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기정薊山紀程
조선 순조 때의 선비 이해응(李海應:1775-1825)이 동지사(冬至使)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연경(燕京)에 갔을 때의 견문을 기록한 책.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성서(聖瑞), 호는 동화(東華)이다. 1825년(순조 25) 51세 때 을유 식년 사마시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803년(순조 3)동지사(冬至使) 민태혁(閔台爀)의 서장관인 친구 서장보(徐長輔1767-1830)를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그 견문과 감회를 읊은 445수의 한시를 일기체로 엮었다. 부사는 권선(權襈)이었으며 계산은 연경을 지칭한다. 한 달 5일간 연경에 묶었다. 1803년 10월 21일부터 1804년 3월 25일까지 5개월간의 연행기이다.
●29세에 중국에 따라 갔으며 것이며 51세에 소과에 겨우 합격하고는 벼슬도 없이 그 해 바로 죽었으니 시가 매우 뛰어났음에도 벼슬복은 없었던 듯하다. 계산기정은 가치 있는 자료가 적다고 하는데 내가 읽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굳이 긍정하자면 기록은 간단히 하고 시로 적었기 때문이기는 하다. 부록에 특히 가치 있는 많은 자료가 있고 따라서 좋은 공부가 되었다. 관심분야만 간추리고 나의 생각을 덧붙인다.
1803년 10월
1. 집을 떠나면서[離家]
연경에 가 보는 것이 나의 숙원이었다. 추양(秋陽) 서 학사(徐學士)가 세폐 서장관(歲幣書狀官)에 충임되어 나와 함께 가기를 의논해 왔고, 경박(景博) 김후근(金厚根) 또한 군복 차림으로 수행하게 되어 이날 같이 떠났다. 홍제원부터는 모두 처음 가는 곳들인데 모여 있는 산과 굽은 시냇물이 갖가지로 아름다워 호연(浩然)하게 만 리의 뜻이 생겨난다. 고양은 한 작은 읍이었다. 취민당(聚民堂)에 들었다.
●교유하던 벌열집안 벼슬아치 서장보를 수행하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2. 송도에서의 옛 추억[松京懷古]
송도 땅에 들어서니 볼만한 곳이 많다. 취적(吹笛)과 탁타(槖駞) 또한 이름난 다리다. 길가에 1주 석등경(石燈檠)과 7층 석탑이 있는데 고려의 고적들이다. 성의 남쪽 문으로 해서 들어가면 시가지가 번화하고 아름다워 서울을 방불케 한다. 성의 체제는 반달 모양이다.
●송도의 번화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3. 남천 들[南泉野]
연도에 있는 읍의 정참(程站)은 언제나 장승에 적힌 것에 의거하나 그 나머지 동리는 다 알 수가 없다.
●마을 입구에 세운 장승에 거리와 참의 이름을 적고 있다.
4. 장난으로 지은 시[戱占]
일행 가운데 어떤 사람이 여인들의 무리 속에서 떠나기를 어려워하기에 장난삼아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었다.
여인의 고장에서 미인을 만나니 / 邂逅綺羅國
검수역(劍水驛)을 못 떠나고 머뭇거린다 / 留連劍水程
만나자 그대로 익숙한 사이되고 / 相逢仍熟面
말 한마디로 새 사랑 갖게 되었네 / 一語便新情
출렁이는 정으로 베개 받치고 있고 / 蕩漾還支枕
정신 희미하니 억지로 술잔 받는다 / 迷離强引觥
푸른 발 때때로 밤중에 조용함은 / 碧簾時夜靜
꽃다운 꿈 만들어 내려는 거라 / 芳夢做將成
●잘 생긴 플레이보이 하나 있어 금방 애인 하나 사귄 듯?
1803년 11월
1. 연광정(練光亭)
삼사(三使)가 사대(査對)를 끝내고 연광정에다 기악(妓樂)을 마련하였다. 물에 임한 난간은 활짝 트여 강산의 좋은 형상이 다 눈에 보인다. 현판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 네 글자가 있고, 또 주련(柱聯)에는 ‘긴 도성 한 면에 콸콸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큰 들판 동쪽 언저리에 점점이 솟아 있는 산이라[大野東頭點點山]’고 했다. 이것은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로, 전체의 형국을 모사해서 천고의 격언(格言)이 된 것이다. 기생 가운데 이주곡(離舟曲)과 선풍무(旋風舞)를 하는 자가 있는데 연도(沿道)의 여러 읍의 기생들 가운데서 으뜸간다는 것이다. 평양(平壤)이라는 도성은 상가가 즐비하고 동리가 잇닿아 있어 서울과 맞설 정도이지마는 다만 땅은 좁은데 사람이 많아 집들이 조여들어 있다. 저녁에 상영(上營) 이아(貳衙)의 선화당(宣化堂)에 들었는데 역시 굉장한 건물이었다.
●연광정 현판은 주지번의 글씨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평양이 서울과 맞설 정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2. 구주단(九疇壇)
평양은 옛날 기자(箕子)의 도읍지이다. 그 유풍과 고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철저히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두 문으로 해서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한 성에 한 문씩이다. 외성 나가는 데로 길을 잡아 정전(井田)의 옛터를 찾았다. 밭길은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고, 정연한 구획(區劃)은 그린 것 같으며, 사방에는 등성이가 없어 가이없이 뻗어 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다. 밭가에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는데 궁전이 우뚝하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구로 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단이 마련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단면에 새기기를, ‘구주단(九疇壇)’이라 했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비석에는 음기(陰記)가 있는데 고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곁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있다. 우물의 깊이는 열 길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의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파란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으로 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당(志道堂)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큰 족자 하나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는데, 그것은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이 때만 해도 평양에는 기자동래와 관련된 기자궁, 구주단. 기자궁구기, 기자정 등이 있고 궁궐이 잔존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조선 이전부터 기자를 숭상하여 건립된 것들로 보인다. 殷(商)이 망한 것은 기원전 1146년이며 기자는 이때 사람이다.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 중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사실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 尙書大典≫이다. 이에 의하면 기자는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고국인 은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으며,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왕 13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을 왔고, 이 때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을 물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12년 기사에 산천단 순심 별감(山川壇巡審別監) 정척(鄭陟)이 아뢰기를,
“평양 기자묘(箕子廟) 신위(神位)에 쓰기를, ‘조선후기자(朝鮮侯箕子)’라고 하였사오니, 청하건대 ‘기자’ 두 글자를 삭제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이를 칭호(稱號)로 함은 불가하다. 그러나 그저 조선후라고 일컫는 것도 미안한 듯하니 ‘後朝鮮 시조 箕子’라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상정소(詳定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 등은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희(喜) 등의 의논에 따랐다.
기자숭배사상은 16세기 사림파들에 의해 크게 부각되었으나 위 글을 통해 이미 15세기 이전에 기자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세종대왕에 의해 후조선 시조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이 어떤 분이신가?
우리 역사가들은 기자의 동래설을 부정하는 온갖 이해하기 힘든 설을 내세워왔으나 교과서에서 이미 서술되고 있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고조선의 역사를 뒤집기는 매우 어려운 일로 생각된다. 익산의 미륵산에 있는 산성은 기준성으로 그 이름이 전해지는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준왕이 익산에 내려와 쌓은 성이라 하여 기준성으로 전해왔으며, 현재는 무왕과 선화공주묘로 밝혀진 쌍릉은 한씨들이 기자를 시조로 모신다하여 준왕과 그 부인의 묘로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오고 있었다.
3. 청류벽(淸流壁)
부벽루로 가는 길에 석벽이 있어 깎아지른 듯한데, 석벽 면에 ‘청류벽(淸流壁)’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밤에는 벼랑을 도는 초롱불이 여기저기서 비친다. 평양에서 사흘을 묵는 동안 성색(聲色)과 음식을 밤낮 계속하다 보니 도리어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사흘 동안이나 기생들의 노래와 춤과 음식에 취하니 지쳤다는 것이니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위로가 지나치다.
4. 기자묘(箕子墓) 아침에 떠나 칠성문(七星門)으로 해서 나갔다. 서행(西行) 길은 본래 보통문(普通門)으로 나가는데 지금은 기자묘를 찾아가기 위해 그렇게 간 것이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묶은 듯이 서 있고 네모난 담이 사방을 둘러 있는데 그 가운데에 기자묘가 있었다. 묘는 네모나고 위가 뾰족한데 높이가 여러 길이며 앞에 작은 비석이 있는데 ‘기자묘(箕子墓)’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비석이 하나가 있어 가운데가 부러지고 다만 ‘묘(墓)’ 자 하나가 남아 있는데, 쇠못으로 붙여 놓았다.
●19세기 초까지도 기자묘가 잘 보존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5. 대정강(大定江) 나루터는 박천(博川) 땅이다. 이 읍부터는 식사 제공이 보잘것없다. 행렬을 멈추고 좀 쉬는데 그때 귀환하는 사은사(謝恩使)와 나루터에서 만나게 되어 초초히 영접을 했다. 사은사는 곧 판서 이만수(李晚秀)와 참판 홍의호(洪義浩)와 교리 홍석주(洪奭周)였다.
●동지사가 떠나고 있는데 사은사 일행은 돌아오고 있다. 연 3-4차례 사신을 보내고 한번 행차에 5개월이 걸리므로 빚어지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는고? 이를 백성을 위해 쓰지 못하고 중국 섬기는 외교에 바쳤으니 애석하다. 그저 연2회 정도면 무방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사신단 규모는 적게 하고 문화사절단(학문, 예술, 과학기술)을 파견하였더라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6. 구곡령(九曲嶺) 곽산(郭山)서부터는 산이 낮고 나무가 없으며 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사람 얼굴의 사마귀 같다. 선천(宣川)과 곽산 사이에는 땅이 비옥하고 곡식이 기름져 연경(燕京)에의 공미(貢米)는 반드시 이곳에서 취한다. 또 몇 고을의 주민 가운데는 본래부터 부호가 많다고 알려져 왔다.
●중국에 바치는 쌀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을 취한다고 한다. 운반상 가장 효율적이라 하겠다.
7. 괘궁루(掛弓樓)
여러 사람의 의논이, ‘용만(龍灣)을 건너가는 것도 이미 멀지 않았고 또 날이 흐려 비가 내리려고 하니 황급하게 달려갈 것 없다.’ 하여 또 하룻밤을 유숙하는데 기악(妓樂)이 낮까지 계속되었다.
●사신단을 위한 위로가 지나치지 않은가?
8. 동림의 진서관[東林鎭西關]
동림성은 청강평 북쪽에 있는데 별장(別將)을 두어 관할하고 있다. 둥그런 성을 산기슭 언저리에 쌓았고, 큰길이 남문 밖으로 가로질러 나 있다. 또 산 입구에 성을 마련해 놓고 문을 세워 진서관(鎭西關)이라고 하였다. 소나무 수풀이 빽빽하게 서 있고, 크고 작은 봉화대가 가끔 높은 산마루에 솟아 있다.
●변방에 봉화대가 잘 정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9. 내훈문(來薰門)
의주부(府)에는 외성문(外城門)이 있는데 문에는 문루(門樓)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다만 거대한 돌로 무지개같이 문을 세웠다. 이것을 구남문(舊南門)이라고 부른다. 내남문(內南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현판은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이라고 하였고 안쪽 현판은 내훈문(來薰門)이라고 하였다. 시가지와 민가가 그득하게 비늘같이 즐비해 있어 변경의 웅대한 도회임을 여기서 알 수가 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는 1050리이다.
●의주의 규모와 번창함을 알려준다. 이때는 정조가 막 승하하고 아직 세도정치의 폐단이 드러나지 않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10. 민 상사 경욱의 관에 들름[過閔上舍景旭館]
1000여 리 길에 올라 20여 일이 걸렸는데 짐을 풀어 하루 저녁을 묵게 되니 자연 몸이 나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오늘은 날씨마저 눈이 오므로 그대로 베개에 누워서 쉬었다. 세 사신이 사대(査對)를 끝내니,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초청했다. 그래서 저녁에 진변헌(鎭邊軒)에 들어갔다가 경욱(景旭) 민치승(閔致升)의 관(館)에 들렀다. 경욱은 정사(正使)의 아들인데, 바야흐로 함께 연경에 들어가게 되어 밤중까지 이야기했다. 막우(幕友) 조경유(趙景裕)도 자리에 있었다.
●정사는 자기 아들을 대동하고 있다.
11. 취승당(聚勝堂)
취승당은 선조(宣祖)가 주필(駐蹕)하였던 곳으로 영조(英祖)가 어필(御筆)로 현판을 썼다. 단청이 아름답고 규모가 자못 장려(壯麗)하다. 동헌 북쪽으로 해서 일섭문(日涉門)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있어 꽃나무들이 섬돌을 둘러싸고 있다. 정원의 동서쪽에 작은 대(臺)를 쌓았는데 성안의 민가들을 그 대 위에서 굽어볼 수 있다. 또 연춘당(延春堂)이 취승당의 왼쪽에 있다. 연경으로 가는 역마는 으레 관동ㆍ관북ㆍ호서ㆍ호남ㆍ영남 다섯 도에서 기일 두어 달 전에 와 의주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중에서 건장하고 힘센 것을 골라서 타도록 되어 있다. 이날 비장 역관 등 여러 사람이 일제히 객사 앞 문에 모여서 여러 말들을 세워 놓고 골랐다. 또 쇄마(刷馬)라는 명칭이 있는데 삼방(三房)의 쇄마는 해서고(海西庫)에서 가지고 들어왔다.
●사신단이 한번 뜨는데 말들은 전국 각지역에서 모이게 하여 의주에서 선발한다는 것이다. 아아! 저토록 많은 비용과 함께 관리와 백성들이 감당해야했을 노력과 수고와 고통이 너무 컸을 것이다.
12. 통군정에서의 횃불 올리기[統軍擧火]
횃불 올리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어둠을 헤치고 통군정에 올라갔다. 횃불 하나를 가져다가 성 위에다 불을 붙여 놓으니, 압록강 위아래의 파수병들이 서로 경고하여 함성이 땅을 뒤흔들고 불빛이 하늘에 가득 찼다. 압록강 동서쪽 100여 리가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10여 섬의 명주(明珠)가 흩어져서 따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 같다. 한 번 올리면 한 번 호응하고, 두 번 올리면 두 번 호응하여, 세 번 네 번에 이르러서도 하나도 호응을 빠트리지 않는다. 성 위의 불이 꺼지자 그 천 백으로 헤아리던 횃불 역시 뒤이어 자취가 없어진다. 이것은 변경의 조직 훈련이지만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다.
●진정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의 기강과 위엄이 저처럼 대단했다면 훌륭하다. 그러나 혹 사신일행을 위한 행사의 하나로 보인 시범은 아니었을까? 조선후기 무너진 군사제도를 생각하니 상상되는 것이다.
13. 백일원(百一院)에서 여러 기녀(妓女)들의 말 달리는 것을 구경하다.[百一院觀諸妓馳馬] 이날 백일원에서 놀이를 했다. 백일원은 의주성의 서문 밖에 있는데 어떤 사람은 강무당(講武堂)이라고도 했다. 당은 그리 크지 않은데 섬과 뜰은 평탄하고 넓어서 말 달리고 활 쏘는 장소로 합당하다. 먼저 무인(武人)의 무리들이 말 위에서 재주 부리는 것을 시험하여 보고, 그 시험이 끝나자 여러 기녀 중에서 말 잘 타는 자 5, 6인을 뽑아 각기 군복을 입히고 말을 달리게 했다. 말들은 다 재갈을 물고 우쭐거리는데 대(臺) 앞의 병졸이 호각을 한 번 불자 다들 안장을 두드리며 앞을 다투었다. 마치 전진에 나가 돌격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었다.
붉은 치마 가냘픈데 군복 걸치고 / 紅裙嫋娜襲戎裝
군문에서 고동치니 아가씨들 달린다 / 鼓動牙門走女娘
말 빨라 몸 가벼운데 전연 무서워 않고 / 馬逸身輕毫不怕
보드라운 손으로 꽃창을 쓴다 / 只將纖手使花槍
●역시 서북이다. 기녀들이 군복을 입고 말을 달린다는 것이다. 조선후기까지도 이곳은 고구려의 기상이 살아있는 듯하니 기쁜 일이다. 저런 상무정신을 국가에서 받아들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더라면 왜란도 호란도 운요호사건도 저처럼 처절하지는 않았으리.
14. 구련성(九連城)
어두워져서 구련성에 다다랐다. 이곳은 명 나라 때의 진강보(鎭江堡)로 유격 장군(遊擊將軍)을 두었던 곳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9개의 성이 연달아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다.” 하고 혹은 애양성(靉陽城)에서 금(金)과 고려가 대치하고 있을 때 금의 장군 알로(斡魯)가 이곳에다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압록강에서부터 책문(柵門)까지는 그 사이의 땅을 비워 놓고 피아(彼我)의 백성들이 농사와 건축을 못하는 것이, 전탈지(䩅脫地 완충 지대) 같았기 때문에 사신 행차는 반드시 이곳에 이르러서는 노숙(露宿)을 해야 한다. 윗 휘장과 장막을 치고 땅을 파서 온돌 모양 같이 만들어 불을 때는데 이런 장막을 치는 곳이 도합 10여 군데나 된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은 몸을 가릴 곳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 나무를 태우며 둘러앉아 있는데 연기와 불이 들판을 뒤덮어 도성에 있는 것 같다. 의주 장교들이 창을 가지고 장막을 돌고, 밤에는 또 호각을 불며 일제히 함성을 내어서 범을 쫓는다. 눈이 내릴 기색이 자욱한데, 우는 말이 서로 호응하여 비로소 변경을 나선 시름을 알게 된다.
●청이 간도를 봉금지로 정한 것과 같이 이곳도 그리 정한 것임을 알겠다. 지금의 비무장 지대와 흡사하다 하겠다. 아랫사람들의 고통스런 수행과 호랑이의 존재를 알려준다.
15. 총수(蔥秀)
저녁에 총수에 도착하였다. 그 석벽이 서 있고 샘이 둘러 있는 형상이 평산(平山)을 지나는 것과 같았다. 명 나라의 문희 예겸(文僖倪謙)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평산 땅 총수의 수석이 이곳과 유사한 것을 보고 그대로 빌려다가 고장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려한 점은 그곳만 못하다. 어제처럼 노숙했다. 책문(柵門) 안의 3, 4명의 호인(胡人)이 술을 팔려고 와서 통역과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는데 곁에서 듣는 사람은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사신단을 상대로 하는 장사치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16. 책문(柵門)
책문은 상룡산 아래에 있다. 나무를 가지고 방책(防柵)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어깨를 넘지 않고 책목 사이는 엉성하여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이 방책을 세운 것은 북쪽으로는 탑라(嗒剌) 땅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해문(海門)에 이르는 2000여 리에 70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중의 하나다. 획정된 경계를 나타내는 뜻인데 변경의 방비는 심히 소홀하다. 문에는 항상 자물쇠가 걸려 있고 봉성(鳳城)의 수비장(守備將)이 그것을 주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신 행차가 방책에 도착하면 먼저 성장(城將) 등의 관원에게 통고해야 비로소 문에 와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방책 밖에서 점심을 하고 곧 도강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마를 점검하여 성장소(城將所)에 입책보단(入柵報單)을 냈다. 사람은 도합 253명이고, 말은 도합 196필이다. 또 인마가 낙오하여 의주로 돌아간 것이 110여 쯤 된다. 시끄럽게 밀치고 차고 밟는 것이 전진(戰陣) 속에 있는 것 같다.
●처음 출발할 때는 사람이 300여명에 말이 250필정도로 보면 되겠다.
17. 봉황성(鳳凰城) 봉황산을 지나가면 성이 평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주위는 네모 반듯하고 성의 문루가 아주 까마득한데, 성장(城將)이 있어 주관한다. 《일통지(一統志)》에는, 봉황성은 본래 예(濊)의 땅이었는데 발해(渤海) 때에 들어와서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가 되었고, 요(遼)에서는 개주진국군(開州鎭國軍)이라고 하였고, 원(元)에서는 동녕로(東寧路)에 예속시켰다. 거리가 반듯하고 좌우의 물건 파는 가게들은 다 화려하고 집들은 거대한데, 각기 주로 파는 상품의 이름을 걸어 놓고 있다.
●섬세한 묘사는 역시 박지원의 일기에 떨어진다. 봉황성의 번영을 적었지만 놀라움과 부러움과 우리나라의 상공업의 부진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은 없다. 실학적 사고가 없는 그저 글공부한 시인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1803년 12월
1. 심양(瀋陽)
심양은 옛날의 숙신(肅愼)과 읍루(挹婁)의 땅이다. 발해의 대씨(大氏)가 처음으로 심주(瀋洲)를 설치하고 정리부(定理府)의 관할로 하였다. 요(遼) 나라 때에는 무원소덕(無遠昭德)과 삼하락교(三河樂郊)라고 하였다가 흥료군(興遼軍)이라고 고쳤으며 명(明) 나라 때에는 심양중위(瀋陽中衛)로 삼았다. 청(淸) 나라 때에는 봉천부(奉天府)에 예속하였고 또 성경(盛京)이라고도 하였는데, 청 나라 사람이 창업한 땅이다. 그 북쪽은 몽고(蒙古 몽골)의 지경이고, 그 동쪽은 개원(開原)으로부터 오랄선창(烏喇船廠)을 거쳐 영고탑(寧古塔)에 이르는 1300여 리이며, 서쪽은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燕京)까지 1400여 리이며, 요동부터 동팔참(東八站)을 넘어 우리 국경에 이르기까지가 500리다. 성 안팎의 인가는 도합 1만 5000에서 1만 6000호다. 그리고 성의 둘레가 5리고 그 형상이 말 같으며 대개 네모난 성이다.
2. 조선관(朝鮮館)
조선관은 거리 동쪽에 있다. 집이 황폐하고 퇴락하여 먼지가 층계와 주춧돌에 쌓였다. 문의 현판에 본래는 ‘조선관(朝鮮館)’ 세 글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 앞에는 경우궁(景祐宮)이 있는데 곧 청조(淸朝)의 원당(願堂)이고 그 뜰에는 순치(順治) 7년(1650)에 세운 비석이 있다.
3. 주류하(周流河)
일명 거류하(距流河)라고 하는데 옛날의 요수(遼水)다. 기자(箕子)가 주(周) 나라에서 봉지(封地)를 받았는데 주류하를 경계로 획정했다. 또 공손연(公孫淵)이 군대를 주둔시켜 자기 세력을 굳혔는데 사마의(司馬懿)가 그 북쪽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곳이 곧 이 강이다. 그리고 당 태종(唐太宗)이 동정(東征)할 때 흙을 깔아서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강을 지나 2리 되는 곳에 또 작은 물 하나를 건넜는데 곧 이 강의 지류(支流)다.
3. 산해관(山海關)
산해관에는 이중문이 있는데 모두 초루(譙樓)가 있고, 또 참호와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 높이는 4장(丈)쯤이다. 외문루(外門樓)가 2층이고 내문루(內門樓)가 3층이다. 첫째 문 바깥쪽에 ‘산해관(山海關)’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이사(李斯)의 글씨라고 하지만,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시에 “산해관 문의 세 큰 글자 진 나라 때에 어찌 한 나라 때의 해서가 있었겠는가?[山海關門三大字 秦時豈有漢時楷]”라고 하였으니, 이사의 글씨가 아닌 뚜렷한 증거인 듯하다. 관의 장수와 무장한 군인이 나와 일행이 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검사하였다. 관장은 곧 부도통(副都統)으로, 이름은 내의(來儀)였다. 관장이 앉은 곳을 지나가는 데는 세 사신은 가마를 멈추고 수종 인원은 다 말에서 내렸다. 둘째 문에 다다르니 안쪽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4. 환향하(還鄕河)
환향하는 천궁사(天宮寺)에서 8리쯤 되는 거리에 있는데, 물이 꽤 광활하였다. 모든 물들이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만이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향에 돌아가는 물[還鄕河]’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병자호란때 청에 붙잡혀갔다고 돌아와 還鄕女라 불리며 기구하게 살다 죽어간 불행한 여인들의 이름이 이에서 나온 것인가?
5. 고려보(高麗堡)
환향하를 건너서 7리쯤 가면 고려보에 이른다. 이곳은 병자년과 정축년의 호란(胡亂)에 납치된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자손들이 계속 거주하고 있다. 그전에는 마을이 적어도 100여 호(戶)는 되어, 우리나라 사신이 지날 적마다 혹 그들의 조상[根派]을 물어보면 부끄러워 대답을 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다른 마을로 이주하고 다만 10여 집만이 살고 있어, 옛날에 비하면 몹시 쓸쓸하다고 한다. 들에는 논이 수백 경(頃) 있는데 압록강을 건넌 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땅이 대개 습기가 있어서 물갈이[水稻作]가 가능하였고,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긴 풍습인 듯싶다. 시장에 인절미[粟切餠] 같은 떡이 있는데, 고려병(高麗餠)이라고 불렀다. 이것 역시 그 당시 떡 파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떡을 모방해서 만든 것인데, 이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사 먹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쟁반에 받쳐 들고 나와서 길을 막으며 먼저 팔려고 다투었다.
타국에 잡혀 와 여생을 의탁했건만 / 拘繫殊方寄晚生
논은 오히려 옛날 갈던 그 모습 남아 있구나 / 水田尙有舊時耕
둥근 떡을 쟁반에 가득히 들고 나와 다투어 호가하며 / 圓餻滿楪爭呼價
우리나라 사람 이름 익히 들었다 하네 / 謂我東人慣是名
6. 황도(皇都)
연경(燕京)은 순천부(順天府)에 속하는데 본래는 요(堯) 임금 때의 유도(幽都)이다. 요(遼) 나라에서는 ‘남경 유도부(南京幽都府)’라 일컫고 송(宋) 나라 선화(宣和) 연간에는 ‘연산부(燕山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얼마 후 금(金) 나라에 들어와서는 ‘연경’이라 일컫다가 이윽고 ‘중도(中都)’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러다가 원(元) 나라 초년에는 ‘연경 대흥부(燕京大興府)’, 명 나라 홍무(洪武) 초년에는 ‘북평부(北平府)’를 삼았고, 영락(永樂) 초년에는 ‘순천부’라고 이름을 고쳤다가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부터는 ‘북경(北京)’이라고 일컬었으며, 18년 즉 경자년(1420, 세종 2)에는 궁성(宮城)ㆍ문궐(門闕) 등을 모두 남경(南京)을 모방하였는데, 그 장엄함이나 화려함은 남경보다 훨씬 나았다.
1804년 1월
1. 환희(幻戱)
이날 요술쟁이를 조치, 관사 안에서 요술을 시켰는데, 요술은 대범 10여 종목이었다.
2. 표류주자가(漂流舟子歌)
우리나라 흑산도(黑山島) 백성으로서 남해에 표류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관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 넷이 있었다. 이날 밤 그들을 불러다가 그 전말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신유년 겨울에 물고기를 사기 위해 곡물(穀物) 약간을 배에 싣고 소흑산도에서 대흑산도로 갔다가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0일 만에 어느 한 항구에 닿으니 마침 어떤 사람이 물 건너편에서 영접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우리나라 말을 약간 알았습니다. 그에게 그 지방을 물었더니, 그곳은 바로 유리국(琉璃國)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관(官)에서 배를 검색하더니 곧 관청에 안접(安接)시키고 의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10월 초에 그들의 연경 진공사(燕京進貢使)를 따라서 배를 출발시켰었는데, 10여 일 만에 또 바람을 만나 표류, 진공사의 배 두 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던 끝에 어느 한 곳에 정박했더니, 언덕 위에 흰옷 입은 사람이 있다가 멀리 바라보더니 곧 달려왔습니다.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이제야 살아날 길이 있구나 하고는, 그를 따라간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 사람이 바삐 돌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 태반이 그들에게 피해를 당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해 왔다.’ 하기에, 드디어 그와 함께 바삐 배를 옮겨, 바다 가운데에 닻을 내렸으니, 정박할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되풀이한 지 4일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를 가로질러 달려온 자그마한 배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주(蘇州) 사람으로서 상업(商業)을 하느라, 여기에 이르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드디어 그들의 힘을 입어 방옥(房屋)에 안접(安接)되고, 또 쌀을 무역하면서 서로 돕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이 어느 지방이냐고 물었더니, 일록국(日鹿國)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또 길을 떠나 15일 만에 사분지(沙分地)에 닿았으니, 이날은 바로 3월 소회(小晦)였습니다. 또 석 달을 가서 소주(蘇州)에 닿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갔는데 관가(官家)에서 공궤(供饋)해 준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10월 3일 소주에서 출발, 12월 4일 연경에 닿았더니, 예부(禮部)에서 의식을 급여하고 절사(節使)가 올 때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행 중 두 사람은 다른 배에 탔었는데, 여태껏 이르지 않으니, 그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 말을 듣고 보면, 그들은 천하를 훌륭히 구경했다고 할 만하건만, 무식한 탓에 그것을 만분의 일도 기록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표류된 사람의 성명은 즉, 문호겸(文好謙)ㆍ문순득(文順得)ㆍ박양신(朴亮信)ㆍ이백근(李百根)ㆍ이중태(李重泰)ㆍ김옥문(金玉文)인데, 문순득ㆍ김옥문은 여태껏 이르지 아니한 자들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장하게 여겨, 술 한 잔을 가득히 부어 주었다.
●흑산도에서 표류되어 3년간이나 중국을 떠돌며 이제야 고국으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어부들을 참으로 안쓰러운 마음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행기록 못한 것을 말한다. 좀 더 인간미 있는 표현과 기술이 아쉽다.
3. 회회관(回回館)
회회국(回回國) 사람들의 모양은 모두 푸른 눈동자에 눈이 깊으며, 의모(衣帽)는 만주 사람과 동일한 모양이었는데, 전립(氈笠)의 챙은 앞도 말리고 뒤도 말렸으며, 오른쪽도 뾰족하고 왼쪽도 뾰족하여 마치 끝이 펴진 연잎과 같았다. 그 번왕(番王)이 거처하는 집은 서화문로(西華門路)에 있는데, 집 제도가 마치 반달 모양과 같았다. 전번 주점에서 회회국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저육(猪肉)으로 만든 안주를 내놓으니, 그는 머리를 휘젓고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저육은 본래 내가 먹지 않는다.”하였다. 대개 회회국의 종족은 저팔계(豬八戒)로써 조상을 삼는다. 그러므로 무릇 음식을 먹을 적에 저육을 대하면 입에 가까이하지 않는다 한다.
●이슬람에 대해 미처 잘 모르고 소문대로 하는 소리다.
4. 객관의 밤[館夜]
감기가 아직도 쾌히 낫지 않아서 종일 이불을 안고 있었다. 또, 객관에는 감기를 앓는 자가 열에 여덟아홉을 차지했다. 객관에 머무르는 여러 장사치들은 모두 뒤뜰에다 대자리로 집을 짓고 벽돌을 사다가 온돌방을 만들었으며, 역졸(驛卒)들 역시 담을 의지해 한 군데로 모여서 깨진 벽돌을 주워다가 바람을 가렸다. 역쇄마(驛刷馬)는 동북단(東北壇) 밖의 한데 두고, 다만 말뚝을 땅에 꽂아서 그 고삐를 매어 놓았을 뿐이며, 따라서 먹이는 것 또한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건강한 말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울어 댔는데, 오늘밤엔 유난히 그 소리가 객관 안을 뒤흔들었다.
●사신단에 차출된 말들의 고생이 심하다.
5. 자정 왕계의 객관[王柘庭棨客館]
이경연(李景淵)이 근래 자정(柘庭)과 친히 알고 지냈다. 그래서 이경연의 소개로 자정과 한 차례 만나기를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일찍이 이경연과 수레를 같이 타고 객관을 나섰다. 왕자정은 현재 춘수호동(春樹衚衕) 관제묘(關帝廟) 가운데 있다. 그의 문에 들어가 좌정한 다음, 내가 붓을 들어서 써 보이기를,“제 벗을 통해서 일찍이 높으신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와서 직접 만나 뵙게 되니, 삼생(三生)의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하였더니 왕자정은,“무식한 저를 이렇게 찾아 주시니,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납니다.”하였다. 접장(蝶莊) 왕진석(王陳錫)은 왕계(王棨)의 아우인데, 그 이름만 들었을 뿐, 그 얼굴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또 써서 묻기를,“듣자니, 제씨(弟氏)와 함께 계신다 하던데, 지금 이 자리에 제씨가 계신지요?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누구누구이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하였더니 왕자정은,“매우 뚱뚱해 보이고 가는 털이 난 자는 같은 고향에 사는 방건일(方乾一)이란 사람인데, 현재 국감(國監)에서 거자업(擧子業)을 하고 있는 중이고, 살이 찌고 노란 수염이 난 자는 제 표형(表兄) 되는 장수삼(張秀三)이란 사람인데, 현재 효렴(孝廉)으로 있는 중이며,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자가 제 동생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나는 “저의 이번 걸음은 산천(山川)ㆍ누관(樓觀)의 승경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실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이오. 그런데 이제 우연히 만나게 되었군요. 동방의 비천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런 신기한 모임을 얻었을까요?”
●되도록 학자나 문인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저자의 마음을 엿 보게 한다. 그러나 기간이 짧고 본인의 지위가 낮아서인지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6. 돌아갈 날짜를 정하고 기쁨을 기록하다[定日回程志喜]
아침에 주객사(主客司)로부터 이문(移文)이 전해졌다. 그 이문에,“연례로 공진(供進)하는 조선 공사신(朝鮮貢使臣)의 상품 수여를 이제 이달 28일 진시(辰時)에 오문(午門 남문) 앞에서 시행하기로 귀관(貴館)에 이문을 보내오니 파원(派員)들은 미리 와서 대기하라.”하였다. 해[年]를 넘기면서 사관에 체류되었던 일행 인원들은 이 소식을 듣자 기뻐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는 모두 짐을 꾸리고 행장을 단속한다는 공론이었다.
●체류기간이 한달이 넘자 귀국을 고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물을 배고 익히려는 선각자는 아쉽다. 더 보고 더 배워야 하기에...
7. 궁녀사(宮女詞)
서직문(西直門)에 들어서면서부터 등불을 들고 간다. 노면에는 수레에 탄 여인들이 보이는데 수레 앞에 긴 나무를 건너지르고 거기에 문가(門架)를 설치했으며, 좌우에는 희고 붉은 철롱등(鐵籠燈)을 달았다. 이렇게 문안에서부터 서안문(西安門) 밖까지 뻗쳐 수레 5, 6백 대가 잇따랐으며, 쌍등(雙燈)이 빛나고 인마가 아울러 웅성거린다. 물어보니,“황제가 바야흐로 궁녀를 간선하는데, 만(滿人)과 한인(漢人)을 막론하고 여자의 나이 14, 5세만 되면 모두 간선에 해당하며, 3년마다 한 차례씩 간선하는데 오늘밤 오경(五更)에 궁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일제히 신무문(神武門)에 들어가 대기하다가 우수한 자를 선발한 후 초이튿날 큰 잔치를 베푼다.”한다. 이 때문에 간선에 해당된 자 모두 가꾸고 화장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향기로운 국색(國色)으로 자못 한 떼의 비단 수풀을 이루었다. 수레 곁에 다가가 살펴보니, 수레 하나에 소녀 하나씩 있고, 또 나이 많은 여자가 하나씩 있는데, 이는 소녀의 스승[姆]인 듯싶다.
1804년 2월
1. 의총에서[義塚]
양하(羊河)를 건너다 절반을 못 갔는데,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아이 10여 명이 길 왼쪽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돈 1문(文) 얻기를 빌므로 마두(馬頭)들에게 주머니 돈을 털어 나누어 주게 하였다. 행궁(行宮) 곁에 편액을 ‘유양국(留養局)’이라 한 집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떠돌며 구걸하는 아이들을 재우고 먹이는 곳으로서, 얼굴에 때가 끼고 해지다 남은 옷을 입은 자들이 문 앞에 모여 앉아 더러는 팔을 벤 채 졸고, 더러는 옷을 벗어 이를 잡고 있었으니, 마치 뭇 돼지가 우리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무령현(無寧縣)을 지나 5리쯤 가니 길 곁에 황량한 무덤 하나가 있는데, 높이와 크기가 다른 무덤보다 배나 되고 짧은 빗돌을 세워 크게 ‘의총(義塚)’ 두 자를 썼기에 물으니 ‘떠돌며 구걸하는 아이들의 시체를 다른 데 묻을 만한 곳이 없으므로 본 고을에서 의총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중국에 가면 어른 아이 거지들이 천원만 달라고 뒤쫓아 다닌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중국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무려 13억중 1억 명은 선진국 수준의 경제생활을 한다지만 국민소득수준은 아직도 겨우 중진국의 문턱에 이르지 밖에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며 경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한 중국의 빈부격차 문제의 해결은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공산당 일당독재를 계속하는 중국의 큰 숙제이다.
2. 한시 두 편
들이 멀어 구름 더디 돌아가고 / 野遠歸雲懶
바람 약해 새도 한가로이 날아가 / 風殘逝鳥閒
넓은 들판에 파란 풀이 고우니 / 廣原靑草嫰
봄은 달리는 말굽 사이에 있네 / 春在馬蹄間
봄바람 얼음 풀린 유하구에 / 春風水暖柳河溝
두세 마리 갈매기 둥둥 떠 노네 / 三兩輕鷗泛泛流
십 리의 인가 안개 속에 있는데 / 十里人家踈霧裡
몽롱하여 흡사 신기루 같네 / 朦朧還似蜃噓樓
2. 사하점에서 가서를 받음[沙河店得家書]
아침에 일어나자 점사(店舍) 문밖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크게 나기로 물으니, 만부(灣府 의주)의 찬물리(饌物吏)가 일행의 집에서 부친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볼 사람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맞으며 불러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놀라 기뻐하고 또 겁이 나면서 장황하게 봉을 뜯었으니, 옛 시에 이른 바,
고향이 가깝자 심정 더욱 설레어 / 近鄕情更㤼
차마 온 사람에게 묻지 못한다 / 不忍問來人]
는 것이 이런 때를 말한 것이 아닌지? 네 통의 가서(家書)가 겹쳐 왔는데 정월 소회(小晦 29일), 2월 3일ㆍ6일ㆍ10일에 띄운 것으로, 부모님께서도 계속 강녕하시고 아내는 지난달 4일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막혔던 참이라 너무나 기뻐 미칠 것 같았다. 한참 모두들 편지를 보고 있을 때는, 누구나 모두 고요하게 말이 없고 놀란 듯 기색이 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서는 또한 모두 이 사람 저 사람이 서로 축하하기를, 마치 새해에 사람을 만나면 곧 지난해 안부를 묻듯이 하였다. 세 사신의 집안과 일행 상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편안하다는 소식을 받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조지(朝紙)를 만부(灣府)에서 보내왔는데, ‘동조(東朝)께서 수렴청정을 걷우[撤簾]심에 조정 신하들이 호(號)를 올렸으며, 새달 7일에는 경과(慶科)로 정시(庭試)를 보인다.’고 한다. 종사(宗社)의 경사가 진실로 이보다 큼이 없겠으나, 다만 지난 섣달의 인정전(仁政殿) 화재는 듣자니 놀라워 두려워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길이 질기 때문에 한없이 엎어지며 죽을 뻔 하였으나 종일토록 20리를 가서 그쳤다.
집과 나라를 아득히 떠난 지 오랜데 / 家國蒼茫久別離
편지 받았으니 기쁨 말할 것 없지 / 手持書尺喜先知
만약 일찍 편하다는 소식을 알았다면 / 若今早得平安信
밤마다 무엇하러 꿈꾸려 하였으리 / 夜夜何須費夢思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남을 말하며 가족들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쓴 시가 아름답다.
1804년 3월
1. 연산점 술자리에서 차운함[連山店酒席次韻]
청석(靑石)ㆍ회령(會寧) 사이는 골에 눈이 아직도 쌓여 있는데, 층대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여 도랑이 깊고 흙이 진 데는 길이 대부분 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양지 바른 산골엔 나물 꽃이 한창 피어나고 나뭇가지가 무르익어가니, 이는 그야말로, ‘남쪽 가지엔 꽃이 피는데 북쪽 가지는 차다.[南枝花發北枝寒]’는 것이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니 만부(灣府 의주부)에서 준례대로 찬물(饌物)을 보내고, 만리(灣吏 의주 아전)가 또 소 한 마리를 잡아 상하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대접했다.
2. 서계에서 술 마심[西溪小酌]
사신 길은 으레 수레의 짐을 기다렸다가 동시에 책문을 나오는 것인데 이번 길은 땅이 질기 때문에 언제나 일제히 오게 될지 알 수 없다. 책문 안 서북쪽에 시냇물이 둘려 있는데 맑게 비쳐 기분이 내킬 만했다. 세 사신과 시내 위에 이르러 그물을 쳐 크고 작은 고기 수십 마리를 잡고 회를 쳐 술 안주를 하다가, 달밤이 되어서야 점사(店舍)로 돌아왔다.
3. 지원이 먼저 돌아감을 전송함[送芝園先歸]
수레의 짐이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일제히 도달했으므로 아침에 드디어 책문을 나오는데, 봉성장(鳳城將)과 세관(稅官)ㆍ책문 어사(柵門御史) 등의 관원이 아문(衙門)에 나앉아, 책문에 들어갈 때처럼 연경에서 가지고 오는 짐들을 풀어 대략 검열했다. 세 사신 일행이 차례로 나왔는데,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여 마치 새가 조롱에서 나온 것 같았다. 다만 서장관은 다음 호시(互市)를 검찰하기 위하여 책문 밖에서 며칠 머무르다가 책문 화물(貨物)이 나온 후에 비로소 가게 되므로, 책문 밖 산기슭 밑에 구덩이를 파고 막 치기를 구련성(九連城)과 총수산(蔥秀山)에서와 같이 해야 한다. 정사(正使)와 부사가 저녁때가 되어 먼저 출발하였는데, 만 리 길을 갔다 오다가 누구는 가고 누구는 처지는가 하는 감회가 없지 않았다.
4. 청류당에서[聽流堂]
서장관은 으레,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일기(日記)와 듣고 본 사건을 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제야 비로소 끝냈으므로 모두 압록강을 건넌다는 장계(狀啓)를 써서 띄웠다. 낮에야 떠나 용천관(龍川館)에 이르니, 희미한 달이 벌써 높이 떴다. 청류당에 기생 풍악을 차렸다가 다시 천연정(天淵亭)으로 올라갔다.
●서장관의 또 다른 책무를 알려준다.
5. 김노수의 서호정에서[金魯叟西湖亭]
사문(金斯文 사문은 선비의 경칭) 김노수(金魯叟)는 정주 선비인데, 추양(秋陽)과는 친분이 있고 나 역시 아는 사이이다. 연경 갔다 돌아오는 것을 맞기 위하여 앞참(站)까지 나왔다. 들으니 집이 고을[州治]에서 남쪽으로 20리 거리인데 새로 자그마한 정자 하나를 ‘초산리(草山里)’에다가 짓고 편액(扁額)을 ‘서호정(西湖亭)’이라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숲 언덕 사이에 솟아 있는데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여 뜰 앞이 만 리나 된다고 하여 그 경치가 좋음을 대략 말하며, ‘방금 서울 사우(士友)들의 시(詩)를 받아 현판을 만들어 걸었는데 시를 얻은 것이 벌써 열두어 수나 된다.’ 하고, 또한 나에게도 한 수를 요청하기로 절운(絶韻) 두 수를 써 주었다.
당신의 풍신 준수하여 특이하거니와 / 怪子芝眉秀氣籠
서호정도 멀리 바람 앞에 솟았네 / 西湖亭子遠當風
나그네가 두루 요동 땅을 밟았지만 / 行人遍踏遼陽返
산 빛 물소리는 역시 우리나라 것일레 / 嶽色川聲又海東
시골 살림은 농사가 제일인데 / 鄕居契闊勝農桑
난간 밖 장사 배가 남해로 몰리네 / 欄外商帆湊海南
부끄럽노라 좋은 인연 아직도 부족하여 / 愧我淸緣猶未足
서호정에 쏘다니던 말 매어두기 어렵네 / 西亭難又繫征驂
●서북에도 선비가 있고 그가 부유함을 보여준다.
6. 용천관을 늦게 떠나며[龍泉館晚發]
상사(上舍) 송계영(宋啓榮)은 주쉬(主倅) 송수연(宋守淵)의 아들인데,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바야흐로 부모가 있는 고을에 오므로 온 지경 사녀(士女)들로 구경하는 자가 담쌓듯 하였다. 주쉬가 내일 고을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기쁨을 기념하게 되므로, 괴나리봇짐에 발을 동여매고 모여드는 제생(諸生)이 벌써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만 되어도 저처럼 큰 경사가 난다. 오늘날은 판검사가 되어도, 장군이 되어도 잔치하면 웃음거리다. 지자체 선거에 당선되는 자들이나 하는 짓거리가 되었다. 시의원만 되어도, 면 농협조합장만 되어도 경사난다.
7. 벽제관에서 밤에 읊음[碧蹄館夜吟]
저녁에 벽제관에 닿으니 막내 아우와 여러 손님들이 마중을 나왔다. 따라서 밤에 함께 잤다. 고양(高陽)은 본래 작은 고을인데, 매양 북경 사신이 오갈 때면 친척이나 친구들로서 여기까지 와서 맞이하고 전송하는 사람이 많으니, 음식과 잠자리의 폐단을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책문을 나오면 중국을 벗어나는 듯, 벽제관에 오면 서울에 다 온 듯 여긴다.
8. 환가(還家)
일찍 떠났다. 왕성(王城)이 점점 가까워지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화살 같은데, 홍제원 이후부터는 마중하러 나온 사람과 손님들이 점차 많았다. 드디어 모화관으로 들어갔는데, 추양(秋陽) 이하는 공복(公服)으로 갈아 입었다. 나는 그대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먼 길을 잘 다녀왔고 또 온 집안이 편안하게 일이 없어, 기쁨을 헤아릴 수 없었다. 갔다 온 길은 모두 6183리인데, 이는 답사한 길과 관(館)에 머무를 때 구경하기 위하여 돌아다닌 길은 논하지 않은 것이다. 표문(表文)을 모신 날로부터 복명한 날까지는 무릇 152일이었다.
입은 채로 당에 올라 문안 드리니 / 征服升堂啓起居
대문에서 기다리던 어버이 마음 위로 되셨으리 / 親心恰慰倚門閭
놀기 좋아 이렇게 이별이 오래였는지 / 耽遊有此離違久
너무도 기뻐서 까닭 없이 눈물이 나네 / 和淚無端喜極餘
행장을 본 아내는 비단 한 치도 없다 조롱하고 / 檢槖妻譏無寸錦
상 앞에 온 아이는 좋은 책 사왔느냐 묻네 / 臨床兒問帶奇書
오늘 밤도 다시 중국 꿈을 꾸겠지만 / 今宵復作中原夢
만리 길 돌아와 작으나마 내 집에 왔네 / 萬里歸來斗小廬
●다섯 달 만에 꿈같은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와 모처럼 느끼는 행복을 재미있게 그린 시다.
부록
1. 행총(行總)
무릇 연경에 가는 사람은, 각각 나무 패[木牌]를 가지는데 소임은 무엇, 성명은 무엇이라는 것을 써서, 일체로 서장관의 수압(手押 수결)을 받아야 하고, 또한 이름을 기록해서 책을 만들어, 갈 때 당해서 점고(點考)하여 패가 없는 자는 섞여들지 못하게 한다.
2. 세폐(歲幣)
만수성절 진하(萬壽聖節進賀)의 어전 예물(御前禮物)
황색 세저포(細苧布) 10필, 백색 세저포 20필, 황색 세면주(細綿紬) 20필, 자색 세면주 20필, 용문염석(龍文簾席) 2장, 황화석(黃花席) 20장, 만화방석(滿花方席) 20장, 잡채화석(雜綵花席) 20장, 달피(獺皮) 20장, 백면지(白綿紙) 1400권, 6장 배접한 두꺼운 유지(油紙) 10부(部). 이상의 것은 금년에는 전(前) 방물로 이준(移准)함.
중궁전 예물(中宮前禮物)
홍색 세저포 10필, 백색 세저포 20필, 자색 세면주 20필, 백색 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방석 10장, 잡채화석 10장. 이상의 것은 금년은 전 방물로 이준함.
동지 영절 진하(冬至令節進賀) 어전 예물
황색 세저포 10필, 백색 세저포 20필, 황색 세면주 20필, 백색 세면주 20필, 용문염석 2장, 황화석 20장, 만화석 20장, 만화방석 20장. 보충하여 진상하는 것, 잡채화석 20장, 백면지 1300권. 이상의 것은 금년에는 전 방물로 이준함.
중궁전 예물
나전 소함(螺鈿梳函) 1벌[事]. 봉진(奉進), 홍색 세저포 10필. 보진(補進), 백색 세저포 20필, 자색 세면주 10필, 백색 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이상의 것은 금년에는 전 방물로 이준함.
정조 영절 진하(正朝令節進賀) 어전 예물
황색 세저포 10필, 백색 세저포 20필, 황색 세면주 20필, 백색 세면주 20필, 용문염석 2장, 황화석 15장, 만화석 15장, 만화방석 15장. 보진(補進), 잡채화석 15장, 백면지 1300권. 이상의 것은 금년에는 전 방물로 이준함.
중궁전 예물
나전 소함 1벌. 봉진(奉進), 홍색 세저포 10필. 보진(補進), 백색 세저포 20필, 자색 세면주 20필, 백색 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이상의 것은 금년에는 전 방물로 이준함.
진공(進貢) 어전 예물
백색 저포 200필, 홍색 명주 100필, 녹색 면주 100필, 백색 명주 200필, 백색 목면(木綿) 1000필, 목면 2000필, 오조룡석(五爪龍席) 2장, 각종 화석(花席) 20장, 녹비(鹿皮) 100장, 달피(獺皮) 300장, 호요도(好腰刀) 10자루, 호대지(好大紙) 2000권, 호소지(好小紙) 3000권, 점미(粘米) 40석.
성경 절류 금년 세폐(盛京截留今年歲幣)
홍색 주(紬) 100필, 녹색 주 100필, 호대지 100권, 호소지 1210권, 생상목(生上木) 300필, 점미(粘米) 3석 5두 4승
3. 식례(食例)
옛 예가 무릇 북경에 들어가는 날로 광록시(光祿寺)에서 쌀 1석 8두, 저육 36근, 술 90병, 차 5승 10냥, 염(鹽)과 장(醬) 각 9승, 기름 4근 8냥, 채삼(菜蔘) 15근 등의 물건을 5일 만에 한 번씩 주었는데, 하곡(荷谷)의 《조천록》에 나왔음 순치(順治) 이후로는 호부(戶部)에서 양료(糧料)를 공급하고 공부에서 시탄(柴炭), 마초(馬草), 기명(器皿)을 공급하고 광록시에서 각종 반찬거리를 공급한다.
세 사신 : 수도미(水稻米) 2승, 닭 1척(隻), 거위[鵝] 1척, 생선 1마리, 저육 반 근, 한양(漢羊) 반 척, 우유(牛乳) 반 정(錠), 백면(白麪) 2근, 장과(醬瓜) 4냥, 청장(淸醬) 6냥, 엄채(醃菜) 3근, 황주(黃酒) 6병[壺], 두부 2근, 장 6냥, 초 10냥, 향유(香油) 1냥, 다엽(茶葉) 1냥, 화초(花椒) 1돈, 소금 1냥, 등유(燈油) 2냥. 이상은 매일 따로 줌, 빈과(蘋果) 75매(枚), 포도 7근 반, 사과(沙果) 112매. 이상은 5일마다 모아서 줌.
대통관(大通官) 3원(員)과 압물관(押物官) 24원 : 백미 1승, 닭 1척(隻), 저육 1근, 면(麪) 1근, 엄채 1근, 황주(黃酒) 1병, 소금 1냥, 두부 1근, 청장 2냥, 향유 4돈, 장 4냥, 등유 2냥, 초(椒) 4푼[分], 다엽(茶葉) 5돈. 이상은 매일 따로 줌.
상(賞)이 있는 종인(從人) 29명 : 백미 1승, 저육 1근 반, 백면 반 근, 엄채 8냥, 소금 1냥. 이상은 매일 일마다 모아서 줌.
상이 없는 종인 242명 : 백미 1승, 저육 반 근, 엄채 4냥, 장 2냥, 소금 4냥, 말은 매 필에 콩 4승, 풀 2속(束), 시(柴) 2근.
길에서 쓸 한양[路費漢羊] 매양 4일 만에 한 번씩 주는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에게는 2척(隻), 서장관에게는 1척, 대통관(大通官)에게는 30근, 압물관(押物官)에게는 20근, 종인(從人)에게는 10근임.
광록시(光祿寺)에서 주는 길에서 쓸 한양 은(銀) 58냥으로 작정하여, 대통관에게는 각 1냥 9돈, 압물관에게는 각 1냥 2돈, 종인에게는 각 8냥임
4. 상사(賞賜)
국왕전
동지(冬至)에는 채단(綵緞) 5표리(表裏), 은(銀) 250냥, 정조(正朝)에는 채단(綵緞) 5표리, 은 250냥, 준마(駿馬) 1필. 영롱(玲瓏) 안장까지 전부 갖추어짐, 성절(聖節)에는 채단(綵緞) 5표리, 은 250냥, 준마 1필. 영롱 안장까지 전부 갖추어짐, 연공(年貢)에는 채단(綵緞) 5표리, 은 250냥. 은(銀)이 모두 1000냥인데 대신 초피(貂皮)가 300장임.
정사ㆍ부사
동지에는 대단주(大緞紬) 2표리, 은 50냥, 황견(黃絹) 2필, 정조에는 대단주 3표리, 은 50냥, 안장 낀 말 1필, 황견 2필, 성절에는 대단주 3표리, 은 50냥, 안장 낀 말 1필, 황견 2필, 연공에는 대단주 2표리, 은 50냥, 황견 2필. 당초에는 흑화자(黑靴子) 털 달린 것을 주었는데, 청 나라가 강희(康煕) 계해년(1683, 숙종 9)부터 대신 황견을 주고 압물관에게는 대신 청포(靑布)를 주었다..
서장관
동지에는 대단주 1표리, 은 40냥, 황견 1필, 정조에는 대단주 1표리, 은 50냥, 황견 1필, 성절에는 대단주 1표리, 은 50냥, 황견 1필, 연공에는 대단주 1표리, 은 40냥, 황견 1필.
대통관 3원(員)
동지에는 대단주 1표리, 은 20냥, 황견 1필, 정조에는 대단주 1표리, 은 30냥, 황견 1필, 성절에는 대단주 1표리, 은 30냥, 황견 1필, 연공에는 대단주 1필, 은 20냥, 황견 1필.
압물관 24원
동지에는 소단(小緞) 1표리, 은 15냥, 정조에는 소단 1표리, 은 20냥, 청포(靑布) 4필, 성절에는 소단 1표리, 은 20냥, 청포 4필, 연공에는 소단 1표리, 은 15냥.
종인(從人) 30명
동지, 정조, 성절, 연공(年貢)에 동은(冬銀) 4냥
5. 도리(道里)
서울에서 고양(高陽)ㆍ파주(坡州)ㆍ장단(長湍)ㆍ송도(松都)ㆍ금천(金川)ㆍ평산(平山)ㆍ총수(蔥秀)ㆍ서흥(瑞興)ㆍ검수(劍水)ㆍ봉산(鳳山)ㆍ황주(黃州)ㆍ중화(中和)ㆍ평양(平壤)ㆍ순안(順安)ㆍ숙천(肅川)ㆍ안주(安州)ㆍ가산(嘉山)ㆍ정주(定州)ㆍ곽산(郭山)ㆍ선천(宣川)ㆍ철산(鐵山)의 차련관(車輦館), 용천(龍川)의 양책관(良策館), 의주(義州)의 소관관(所串館)을 지나 만부(灣府)에 이르는데, 무릇 24점(店)으로 모두 1050리임.
압록강(鴨綠江) 5리, 소서강(小西江) 1리, 중강(中江) 4리, 방피포(防陂蒲) 5리, 구련성(九連城) 4리. 옛 진강부(鎭江府). 모두 24리, 항두하자(恒頭河子) 2리, 구련성참 4리, 망우(望隅) 8리, 자음복(者音卜) 4리. 일명은 하마당(蝦蟆塘), 비석우(碑石隅) 2리. 글자가 없는 비석이 있음, 송우(松隅) 3리, 마전판(馬轉板) 1리. 일명은 사와자(沙窩子), 석우(石隅) 5리, 금석산(金石山) 7리, 중아문(中衙門) 3리. 일명은 질광현(質光峴), 탕타자(湯他子) 5리, 건포(乾浦) 3리, 세포(細浦) 7리, 유전(柳田) 2리, 탕참(湯站) 9리. 일명은 탕산성(湯山城), 총수참(蔥秀站) 3리. 모두 68리, 어룡퇴(魚龍堆) 1리. 일명은 지타이(知他爾), 차유장항(車踰獐項) 2리. 일명은 사평(沙平), 왕팔석(王八石) 10리, 상룡산(上龍山) 3리, 책문(柵門) 10리. 모두 28리.
의주에서 책문까지 모두 120리이다.
안시성(安市城) 5리, 진평(榛坪) 2리, 봉지(鳳池) 4리, 구책문(舊柵門) 3리, 봉황산(鳳凰山) 12리, 봉황성 4리. 모두 30리, 삼차하(三叉河) 6리, 이대자(二臺子) 4리, 건자포(乾子浦) 10리. 일명은 여온자개(餘溫子介), 사대자(四臺子) 1리, 백안동(伯顔洞) 9리. 원 나라 백안이 군사를 주둔했던 곳, 마고령(麻姑嶺) 10리, 송참(松站) 10리. 옛 진동보(鎭東堡), 일명은 설참(薛站), 또는 설리참(雪裏站). 모두 50리, 소장령(小長嶺) 5리. 일명은 두자령(阧子嶺), 옹북하(瓮北河) 5리. 일명은 삼가하(三家河), 대장령(大長嶺) 5리. 일명은 장령자(長嶺子), 유가하(劉家河) 8리, 황가장(黃家莊) 2리. 모두 25리, 팔도하(八渡河) 5리. 일명은 금가하(金家河), 장항(獐項) 1리, 임가대(林家臺) 9리. 일명은 금계하(金鷄河), 범가대(范家臺) 5리, 이도방신(二道方身) 5리, 통원보(通遠堡) 10리. 옛 진이보(鎭夷堡). 모두 35리, 석우(石隅) 5리, 화상장(和尙莊) 8리, 초하구교(草河口橋) 10리, 답동(畓洞) 2리. 모두 25리, 분수령(分水嶺) 15리, 고가령(高家嶺) 6리, 유가령(兪家嶺) 4리, 연산관(連山關) 5리. 옛 아골관(鴉鶻關). 모두 30리, 회령령(會寧嶺) 20리, 첨수하(甜水河) 17리, 첨수참(甜水站) 3리. 모두 40리, 청석령(靑石嶺) 10리, 소석령(小石嶺) 5리, 낭자산(狼子山) 15리. 모두 30리, 마천령(摩天嶺) 8리. 서쪽에 당 태종 때 주필(駐蹕)한 산인 마제산(馬蹄山)이 있음, 두관참(頭關站) 8리, 삼류하(三流河) 4리, 왕상령(王祥嶺) 10리, 석문령(石門嶺) 4리, 왕보대(王寶臺) 6리. 냉정(冷井)이 있음. 모두 40리, 고려총(高麗叢) 10리, 아미장(阿彌莊) 5리, 목창(木廠) 5리, 태자하(太子河) 9리. 연단(燕丹)이 도망하여 죽은 곳, 영수사(迎水寺) 1리. 책문으로부터 여기까지가 동팔참(東八站). 모두 30리, 접관청(接官廳) 12리, 방허소(防虛所) 6리, 삼도파(三道把) 5리, 난니도(爛泥塗) 5리. 모두 28리, 만보교(萬寶橋) 6리, 연대하보(煙臺河堡) 4리, 산요포(山腰鋪) 5리, 오리대(五里臺) 5리, 십리하보(十里河堡) 7리. 모두 27리, 판교보(板橋堡) 5리, 장성참(長盛站) 5리, 고가자(古家子) 5리, 사하보(沙河堡) 6리, 폭교와(暴交哇) 6리, 전장포(氈匠鋪) 4리, 화소교(火燒橋) 2리, 백탑보(白塔堡) 8리. 모두 40리, 일소대(一所臺) 5리, 혼하보(渾河堡) 5리, 혼하(渾河) 1리. 일명은 야리강(耶里江), 심양(瀋陽) 9리. 봉천부 성경(奉天府盛京). 모두 20리.
책문에서 심양까지 모두 445리이다.
원당사(願堂寺) 5리, 탑교(塔橋) 7리, 방사촌(方士村) 5리, 장원교(壯元橋) 7리, 영안교(永安橋) 8리. 길 돋우기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모두 30리, 쌍가자(雙家子) 7리, 대방신(大方身) 10리, 마도교(磨刀橋) 5리, 백변참(白邊站) 10리. 모두 30리, 신농참(神農站) 12리, 고가자(孤家子) 13리. 모두 25리, 주류하(周流河) 10리. 일명 거류하(巨流河), 거류하보(巨流河堡) 5리. 모두 15리, 서점자(西店子) 2리, 오도하(五道河) 3리, 사방대(四方臺) 7리, 곽가둔(郭家屯) 4리, 신민둔(新民屯) 4리, 소황기보(小黃旗堡) 4리, 대황기보(大黃旗堡) 8리. 모두 32리, 유하구(柳河溝) 8리, 석사자(石獅子) 15리, 영방(營房) 10리. 일명 고성자(古城子), 백기보(白旗堡) 5리. 모두 38리, 소백기보(小白旗堡) 12리, 신방(新方) 5리, 일판문(一板門) 13리. 일명 반랍리(半拉里). 모두 30리, 곡산둔(靠山屯) 8리. 일명 왕가장(王家莊). 또 왕팔개자(王八蓋字)가 있다, 이도정자(二道井子) 12리. 모두 20리, 신은사(神隱寺) 8리, 신점(新店) 22리. 일명 호가와붕(胡家窩棚). 여기와서 길 돋우기가 끝났다. 모두 30리, 상자정(上子井) 2리, 십리강자(十里扛子) 8리, 연대(煙臺) 5리, 소흑산(小黑山) 5리. 모두 20리, 양장하(羊腸河) 12리, 중안보(中安堡) 18리. 모두 30리, 우가대(于家垈) 5리, 조양포(朝陽鋪) 3리, 팔망대(八望臺) 3리, 구점리(舊店里) 3리, 이대자(二臺子) 6리, 고가자(古家子) 3리, 대고가자(大古家子) 5리, 초가점(焦家店) 5리, 광녕참(廣寧站) 5리. 모두 38리, 흥륭점(興隆店) 5리, 쌍하보(雙河堡) 5리, 장진보(壯鎭堡) 5리, 상흥점(常興店) 5리, 삼대자(三臺子) 2리, 이대자(二臺子) 6리, 여양역(閭陽驛) 12리. 무량옥(無梁屋 들보 없는 집)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모두 40리, 이대자(二臺子) 10리, 삼대자(三臺子) 5리, 사대자(四臺子) 5리, 오대자(五臺子) 5리, 망산보(望山堡) 5리, 석산참(石山站) 10리. 일명 십삼산(十三山). 모두 40리, 삼대자(三臺子) 4리, 독로파점(禿老婆店) 8리. 일명 이대자(二臺子), 대릉하(大凌河) 13리, 대릉하보(大凌河堡) 5리. 모두 30리, 사동비(四同碑) 12리, 쌍양점(雙陽店) 8리. 모두 20리, 소릉하보(小凌河堡) 5리, 소릉하교(小凌河橋) 3리, 서점자(西店子) 1리. 일명 수수영(水手營), 송산보(松山堡) 14리, 관마산(官馬山) 13리. 관마총(官馬塚)이 있다, 행산보(杏山堡) 5리, 십리하(十里河) 8리, 고교보(高橋堡) 10리. 모두 59리, 주가보(朱家堡) 2리, 홍기영(紅旗營) 5리, 탑산소(塔山所) 5리. 날씨가 맑을 때에는 명호도(鳴呼島)가 바라보인다, 주사하(朱沙河) 5리, 조리점(罩罹店) 2리, 조리산(罩罹山) 1리, 이대자(二臺子) 4리, 연산역(連山驛) 6리. 모두 30리, 연대하(煙臺河) 5리. 일명 오리하(五里河), 장춘하(長春河) 5리, 쌍수보(雙樹堡) 1리, 쌍석령(雙石嶺) 1리, 건시령(乾柴嶺) 1리, 동팔리보(東八里堡) 8리. 계명산(鷄鳴山)이 바라보인다. 산에 구혈대(嘔血臺)가 있다, 동두대(東頭臺) 2리, 영녕사(永寧寺) 1리, 영원위(寧遠衛) 5리. 모두 30리, 청돈대(靑墩臺) 6리. 해돋이를 볼 수 있다, 조장역(曹莊驛) 6리, 칠리파(七里陂) 6리, 오리교(五里橋) 7리, 중우소(中右所) 5리. 일명 사하소(沙河所). 모두 30리, 건구대(乾溝臺) 5리, 연대하(煙臺河) 5리, 반랍점(半拉店) 5리, 망해점(望海店) 2리, 곡척하(曲尺河) 5리, 삼리교(三里橋) 7리, 동관역(東關驛) 3리. 모두 30리, 이대자 5리, 삼대자 5리, 육도하교(六渡河橋) 5리, 중후소(中後所) 3리, 일대자(一臺子) 5리, 이대자 4리. 폐지된 연대(煙臺)가 있다. 해돋이를 볼 수 있다, 삼대자(三臺子) 3리, 사하참(沙河站) 6리, 쌍돈대(雙墩臺) 4리, 판교(板橋) 4리, 섭가분(葉家墳) 4리, 구어하둔(口魚河屯) 2리, 구어하교 3리, 양수하(亮水河) 7리. 모두 60리, 만정포(滿井鋪) 4리, 전둔위(前屯衛) 4리, 왕가대(王家臺) 5리, 망강대(望江臺) 3리, 왕제구(王濟溝) 4리, 두봉하(頭封河) 5리, 고령역(高嶺驛) 5리, 소송령구(小松嶺溝) 3리, 대송령구 5리, 중전소(中前所) 7리. 모두 45리, 대석교(大石橋) 7리, 양수호(兩水湖) 3리, 노군둔(老軍屯) 5리, 왕가장(王家莊) 2리, 팔리보(八里堡) 10리. 강녀묘(姜女廟)가 있다, 사방성자(四方城子) 5리. 장대(將臺)가 있다, 이리점(二里店) 1리, 산해관(山海關) 2리. 모두 35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 787리이다.
심하(深河) 1리, 오리대(五里臺) 4리, 홍화점(紅花店) 3리. 돈대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모두 8리, 혁가령(奕家嶺) 2리, 오가영(吳家塋) 4리, 이십리보와(二十里堡窪) 6리, 원가장(苑家莊) 10리, 탕하언(湯河堰) 3리, 대리영(大理營) 7리. 일명 낭하(浪河), 왕가령(王家嶺) 2리, 봉황점(鳳凰店) 3리. 모두 37리, 망해점(望海店) 10리, 심하역(深河驛) 5리, 고대령보(高臺嶺堡) 8리, 강자점(綱子店) 2리. 일명 왕가점(王家店), 마붕산(馬棚山) 6리, 석자하(石子河) 1리, 유관(楡關) 3리. 모두 35리, 송가장(宋家莊) 3리, 상백석보(上白石堡) 3리, 하백석보 3리, 오가령(吳家嶺) 4리, 무령현(撫寧縣) 8리. 문필봉(文筆峯)이 서남에 있다, 양하(羊河) 1리, 오리보(五里堡) 4리, 노가점(盧家店) 2리, 십리대보(十里臺堡) 3리, 노봉구(蘆峯口) 5리, 다붕암(茶棚菴) 6리, 음마하(飮馬河) 3리, 배음보(背陰堡) 3리. 모두 47리, 쌍망보(雙望堡) 8리, 오달자점(吳㺚子店) 3리, 요참(腰站) 3리, 부락령(部落嶺) 5리, 이십보(二十堡) 2리, 십팔리보(十八里堡) 3리, 백사하(白沙河) 7리, 여자조(驢子槽) 8리, 누택원(漏澤園) 3리, 영평부(永平府) 2리. 옛 우북평(右北平). 모두 44리, 청룡하(靑龍河) 1리, 남구점(南坵店) 4리, 난하(灤河) 1리, 압자하(鴨子河) 4리, 범가점(范家店) 6리, 망부대(望夫臺) 4리, 안하점(安河店) 8리, 적홍보(赤紅堡) 6리, 야계이(野鷄坨) 6리. 모두 40리, 사하둔(沙河屯) 8리, 장가장(張家莊) 8리, 사하역 4리. 모두 20리, 홍묘(紅廟) 5리. 일명 삼관묘(三官廟), 마포영(馬鋪營) 5리, 칠가령(七家嶺) 5리, 신점자(新店子) 5리, 건하초(乾河草) 5리, 왕가점(王家店) 5리, 신평점(新平店) 4리, 장가점(張家店) 2리, 강우교(扛牛橋) 4리, 연화지(蓮花池) 1리, 청룡교(靑龍橋) 9리, 진자점(榛子店) 1리. 모두 50리, 연돈대(煙墩臺) 10리, 백초와(白草窪) 7리, 철성감(鐵城坎) 3리, 우란산(牛欄山) 5리, 소령하(小鈴河) 4리, 판교(板橋) 1리, 은성보(銀城堡) 5리, 오리대(五里臺) 10리, 풍윤현(豐潤縣) 5리. 모두 50리, 조가점(趙家店) 5리, 장가점(張家店) 1리, 환향하(還鄕河) 2리, 노가점(魯家店) 2리, 고려보(高麗堡) 5리. 논[水田]이 있다, 사자하(沙子河) 5리, 연계보(軟鷄堡) 5리, 신방(新坊) 3리, 이가점(李家店) 5리, 사류하(沙流河) 7리. 모두 40리, 양수교(兩水橋) 10리, 양가점(兩家店) 5리, 이십리보(二十里堡) 5리, 십오리둔(十五里屯) 5리, 동팔리보(東八里堡) 7리, 용지암(龍池菴) 3리, 옥전현(玉田縣) 5리. 모두 40리, 서팔리보(西八里堡) 8리, 황가점(黃家店) 7리, 채정교(彩亭橋) 5리, 대수고점(大樹枯店) 1리, 봉산점(蜂山店) 4리, 나산점(螺山店) 3리. 일명 송가장(宋家莊), 제자산(梯子山) 7리, 별산(鱉山) 5리. 모두 50리, 이리점(二里店) 2리, 현거(現渠) 8리, 삼가장(三家莊) 3리, 운전사(雲田寺) 4리, 취병산(翠屛山) 3리, 팔리보(八里堡) 2리, 어양교(漁陽橋) 3리. 일명 동오리교(東五里橋), 관일장(貫日莊) 2리, 계주(薊州) 3리. 옛 어양(漁陽). 북쪽에 반산(盤山)이 있다. 모두 30리, 오리교(五里橋) 5리, 서가점(徐家店) 10리, 방균점(邦均店) 15리. 모두 30리, 백간참(白澗站) 12리. 미고암(尾姑菴)이 있다, 공락점(公樂店) 5리, 단가령(段家嶺) 3리, 석비포(石碑鋪) 10리, 호타하(滹沱河) 5리. 일명 관하교(館河橋), 삼하현(三河縣) 5리. 옛 임구현(臨駒縣). 모두 40리, 조림장(棗林莊) 6리, 백부도(白浮圖) 6리, 신점(新店) 6리, 황친장(皇親莊) 6리, 하점(夏店) 6리, 유하둔 6리, 마기핍(馬起乏) 6리. 일명 마기포(馬起鋪), 연교보(燕郊堡) 8리. 모두 50리, 방가장(方家莊) 3리. 일명 사고장(師古莊), 등가장(滕家莊) 5리, 호가점(胡家店) 5리, 습가장(習家莊) 2리, 백하(白河) 2리, 통주(通州) 1리. 돌길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모두 17리, 팔리교(八里橋) 8리. 일명 영통교(永通橋), 관가장(管家莊) 2리, 양가갑(楊家閘) 2리, 삼간방(三間房) 3리, 정부장(定府莊) 3리, 대왕장(大王莊) 2리. 모두 20리, 태평점(太平店) 2리, 십리보(十里堡) 3리, 팔리보(八里堡) 2리, 홍문(紅門) 3리, 미륵원(彌勒院) 3리, 동악묘(東岳廟) 5리, 조양문 2리. 일명 제화문(齊華門) 모두 20리.
산해관에서 황성(皇城)까지 667리. 통계 3609리이다. 혹 성엣장이나 수렁이나 물이 불어날 때를 만나면 흔히 우회(迂回)해서 갔다.
6. 언어(言語)
중국 사람의 말은 결국 글이었다. 비록 종일토록 마구 말해도 그 뜻을 찾아 새겨보면 다 ‘입 밖에 내는 말은 글이 된다.[出口成章]’고 할 만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말과 글을 두 가지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그 패관잡설(稗官雜說)을 중국 사람과 읽어 보노라면, 평생에 일자무식한 자라도 옆에 앉아서 듣는데 꼭 누워서 창인(傖人)의 말을 듣는 것같이 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언문 서책을 읽으면 못 알아듣는 자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말과 글이 같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자는 뜻글자이므로 말과 글이 다름은 우리와 다름 아니다. 저자가 잘못 인식하고 있다. 박지원은 이에 대해서 ‘우리는 글자도 잘 알고 문장의 뜻을 중히 여기는데 반하여 중국인들은 그 뜻은 몰라도 말로 외워서 능수능란하게 이야기 한다. 그 문장은 잘 쓰지도 못한다’고 한 바 있다. 박지원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7. 호번(胡藩)
몽고는 명 나라 때 달단(韃靼)이라 일컬었다. 그 지역은 북으로 사막 끝까지인데 38부(部)로 나뉘었고, 다 해마다 조공(朝貢)을 바치므로 장사와 나그네가 길에 가득하다. 남자는 황녀(皇女)에게 장가들고 여자는 친왕(親王)에게 시집가서 금옥 인장(印章)을 찬 자가 전후로 잇달았다. 그 사람들은 다 무례하고 사납기가 여러 오랑캐 가운데 더욱 심하다. 풍속이 온돌 만들기를 잘하나 거처에는 궁실이 없다. 부락이 강성하여 예부터 제어하기 어려웠다. 다만 공경히 부처를 받들어 삼가서 죽고 사는 것을 그로써 하므로 청인이 그 풍속을 따라서 달랜다. 그래서 그들의 승려들을 불러다가 여러 원당(願堂) 및 백탑(白塔)ㆍ오탑(五塔) 등의 절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여 매우 후히 대접한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흔히 높은 품질(品秩)로 총애 받는다. 또 황제가 황색 옷을 입는데 몽고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다 황색 옷 입는 것을 허락한다. 비록 그들의 숭상하는 풍속이 그렇다고는 하나 황제와 대등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가 한여름이면 열하(熱河)에 머물면서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일컬으나, 그 실은 스스로 방수(防守)하는 것이다.
회국자(回國子)는 무릇 12부(部)이니, 합밀(哈密)ㆍ벽전토로번(闢展土魯藩)ㆍ합랍사랍(哈拉沙拉)ㆍ고지기[庫直]ㆍ사아이(沙雅爾)ㆍ새리목(賽里木)ㆍ배(拜)ㆍ아극소(阿克蘇)ㆍ오십(五什)ㆍ객승랍이(喀升臘爾)ㆍ대이강(蔕爾羗)ㆍ화전(和闐)인데, 또한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한다. 바다 안에 있고 동북으로 육지와 통했다. 공로(貢路)가 멀어서, 육지로 무릇 5개월을 지나야 북경에 도착된다. 그래서 공사(貢使)가 해마다 한 번 오는데 대임자가 이른 뒤에야 귀국한다. 강희(康煕) 16년에 회자(回子)가 명을 거역하자, 드디어 군사를 내어 토벌하게 하니 그 왕을 사로잡아 경사(京師)에 바치매, 관사(館舍)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그 딸을 후궁(後宮)으로 맞아들여 귀비(貴妃)로 봉하였다. 귀비가 늘 그 아비를 보려 하므로 이에 궁성 서쪽에 회자관(回子館)과 마주 보게 누각을 지어 곧 누각에 올라서 그 아비를 보게 했다. 그 뒤에 그 왕은 돌려보내고 그 종인(從人)을 볼모로 남겨 두었는데, 번갈아 가며 교대로 처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지금까지 상례가 되었다. 관은 서문 밖에 있다. 관문은 3첨(簷)으로 높이 올렸는데, 옆에서 보면 반쯤 지은 집[半屋]과 같아서 곧 쓰러질 듯하지만, 정면에서 보면 먹줄 튀겨 놓은 것처럼 반듯하고, 담과 벽에 틈이나 모서리가 거의 없다. 관문 안에 한 채의 원각(圓閣)이 있어 위에 금정(金頂)을 박았는데, 그것은 곧 신을 모신 곳이다. 그들은 눈이 우묵하고 얼굴이 검으며 수염이 더부룩한데, 가까이 가면 노린내가 난다. 조회 때마다 우리 사신의 뒤에 선다. 의복과 모자는 청인과 같으나, 관소에 있을 때나 다닐 때에 쓰는 모자로는 둥글게 말아 묶은 홍전(紅氈)을 머리 위에 세워 쓰는데 그 끝이 차츰 뾰족하다. 청인은 그들을 매우 더럽게 여겨 말을 붙이는 일이 없다. 그 여자는 알롱달롱한 장옷을 입고 머리를 땋아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간혹 미인이 있다고 한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고도 이름 한다. 그 나라는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과 교통하여 상인이 해마다 온다. 관소는 옥하관(玉河館)의 곁에 있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 높은 코에 천성이 사나워서 흔히 거리에서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건륭(乾隆) 때 그중의 몇 사람을 찢어 죽이게 하였더니, 그 뒤부터 자못 두려워하여 규칙을 지킨다고 한다. 청인은 그들을 천하게 여겨 개돼지로 대우한다. 그 나라에서 나는 석경(石鏡)이 가장 좋다. 섬라(暹羅 태국)는 본래 두 나라의 이름이다. 섬(暹)은 한(漢) 나라 적미(赤眉)의 종족으로 원(元) 나라 때 하나의 나라로 합쳐졌다. 점성(占城 참파 Champa, 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인도차이나 남동 기슭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 극남(極南)에 위치해 있는데 뱃길로 8000리 남짓 와서 광동(廣東)에 이르러 육지에 오르고, 광동에서 북경까지 7000리 남짓하며, 5년에 한 번 조공(朝貢)을 바친다. 의복은 대개 청인과 같다. 사신은 넷인데 의복 색깔은 검붉고 금화(金花)를 수놓았다. 머리에는 외뿔로 된 금관을 썼는데 길이는 1척쯤 되며 그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다. 모두 머리를 깎아서 번쩍번쩍하고 몸집은 작고 모습은 경박하여 승려들과 같다. 그 나라는 강남에 위치해 있어 겨울에도 춥지 않아 모두 홑옷을 입고 가죽이나 솜 따위 장식이 없다. 나라 안에서 쓰는 문자는 다 범패(梵唄 불경 문자) 따위이다. 중국에 바치는 공물은 다음과 같다.황제 : 용연향(龍涎香) 1근, 침향(沈香) 2근, 백단향(白檀香) 100근, 백교향(白膠香) 100근, 강진향(降鎭香) 300근, 금강찬(金剛鑚) 7냥, 상빙편(上氷片) 1근, 중빙편(中氷片) 2근, 장뇌(獐腦) 100근, 대풍자(大楓子) 300근, 두구(豆寇) 300근, 필발(蓽橃) 100근, 계피(桂皮) 100근, 감밀피(甘蜜皮) 100근, 취조피(翠鳥皮) 600장, 공작 꼬리 10병(屛), 상아(象牙) 12지(枝), 서각(犀角 무소뿔) 6개, 서양담(西洋毯) 2상(床), 서양 홍포(紅布) 10필, 오목(烏木) 300근, 소목(蘇木) 3000근.황후 : 방물의 여러 가지는 모두 같으나 근량(斤兩)은 황제의 반으로 줄인다.황후에게는 ‘황궁(皇宮)’이라 칭하고, 황제에게는 역시 번자(番字)로 된 금엽표문(金葉表文) 1통[道], 한자(漢子)로 된 표문 1통, 표문정(表文亭) 1좌(座)가 있다.중국에서 주는 상사(賞賜)는 다음과 같다.국왕 : 금(錦) 8필, 직조단 금단(錦緞) 8필, 나단(羅緞) 8필, 사(紗) 12필, 단(緞) 18필, 나(羅) 18필.왕비 : 금(錦)만 없고 그 나머지는 국왕의 반으로 줄인다.사신 4인 : 나단 각 3필씩, 단 각 8필씩, 나 각 5필씩, 초(綃) 각 5필씩, 주(紬) 각 2필씩, 포(布) 각 1필씩.상통사(上通事) 2명 : 단 각 5필씩, 나 각 5필씩, 견(絹) 각 5필씩.종인(從人) 19명 : 견 각 3필씩, 포 각 8필씩.반송관(伴送官) 2원(員) : 팽단(彭緞) 도포감 각 1건.《일통지(一統志)》에는,
“섬라국은 침략을 숭상하고 기후가 올곧지 못하다. 부인들은 뜻과 도량이 남자보다 웃돌아, 나라에 계산이나 의논이 있을 적마다 형법의 경중과 전곡(錢穀)의 출납을 모두 결정한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섬라국에서는 40세 이상이 된 남자가 만약 성을 내어 얼굴빛에 나타내면 그 나라 사람들이 배척하여 사람으로 치지 않으므로 괴로움을 참아 내서, 갑자기 불평스런 일을 당하더라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멍청히 있다.
건륭(乾隆) 말년에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알 수 없는, 모두 붉은 머리털에 눈빛이 불빛처럼 번쩍이며, 의복이 이상하고 걸음걸이가 날랜 사람 300여 인이 남방으로부터 왔는데, 군현에서 다 알아내지 못하였다. 연경에 도착하자 100여 인이 홀연히 병들어 죽고 그 나머지 200여 인은 스스로 예부에 나아가서 황제에게 조현(朝現)할 것을 청했다. 건륭 황제가 곧 인견(引見)하는데 그때 시위가 삼엄했다. 그들 중에 13세 먹은 아이가 가장 총명했는데, 먼저 화신(和珅)의 앞에 나아가서 절하고 꿇어앉았다. 대신 아숙가(阿肅呵)가 꾸짖으니, ‘장차 폐하를 알현하는 예절을 물으려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좋지 않게 여겨 도성 문밖으로 내쫓게 하였다. 그들은 성문을 나오자마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하였다.한번은 《명말기이(明末記異)》를 보니,
“만력(萬曆) 말년에 어사 섭영성(葉永盛)이 강우(江右)로 안찰(按察)하러 나갔을 적에 유사(有司)가 광객(狂客) 1군(群)을 바치고 스스로 말하기를, ‘능히 황백(黃白)의 일을 하며, 실컷 마시고 오락하며, 시장 물건은 매우 사치스러워서 주옥과 비단[綺繒]을 가져다 치르되 내야 할 값보다 훨씬 많이 치릅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홀연히 보이지 않아 그 역상(逆裳)에 대해 힐문하려면 없어졌다가 아침에 다시 오니 매우 괴이합니다. 크게 수색하기를 청합니다.’ 했으나 섭영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앞에 오게 했더니, 강우(江右) 지방 말을 능히 하고, 스스로 말하되 ‘해외의 부제국(浮提國) 사람이라.’ 하며, 또 황백의 일을 숨기지 않았다. 손에는 돌 하나를 가졌는데 수정과 흡사하고 길이는 7, 8척쯤 된다.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전후 상하의 물건이 그 안에 비쳐 털끝만 한 것도 보인다. 또 금으로 아로새긴 작은 함 하나를 가졌다. 그 안에 경서(經書)가 있는데 검은 종이에 녹색 글자로 《반야경(般若經)》의 말과 같으며 다 보고나면, 글자가 날아가 버린다. 그 사람이 두 가지를 바치려 하므로 섭영성은, ‘너희들은 반드시 이인(異人)일 것이다. 나는 바치는 물건을 받지 않겠으니, 속히 우리 지역을 떠나가 우리 백성을 미혹시키지 말라.’ 하니, 그들은 각각 머리를 조아리며 가 버렸다.”
하였다.
대개, 해외에 부제국(浮提國)이 있다. 그들은 다 비선(飛仙)처럼 놀기를 좋아하여 천하를 돌아다닌다. 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의 말을 해 내며, 그 고장의 옷을 입고 그 고장의 음식을 먹는다. 술을 좋아하여 한없이 마시며, 또한 혹 양대별관(陽臺別館)에서 정을 풀기도 한다. 그 나라로 돌아가고 싶으면 한번 숨쉴 사이에 만 리를 갈 수 있어 홀연히 날아가 버린다고 한다. 이것은 황당한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와 같다면 그 300인 역시 부제국 사람이 아닌가?강희(康煕) 을미 연간에 우리나라 사람이, 산해관(山海關) 밖에서 한 여인과 동행하는 흑진국(黑眞國)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대개, 영고탑(寧古塔) 북동쪽 수천 리 지점에 빙해(氷海)가 있어 5년에 한번 얼음이 어는데, 거기에 ‘흑진국’이란 나라가 있다. 육지와 교통한 적이 없었는데, 강희 을미 10여 년 전에 흑진국 사람이 홀연히 얼음을 건너 서쪽 해안에 왔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몰랐다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사람이었다. 온몸에 짐승 가죽을 두르고 머리와 얼굴만 내놓았는데, 머리털과 수염이 양털처럼 꼬불꼬불했다. 변경 사람이 연경(燕京)으로 생포해서 보냈다. 황제가 그를 불러 보고 밥을 먹이니, 먹을 줄 모르고 오직 생선만 먹었다. 온갖 물건을 그의 앞에 진열하여 가지고 싶어 하는 바를 보려고 했으나 끝내 원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 여인을 데려가다 보였더니 곧 기꺼이 껴안았다. 이에 황제가 총명한 여자를 골라 짝을 지어 주게 했다. 그리고 영리한 시위(侍衛) 5인을 시켜 여인과 함께 데리고 환국하게 하되, 오곡의 종자와 농기구를 주어 농사를 가르치게 했다. 그 뒤 5년 만에 그는 그 여자와 함께 다시 빙해를 건너와서 사은(謝恩)하되, 주먹만 한 큰 구슬 몇 개, 1장(丈)이 넘는 초피(貂皮)를 가지고 와서 공물로 바쳤다. 그 여자의 말에,
“그 나라는 바다 속에 있는데 임금이 없다. 사람은, 키가 큰 자는 3장(丈), 작아도 1장 남짓 이상은 된다. 오직 사냥을 일삼고, 산 생선과 자라를 먹으며, 주옥이 바다 안에 가득하여 광채가 헤아릴 수 없다.”
했다 한다. 안남국(安南國)은 옛날 남교(南交)의 땅이다. 진(秦) 나라 때에는 상군(象郡)을 두었고, 한(漢) 나라 때에는 교지(交趾)ㆍ일남(日南)ㆍ구진(九眞) 세 군을 두었으며, 수(隋)ㆍ당(唐) 나라 때의 도독 도호부(都督都護府)를 거쳐, 오대(五代) 양(梁) 나라 때에는 토호 곡승(曲承)이 그 땅을 점유하였다가, 뒤에 유은(劉隱)이 합병(合倂)하였다. 오대 한(漢) 나라 때에 관내가 크게 어지러워져 정부(丁部)를 추대하여 주수(州帥)로 삼았고, 그 아들 연(璉)ㆍ선(璿)이 서로 계승하였는데, 선은 그의 부하 여환(黎桓)에게 찬탈당하였다. 그 뒤 이공온(李公蘊)이 여씨를 찬탈하고, 진일조(陳日照)가 다시 이씨를 찬탈하여 중국에 신하로 복종하므로 교지군왕(交趾郡王)으로 봉해 주고, 원(元) 나라 때에는 일조의 아들 광병(光昺)을 안남왕(安南王)으로 삼았으며, 그의 손자 일등(日燈)에게 와서 명(明) 홍무(洪武) 초에 귀부(歸附)하여 일황(日熀)에게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그의 신하 여계려(黎季黎)가 그를 찬탈하고 위호(僞號)를 칭하였다. 그래서 영락(永樂) 초에 대장을 보내어 토벌하여 여계려 부자를 사로잡아오고 진씨(陳氏)의 후손을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자,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홍희(洪煕) 초기에 와서 여씨의 후손 여이(黎利)가 스스로 왕위에 서서 사죄하고 살려 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봉해 주어 그 자손이 세습(世襲)하고 있었다. 경술년(1790, 정조 14) 봄, 돌아오는 사신 별단(別單)에,
“안남왕 여유기(黎維祈)가 나라를 잃고 내부(內附)하자 건륭 황제가 경사(京師)에 사관을 정해 주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광남(廣南) 사람 완혜(阮惠)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광평(光平)으로 개명한 다음,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또 ‘장차 입조(入朝)하려 합니다.’ 하므로, 건륭 황제가 안남국왕으로 삼았습니다.”
하였고, 신해년 겨울 별사(別使)가 돌아와서 전하기를, ‘안남국왕 완광평이 입조하였다.’ 하였다.그들 나라 도성에서 북경까지는 1만 1160리이다.중국 사람이 일찍이 진랍국(眞臘國)의 부귀에 대해 말하기를,
“진랍국은 지방이 7000여 리요 점성(占城)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국왕은 3일에 한 번씩 조회를 보는데 오향칠보상(五香七寶床)에 앉고 그 위에 보물로 꾸민 보장(寶帳)을 쳤다. 조하길패(朝霞吉貝)를 입는데 온 허리와 배를 감아 아래로 정강이까지 내려온다. 머리에는 금보화관(金寶花冠)을 쓰고 진주 영락(纓絡)을 두르며,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귀에는 귀고리를 달며, 항상 흰 전(氈)을 입는다. 왕에게 조회 오는 신하는, 섬돌 아래에서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다섯 번 호창한 다음, 섬돌에 올라 와서는 꿇어앉아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안는다. 왕의 좌석을 빙 둘러앉아 정사를 의논하고, 의논을 마치면 꿇어 엎드린 뒤에 나간다.
그 나라의 도성은 주위가 70여 리이고 전우(殿宇)는 30여 개소나 되어 꽤 장려(壯麗)하다. 그 나라의 왕 및 귀인이 가지는 물건은 흔히 금옥으로 장식한다.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고 토산이 풍부하다. 남녀 모두 머리를 깎고, 여자는 10세만 되면 시집가는데, 비단으로 몸을 휘감고 눈썹과 이마에 붉은 칠을 한다.”
하였다. 농내국(農耐國)은 안남국의 부용(附庸 속국)이다. 그 나라 군장(君長) 원복영(院福映)이 안남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표문(表文)을 올려 봉왕(封王)해 주기를 청하되 남월(南越)로 국명을 하고자 하니, 부신(部臣)이 월(越) 자를 위에 놓도록 논박하여 ‘월남왕’으로 봉하였다. 이것은 계해년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의 수본(手本) 안에 기록된 것이다.지금 중국 지방은, 서북은 감숙(甘肅)까지, 서남은 면전(緬甸 미얀마)까지 남쪽은 운귀(雲貴)까지, 동쪽은 올랄선창(兀喇船廠)이 있으니 곧 청 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황명(皇明)이 통일한 지역 이외에 서성(西城)ㆍ토번(吐蕃)ㆍ돌궐(突厥) 등의 지역이 다 판도로 들어왔으니, 영토의 큼이 전고(前古)에 으뜸이고 조공하는 나라도 전대에 비해 배나 된다. 점성(占城)ㆍ우전(于闐)ㆍ조와(爪哇 인도네시아의 자바)ㆍ유구(琉球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ㆍ안남(安南)ㆍ섬라(暹羅)ㆍ진랍(眞臘)ㆍ발니(浡泥)ㆍ소연(蘇椽)ㆍ타회(打回)ㆍ안정(安定)ㆍ합밀(哈密) 등의 나라가 가장 드러난 나라다. 한 해 걸러, 혹은 3년, 혹은 5년 만에 한 번 오기도 하고, 10년, 혹은 1세(世 약 30년)에 한 번 오는 자도 있다.
●우리나라는 연 3-4차례 이상 사신이 파견되었다. 특히 청은 마음속으로 섬기지도 않으면서 사절은 여전히 파견되었다. 외교에 반드시 필요한 사절단이자 무역거래요 문화교류였기 때문이다.
'한국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화봉사고려도경(서긍) (0) | 2017.05.23 |
---|---|
계원필경집(최치원) (0) | 2017.05.17 |
경세유표(정약용) (0) | 2017.05.17 |
가정집(이곡) (0) | 2017.05.02 |
부연일기(김노상) (0) | 2011.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