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자가용과 골프와 등산

청담(靑潭) 2010. 10. 12. 01:00

자가용·골프·등산 

자가용

 

자전거

 

  어린시절 자전거가 정말 갖고 싶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시절 우리집에 자전거가 있은 적이 없다. 자전거가 꼭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자전거를 살 만한 돈도 사실 없었다. 그래서 탈 줄도 모르는 자전거를 가끔씩 신나게 타는 꿈을 자주 꾸곤했다. 

  그러나 외갓집에는 언제나 자전거가 있었다. 우리집에서 10리(4km) 거리인 외갓집에서 삼촌들이 우리집에 올 때면 꼭 타고 오므로 나도 4학년때부터는 자전거를 배우게 된다.

  4학년으로 기억되는 그 해 어느날 대학 1학년인 둘째 외삼촌이 저전거를 타고 왔다. 기회다 싶어 몰래 타고 나가서 아직 익숙치 못한 실력으로 논길을 달리다가 그만 물이 있는 논에 빠져 옷이 몽땅 젖고 진흙이 잔뜩 묻은 저전거를 물로 닦느라 혼났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중학교때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정이 더욱 어려워짐에 따라 자전거에 대한 꿈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자전거는 아버지께서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가정경제가 조금 안정된 1970년(고등학교 3학년)에야 아버지께서 중고자전거를 구입하셔서 비로소 우리 자전거를 처음으로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집에 기계라고는 오직 재봉틀 밖에 없다가 비로소 자전거를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나는 고3이라서 자전거 소유에 대한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오토바이

 

   어린시절 1960년경 우리 시골동네에 엔진을 부착한 자전거를 누군가 타고 왔다. 진짜 오토바이도 아니건만 신기해서 모두들 열심히 구경하였다. 우리 마을앞이 국도 29번으로 차는 많이 다니지만 그 당시 오토바이는 오히려 희귀하여 구경하기 힘들었다.

  1985년 우리학교에 전입해온 후배교사가 새 자가용을 타고 왔다. 원래 집안이 잘살았다하고 본인도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서인지 1500cc현대에서 나온 신형차를 소유하고 있었고 나는 시골집에 다니면서 자주 얻어 타곤 했다. 그러나 보통 교사들은 자가용은 꿈도 못꾸었다. 이전에는 학교에 드나드는 자가용은 고창읍에 있는 대형서점 사장의 자가용이 유일하였고 우리도 가끔 한번씩 탈 기회가 있었을 뿐이다.

  후배는 <형도 차 한대 뽑으시오> 라며 권했지만  나는 자가용은 정말이지 꿈밖에 못꾸고 있을 때라서 오토바이를 하나 구입하기로 한다. 승수가 네 살때인 1986년 봄의 일이다. 125cc가 대세였지만 100만원이 넘으니 사기 힘들었고 우리 승수를 태우고 드라이브가 목적이었으므로 소형 빨강색 50cc 를 50만원엔가 구입하였고 고창읍 모양 연립에 살면서 승수와 가끔 드라이브를 즐기고 1987년에 익산으로 나오면서 아버지 통근용으로 드렸다. 아버지는 그 오토바이로 학교에 출퇴근 하시다가 1994년에 자동차(현대 엑셀)를 구입하셨다. 

  그 시절은 국민소득이 5,000달러로 후진국을 면하고 겨우 중진국에 진입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정말이지 공산품 값이 너무 비쌌다. 우리 월급은 20만원 남짓인데 <아이와> 녹음기가 5만원인가 하고 자가용은 1500cc소형이 300내지 400여만원이니 도대체 서민들은 자가용은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또 관리할 돈도 없었다. 교사가 되어서도 나는 소형 < 아이와 >녹음기를 가져보지 못했고 자가용은 꿈이었을 뿐이다.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들은 오직 저축만이 살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너달 월급이면 소형차 한대 구입이 가능하니 내가 부자인지 우리나라가 부자인지 참 격세지감이다.

 

 

승용차

 

  중학교 시절 미국영화를 보노라면 청춘남녀들이 모두들 자가용을 가지고 데이트를 한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일당이 미국인들의 이발료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도대체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경제지식이 없어 항상 숙제로 남아 생각해 보곤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일당이 최하 5만원에서 10만원이나 동남아시아 후진국 사람들의 한달 월급이 겨우 10만원에서 20만원 정도인것과 같은 이치이건만 당시 가난한 후진국의 중학생은  도대체가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금년 말이면 우리나라의 구매력지수(ppp)가 3만달러가 되어 곧 일본과 거의 같은 수준이 된다 하니 마치 우리나라가 천하를 얻은듯 가슴이 후련해지고 가슴이 벅찰 뿐이다.

  폐일언하고 자가용을 가지고 싶은 욕망은 젊은이들에겐 커다란 꿈이었다. 결혼을 하고 박봉인 초임교사지만 그래도 부부교사인고로 아주 어렵지는 않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1987년 봄에 익산으로 이사오면서 16평 작은 주공아파트를 마련하고 나니, 1989년에는 자가용을 갖고 싶은 꿈을 기어이 이루고 싶어졌다. 그러나 주변에 자가용을 가진 친한 사람으로는 1년 후배인 오성수 사장밖에 없고 회사차를 모는 친구인 윤재원이 있어 그에게 중고차구입을 부탁하였더니 7년 된 대우로얄 살롱(전북 2마 5189)을 소개하여 사게 되었다. 자동차 값도 제대로 따질 정보도 없이 400만원이 넘는 새 소형차는 구입할 자신이 없어 280만원에 중고차를 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야 만다. 당시 로얄 살롱은 거의 최고급수준이어서  보통사람들은 타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 차가  겉은 말짱했으므로 내가 잠깐 허황된 생각으로 구입을 너무 쉽게 결정해버린 것이다. 1989년 2월이다. 1985년에 대성고에서 고물 자동차를 구입하여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운전을 연습하였기에 학원을 다니지 않고 운전면허를 따려다가 무려 대여섯 번이나 떨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합격하여 한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차를 운행하는 부끄러운 에피소드도 있다.

  우리학교 직원이 50명이나 되는데 내가 두 번째로 차를 가진 것이라서 일면 우쭐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자동차세가 엄청 비쌌고(20년이 지난 지금과 거의 같았던 것 같다) 기름값, 엔진 오일값 등이 당시의 내경제력으로는 감당이 안되어 후회 막급이었으며 겨우 3년 반을 타고 나니 폐차 직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폐차시키고 만다.

 하지만 어려움보다 즐거움은 훨씬 컸다. 꿈 속에 그리던 자가용, 그것도 로얄 살롱을  운전하며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하게되니 마치 내가 상류층이 된 듯 당당하게 느껴지면서 그동안 초라한 시골 중학교 교사로서 지녔던 위축감이 사라지고 자부심이 커진 것이다. 내가 남보다 조금 먼저 차를 가지게 되니 다음 해엔 김호길 선생과 채수환 교수도 곧장 중고차를 구입하여 세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되었고 자가용의 구입은 내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온 《36년래 제 일대 사건?》일 수 밖에 없었다.

   1992년에 로얄 살롱을 폐차시켜버리면서 구입한것은  프라이드베타(전북2마 9917)이다. 차에 무지하고 겉멋 좋아하다가 살롱으로 크게 데었으므로 이현복 선생이 프라이드 베타를 산 것처럼 나도 진짜 내 수준에 맞는 실용적인 차를 사기로 한 것이다. 군산에서 오성수 사장 처남이 역시 고교후배인데 기아대리점 지점장이므로 그곳에서 구입했다. 차야 새차이니 성능좋고 저동차세 싸고 기름값 적게 들어 좋았으나 나중에는 내 나이 50이 다되어서 품위에 맞지 않고 색깔(짙은 밤색)도 맘에 들지 않아 또 조금은 반성했다. 그래도 서민이 10년은 당연히 타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줄기차게 타다가 드디어 큰일이 터진다.

  2001년 2월에 동창인 이일여중 강덕신 선생과 함께 동창회일로 전남과 경상도를 순방하게 된다. 5월에 남성21회 30주년 기념행사를 하게 되어 2년간 준비해왔고 그 행사를 위해 최근에 총무를 맡은 강선생과 7년째 재무를 맡은 내가 소외지역인 두 곳의 친구들을 찾아 후원금과 참가독려차 나선 것이다.

  익산을 출발하여 고창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광양제철에 근무하는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1박하고 울산에 들러 최왕진(중견기업 상무겸 공장장)을 만나고 꼭 다녀가라는 부산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울산을 출발하자마자 대형접촉사고가 터졌다. 내가 피곤하여 강선생이 운전중이었으나 상대방에서 내가 운전한 것으로 고맙게도 용인해주어(보험은 부부한정이므로) 경찰서에서 합의를 보고 프라이드 베타는 최왕진에게 폐차처리시키고 야간 열차를 타고 허무하게 익산으로 돌아왔다. 울산경찰서의 교통담당자의 친절이 너무 고마웠고 벌금 80만원과  피해자에게 지불한 약값 100만원은 30주년 행사비에서 해결해 주었다. 다행히 우리 둘 모두 크게 다친곳은 없었다.

  사고로 프라이드를 폐차시켰으므로 부랴부랴 차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레조(전북 32거 4854)를 샀다. 조금 차체가 높은 차를 타고도 싶고 동료인 권오인 선생의 레조를 시승해보니 썩 괜찮아서 단박에 결정해 버렸다. 가스차이므로 기름값도 절약할 겸 쉽게 결정한 것이다. 레조는 내가 2008년까지 타다가 우리 아들 이승수에게 넘겨주었고 불필요하다 하여 되받았다가 2010년 8월 처조카에게 넘어 갔다. 9년만에 소유권이 넘어간 것이다.

  1997년 양드리용 티코(전북 32마 7738)를 구입한다. 값도 싸고 앙증맞게 예쁘기도 하고 주차비도 반 값이라하고 단지 출퇴근용으로만 사용할 것이기에 가장 비산 티코를 구입한 것인데 2004년 친구인 손용국에게 넘어갈 때까지 예쁘게 탔다. 생각만큼 유류비가 절약된 건 아니었는데 이유는 1997년에 발생한 대형사고로 엔진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우리 세희약혼식이 열리던 날 티코로 출발한 이유는 내가 전날 술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운전이 힘들면 차라리 고속버스로 가면 될것을 구태여 양드리를 시켜 티코를 운전하여 가다가 고속도로 북대전 대덕연구단지 입구부근에서 앞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차체가 반대로 도로를 향하여 섰으나 다행히 우리 둘이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천운이었다. 100km로 함께 달리던 차들이 많았더라면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리라. 대전의 공장에 차를 넣고 대전에 사는 동네친구인 기조에게 전화하여 처리를 부탁한 다음 고속버스로 남서울의 약혼식장에 가까스로 갈 수 있었다.

  내 나이 40대 중반인데 서울 나들이 하면서 술을 잔뜩 마시는 행위나 그 상황에서 소형인 티코를 양드리에게 운전하도록 하는 행위나 모두 머저리의 행동이다. 두고 두고 내 인생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2004년 양드리가 <나이 50이 넘어 티코가 어울리지 않는다>하시므로 곧 처분하고 SM5(58나 5726)를 구입하였다. 대체 동료들이 그랜저나 소나타를 타는데 티코는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도 미련한 나는 체면보다는 실리요, 차는 한번 구입하면 기본이 10년이라는 구시대적 옹고집이 있어 미련하게도 양드리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1993년에 아버지께서 처음 구입하신 차는 엑셀(전북 2도 1561)인데 두번째 차인 라세티(2004년구입, 52거 1928))를 2008년 여름에 구태여 차를 타실 일이 별반 없으시므로 우리에게 양보하시게 되자 자연히 내 레조를 승수에게 주고 내가 SM5를 타도록 양드리가 양보해주시어(무주까지 100km의 먼 길이요, 고개가 많아 소형차는 엄청 운전이 힘들고 피곤하다) 내가 운행하게 된다.

  이제 나이가 50대 후반이니 다들 좋은 차를 타노니 나도 역시 중후한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한편으로 있으나 그리 절실하지는 않다. 교장들은 모두들 약속이나 한듯이 그랜져요, 절친한 후배 조병호 장학사가 체어맨을 타고, 아우 채수환 박사는 무슨 외제차를 끌고 역시 절친인 김호길 선생도 SUV소렌토를 타고 친구들인 송명용이 그랜져, 이종철 선생은 제네시스를 타니 나도 좋은 차로 바꾸고 싶지만 시골의 교감으로는 어려운 우리 아이들이나 학부형들을 보아서라도 그냥 참으려 한다. 교장이 되어 체면치레가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거나 (솔직히 SM5구형은 별로 품위는 없다. 언젠가 모 교장이 내차와 같은 옅은 파란색을 소유하고 있는데 내 눈에도 환갑이 지난 교장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하면 생각해보련다. 그러나 정년 퇴임하게 되면 오히려 정말 품위있는 좋은 차를 타고 싶다. 나이 들수록 품위있게 말하고 품위있게 행동하며 품위있게 먹고 마시며 품위있는  옷을 입고 품위있는 차를 타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아니 내가 매사 남들과 정 반대의 생각으로만 사는 것은 아닌가? 

  죄우간 나는 아파트도 자가용도 세상 사람들 움직임과는 다르게만 생각하고 사니 우리 양드리에게 자주 핀잔 맞는데도 할 수 없다.

 

  

 골프

   이제 골프이야기 차례다. 자가용이야 없는 이 없는 세상이고, 소형아파트에 고급차, 외제차가 즐비하다고 보도되는 세상이니 제 멋대로 말함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골프 얘기도 괞찮을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교사들은 골프를 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2000년대 중반들어 골프의 대중화시대가 열렸다. 우리 전북은 가난한 도 임에도(경제에 관한 한 맨날 전국 16개 시도중 14위다. 근로소득자 평균임금이 212만원으로 서울의 260여만원에 비해 현격히 낮다) 웬 골프장은 저리도 많이 생겨나는지 평범한 보통사람들까지 골프연습을 시작했다.

  2006년 함께 근무한 동료들 모임에서 골프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학교에 작은 연습장을 만들고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으로 연습하고 교사들도 연습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나는 교감연수를 받게 되어 시간도 없고 마음도 내키지 않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임이 골프를 함께 하는 모임으로 변질되며 (나는 마음속으로 원하지 않았지만)다른 회원들도 가입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골프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본디 나는 작은 공 가지고 하는 운동치고 잘하는게 없노니 골프라고 잘 될까? 탁구도 대충이요, 당구도 평생 80이요, 테니스도 겨우 복식게임에 끼어 치는 정도라, 어느 운동하나 제대로 배우지도 열심히 연습도 해 본적이 없다. 그냥 끼어들어서 어울려 운동하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2006년 9월에 가장 값이 싼 연습용 골프채를 구입하고(친구인 김대수 실장의 말에 따랐으나 후일 생각해보니 실수였다)동네 연습장에서 프로의 코치를 받았으나 별로 실력이 생기는 것 같지도 않고, 하도 고등학교 친구들이 함께 가자기에 마지못하여 한번 따라가 머리는 올렸다. 회원들이 만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골프 얘기만 하는데 식상하기도 하고 큰 매력을 못느끼나 모두 내가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동료들이므로 함께 어울리기 위해 한 해 서너번씩이나 따라 다녔다. 골프 모임이 있는 고교친구들은 언제쯤이나 회원으로 들어와 레귤러골프장에 함께 나가게 되느냐고 놀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후 연습장에서 두 번이나 더 프로에게 코치를 받았고 2009년 2월에는 우리학교에도 전문계(레져 관광학과) 학생들을 위한 연습장을 만들어 선생님들과 연습도 하였지만 2010년 3월이후에는 아예 연습도 안하고 담을 쌓아 버렸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우리 양드리와 함께 등산을 해야 한다. 양드리는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운동인데 나 혼자 골프친다하여 골프패들과 어울리면 양드리가 산에 가지 못하게 된다. 별로 취미도 없고 또 사실 연습장에서나 운동이 되는듯 하지 필드를 돌다 보면 이게 운동인지 노동인지 피곤하기만 해서 등산만 못하게 여겨지고 즐거움도 별로다.

  하여튼 무주에 근무하다 집에가서 쉬는 휴일에 골프를 치는 것은 시간이 너무 아까워 정말 내키지 않는다. 겨우 이틀이나 하루 반인 휴일에 고향집 돌제에 가고 부모님 만나뵙고, 등산하고 온천가고 결혼식가고 하다 보면 바빠서도 골프치기 어렵다. 퇴직후에나 시간이 많~아지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절대필요조건이 된다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있다. 

 

 

 

 

등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등산을 다니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내가 보건대 산을 싫어하는 족속이 있으니 바로 학생들이다. 그저 고등학생들은 등산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니 말이다.

  나는 여러차례 언급하는 바 이지만 젊은 시절에 등산을 다니지 못했는데 변명같지만 산에 갈 돈도 없었고 또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별반 없어 기회를 갖지 못했다. 1974년 여름에 김용성, 강민석과 함께 무주구천동 향적봉에 올라 1박을 한 것이 젊은 시절 등산경험의 전부다.

  1987년 고창에서 익산으로 전근한 뒤 일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배산에 다니게 된다. 생각해 보면 그 때만 해도 일요일에 배산에 가면 오는 시민들이 별로 없었다. 아직 건강을 챙기며 산을 찾는 여유가 없었다는 거다. 세네살 승원이까지 데리고 시내버스를 타고 미륵산에도 가끔씩 가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1989년 2월 자가용을 장만하고는 대아리로 진출하고 매주 드라이브만 하지 건강을 위한 등산은 소홀히 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이후 너도 나도 자가용을 가지게 되자 1990년대 중반부터는 산이란 산은 휴일이면 등산객으로 인산 인해를 이루는 대한민국이 되어 갔다. 바로 자가용 소유확산으로 인하여 생겨난 놀라운 현상이다. 시내버스로 가려면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고 불편하지만 자가용이 생기니 후다닥 산으로 나서게 되고 건강 챙기는게 유행처럼 되면서 등산공화국이 되어 갔다.

  우리도 김호길 선생내외와 채수환 선생 내외가 함께 어울려 미륵산으로, 운장산으로, 함라산으로 다니기 시작하고, 아이들과 함께 점심도 준비하여 산과 강과 들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도 구워 먹는 즐거운 삶이 시작된다. 약 15년 동안 정말 많이도 함께 놀러 다녔다. 

  요즈음은 삶의 행동반경이 각기 달라져서 그저 분기별로 겨우 어울리게 되어 버렸다. 채박사는 기업체 회장님과 어울려 다니게 되고 김호길 선생은 당신 친구들과 당구와 바둑으로 어울리게 되었고 나는 주로 양드리와 시골에 가거나 등산하는 스케줄 컨셉이 만들어 졌다. 이제 나이가 이만 하니 등산을 멀리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계속만 하면 70대가 되어서도 산을 찾는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지만 건강치 못하면 산을 오르지 못하고 드라이브만 해야하니 생각하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양드리가 몸이 약하기도 하고 심장도 약심장이라 높은 산을 오르거나 빠른 등산은 하기가 힘들다. 그저 나와 함께 설렁설렁 야트마한 산을 가볍게 산보하듯이 다니면 그게 바로 최고의 등산이요, 최고의 운동효과를 볼 수 있다고 믿으므로 우리 둘이 다니는 것을 양드리도 내심 반기며 휴일 등산은 절대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언제까지나 가벼운 등산으로 심신을 맑게 하며 건강을 유지하고자 한다. 평생 가까이하고자 하는 것은 여행이요, 등산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가 매주 휴일이면 쉽게 나서기 쉬운 산들은 다음과 같다. 

 

배산(82m)  평야에 놓인 구이리시의 주산이다. 큰 배산과 작은 배산을 돌거나 내려와서 2년 전에 생긴 

                     배산체육공원을 돌아도 좋아 자주 간다. 두 바퀴정도 돌면 1시간 정도 운동하게 된다.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이다.

 

  

미륵산(430m) 익산의 주산이다. 오르는 길도 많고 찾는 시민도 많다. 정말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찾은 산

                     이로다. 정상에 다녀오면 2시간 남짓 운동한다. 우리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이다.

 

함라산(240m) 함라면 소재지 뒷산이다. 최근 몇 년동안 가장 많이 다니는 산이다. 올레길도 만들어져 있

                     다. 2시간 정도 걷는데 아름다운 금강과 웅포 골프장을 바라보며 걷는다. 우리집에서 차로

                     25분 거리이다.

 

대아수목원(300m) 완주군 동상면 소재. 전라북도청에서 운영하는 수목원이며 3개의 전망대와 온실과 나

                     무 전시관이 있다. 1시간 산보코스가 있고 세 봉우리를 돌면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제1 봉

                     만 다녀오면 1시간 반이다. 사람들이 무지 찾기 시작하여 북작거린다. 하지만 아름다운 곳이

                     라 엄청 찾아다녔다. 지난 이십년간 매월 1회 이상 찾아간 곳이다. 아름다운 대아리 저수지

                     와  많은 가든이 있으며 송광사및 위봉사와 연결되는 드라이브 코스다. 비가 오면 위봉폭

                    포가 절경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휴일 누가 엄마 아빠 소재를 물으면 무조건 대아리

                    가셨다고 대답했다. 우리집에서 40KM, 차로 50분 거리이다.

 

모악산(794m) 전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전주의 주산이요, 전북의 평야지대의 가장 대표적인 명산

                     이다. 기린회원들과 자주 찾고 있다.양드리에겐 약간 무리이므로 함께는 잘 가지는 않는 산

                     이다. 우리집에서 차로 40분 거리이다.

 

옥산저수지 둘레길 : 군산시 옥산면 소재. 둘레길이 있는지 나만 몰랐다. 한달 전에 처음 가본 곳이며 1/3

                    정도를 산으로 돌면 2시간 20분 소요되며 저수지 둘레길만 돌았더니 무려 3시간이나 걸려 조

                    금 지루하고 힘들었다. 우리집에서 차로 30분 거리다.

 

은파저수지 둘레길 : 군산시내 유명한 은파저수지 둘레길을 만들었다하여 가보니 아주 길을 잘 만들었고

                     경관도 좋은데 화장실이 없거나 더러워 다시 가기 힘들듯하다. 8.8km로 두시간 반 소요될 듯

                     하다. 35분이면 공원입구까지 갈 수 있다. 

 

용화산(340m) 미륵산의 앞산이며 평생 3번밖에 가지 않았으나 쉬지 않고 돌았더니 2시간 40분이 걸렸

                    다. 10여년 만에 가보니 기억에 남아 있던 것 보다 훨씬 좋은 산이었다. 역시 차로 30분 거리

                    다.

월명(산)공원 : 군산시에 있는 공원이다. 월명여중에 근무할때 2시간 연속 강의가 비면 종종  수시탑까지 다녀오 곤 했다. 대 공원으로 확장하여 수원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둘레길도 꾸며졌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1시간내지  2시간 30분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향로봉(340m) 우리학교 바로 뒷산이니 아침저녁으로 가끔씩 오르는 산이다. 무주에 근무하는 동안 많이

                   오르게 된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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