와는 방학 때도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0분 이리역열차폭발사건이 있던 날도 학과후배들과 막걸리를 하고서 7시 정도에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왔었다. 만일 9시 반 막차를 타려고 버스정류장에 있었더라면 저만큼 멀리 길 건너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입학동기들 10여명이 모임을 하고 있는데, 교장도 여럿이고 교수가 둘이다. 한 대희교수와 나는 입학동기가 아니기에 가끔 업서버로 참석한다. 항상 형 대접을 잘 해주고 지금도 정겹게 대해주는 김갑성 교장, 김정경 교장, 최완규 교수,이동희 선생, 이경로 선생을 비롯하여 모두에게 항상 감사하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여 다니는 고교 동기들이 있어 힘이 되었다. 한종현(현 한의대 교수) 권문봉(현 사대교수) 조운용(현 호원대 교수) 정성모(전 교사) 이윤수(전 교사)등이다.
○2대독자라서 6개월 방위근무를 하게 된다. 1978년 2월에 35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백산면 중대본부에서 9월 까지 전출입 사무를 보았다. 독자라서 신체검사 연기를 4번이나 한 후에 받는 복무이므로 전체 42명중 나이가 가장 많아 (비록 방위지만 그래도 군복무 상황임에도) 대원들로부터는 선배 대접을 받고, 심지어는 중대장님들까지도 특별대우를 해주었으니 모두가 고마운 분들이다. 초등학교 3년 후배인 정동남(현 공무원)이 역시 2대독자이며 같은 기수여서 늘 함께 지냈다. 복무를 무사히 끝내고는 곧 백석초등학교와 청하초등학교에서 각각 1개월 동안씩 강사로 근무하였다. 초등학교에서 근무한 경력 모두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다. 복학생인 박영관과 마음이 통했고 그와는 전주제일고에서 만나 2년을 함께 근무했다. 고교후배인 채수환(현 교수)과의 깊은 인연의 시작이다. 4학년이니 순위고사 합격이 최우선 과제이다. 도교육청에서 소환하여 찾아가니 초등교사자격증을 반납하든지 발령을 받든지 양자 택일하라하여 자격증을 반납하였다. 교대에 다니는 동안 국가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발령을 받지 않으면 자격증을 반납하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제 초등교사 자격증을 반납까지 했으니 반드시 순위고사에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절박감을 가지게 되었다.
채수환 후배는 정식 학과조교를 하고, 나는 조동원교수님(후일 성균관대 부총장 역임) 연구실을 관리하는 조교역할을 하게 되어 학교에 다니기가 한결 편해졌다. 하루를 채수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 되었고, 이런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는 형제처럼 여기는 사이가 된다. 교수님이 나오시지 않는 날은 내가 공부하는 방이 되었고 다른 학과의 조교들과도 친해져서 인간관계의 폭도 넓어졌다. 또 유일학원의 강사를 하게 되어 적어도 용돈은 벌어 쓰게 되었다. 당시 학원에서 함께 강의를 하던 분으로는 한황래 선생(현 고교교장)이 있다. 대입반 국사와 고입반 일반사회를 담당하였다. 그 처럼 바쁜 중에도 채수환과 그와 친한 친구이자 고교후배인 법학과의 김성진(현 대진대 교수)과는 내내 두터운 정을 함께 하였다.
○2학기에는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여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강의한 뒤 저녁을 사먹고는 독서실에서 순위고사 준비를 했으니 대학생인 내 책상이 4개였다. 연구실 조교책상, 학원강사용 책상, 독서실 책상, 집에 있는 내 책상이다. 전북의 순위고사에는 28명이 응시했고 4명을 선발했는데 다행이 합격하여 1980년 3월에 발령을 받게 되니 불효자는 겨우 면했다.
○원광대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함에 따라 중등교사가 되어 직업적으로 나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 만 아니라 나의 성격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더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인간이 되었다. 늘 마음을 함께 한 후배들인 고 한상설 선생과 한대희 교수, 채수환 교수, 김성진 교수가 준 선물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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