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평등옹호/존 롤스(1921-2002)
♣존 롤스
1921년 볼티모어에서 출생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2년 하버드대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저서 《정의론(正義論)》(1971)에서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대신할 실질적인 사회정의 원리를 ‘공정사회로서의 정의론’으로 체계 있게 전개하여 규범적 정의론의 복권(復權)을 가져왔다.
♣JUSTICE
사회계약에 있어 존 로크는 암묵적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칸트는 가언합의에 호소한다. 롤스는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를 주장한다. 롤스는 이 가언계약에서 정의의 원칙 두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같은 기본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원칙이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이다.
♣계약의 도적적 한계
어제 헌법재판소에서 2009년 6월 노무현 대통령 추모행사시 경찰이 서울광장 불법 집회를 막기 위해 차벽을 쌓은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한 경찰은 이견을 보이고 있으므로 논란은 계속된다. 시대에 따라 사회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고 더더우기 새로운 헌법재판관들의 생각부터가 다르므로 극히 얼마가지 않아 재의에 붙인다면 전혀 다른 판결이 나올수도 있다. 그만큼 인간에 의한 판결이나 법은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합의만으로도 의무가 생기는 것일까? 합의를 파기한 당신은 상대자에게 의무감을 져야한다 비록 상대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를 위하였다해도, 상대방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희망과 꿈을 무너뜨린 점에 대해서는 도덕적 의무감을 가지고 대단히 죄송한 생각과 사과를 해야만 한다.
♣합의만으로는 부족할때 : 야구카드와 물이 새는 변기
두 사람의 합의가 정당하지 못한 합의일 때 당연히 도덕적 의무는 없다. 정신지체아나 치매환자나 강압과 공포속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는 원천 무효일 수도 있으며 욓려 사기죄나 폭력행위로 고발 할 수 도 있다.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때 : 흄의 집과 유리닦이
집주인인 흄과 일말의 협의도 통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수리하고는 청구서를 요청한 세입자의 행위는 무식하거나 비 양심적이다. 또한 그에게 비용지불명령을 내린 법원의 판결은 틀렸다. 오늘날 그런 판결이 난다면 그 판결을 한 판사는 무식한 인간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내가 서울에 사놓은 작은 소형 아파트를 5년 정도 전세 임대를 주었는데 임대한 젊은 주부(직장인)가 상당히 이기적이고 그리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리할 일이 있으면 꼭 연락을 하여 나의 동의를 받은 뒤에 수리하였고 수리비는 내가 직접 업자에게 주었다. 흄의 재판을 담당한 재판관은 논리학이 아주 부족한 인간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오늘날에도 전혀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판결을 하는 판사 작자들이 종종 있다. 법은 상식을 정리하여 체계화한 것에 다름아니건마는 ...
뉴욕의 줄리아니 시장은 명쾌했다. 아주 유능하고 존경받던 시장으로 기억된다.
♣이익인가, 합의인가? 샘의 자동차 수리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는 평생을 상대를 진실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주례와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맹세한다. 그러나 평생을 진실로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 부부가 아주 많다. 가난이 싫다, 남편의 폭력이 싫다, 남편의 바람 피우는게 싫다, 잔소리 하는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것이 싫다며 합의와 맹세를 깨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며 법적으로 이혼 사유가 된다면 기꺼이 이혼하고 남편으로부터 당당하게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자기자신에게 배우자 아닌 다른 애인이 생겨 가정에 소홀하고 배우자와는 충돌로 인하여 성생활이 무너지고 이미 부부관계를 상실하게 되어 합의이혼하게 된다면 이때에도 함께 살면서 모은 재산이니 반반으로 재산을 분할해야 하는가? 나의 견해로는 최소한의 위자료만 지불하면 된다고 본다. 불륜을 저질러 결혼의 합의와 맹세를 깨고 자식을 버리고 가정을 파괴하는 인간에게 비록 이혼은 허락될 망정 먹고 살기에 충분한 위자료를 지불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의에 맞지 않다.
♣완벽한 계약 상상하기
지난 토요일(2011.7.2) 정귀우 선생 큰 아들 결혼식은 대단히 멋있었다.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혼인이라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계약결혼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싫어져도 함부로 헤어질 수 없게 혼인신고를 하는것이 다른가? 일정한 기간을 정하지 않고 결혼하는 것이 다른가? 결혼은 결국 계약이 아니던가? 언제라도 파기될 수 있는......
그래 결혼식장에서 주례가 묻는 혼인서약에 대답하고 성혼성언문이 낭독되고 친구들이 축가를 불러주고 축하객들에게 절을 하면서 백년가약을 맺어 놓은 사람들이 헤어지지 않고 그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인가?
정선생은 호텔처럼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예식장이면서도 번잡스럽지 않게 대 연회장을 이용하여 예식을 치르니 휼륭하다. 700여명이 예식을 보면서 박수를 치며 식사를 했다. 옳은 일이다. 거의 모든 혼례가 좁은 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대다수 축하객들은 봉투만 내고는 예식은 보지도 않고 부페먹는 식당으로 몰려간다. 결혼식을 보면서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랑신부 부모에게 빛진 돈 갚으러 오고 밥먹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식당은 붐벼서 같은 일행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도 못하고 제각각 부페음식을 입에 바쁘게 몰아 넣고는 또 바삐들 헤어진다.
이 날 예식 프로그램도 내마음에 흡족했는데 방금 정선생 전화를 받고는 물으니 모두 정선생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 날 주례는 없었다. 두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당부하고 하객들에게도 감사와 부탁의 인사를 드렸다. 신랑 신부가 각각 부모님들께 효도하겠다는 다짐을 한뒤 서로에게 사랑을 다짐하는 맹세문을 읽으며 하객들에게 영원히 사랑하며 잘 살겠다고 약속했다. 신부의 다짐이 아주 재미있었다.
첫째 바가지를 긁지 않겠습니다.
둘째 용돈을 충분히 주겠습니다.
모두들 웃으며 박수를 쳤다. 친구들의 퍼포먼스나 장난스런 요구가 결혼식의 엄숙함을 훼손하는듯 하여 완벽함을 깼으나 다른 어느 결혼식들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신선한 혼인이며 계약이었다.
♣정의의 원칙 두 가지
차등의 원칙은 정의에 위배되지 않는다. 역사는 경제적 평등의 원칙이 그리 쉽게 인류사회에 적용될 수가 없다는 것을 20세기에 증명하였다. 평등의 원칙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난 우월적 차등의 혜택을 누렸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강남 좌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나는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지속해야하지만 남들에게만큼은 이론적으로 평등을 부르짖는다. 나는 지성이자 박애주의자라는 것을 알려야만 한다. 나는 재산을 더 늘려 부자가 되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부금을 낼 수는 없다. 왜냐고요? 빌 게이츠처럼 부자가 아니니까...
♣도덕적 임의성 배제논리
사람은 타고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부모가 다르고 가정환경이 다르다. 미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 지능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다. 많은 나라에서 타고난 불평등을 수정하는 최소한의 방법의 하나로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시정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일뿐 결코 불평등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구조가 급격히 변화하고 새로운 직업이 날마다 생겨나고 삶의 모습이 놀랍게 다양해지는 현대 사회에서는 타고난 불평등이 변화없이 그대로 지속되는 삶은 차츰 적어지고 있다. 나의 친구들이 이를 증명한다. 대를 잇는 부자는 적어지고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되고 자식의 성실성과 노력으로 인하여 새로운 빛나는 가정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너무 이념적으로 도식적으로 걱정하고 싸울일만은 아닌 것이다. 오늘도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거나 땀흘려가며 자신의 미래를 맹렬하게 개척해 나가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고, 반면 평안한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꿈조차 가지지 않고 오직 부모에게 의지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젊은이 또한 많다는 사실에서 인간 불평등은 영원한 숙제는 될지언정 영원한 골치거리는 결코 아니다.
♣ 평등주의 악몽
<해리슨 버거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 2081년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평등해졌다. 어느 누구도 다름 사람보다 더 똑똑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생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거나 빠르지 않았다>
지나친 평등주의의 한계와 위험성을 경계하는 공상과학 소설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일부 진보라 자칭하는 평등주의자들에게 정치를 전적으로 맡기면, 그 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내에 무서운 평등사회가 도래하지나 않을까? 하긴 지나친 기우다. 공산주의가 그 모순이 드러나서 저절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 보았으니...
롤스는 강제로 평등을 달성하는 일을 능력 위주 시장사회를 대체할 유일한 대안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차등원칙이라 부르는 것으로 재능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 잡는다. 차등원칙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을 공동재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활용해 어떤 이익이 생기든 그것을 공유하자는 데 사실상 동의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분배정의에 대한 이론을 정리 해보자. 기본적으로는 능력위주로 공정한 기회균등을 인정하는 자유시장을 택한다. 여기에 롤스의 차등원칙이 지켜지면 훨씬 아름답고 바람직한 인류사회가 건설될 것이다. 동물사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도 완전한 평등사회는 가능하지도 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차등이 존재할 때 경쟁심과 의욕이 생기고 그에 따라 노력이 수반되며 발전이 오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먹을 것을 마음껏 주면 결코 사냥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가 완전하게 평등한 사회는 끔찍 스럽다. 대통령도 필요 없다. 박태환도 필요 없다. 우사인 볼트도 김연아도 의미 없다. 이건희도 의미 없고 소녀시대도 가치 상실이다. 평등주의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이나 그 한계점을 직시하면서 평등주의 정책은 서서히 차분하게 사회발전을 저해하지 않는 선까지만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타고 날때 제각각 가지고 태어나는 재능과, 자신의 행복을 위한 그들의 노력은 최대한 존중하면서 되도록 평등한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 도덕적 자격 거부하기
미국의 교사들은 평균 연 5천만원을 받는다. 한국의 교사들은 평균 연 4천만원을 받는다. 국민소득으로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미국보다 우리 교사들이 훨씬 낫다. 실제로 미국의 교사들은 박봉이라 희망자가 적고 이직률이 높다. 한국은 초중고 학생들 모두 교사가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고 그래서 우수생들이 교대와 사대로 몰린다. 그래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자주한국의 교육열과 교사들을 칭찬한다.
그러나 분배정의문제에 있어 그런 시시한 것은 이제 문젯거리가 아니다. 유재석이나 강호동은 연 수 십억씩을 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호화로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재벌이 아니라 인기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맨들이다. TV 1회 출연료가 상위급 직장인의 연봉을 웃돈다. 기업가들은 주식상장을 통해 수십억 수백억을 일거에 벌어들인다는 보도도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배알이 뒤틀리는 시대의 변화를 중지시킬수도 없거니와 되돌릴 수는 더더구나 없다. 학교에서는 죽어라고 공부만 요구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만들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정말 그런가?
1970년대에는 맞는 논리였다. 성적순으로 사회적 지위를 나누어 가지거나 얻어 내는 시대였다. 이제 아니다. 돈을 목적으로 인생을 설계하려는 사람은 돈만을 추구하면 거의 성공 확률이 높다. 의사도 개업하여 먹고 살기 힘들다 하고 변호사가 사무실 운영이 힘들다 하며 카이스트 석사가 다른길로 빠져 나가고 연구원은 이제 선망직업이 아니다. 연예인들과 프로선수들과 금융맨들과 유능한 CEO들이 연간 수 십억씩 벌어들이는 모습을 보며 억장이 무너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막을 도리가 없다. 그들이 도덕적 분배 정의를 인식하여 사회발전과 경제적 불평등의 시정을 위한 성금을 듬뿍 내줄 때 큰 박수를 보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수 김장훈은 이 사회의 거울이다. 하춘화도 그런 가수라고 한다. 그런데 국민들은 아직도 썩은 정치 지도층은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가수는 가수일뿐 이라고 여기지나 않는가? 나도 크게 각성해볼 일이다.
♣ 삶은 불공평한가?
동물이든 인간이든 불공평하게 태어나고 불공평하게 살아가는 운명이다. 나의 관사 앞 머루나무에서 잎을 먹으며 살아가는 벌레들은 참말로 억울하다. 산머루 잎에서 태어 났다면 마음대로 잎을 갉아 먹으며 행복하련만 하필이면 필자 방 앞의 머루나무에 태어나서 필자의 눈에 띠는 족족 쇠막대기에 맞아 죽어간다.
우리 시골집에 기르는 영리한 똥개 《소리》는 태어날 때는불행했으나 필자를 만나는 행운을 맞아 행복하다. 필자가 시장에 갔을때 어느 집에서 태어 났는지 비루먹어서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을 개였는데도 내가 보기에 순하기에 그냥 사버린 개다. 회충약을 먹여서 통통해 지고 영리하고 예뻐서 나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새끼도 세마리나 낳아서 분양했다. 그러나 같은 날 사서 함께 키우던 《천둥이》는 나를 만난것이 불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예쁘지도 않거니와 워낙이 멍청하여 도무지 예뻐하며 키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결단을 내려 다른데로 보내고 예쁘고 영리한 진도개 새끼 《진소리》를 받았다. 마음이 조금 아픈것은 쉬이 잊어 버리기로 했다.
다아 운명이다. 동물이 아닐진대 인간은 타고난 운명을 사랑하고 자신의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주어진 불평등과 불공정을 노력과 땀으로 극복해야만 하는, 또 능히 그럴 수 있는 존재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시골 오지에서 태어난 젊은이도 부자가 될 수 있고, 반면 선진국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사람도 불행해 질 수 있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얻어지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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