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최치원(崔致遠 857 ∼ 908이후?)
857년 출생
868년 당에 유학(12세)
874년 빈공과 합격(18세)
876년 표수현위(20세)
879년 제도행성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23세)
885년 귀국(29세)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
●우리 동방에 문장이 나와서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운(孤雲) 최공(崔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우리 동방의 선비로서 북쪽으로 중국에 유학(遊學)하여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것도 최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공의 글 가운데 후세에 전하는 것으로는 오직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2부(部)가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2부의 서책이 또한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다.
갑오년(1834, 순조34) 9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풍산(豐山) 홍석주(洪奭周)는 서문을 쓰다.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수하여 지은 것으로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해부(海夫)요, 고운은 그의 호(號)이다. 호남(湖南)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문(文)ㆍ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마치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으며,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時)에 빈공(賓貢)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신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에 망부(亡父)가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겨를 없이 현자(懸刺)하며 양지(養志)에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로 인백기천(人百己千)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文物)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정성(情性)을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이것들은 동자(童子)가 전각(篆刻)하는 것과 같아 장부(壯夫)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급기야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뒤이어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 선주(宣州)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飽食終日〕,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仕優則學〕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 5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만들 뜻을 더욱 분발하여 복궤(覆簣)의 이름을 내걸고는 마침내 그 지역의 명칭인 중산(中山)을 맨 앞에 얹었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의 군직을 맡으면서부터 고 시중(高侍中)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있는 힘껏 담당하며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도태(淘汰)하며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披沙見寶〕에 비유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기왓장을 깨뜨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毁瓦畫墁〕보다는 나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계원집》 20권을 우겨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침 난리를 당하여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이른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는〔饘於是粥於是〕 신세가 되었으므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왕소(王韶)의 말을 가지고 예전의 일을 고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몸을 움츠린 채 돌아와서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이들에게 부끄럽긴 합니다만, 일단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情性)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져서 위에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詩)ㆍ부(賦)ㆍ표(表)ㆍ장(狀) 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화(中和) 6년 정월 일에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소장을 올려 아룁니다.
1. 계원필경집 제1권
■황소의 도당을 섬멸한 것을 하례한 표문〔賀殺戮黃巢徒伴表〕
삼가 살피건대, 역적 황소가 흉악한 무리를 불러 모아 잠시 동안 붙어 있는 목숨을 부지하면서, 간악한 흉계를 꾸미며 날마다 부족하게 여기는가 하면, 포악한 행동을 믿고서 하늘도 속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감히 개미와 같은 무리를 몰아 누차 웅비(熊羆)와 같은 대군에 대항하면서, 오직 스스로 재앙을 만들고 있으니 그 죄를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6. 계원필경집 제6권
■종사관으로 전임시켜 주기를 청한 장문〔請轉官從事狀〕
모관(某官) 고운(顧雲)
상기 관원은 동방의 대나무처럼 아름다운 재질을 자랑하고 남방의 계수나무처럼 향기를 내뿜으면서 사조(謝脁 남조 제(南朝齊)의 시인)의 긴 옷자락을 끌고 위청(衛靑 한(漢)의 명장)의 군막에서 종사하였습니다. 다섯 장의 양가죽〔五羖皮〕만큼 소중하다는 것이 어찌 헛된 이야기이겠습니까. 백 마리의 사나운 새〔百鷙鳥〕도 그보다 못하다는 것이 사실임을 바야흐로 알겠습니다. 참으로 묘책을 도와 함께 장도(壯圖)를 펼칠 수 있을 것인바, 삼가 전임을 청하노니 그에게 장복을 내려 관찰지사(觀察支使)로 임명해 주소서.
11. 계원필경집 제11권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黃巢書〕
광명(廣明) 2년(881) 7월 8일에 제도도통 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모(某)는 황소(黃巢)에게 고하노라.
대저 바름을 지키면서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위기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고 한다. 지혜로운 자는 시기에 순응해서 공을 이루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서 패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백 년의 인생 동안 생사(生死)를 기약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만사(萬事)를 마음으로 판단하여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은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왕사(王師)는 정벌하면 싸우지 않고도 이기며, 군정(軍政)은 은혜를 앞세우고 처벌은 뒤로 미룬다. 장차 상경(上京)을 수복하려는 이때에 우선 큰 신의(信義)를 보여 주려고 하니, 타이르는 말을 공경히 듣고서 간악한 꾀를 거두도록 하라.
너는 본시 변방의 백성으로 갑자기 사나운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時勢)를 타고는 감히 강상(綱常)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마침내 화심(禍心)을 품고서 신기(神器)를 농락하는가 하면, 도성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다. 너의 죄가 이미 하늘에까지 닿았으니, 반드시 패망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질 것이다.
아, 당우(唐虞 요순(堯舜)) 이래로 묘호(苗扈)가 복종하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불량(不良)한 무뢰배(無賴輩)와 불의(不義) 불충(不忠)한 무리가 계속 나왔다. 너희들이 지금 보이는 작태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멀리로는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이 진(晉)나라 왕실을 엿보았고, 가까이로는 녹산(祿山)과 주자(朱泚)가 개처럼 황가(皇家)에 짖어 대었다.
그들은 모두 손에 강병(强兵)을 쥐기도 했고, 몸이 중임(重任)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 번 성내어 부르짖으면 우레와 번개가 치달리듯 하였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이 끼듯 하였다. 하지만 잠깐 동안 간악한 짓을 자행하다가 끝내는 남김없이 멸망을 당하였다. 태양이 밝게 빛나는데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냥 놔두겠는가. 하늘의 그물이 높이 걸렸으니 흉악한 족속이 제거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분탕질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살상(殺傷)하는 것을 급무로 삼고 있다. 너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큰 죄만 있을 뿐, 용서받을 만한 선행(善行)은 조금도 없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여서 시체를 전시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요, 땅속의 귀신들도 남몰래 죽일 의논을 이미 마쳤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잠시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조만간 혼이 달아나고 넋을 뺏기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무릇 어떤 일이고 간에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잘 알아듣도록 하라.
그동안 우리 국가는 더러움도 포용하는 깊은 덕을 발휘하고, 결점도 눈감아 주는 중한 은혜를 베풀어, 너에게 절모(節旄)를 수여하고 방진(方鎭)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너는 가슴속에 짐새〔鴆〕의 독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은 채, 걸핏하면 사람을 물어뜯고 오직 주인에게 대들며 짖어 대는 일만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끝내 임금을 배반하는 몸이 되어 군대로 궁궐을 휘감은 나머지, 공후(公侯)는 위급하여 달아나 숨기에 바쁘고, 임금의 행차는 먼 지방으로 순유(巡遊)하기에 이르렀다.
너는 일찍이 덕의(德義)에 귀순할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완악하고 흉측한 짓만 자행하였다. 이것은 곧 성상께서 너에게 죄를 용서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너는 국가에 대해서 은혜를 저버린 죄만 지은 것이다. 그러니 네가 죽을 날이 눈앞에 닥쳐왔다고 할 것인데, 어찌하여 너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더구나 주(周)나라 솥은 물어볼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한(漢)나라 궁궐이 어찌 구차하게 안일을 탐하는 장소가 될 수 있겠는가. 너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끝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너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폭풍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하늘과 땅의 현상도 오래갈 수가 없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이겠는가.〔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라고 하였다. 또 듣지 못했느냐.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하늘이 선하지 못한 자를 그냥 놔두면서 조장하는 것은 복을 주려 함이 아니고, 그의 흉악함을 더하게 하여 벌을 내리려 해서이다.〔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 而降之罰〕”라고 하였다.
지금 너는 간사함과 포악함을 숨기고 죄악과 앙화(殃禍)를 계속 쌓아가면서, 위태로움을 편안히 여긴 채 미혹되어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제비가 바람에 날리는 장막 위에다 둥지를 틀고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끓는 솥 속에서 노닐다가 바로 삶겨 죽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나는 웅대한 전략(戰略)을 구사하며 제군(諸軍)을 규합하고 있다. 맹장(猛將)은 구름처럼 날아들고 용사(勇士)는 빗발처럼 모여든다. 높고 큰 깃발들은 초(楚)나라 요새의 바람이 잦아들게 하고, 전함(戰艦)과 누선(樓船)은 오(吳)나라 장강(長江)의 물결이 끊어지게 한다. 손쉽게 적을 격파했던 도 태위(陶太尉)의 군략(軍略)이라 할 것이요, 귀신이라고 일컬어졌던 양 사공(楊司空)의 위의(威儀)라고 할 것이다. 사방팔방을 조망하며 만리 지역을 횡행하니, 이를 비유하자면 맹렬한 불길 속에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금신(金神)이 계절을 맡고 수백(水伯)이 군대를 환영하는 이때에, 가을바람은 숙살(肅殺)의 위엄을 북돋우고, 아침 이슬은 답답한 기분을 씻어 준다. 파도도 잠잠해지고 도로도 통하였으니, 석두성(石頭城)에서 닻줄을 올리면 손권(孫權)이 후미(後尾)를 담당할 것이요, 현수산(峴首山)에서 돛을 내리면 두예(杜預)가 선봉(先鋒)이 될 것이다. 그러니 경도(京都)를 수복(收復)하는 것은 열흘이나 한 달이면 충분할 것이다.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상제(上帝)의 깊은 인덕이요, 법을 굽혀서라도 은혜를 펼치려 하는 것은 대조(大朝)의 훌륭한 전장(典章)이다. 공적(公賊)을 성토(聲討)할 때에는 사적인 분노를 개입시켜서는 안 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는 바른말로 일깨워 주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한 장의 글월을 날려, 거꾸로 매달린 듯한 너의 급한 사정을 구해 주려 하니, 너는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빨리 기미를 알아차려서, 자신을 위해 잘 도모하여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라.
네가 만약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땅을 떼어 받고 국가를 세워서 계승하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몸과 머리가 두 동강 나는 화를 면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공명(功名)을 우뚝하게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친한 척하는 무리의 말을 믿지 말고 먼 후손에게까지 영화(榮華)를 전하도록 할 지어다. 이는 아녀자가 상관할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속히 회보(回報)하고 결코 의심하지 말라. 내가 황천(皇天)의 명을 떠받들고 백수(白水)에 맹세를 한 이상, 한번 말을 하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니, 은혜를 원망으로 갚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만약 미쳐 날뛰는 무리에게 끌려다니며, 잠에 취해서 깨어나지 못한 채, 버마재비가 수레바퀴에 항거하듯 하고,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려고만 한다면, 곰과 범을 때려잡는 군사들을 한번 지휘하여 박멸(撲滅)할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들어 솔개처럼 날뛰던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쁠 것이다. 너의 몸뚱이는 도끼의 날을 기름칠하고, 너의 뼈다귀는 전차(戰車) 밑에서 가루가 될 것이요, 처자(妻子)는 잡혀 죽고 종족(宗族)은 처형될 것이니, 배꼽에 불이 켜질 때를 당하여서는 아무리 배꼽을 물어뜯어도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선악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배반하여 멸망을 당하기보다는 귀순(歸順)하여 영화를 누리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네가 그렇게 바라기만 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장사(壯士)의 나아갈 길을 찾아 곧바로 표범처럼 변할 것이요, 우부(愚夫)의 소견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하지 말지어다. 모(某)는 고하노라.
17. 계원필경집 제17권
※16권까지는 고변을 대신하여 지은 글이고, 17권부터는 온전한 자신의 글이다.
■두 번째 올린 글〔再獻啓〕
생각건대, 멀리 신라 땅을 떠나 오래도록 강변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감안하시어, 특별히 양식을 내려 허기를 면하게 해 주셨다고 여깁니다. 저력(樗櫟)과 같은 산목(散木)이 도량(稻粱)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이 놀랍기만 한데, 거북이와 물고기가 물을 만나 다시 살아난 것이 기쁜 한편으로, 벼룩과 이가 태산을 짊어진 것처럼 역량이 모자란 것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시를 헌정하면서 올린 글〔獻詩啓〕
모(某)는 아룁니다.
모가 삼가 동년(同年)인 고운(顧雲 : 최치원의 친구) 교서(校書)가 상공(相公)에게 바친 장계(長啓) 1수(首)와 단가(短歌) 10편(篇)을 보건대, 학파(學派)는 고래가 바다 물결을 내뿜는 듯하였고, 사봉(詞鋒)은 검광(劍光)이 은하에 비낀 듯하였습니다. 빠짐없이 갖추어 찬송하였으니, 세상에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모와 같은 자는 외방(外方)에서 건너온 데다 재예(才藝)도 하품(下品)에 속합니다. 그래서 유궁(儒宮)에서 덕행을 사모하며 안염(顔冉)의 담장을 엿보기는 했어도, 필진(筆陣)에서 자웅(雌雄)을 다투며 조유(曹劉)의 보루(堡壘)에 다가가 도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낙국(樂國)에서 노닐며 인풍(仁風)을 접하게 되었기에,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품어 온 정성을 노래로 불러 보려고 소원하다가, 이번에 공덕(功德)을 칭송한 절구시(絶句詩) 30수(首)를 지어서 삼가 별지(別紙)와 같이 봉해 올리게 되었습니다.
18. 계원필경집 제18권
■앵두를 사례한 장문〔謝櫻桃狀〕
중군사(中軍使) 유공초(兪公楚)가 받들어 전한 처분을 보건대, 전건(前件)의 앵두(櫻桃)를 내려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봄철 석 달을 내려오며 온갖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데, 백 가지 과일 중에서는 앵두가 먼저 익어 홀로 뽐내고 있습니다. 선계(仙界)의 이슬이 맺힌 만큼 봉황의 양식에 합당하니, 은덕(恩德)의 바람을 입는다 해도 꾀꼬리가 물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높은 가지에서 따 내어, 아름다운 열매를 나누어 주게 하셨는데, 말석(末席)에 끼인 이 몸 역시 깊은 은혜를 입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손 안에 받쳐 들면 그 색깔이 초평(楚萍)을 무색하게 하고, 입안에 넣으면 그 맛이 소귤(蘇橘)을 우습게 여깁니다. 어찌 꼭 붉은 옥돌의 소반 위에 담아 놓겠습니까. 백옥(白玉)의 술 단지를 마주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1만 개의 구슬을 고루 늘어놓으면 눈만 만족스러울 뿐이 아니요, 흡사 환약(丸藥) 한 알을 먹은 것처럼 곧바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닫겠습니다. 그지없이 감격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 없기에, 삼가 장문을 받들어 사례하는 바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동지의 절료를 사례한 장문〔謝冬至節料狀〕
삼가 인은(仁恩)께서 전건(前件)의 절료(節料)를 특별히 내려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모는 영광스럽게 덕우(德宇)에 깃들어, 외국 출신인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만리의 창파(滄波)에 동쪽에서 오는 소식이 끊어진 것이 한스럽긴 해도, 삼동(三冬)의 애일(愛日)에 남지(南至)의 명절을 맞는 것이 기쁜 때에, 존자(尊慈)께서 특별히 후한 은사(恩賜)를 내리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쌀알이 이미 동영(同穎)에서 나온데다가 보리 꽃도 바로 양기(兩歧)에서 피었으니, 굳이 대작(大嚼)의 말로 위로할 것도 없이, 문득 중성(中聖)의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은덕을 어떻게 보답할지 알지 못한 채, 오직 배불리 먹고 취해서 읊조릴 뿐입니다. 그지없이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면서, 삼가 장문을 올립니다.
■사일의 주육을 사례한 장문〔謝社日酒肉狀〕
구릉(丘陵)처럼 쌓인 맛있는 고기를 나누어 주시고, 회수(淮水)처럼 많은 향기로운 술을 덜어 주시니, 전부(田夫)는 마당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출 것이요, 해객(海客)은 미친 듯 노래하고 싶은 흥취를 일으킬 것입니다. 어찌 감히 진평(陳平)의 장한 뜻을 본받아 문득 큰소리를 치겠습니까. 오직 서막(徐邈)의 옛 자취를 따라서 약간 성인(聖人)에 중독되리라 다짐합니다. 고기와 술을 삼가 무릎 꿇고 잘 받고 나서, 그지없이 감격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 없기에, 삼가 장문을 올립니다.
19. 계원필경집 제19권
■이부 시랑에 제수된 것을 하례한 별지〔賀除吏部侍郞別紙〕
이제 시랑(侍郞)께서 조용히 암비(巖扉)를 하직하고 드높이 전관(銓管)을 담당하심에, 맑게 소통(疏通)시키시는 명성을 온 겨레가 우러르는 가운데, 한미(寒微)한 집안의 자제들도 일시에 진출하게 되었으니, 관중(關中)에는 구얼(寇孼)의 재앙이 해소되고, 해내(海內)에는 영웅(英雄)의 앞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또 삼가 듣건대, 풍의(風議)가 천심(天心)을 추측하면서 으레 이르기를 “문사(文司)가 다시 중덕(重德)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현인(賢人)을 제자리에 임명한 것이 이미 500년의 기한에 맞을 뿐만이 아니요, 배움을 좋아하여 문하에 모여드는 자들이 반드시 칠십자(七十子)의 숫자를 채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봉도(蓬島)에서 신선의 집회를 계속 열고, 행단(杏壇)에서 유교의 예법을 성대하게 전할 것이니, 홍옥(虹玉)과 여주(驪珠)를 찾아내어 모두 국보(國寶)로 삼을 것은 물론이요, 장차 대란(臺鸞)과 각봉(閣鳳)을 보기만 하면 길이 가금(家禽)으로 만들 것입니다.
모(某)는 삼가 생각건대, 만리 타국에서 의지할 곳 없이 오래도록 고생하며 떠돌다가, 10년 만에 지우(知遇)를 얻어 요행히 날개를 떨치고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향(異鄕)에서 늙어 가는 어버이를 영예롭게 해 드리고, 벼슬길에 올라 붉은 관복(官服)을 입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옛날에 어떤 명사(名士)는 이공(李公)을 위해 수레를 몰고서도 기뻐해 마지않았는데, 지금 먼 곳에서 온 모(某)는 이보(尼父)의 생도(生徒)라고 칭하고 있으니 그 영광은 비할 데가 없습니다. 지극히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려니 입이 석 자라도 부족하고, 깊은 인덕(仁德)을 앙망하노라니 창자가 아홉 구비나 얽혀듭니다. 그지없이 축하하고 용약(踊躍)하며 감격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디 굽어살펴 주시기를 바라며, 삼가 글을 올립니다.
■왕림해 준 것을 사례한 장문〔謝降顧狀〕
모는 산속에서 공부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아직도 속진(俗塵)의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거처하는 관사(官舍)가 군영(軍營) 안에 깊이 있으니, 비록 형문(衡門)과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누항(陋巷)과 같습니다. 군장(君章)의 난국(蘭菊)처럼 향기를 풍길 만한 것은 없고, 중울(仲蔚)의 봉호(蓬蒿)만 우거져서 공연히 적막감을 더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봄날에는 나비가 낮잠의 꿈나라로 이끌어 주고, 가을바람이 불면 귀뚜라미가 밤중의 읊조림을 도와주나니, 이것을 즐겁게 생각할 뿐이요, 달리 바라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바야흐로 난리를 겪으면서 다시 기거(起居)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다만 부모와 같은 은혜에 기댄 것을 기쁘게 여기고, 아녀자처럼 눈물을 흘린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모는 외람되게 진(秦)나라 관작(官爵)의 영예를 누리며 한(漢)나라 위의(威儀)를 배울 수 있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20. 계원필경집 제20권
■귀근하도록 허락해 준 데 대해 사례한 계문〔謝許歸覲啓〕
모(某)는 아룁니다. 원외랑(員外郞) 군이 일찍 와서 존지(尊旨)를 전하기에 삼가 살펴보니, 은자(恩慈)께서 모가 오래도록 부모님 곁을 떠난 것을 생각하시어 귀근(歸覲)하도록 허락해 주신 내용이었으므로, 우러러 금낙(金諾)을 받들고서 경건히 옥음(玉音)에 감복하였습니다. 비록 고금(古今)에 견줄 바 없이 영광스럽게 해도(海島)를 향해 돌아가게 되었지만, 머물기도 어렵고 떠나기도 어려운 심정이라서 연파(煙波)를 바라보며 울먹일 따름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모는 12세에 집을 떠난 뒤로 지금 벌써 1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반 백성이 천행(天幸)으로 덕문(德門)에 의탁하여 갑자기 관직의 영광을 더하고 여기에 명복(命服)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일신(一身)이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만리에 환하게 빛납니다. 그러므로 멀리 고향의 어버이는 문에 기대어 기다리시며 조금 위로를 받고, 집을 떠난 자식은 벼슬길에 올라 갑절이나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오직 조최(趙衰)의 동일(冬日)을 우러르며 나그네의 회포를 깊이 달래고 있는 이때에, 어찌 장한(張翰)의 추풍(秋風)을 읊조리며 갑자기 고향 생각에 끌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고향을 떠난 세월이 오래되고, 항해(航海)의 여정(旅程)이 또 머나먼지라, 머물러 있으려니 오조(烏鳥)의 사정(私情)에 마음이 아프고, 떠나가려니 견마(犬馬)의 그리움이 가슴을 채웁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동쪽으로 돌아갈 꾀를 잠시 내었다가, 서쪽으로 돌아와 다시 영후(迎候)하고 시봉(侍奉)하면서, 우러러 인자한 봉강(封疆)에 의탁하여 영원히 비천한 자취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배를 타고 떠날 생각을 하니, 그저 연헌(戀軒)하는 마음만 절실해집니다. 그지없이 감격하고 황공하며 체읍(涕泣)하는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계문(啓文)을 받들어 사례하는 바입니다.
■행장과 여비를 준 것을 사례한 장문〔謝行裝錢狀〕
삼가 인은(仁恩)께서 전(錢) 200관(貫)을 특별히 하사하시고, 또 행장(行裝)을 마련하게 하신바, 이들을 모두 처분하신 대로 잘 수령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모는 학문을 힘써 행하지 못했는데도, 결과는 마음의 기대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제비가 부리로 진흙을 물어 와 큰 집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항상 부끄러워하고, 자라가 머리로 산을 떠받치고 배회하며 슬쩍 연구(連鉤)를 피하듯 하면서, 매양 행장(行藏)을 신중히 하고, 깊이 조정(躁靜)을 규계(規戒)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겸손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생각한 것〔謙而受益〕이었겠습니까. 혹시라도 굽혔다가 펼 수 있을까 하는 희망〔屈以求伸〕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과연 존자(尊慈)께서 멀리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광스럽게 고국(故國)에 돌아가게 하면서 주머니가 비지 않게 배려해 주셨습니다. 육생(陸生)이 남쪽을 유세(遊說)할 때의 탁장(橐裝)에 비해서 배나 더 휘황하고, 공씨(孔氏)가 동쪽으로 돌아갈 때의 치중(輜重)과 달라서 불태울 걱정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 우경(虞卿)의 백벽(白璧)과 곽외(郭隗)의 황금(黃金)은 한갓 이름을 빛내려 한 것일 뿐 끝내 일을 이루지 못했으니, 어버이를 봉양하려는 것을 생각하시고 생활이 빈한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20일의 당봉(堂封)을 감하여 수천 리의 가신(家信)을 묻게 하심으로써, 여러 해 동안이나 노고(勞苦)를 바치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지감(旨甘)을 넉넉하게 해 주신 것과 어찌 같겠습니까.
어버이를 뵈러 가면서 이미 은장(銀章)을 찼으니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것보다도 갑절이나 영광스러운바, 인덕(仁德)을 연모하며 주루(珠淚)를 드리워 매초(賣綃)의 은혜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그지없이 감격하고 환희하고 체읍(涕泣)하며 황송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한 달분의 요전을 다시 보낸 것을 사례한 장문〔謝再送月料錢狀〕
모(某)는 아룁니다.
작일(昨日)에 군자고(軍資庫)에서 관역순관(館驛巡官)의 8월분 요전(料錢)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모는 원방(遠方)에 사명(使命)을 받드는 공첩(公牒)을 받고서 잠시 후관(候館 역관(驛館))을 떠나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몸으로, 특별히 행장(行裝)을 마련해 주시는 은혜를 입기까지 하였으니, 직봉(職俸)을 다시 받는 것이 어찌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참으로 수령(受領)하기가 난처하기에 마침내 도로 돌려보냈는데, 고사(庫司)에서 또 이 사연을 갖추어 상신(上申)했을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수비(手批)를 받들고 보니, 붓은 운봉(雲鳳)을 날려 깊은 은혜를 드러내 보여 주셨고, 돈꿰미는 천룡(天龍)이 뛰어올라 우러러 후한 녹봉(祿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또 집에 돌아가는 소망을 이룬 데다, 집을 윤택하게 하라는 말씀이 실로 놀라운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원지(遠地)의 미천한 모는 비록 구리쇠 냄새〔銅臭〕에 부끄러운 점이 있으나, 고향의 친지들은 반드시 황금이 많다고 존경할 것입니다. 귀신과 통한다는 노포(魯褒)의 말이 더욱 징험됩니다만, 돈만 모으는 화교(和嶠)의 버릇을 본받기야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존비(尊卑)의 예(禮)가 현격해서 사양(辭讓)할 길이 없기에, 처분하신 대로 무릎 꿇고 수령하였습니다. 그지없이 감격하고 사모하고 격동되고 배회하며 황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습니다. 운운.
■아우 서원에게 전을 준 것을 사례한 장문〔謝賜弟栖遠錢狀〕
모(某)는 아룁니다.
모의 당제(堂弟) 최서원(崔栖遠)이 최근에 가신(家信)을 가지고 와서 모의 귀국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라국입회해사녹사(新羅國入淮海使錄事)의 직명(職名)을 빌려 웅번(雄藩 회남(淮南))에 나아와서 장차 고국(故國)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작일(昨日)에 삼가 전(錢) 30관(貫)을 특별히 하사하시는 인은(仁恩)을 입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최서원은 멀리 안개 낀 바다를 건너오다가 크게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겨우 미천한 목숨을 부지하여 오직 몸뚱이 하나만 남았는데, 뜻은 척령(鶺鴒)에 절실하여 재원(在原)의 의리를 사모하면서도, 명예는 기기(騏驥)에 부끄러워 대로(大路)를 치달릴 시기를 기약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함로(銜蘆)하여 나란히 날아가게 된 것을 다만 기쁘게 여겼으니, 범경(泛梗)하여 있을 곳이 없게 되는 걱정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가 사명(使命)을 받드는 영예를 안고 어버이를 찾아뵙는 소망을 이루게 된 때에, 화폐의 샘물〔貨泉〕이 촉촉이 적셔 주어 실로 자모(子母)의 명칭에 걸맞으니, 귀국 길의 영광스러운 일은 모두가 선인(善人)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지없이 감격하고 환희하며 황송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태위에게 올린 별지〔上太尉別紙〕
모(某)는 아룁니다.
작일에 향사(鄕使 고향의 사신)인 김인규(金仁圭) 원외(員外)가 귀국할 날이 임박하였으나 돌아가는 배편을 구하지 못해서 동행(同行)하기를 간절히 청하기에 우러러 존지(尊旨)를 여쭈었더니 상공(相公)께서 비천한 정성을 굽어살펴 윤허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함께 회성(淮城 회남(淮南))을 떠나 해함(海艦)에 나란히 오르게 되었으니, 비록 이곽(李郭)의 명예에는 부끄러운 점이 있으나, 호월(胡越)의 비평을 듣는 일은 면하였습니다. 먼 길에 걱정이 없으니 금고(琴高)의 술법을 빌릴 것도 없고, 큰 내를 건널 수 있으니 오직 부열(傅說)의 은혜만을 생각합니다. 그지없이 감격하며 연모하는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모(某)는 주선(舟船)의 행리(行李)가 유산(乳山)에 도착한 때로부터 열흘 동안 바람 기운을 살피다가 벌써 겨울철을 맞았습니다. 뱃사공은 나아가기 어렵다고 체류(滯留)하기를 간청하는데, 모는 바야흐로 영광스러운 신분이 되어 오직 사명(使命)을 욕되게 할까 걱정입니다. 승풍파랑(乘風破浪)을 다짐한 종각(宗慤)의 말도 어겼을 뿐더러, 장집단고(長楫短篙)를 운운한 혜시(惠施)의 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은혜로운 보살핌을 우러러 믿고서 어렵고 험한 길도 꺼리지 않았습니다만, 정말 무서운 파도를 만나고 보니 거대한 바다를 지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 곡포(曲浦)에 의지하여 잠시 비려(飛廬)에서 내려왔는데, 띠풀을 엮어 몸을 가리고 콩국을 끓여 배를 채우면서, 남은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할 시기를 결정할까 합니다. 만약 봄날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면 온종일 거세게 바람이 부는 일도 없을 것이니, 곧장 돛을 올리고서 영광스럽게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삼가 별장(別狀)을 갖추어 아룁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운운.
■참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낸 글〔祭巉山神文〕
모년 모월 모일에 신라국입회남사(新羅國入淮南使) 검교창부원외랑(檢校倉部員外郞) 수한림랑(守翰林郞) 사비은어대(賜緋銀魚袋) 김인규(金仁圭)와 회남입신라겸송국신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비어대(賜緋魚袋) 최치원(崔致遠) 등은 삼가 청작(淸酌)과 생뢰(牲牢 희생(犧牲))의 제물을 올려 경건히 참산대왕(巉山大王)의 영전(靈前)에 정성을 바칩니다.
......지금 김인규 등은 오래전에 중국에 조빙(朝聘)하는 명을 받들었고, 최치원은 처음으로 고국에 빙문(聘問)하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앞으로 말고삐도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월(胡越)의 뜻이 다를까 걱정할 것이 없으니, 어찌 이곽(李郭)의 명성이 성대하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난해 초겨울에 동모(東牟)의 동쪽까지 왔습니다만, 창해(滄海)의 길은 아직도 먼데 현율(玄律 겨울철)은 막바지로 치닫는 때라, 바다 물결이 사나워서 익조(鷁鳥)로도 선박을 띄우기가 어려웠고, 바람 소리가 요란해서 고니도 새장을 떠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고목(刳木)을 해안에 대고, 단봉(斷蓬)을 안정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일(前日)에 단월(端月)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대풍(大風)이 무섭기에, 목을 빼고서 돌아오는 제비를 기다리고, 눈을 돌려서 돌아가는 기러기를 전송했습니다. 바야흐로 무사히 건너갈 날을 기약하며, 거북과 시초(蓍草)가 길한 점괘를 알리면, 곧장 계림(雞林)을 향하여 경쾌하게 개엽(芥葉 일엽편주(一葉片舟))을 띄울 것입니다. 어찌 천리마의 말발굽에 뒤지겠습니까. 송골매의 민첩함과 겨루어 보고자 합니다.
.....지금은 행장(行裝)을 이미 꾸리고 행색(行色)을 엄연히 차렸습니다.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노래 부르며, 배 띄워 순식간에 바다를 편히 건너도록, 오직 대왕의 바람〔大王之風〕에게 부탁드리는 바이니, 일찍 군자의 나라〔君子之國〕에 돌아가서 황제의 명령을 전할 수 있도록 신령의 직분을 소홀히 하지 말기 바랍니다. 상향(尙饗).
■詩
●일행이 산양에 머물 적에 태위가 잇따라 옷감을 보내면서 어버이를 뵙고 축수하는 예물로 삼게 하였으므로 삼가 시를 지어 사례하다.
예로부터 주금행을 자랑하지만 / 自古雖誇晝錦行
장경과 옹자도 허명을 점했을 뿐 / 長卿翁子占虛名
나는 국신 받들고 가신까지 얻었으니 / 旣傳國信兼家信
집의 영광 넘어서서 나라의 영광이라 / 不獨家榮亦國榮
만리 멀리 돌아갈 꿈 비로소 이뤘지만 / 萬里始成歸去計
한마음은 돌아올 길 벌써 요량한다네요 / 一心先算却來程
깊은 은혜 생각하며 저 멀리 바라보니 / 望中遙想深恩處
세 송이 선산이 눈가에 걸려 아른아른 / 三朶仙山目畔橫
●오만 수재의 석별 시에 답한 절구 두 수〔酬吳巒秀才惜別二絶句〕
난세라 어버이에게 영록이 미치지 못했나니 / 榮祿危時未及親
기로에 잠깐의 몸 고생을 슬퍼하지 마오 / 莫嗟歧路暫勞身
오늘 멀리 헤어짐에 달리 할 말은 없고 / 今朝遠別無他語
일편단심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기만을 / 一片心須不愧人
석양에 변방 기러기 높이 떠서 선명하고 / 殘日塞鴻高的的
물가 숲엔 저녁연기 저 멀리 아른아른 / 暮煙汀樹遠依依
지금 돌아보는 정경 어찌 한이 있으랴만 / 此時回首情何限
물결 헤치고 날아가는 하늘 끝 돛배 하나 / 天際孤帆窣浪飛
●진달래꽃〔杜鵑〕
바위틈에 뿌리 내려 쉽게 잎이 메마르고 / 石罅根危葉易乾
풍상에 시달려 유난히 꺾이고 시들었네 / 風霜偏覺見摧殘
들국화가 가을의 미태를 뽐냄은 봐준다 해도 / 已饒野菊誇秋
바위의 솔이 겨울 추위에 꿋꿋함은 부러우리라 / 應羨巖松保歲寒
애틋해라 향기 머금고 푸른 바다 굽어봄이여 / 可惜含芳臨碧海
누가 붉은색 난간 앞에 옮겨다 심어 줄까 / 誰能移植到朱欄
범상한 초목과는 그래도 품종이 다르건만 / 與凡草木還殊品
나무꾼은 똑같이 볼까 그것이 두렵도다 / 只恐樵夫一例看
●봄바람〔東風〕
지금 막 바다 건너 불어왔다 생각하니 / 知爾新從海外來
새벽 창 시 읊는 자리 마음이 설레기만 / 曉窓吟坐思難裁
어여뻐라 이따금 또 휘장을 날리면서 / 堪憐時復撼書幌
고향 동산 꽃소식을 알려 주려는 듯 / 似報故園花欲開
●해동으로 돌아올 즈음에 참산의 봄 경치를 바라보며〔將歸海東巉山春望〕
안개 물결 아득한 너머 눈 들어 바라보니 / 目極煙波浩渺間
새벽 까마귀 날아가는 저기가 바로 고향 / 曉烏飛處認鄕關
머리털 세는 객지의 시름도 이제는 그만 / 旅愁從此休凋鬢
행색도 활짝 웃을 일이 유난히 많아졌네 / 行色偏能助破顏
물결에 밀리는 모래톱은 꽃이 해안에 부딪치고 / 浪蹙沙頭花撲岸
구름이 장식한 바위산은 잎이 봉우리 가렸어라 / 雲糚石頂葉籠山
오고 가는 치이자에게 말을 부치노니 / 寄言來往鴟夷子
누가 천금으로 한가함 살 줄 아시는지 / 誰把千金解買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