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술 · 추억 · 건강

청담(靑潭) 2010. 11. 16. 10:43

 

 

술 · 추억 · 건강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를 울리며

가을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 오늘

  아침에 영하 5도의 추위인데 기분이 상쾌하다. 드디어 오늘에야 내 몸이 정상을 찾았나보다. 지난 수요일 학교평가를 받고 난후 신나는 친목회가 있었고, 기분이 좋아 함께 어울려 3차까지 마셨다. 양드리는 술 마신 뒤의 나의 얼굴은 할아버지 다름 아니라고 놀린다. 술 한번 즐겁게 마시고 난 뒤 신체리듬이 정상을 되찾기까지 일주일이 지나야 한다면 이제 나는 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술을 빼고는 내 인생을 논하기 어렵다. <술과 인생>을 소재로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살피자니 정말 나는 술과 함께 살아온 인생임이 틀림없는 사실이요, 항상 술 마시는 사람들과 주로 어울려 살아 왔다. 따라서 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황에 처한 나는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다. 

 

☆ 1960년대

  예전에 고등학교 다닐때 술을 많이 마셨다는 친구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보았는데 나는 그런 기억이 거의 없다. 2학년때 자취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단 한 번 막걸리를 마셨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인정하는 우리의 사회통념에 맞추어 졸업하고서야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나는 상당한 모범생(?)   

 

☆ 1970년대

  재수하면서부터 막걸리를 마셨다. 동네에서는 주로 윗점방에서 동네형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마셨다. 동네 점방이므로 안주는 고작 김치나 오이나 마늘대나 깍두기나 아니 아무거라도 상관 없었다. 왜냐고요? 대답은 간단하다. 막걸리니까. 때로는 재철이 형이 독약인 사이나로 몰래 잡은 꿩이나 전환이 아저씨가 저수지에서 그물로 잡은 붕어를 찌게로 끓여 술을 마시기도 하고 어느 때는 재철이 형과 함께 공기총으로 산비들기를 잡아 서너명이 정말 맛있게 마실때면 막걸리는 대병이 아니라 아에 큰 막걸리통으로 받아다 마셨다. 나보다 한 학년 위지만 그들은 이미 스물 하나 또는 스물 둘이므로 술마시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는 때이다. 대학에 실패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원재수가 어렵게된 상황이라 1학기에는 집에 있으며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형들이나 친구인 삼렬이 현수와 어울려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수 상황이었으나, 형들과 친구들은 모두 대학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군입대를 앞두고 자기집 농사일을 도우며 일을 하고 사는 생활이다. 당시에는 인문계고등학교이면서도 일류나 이류고교 출신이 아니면 예비고사 합격이 어렵고 예비고사를 합격하면 4년제 대학입학은 무조건 합격이고 졸업만 하면 취업도 100%이며 대학에 가지 않아도 공무원 시험은 틀림없이 합격할 수 있던 시절이니 돈과 실력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예비고사 통과문제로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러면서도 전문대에 가면 챙피하다고 굳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요즈음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하도 경쟁이 치열한 시대가 되다보니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경제력만이 실력을 보장하고 부모의 능력이 자식들의 일생을 좌우한다는 이유를 대며 교육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는데 언제는 안 그랬나요? 당시에는 돈이 없으면 아예 대학진학은 생각도 못하였고, 실력이 없으면 대학을 가고 싶어도 아예 응시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들을 알고나 하는 소리들인지 모르겠다. 2학기에는 다행이 독서실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셔서 텍사스 골목에 있는 태양독서실에서 친구인 동희, 종철, 선배인 형택형과 함께 지내며 가끔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당시는 막걸리가 대중들이 마시는 술이고 막걸리집엔 아가씨도 있던 시절이라 꽤나 즐겁게 마셨다. 어른들은 소주도 마시지만 우리는 술이 약하여 마시기를 두려워 했다.(당시에는 25도 아니면 30도인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어느 날 그 방면엔 이미 능숙한 동희를 따라 아가씨와 막걸리 방 술을 열병이나 마시며 많이 취해서 그 집에서 잠을 자버린 추억도 있다.

 

  전주교육대학에서의 생활은 써클(동아리) <성화>와 함께 하는 것이 학교생활의 거의 전부였다. 지금은 9급 공무원 시험이 백대 일이며 공무원은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 되었고, 교육대학교는 시내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아주 우수한 여학생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나 우리시절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인 시골고교출신들이 많이 모인 2년제 대학이었다. 예비고사를 합격하고 지방 사립대에는 경제적으로 가기 어렵거나, 또는 가기 싫거나, 전북대는 4년을 다녀야 하므로 경제형편을 고려하여 부모의 권유에 따르거나 또는 교사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여러 이유로 모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전고, 전여고, 신흥고, 성심여고, 남성고, 이리고가 주축이고 고창, 부안, 정읍, 남원, 순창읍내 인문계고교 우등생들이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20명이 다니는 소규모 대학이라 큰 뜻도 자부심도 찾기 어렵고 스스로 자폐증 환자는 아니지만 극히 폐쇄적이 되었으며 행동반경도 한정되어 동서학동에서 우물 우물 모여지내는 형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아리(주로 남성동문)활동을 하며 막걸리 자리가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항상 아주 건전한 모습으로 청춘과 인생을 논하며 살아갔고 이는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교장인 상범이, 재호, 지난 10월 한 날에 사위 얻은 명용이와 종철이, 용성이, 조석이, 동규 장관익이랑 함께 살았던 동서학동이 그립다. 어떤 특별한 날에는 70년대 포크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청년문화의 상징의 하나인 학사주점 석굴암에서 다른 대학의 학생들과 어울려 막걸리 특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마냥 기타를 두드려대며 막걸리를 마시던 아름다운 그 시절은 다행이 내가 1년 후배인 양드리와 결혼하고 여러 친구들과 조직한 성우회가 있어 여전히 만나면서 언제라도 지난 추억을 다시 만들어 가며 살아가고 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1970년대 후반은 원광대를 다니던 시기이다. 물론 함께 어울려 살던 한상설이와 한대희랑과의 추억은 참으로 많다. 이 때는 여름철이면 역전앞에서 과친구들과 냉막걸리를 마셨고, 중앙시장 지하 안주짱인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도 벌였다. 그리고 조금 수준이 높아지면서 어느샌가 생맥주로 바뀌었다. 어느날인가 역전의 어느 생맥주집에서 우리 셋이는 약간 취한 상태에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불놀이야>를 정말 신나게 합창하였다. 방위군 시절 면사무소 근처의 막걸리집에서 중대원들이 함께 막걸리를 마실때면 내 노래가 인기였는데 레퍼토리는 주로 혜은이 노래로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교사가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코스였기에 공부보다는 청년문화를 실컷 즐기며 살 수 있었으니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마지막 해에는 채수환 후배와 함께 살았다. 수환이는 과조교를 맡았고 나는 조동원교수방 조교로 있으면서 순위고사를 준비하고 오후에는 학원강사를 하게되니 언제나 함께 점심도 먹고 집에도 같이 가게 되는데 이때 친해진 또 하나의 후배가 수환이의 친구인 법학과의 김성진이다. 수환이는 술에 별로 관심이 없으나 김성진이는 매우 좋아하는 고로 저녁이면 둘이 한잔하는 일이 가끔씩 있게 되면서 평생지우가 되었다. 그러나 나와  채교수는 언제나처럼 막역지간이나 김교수와는 결코 내가 막역하다고 느끼기에는 언제나 2% 부족한 느낌으로 살아왔고  세 사람이 막역하게 함께 즐거운 일은 결코 많지 않았으니 지금도 진행되는 세 사람의 마음의 불일치 관계는 참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 1980년대

  해리중에 김호길선생과 함께 부임한다. 총각선생님들과 처녀선생님들이 정말 많다. 이 때 총각으로 부임한 사람들이 조직한 모임이 해우회이니 나의 가장 소중한 모임이 되었다. 1977년에 부임한 친구인 김병근, 1978년에 부임한 김재완, 1979년에 부임한 정귀우, 그리고 1980년에 부임한 이치수, 나, 김호길, 강거희, 다음해에 부임한 유영상과 김종기이다. 이때 저 머나먼 해리면 소재지에서 하숙하면서 오후 보충수업이 끝나면 으레 선술집에서 가오리를 한접시 시켜놓고 막걸리와 소주를 즐겨하며 마냥 학교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김재완과 정귀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술을 즐겨하거니와 하루에 평균 6시간의 수업을 하고 나면 기()가 떨어져 가슴이 허()하여 막걸리를 마셔야만 했다. 존경하는 문하상 교감과 함께 자주 어울렸는데 불행하게도 정년 못하시고 간암으로 세상을 뜨셔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술을 너무 좋아하신 탓인듯해서 이 때 술에 대한 경계심을 처음 가지게 된다.

  대성고로 옮겨 이의방 형님과 읍내에서 대산면으로 통근하면서 참 많이 마셨다. 퇴근시간이면 거구인 은용기교감선생님과 그 분 음주법대로 딱 소주 한 곱푸(큰 컵)만 하기도 자주 했다. 퇴근하고 나서면 터미널 앞 고깃집에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동료가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고 돈은 돌아가며 계산했는데 보충수업이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선배인 의방이 형님이 30대 마지막 나이이며 모두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이준호, 한범대, 이성현, 이의방, 이치수, 장상민, 권명철등 멤버가 10여명이나 되었다. 어느 날 의방이 형님과 고창 터미날에서 실컷 마시고 헤어진 뒤 집을 찾지 못하고 헤메던 부끄러운 추억까지 남았다. 의방이 성님과 또 한잔 마시고 싶다. (방금 형님에게 전화드렸더니 친구들과 술한잔하시고 노래방에 계신다.) 작년에 정년하시고 적적하시니 말로만이 아니라 꼭 놀러 가겠다. 권혁성 교장의 강력한 주장으로 부부동반 직원여행을 다녀온 일이 잊지못할 추억이다.

  1980년대 후반은 이리북중 시절이다. 또래인 송창오 이현복 이봉희 그리고 후배인 최병은등과 함께 어울리며 다른 선배들과 자주 술자리를 하게 된다. 대장인 김수영 선생을 비롯하여 이영삼 형님등 10여명 이상의 동료들이 소주는 신동 삼겹살 집에서, 맥주는 북부시장의 지하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며 실컷 마셨다. 여기서 생긴 모임이 거북회다. 박종구 교장과 배상원선생, 이준엽 전 교장과 성길호, 채종석 형님들이 회원이다. 

  직원여행에서는 저녁회식에서 주로 생선회나 그 지역 특산물을 안주로 하여 거창하게 술을 마신후 필수적으로 2차에 나이트나 단란주점으로 이동한다. 그러고 나면 대개 호텔로 들어가서 자거나 고스톱을 치거나 하는데 패거리를 만들어 새벽까지 별도의 음주가무회를 열기도 한다. 이미 해리중 시절부터 해마다 직원여행이 있었으나 이때까지 술과 관련하여서 큰 추억거리가 없는 듯 한데, 이리북중에서의 기억이 가장 많고 생생하다. 버스속에서부터 막내인 우리들은 항상 음식과 술을 나르는 보이 역할을 담당하며 마시기 시작했고 이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시의 관광여행 분위기였다. 한번은 백암온천에 도착하였을때 신규발령자인 배상원이 만취하여 정신을 못차려서 모두들 지금도 기억하며 놀리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는 이영삼 전교장(당시 45세정도)을 우두머리로 하여 평소 얌전뱅이 여교사들을 포함한 남여교사 10여명이 주점을 얻어 박스술을 마시며 실컷 놀다 새벽녁에 나와 해장국을 먹다가 말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을 목격하고 놀라기도 하였다.

  학교동료들과는 별도로 김호길 선생과 당시 시간강사인 채수환 교수, 김성진 교수 나 이렇게 네명이 무수히 어울리고, 또 다른 버전으로 김성진 대신 오성수사장과 넷이 어울려 헤일수 없이 많이 마셨다. 김호길 선생과 오성수 사장이 사는 남중동 남파사거리를 중심으로 뭉쳐 살았다. 87-88년경에 는 고급 중형차를 가진 오성수 사장과 한가한 토요일 오후 쯤 시골로 나가 주막집을 찾아 차디찬 두부에 시디 신 김치를 얹어 한잔씩 마시는 막걸리는 맛도 있었지만 재미도 멋도 그만이었다.(더욱 재미있는 것은 당시 오성수 사장이 막걸리 주조장 사장이라는 사실이다.) 또 김호길 선생 김종구 사장과 가끔 셋이서 어울리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두어 해는 김성진 교수와 대학의 젊은 교수및 강사들과 어울려 약간 수준있는 맥주홀(아가씨 있는)로 마시러 다니기도 했다. 실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구도로 살다가 김성진 교수가 경기도 모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 떠나고 김종구사장이 전주에 대형 서점을 열면서 김호길 선생과 채수환 교수, 오성수 사장이 함께 어울렸고 90년대 초반에 시작한 오성수 사장의 공장형조립건축사업이 90년대 말경에 어려워지면서는 셋이서만 함께 살아오다가 내가 무주로 발령받으면서 생활반경이 다원화 되어 이젠 세 명이 함께 만나는 일조차 아주 희박해 졌다. 모두들 사는게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 1990년대

  1992년 군산 월명여중으로 갔다. 자가용으로 통근하므로 학교 동료들과는 친목회나 체육대회 같은 행사때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으나 별도의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학생부장을 맡았으나 우리 부원들은 세 명 모두 10년 연하이고 나만 익산에서 통근하므로 자주 함께 어울리기 어려웠고 여타의 30대들과 어울려 주로 테니스를 하며 건전하게 보냈다. 50대 선배들은 학교장과 당신들끼리만 어울리므로 따로 놀았고 친목회때면 이항근 이봉희 김용수 고영효 등과 뜻이 맞아 좀 길게 어울렸다. 교생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진 기억도 있다. 부산으로 간 직원여행에서는 해운대 바닷가에서 기분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김명희 선생등과 함께 노래방에서 포크송만 찾아 부르던 즐거운 한때가 생각난다.

  어느 해인가는 직원여행 회식이 끝난 뒤, 냇가에 앉아 30대와 40대가 7-8명씩 두 팀으로 나뉘어서 70년대 포크와 80년대 발라드로 노래이어가기 시합을 했다. 승리는 우리 40대들의 것¡ 끝없이 이어지는 70년대 포크송 메들리에 30대들은 꼼짝못하고 항복하고는 술을 샀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1998년 부안여상에 가니 교직원 수에 비해 그래도 30, 40대 청장년들이 많은 편이어서 주 1회씩 미니축구를 했다. 지금도 같이 근무하는 허대웅 그리고 권오인 등과 겨우 10여명이 반반으로 나누어  공을 차고 운동장에서 고기를 구어 쇠주 한 잔씩 했다.

 

 

☆ 2000년대

  2000년대 들어서는 은정표 교장을 중심으로 교감, 교무부장인 강병택, 나, 조병호, 변진섭, 김종복, 최기석등 무려 13-4명이 토요일이면 전주 중화산동으로 몰려가 함께 고스 톱을 치고 노래방에서 어울렸다. 워낙 인자하시고 존경하는 학교장이라 다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함께 하는 시간이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들 동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때면 익산에 사는 변진섭과 나는 으레 밤늦게 대리운전으로 와서는 우리 아파트나 진섭이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생맥주 한잔을 더 했다. 이때부터 전주에서 대리운전 참 많이 했다. 개인적으로는 김욱중 형님과 4년간 함께 통근하며 어느때는 우리 아파트 부근 생맥주홀에서 어느 날은 형님네 동네인 영등1차 앞 생맥주집에서 500cc 서너개씩 마시고 헤어지는 일도 추억에 남는 일이다. 평소 전화도 자주 못드려 형님께 죄송하다. 대천 직원여행에서 마지막코스로 40대만 모이자고 하여 김춘순 선생,오희숙선생, 나, 강병택이 노래방에 가다가 내가 취하여 계단에서 굴렀으나 다행이 다치지는 않았던 부끄러운 기억도 난다.

  2004년 전주제일고로 오니 박명일 교장께서 워낙이 사나이 기질이시고 술을 상당히 좋아하시는데 12명의 부장과 (특별히 나도 포함시켜) 회식이 자주 이루어졌다. 학교장, 조점수 교감, 임사환, 임영배, 김종안, 정성순등과 학교장 뜻에 따라 2차까지 남게 되면 취해서라기 보다는 맥주로 배가 불러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다. 은정표 교장이 오신 뒤로는 교감, 행정실장(사무관), 교무부장인 나와 식사자리는 많았으나 단체로 하는 술자리는 거의 없어졌다. 대리운전하는 일도 적어지고 편안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조점수 교감과 대리운전시켜 익산으로 함께 오는 날이면 꼭 우리 아파트 앞에서 맥주 세병시켜 마시고 택시로 가신 것도 추억거리다. 기억에 남는 직원여행은 2006년 교감연수중에도 금요일 저녁에 목포까지 찾아가 직원여행단과 함께하며 신나는 음주가무파티에 참석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2008년 무주고에 왔다. 이찬규 학교장께서 매우 술을 좋아하신다. 권이철 교무부장, 황봉식 연구부장. 문병주 진학부장, 이인근 기숙사운영부장, 정우경 행정실장등이 학교장의 뜻에 따라 상당히 자주 어울리게 되었으나 2차는 없었다. 학교장께서 이 좁은 읍내에서 우리 고교직원들이 술취한 모습을 절대로 지역민들에게 보이면 안된다는 강한 신념이 있어 실천하시기에 굳이 한잔 더 하자면 교장 관사에서 하게되고 이는 내게 귀한 귀감이 되어서 앞으로도 꼭 계속하여 실천하고자 한다. 금년에 황봉식 부장이 교감발령으로 나가고 문병주부장이 전주로 이동하게 됨에 사실상 술 모임이 사라졌다. 아주 성실하고 술도 좋아하는 최진만 연구부장과 지난 6월 15일 단 둘이 술 한잔 하면서 마지막 담배를 피운뒤 큰 결심으로 완전히 금연이 이루어졌고, 이제 술은 식사시 반주만 하려하며 술을 마시기 위해 2차니 3차니 하는 일은 중단하려 한다. 어제 지역 선배님들과의 회식에서도 실천이 가능했고 오늘 저녁 문상에서도 그리고 토요일 전주에서 가지게되는 5인 모임에서도 실천하고자 한다. 미안한 마음이면서 최진만 부장에게도 선언했다. 양드리는 아주 끊으라 하나 그건 참으로 지난한 일이요, 또 그러고 싶지도 않으며 정말 그리되어 술한잔 분위기를 소중히하는 그녀가 생의 의욕을 상실한다면(?) 그 또한 큰일이니 크게 양보하여 음주 패턴만 새로이 정립하고자 한다.

 

☆ 술과 살아온 추억을 회상하고

  참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고나니  정말 많은 사람들과 정말 많은 술을 마시며 살아 온 것 같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본 적이 별로 없다.(그런데 주변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단체로 함께 어울린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시며 인생을, 국가를, 사회를, 정치를, 미래를, 서로의 가정을, 자신의 미래를, 스포츠를, 연예를 그리고 별별 관심사를 시도 끝도 없이 논하며 서로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주며 살아온 영원히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방금 통화한 초등학교 동창인 김준기, 정기선, 유삼렬. 강해정. 고등학교 동창인 김하겸, 심재현, 손용국, 송명용, 장관익, 신홍규, 후배인 김용성, 조병호, 한대희, 한상설, 오성수, 심재호, 김성진. 존경하는 선배인 은정표, 김욱중, 이의방, 이영삼 형님들. 그리고 같이 근무하면서 정을 나눈 너무 너무 많은 동료분들이 있었다.( 이름을 일일이 다 올릴 수가 없도다.)

  언제나 항상 내 마음과 내 몸 곁에 있어주며 30년을 자나깨나 함께 살아온 김호길 선생, 채수환 박사가 있고, 강거희, 이치수, 김병근, 전경욱 친구는 지금까지 함께 살아가는 정말 믿음직스럽고 고마운 진정한 벗들이다. 

  지난 여름방학에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식도와 위가 별로 예쁜 모습이 아니고, 간은 안개낀 새벽인양 뿌옇게 덮여있다.

  이는 마구마구 마셔대는 술과, 마시면서 몇 시간씩 끝없이 먹어대는 무지막지한 음식때문에 생긴 모습이며 역류현상으로 말미암아 불쾌한 냄새가 나고 결재받으시느라 옆에 서 계시는 선생님들께 죄송하기 짝이 없더니만 이제야 해결방안이 찾아졌다. 40여년간 변함없던 술마시는 패턴을 시대와 나이에 맞게 바꾸는 것이다.   

  위에 생긴 용종을 제거하고 약을 두 달째 복용하니 역류현상이 없어지고 목이 상쾌하다. 조만간 간기능 정밀검사도 받아보고 건강에 더욱 주의할 때다. 나와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2010년 6월 15일(최진만선생과 술마시며 마지막 담배를 피우다)  

나의 아름답고 건강한 남은 30년을 위해 40년간 피워댄 담배는 완전히 끊었다. 

이젠 술이다.

 

2010년 11월 10일(최진만선생과 3차까지 마시다)

술과의 이별(?)이라니 마음이야 아프지만 결심해야만 한다.

 

회식이나 모임에서 1차로 반주를 하는 것은 아주 마땅하나

2차니 3차니 오직 술을 위해 이동하며 마셔대는 건 이제 사양해야만 한다.

 

나의 건강과 젊음을 위해서 좋아하는 술도 자제할 수 있어야하는 때가 된 것이다.

 

필요 이상의 술로 건강을 해치면서

일주일의 피곤을 힘들게 감당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함은

바보나 천치가 하는 일이다. 

 

품위있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되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끝.

 

 

건강관련 기사 하나(2012. 3.23)

나트륨의 역습

동아일보 횡성수설 송평인 논설위원

 

  성경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로 빛과 소금을 든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틀린 말은 아니다. 소금은 원소기호로 염화나트륨(NaCl)이다. 나트륨은 칼륨과 함께 세포의 삼투압을 조절하는, 신체에 없어서는 안 될 미네랄이다. 몸속에는 ‘나트륨-칼륨 펌프’가 쉼 없이 작동하며 세포의 신진대사를 일으킨다. 나트륨이 세포로 들어오면 칼륨이 밀려나고, 칼륨이 들어오면 나트륨이 밀려나는 순환 과정을 통해 유해물질이 든 오래된 물과 영양소가 든 신선한 물이 교환된다.

 

  나트륨은 칼륨과는 달리 자연 상태의 먹을거리에는 극히 적은 양만 들어있다. 그래서 포유동물은 나트륨 부족에 시달리기 쉽다. 채식동물은 더위 등 스트레스를 겪으면 나트륨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짠맛을 찾는다. 간혹 비무장지대(DMZ)의 야생 사슴이 콘크리트 벽을 핥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콘크리트 벽에 묻은 소금기를 섭취하기 위한 행동이다. 포유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제염 기술을 개발했다. 소금은 큰 이익이 됐고 국가의 최초 전매사업도 제염이었다. 로마 시대 병사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소금(salar)으로 받기도 했는데 오늘날 급료를 뜻하는 영어 ‘salary’, 프랑스어 ‘salaire’의 어원이 됐다.

 

  소금의 공급 부족 현상이 해결되자 나트륨의 역습이 시작됐다. 나트륨은 수분을 빼앗는 성질이 있다. 생선을 저장할 때 소금을 뿌려두면 생선에서 수분이 빠져나와 오래 둬도 상하지 않는다. 빙판길에 소금을 뿌리는 이유도 소금이 눈의 수분을 빼앗아 어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몸속 세포가 건강하려면 충분한 수분을 유지해야 한다. 칼륨에 비해 나트륨이 많으면 수분이 상실된다. 세포가 수분을 빼앗기면 혈관이 좁아져 혈압을 높이고 당뇨 신장질환 백내장 피부노화를 일으킨다.

 

  그동안 건강의 최대 적으로 지방과 설탕이 꼽혔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방이나 설탕보다 소금을 더 주목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2020년까지 하루 나트륨 섭취 20%(소금 2.5g) 줄이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우리 국민이 주로 먹는 김치찌개류 면류에 소금이 많아서인지 한국은 세계 주요국 중 나트륨 섭취량이 가장 많다. 소금이야말로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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