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개혁에 대한 관찰

청담(靑潭) 2010. 12. 6. 09:40

 

 

 

개혁에 대한 관찰

(준비중)

 

 

Ⅰ. 서언

   이성과 지혜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을 가진다. 그 꿈이 소박하거나 자신의 능력에 비추어 실천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할 때 능히 그 꿈을 이루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꿈이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그리고 너무나 높은 이상에 치우치면 결코 그 꿈을 이루기 힘들다. 평생을 이상만을 좆다가 그 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을때 당하는 슬픔과 좌절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그 지나치거나 도저히 가능성이 없거나 너무나 이상적인 꿈만을 좆다가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부작용은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하다.

   개인도  큰 꿈을 가지되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상황에 맞게 수정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버릴 것도 있다. 그게 바로 실용적 사고이며 현실상황과의 적절한 타협과 조절을  통하여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수가 있다. 바로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최소화시켜가면서 자신의 목표를 조절할 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면서 삶의 만족도를 최대화시킬 수 있다 하겠다.  국가경영도 다름아니라고 본다.

   혁명은 기존의 질서를 전면 부정하면서 정치체제의 근본을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운영의 방법이나 구조까지 전면 개편된다. 혁명은 강제적이다. 반대자는 반혁명분자가 되어 처형된다.

   개혁은 기존의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 국가운영의 방법을 개편하는 것이다. 개혁으로 인한 불이익을 예상하는 반대파가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당위성과 정당성을 확보해도 개혁의 성공은 그리 쉽지 않다. 군주제에서는 군주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고 민주제에서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인류의 연사상 많은 혁명과 개혁이 있었고 성공한 개혁도 많지만 의의는 높았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개혁도 많았다. 그중 안타깝게도 실패의결과를 낳은 대표적이라고 생각되는 개혁에 대해 조사해 보고, 현대 한국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실로 획기적 역사 발전을 이끈 박정희의 혁명적 개혁과 오직 이상에만 치우치며 전혀 비현실적이고 전혀 비 실용적인 개혁에만 매달리며 실패한 노무현의 개혁을 비교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이 글을 시작하였으나 나의 지식과 연구가 일천하여 갈 수록 자신감이 약화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끝을 맺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없어 이 글을 삭제하지 못하며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도 고질이다.  퇴직후가 되더라도 조사와 정리를 계속하고자 한다.

 

Ⅱ. 아테네 솔론의 개혁

 1. 시대 상황

 2. 개혁의 목적

 3. 결과

 4. 평가

  솔론이 자신의 과업을 완수했을 때 각계 각층에서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다가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귀족들은 그가 부분적인 개혁에 머물기를 바랐고, 빈민들은 거꾸로 모든 토지의 평등한 분배를 원하면서 그같은 재분배를 실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가 참주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론은 비록 자유·정의·인도주의에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결코 평등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독재권력을 장악하려는 야심도 없었다. 그의 시에는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많은 특권을 주었노라……부자와 권세가들이 잘못해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으며 양측 모두에게 강력한 보호자가 되어 어느 쪽도 부당하게 득세하는 일이 없도록 했노라. 참주가 되어 강제로 무언가를 이루거나 귀족과 하층민들이 풍요한 땅을 똑같이 나누어 갖게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도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불만을 갖기는 했어도 솔론의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그의 조치는 100년간 효력을 갖는 것으로 선포되었고 회전 나무판에 새겨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게시되었다. 이후 그는 더이상의 논란과 해명을 피하기 위해 약속하고 여행을 떠났다.
  말년 그가 방문한 곳 가운데는 이집트와 키프로스가 있었다. 이 사실은 그의 시에서 확인된다. 전설 속의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와 만났다는 유명한 일화는 연대의 차이 때문에 신빙성이 적지만 어쨌든 전설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통해서 부와 권력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솔론이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은 귀족출신 권력자들을 우두머리로 한 지역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솔론은 살라미스의 최후 결전 때 장군이었으며 아티카 북동부의 지도자인 친구 피이소스시라투스가 참주가 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연로한 정치가 솔론의 절박한 경고를 무시했으며 심지어는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응답했다. "머지 않아 시민들은 나의 광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진실이 우리 가슴속에 모습을 나타낼 때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옳았음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BC 560년 참주가 되었다. 그는 곧 쫓겨나기는 했지만 솔론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다.

 

Ⅲ. 로마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1.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3년 -B·C132년)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다. 호민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결국 개혁에 반대하는 원로원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배경과 군 경력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6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였다. 그라쿠스 가문은 당시 로마에서 존경받던 부유층 가문으로 아버지는 기원전 154년경 10살인 티베리우스와 누나, 갓난아기였던 남동생 가이우스를 남기고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혼하지 않고 아이들의 양육에 힘썼다. 누나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와 결혼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당시 그는 매형 스키피오와 함께 카르타고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기원전 137년에는 군단의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으로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에 참가했다. 원정은 실패했고 불명예스러운 강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때 그라쿠스의 소극적인 태도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원로원은 불만을 가졌다.

○로마 사회의 불안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로마 사회는 불안해졌고 자작농들은 군단에 복무하느라 자신의 토지를 돌볼 수 없었다. 또한 전쟁으로 늘어난 속주들에게서 들어오는 농작물로 본국 이탈리아의 자작농은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티푼디움(노예를 기반으로 한 대농장제도)의 발달로 거대 지주와 일부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 등 귀족들의 부는 더욱 늘어만 갔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자작농들은 농지가 없어 갈 곳을 잃고 무산자가 되어 로마로 밀려 들어왔다.

정치적으로도 전쟁을 치르면서 원로원은 그 권한이 점점 더 강화되고 일부 소수의 가문들에게 그 권력마저 집중되었다. 자작농들은 자산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는 실제로 군단병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로마의 문제를 파악하고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다.

 

○ 농지개혁의 추진

기원전 134년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 이라고 불리는 농지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유지 임차 상한선을 500유게라(jugera)(약 1.3㎢)로 정하고 아들의 명의로 한명당 250유게라까지 인정한다. 전체 가족(한 가문)이 1,000유게라를 넘기지 못한다.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하지만 양도할 수는 없다. 1,000유게라 이상의 토지는 국가에 반환하고 보상을 받으며, 반환된 토지는 농민에게 재분배하고 국고에서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라쿠스는 이 법안으로 국유지의 공정한 분배와 자작농의 보호를 꾀했다. 원로원의 보수주의자들도 처음에는 이 법안에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었다. 백년 전에 제정되었지만 유명무실해진 기존의 법안을 부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고 완전한 평등보다는 단순히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보수파는 그라쿠스의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를 끌어들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그라쿠스는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옥타비우스를 탄핵시킨 후 농지법을 통과시키고 농지 위원회를 선출하게 되었다.(기원전 133년)

때마침, 페르가몬의 아탈루스(Attalus) 3세가 죽으면서 왕국 전체를 로마에게 넘기는 일이 일어났다. 농지 위원회를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그라쿠스는 아탈루스 왕의 유산을 이용하여 자작농에게 보조금을 주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보수적인 원로원의 반감을 샀다. 외교권과 해외 재산의 사용에 대한 결정은 원로원의 고유 권한인데 호민관이 이 권한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반대파는 그라쿠스의 호민관 임기가 끝나면 그를 기소하려 했고 그라쿠스는 그때까지 관례적으로는 재선이 허용되지 않던 호민관직에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선에 출마했다. 반대파는 그라쿠스가 독재를 꿈꾼다는 비난을 퍼붓는 등 필사적으로 당선을 막으려 했다.

 

○결과

  호민관 선거날, 수많은 그라쿠스의 지지자들이 로마 광장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기세라면 그라쿠스의 당선은 분명해 보였다. 다급해진 반대파는 집정관 스카이볼라에게 선거를 무효로 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반대파는 철제 곤봉으로 무장하고 광장으로 가서 그라쿠스의 지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라쿠스도 살해당하고 수백명이 반대파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들의 시체는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원로원 의원들의 곤봉에 맞아 테베레강에 아무렇게나 버려진다. 원로원은 물론 사촌들까지도 등을 돌렸다. 티베리우스와 유력한 원로원 의원들이 불화를 겪은 것은 당시 중요한 현안을 둘러싸고 그가 타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안이란 다름아닌 토지의 분배와 로마의 일반시민인 평민의 권리였다.

  그라쿠스가 죽은 후, 원로원은 평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반대파의 주동자인 스키피오 나시카를 사실상 추방하고 농지 개혁 법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라쿠스라는 견인차가 없어진 마당에 토지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또 한번의 토지 개혁으로 보수파와 맞서게 된다.

 

 

 

2.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1년)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다.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으로 형과 같이 민중을 위한 개혁을 추구하다가 끝내는 죽임을 당하였다.

 

○ 배경과 초기 생애

가이우스는 기원전 154년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였다. 그가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가 죽었고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누나 셈프로니아는 훌륭한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자라났다.

형 티베리우스가 로마에서 보수파에게 죽임을 당하던 기원전 133년 가이우스는 매형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밑에서 히스파니아 누만티아에서 군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10년간 가이우스는 당시 로마 공화정의 지도자들이 거치는 평범한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126년부터 3년간은 사르데냐에서 군단의 회계감사관으로 복무했다.

 

○ 첫 호민관 시기

기원전 123년 가이우스는 첫 번째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호민관에 당선되자 그는 여러 가지 개혁적인 법안을 들고 나왔다. 주요한 개혁 법안들은 아래와 같다.

 

농지개혁법 : 형 티베리우스가 추구하던 자작농 육성법

곡물법 :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시가보다 싼 값으로 빈민에게 제공하는 것

병역법 : 17세 미만인 시민의 징병을 금함

공공사업법 : 가도, 교량, 항만등 공공사업을 진흥함

식민법 : 새로 생긴 식민지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많은 시민을 이주시켜 경제적 부흥을 꾀함

사법배심원법 : 새로이 대두된 계급인 에퀴테스(기사) 계급이 배심원을 독점하게 함

시민권 개혁법 :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추구함

이러한 법안이 차례로 제출됨에 따라 가이우스는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로마 민중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전통적인 보수파들에게 법안의 일부는 매우 불쾌한 것으로 특히 시민권의 확대는 모든 원로원 의원이 가이우스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두 번째 호민관 시기

기원전 122년 두 번째로 호민관에 당선된 가이우스는 더욱 정력적으로 개혁을 실현하려 했고 반대파의 반대도 점점 노골적으로 되어갔다. 가이우스는 카르타고를 재건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를 위해 카르타고에 나가 있는 동안 원로원은 리비우스 드루수스라는 다른 호민관을 이용해 더 급진적인 법안을 제출하게 함으로 가이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이에 가이우스는 초조해졌다. 더욱이 다음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두사람중의 한사람은 루키우스 오피무스로 매우 강력한 그라쿠스의 반대자였기 때문에 그동안 쌓아왔던 개혁이 물거품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어 벌어진 호민관 선거에서 가이우스는 결국 세 번째 연임에 실패하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카르타고 식민 도시 건설마저 반대파가 무효법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가이우스 세력과 보수적인 원로원세력은 이제 카르타고 식민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결과

카르타고 식민시의 운명을 결정할 투표가 실시되는 날, 사소한 다툼끝에 하급관리 한명이 그라쿠스파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마 원로원은 즉각 집정관 루피우스 오피무스의 선동으로 그라쿠스파를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일종의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그라쿠스파를 진압했다. 그라쿠스파는 전통적으로 평민의 아성이던 아벤티노 언덕에서 저항했으나 모두 학살당했고 가이우스도 혼란중에 도망치다가 결국 자살했다. 오피무스에 의해 가이우스와 그의 동료 플라쿠스는 참수되어 '포로 로마로'에 효수되었고 몸뚱이는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이후 원로원은 카르타고 식민도시 건설, 로마 시민권의 확대법안 비롯한 가이우스의 개혁의 대부분을 무효로 만들고 토지개혁도 무산시켰다. 나중에야 시민권 확대를 비롯한 가이우스의 개혁이 옳았음이 증명되고 대부분 실행되게 된다.

 

 

 

1. 시대 상황

 2. 개혁의 목적

 3. 개혁의 내용

 4. 결과

 5. 평가

 

Ⅳ. 남송 왕안석(1021-1086)의 개혁

 1. 시대 상황

  960년 수립된 송왕조는 제4대 인종(仁宗)의 치세(1022~1063)에 전성기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40년 동안 큰 전란도 천재지변도 없는 속에 경제는 부흥했고, 문화는 융성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맞먹는 ‘경력(인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종 시대 개막과 거의 비슷한 때(1021) 태어난 왕안석은 강서성 무주 임천현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할아버지 대부터 관직에 올라 아버지는 강녕부 부지사까지 지냈다. 말하자면 명문가는 아니었던 셈인데, 그나마 왕안석이 19세 때 아버지가 급사하면서 한동안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학문을 좋아했던 왕안석은 “하인이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서 스승도 두지 못한 채 꾸준히 책을 읽었다. 스승이 없어서인지 공부의 범위가 넓고 이해 방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는 공부는 즐거워도 벼슬살이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머니와 오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그가 녹봉을 받는 것 말고 방법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23세에 과거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당시는 되도록 중앙에서 근무해야 출세길이 트였지만, 왕안석은 계속 지방관직을 희망했다. 그래서 양주 지사의 보좌관을 시작으로 16년 동안 은현, 서주, 상주, 파양을 전전하며 지방행정을 맡아보았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미래의 대 개혁가 왕안석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는데, 상대적으로 권모술수의 수라장에서 벗어난 한가함을 이용해 경전 공부를 더욱 심화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지방민들의 실생활을 오래 접하며 무엇이 그들에게 절실한가를 숙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좋은 평판을 얻어, 결과적으로는 중앙에서 권모술수에 몰두한 사람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었다. 즉 30대 후반의 그는 “경전 해석에서 당대 으뜸”이라는 명성을 누렸으며 지방관으로서도 두루 선정을 베풀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2. 개혁의 목적

   그는 1058년에 중앙관직으로 올라가면서 인종에게 “만언서”를 올려 개혁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밝혔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그 후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며, 왕안석의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잠깐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067년, 영종이 일찍 죽음에 따라 그의 맏아들 조욱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함으로써(신종), 마침내 ‘왕안석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왕안석은 1068년에 신종과 처음 만남을 가졌다. 이것은 신종의 태자 시절 사부였던 한유의 주선 덕분인데, 한유는 왕안석의 사돈의 사돈이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정실이 개입된 만남이었다. 왕안석에 대한 신종의 첫인상은 의외로 “너무 원칙에만 치우친 이상주의자”라는 것이었고, 서하의 간섭을 물리치는 문제와 재정 압박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 싶었던 신종으로서는 다소 실망이었다. 그래도 그는 왕안석을 참지정사에 기용했는데, 그 이후 이른바 “왕안석의 신법”이 잇달아 제정되기 시작한다.

 

3. 개혁의 내용 

●균수법(均輸法)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의 운송을 발운사라는 관청에 통제하도록 하여, 그동안 원거리에서 공물을 바칠 때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어 사실상 중간상인들이 대납하고 폭리를 취해 온 것을 차단했다.

●청묘법(靑苗法)은 춘궁기에 굶주린 소농이 높은 이자로 대지주에게 식량과 종자를 빌리고, 그 빚 때문에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국가가 소농에게 식량과 자금을 빌려주게 했다.

●모역법(募役法)은 지방행정 업무를 민간에서 돕는 직역을 임의로 부과하고 그 부담이 파산할 정도로 과했던 상황을 개선하여 모든 농가가 재산 등급별로 면역전을 내도록 했다.

●보갑법(保甲法)은 향촌을 열 집씩 묶어 행정의 효율성과 향촌방위의 강화를 도모했다.

●보마법(保馬法)은 향촌별로 군마를 할당하여 사육하게 했다.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은 토지의 소유에 따라 세금을 차등 있게 징수하는 법이었으며, 대지주에게 타격을 주었다. 

●시역법(市易法)은 중소상인이 부족한 자금을 대상인에게 높은 이자로 빌리던 것을 국가에게 낮은 이자로 빌리게 했다.

●과거제도를 개혁해 보다 실무 위주의 임용시험이 되도록 했다.

●창법(倉法)은 서리에게도 녹봉을 주고 정식 관리로 승진할 기회를 주되 부정부패는 엄히 단속하는 내용이었다.

 

4. 결과

   이런 신법들은 국가의 경제 개입을 늘리고, 재정 수입과 규모를 늘리며, 대지주와 대상인에 맞서 소농과 소상인을 보호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개혁은 ‘당연히도’ 처음부터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론은 신법의 역효과나 시행상의 어려움 등을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왕안석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 도참설을 들먹이는 “신법은 불길하며 국가에 변고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 등까지 다양했다. 그래도 신법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볼 수 있다면, 그들이 주로 화북 지방의 명문대가 출신으로서 대토지 소유자이거나 대규모 상인과 얽혀 있었다는 것, 따라서 대지주와 대상을 억제하는 신법에 반대할 까닭이 충분했다는 것을 우선 들 수 있다. 또한, “선대 임금이 지으신 법(조종지법)을 멋대로 고치는 것은 불효”, “정치는 법제를 제정하기보다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 앞서야 마땅” 등 유교적 정치론에 따라 왕안석과 그의 개혁을 “법가적”이라고 비판하는 점에서 이념적 통일성이 있었다.

   사실 왕안석을 법가라고는 볼 수 없다. 그는 [삼경신의]를 짓고 맹자를 존숭하여 그를 공자 다음의 반열에 올렸으며(대체로 맹자가 토지개혁 등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인 듯하지만), 원론적이나마 유가 이외의 학문을 탄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상업을 중시한 법가와 달리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진흥하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법가인 상앙을 매우 존경했으며, “위기 상황에 언제 백성의 마음을 쓰다듬어 교화시킬 여유가 있는가? 제대로 된 법제가 먼저다”는 주장을 강조했다.

   그는 이른바 “삼부족론(三不足論)”을 주장했다고 한다. 개혁을 할 때 “천변(天變)도 신경 쓸 것 없고, 언론(言論)도 신경 쓸 것 없고, 조종지법도 신경 쓸 것 없다”는 것이다. 유교 정치사상의 기본을 깡그리 부정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사실 이는 왕안석의 말은 아니며 나중에 그의 말이라고 치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안석은 가뭄이 든 것이 우리 정치의 잘못을 경고하는 하늘의 소리가 아니냐는 신종의 우려에 “요순 시대에도 가뭄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내내 풍년이었는데 잠깐 흉년이 들었다고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조종지법이 중요하다지만 새로운 법을 제정하지 않은 황제가 하나라도 있느냐? 조종지법보다 더 근본적인 법, [주례] 등에 나와 있는 ‘선왕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라고도 밝혔다. 조정 내외의 반대론에 대해서도 단 한 번도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지 않고, 무시와 숙청으로 대응했다.

   왕안석이 독불장군 내지는 고집불통이었다는 일화는 숱하게 남아 있다. 가령 하급관리 시절 사마광과 함께 ‘포청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포증의 초대를 받아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왕안석은 “관리란 사석에서도 몸가짐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포증이 권하는 술잔을 받지 않았다. 그날 밤 내내 포증은 ‘딱 한 잔’을 권했으나 왕안석은 끝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밤을 새웠고, 사마광만이 대취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의사가 “자단산을 드셔야만 병이 낫습니다”고 하자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까짓 자단산이 뭐란 말이냐?”면서 끝내 들지 않았다. 또 그는 도무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아서 얼굴빛이 거무튀튀했는데, 보다 못 한 제자가 쥐엄나무로 닦으시라고 하자 “내 얼굴빛이 검으면 검은 것이지 쥐엄나무가 다 뭐냐”고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물론 이는 나중에 그를 비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화일 수도 있지만, 그가 유난히 타협할 줄 모르며 과격하게 사람을 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누가 신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당신이 무식하니까 그따위 이야기를 하는 거다. 공부 좀 더 해 가지고 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니까 자연히 그에게 개인적 원한과 울분을 품는 사람이 늘었고, 신법 반대론은 더욱 치열해졌다. 사실 화북 지방의 명문 출신으로 강남의 비명문인 왕안석과 대립하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왕안석이 좀 더 겸허하고 포용적인 자세로 대했다면 신법 반대론자들의 반발도 느슨해졌을지 모른다. 그의 숙적 사마광을 비롯해서 한기, 구양수, 소식 등은 한때 왕안석의 선배나 친구로서 개혁의 필요성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식한 소리 마라!”는 식의 왕안석의 태도는 그들이 신법 반대를 위해 든든히 결속하도록 만들었다. 이들 “구법당”의 공세는 마침내 1074년에 결실을 보았다. 정협이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수도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백성의 참상을 묘사한 [유민도]라는 그림을 바치자, 신종은 당장 뭐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환멸의 태도가 역력했다. 그동안 여러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안석을 지지해 왔는데, 이처럼 백성들의 삶이 척박해졌다면 신법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하여 보갑법과 방전균세법이 중지되고, 왕안석은 며칠 후 사임했다. 그리고 1년 뒤에 잠시 복직했지만 곧 다시 사임했는데, 증포나 여혜경 등 자신의 심복이었던 ‘신법당’의 배척을 받은 충격과 사랑하던 아들 왕방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컸다. 그는 이후 다시는 중앙관직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강녕부(지금의 난징) 지사를 지내다가 은퇴했다.

   말년의 왕안석은 강녕부의 집에서 은거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번뇌를 잊기 위함이었는지 불교에 심취했고, [자설]이라는 책을 짓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65세가 되던 1085년에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을 선인태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조정은 구법당 일색으로 바뀐다. 그 영수였던 사마광은 왕안석이 세운 제도는 뭐든지 폐지하고 뒤엎었다. 세상사에 달관한 듯했던 왕안석이었으나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 앞에서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5. 평가

   왕안석은 위대한 행정개혁가이면서 [주례]를 비롯한 유교경전을 재해석해 “왕학(王學)”이라 불리는 학파를 창시할 만큼 학문의 조예가 깊었고, 또한 “당송팔대가”의 하나로 꼽힐 만큼 뛰어난 문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파의 입장도 배려하고 쓴 소리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없었으며, 뺄셈의 정치를 거듭한 끝에 한때의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고 끝내 심복들에게서도 배신당했다. 그것은 그가 정말 재능에 어울리는 덕을 갖추지 못한 소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급진적인 개혁가에게는 으레 따르기 마련인 과단성과,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범인들의 시기와 속 좁은 원망이 문제였을까? 아무튼 그가 결국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김으로써, 송나라 이후 개혁가들은 변법을 시도할 때 “또 하나의 왕안석”이라는 비난을 피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개혁의 논의가 진보와 보수 사이의 건전한 정책 대결이 되지 못하고, 오직 권력만을 탐하는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으로 이어지는 전례를 남겼다. 이 두 가지야말로 왕안석의,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은 과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지주들과 대상인들의 지배속에서 어려움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위한 침 개혁이었으나 지배층의 반발과  개인적 포용력의 부족, 군주의 절대적 개혁에 대한 신념과 의지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오히려 당쟁만 만들어 후세의 비판만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백성을 위한 개혁정신의 위대함을 누구도 결코 훼손해서는 안된다.

 


Ⅴ. 조선 조광조의 개혁

 1. 시대 상황

 2. 개혁의 목적

 3. 개혁의 내용

 4. 결과

 5.평가

   1515년 조광조의 답안에 매료된 중종은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며 자신의 핵심 참모로 삼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거는 불과 4년 만에 깨졌다. 1519년 11월 중종은 붕당을 형성했다는 죄목으로 조광조를 체포했고 급기야 사약까지 내렸다.
  조광조는 신하는 왕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 그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성리학 이념의 ‘확신범’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519년의 기묘사화로 중종과 조광조의 동거는 끝이 났다. 중종이 조광조를 전격적으로 숙청한 것은 성리학을 무기로 왕권을 압박하는 조광조의 도전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 이념의 실천을 무기로 화려하게 등장한 조광조. 그러나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그가 구상한 도덕적, 이상적 정치의 실천은 꿈으로만 끝났다. 그리고 중종을 사로잡았던 그 화려했던 답안지도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Ⅵ. 박정의 혁명개혁

 1. 시대 상황

 2. 개혁의 목적

 3. 개혁의 내용

 4. 결과

 5. 평가

 

Ⅶ. 노무현의 4대 입법개혁

 1. 시대 상황

 2. 개혁의 목적

 3. 개혁의 내용

 4. 결과

 5. 평가

 

Ⅷ. 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