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동기다/이마누엘 칸트

청담(靑潭) 2011. 3. 30. 21:55

 

 

5강 중요한 것은 동기다/이마누엘 칸트(1724-1804)

 

♣JUSTICE

   모든 인간은 집단적 행복의 도구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역사적 신분계급사회에서는 지배층인 귀족이나 양반을 제외한 80-90%의 백성들은 오직 지배자들만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교육도 일부러 시키지 않았다. 과거시험도 그림의 떡이었다. 지배층만 관리가 되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짰다. 백성들은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종노릇이나  양반의 소작이나 지으며 양반들을 섬기다 아프면 죽고 배고프면 죽어 갔다.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잘사는 나라는 일찌기 없었다. 요순시대가 참말일까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20세기 공산주의국가들이 모두가 평등하지도 모두가 잘 살지도 못하고 결국 항복하며 두손을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겠다. 김일성 생일잔치하고 김정일 생일잔치하느라 막대한 돈을 쓰는데 인민들은 배고파 죽어가고 다른나라에 식량구걸하느라 야단이다. 저런 지배층을 아직도 믿고 따르는 인간들이 북쪽에 있는 것은 조금 이해라도 되는데 우리 대한민국에도 존재한다. 도대체 철학이나 역사를 근접이나 한 인간들인지! 오기로만 뭉친 사람들인지! 무슨 남 않는 짓만 해야 기분이 좋은 사람들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북한정권의 존재이유나 존재가치는 부정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대북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자는 생각을 가진 분들은 예외다)

 

  오늘날 전 세계 200여 국가중 인구가 2천만 명이 넘는 큰 나라들 중 GNI(국내 총소득)가 2만 달러가 넘는 나라는 겨우 10여 개국 정도라고 오늘 발표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전 세계 200여개국 중 40 - 50위 정도). 더구나 PPP지수(구매력지수)로는 3만달러가 넘어 우리는 당당하게 큰 나라들만 따지면 세계 10대 이내의 경제강국이요 부국이 되었다(ppp지수로는 전 세계 200여개국 중 20-25위). 아아! 자랑스럽다. 지나친 빈부격차문제와 서민들의 가계빛 문제등 해결해야할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우리 대한민국 정말 대단하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돈벌러 한국으로 몰려들고 구태여 시집오려하고 이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을 돕는 나라인 원조국 반열에 올라섰으니 80년대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역사에 한숨쉬던 우리가 민주주의와 경제를 아울러 발전시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아시아의 강국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 가는 리더국이 되었으니 이 아니 감격스러운 일인가?

■2015년에는 인구 5천만 이상의 큰 나라로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되는 7번째 나라가 된다고 한다. 이미 이에 해당하는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반세기 만에 경제선진국을 만들고 민주주의까지도 성숙한 나라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아직도 70년대식 독재에 투쟁하던 이념에 사로잡혀 독재대 반독재, 남북통일문제에만  집착하여 대한민국을 자꾸만 비하하고 부정하는 왜곡된 역사관으로 교과서를 쓰고 이를 끝까지 고집하며, 이를 관철하려 혈안이 되어 변호하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교과서는 일체 채택되지 못하도록 무차별 비난하고 방해하며 이를 채택한 학교의 교문앞에서 촌극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과연 언제까지 시커먼 이념의 동굴에서 환상만 좇으며 살아갈 것인가? 민주를 주장하며 비민주적 작태를 자행하고 폭력을 비난하며 자신들의 폭력은 인식하지 못한다. 과연 그들은 언제쯤이면 어둠의 동굴에서 뛰쳐나와 전 지구적 관점과 세계사적 안목에서 대한민국을 바로보고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며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순수하지 못한 인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2014.10.17)

 

   로크(1632-1704)나 루소(1712-1778)는 자연권 사상에서 출발한 천부인권설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지독한 인간중심주의 사고의 결정체다. 한국의 인권단체들은 오직 인간의 천부인권적 권리만을 붙잡도 늘어지며 먹고 산다. 신이 인간만이 절대적으로 소중한 존재라고 판결을 내리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가? 기원전 3C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자이나교의 교리에 따라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하고 사냥을 포기했으며 식사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람과 동물을 똑같이 치료하는 병원도 세웠다. 신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모든 생명체는 동등하게 소중한 존재이지 않을까? 나는 오늘 진학실 개관식에서 재미로 고사를 지낼 때 돼지고기와 떡 앞에 절하지 않고 박수만 쳤다. 아무리 재미로 하는 행사라지만 내가 몇 년전 부터 돼지머리에 절하는 행위가 싫어졌고 집안 시제를 모실 때에도 산신에게 절하는 것이 마음속으로 받여들여지지 않아 살짝 피하고 있으며 나의 존경과 애정이 서린 분들의 묘앞에서만 절을 하고 있다. 일찌기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해보다가 깨달음이 있어 즉각 중지하고 총을 없애 버리기도 하였다. 나도 언젠가는 육식을 금하는 때가 과연 올 수 있을까? 며칠전 좀 이상한 책들이 왔는데 월남 출신의 여성인 <칭하이 무상사>라는 사람의 활동에 대한 것인데 무슨 사이비 종교에서 나누어 주는 책같은 냄새가 나는데도 대략 살펴보니 아주 훌륭한 이론으로 활동을 하는 분이다.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비동물성 생활방식(녹색 식생활 - 비건(vegan : 순수) 채식))          ♣ 비건(vegan) 유기농 농법 권장            ♣ 동물사랑 

 ♣ 자연과의 조화 회복 

  기원전 6세기에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육식을 금하는 채식주의를 따랐고 윤회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고 한다.

 

  오늘 저녁때 산책을 나갔는데 작년 12월 이후 4달만에 나갔더니만 평소 내가 아침 산책길에 들러 예뻐해주던 외딴집 개가 나를 보더니 난리가 아니다. 네 달만에 예뻐해주러 가니 너무 좋아하여 날뛰는지라 어루만져 주기가 힘들었다. 아마 나를 많이 기다린듯 하다. 이제 날이 플렸으니 매일 산보를 계속하며 예뻐해 주겠다. 

 

  그러나 어쩌랴? 내 몸이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듯이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부정하지 않을진대 만물을 지배하고 잘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연과 만물을 지배한다하여 인간 제멋대로 함부로 지배하지는 말아야한다는 것은 정의이다. 이 지구는 현재에 살고있는 우리만의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의 권리 옹호

  칸트는 우리의 목숨과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지 않고, 그보다는 우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가진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그는 도덕이란 행복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라는 것이다. 인간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며 어떠한 자유와 권리도 간섭하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근․현대 인권사상에 기초를 제공하는 이론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오늘날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인권관련 시책이나 판결문제등과 관련하여 여러 생각을 해 볼 단서가 제공되었다. 인권에 대한 연구나 깊이도 없이 그저 관심만 많은 나로서는 좋은 공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칸트가 지지하는 자유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고 한다.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시각으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란 규제 없는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이라고 한다.

 

 ●행복 극대화의 문제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이익추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순수이성을 연습하여 도덕의 최고 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이성으로 어떻게 도덕법에 도달 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단지 식욕만을 느끼는 동물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칸트는 인간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하는 인간절대 지상주의자라고 보여 진다. 동물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느끼거나 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단히 치부하고 있다. 동물은 단지 식욕만을 느낀다고 절대비하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몰이해다. 오늘날 동물연구에 대한 과학적 성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지나친 인간중심사상이요 동물을 무시하고 전혀 존중하지 않는 철저한 동물경시시상이다. 동물은 사고하는 능력도,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도 없다고 보고 있다. 정말 그럴까? 동물의 세계에도 사회구조가 있고 위계질서가 있으며, 수컷과 암컷간의 사랑이 있으며 가족간의 뜨거운 사랑이 있고 인간보다도 더 강렬하고 뜨거운 자식사랑이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으며, 코끼리는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고 돌고래는 장례식까지 치른다는 것을 18C에 살다간 칸트가 알았을 리 없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만이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고에서 출발한 인권사상은 오직 인간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절대적 인권(천부인권)이 있다고 보고 20C들어서는 어떤 사회규범이나 법으로도 규제하지 못한다는 절대적 인권사상으로 발전하고 인권신봉자들에게는 무비판적으로 또는 절대적 철학으로 신봉시 되고 있다. 따라서 근본적인 오류를 담고 출발한 천부인권사상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철학적 오류를 양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사형제 폐지론이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여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주장인데 일견 그럴듯하지만 이는 인간은 동물의 죽음은 전혀 괘념치 않는 최악의 인간중심논리일 뿐이다. 소위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무 죄 없이 살아가는 선량한 인간들을 수없이 무참하게 죽여서 그 가족을 피눈물이 나게 하고 병들게 하고 가정이 파괴되게 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도 전혀 갱생의 여지가 없는 인간에게까지도 그가 죽을 때까지 밥을 먹이고 재워주고 문화적 혜택을 부여하고 선도하자는 것이다.

   그렇게도 인간은 숭고하다면서 인간성을 이미 상실한 인간에게까지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려하는 인간들이 수백만 마리의 구제역 걸린 가축들은 아직 인간에게 피해를 입힌 증거도 없는데 그 가능성만 가지고 추운 겨울날 구덩이에 몰아넣고 두 눈을 부릅뜨고 살려달라며 발버둥치며 애원하는 동물들을 포크레인으로 흙을 퍼부어가며 말이 좋아 살 처분이요 그냥 생매장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의 잘잘못도 따지기도 전에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같은 인간인 적군을 한명이라도 더 쏘아 죽이려 총을 잘 조준하고 많이 죽였다고 훈장을 주며 박수쳐주고 인간 많이 죽인 공으로 받은 훈장을 자랑하고 평생을 연금으로 편안하게 잘 살아간다.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국가이기주의적 이유는 그럴싸하지만, 분명히 지구 밖에서 볼 때 그는 존귀한 존재인 같은 인간을 많이 죽인 엄청난 일을 저지른 무서운 살인자들에 다름 아니건마는…  

 

 ●자유란 무엇인가?

   칸트가 생각하는 자유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개념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결코 타율적이 아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것이다. 나는 자유의지가 강한 편이라고 스스로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말을 들으며 나의 안주인은 이를 경계하고 어른들에게는 때때로 죄송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과 사물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밖에 주어진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으로서 행동 그 자체가 목적 된다는 뜻이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공리주의처럼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칸트가 말하는 의미의 자율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또 이 복잡하게 사회구조와 인간관계가 서로 뒤엉켜 있는 현대의 인간사회에서 과연 자율적으로만 살아갈 수는 있기나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교사가 되어 32년째 학교에 근무하면서 교육부나 관리자들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온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그 어떤 무시도 간섭도 별로 받음이 없었고, 또 별로 크게 공헌한 바도 없음에도 작지만 항상 존경과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으니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내 삶에 감사하고 고마워한다. 내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하여, 오직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내가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면 정말 대단히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아! 나는 지금까지 내 자유의지와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내게 주어졌음에 종교보다도 더 깊은 마음으로 감사하며 앞으로의 삶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미래를 잘 설계하고 실천하여 나갈 생각이다. 나는 내 운명과 내 의지를 사랑한다. 내 미래에 대해서도 항상 꿈을 꾸며 사랑하고자 한다. 나의 미래를 사랑할 수 있게 나를 만들어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모든 자연과 모든 사회조직과 시간의 신에게까지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행여 내가 행복하였기에 그로 인하여 조금은 힘들어진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 분들에게는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나 아닌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까지 지금보다 덜 고통 받으며 행복해지기를 빈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동기를 찾아라

  중요한 것은 동기다.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의무동기란 올바른 동기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의무가 아닌 동기로, 이를테면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과가 나빠도 동기가 선하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동기가 선하지 못하면 우리는 가식적인 칭찬은 해주지만 그를 신뢰하거나 사랑할 수는 없다. 

 

●계산적인 가게주인과 <바른 거래 사무국>

   물건을 파는 상업행위에서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는 유일한 동기인 의무동기를 찾아보려면 아마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나는 상업행위에서는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과장으로 홍보하는 일이 보편적이므로 절대적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하나 의무동기에 의한 정직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는 대단히 희박하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고로 나는 이익을 창출하는 장사는 경영할 철학도 자신도 능력도 없음을 너무도 잘 안다.

 

  

●목숨 보전하기(2011. 5.9)

  사람들은 대개 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그것은 의무랄 게 없다. 그런데 가령 희망을 잃은 비참한 사람이 있어 절망에 찬 이 사람은 살고 싶은 의지가 없다. 이 사람이 마음이 끌려서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삶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다진다면 그의 행동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자신의 삶을 보존해야하는 의무를 인식하고 그 이유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계속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삶을 보존하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가 있다.

  오늘 모 스포츠 방송국 프로야구를 해설하는 인기 여자아나운서가 자신의 트위터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올려 경찰이 출동하고 방송활동이 중단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녀의 미니홈피에는 모 프로야구선수(7살 연하)와의 교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게재한 글이 현재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데 읽어보니 참으로 놀랍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선망하는 인기 아나운서가 나 어린 선수와의 이성교제로 인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데 까지는 이해가 가나 그 내용에는 자신의 차속에서 두 번에 걸쳐 구강섹스를 해주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이미 정신병(자신의 말로 우울증)환자거나 완전히 자살을 작심한 상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사건이 터진 후 미니홈피의 글은 자신이 작성한 것이 아니고 아이디를 도용당했다고 하나 내가 읽은 판단으로는 100% 본인의 글이다. 놀라운 세상이다. 나 어린 선수와의 장난 같은 사랑으로 자신의 명예와 선망의 최고 인기직업을 내팽개치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니 말이다.

 과연 이 아나운서는 절망에 차서 명예와 아나운서 같은 직업을 내던지고 살고 싶은 의지를 잃을 만큼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보기에는 나이가 삼십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을 가지지 못한 풋내기 직장인에 다름 아니다. 그 행위(자신의 미니홈피에 프로선수와의 성적 행위까지 밝히는)에 동정이나 안쓰러움보다는 어이가 없고 실소를 금할 길 없다.

 

●도덕적인 인간 혐오자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은 아무리 옳고 다정해도 도덕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칸트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것은 선행동기로서 의무동기와 구분한다. 우리가 의무동기를 가지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 일은 어쩌면 칸트의 철학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팅게일이나 테레사 수녀도 불쌍한 사람들이라 여겼기에 그들을 도왔고, 또 그들을 도우면서 행복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우리는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을 돕는 게 아니고, 자신보다 약하고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동정심을 발휘하여 도울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노력과 땀과 시간과 돈을 투여하여 돕는 것일지니 구태여 철학적 동기로 도덕적 가치를 따질 일이 아니로다. 자신만을 위함이 아닌 이타심을 발휘하여 어려운 남을 돕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나라나 지역이나 마을이나 가문이나 동창이나 를 떠나 자신과 별 연관이 없는 다른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행위는 정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도 좋은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면서 이런 이타적 선행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철자 맞히기 대회 영웅

  끌림에서 나온 고백이든 의무동기에 서 출발한 고백이든 자기가 틀렷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아이의 용기는 훌률하기 짝이 없다. 나는 일직이 대학 시절 커닝도 하면서 시험을 본 경험이 많거니와 이는 남들도 다하는 관행이라고 치부해 버렸으며 또 다른 부정행위에 동조한 경험도 있으나 30년도 넘는 세월동안 혼자 부끄럽게 여기기는 하였으되 아내에게까지도 그 부끄러운 부정행위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부끄러운 부정한 행위들은 오늘날까지 좋은 교훈이 되어 나를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도덕의 최고 원칙

  의무동기만이 어떤 행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끌림과 대비한다.  내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자유롭다. 타율과 대조된다. 이성이 의지에 명령하는 두가지중 조건없는 명령인 정언명령은 바람직하며 어떤 행동이 다른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는 가언명령이다. 돈이 필요해 돈을 빌릴때 금방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금방갚겠다고 약속하고 거짓 약속으로 돈을 빌리면 가언명령에 따른 행위이다. 내게 금방 갚겠다고 돈을 빌려간 어느 친구가 3년이 지난 오늘까지 갚지 않고 있다. 그 친구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 일로 인하여 앞으로 정말 급하고 절실한 이유로 돈을 빌려달라는 그 어떤 친구가 있다해도 쉽게 돈을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2011. 6.7)  

 

●정언명령대 가언명령

  정어명령은 조건없는 명령이나 가언명령은 조건있는 멸령이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은 다른 어떤 목적에도 기대지 않고 말 그대로 정언적으로 명령한다.

 정언명령 1 :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

 정언명령 2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그 어떤 이익이나 목적도 도덕법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어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존중받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나는 정언명령 2의 주장에 상당한 부분은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은 옳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하라는 주장은 반대한다. 비록  이성적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도 동물보다는 더 보호 받고 인권을 보장 받은 권리가 있으며 무능한 인간도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지만 천인이 공노하는 보스니아인 8천여명을 학살한 범죄자인 믈라비치나,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자인 히틀러 같은 인간까지도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해주고 옹호할 필요는 없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절대로 이 부분은 칸트에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도덕과 자유

  나는 도덕적 인간으로 살고 싶다. 도덕적 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도덕법을 생각하여 의무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도덕법은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정언명령에 따른 행동만이 자유롭다고 보았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정언명령에만 충실하여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나 이는 많은 이익을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진정 그런 용기가 있는가? 나라는 여야가 내년 선거를 의식하여 벌써부터 대학등록금 문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갖 장밋빛 청사진을 연일 쏟아내며 포퓰리즘으로 치닫는다. 우리 교육부는 끝없는 개혁드라이브로 우리 학교현장을 힘들게 하고 도교육청은 교육부와 각종 사안으로 맞서며 갈등을 만들어내고 학교현장을 혼란스럽게 한다. 누가 더 개혁적인지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는듯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점진적 개혁론자인 나는 설 자리가 없다. 자기네 이익과 맞지 않으면 꼭 바꿔야 할 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선거공약이니 바꾸고 다음선거 의식해 바꾸고 무엇이든 유권자 마음잡는데 도움이 될듯하면 마구잡이로 바꾸자 하니 나는 할 말을 잊는다.

 

●칸트에 대한 의문

  황금률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 의사와 가족들은 본인에게 그 사실을 숨겨 왔으나 최근 설문조사에서 대다수 환자들이 사실을 본인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하였다.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생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날 갑자기 죽는 것은 상상만 해도 너무나 슬픈 일이다.

  자율적인 행동과 자유의지와 도덕법에 따른 행동은 거의 일치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지적(이성적) 수준이 정상이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정치

  ○자유로운 성관계에 반대하는 칸트의 견해

  금년 6월 17일 내일 모레 개봉된다는 스페인 영화 <섹스, 파티, 그리고 거짓말>의 제목은 혹 이 책에서 따 온 것은 아닌가? 칸트는 자유로운 성관계에 반대한다. 동물중에서도 오직 일편단심 짝과만 평생동안 섹스를 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강한 수컷 한마리가 여러 암컷을 거느린다. ( 원앙은 소문과는 달리 다른 암컷에 엄청 눈독을 들이는 동물이라 하니 가히 동물적이다) 이슬람 세계는 지금까지도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상황이다. 극심한 여성차별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이슬람 세계는 남성우월주의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는 비이성적 암흑세계다. 나는 종교를 인정하되 특정종교를 가지지 못하고 문화의 특수성은 인정하되 비 인간적이거나 비 이성적이거나 하는 문화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에 입각하여 판단하면 백번 칸트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다행이도 인간은 전적으로 이성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남성은 거의 전적으로 덜 이성적이며 동물적 본능을 숨길 수 없다. 동물적 본능을 가진 인간이기에 오직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섹스도 상대에 대한 아름다움만 느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덜 이성적인 인간들은 다른 섹스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도 은근히 바라다가 기회가 오면 망설이거나 혹은 못이기는체 불륜행위를 저지른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을 이성으로 중지시킬 수 없듯이 보통의 남성들은 예쁜 여성이나 특히 섹시한 여성들을 가까이 하면 입에 침이 고이는 동물적 본성이 발현되는 것을 결코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 하물며 아주 덜 이성적인 사람이나 술기운이 도는 상황에서 감성을 억제하고 이성적 행동만을 취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작업임을 남성들은 결코 부정하지 못한다. 

  칸트는 도덕과 이성을 존중하나 내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그중에서도 남성)은 도덕적으로만 또는 이성적으로만 성문제를 해결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이다. 하긴 인간이 그렇게도 도덕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어찌 공자님이나 목사님이나 철인들이 아내를 사랑하고 섹스를 통해 자식을 가질 수 있었으리오?(2011. 6.13)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잘못인가?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은 해야 한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선의의 거짓말도 잘 못하는 병폐가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데 영리하지 못하다. 선을 위해 악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가 선이므로 옳은 일에 쓰이는 거짓말은 오히려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우기 착한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한 거짓말은 공자도 예수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아니 하느님도 참 잘했다고 칭찬 할 것이다. 칸트만 빼고..

   맘에 들지 않는 선물에도 활짝 웃으며 “정말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아주 천연스럽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에게는 두려움에 전혀 주눅들지 말고 용감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칸트라면 빌 클린턴을 변호했을까?

  클린턴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누어 떡 먹듯 한다. 20세기 말 미국을 훌륭하게 이끈 수재대통령 클린턴(1993-2001)뿐 만 아니라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수재 오바마(2009- 현재)도 한 입으로 두 말하기 선수다. 최근 정부부채 한도를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이지만 2007년 상원의원시절 연설에서는 ‘정부 부채를 늘리면 결국 우리자손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이라며 반대했었다고 한다. 리비아 군사 개입을 의회의 승인없이 개시하였지만 2006년 상원의원시절 부시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대통령은 전쟁권한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여야를 말론하고 입장만 바뀌면 예전과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우는 궤변가들이다. 하긴 우리가 정치인들 같은 사이비 인간이 될 수 야 없지만 거짓말 잘하고 입장만 바뀌면 정책과 주장과 말이 바뀌면서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철면피들이 이끄는 나라의 일개 시민임을 생각하면 약간 화가 나는것을 억제할 수 없다.

○칸트와 정의

   칸트는 공리주의를 개인 도덕성의 기초만이 아니라 법의 기초로서도 거부한다. 그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성>이라는 관념을 중시한다. 집단적 동의라는 상상의 행위가 모든 공공법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라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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