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그리움

남성중학교

청담(靑潭) 2010. 7. 26. 22:01

남성중학교

 

♧입학시험

  1965년 2월 어느 날 남성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이리에 갔다. 평화동 정류장에서 내려 영정통을 따라 걸었다. 시공관을 지나 남성중학교로 가는데 시공관 뒤부터는 군데군데 논이 있고 밭이 있어 왠지 도시 같지 않은 모습이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예비소집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익산 군청에 들러 아버지 친구분을 만나고 영정통 이리극장 옆에서는 큰 삼촌 처남이 경영하는 양복점에 들러 인사했다. 바로 그 부근 철도 관사에 기관사인 재당숙 판환 할아버지가 사시고 계시므로 나는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시험을 보게 된다.

  시험에 부담은 전혀 없었으므로 무난히 합격하고 남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남성중학교는 남성고등학교와 같은 울안에 있으며 창인동에 있는 남성여중고와 화성학원재단에 소속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전라북도에서는 가장 큰  개인농장(3600정보)인 화성농장주 백인기씨의 미망인이신 이윤성여사가 설립자이시고 당시 이사장은 이윤성여사의 조카이신 이춘기선생이었다. 학교의 한 중심지에 이윤성여사의 동상이 있고 이춘기이사장은 백발이 성성하신 분으로 학교에 자주 오시는데 후일 유신시대에 통일주체국민회의 상임부위원장을 하셔서 조금 부끄러운 측면이 있으나 당시에는 대단한 위치였으며 국회보다 상위기관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유신정우회 의원을 선출하는 기관인데 대통령이 위원장이었다. 수년 전 조사차 화성농장터를 찾았더니 선생께서 살던 농장터는 폐허가된 채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아드님도 세상을 떠서 후손조차없이 방치되고 본인이 쓰신 것으로 보이는 <이춘기>라는 문패만 남아서 세월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쓸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중고 모두 이중각 선생이 교장이셨다. 단신이시고 대단히  점잖으신 분으로 두 팔을 뒤로하시고는 의젓하게 학교를 거니셨고 우리는 함부로 인사조차 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 무게감만으로도 저절로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일본여행을 하시고 오셔서 운동장에서 전교생 3000여명을 모아놓고 일본에 대해 말씀하신 기억이 나며 후일 동생이 인수한 이일여자고등학교 교장도 역임하셨다. 내가 입학한 1965년에 이중각교장은 48세셨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10살이나 아래인데 그렇게 으젓하실 수가 없었다.(내 자신을 생각해보니 매우 부끄러워지네요)

 

♧1학년

  3월부터 버스 통학을 하게 된다. 조종리나 소라단같은 마을은 버스를 타기 위해 1시간씩 걸어나와야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마을은 국민학교가 있기도하고 국도 23번이 통과해서 버스타는 신작로까지 7분거리다. 잿백이까지도 10분이면 갈 수  있으니 이정도만 해도 시골에서는  교통요지 아닌가?

  당시 안전여객, 호남여객, 삼남여객, 동아여객, 전북여객, 공화여객등이 있었고 마이크로버스도 있었다. 마이크로버스란 미니버스를 말하는 것으로 대략 15명 정원으로 좌석버스이지만 어디 그렇게 되나요? 스므명, 서른명은 족히 밀어넣지 않았을까? 차체 높이가 낮으므로 어른들은 비포장도로에서 허리를 굽히고 도착할 때까지 참으려면 정말 힘들었을 게다.

  나는 1학년 입학 초 키가 142cm밖에 되지 않아서 마이크로버스는 유리하나, 밀리는 일반버스에서는 사람들 속에 갇혀 숨이 막히는듯 정말 죽어났다. 가방이 떠돌아다닐까봐 꼭꼭 붙잡고 지키느라 젖먹던 힘을 다해야만 했다. 두 달을 다니고 나니 입술이 부르트고 지쳐서 부득이 판환 할어버지 댁에서 다니게 된다. 

  할아버지 댁은 삼기(국민학교 1학년), 문기, 평자, 윤기(갓난아기)까지 있는데 나는 삼기의 사촌형인 영기네 외삼촌  오희남 형(이리상고 1학년)과 함께 두 개의 방 중 하나를 쓰면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오늘날 생각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는 다들 이해가 되기도 하는 일이었다. 둘이는 오손 도손 잘 지냈고 어느 날은 산책나갔다가 이리극장에 기도(검사원)가  없어 몰래 들어갔다 들켜서 조금 혼이 나고 남은시간 10여분인가를 보고 나온 에피소드도 있다. 맨날 부서진 라디오 고치고 전축에 대해 공부하는게 취미더니만 정말 훗날 이리에서 전파사를 경영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보고 싶은 마음이 크게 이네요) 아이들이 많은 가정인데도 우리에게 싫은 내색한 번 안하시고 정성을 다 해주신 황산 재당숙모는 정말 천사같은 분이시다. 고등학교와 재수하던 시기까지도 나는 할머니께 어려운 부탁을 자주 드렸고 언제나 나의 부탁을 웃으시며 다 들어주셨다. 1학년은 그렇게 다녔고 할머니는 10여년 전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우리 선산에 계시므로 가까이 계셔서 자주 뵙는 것만으로 은혜를 갚는것을 대신한다고 아전인수격 해석을 해 버린다. 큰 아들 삼기는 전고, 전북법대를 나와 삼양사에 근무했고 지금은 은퇴하고 부동산 중개사라고한다. 부인이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이고 시제에 거의 참석한다. 둘째 문기는 남고와 전북대를 나와 엘지전자에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전주에서 PC방을 운영한다. 외동딸 평자는 이리여고와 전북대 사대를 나와 전남에서 살며 부부교사이다. 막내 윤기는 남고와 연대를 나와 금융계(삼성)에 근무한다. 할머니의 친동생인 경술이는 중고교 1년 후배로 전북대 공대를 나와 세무서에서 과장으로 퇴직하고 현재 익산에서 세무사이다. 할아버지는 재혼하셨다가 다시 헤어지시고, 익산에 혼자 사시는데 신장이 좋지 않으셔서 투석을 하시나 그래도 아직은 건강이 그만하시다. 연세가 80이시다. 마음이 깨끗하시고 맑으신 분이다. 오래 건강 유지하시길 빈다.

  1학년 담임은 고복동 선생님으로 체육선생이신데 잘생기고 멋쟁이셨다. 홍중이, 하겸이, 기환이, 최문규등이 5반인 우리반인데 첫 짝궁은 최문규다. 첫날인데 분명히 문규가 자리에 있는것을 보고 화장실을 가는데 1층 아래에서 문규가 올라오기에 깜짝 놀라 언제 나보다 먼저 나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며 우물쭈물한다. 며칠 뒤 운동장 조회에서 문규와 똑같이 생긴 녀석을 또 하나 발견하고는 쌍둥인줄 알았다.

  최문규는 대야놈으로 수업시간이면 엄청 나를 주먹으로 건들며 괴롭히고 공부는 열심히 안하는 놈이어서 짝궁을 잘못 만났다. 후일 전주교대에서 감짝 놀라며 만났고 현재 초등학교 교사이다.

  내 앞에는 이정귀가 앉았고 그 녀석은 황등놈인데 <울엄니> <이 썩을 놈아>등 보편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구사해서 우리가 항상 놀리곤 했다.  2,3학년때는 반이 달라져 가깝게 지내지 못하다가 공고로 진학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때 단체 영화관람이 있어 시공관에 갔다가  어두운 2층에서 반갑게 만났다. 그리고는 1995년엔가 내가 군산월명여중 학생부장으로 시민회관에서 검찰지청장 감사패를  받고난 후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정귀다. 이정귀는 당시 군산동고 육성회장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정말 반갑기 그지 없었고 그는 가구업을 성공적으로 잘 하고 있었으며, 그 뒤부터는 남성동창회에서 계속 만나오고 있다. 아주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좋은 친구다.

  하겸이는 당시 이리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관중 하나인 월광사 아들이다. 당시 이리시내 부잣집 아들답게 하얀피부와 잘생긴 얼굴에 귀티나는 친구인데 먼 훗날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칠팔년동안 나와 함께 21회동창회의 총무와 재무로 오랜 세월 많은 희노애락을 함께 하였다. 아버지의 사업인 사진관을 물려받아 오랫동안 운영하다가 시대변천에 따른 사진관의 쇠운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몇년 전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잃고나서는 부부가 생의 의욕을 상실한듯하여 마음이 아팠으나 결혼한 두 딸들과 손자손녀들을 돌보는 재미로 살아간다고 한다. 다시 원래의 패기를 되찾고 건강도 잘 유지하면서 우리 오래 오래 함께 잘 살아가세나. 언제나 미안한 마음만 드는 착하고 고마운 친구!

  운동장에서 거의 매주 전체조회가 열리는데 한달에 한번쯤은 중고가 합동조회를 하였다. 중고생 3천명이 함께 모이면 정말 그 모습이 대단했다. 체구가 작은 중학교 1학년짜리의 눈에 고등학생들까지 3천명이 모이는 것은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도시의 학교도 대부분 1천명을 넘지 못하며 현재 우리학교 학생수는 250명이니 강당에 모이면 마치 한 개 학년이 모인듯 하다. 당시 한개 학년이 500명이요 모두 6개학년이니 운동장이 꽉 들어찼고 이럴때면 꼭 이중각 교장선생님의 훈화와 각종 전국대회 수상자들에 대한 시상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것은 미술특기자들이 상을 유난히 많이들 받았고 해마다 남성문학상이 주어지는것이 큰 관심거리였으며 남성문학상은 엄청 대단한 상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당선자들중에서 많은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오고 또 후일 대부분 작가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1학년 1학기말 시험인가 국어시험에서 우리반 일등을 했다. 김연태선생님께서 앞으로 불러내어 칭찬을 해주시고 모두 축하박수를 치도록 했다. 내 인생에서 1등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김연태 선생님과는 고등학교때 국어선생님인 조재섭선생님과 함께 1990년대 10여년간 마한향토사연구회에서 자주만나 뵈었다.지금은 모임이 해체되어 뵙지 못하나 여전히 건강하시다고 신약국  신명관 친구가 전해준다. 중학교때 남보다 잘한 것은 노래를 쬐끔 잘한 덕분에 음악시간이면 노래부르고 받는 높은 실기점수외에는 기억에 없군요.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2학년

  2학년때는 2반으로 오석고선생님이 담임이시다. 수학선생님으로 워낙 말이 없으신 과묵하신 분이다. 2학년때는 부용에 사는 황성열이와 친하게 되어 이리여고 2학년인 누나와 함께 자취하는 인화동 집에도 가고 부용에도 놀러갔다. 그의 아버지가 부용역장이셔서 살림이 괞찮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후일 원광고로 진학하고는 그 뒤 거의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사업한다는 소식은 같은 마을 친구인 건설회사를 하는 이득세 사장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

  2학년부터 버스통학이 다시 시작되고 나는 버스 터미널부터 남성여중고 정문과 이리여고 후문길을 통해 학교에 다니게 된다. 걷는 시간이 15분씩이므로 하루에 30분을 걷는데 항상 재춘이와 함께 다녔다. 재춘이는 시청에 근무하다가 무슨 연유인지 정년을 10여년 앞두고 갑자기 퇴직하는 바람에 여러 해 많이 고생하고 있다. 종정 향우회 모임을 통해 매달 만나고 있으나 당당하던 시청 공무원이 시작하는 사업마다 잘 안되고 요즘은 아버지 농장에 의지하며 조종리에서 거주하므로 마음이 짠하다. 내게 항상 고마운 친구이자 선배다.

  버스로 힘들게 통학하지만 1학년때는 공부를 그런대로 유지했으나 2학년때부터 공부가 안되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오고, 관심이 연예계에 유난히 많이 쏠린데다가 집에 가면 동네 형들과 날이면 날마다 어울려 쏘다니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사업시작으로 군산에서 사시게 되어 감독과 관리마저 전혀 없게 되었다. 정말이지 저녁밥 먹고 내방에서 희미한 등잔불 아래 열심히 공부하기란 나로서는 적응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저 저녁먹고 나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병환이 형, 전환이 형, 영균이 형등과 마을에 있는 국민학교에 가서 12시가 다 될 때까지 놀다 들어와서는 그대로 잠을 자고, 다음 날엔 학교에 가는 생활의 연속이니 성적은 나빠지고       

부모님의 격려도 들을 때 뿐이었다. 내 인생에 부끄러운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일면 환경의 중요성(인적환경과 물적환경을 포함하는)을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으나 기실 환경보다는 나 자신의 정서가 문제였고 그래서 부끄러운 것이다. 교복바지는 항상 멋지게 다려입고 모자는 테를 한번 눌러 써야 멋있게만 여겨지는,  남들에게 실로 공부 잘하기 매우 어려운 학생모습으로 비쳐지는 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제도 남성 선후배 부부모임인 성우회 모임에서 그들 자녀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들으면서 부모의 강력한 리더십과 희생, 본인의 꿈을 이루려는 의지가 결합되면 반드시 보람된 결실을 이루어 낼 수 있으나 부모가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자녀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면서 민주적으로 이끄는듯 하지만 실은 방관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너무나 천만 위험한 일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 나 자신의 옛 기억과 우리 아이들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니 한없이 마음이 무겁고 착잡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창시절에는 오직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정신과 육체적 능력의 한계까지 모두 바쳐 노력하는 자만이 능히 자신의 꿈을 이루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더우기 지구상에서 가장 취업이 어려운 이 대한민국의 오늘의 현실은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는 끝이 없이 지속되는 악몽이다. 더 참고 더 기다리면서 우리 아이들을 격려하자. 그리고 우리 학생들에게 더 많은 노력과 의지력을 요청하자!

  종철이는 한전에 입사한 딸이 동료직원과 결혼하는 경사가 있고, 명용이는 생명공학을 전공한 딸이 같은 전공인 사윗감과 결혼한후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10월 9일 같은 날에 명용이네는 인천에서, 종철이네는 서울에서 혼례를 치른다고 한다. 매우매우 축하할 일이다.  

 

 

♧3학년

  3학년때는 6반이 되었다. 담임은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가지신 백선기선생님이시다. 당시에는 중학교 3학년이고 고입시험을 치르는데도 보충수업이라는것이 없어서 하절기에도 해가 남쪽에 동동 떠 있는 3시 반이면 교문을 나와 시공관방향으로 줄지어 집으로 갔다. 초등학교 6학년때 촛불 켜 놓고 밤 10시까지 했던 입시공부가 중학교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시키며 훌륭한 진로진학지도를 해주지 못한 학교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수생을 모아놓은 삼류중학교라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첫 짝궁은 삼정리에 사는 고광렬이다. 한없이 착한 친구로 공부를 잘해서 우등생이었고(전교 2-30등) 이미 2학년때부터 공부를 등한시한 내가 수학을 따라가지 못해 많이도 괴롭혔지만 언제나 다정하게 설명해주었다. 가정이 어려워 이리공고에 2등으로 입학하여 다녔는데 고2때 이리여고 앞 석영형이 거주하는 이모네집 옆 통일교회에 다니고 있어 반갑게 만났고 1980년대말 예비군 훈련장에서 다시 만났다. 쌍방울에 근무하고 있었고 자주 만나지는 못했는데 직업이 다르고 하여 만나는일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던 소양섭과는 중학교때의우정을 계속하며 가끔씩 만나며 살아왔다고 했다. 소양섭친구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떴다.

  이때 오산에 사는 장관익과 친구의 인연이 맺어진다. 의식적으로 나와 가까와지려는 그와 상당히 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취미가 같았기 때문이며 그 취미는 부끄럽게도 유행가를 좋아하는 것이었고, 이 사실은 내 인생에 큰 비중으로 오랫동안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 둘은 모자에 별은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으나 결코 공부를 열심히하는 학생들은 아니었으며 항상 주 관심은 노래요, 영화요, 연예계였다. 규율부원이 되어 뺏지까지 차고도 부끄러운 학창시절은 계속되고 있었다.(단언코 나쁜 짓은 절대로 안했습니다, 오직 공부를 멀리 했을 뿐이랍니다)  성적은 이곳에 절대로 밝힐 수가 없노니, 다른 고등학교로 쫒겨가지 않고 남성고에 진학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3학년때는 장관익, 오성만, 황명천, 강덕신, 황순호등이 우리반 친구들이었고 규율부장인 박병규와 한종현과도 친하게 지냈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역전앞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한잔씩으로 뒤풀이를 한 기억도 있고 순호와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이리극장 쇼에 몰래 입장하기도 하였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시키지도, 학생들에게 큰 꿈을 심어주지도 않고 다들 별로 공부들도 열심히 안하는 중학교에서도 가장  공부 안하는 학생으로 한 해가 갔다.   

  고교입시가 다가왔다. 할아버지께서는 무겁게 그러나 단호하게 공고진학을 말씀하셨다. 빨리 취업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인문계고교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차마 드리지 못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손자가 아버지께서 사업(군산에서의 서민금융업)에 실패하고 빛만 지신채 집으로 돌아오신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드릴 수가 있으랴? 가장골의 큰 밭과 논이 남에게 넘어갔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이후 밤이면 고민속에 내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적성으로 결코 공고에서 공부를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다른 방도를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업을 할 것이 아니라 둘째 외삼촌처럼 간부후보생이 되어 장교가 될까? 벼라별 궁리를 다해보았지만 뾰족한 방안이 있을 리 없다. 다행이 엄마가 나서서 인문계로 진학하도록 적극 지지해주시어 내 인생이 힘들지 않고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다. 아아! 어머니의 은혜는 끝이 없는 것이러니 나도 나의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며 이를 교훈으로 삼아 나의 아들과 딸에게 최선을 다 하고 더욱 참고 기다리며 진지한 삶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어머니의 은혜는 끝이 없다하는 내가 지금 어머니께 자식된 도리를 잘 실천하고 있나 하고 반문하면 부끄럽기 그지 없지요.

  다행이 다른 학교로 쫒겨가지는 않을 정도는 되어 같은 재단으로 한 울안에 있는 남성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School-그리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광대학교  (0) 2015.01.09
전주교육대학  (0) 2014.12.29
남성고등학교  (0) 2010.09.27
종정초등학교  (0) 2010.07.07
학창시절  (0) 2010.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