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추모공원-묘제(墓制)대한 단상
중추일 아침에 성묘를 다녀오며
조재호(趙載浩 1702~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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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재호는 좌의정 풍릉부원군 문명의 아들이고 영의정 현명의 조카이며, 효순왕후의 오빠라고 한다. 1739년(영조 15) 우의정 송인명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어 홍산현감으로 있으면서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승지로 특진되었고, 이어 경상도관찰사ㆍ이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이 되었다.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계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 장헌세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되었다가 1775년 신원(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아마 50대에 지은 시로 추정되는데 관찰사와 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낸 벌열양반이지만 그도 죽음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역모로 몰려 겨우 환갑의 나이에 죽을 줄 그 자신 어찌 짐작이나 했으리오?
나의 고향마을인 김제시 백산면 돌제는 전형적인 신평이씨 씨족부락이다. 내가 어린시절인 60년대 초․중엽만 해도 안 동네만 40여 호가 넘고, 외곽지역까지 포함하면 총 호수가 60여 호에 달하고 인구는 400여명이 넘었다. 당시에 내가 대략 그렇게 추정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나는 4대 장손으로 종중선산의 한 쪽에 약 200여 평에 달하는 우리 집안의 독립된 선영묘역을 가지고 있고, 그 묘역은 호남평야에서는 흔치 않은 50여 미터 높이의 두악산과 백산저수지를 바라보는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위로는 고조부모와 증조부모 조부모의 묘가 있고 종증조부모와 종조부모, 재종조부모, 재종조모, 당숙의 묘와 불행하게도 4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두 육촌동생의 묘 등 모두 열두 개의 봉분이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65년에 할아버지께서 고조부모의 비석을 세우시면서 묘역의 정비가 이루어져서 이젠 남들이 보기에도 아주 부러워할 정도의 모습으로 잘 가꾸어져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4월 둘째주 토요일에 고조부모의 시제를 모시고 있고 명절 때는 여러 친척이 함께 벌초를 하고 있으나 세태의 변화에 따라 조상모시는 풍속도 급변하고 있어 장차는 상당한 걱정과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당장 우리 집부터도 증조부모와 조부모의 제사는 연 네 반상 임에도 할아버지 제삿날 한차례로 치르거니와 이는 전적으로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로서 자주 제사 지내는 일을 꺼려하시기 때문이다. 장소도 어쩔 수 없이 나와 집사람이 어머니의 뜻을 받아 익산의 우리 아파트에서 모시게까지 되었다.
시제에 참석하는 친척들의 수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데 원래 6가(六家)에서 경비도 갹출하고 20-30여명이 모이더니 지난 시제에는 4가(三家)에서 겨우 10여명만 참석하여 치렀다. 별도로 묘역을 마련한 백구당숙 가족들은 당숙이 연로하시고 병환이시라 차츰 참여율이 저조하게 되고 일찍 아들 둘을 보낸 정읍 당숙가족들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명절 성묘도 잘 안하고 있다. 당분간은 우리 50-60대들이 있어 시제가 그런대로 유지되겠지만 20-30대 나이인 우리 아들들 대에는 중단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를 잘 유지할 근거인 고조할아버지 재산이 전무한 것도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앞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옛 방식대로 매장하고 봉분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는데 내가 은퇴 후 고향집을 가꾸고 텃밭과 과일밭을 일구며 살아갈 계획이므로 선산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로되, 시제를 잘 유지시키는 일은 별로 자신이 없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면 선산에 모신 모든 분들을 단 한번의 제사로 치르는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고 내가 죽은 뒤의 선영관리와 시제는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최근에까지 내가 죽게 되면 화장하여 함에 넣고 봉분없이 선산에 묻은 뒤(자연장) 자식들이 나에 대한 추모비만 세워주기를 원했다. 선산을 벗어난다는 생각에까지는 미처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 다른 묘역에 모셔져 있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유골을 화장하여 한 곳의 납골당에 모시기로 집사람과 결정하고 금년 봄에 개장한 모악추모공원을 찾았다. 일찍이 증조부모가 모셔져 있던 마을 못미처 모악산 정상을 등에 업고 산기슭에 자리한 모악추모공원은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죽은 자들을 위한 궁궐 다름 아니다. 천당이 따로 없다.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하며 아늑하여 마음이 편안한지 아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셔져 있는 납골당 임에도 바닥에 누어 잠을 자도 좋고 밥을 먹어도 상관없겠다 싶다. 당장 두 분을 모시기로 계약하였다.
무주에 있는 선경공원에 있는 야외 납골당은 화강암으로 근사하게 지었는데도 혼자 찾았을 때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조금은 무섭고 섬뜩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으나 이곳 실내 납골당은 전혀 달랐다.
예쁜 가이드가 특별실(VIP룸)을 보여 주었을 때 내부의 화려함에 크게 놀라고 죽은자들을 모신 방임에도 마음은 지극히 편안하였다.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황홀함을 안겨주는 로마황제가 거쳐하는 궁전이나 초특급 호텔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진시황의 능에도 가보고 베이징의 황제능과 이집트의 파라오의 능안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규모는 크나 화려함은 이만큼은 못했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도의 타지마할 묘당이 바로 이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아! 바로 이곳이다. 내가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되면 바로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다. 저 하늘나라로 멀리 가는 게 아니라 이곳 모악산 추모공원에서 우리 양드리와 함께 편안하게 쉬는 것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을 완전히 씻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양드리도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했다 한다.
나와 양드리는 선산은 관리만 할 뿐 우리가 죽은 뒤에까지 있고 싶지는 않은 곳이라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특별실(VIP룸)같은 깨끗하고 편안하고 아늑한 방에서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양드리는 또 특별실(VIP룸)을 구경하고 나니ꡐ이젠 죽음도 별로 두렵지 않은 느낌이다ꡑ라고까지 말한다. 죽은 뒤에 살 낙원을 미리 준비한 느낌이다.
왠지 대낮에도 혼자가면 괜히 마음이 편치 않고 밤에는 남자라 해도 혼자서는 가기 두렵고 무서운 망자를 매장하여 산속에 모시는 봉분묘제를 하루빨리 지양하고, 각종 종교기관, 기업체, 사회단체, 공공기관 등에서 모악추모공원 같은 대규모의 아름답고 깨끗하고 편안한 많은 납골당을 세워서 망자나 자손들이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망자를 쉽게 편히 모실수 있고, 언제라도 마음 편하게 쉬이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장례문화(화장및 납골묘 공원)가 조속히 우리 전북지방에도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
지난 4월 14일 고조부모의 시제를 모셨다. 우려한 대로 6家중 3家만 모였다. 정읍 석영형집은 형(62세)의 큰 병환으로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고 백구 당숙네도 당숙(84세)이 크게 다치신뒤 거동이 불편하시니 매년 거의 꼭 참석하는 세 아들들도 불참하였다. 서울 태환할아버지댁은 할아버지(80세)가 노환으로 오시지 못하니 세 아들들 역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익산 영기아저씨 댁은 재당숙모께서 교통사고로 병원에 계시고 시골에 살고 있는 성기아저씨(65세)와 영기아저씨가 모두 불참하였다. 오직 마을에 사는 태균이 아저씨만 참석하였다.
우리집에서 부모님과 우리 내외 4명이 참석하고 판환할아버지(81세)와 큰 아들인 삼기 아저씨 내외와 셋째 아들인 윤기 아저씨 4명, 태균이 아저씨가 참석하니 모두 9명이 모인 것이다. 장손인 우리 승수는 회사행사로 참석할 수 없었다. 어른들이 모두 80세가 넘으시고 내가 장차 조상일을 함께 도모하려던 석영형이 큰 병으로 투병중이니 조상묘역관리와 시제모시는 일은 조만간 합리적 해결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제 5월 5일 장인 장모님을 모악추모공원에 모시니 참으로 기쁨이 크다. 1975년 마흔 일곱의 젊으신 나이에 세상을 뜨신 장모님은 선산이 먼거리인 임실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동묘지에 모셔졌던 듯하고, 우리가 결혼한지 1년이 채 안된 1982년 여름에 예순의 나이에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천주교 묘역에 모셔져서 30년을 두분이 따로 계셨다.
이제 우리 양드리가 나서서 당신의 부모님을 한국의 명산 모악산에 자리하고, 마치 호텔처럼 아름답게 지어진 죽은자들을 위한 궁전인 모악추모공원에 모시니 가족 모두들 더없이 기뻐하고 가슴뿌듯해 한다. 귀옥처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초등학교 6학년때 엄마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난 막내 부옥처제가 너무나 기뻐하는 것도 큰 가쁨이다. 이제 명절때면 두 곳의 묘역을 찾는 번거로움이 없어지고, 모악추모공원을 찾아 참배하는 일은 오히려 즐겁고 행복한 나들이가 될 터이다. 2012. 5.6
전경
일반실
특별실
위패없이 가봉안직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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