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가정집(이곡)

청담(靑潭) 2017. 5. 2. 09:48

 

가정집(稼亭集)

이곡(李穀 1298-135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 1328-1396)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1287-1367)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가정집』은 고려 말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 중요한 책임에도 지금까지 읽지를 못했다. 『대동야승』을 잠시 중단하고 『가정집』 읽기를 시작한다.

 

 

1. 가정집 제1권 잡저(雜著)

●책문(策問)

○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나오는 팔정(八政) 중에 식(食)이 첫자리를 차지하고 화(貨)가 다음을 차지한다. 대개 식은 백성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지만, 소위 화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화가 전폐(錢幣)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사대(四代)의 글에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태공망(太公望)이 구부(九府)와 환법(圜法)을 설치할 적에 전(錢)이 그중에 하나를 차지하였다. 그 제도는 어느 시대부터 비롯된 것인가? 관자(管子 관중(管仲))는 말하기를 “탕(湯)은 장산(莊山)의 금으로 화폐를 만들었고, 우(禹)는 역산(歷山)의 금으로 화폐를 주조했는데, 이는 당초에 흉년을 당하여 백성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곡백(穀帛)이 본이요 전폐는 말이라고 할 것인데, 후세에는 끝내 말을 중시하고 본을 경시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폐의 크기와 무게가 누차 바뀐 사실은 사책을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소위 삼수전(三銖錢)과 반량전(半兩錢)과 오수전(五銖錢) 중에서 어느 것이 적당하다고 하겠는가? 선유 중에는 전폐의 폐단을 논하면서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곡백을 사용하려고 한 자도 있었다. 과연 그 주장대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인가?

저폐(楮幣 지폐)가 성행하면서부터 전폐는 시행되지 않았는데, 그 법은 또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가? 원래 화폐가 유래한 바를 살펴본다면, 대개 전폐를 모(母)로 삼고 저폐를 자(子)로 삼았다. 이 역시 당시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임시 조처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전폐를 폐기하고 저폐만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삼가 생각건대 원(元)나라의 공업(功業)이 성취되고 정치가 안정되자 예악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전폐의 경우만은 유독 근세의 누습을 답습하였으니, 그래도 되겠는가? 국가의 이익을 꾀하는 신하와 정책을 건의하는 인사들은 매양 “전폐와 저폐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경중을 균형 있게 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도 전폐를 끝내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 국가에서 전폐 제도를 시행하지 않아도 민간에서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사는 금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백성에게 편리하기 때문인가?

전폐의 경우는 금속을 제련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도 사적으로 위조하는 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저폐의 경우는 종이에 인쇄하기가 쉽기 때문에 위조하는 자들이 더욱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을 극형으로 다스려도 금할 수가 없을 텐데, 장차 이 폐단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본국은 예전에 동제(銅製) 화폐는 쓰지 않고 오직 은제(銀製) 화폐만 썼다. 그런데 그 법이 오래도록 시행되면서 폐단이 생겨 날로 경시되기에 이른 나머지 지금에 와서는 아예 폐기된 채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근래에 국가의 재정이 점차 고갈되고 백성의 생활이 점차 군색해지는 이유가 은제 화폐를 폐기했기 때문은 아닌가?

 

●죽부인전(竹夫人傳)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다.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로, 계보는 창랑씨(蒼筤氏)에서 나왔다. 그의 선조는 음률을 알았으므로 황제(黃帝)가 발탁하여 음악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우순(虞舜) 시대의 소(簫)도 바로 그의 후손이다.

창랑씨가 곤륜산(崑崙山) 북쪽에서 진방(震方 동방)으로 이주하였는데, 복희씨(伏羲氏) 시대에 이르러 위씨(韋氏)와 함께 문적(文籍)을 주관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자손들도 모두 가업을 지키면서 대대로 사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진(秦)나라가 포학하게 굴면서 이사(李斯)의 계책을 채용하여 서책을 불사르고 유자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인 뒤부터 창랑씨의 후손도 차츰 쇠미해졌다.

그러다가 한(漢)나라 때에 와서 채륜(蔡倫)의 가객(家客) 중에 저생(楮生)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서 붓을 가지고 때때로 죽씨(竹氏)와 어울려 노닐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경박한 데다가 점차로 젖어들 듯한 참소를 잘하였는데, 죽씨의 강직한 성격을 미워한 나머지 남모르게 좀먹고 헐어서 마침내는 그 직임을 탈취하였다.

주(周)나라의 간(竿 낚싯대)도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太公望)과 함께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였는데, 태공이 갈고랑이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간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큰 낚시질을 할 때에는 갈고랑이 없이 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을 낚느냐 큰 것을 낚느냐 하는 것은 꼬부라진 갈고리를 매다느냐 매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갈고리 없는 낚시를 해야만 나라를 낚을 수 있지, 갈고리 있는 낚시를 하면 고작 물고기나 잡을 뿐이다.”라고 하니, 태공이 따랐다. 그 뒤에 과연 태공이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나라에 봉해졌는데, 간을 유능하다고 천거하여 위수 가 즉 위빈(渭濱)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죽씨가 위빈에서 일어나게 된 유래이다.

지금도 그곳에 거하는 자손이 여전히 많으니, 예컨대 임(箖)ㆍ어(箊)ㆍ군(䇹)ㆍ정(筳)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양주(楊州)로 옮긴 자들은 소(篠)와 탕(簜)이라고 칭해지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들은 봉(篷)이라고 칭해진다. 죽씨는 대개 재능 면에서 문(文)과 무(武)의 두 갈래로 분류되는데, 대대로 변(籩)ㆍ궤(簋)ㆍ생(笙)ㆍ우(竽) 등 예악에 쓰이는 것들로부터 짐승을 쏘고 물고기를 잡는 미세한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적에 실려 있어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다만 감(䇞)의 경우만은 성품이 우둔하기 그지없어서 속이 꽉 막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그리고 운(篔)의 시대에 와서는 숨어 살면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동생 하나가 있어서 이름을 당(簹)이라고 하였는데, 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속을 텅 비우고 자신을 바르게 유지하며 왕자유(王子猷)와 친하게 지내니, 자유가 “하루도 차군(此君)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므로 차군이 그대로 그의 호가 되었다. 대저 자유는 단정한 사람이니, 자기의 벗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품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당은 익모(益母)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니, 이 딸이 바로 부인이다. 처녀 시절부터 그 자태가 정숙하였는데,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이란 자가 음탕한 말을 지어내어 집적거리며 유혹하자, 부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해도 절조를 지켜야 하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한번 남에게 그 절조가 꺾인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다시 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의생(宜生)이 부끄러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 어찌 소를 끌고 다니는 무리가 부인을 감히 넘볼 수나 있었겠는가. 부인이 장성하고 나서 송 대부(松大夫)가 예의를 갖춰 청혼을 하니, 부인의 부모가 말하기를 “송공(松公)은 군자다운 사람으로서 그 고상한 절조가 우리 가풍과 서로 대등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 뒤로 부인은 날이 갈수록 성품이 더욱 굳세고 두터워졌다. 간혹 일을 당하여 분변할 적에는 마치 칼을 대는 대로 쪼개지듯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였을 뿐 매선(梅仙)의 서신이 있거나 이씨(李氏)의 무언의 기대에도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감귤 노인이나 살구 아이의 청탁을 들어줄 리 있었겠는가. 간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에 바람을 만나 읊조리고 비를 만나 휘파람 불 적에는 산뜻하고 말쑥한 그 자태를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호사가들이 그 모습을 살짝 화폭에 담아 보배로 전하곤 하였는데, 문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 같은 사람은 더욱 이를 좋아하였다.

송공(松公)은 부인보다 나이가 18세 위였는데, 만년에 신선술을 배우더니 곡성산(穀城山)에서 노닐다가 돌로 몸을 바꾸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몸으로 살면서 왕왕 위풍(衛風)의 시를 노래 부르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마구 흔들려서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성품인지라, 사관이 정확한 연대는 잊어버렸지만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으로 집을 옮긴 뒤로 술에 마냥 취한 끝에 고갈증(枯渴症)에 걸려 마침내 치료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병에 걸린 뒤로는 사람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만년에 들어 절조가 더욱 굳었으므로 향리의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부인과 동성(同姓)인 삼방 절도사(三邦節度使) 유균(惟箘)이 부인의 행실에 대해서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조정에서 절부의 호를 내렸다.

사씨(史氏)는 말한다. 죽씨(竹氏)의 선조는 상세(上世)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모두 재능을 발휘하며 절조를 고수하여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그러니 부인이 현덕을 소유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아, 부인이 이미 군자의 배필이 된데다가 사람들로부터 기특하게 여겨졌는데도 끝내 후사를 두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무지하다는 탄식의 말이 어찌 근거 없이 나온 것이라고 하겠는가.

 

 

2. 가정집 제4권 기(記)

●자그마한 채마밭의 기문

경사(京師)의 복전방(福田坊)에 가옥을 임대하였는데, 거기에 공한지(空閑地)가 있기에 이를 일구어서 자그마한 채마밭을 만들었다. 세로 2장(丈) 반, 가로는 그 3분의 1, 종횡으로 8, 9개의 고랑을 만들고는, 채소 몇 가지를 앞뒤로 때에 맞게 번갈아 심으니, 김치가 떨어져도 보충하기에 충분하였다.

첫해에는 비가 오고 볕이 나는 것이 제때에 맞았기 때문에, 아침에 떡잎이 돋고 저녁에 새잎이 나오면서 잎사귀는 윤기가 돌고 뿌리는 통통하게 살졌는데, 매일 캐어 먹어도 다하지 않았으므로 남는 것을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2년째 되는 해에는 봄과 여름에 조금 가물어서 항아리로 물을 길어다 부어 주기를 마치 옥초(沃焦)처럼 하였지만, 씨를 뿌려도 싹이 트지 않고 싹이 터도 잎이 나오지 않고 잎이 나와도 넓게 펴지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것마저도 벌레가 거의 다 갉아 먹었으니, 뿌리나 줄기가 통통해지기를 감히 기대할 수나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가을 늦게야 개었는데, 흙탕물에 빠지고 진흙과 모래를 뒤집어쓰는가 하면 담장 아래에 있는 땅은 모두 담장의 흙이 무너지면서 덮어 버렸기 때문에, 지난해에 먹은 것과 비교하면 겨우 반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3년째 되는 해에는 올 가뭄과 늦장마가 모두 심했으므로 채마밭에서 캐 먹은 것이 또 지난해의 반절의 반에 불과하였다.

내가 일찍이 나의 자그맣고 가까이 있는 채마밭을 가지고 천하의 규모가 크고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작황을 헤아려 추측해 보면서, 천하의 이익이 태반은 손상을 당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가을철에 과연 흉년이 들어 겨울철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의 많은 백성들이 유랑하며 옮겨 다녔고, 여기에 또 도적 떼가 출몰하였으므로 군대를 내보내 소탕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기민(飢民)이 경사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성 안팎에서 울부짖으며 먹을 것을 구걸하였는데, 땅에 엎어지고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서로 줄을 이었다.

이에 묘당이 노심초사하고 유사가 분주히 주선하여, 구제해 살릴 대책을 강구하며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죽을 쑤어서 먹이기까지 하였지만 죽는 자가 이미 절반을 넘었고, 흉년으로 인해 물가가 또 뛰어올라서 쌀 한 말 값이 8, 9천이나 나갔다.

그런데 지금 또 봄이 끝날 무렵부터 하지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의 채마밭에 심은 채소를 보면 지난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지금부터라도 비가 와 줄지 어쩔지 모르겠다. 풍문으로 얻어 듣건대, 재상이 직접 사관(寺觀)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니, 반드시 비를 내리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조그마한 이 채마밭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역시 때가 이미 늦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지금은 지정(至正) 을유년(1345, 충목왕 1) 5월 17일이다.

 

 

3. 가정집 제5권 기(記)

●주행기(舟行記)

기축년(1349, 충정왕 1) 5월 16일에 진강(鎭江) 원산(圓山)에서 한밤중에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용연(龍淵)에 이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송정(松亭) 전 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 반 사군(潘使君)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하여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저녁에 고성(古城)에 정박하였다.

그 이튿날에 부여성(扶餘城) 낙화암(落花岩)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에 당(唐)나라가 소 장군(蘇將軍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백제(百濟)를 쳤는데, 부여는 바로 그때의 도읍지였다. 당시에 포위를 당하여 상황이 매우 급박해지자 군신(君臣)이 궁녀들을 놔두고 도망쳤는데, 궁녀들이 의리상 당나라 군사들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여 떼를 지어 이 바위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낙화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부여의 감무(監務)가 바위 모퉁이에 있는 승사(僧舍)에 음식을 차렸다.

정오가 지나서 닻줄을 풀고 조금 서쪽으로 가니, 물가에 거대한 암석이 반원(半圓)의 형태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밑에 맑은 물이 잠겨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 와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는데, 강을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염탐하게 하였더니 용이 그 밑의 굴속에 살면서 본국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 사람이 술자(術者)의 계교를 써서 미끼를 던져 낚아 올리기로 하였는데, 용이 처음에는 저항하며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물가의 암석에서부터 그 바위 꼭대기까지 한 자 남짓 되는 깊이와 너비에 길이가 거의 한 길쯤 되는 파인 흔적이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 내어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일러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조룡대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강의 남쪽 언덕에 호암(虎岩)이라는 승사가 있다. 거기에 암석이 벽처럼 서 있고 그 암석을 절이 등지고 있는데, 암석에 마치 바위를 타고 올라온 것 같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다. 그리고 호암의 서쪽에는 1000척(尺) 높이의 단애(斷崖)가 있는데,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 대개 이곳은 백제 시대에 하늘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의 이름을 써서 이 천정대 위에 올려놓고는 군신이 조복(朝服) 차림에 홀(笏)을 쥐고 북쪽 강안의 모래톱 위에 줄지어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하늘이 그 이름 위에 낙점한 뒤에야 뽑아서 썼다고 한다. 그 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이야기가 이와 같다. 호암에서 걸어서 천정대에 오르니, 대에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없고 오직 바위가 반공에 솟아 있을 뿐이었다.

이상이 이른바 부여의 사영(四詠)으로서, 한 지방의 승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래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을 찾아오곤 한다. 나의 고향은 여기에서 겨우 6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소싯적부터 이곳을 지나다닌 것이 또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일찍이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못 자부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그만 농사철을 당한 이때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빈객을 잔뜩 모아 100명 가까이 대접하면서 왔다 갔다 하느라 사흘이나 넘겼으니, 놀기 좋아하는 것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역사책에도 이 일들이 전해지지 않고 상고할 만한 비석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괴이쩍은 느낌이 드니 그 지방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다. 더구나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경치가 귀로 들은 소문보다 훨씬 못한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가 그래서 이렇게 기문을 지어서 후세의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계로 삼는 동시에 나의 허물을 기록하는 바이다.

 

●동유기(東遊記)

지정(至正) 9년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장차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려고 14일에 송도(松都)를 출발하였다.

21일에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산 아래 장양현(長陽縣)에서 묵었다. 이곳은 산과 30여 리 떨어진 지점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조반을 서둘러 먹고 산에 오르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어두웠다.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풍악(楓岳)에 구경 왔다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하였다. 동행한 사람들 모두가 걱정하는 기색을 띠면서 말없이 기도를 드렸다. 산에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음산한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그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절재〔拜岾〕에 오르니 하늘이 활짝 개고 날씨가 청명해졌다. 그래서 안 보이던 눈꺼풀을 떼어 내고 바라보듯 산이 선명하게 보여서 이른바 일 만 이 천봉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었다. 누구든지 이 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재에 올라서면 산이 보이고 산이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에 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재에 예전에는 집이 없었고 돈대(墩臺)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쉴 곳을 마련했었다. 그러다가 지정 정해년(1347, 충목왕 3)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인 강공 금강(姜公金剛)이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한 다음에 이 재 위에다 종각(鐘閣)을 세워서 종을 매달아 놓고는 그 옆에 승려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우뚝 솟은 종각의 단청 빛이 눈 덮인 산에 반사되는 그 경치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이라고 할 만하였다.

아직 정오가 못 된 시각에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사미(沙彌) 한 사람의 인도로 산에 올랐다. 사미가 말하기를 “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이 있는데, 사람들이 사찰을 순례할 때에는 으레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골짜기가 깊고 길이 험합니다. 서북쪽에 정양암(正陽庵)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 태조가 창건한 암자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존상(尊相)을 봉안한 곳입니다. 비록 경사가 급하고 높기는 하지만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충분히 올라갈 수가 있고, 또 이 암자에 오르면 풍악의 여러 봉우리들을 한눈에 다 볼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관음보살(觀音菩薩)이야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느냐.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대개 이 산의 형승을 보려고 해서이다. 그러니 그 암자에 먼저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탈길을 타고 어렵사리 올라갔더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으므로 마음에 매우 흡족하였다. 보덕관음굴에도 가 보고 싶었지만 해가 벌써 지려 하였고 또 산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결국 신림(新林)과 삼불(三佛) 등 여러 암자를 거쳐 시내를 따라 내려와서 어스름 저녁에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해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산을 나왔다.

철원(鐵原)에서는 금강산까지의 거리가 300리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실제로 500여 리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쪽 방향도 강과 산이 중첩한 가운데 길이 유심(幽深)하고 험절(險絶)하기 때문에 금강산을 출입하기 어려운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은 이름이 불경에 나와 있어서 천하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건축(乾竺)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사람들까지도 이따금 와서 보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눈으로 직접 보면 귀로 들은 것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동방의 사람들 중에 서촉(西蜀)의 아미산(峨眉山)이나 남월(南越)의 보타산(補陁山)을 유람한 자가 있었지만, 모두 소문보다 못하더라고 하였다. 내가 아미산이나 보타산은 가 보지 못하였지만, 내가 본 이 금강산은 실로 소문을 능가하였으니, 제아무리 화가가 잘 그려 보려 하고 시인이 잘 표현해 보려 하더라도 이 금강산을 비슷하게라도 형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23일에 장안사에서 천마(天磨)의 서쪽 재를 넘어 또 통구(通溝)까지 와서 묵었다. 무릇 산에 들어가는 자는 천마의 두 재를 거치게 마련인데, 재에 오를 때에는 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재를 넘어서 산에 들어가는 자들이 처음에는 험준하다는 걱정을 하지 않다가, 산에서 일단 재를 넘고 난 뒤에야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쪽 재는 조금 낮은 편이지만 올라가고 내려오는 30여 리의 길이 무척 험하기 때문에 단발령(斷髮嶺)이라고 부른다.

2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와서 하루를 머물렀다. 26일에 철령관(鐵嶺關)을 넘어 복령현(福靈縣)에서 유숙했다. 철령은 본국의 동쪽 요해지로서, 이른바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문을 열 수 없다.”고 하는 곳이다. 그래서 철령 동쪽에 있는 강릉(江陵) 등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고 칭한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반란을 일으킨 원(元)나라 대왕(大王)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의 적도(賊徒)가 패배하여 동쪽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원나라 개원로(開元路) 등의 제군(諸郡)으로부터 본국의 관동 지방으로 난입하였으므로, 국가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철령관을 방호하게 하였다. 적도가 화주(和州 영흥(永興))와 등주(登州 안변(安邊)) 이서(以西)의 여러 고을의 인민들을 겁탈하고 노략질하였다. 그리고는 등주에 이르러 등주 사람으로 하여금 염탐하게 하였는데, 나공(羅公)이 적도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철령관을 포기하고 도주하였으므로, 적도가 마치 무인지경을 치달리듯 하였다. 이에 온 나라가 불안에 떨고 인민들이 피해를 입는 가운데 산성에 올라가고 해도로 들어가서 적도의 예봉을 피하다가, 끝내는 중국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한 뒤에야 겨우 섬멸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내가 본 바로는, 철령관의 험난함이야말로 한 사나이에게 지키게 하면 천 명, 만 명이 쳐다보고 공격하더라도 쉽사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나공은 참으로 담력이 적었다고 하겠다.

27일에 등주에 도착해서 이틀 동안 머물렀는데, 지금은 그곳을 화주라고 칭한다. 30일에 일찍 화주를 출발하여 학포(鶴浦) 어귀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국도(國島)를 관광하였는데, 그 섬은 해안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다. 서남쪽 모퉁이로부터 들어갔더니 물가에 누인 비단처럼 흰모래가 깔려 있었고, 그 위로 평지 5, 6묘(畝) 정도가 마치 반벽(半壁) 모양의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집터가 보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승려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 위에는 한쪽이 트인 고리처럼 산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산세가 그다지 높지 않은 가운데 덩굴 풀만 덮여 있고 또 수목도 없었으니, 얼핏 보기에 흙을 쌓아 놓은 하나의 제방 같은 인상이 들었다.

배를 타고 약간 서쪽으로 가니 단애(斷崖)와 물가의 언덕이 특이하게 변해 갔다. 단애의 바위들은 모두 직방형(直方形)으로 즐비하게 벽처럼 서 있었으며, 언덕의 바위들은 모두 평원형(平圓形)으로 배열되어 한쪽 면에 한 사람이 앉을 만하였으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다. 수백 보쯤 더 나아가니 수백 척은 될 만한 높이의 단애들이 나타났는데, 그 바위는 모두 백색에 직방형으로 장단(長短)이 한결같았다. 그리고 하나의 단애마다 그 꼭대기에 각자 하나의 작은 바위를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얼굴을 위로 들고서 쳐다보노라니 아슬아슬해서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났다.

자그마한 동굴 하나가 있기에 배를 저어 들어갔으나 점점 좁아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는데, 그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얼마나 깊은지 측량할 수가 없었다. 그 좌우에 묶어서 세운 것 같은 바윗돌들은 외면(外面)의 것과 같았으나 그보다는 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 있는 바위가 지면까지 내려오는 형태도 모두 외면의 것들처럼 평정(平正)한 것이 한 판의 바둑을 복기(復碁)하여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아서 마치 일률적으로 잘라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본다면 외면만 그러할 뿐이 아니라 하나의 섬 전체가 그야말로 한 묶음의 네모진 바윗돌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동굴 속이 하도 험하고 깊어서 사람의 혼이 떨리게 하였으므로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가니 이번에는 한 면이 둘러친 병풍과 같은 곳이 있기에, 배를 놔두고 내려가서 배회하며 더위잡고 기어오르기도 하였다. 대개 그 바위는 동굴과 다름이 없었지만 단애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그 아래는 조금 평이하였으며 둥근 바위가 배열된 곳에는 1000명도 앉을 만하였으므로, 유람을 온 사람들은 으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 머물러 술을 마시기도 하였으나 풍랑이 일까 걱정도 되었고 게다가 그곳은 익힌 음식을 먹는 속세의 사람이 머물러 있을 곳이 못 되었다.

그 석벽을 따라 동남쪽으로 다시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바윗돌이 조금 특이하여 네모진 철망의 형태를 하고는 바닷물을 그 속에 담아서 조그맣고 둥근 자갈을 갈아 내고 있었는데, 길이는 5, 6십 척쯤 되었다. 서 있는 석벽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한 면은 모두 그와 같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철망석(鐵網石)이라고 하였다. 이상이 국도(國島)의 대략적인 경치이다. 그러나 그 기절(奇絶)하고 괴이한 형상으로 말하면 필설로는 방불하게 표현할 수가 없으니, 조화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이런 극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포구로 돌아온 뒤에 술잔을 들며 서로 치하하였으니, 하나는 승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풍랑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구에서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鶴浦)라는 곳으로 들어가서 원수대(元帥臺)에 올랐는데, 100경(頃)의 맑은 호수에 한 점 고둥처럼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또한 하나의 기관(奇觀)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더 머물 수 없기에 현관(縣館)에 들어와서 묵었다.

9월 초하룻날에 흡곡현(歙谷縣)의 동쪽 재를 넘어 천도(穿島)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그 형상을 물어보았더니 “그 섬에 굴이 있는데 남북으로 뚫려서 풍도(風濤)만 서로 드나들 뿐이다. 그렇지만 그 천도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총석정(叢石亭)에 갈 수 있는데, 그 거리는 8, 9리쯤 된다. 그리고 총석정에서 바다를 또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金蘭窟)에 갈 수 있는데, 그 거리 역시 10여 리쯤 된다. 배 안에서 보이는 승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날 바람 기운이 약간 있어서 배를 탈 수가 없기에 천도는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을 따라 총석정에 갔더니 통주(通州)의 수재(守宰)인 심군(沈君)이 총석정 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사선봉(四仙峯)이라는 것을 보니, 바위를 묶어서 세운 듯한 것과 그 몸통이 직방형인 것은 대개 국도의 경우와 같았으나, 다만 색깔이 검고 단애의 바위 또한 들쭉날쭉해서 가지런하지 않은 차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건대, 네 개의 봉우리가 저마다 따로 우뚝 솟아서 깎아지른 듯한 단애의 위용을 자랑하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만 리의 푸른 바다를 굽어보고 서쪽으로는 천 겹의 준령을 마주하고 있었으니, 실로 관동의 장관이었다.

예전에는 비석이 단애 위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받침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동쪽 봉우리에 오래된 비갈(碑碣)이 있는데, 비면(碑面)이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져서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으니, 어느 시대에 세워진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新羅) 시대에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도(徒)ㆍ남(南) 등 네 명의 선동(仙童)이 그 무리 3000인과 함께 해상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비갈은 그들 무리가 세운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이 또한 상고해 볼 길이 없다. 사선봉에 임하니 자그마한 정자가 있기에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날이 저문 뒤에 통주(通州)에 와서 유숙하였다. 통주는 옛날의 금란현(金蘭縣)이다. 그래서 성 북쪽 모퉁이에 있는 석굴을 사람들이 금란굴(金蘭窟)이라고 말하는데, 그곳은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이튿날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들어가 멀리서 바라보니 희미하게 보살의 형상이 굴속에 서 있는 것도 같았으나, 그 굴이 워낙 깊고 비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배를 조종하는 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거주한 지 오래됩니다. 그런데 원조(元朝)의 사화(使華 사신)와 본국의 경사(卿士)는 물론이요, 부절(符節)을 나눠 받고 한 방면을 다스리는 자로부터 아래로 유람하며 구경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여기에 와서는 이 굴을 반드시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나에게 배를 이곳으로 인도하게 하였으므로 나로서는 정말 질리게 와 본 셈입니다. 내가 일찍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를 조종하여 혼자 굴속에 들어가서는 끝까지 철저하게 살펴본 적이 있는데, 특별히 보살처럼 보이는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손으로 만져 보아도 한쪽 면에 이끼가 낀 바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굴을 나와서 뒤돌아보니 또 관음보살의 형상을 방불케 하는 것이 서 있지 않겠습니까. 아, 나의 정성이 미흡해서 굴속에서 보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항상 그런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현상이 보인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못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금란굴 동쪽에 석지(石池)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관음이 목욕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또 암석이 밀집해 있는데, 아주 작은 크기의 것들이 무려 수 묘(畝)에 걸쳐 깔려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모두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이 암석들을 사람들이 통족암(痛足岩)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개 관음보살이 발로 밟다가 통증을 느끼자 바위가 보살을 위해서 옆으로 몸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란굴을 출발하여 임도현(林道縣 고성군 내)에 와서 묵었다.

초사흗날에 고성군(高城郡)에 도착하였다. 통주에서 고성에 이르는 150여 리의 길은 실로 풍악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산세가 깎아지른 듯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외산(外山 외금강(外金剛))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대개 내산(內山 내금강(內金剛))과 기괴한 경치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남쪽에 유점사(楡岾寺)가 있는데, 그 절에는 대종(大鍾)과 53불(佛)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 시대에 53불이 이 종을 타고 서쪽 천축(天竺)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고성의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유점사까지 와서 멈추었다고 한다. 고성 남쪽에 있는 게방촌(憩房村)은 바로 금강산의 기슭에 해당하는데, 이 게방촌에서 60리쯤 곧장 위로 올라가면 유점사에 이른다. 내가 처음에는 함께 유람 온 사람들과 함께 반드시 유점사까지 가서 그 종과 불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거리가 먼데다가 길이 또 험해서 말이 모두 등창이 나고 발굽을 다친 탓으로 뒤처진 자가 있었으므로 더 이상 산에 오를 수가 없었다.

초나흗날에 아침 일찍 일어나 삼일포(三日浦)에 갔다. 삼일포는 성에서 북쪽으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배를 타고 서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갔는데, 그 섬은 무지개 모양의 거대한 하나의 암석이었다. 그 꼭대기에 석감(石龕)이 있고 그 안에 석불이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미륵당(彌勒堂)이었다.

그 단애(斷崖)의 동북쪽 벽면에 여섯 글자로 된 붉은 글씨가 보이기에 그곳에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더니, 한 줄에 세 글자씩 두 줄로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술랑남석’ 네 글자는 매우 분명하였지만, 그 다음의 두 글자는 희미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옛날에 그 고을 사람이 유람 온 자들을 접대하기가 괴로워서 이 글씨를 깎아 내려고 하였지만, 5촌가량이나 깊이 새겨져 있었던 까닭에 자획을 없애지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 이 두 글자가 분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뒤에 배를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올라갔는데, 이곳 역시 호수 가운데의 하나의 섬이었다. 이리저리 배회하며 돌아보았더니, 이른바 36봉(峯)의 그림자가 호심(湖心)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100경(頃)쯤 되는 넓이에 맑고 깊은 물이 가득 넘쳐흐르는 이 호수의 경치 또한 실로 관동의 승경으로서 국도(國島)에 버금간다고 할 만하였다. 이때 군수가 없어서 그 고을 아전이 자그마한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혼자 마실 수는 없기에 배를 준비하게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호수는 사선(四仙)이 노닐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36봉에는 봉우리마다 비석이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모두 가져다가 물속에 가라앉혔다고 한다. 지금도 그 비석의 받침돌은 아직 남아 있다. 호종단이란 자는 이승(李昇)의 당(唐)나라 출신으로 본국에 와서 벼슬하였는데, 오도(五道)에 나가 순시할 적에 이르는 곳마다 비갈을 가져다가 비문을 긁어 버리는가 하면 깨뜨리기도 하고 물속에 가라앉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종경(鍾磬)까지도 유명한 것들은 모두 쇠를 녹여 용접해서 소리가 나지 않게 틀어막았다고 한다. 이는 한송정(寒松亭)과 총석정(叢石亭)과 삼일포(三日浦)의 비석, 그리고 계림부(鷄林府) 봉덕사(奉德寺)의 종 같은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사선정은 박군 숙진(朴君淑眞)이 이 지역을 존무(存撫)할 때 세운 것인데, 좌주(座主)인 익재(益齋) 선생이 기문을 써 주셨다. 삼일포에서 성 남쪽의 강물을 건넌 뒤에 안창현정(安昌縣亭)을 지나 명파역(明波驛)에서 유숙하였다.

초닷샛날에 고성(高城)에서 묵어 거기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초이렛날에 주인이 선유담(仙遊潭) 위에서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청간역(淸澗驛)을 지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서 약간 술을 마시고 인각촌(仁覺村)의 민가에 묵었다. 초여드렛날에 영랑호(永郞湖)에 배를 띄웠다. 날이 기울어서 끝까지 돌아보지 못하고,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세음보살)를 참알(參謁)하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이곳에 머문다고 하는데, 산 아래 석벽에 있는 동굴이 바로 관음보살이 들어가서 머무는 곳이란다. 저녁 늦게 양주(襄州)에 도착해서 묵었다. 그 다음날은 중구일(重九日)인데, 또 비가 와서 누대 위에서 국화 술을 들었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유숙하였는데, 그곳에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다. 11일에 연곡현(連谷縣)에서 묵었다.

12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경포대에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 돌 아궁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정자에서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서 재를 넘을 수가 없기에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숙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역을 지나서 동쪽 산봉우리를 오르는데 길이 매우 험하였다. 등명사(燈明寺)에 도착해서 누대 위에서 일출을 구경하고, 마침내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강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재를 넘어 우계현(羽溪縣)에서 묵었다. 12일에 삼척현(三陟縣)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오십천(五十川)의 팔영(八詠)이라는 것을 마음껏 살펴보고 나와서 교가역(交柯驛)에 이르렀다. 이 역은 현의 치소(治所)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곳에서 15리를 가면 바다를 굽어보는 단애 위에 원수대(元帥臺)가 있는데, 또한 절경이었다. 그 위에서 조금 술을 마시고는 마침내 역사에 묵었다. 18일에 옥원역(沃原驛)에서 묵었다. 19일에 울진(蔚珍)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렀다.

21일에 아침 일찍 울진을 출발하였다. 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는데, 그 절은 석벽의 단애 아래 장천(長川) 가에 위치하였다. 단애의 석벽이 1000척의 높이로 서 있고 그 석벽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을 성류굴(聖留窟)이라고 불렀다. 그 동굴은 깊이도 측량할 수 없었지만 으슥하고 어두워서 촛불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의 승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는, 또 출입에 익숙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앞뒤에서 돕게 하였다.

동굴의 입구가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4, 5보(步)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기에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3장(丈)쯤 되는 단애가 나타났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점점 평탄해지는 가운데 공간이 높다랗고 널찍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畝)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으며,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다시 10여 보를 걸어가자 동굴이 또 나왔다. 그런데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보다 훨씬 비좁아서 아예 배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기어갔는데, 그 아래가 진흙탕이었으므로 돗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하였다.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또 못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그 못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와 비슷하고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으며,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라서 그다지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각각 소리가 나면서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향을 발하는 것이 마치 편경(編磬)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동굴 안을 끝까지 탐험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해군(平海郡)의 해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거리는 대개 여기에서 20여 리쯤 된다.”라고 하였다.

앞서 동굴 입구에서 옷에 훈김이 배고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동복(僮僕)의 의건(衣巾)을 빌려 입고 들어왔는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의복을 갈아입고는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고 나니, 마치 화서(華胥)를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퍼뜩 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이날 평해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군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평해군은 강릉도(江陵道)의 남쪽 경계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릉도는 북쪽의 철령(鐵嶺)에서부터 남쪽의 평해까지 대개 1200여 리의 지역을 관할하는데, 평해 이남은 경상도의 경내에 속한다. 이곳은 내가 일찍이 갔다가 온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4. 가정집 제7권 설(說)

●차마설(借馬說)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일쑤요,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시사설(市肆說)

상고(商賈)가 모여서 있고 없는 것을 무역하는 곳을 시사(市肆)라고 한다.

처음에 내가 연경(燕京)에 와서 위항(委巷)에 들어가 보았더니, 예쁘게 치장하고서 간음하라고 가르치는 자가 그 용모의 고운 정도에 따라서 값을 올리고 내리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공공연히 거래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여사(女肆)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관부(官府)에 들어가 보았더니, 붓을 함부로 놀려 법규를 농락하는 자가 그 사건의 경중에 따라서 값을 올리고 내리면서 조금도 의구(疑懼)하는 마음이 없이 공공연히 거래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이사(吏肆)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형정(刑政)이 문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또 인사(人肆)를 보게 되었다. 지난해부터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진 나머지 강한 자는 도적이 되고 약한 자는 유리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입에 풀칠할 길이 없게 되자, 부모는 자식을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하인을 팔 목적으로, 저자에 늘어놓고는 헐값으로 흥정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짓이라고 할 것인데, 유사(有司)는 이런 일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아, 앞의 두 시장은 그 정상이 가증스러우니 통렬히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뒤의 한 시장은 그 정상이 가긍(可矜)스러우니 이 또한 빨리 없어지도록 조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시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내가 알기에 여사로 인해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고 이사로 인해 형정이 문란해지는 것이 장차 이 정도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5. 가정집 제8권 서(書)

●중국의 언관(言官)을 대신해서 글을 지어 고려(高麗)의 동녀(童女)를 데려오는 것을 그만두도록 청한 글 지원(至元) 3년(1337, 충숙왕 복위 6)에 청한 대로 일이 시행되었다.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하나의 독립국으로 존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중국에 성인이 나온 때가 아니면 아득히 떨어진 채 서로 왕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 태종(唐太宗)처럼 위엄과 덕망을 갖춘 제왕으로서도 두 번이나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지만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국조(國朝 원(元)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적에 고려는 맨 먼저 신복(臣服)하여 왕실에 공훈을 현저히 세웠습니다. 이에 세조황제께서 공주(公主)를 이강(釐降)하는 한편, 조서(詔書)를 내려 장유(獎諭)하시기를 “고려의 의관과 전례는 그들 조상의 풍도를 떨어뜨리지 말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풍속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전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있는 곳은 오직 삼한(三韓)뿐입니다. 따라서 고려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다면, 당연히 밝은 조서를 받들어 선조가 행한 대로 따라 정교(政敎)를 제대로 닦아 밝히고 조빙(朝聘)을 제때에 행하면서 천자의 나라와 함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는 그만 부시(婦寺 내시)와 같은 무리로 하여금 중국에 근거하고서 그 도당을 번성하게 한 결과, 은총을 믿고 의지하여 거꾸로 본국을 뒤흔들게 만들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내지(內旨)라고 사칭하고는 다투어 역마를 급히 치달려 해마다 동녀(童女)를 빼앗아 잇따라 수레에 싣고 오게까지 만들었습니다.

대저 남의 딸을 빼앗아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게 한 이 일이 비록 고려가 자초한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일단 내지가 있었다고 칭했고 보면 이 또한 어찌 국조(國朝)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제왕이 한 번 호령을 내려 시행할 때마다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보며 덕택을 입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지(詔旨)를 일컬어 덕음(德音)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누차 특지(特旨)를 내렸다면서 남의 집안의 딸을 빼앗아 오게 하다니, 이는 너무나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키우는 것은 장차 반포(反哺)의 보답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존귀한 자와 비천한 자의 구별이나 혹은 중화와 이적의 차이가 없이 누구나 똑같이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본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의 풍속을 보면, 차라리 아들을 별거하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옛날 진(秦)나라의 데릴사위〔贅壻〕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딸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고 근실히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라 마지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딸을 품 안에서 빼앗아 4000리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 발이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에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과연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고려 출신 부녀 중에 후비(后妃)의 반열에 선 이도 있고, 왕후(王侯) 같은 귀인(貴人)의 짝이 된 이도 있으며, 공경 대신 중에도 고려의 외생(外甥) 출신인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는 본국의 왕족 및 벌열과 부호의 집안에서 특별히 조지(詔旨)를 받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소원에 따라서 스스로 온 것이요, 또 매빙(媒聘)의 예법도 이미 갖췄으니, 통상적으로 있는 일이 본래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이익을 탐내는 자들은 이를 끌어다가 자기들의 행위를 변호하는 하나의 통상적인 사례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을 보면 모두 처첩을 욕심내고 있으니, 동녀만 뺏어 오려고 할 뿐이 아닙니다. 대저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는 목적은 장차 황상의 은혜를 선포하는 동시에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파악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시경》에서도 “두루 묻고 강구한다.”라고 하였고, 또 “두루 묻고 의논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만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재물과 여색만을 탐욕스럽게 구하고 있으니, 이런 일은 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옆에서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바로 비밀에 부치고는 오직 소문이 날까 걱정하기 때문에 비록 이웃집 사람이라 할지라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아연실색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인가? 동녀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처첩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말한답니다. 이윽고 군리(軍吏)들이 사방으로 나가서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수색을 하는데, 혹시라도 숨길 경우에는 그 이웃집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들을 밧줄로 동여매고서 치고 때리고 곤고(困苦)하게 하여 숨겨 놓은 딸을 내놓게 한 뒤에야 그만두곤 하니, 한 번 사신의 행차를 당하기만 하면 온 나라가 소란스러워져서 비록 닭과 개들이라고 할지라도 조용히 있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다가 동녀를 모아서 선발할 때가 되면 각자 미추(美醜)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혹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서 그의 욕심을 채워 주면 비록 용모가 아름답더라도 놓아주곤 합니다. 이런 식으로 놓아주고는 다른 곳에서 다시 찾기 때문에 동녀 하나를 취할 때마다 수백 집을 뒤지기 일쑤인데, 오직 사신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야지 혹시라도 감히 어겨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내지가 있다고 칭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한 해에 한두 번씩 일어나기도 하고 격년(隔年)으로 일어나기도 하는데, 데려오는 동녀의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4, 5십 명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선발이 되면 부모와 종족이 서로 모여 통곡하면서 울기 때문에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급기야 국문(國門)에서 떠나보낼 적에는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서 울부짖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비통하고 분개한 심정에 우물에 몸을 던져 죽기도 하고, 목을 매어 자결하는 자도 나오며, 근심과 걱정에 혼절하여 쓰러지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실명(失明)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동녀 대신 처첩으로 데려오는 경우는 비록 이와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인정을 거역하고 원망을 사는 점에 있어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필부필부가 자신의 성의를 다 바치지 못하게 하면, 백성의 임금 된 자가 자기의 공을 더불어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조의 덕화가 미치는 곳마다 만물이 모두 뜻을 이루고 있는데, 고려 사람들만 유독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고통을 받게 한단 말입니까. 옛날 동해에 원부(冤婦)가 있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고려에는 얼마나 많은 원부가 있겠습니까. 근년에 그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따라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매우 많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들의 원망과 탄식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당당한 우리 천조(天朝)에서 후정(後庭 후궁)이 뭐가 부족하기에 굳이 외국에서 데려온단 말입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은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리(情理)라고 할 것인데, 지금은 그만 궁중에 안치하고는 꽃다운 시절을 다 놓친 채 헛되이 늙어 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간혹 궁중 밖으로 내보내어 시인(寺人)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끝내 후사도 없이 생을 마치는 경우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니, 그 원기(怨氣)가 화기를 상하게 하는 것이 또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일에 폐단이 조금 있더라도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경우라면 한번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일에 폐단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국가에는 아무 이익도 없고 먼 지방 사람들에게 원망만 사는 일로서, 그 폐단이 결코 적지 않은 일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덕음(德音)을 반포하시어 감히 내지라고 사칭하며 위로 성청(聖聽)을 모독하고 아래로 자기의 이익을 꾀하여 동녀를 취하는 자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첩을 취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금하는 법률 조목을 명시하시어 앞으로는 그들이 기대하는 마음을 아예 끊어 버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성조(聖朝)의 덕화를 밝게 드러내어 의리를 사모하는 외국의 심정을 위로해 주는 동시에, 원기를 소멸하고 화기를 불러들여 만물이 제대로 자라나게 해 주신다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6. 가정집 제14권 고시(古詩)

●운명이 기박한 첩〔妾薄命〕

첩은 본래 한미한 집안의 딸로 / 妾本寒門子

가시나무 비녀 꽂고 오두막에 살았지만 / 荊釵居白屋

아름다운 자질을 받고 태어나 / 美質天所生

두 뺨이 붉은 옥 소반과 같아서 / 兩臉如赬玉

스스로 경국지색이라 믿고는 / 自倚傾國艶

세상 사람들과 아예 사귀지 않았지요 / 乃與世人疎

오릉의 많은 젊은 자제들이 / 五陵多年少

지나가다가 수레를 모두 멈췄지만 / 過者皆停車

미소 한 번이라도 어찌 가벼이 흘릴까 / 一笑肯輕賣

천금을 준다 해도 응하지 않았나니 / 千金且不收

이 때문에 자연히 좋은 시기 놓치고서 / 以此自愆期

세월만 장강처럼 흘려보냈다네요 / 歲月長江流

어젯밤엔 불어오는 갈바람 속에 / 西風昨夜至

이슬 맺힌 풀숲에서 베짱이 울음소리 / 莎雞鳴露草

고운 얼굴 시들고 나면 어찌할거나 / 紅顔恐消歇

때 지나면 호시절 다시 오지 않건마는 / 時過不再好

나면서부터 남과 사귀지 못한 채 / 生不識人面

긴긴 세월 집 안에만 틀어박혔는데 / 長年在深屋

미색이란 굴레로 계속 신세 그르치다 / 一爲色所誤

민이 옥을 기만하는 조롱만 되려 당했다오 / 反遭珉欺玉

미움과 사랑은 예부터 무상한 것이라서 / 憎愛古無常

아침의 연인이 저녁에는 타인이 된다네 / 朝恩暮乃疎

울적한 심정에 추선의 시 읊조리노니 / 悒悒詠秋扇

임의 수레에 오를 희망 끊어졌어라 / 望絶登君車

누굴 위해 금빛 침상 먼지 털거나 / 金牀爲誰拂

수놓은 이불 거둔 지도 이미 오래전 / 繡被久已收

허전한 규방에 스며드는 차가운 달빛 / 閨空寒月落

보이나니 깜박이며 흐르는 반딧불뿐 / 但見螢火流

깊은 시름 속에 잠깐 이룬 한바탕 꿈 / 沈憂暫成夢

어렴풋이 풀꽃 꺾어 겨루었던 듯도 한데 / 依俙鬪百草

지금 세상에 상여의 재주 구할 수가 없으니 / 世無相如才

그 누가 옛정을 되찾게 해 줄 수 있을까 / 誰令復舊好

 

 

7. 가정집 제15권 율시(律詩)

●홍 합포(洪合浦)가 귤과 차를 부쳐 준 것을 감사하다

만식에는 나물국도 맛이 좋은데 / 晩食藜羹味亦長

동정향을 나눠 주다니 이것이 웬 떡이오 / 忽驚分我洞庭香

안개 낀 강의 옥회는 구할 길이 없다 해도 / 煙江玉膾雖無計

이따금 금제 대하면서 흥을 가누지 못한다오 / 時對金虀發興忙

봄 우레 기다려서 돋아나온 황금색 싹 / 芽茁黃金待一雷

대궐에 바치고 부쳐 준 향기롭게 볶은 차 / 焙香新寄貢餘來

옥천의 일곱째 잔 신묘한 그 효과 신속해서 / 玉川七椀神功速

곧장 맑은 바람 타고 월대에 내려앉을 듯도 / 便擬乘風到月臺

 

 

8. 가정집 제17권 율시(律詩)

●봄비 2수

단비는 제때에 잘도 내리는데 / 好雨時能至

유인은 밤새도록 잠 못 이루네 / 幽人夜不眠

토양이 기름진 몇 이랑의 싹들이요 / 畝鍾膏土脈

부엌 연기 축축한 계수나무 장작이라 / 薪桂濕廚煙

제비집은 축 늘어져서 이제 막 보수하고 / 燕壘低初補

꽃잎은 무게를 못 이겨 거꾸로 매달렸네 / 花房重倒懸

돌아가 농사짓는 것이 무엇이 어렵기에 / 爲農豈難事

나는 올해도 약속을 다시 저버리는가 / 吾又負今年

 

꽃과 버들 한가로이 유혹하는 계절 / 花柳閑相引

풍광이 노곤해서 잠 속으로 떨어질 듯 / 風光困欲眠

봄이 저물려고 하여 시름이 깊던 차에 / 已愁春向晩

안개처럼 내리는 비를 다시 만났어라 / 更値雨如煙

세상 어디나 보통 있는 외상 술값이요 / 酒債人間有

말 머리 드높이 돌아가고픈 마음이라 / 歸心馬首懸

좋은 시절 만났어도 혼자 즐길 따름 / 良辰自樂耳

단지 소원은 풍년이나 자꾸 들었으면 / 但願屢豐年

※계수나무 장작 : 물가가 비싼 도시에서의 어려운 생활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나라의 곡식은 옥보다도 귀하고, 장작은 계수나무보다 비싸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라고 불평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상……술값이요 :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외상 술값이야 세상 어디나 보통 있는 일이지만, 일흔까지 사는 사람은 예로부터 드물기만 하다네.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라는 명구가 나온다.

 

 

9. 가정집 제20권 율시(律詩)

●변산(邊山)의 여러 암자를 돌아본 뒤에 소래루(蘇來樓) 위의 시에 차운하고 세월을 기록하다

해안의 산이 고절하다 일찍이 들었기에 / 高絶曾聞海岸山

틈을 내어 마음먹고 실컷 등반을 하였소 / 偸閑得得恣登攀

사람은 하늘로부터 천척의 사다리를 내려오고 / 人從天降梯千尺

승려는 구름과 더불어 반 칸의 집을 나누었네 / 僧與雲分屋半間

선방의 적막도 속박이 되는 줄을 원래 아는 터에 / 禪寂固知猶見縛

세상 인연이 어떻게 감히 걸리게 할 수 있으리오 / 世緣那得敢相關

푸른 산에 어느 날 나의 거처 마련하여 / 翠微何日容吾住

죽장망혜로 날마다 왔다 갔다 해 볼는지 / 竹杖芒鞋日往還

 

●흥덕(興德)의 객사에 제하다

명산을 방문하려면 이 땅을 통과해야 / 爲訪名山此地過

강 다리에서 길 나뉘어 연하 속으로 / 江橋分路入煙霞

돌아오며 죽림 아래에 말을 쉬게 하는데 / 歸來歇馬竹林下

아직 꽃 피우지 않은 한 그루 동백나무 / 一樹山茶猶未花

 

●금산사(金山寺)의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

봄이 청구에 이르러 밤낮이 같아지려는 때 / 春到靑丘日欲中

멋진 유람은 농한기를 가려서 해야 하고말고 / 勝遊要及未農功

바다 위 봉래의 경내를 찾는 기회에 / 爲尋海上蓬萊境

세상 속 도사의 궁전도 들르게 됐다오 / 因訪人間覩史宮

높이 치솟은 처마 지붕은 북두와 맷돌질하고 / 危構簷牙磨北斗

법을 설하는 풍경 소리는 동풍과 얘기 나누네 / 法音鐸舌語東風

절경을 끝까지 더듬고 싶은 생각도 든다마는 / 更思杖屨窮幽絶

연하가 골에 가득해서 길이 자꾸만 막히니 원 / 滿壑煙霞路易窮

 

●고부군(古阜郡) 북루(北樓)의 시에 차운하다

예전부터 꿈속에 생각했던 남쪽 유람 길 / 夢想南游自昔年

등림하니 온갖 걱정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 登臨萬慮散如煙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처럼 얼마나 떠돌아다녔던가 / 幾番過客隨風絮

바다로 치달리는 강물처럼 허무한 백년 인생인 것을 / 百歲浮生赴海川

떠 마셔도 좋을 만한 도솔의 맑은 산 빛이요 / 兜率山光淸可挹

멀리 서로 이어진 봉래의 구름 기운이로세 / 蓬萊雲氣遠相連

시구를 남기려고 읊다 보니 다시금 괴로워져 / 欲留詩句吟還苦

나귀 등에 탄 맹호연은 비교도 되지 않으리 / 莫比騎驢孟浩然

 

가정집 잡록

●이중보(李中父 : 이곡)가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序)

고려는 아조(我朝)에서 옛날 봉건제도가 행해지던 때의 제후국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직접 사람을 뽑아 관원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질이 우수한 인재들 모두가 그 나라에서 설행하는 과거 시험을 통해 그 나라에서 벼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황경(皇慶) 연간(1311-1313)에 천하의 인재를 대상으로 과거 시험을 보이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이로부터는 고려에서도 예부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말단으로 급제하는 대열에 끼이곤 하였으므로 동성(東省)의 재속(宰屬)에 임명되거나 가까운 주군(州郡)에서 벼슬하거나 하였는데, 일단 귀국하고 나면 곧바로 그 나라의 현관(顯官)이 되었을 뿐 다시 서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봉건제도가 없어진 뒤로 천하의 벼슬하려는 자들이 천자의 조정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된 것은 형세로 볼 때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 고려의 경우는 그 나라에서 직접 사람을 뽑아 관원으로 임명할 수가 있기 때문에, 자질이 우수한 인재들이 왕왕 그 나라에서 설행하는 과거 시험을 통해 그 나라에서 벼슬할 수가 있는데도, 다시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경사(京師)에 와서 응시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나라에서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조정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훨씬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록 말단으로 급제하여 시시한 관직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 나라에서는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는 터인데, 더군다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화려한 근시(近侍)의 직책을 차지함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영예로 여기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원통(元統) 원년(1333, 충숙왕 복위2)에 천자가 친히 책문(策問)으로 진사를 뽑을 적에, 내가 외람되게 염내(簾內)의 신분으로 시권(試券)을 검토하였는데, 고려의 이곡(李穀)이 답한 대책문(對策文)이 독권관(讀券官)의 인정을 크게 받아 을과(乙科)로 뛰어올라 급제하였고, 마침내는 재상이 천자에게 아뢰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영예로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듬해에 황상(皇上)이 크게 학교를 일으킬 적에, 중보가 제서(制書)를 받들고 동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에 조정에서 인정을 받은 것을 가지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림은 물론이요, 나아가 향당까지 영광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내가 그의 출행을 장하게 여겨 고하기를,

“그대가 돌아가서 방인(邦人)과 제우(諸友)를 보거든 다음과 같이 말하라. ‘황상은 문명(文明)한 덕을 지니신 분으로, 유능한 인재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시기 때문에 원방(遠方)의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법이 없다. 이는 마치 증청(曾靑)과 단안(丹矸)이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중국이 실제로 쓰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선비는 자기가 쓰이기에 적합하지 못할까 걱정해야지 중국이 자기를 쓰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를 일으키는 조서를 무엇 때문에 멀리 이 땅에까지 반포하겠는가.’”

하였다. ...원통(元統) 2년(1334, 충숙왕 복위3) 4월 18일,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보전(莆田) 진려(陳旅)는 서(序)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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