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루어 왔던 우리 고전읽기를 시작한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구축한 고전번역DB를 통해 종이책이 아닌 컴퓨터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가볍고도 재미있는 연행록중의 하나인 부연일기를 두 시간에 걸쳐 읽고 두 시간 동안 정리한 것이다.
부연일기(赴燕日記)
저자 : 1828년(순조 28) 진하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정사(正使) 이구(李球)의 의관 겸 비장(醫官兼裨將)으로 청(淸)나
라 에 다녀온 김노상(金老商)이 기록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DB에는 작자미상으로 되어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에 비해 기록된 양이 아주 적고 흥미로움이 덜하다. 내가 기록하고 싶은 내용만 간추려 뽑아 적는다.
1. 노정기(路程記)
●1828년 4월 13일부터 10월 4일 168일간 왕복 6300여리를 다녀오다.
●경성에서 의주까지는 1050리이다.
●의부에서 책문까지는 120리이다.
●책문에서 심양까지는 445리이다.
●심양(瀋陽)에서 산해관까지는 787리이다.
●산해관에서 남관(연경의 회동사역관)까지는 667리이다.
●모두 3069리이다.
2. 왕환일기(往還日記) 序
청 나라 도광(道光) 8년 무자년(1828, 순조 28)에 회강(回彊)을 토벌하여 평정하자, 우리나라에서 진하사(進賀使)를 차정(差定)하여 연경으로 보내는데, 정사(正使)는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부사는 참판 이규현(李奎鉉), 서장관은 문학(文學) 조기겸(趙基謙)이었다. 나는 의관 겸 비장(醫官兼裨將)으로 정사를 따라갔다.
부사의 반당(伴倘)은 유학(幼學) 백한진(白漢鎭)으로 자는 중기(仲紀), 나이는 55세이며, 비장은 □□□요, 서장관의 반당은 유학 이만재(李在)인데 자는 경학(景學), 나이는 26세이며, 비장은 이수민(李壽民)이다. 정사의 반당은 유학 김노상(金老商)인데 자는 성여(成汝)이고, 나이는 45세이며, 김노영(金魯榮)은 자는 계실(季實), 나이는 40세이다.
반당은 자비로 데리고 간 사람이다. 비장은 낮은 무관이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이니 바로 고종의 할아버지가 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1. 1828년 4월
○26일 안주(安州)에 머물렀다. 기생 옥향을 불러 노래를 들었는데, 그녀의 나이 12세로 노래와 함께 또한 춤을 알았다.
12살 기생이니 오늘날 초등학교 5학년 나이이다. 요즘도 초등학생으로 판소리나 민요를 구성지게 잘하는 어린 처자들이 많다.
2. 1828년 5월
○2일 의주에 머물렀다. 파발 편에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6일 의주에 머물렀다. 오후에 잠시 바람이 불고 비가 와 두어 기생을 이끌어 통군정에 올라갔다가 어두워서야 취한 몸을 가누어 돌아왔다.
○9일 강가에 초막(草幕) 두어 곳이 있었는데, 바로 저들 갑군(甲軍)의 수자리 사는 곳이었다. 문에 나와 바라보는 자를 보니 매우 추하고 용렬하였다. 평소에 중국 사람들을 보면, 늘씬하고 너그러워서 근실한 태도가 있었는데, 이 수자리 사는 군사들은 더러 목을 길게 쑥 늘어뜨리고, 딱 달라붙은 코에서는 콧물이 흐르며 옷 빛깔도 일정하지 않아 거지(擧止)가 온당하지 못하였다. 듣건대, 저들 가운데 수자리 살러 가는 자는 은(銀)으로 삯을 주어 보낸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수자리 사는 자들도 분명 이러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자리는 국경을 지키는 병사이다. 병역을 치르기 위해 고향을 떠나 근무하는 지방군의 불쌍한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작자는 조선후기 19C의 정치질서가 문란하고 백성들은 죽지못해 살던 세도정치 시절의 잘나가던 양반내지 중인이다. 고국과 고향을 그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변방을 지키는 불쌍하고도 초라한 모습의 병사의 형상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기는 커녕 조롱조로 말하며 어이없이 잘살며 때깔나는 중국사람들과 비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대립제로 대신 군대를 가기도 하였는데 이런 불쌍한 백성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는 것이다.
작자는 양반이거나 돈이 많은 의관으로 사대주의자이다. 지식도 있어 중국인들과 필담하며 글씨도 써주곤 하는데 지식은 있으되 의식이 없는 자이다. 만일 의식있는 실학자였더라면 불쌍한 변방의 수자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정치현실과 백성의 가난함을 한탄하며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이 되어 중국처럼 백성들까지 비단옷 입고 잘먹고 살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려는 의지를 표명했을 것이다. 아아! 사람의 의식 있고 없음이 대체로 저와 같다. 이나라 잘살게 된데에 무슨 노력을 그리도 하였는지 집권을 위해, 한 표를 얻기 위해 균형을 잃고 죽어라고 경제발전보다는 복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야당의 선동적 정치꾼들이나, 내년 총선에서 행여 망쪼들까봐 갑자기 야당과 복지 경쟁을 시작한 한나라당 소인배들이나 한심하기 그지 없다.
중단없는 경제발전을 지속하는 가운데 정부와 여야가 신중하게 복지 정책들을 입안하고 전문가 집단의 충분한 연구를 거쳐 합의를 도출하여 시행한다면 지속발전이 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으련만....오늘날 얄팍한 풋내기 정치인들에게 국가와 백성을 우선하는 의식있는 정치를 기대하기란 바늘구멍으로 낙타보다도 더 큰 코끼리가 지나가를 바라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정말 사람들 잘 뽑아야 합니다. 미래지향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 아닌 즉흥적이고 지나치게 포퓰리즘적이고 거짓말 하는 선동가들만큼은 필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10일 책문은 대체로 한 길[丈] 되는 나무막대기를 벌여 세운 것이었는데, 버드나무로 꺾어 포전(圃田) 울타리를 한 것에 불과하며, 문 1칸이 우뚝 서 있는데 띠로 덮었다. 들어가도록 허락하고는 곧 닫았는데, 이것은 바로 법이 그러하여 형식을 갖추었을 뿐이며, 목책 사이로 드나들 수가 책문은 대체로 한 길[丈] 되는 나무막대기를 벌여 세운 것이었는데, 버드나무로 꺾어 포전(圃田) 울타리를 한 것에 불과하며, 문 1칸이 우뚝 서 있는데 띠로 덮었다. 들어가도록 허락하고는 곧 닫았는데, 이것은 바로 법이 그러하여 형식을 갖추었을 뿐이며, 목책 사이로 드나들 수가 있어 비록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몰더라도 제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있어 비록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몰더라도 제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책문의 모습을 생생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12일 봉황성안에는 가게와 저자들이 조밀한데 모두 무늬창과 조각한 문에는 금벽(金碧)을 하였다. 비록 서민들의 구석진 집이라도 흰 서까래[素題]와 흙담이 전혀 없는데, 어디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다. 책문에 들어간 이후로 가는 곳마다 구경하는 자들이 담 쌓듯 하였는데, 말에서 내릴 때에는 문을 메우고 길이 막히도록 분주하게 둘러싸고 구경하기를 마지않아 싫고 괴로울 때가 많았다.
○15일 객점의 호인이 먹을 갈고 종이와 붓을 가지고 와 글 써 주기를 간청하여 나와 김지수(金芝叟)는 6폭 종이 2장을 써 주었다.
○22일 소흑산(小黑山)에서 잤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향해 가게 되는데 열기가 너무나 혹독하여 사람들의 등을 지져대니 자못 견디기 어려웠다.
○24일 김지수(金芝叟)가 망녕된 생각으로 옷을 벗고 기어 올라가 부채 끝에 붓을 묶고 먹을 찍어 쓰려는데, 백 천 명이나 이름을 써서 자못 빈틈이 없었다. 간신히 한 조각 빈 석면(石面)을 찾아 드디어 그의 성과 이름을 기록하니 글자 크기가 손바닥만한데, 석면이 협착하고 기울어져 밖에 잘 보이지 않는다. 쓰기를 끝내자 또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것을 잡고 내려오는데 석벽의 높이가 4, 5길이나 되어 잠깐이라도 손을 놓으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므로 먼지가 젖도록 땀이 흘러내렸다.
3. 1828년 6월
○5일 아침에 고려장(高麗莊)을 지났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대로 거주하는 자들이 한 마을을 이룬 것이다. 앞들에 논[水田]이 있는데, 논은 법이 금지하고 있으나 이런 지역이니 만큼 특별히 놓아 둔 것이다.
○8일 무릇 수륙으로 20리를 가서 통운문(通運門)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통주의 동문이었다. 서문 안에 이르러 머물러 잤는데, 성안의 조밀하고도 부유하고 화려함이 심양(瀋陽)보다 훨씬 더하였다. 대개 책문(柵門)에 들어온 이후에 지나온 성읍(城邑)들을 보면 반드시 멍해져, 민물(民物) 가옥의 융숭함과 물화와 거마의 번성함을 응접할 겨를이 없어, 말 위에서 좌우로 둘러보느라 시력을 허비하고 현기증이 나며 놀라서 광인과 같았다. 그런데 일단 봉황성(鳳凰城) 서쪽부터는 도회의 번화한 곳을 반드시 눈을 감고 얼굴을 단정히 하여 지나며 도무지 묵묵히 바라보기만할 뿐이어서, 참으로 우매한 백성이 서울에 들어오고 도회지를 지나려면 반드시 좌우를 둘러보다가 정신 나간 자 같은 사람이 많이 있고, 심지어는 소나 말을 끄는 자가 손에는 빈 고삐만 쥐고 그의 가축 잃은 것을 모르는 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오늘에 당하매 하나도 괴이할 것이 없으니 우습고도 우습다.
○9일 우리나라 서울에서 떠나온 지 57일 만에 비로소 북경(北京)에 도착하니 3070리라는 길이 역시 지리 함을 느꼈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지극히 가까운 나라로도 문득 하늘 끝과 같으니 교지(交趾)나 광동(廣東)의 바깥사람으로는 아마 북으로 와 노닐 자가 없을 것이매, 초파리[醢鷄]가 항아리 속에서 나온 것 같아 우스웠다.
대체로 베이징까지 가는데 두 달이 걸리고 있다.
○25일 또 천주당은 지극히 해괴하고 참혹하여 볼 수가 없기로 우리나라에 돌아가는 날에는 정녕코 연경 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절대로 이 관에 발을 들여놓지 말도록 하기로 하였다.
보수적인 사람이므로 서학에 대해 아주 배타적이며 새로운 학문(종교)에 대해 큰 관심조차 없다.
○26일 중국 사람들의 손님 대접하는 예는 비록 매우 친숙한 사이일지라도 만나면 반드시 읍하고 절하고, 떠나면 반드시 문에서 전송하여 우리나라 풍속과 같이 손님에게 거만하여 예를 잃는 법이 없었다. 손은 나이 30으로 글이 물 흐르듯 하여 맑은 풍채가 남을 감동시켰다. 담화한 지 얼마 아니 되었으나 서로 헤어질 뜻이 없었으니, 실로 남쪽 지방의 아름다운 선비였다. 듣자니, 한인(漢人)들은 모두 외성(外城)에서 기류(寄留)한다는 것이다.
베이징에는 만주인들이 거주하므로 유식자가 거의 없고 한인들은 외성(베이징 아닌 성)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4. 1828년 7월
○1일 촛불을 밝히고 어둠 속을 지나 버려 오늘도 또 천자의 얼굴을 보지 못해 마음에 분한(憤恨)이 간절하였다. 종기(從騎 따르는 기마)가 패를 지어 달려갈 뿐 그 밖에 다른 의장(儀仗) 같은 것은 없었다. 궐내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날이 새어 그 제서야 천자를 보았는데, 번개같이 대한 것에 불과하여 자상하게는 보지 못하였다. 다만 누런 얼굴이 위는 넓고 아래는 좁으며, 수염이 짧고 구레나룻은 없었으며, 턱이 길고 눈썹이 가늘며, 입이 크고 이가 빠졌으며, 몸이 길고 등이 굽어졌으며, 몸이 가늘고 기골이 준수하였다. 듣건대, 눈의 광채가 사람을 쏜다는데 한스럽게도 보지 못했고, 호종하는 신료들은 나올 때에 비해 배나 많았다.
황제는 선종 도광제(재위 1820-50)인데 이때 나이는 56세였다.
○4일 소흥주(紹興酒)를 마셨는데 술이 담담하여 우리나라 청주와 같으나 맛이 매우 열악하고, 작은 병 하나의 값이 돈 1냥인데 한 병은 작은 잔으로 두 잔이었다. 대체로 북경(北京)은 모두 소주(燒酒)를 마시는데 독하고 강렬하여 많이 마시기 어려우므로 이것을 좋게 여기며, 또한 먼 데에서 가져오므로 값이 비싸고, 품질이 좋아서 손님을 대접하는데 상품으로 삼는다.
5. 1828년 8월
○13일 낮에 회정 길에 올랐다. 6월 9일에 연경에 들어와 관에 머무른 지 모두 63일이었다. 원래 별사(別使)는 관에 머무르는 기일이 20여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적을 평정한 축하연이 8월 7일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신을 머무르도록 하여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역시 특이하게 대우하는 뜻이나, 기한이 넘도록 지체하다 보니 비용이 다 되어, 심지어 상ㆍ부방(上副房)의 건량청(乾糧廳)도 잇기 어렵도록 궁핍하니, 공궤(供饋)하는 범절이 점차 먹기도 어려워져 자못 배고픈 고통이 많았다.
6. 1828년 9월
○5일 길가에 머리를 달아 놓은 것이 있었는데, 듣건대 유부녀를 간음한 죄를 범한 자라 하니, 법의 준엄함이 우리나라보다 나았다.
○9일 길을 떠나 배로 태자하(太子河)를 건너고 또 배로 소하(小河)를 건너 모두 30리를 가 왕보묘(王寶廟)에서 자는데, 주인 놈 호인 왕가(王哥)가 주접시키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로 나가도록 강박했다. 그의 나이가 자못 늙은 데다 가 완악하고 사나우며 무식하여 부득이 다른 데로 옮겨 들었다. 정사또[正使道]가 왕가의 완악한 짓을 요동군(遼東郡)에 이문(移文)하여 장차 죄를 다스리려고 하니, 그 늙은 호인의 아들과 호송하는 호인이 간절히 애걸하므로 드디어 호송관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했다. 호송관이 바로 의자에 걸터앉고 젊은 왕가가 땅에 엎드리며 발을 뻗어 호송관의 앞으로 향하자, 한 호인이 채찍을 가지고 바지 위로 볼기를 치되 계속 10대를 치는 것이, 우리나라 풍속에 형장(刑杖)으로 심문하는 태법(苔法)과 같았는데 이렇게 하기를 두 번이나 하니, 채찍 머리로 땅을 치기만 하여 전연 아프지 않은데도 그 호인은 어린아이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대체로 여기 풍속의 태법이 모두 이러하되, 그 징계되어 법을 무서워함이 살을 벗기거나 몽둥이질하는 것보다도 더하다는 것이다.
7. 1828년 10월
○4일 새벽에 출발하여 30리를 가 녹반점(綠礬店)에서 점심을 먹고, 또 10리를 가 집에 이르렀다. 반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던 나머지여서 매우 기뻤다. 이해 4월 13일에 길을 떠나 연경에 들어갔다가 오늘 비로소 돌아오기까지 168일을 소비했으며, 6300여 리를 다녔다.
사신단의 여행은 약 6개월간이나 되었다.
3. 역람제처(歷覽諸處)
요동성(遼東城) 관제묘(關帝廟) 백탑(白塔) 심양(瀋陽) 원당사(願堂寺) 북진묘(北鎭廟)
도화동(桃花洞) 영원성(寧遠城) 강녀묘(姜女廟) 산해관(山海關) 화표주(華表柱) 이제묘(夷齊廟)
독락사(獨樂寺) 반산(盤山) 통주강(通州江) 동악묘(東嶽廟) 연경(燕京) 각생사(覺生寺)
해전(海甸) 만불사(萬佛寺) 오룡정(五龍亭) 홍인사(弘仁寺) 인수사(仁壽寺) 융복사(隆福寺)
4. 주견제사(主見諸事)
지리(地理) 인물(人物) 풍속(風俗) 방적(紡績) 공장(工匠) 시전(市廛) 돈[錢財] 기술(技術)
성읍(城邑) 궁실(宮室) 사묘(祠廟) 사찰(寺刹) 의관(衣冠) 음식(飮食) 기용(器用) 금축(禽畜)
5. 회자국(回刺國)의 국서 : 생략
6.일급(日給)
1. 정사 남연군(南延君)에게 날마다 공급한 것
산 거위[生鵝] 1마리, 산 닭 3마리, 생선 3마리, 제육 5근, 두부 3근, 장아찌 4냥, 호초 1전, 나물 3근, 술 7병, 면(麪) 2근, 청장(淸漿) 6냥, 장 8냥, 초 10냥, 향유(香油) 1냥, 소금 2냥, 다엽(茶葉) 4냥, 황랍촉(黃蠟燭) 3자루, 등유(燈油) 6냥, 타락죽[酥] 3냥, 우유 1두레박, 생강 5냥, 마늘 10개, 세분(細粉) 1근 반, 빈과(蘋果)ㆍ사과ㆍ배ㆍ감 각 15개, 포도ㆍ대추 각각 1근, 몽고(蒙古 몽골) 양 3일에 1마리씩이다.
반당이나 비장과 셋이서 함께 먹는다 해도 양이 대단하다. 어찌 다 먹누? 시중드는 종자들에게 다 나누어 먹여야지?
2. 부사에게 날마다 공급한 것 - 서장관(書狀官)에게 날마다 공급한 것도 이와 같음
각각 거위 1마리, 닭 1마리, 생선 1마리, 고기 1근 반, 한양(漢羊) 반 마리, 우유 반 두레박, 백면(白麵) 2근, 청장 6냥, 장아찌 4냥, 나물 3근, 황주(黃酒) 6병, 두부 2근, 장 6냥, 초 10냥, 향유(香油) 1냥, 다엽 1냥, 호초 1전, 소금 1냥, 등유(燈油) 2냥, 빈과ㆍ사과ㆍ배 각각 10개, 포도ㆍ대추 각각 반 근씩이다.
3. 대통관(大通官) 3원(員), 압물관(押物官) 21원에게 날마다 공급한 것
각각 닭 1마리, 고기 2근, 백면 1근, 나물 1근, 술 1병, 두부 1근, 청장 2냥, 향유 4전, 장 4냥, 등유 2냥, 호초 5푼, 다엽 5전, 소금 1냥씩이다.
4. 상 받은 종인(從人) 27명에게 날마다 공급한 것
각각 고기 1근 반, 백면 반 근, 나물 8냥, 소금 1냥, 술 합쳐서 6병, 등유 합쳐서 11냥이다.
5. 상 없는 종인 167명에게 날마다 공급한 것
각각 고기 반 근, 나물 4냥, 장 2냥, 소금 1냥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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